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croce ( 크로체) 날 짜 (Date): 1998년03월04일(수) 15시56분33초 ROK 제 목(Title): cap]양무제가 달마를 만났을때(2) 禪은 삶이요 覺이요 佛心이라 조선의 불교사는 선(禪)을 그 종주로 삼는다. 바로 이 禪이라는 것이 불립문자(不立文字)요, 이심전심(以心傳心)이요, 교외별전(敎外別傳)이요,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는 것이다. 조선의 불교가 선을 종주로 삼는다는 것은, 교학적 입장에서 본다면 그 폐해 또한 적지 않은 것이지만(우선 불교계를 무식하게 만들었고 복잡다단한 현대언어사회에 적응력을 상실케 한 측면이 없지 않다), 그 기나긴 혜맥의 본상(本相)을 고구(考求)한다면 너무도 당연한 귀결이 아닐 수 없다. 선이야말로 인도불교가 중국문명에 도전을 시작하여 기나긴 중국화과정(Sinicization Process)을 거치면서 펼쳐나간 동아시아 불교사의 최정점이요 최궁극점이기 때문이다. 불교는 원래 인도인의 산만한 언어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지극히 복잡다단한 개념적 장치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매우 형식논리적 치밀성을 보유하는 이론체계다. 허나 제아무리 그 교학적 이론이 체계적이고 복잡다단하다 해도 불교는 단 하나의 전제를 그 알파·오메가에서 잃어버리지 않는다. 그 전제란 모든 진리는 「해탈」을 위한 것이며, 해탈의 실천을 위한 것이며, 해탈의 수행을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불교사 전반에 공통된 하나의 입장은 어느 상황에 있어서도 프락시스(실천)가 테오리아(이론)에 선행하는 것이요, 가치적 우위를 점한다는 것이다. 화살이 꽂혀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는 인간 앞에서 화살의 구조나 성분, 그 화살이 박힌 각도와 빼는 각도에 대한 기하학적 연구, 화살주변의 세포손상에 대한 생리학적·병리학적 이론체계가 무의미한 것이다. 그러한 이론에 앞서 화살을 뽑아 사람을 살리는 행위 그 자체가 어떠한 경우에도 우선하는 것이다. 불교는 그런 의미에서 철저히 실천의 종교요, 수행의 종교요,인간구원의 종교요, 해탈 행위의 종교다. 그런 의미에 禪은 敎와 대립하는 것이 아니요, 禪이야말로 敎의 완성이요, 敎의 궁극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위진남북조·수당을 통하여 기나긴 교학불교의 치열한 언어전개가 현금 『팔만대장경』이라고 하는 大藏속에 大藏되어 있고, 이러한 교학불교가 北으로는 華嚴을 성립시키고 南으로는 天台를 성립시키는 등 중국불학의 장엄한 꽃을 만개시켰지만, 결국 이 모든 교학불교가 중국인의 심성 속에서 선으로 귀속된 데는 애초로부터 그 인도문명과 중국문명의 언어의 특이한 양상에 그 근본적 이유가 내재하는 것이다. 인도언어는 굴절어인데(inflected) 반하여 중국언어는 굴절하지 않는다(uninflected). 인도언어는 표음문자인데 반하여(alphabetic), 중국언어는 표의문자이다(logographic). 인도언어는 다음절어인데 반하여(polysyllabic) 중국언어는 단음절어(monosyllabic)이다. 인도언어는 아주 형식적 논리와 문법을 고대로부터 확보한데 반하여(a formal grammatical system), 중국언어는 체계적이고 형식적인 논리에 맞추어 언어생활을 영위하지 않는다(no systematic grammar). 그리고 인도언어는 산문적이고 지루한데 반하여(discursive), 중국언어는 운문적이고 간결함을 그 최우선으로 삼는다(terseness). 불교의 교의가 실천을 제1의로 삼는다면 이제 그 궁극적 귀결은 명백해진다. 실천이란 곧 언어로부터의 해방이고, 언어로부터의 해방이란 언어의 부정이라기보다는 중국언어의 본래면목으로 회귀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禪이란 산문에서 운문으로의 복귀요, 지루함에서 간결함으로의 환귀요, 철학에서 시로의 회귀다. 