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chyoo (문사수) 날 짜 (Date): 1998년03월12일(목) 11시02분58초 ROK 제 목(Title): Re: Re^6]양무제가 달마를...의 bug[문사수� >선종과 교종은 국사시간에 통일신라시대때 5교9산이야기를 >들으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선종은 경전의 연구보다는 선을 중심으로 하고 교종은 불경 연구에 중점을 >두었다고 들었습니다. >불교에서 수행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나보다 하고 아는 정도였습니다. >두 가지 모두 깨달음을 얻는 방법이겠거니 했죠. 禪 이란 부처님의 마음으로 그 특성이 무방법입니다. 방법이 없다는 것이 禪입니다. 깨닫는 방법이 아니라 깨달음에 바로 들게 하는 것이 禪입니다. 따라서 선사들은 깨달을 수 있는 방법은 한번도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깨달음을 직접 보여줄 뿐입니다. 직접 보여주는데 보지 못할 때에 두둘겨 패서라도 보게 하는 것은 선사의 자비이나 그래도 보지 못할 때에 그것은 선사의 잘 못이 아니라 보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면서 방법론을 제시해 달라는 기초적 관점과 인생에 대한 기본 고민 조차 없는 상대방의 인연 때문입니다. 선이나 교가 깨달음을 얻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한에 있어서 깨달음과는 끝없이 평행선을 달리게 될 뿐입니다. 敎란 부처님의 말이데 부처님의 말이란 어떤 것이냐 하면, 방법론을 버리게 하는 말입니다. 생사에 대한 기본 고민이 간절한 사람은 敎를 충실히 따라가다 보면 자연히 깨닫는 방법을 쫓는 시도를 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방법을 구속되어 방법속에 안도하는 시도를 버리게 되면 미망은 걷히고 본래 부터의 청정하고 맑은 깨달음만이 본래부터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이나 교나 다른 것이 없는 것입니다. 불교에는 선도 없고 교도 없고, 오직 방법과 결과를 찾는 시도의 중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방법을 찾는 미망의 죽음, 결과를 쫓는 어두움의 종말, 방법론과 결과론의 추구로 두터워지는 자아와 자존심의 파멸만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종교 중에서 가장 무식한 종교가 불교입니다. 부처님 앞에서 완전히 쭉 뻗어 죽어버리는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앞에서 자존심과 허망한 지식을 다 던져 버리고 쭉 뻗어 죽어 버려야 청정한 부처의 세계가 보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럴 각오와 자세 없으면 禪을 해도 하는 시간과 노력 만큼 어두움만 더욱 두터워지고 방법론과 결과론에 잡혀서 한치도 진전이 없게 되는 것이고, 敎를 해도 머리속에 온갖 잡지식만 잔뜩 쌓여서 미망만 더욱 두터워지는 것입니다. >김용옥 교수의 글에서 깨닫는 과정에서 언어의 갈등이 있다는 것과 >말로 할수 있는 것과 말로 할수 없는 것이 있음을 생각할때, >결국에는 선으로 귀착될수 밖에 없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언어가 불편하다고 해도 말을 안할수 없으니, >묵조선(默照禪)과 간화선(看話禪)으로 나뉘는 것도 이해가 가더군요. >가끔 불교와 관련된 영화를 보다가 높으신 스님이 젊은 스님에게 >한마디 화두를 던져주면, 젊은 스님이 그것을 계속 읊조리면서 >무슨 뜻인지 알려고 하던것이 간화선을 하고 있던 중이란 것도 >무슨 뜻인지 알려고 하던것이 간화선을 하고 있던 중이란 것도 >알게 된것이죠. >저는 면벽수도로 대표되는 선과 경전연구를 하는 교가 >같은 것인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나는 아무것도 없는 벽을 보고 있고, 하나는 책을 보고 있습니다. >모두가 깨달음을 얻기위한 방법이겠죠. >하나는 참고서를 가지고 하는 것이고 하나는 아무런 참고서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참고서를 가지고 있는 것이 일반적으로 도움이 되겠지만 >장담할수는 없는 것이죠. >나쁜 참고서만 읽고 공부 못 하는 아이가 있을수 있거든요. >선에서도 공안이라는 것이 있다고 김용옥 교수의 글에서 >보았는데, 일종의 위인전과 같은 것으로 불교의 가르침을 적은 불경과는 >성격이 다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선이란 부처님의 마음이고 부처님이 앉아 계시는 자리입니다. 