| [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chyoo (문사수) 날 짜 (Date): 1998년03월14일(토) 04시34분22초 ROK 제 목(Title): Re: 문사수님께 질문 있습니다. >선과 교 입니다. >그런것은 제가 아는 것이 별로 없고, 제 관심사도 아닙니다. 관심사도 아닌 것에 감동을 받는 것도 개인 취향이라고 이해하고 가겠습니다. >남이 감동을 받았는지 안받았는지 단정적으로 이야기하기 힘들다는 >것과 감동은 2가지밖에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 하는데는, >제가 김용옥교수의 글을 읽고 감동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남의 감동을 아는 것은 힘이 듭니다. 그러나 남과 똑 같은 감동을 한 사람은 압니다. 감동이 2가지밖에 없다는 것은 감동이 두 부류에 속한다고 정정할까요? 하나는 자아가 소멸되는 감동 하나는 잠재의식이나 표층의식에 부합되어 동감하는 감동 예리큰아빠게써 어떤 감동을 느꼈는지 모르지만 두번째 부류에 속하지 않나요? 두번째 감동은 개수로 따지면 예리큰아빠 말대로 무수히 많습니다. 그러나 첫 번째 감동은 누구나 똑 같습니다. 그리고 벽암록은 첫 번째 감동 이야기 입니다. 그리고 남과 똑같은 감동을 한 사람은 그 사람이 감동 받았음을 몇 마디 말만으로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불교는 첫 번째 감동, 즉 누구나 똑 같이 느끼는 감동을 전합니다. 사람 마다 다르게 느끼는 감동 즉 특별난 세계를 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제가 다른 말을 했다는 것은 문사수님의 오해인듯 합니다. >문사수님이 답을 않으시니 다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제가 오해하였습니다. 죄송합니다. 문사수님이 답을 않으시니 다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1. 남이 감동을 받았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이 낮에 태양을 보듯이 분명한 것입니까? 먼저 이야기하였습니다. 같은 감동은 한 마디 말을 하지 않아도 압니다. 몇 마디 글이나 말로도 압니다. 2. 감동이 2가지 밖에 없는 것입니까? 두 가지 부류라고 하겠습니다. 되었나요? 3. 염화미소의 가섭은 심한 상실감을 맛보았습니까? 염화미소가 감동의 교류인 것입니다. 같은 감동이기에 부처님께서 연꽃을 들었을 때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중에 가섭존자만이 웃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연꽃을 들었을 때에 가섭존자가 깨달은 것이 아니라 가섭존자가 이미 자아 소멸의 감동에 있었기에 웃었던 것입니다. > 그리고 벽암록 일측에 무식에 대해 나온 다는 문사수님의 말은 > 틀린 말입니다. 나오지 않습니다. 【本則】擧:梁武帝問達磨大師:「如何是聖諦第一義」 磨云:「廓然無聖」 帝曰:「對朕者誰?」 磨云:「不識」 帝不契, 達磨遂渡江至魏 帝後擧問志公. 志公云:「陛下還識此人否?」 帝云:「不識」 志公云:「此是觀音大士傳佛心印」 帝悔, 遂遣使去請, 志公云:「莫道陛下發使去取, 闔國人去, 豹亦不回」 그럼 예리큰아빠께서는 달마조사의 불식과 양무제의 불식이 같은 불식이라 생각하시는 모양입니다. 종교적 감동은 deconstruction이나 정치, 철학, 사회학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자아가 통째로 날라가는 감동은 deconstruction이니 정치니 철학이니 사회학이니 동양이니 서양이니하는 것이 끼어들지 않습니다. 달마의 不識은 첫번째 부류의 감동 즉 자아소멸의 감동에서 나오는 소리이고 양무제의 不識은 두번째 부류의 감동 즉 잠재의식과 표층의식의 자아만족에서 나오는 예리큰아빠가 말씀하신 사람마다 모두 다를 수 있는 그 각각의 특별난 감동의 세계에 있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자아소멸의 감동은 지식이 끼어들 만큼 빈 곳이 있는 감동이 아니기에 無識인 것이며 또한 어떤 사람이 느껴도 똑 같은 감동입니다. 자아만족의 감동은 예리큰아빠께서 말씀하시는 데로 사람마다 서로 틀릴 수 있는 감동의 세계로 지식도 끼어들고 자존심도 끼어들고 자아가 개입되는 감동입니다. 이 감동은 불교의 감동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양무제의 不識은 무식이 아니라 無知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연꽃을 들었을 때에 가섭존자가 미소지음은 둘 사이에 지식이 오고 가지 않았는데 압니다. 無知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1. 여기서 무식하다고 하신 것은 무슨 뜻으로 하신 것인가요? "수보리야, 너는 여래가 생각하기를 '내가 마땅히 설한 바 법이 있다'고 말하지 말라. 이런 말 하지 말지니, 어찌 한 까닭이냐? 만약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여래가 설한 바 법이 있다고 한다면, 이는 여래를 비방함이 되나니, 내가 설한 바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금강경 19분에 나오는 경구입니다. 평생을 법을 설하셨다는 부처님의 말입니다. 설한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설한 법도 없다는 불교에 지식이 어디에 끼어 들겠습니까? 법이 있다고 해도 설한 바를 모르는 무지(無知)인데 법도 아닌 지식 같은 것이 불교에 어디에 있겠습니까? 2. '태양은 낮에 보인다'는 것을 알고 있는 문사수님은 무식한 것인가요? 아닌가요? 예리큰아빠가 아는 것을 저도 압니다. 예리큰아빠와 제가 어느 쪽이 무식하다고 하고 어느 쪽이 더 유식하다고 할까요? 그것은 유무식이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3. '가장'이라고 다른 종교와 비교를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개신교와 비교를 한다면 개신교가 불교보다 좀 덜 무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불교에는 개신교가 없습니다. 자아의 죽음이 불교입니다. 자아가 있으면 불교도 있다하고 개신교도 있다 하겠지만 불법이라 하는 것은 불법이 아니니라… 끝까지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