晩唐에 이르러, 난숙한 문명의 폐해도 절정에 이름과 동시에 배불(排佛)의 기운이 휘덮어 불교는 끊임없는 法難에 시달리고 宋에 이르면 흔히 신유학(Neo-Confucianism)이라 부르는 宋儒의 주체성 회복운동이 일어나 불교는 문명의 뒷전으로 물러앉는 운명에 처하지만 禪宗만은 쇠퇴의 기미에서 벗어나 있었으며 중국문명전반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어찌 그럴 수 있었는가? 禪은 우선 不立文字를 지향하며 모든 권위를 부정한다. 인간세의 권위라는 것은 인간의 언어를 틈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언어가 存在하지 않는 인간들에게 무슨 세속적 권위가 의미를 지닐 수 있겠는가? 禪에 깊게 들어가면 따라서 하등의 권위가 사라지고 나의 실존조차 사라지고 오온육근(五蘊六根)에 구애받지 않는 깨달음 그 자체만 존재하게 된다. 따라서 선이란 아주 본질적인 무정부주의(fundamental anarchism)며 일체의 제도를 거부하게 된다. 따라서 선의 종단은 제도적인 조직을 통하여 성립한 것이 아니라 실존적인 의발(衣鉢)의 전수라는, 도통을 통하여서만 존속한 것이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선(禪)은 종(宗)이 아니다. 그것은 불심인(佛心印)을 전하는 것일 뿐 경교(經敎)에 의존하는 것도 아니요, 따라서 교상판석(敎相判釋)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선은 타종처럼 그 종을 성립시키는 『바이블(經)』조차 없는 것이다. 선이란 언어의 해탈을 지향하며 불심(佛心)을 직지(直指)하는 깨달음 그 자체며 그것은 인간의 모든 근원적 사유의 저변에 내재하는 것이다. 어떠한 종교든 그 종교적 진리가 구원과 절대를 희구하는 한에 있어서는 이 선의 경지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기독교도 그 구도의 궁극에 도달하려하는 한에 있어서는 이 선의 경지에 入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禪은 교리가 아니요 교리의 개념화인 경전이 아니요, 그 교리를 지탱하는 조직이 아닌 것이다. 禪이란 순수한 무교회주의자들이 말하는 것과도 같은 무조직의 수행 그 자체요, 따라서 禪에는 宗이 없고 수행한 자들의 삶만 있을 뿐이다. 선은 삶이요 覺이요 佛心이다. 따라서 제도적인 박해에 대하여 강할 수밖에 없는 것이요, 唐武宗의 會昌5년 박해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을 수 있는 소이가 바로 이러한 무제도성에 있었던 것이다. 禪은 박해 이후에 오히려 유학이 창성한 宋代에 이르러 크게 융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조선조가 정도전의 排佛 이래 숭유억불책(崇儒抑佛策)을 표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불교가 禪을 통하여 강인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禪宗자체에 내재하는 무정부주의적이고도 무제도적인 본질성격 때문이다. 그리고 禪宗이 晩唐의 박해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리더들의 수행과 실천의 철저성에 기인한다. 다시 말해서 會昌 五年(845)의 법난으로 대표되는 폐불(廢佛)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외면적으로 표방한 종교적 이유(도교만 숭상하고 제종교를 엄금)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지나친 사탑 건립, 승려의 출가에 수반된 불교교단의 번영, 국가적 불교행사로 국가부담의 격증, 요역에 면제된 승려와 불사영유 토지의 증가 등 사회적 사태가 국가의 세입을 감소시키고 재정을 궁핍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비대해진 사원경제와 그에 수반된 도덕적 타락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종교개혁이 필수적인 과제로 등장했던 것이다. 