묵조란 부처님의 마음에서 고요히 비추어 본다는 것으로 그 고요함도 중생의 고요함이 아니라 부처님의 고요함입니다. 부처님의 자리에서 부처님의 고요한 마음으로 일상을 비추어보는 것이 묵조선이고 그 묵조선은 곧 반야바라밀다와 같은 것입니다. 무슨 벽을 쳐다보고 앉아있는 다고 해서 묵조선인 것이 아닙니다. 그럼 부처님의 자리와 부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묵조선을 할 수가 있으니 그것을 먼저 배워야 하고 이 게시판의 앞에서부터 차례대로 있는 글들을 죽 읽는 노력 정도만 최소한 하여도 부처님의 자리와 마음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간화선이란 모든 방법 추구와 결과 집착이라는 중생적 망상을 부처님 앞에서 정말로 다 버리고 자아와 자존심을 쭉 뻗어 죽여버렸는지를 검토하는 참으로 놀라운 방법입니다. 즉 깨닫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참으로 부처님 앞에서 중생이 쭉 뻗어서 완전히 죽었는 지를 검토하는 것이 공안인 것입니다. 쭉 뻗어서 중생이 죽어버리고 부처님이 확연히 드러나면 공안이 그냥 풀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공안의 풀림을 가지고 이 사람이 완전히 죽어서 새로 태어났는 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정말로 죽어서 부처가 태어났는 지를 스스로 알 수도 있으니 공안 중에 단 한 가지 공안도 막히면 여전히 자존심이 왕성해서 아직 부처님 앞에서 조금도 죽을 자세 조차도 안되어 있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깨달음의 초기단계에는 두가지가 병행되어야 할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결국에는 아무도 의지할 것이 없는 >그리고 아무의 방해도 받지 않는 선으로 가야할것 같습니다. >이 단계에서는 말 그대로 유아독존이죠. >선과 교가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를 대라고 하셨는데, >제가 말씀드릴수 있는 것은 결국에는 선으로 가야될것 같다는 말씀밖에 >드릴수가 없겠습니다. 아무도 의지할 것이 없는 아무의 방해도 받지 않는 것이 禪이 아니라 자아의 죽음이 禪이니 자아와 자존심을 불심(佛心)으로 죽여 버려서 불심(佛心)만이 남는 것이 禪입니다. 그러니 의지하지 말 것은 중생적 아(我)이고 의지해야 할 것은 佛心과 佛力인 것이 禪입니다. 그러니 예리큰아빠께서 신경써야 할 것은 자아(自我)에 의지하고 있는 지 자아(自我)를 죽이고 불심에 의지하고 있는 지를 따져서 바로 잡는 것입니다. >선과 교는 둘 다 방법의 문제인데, 궁극에는 선으로 귀결된다면 >선이 더 근본적이라고 할수 있겠습니다. >석가모니가 쓰신 방법도 선으로 알고 있습니다. 선과 교가 둘 다 방법이 아님은 앞 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김용옥 교수의 글에서 "자기의 깨달은 바를 如如한대로 풀어내는 >素朴하고 진솔한 마음이 모자라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자기가 깨달은 >바를 소박하고 진솔하게 풀어낸다고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이 마음에 듭니다. 깨달은 바가 없는 것을 일러서 如如라고 하는 것입니다. 깨달은 바가 없어서 중생심이 죽어 무심(無心)으로 돌아가고 불심(佛心)만이 남으니 이를 如如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깨달은 바를 소박하게 이야기하다보면 정말로 큰 것을 >깨닫게 될것이라 생각합니다. >티끌모아 태산이라는 말처럼. 깨달음이 어떤 비밀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아무거나 또한 아무 것이나 다 깨달음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깨달음이라고 말하는 것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의 글에서 가끔 자기 자랑이 있지만, 일종의 유머라고 봅니다. >저는 재미있기만 하던데 그런것이 마음에 걸리시는 분들이 >있는것 같습니다. >이런 유머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드리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유머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유머와 지식으로 숨기고 있는 김용옥 교수의 무지가 심각한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