따라서 會昌法難은 단순한 법난의 차원을 떠나서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되돌이켜 보려는 衰唐의 안간힘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조선조 말기 대원군의 서원철폐와도 유사한 성격을 지니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회경제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배불은 국가재건에 필연적 관건이 되었다 말할 수 있는데, 禪宗은 이러한 사원경제의 몰락과 무관하게 존속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禪의 수행자들은 세속적 승려들과는 달리 육신의 생명을유지하는 최소한의 물질만을 보유했으며 그것조차 대부분 자신들이 경작하여 먹고 사는 자급자족의 생산체제를 갖추었기 때문에 법난의 대상이 되질 않았다. 그런 연유로 禪宗은 宋·明代를 통하여 오히려 융성하였고, 臨濟·曹洞 兩宗은 그 세를 펼쳤다. 선종 中興의 祖, 혜능 선종의 최초의 출발은 석가모니가 가섭에게 拈花微笑하여 이심전심으로 법을 전했다고 하는데서 기인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후대에 원조에게서 출전을 구하는 견강부회의 소치일 뿐이고, 중국적인 禪 그 자체의 출발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후에 達磨(Bodhi-dharma)라고 불리는 波斯國 출신의 한 역사적 인물이 중국으로 渡來하여 普通 8년(527) 9월21일에 廣州에 도착하였고 그후 嵩山少林寺에 들어가 면벽(面壁)한 것이 9년, 神光이라는 異僧이 달마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어 밖에서 끝까지 버티고 있는데 밤사이 눈이 허리까지 차올라와도 움직이지 않고 법을 구하니 달마가 드디어 9년간의 침묵을 깨고 『諸佛의 도는 오랜 세월을 정진하며 참기 어려운 것을 능히 참고 행하기 어려운 것을 능히 행하지 않으면 안 되거늘 어찌 경망한 마음으로 진실의 불법을 구하려느뇨』하고 꾸지람하니, 神光이 바로 칼을 들어 왼팔을 잘라바치고 드디어 入室을 허락받았다는 고사가 『楞伽師資記』에 수록되어 있다. 바로 이 神光이 慧可요, 慧可가 바로 第二祖다. 중국에서 禪을 일으킨 第一祖가 바로 이 달마라는 인물인데, 世壽 150세를 누리고 大同연간 혹은 太和연간에 遷化하였다는 이 달마가 과연 역사적 인물인가 하는 것은 그 정확한 전기가 재구성될 수 없다고 하는 측면에서 보면 후대의 설화 속에 남은 픽션이 아닐까 하고도 의심해볼 수 있지만, 하여튼 당대의 불교계가 經論의 연구강연만에 힘쓰고 있을 때 學解를 물리치고 空無所得의 실천적 선풍을 주도한 어떤 역사적 인물이 실존했었다는 사실을 추론키에 그리 난감함만을 느끼지도 않는다. 제1조 달마에서 제2조 혜가(慧可)로 제3조 승찬(僧璨)으로 제4조 도신(道信)으로 제5조 홍인(弘忍)으로 의발은 전수되어 갔으나, 실제로 중국불교사에서 禪法을 크게 진작시킨, 그리고 가장 중국적인 頓悟의 선풍을 창성시킨 자는 바로 제6조 혜능(慧能, 638∼713)이었다. 홍인의 의발을 둘러싼 신수(神秀)와 혜능(慧能)의 갈등은 유명한 게송, 『菩提本無樹, 明鏡亦非臺, 本來無一物, 何處惹塵埃』로 잘 알려져 있으나 혜능이 30여세나 선배인 신수를 물리치고 의발을 전수받은 그 배면에는 혜능의 지근(智根)이 중국적인 문화의 특성을 보다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신수는 북방의 長安·洛陽 근방에서 포교하여 漸修主義를 펼쳤고 혜능은 韶州(廣東省)·廣州에서 40여년 頓悟主義를 펼쳤다. 이로써 北宗禪·南宗禪이니, 北漸·南頓이니 하는 선종의 대세가 형성되었으나 北宗禪은 시들고 南宗禪이 크게 창성한 것은 무엇보다도 혜능의 法系에서 뛰어난 인재들이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臨濟·曹洞宗으로 시작하는 소위 五家七宗이라 하는 禪門 모두가 이 혜능의 법계에서 발전되어 나간 것이다. 南宗이 득세한 것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취한 입장이 중국인 심성의 갈구를 보다 본질적으로 충족시켜주었기 때문이다. 『금강경』과 『열반경』을 중시하고, 돈오견성(頓悟見性)과 계(戒)·정(定)·혜(慧) 三學의 一體를 설파하고 무상심지계(無相心地戒)를 창시한 혜능이야말로, 전기구성이 확실한 역사적 인물이며 선종 中興의 祖다. 중국적인 禪은 바로 이 혜능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禪에는 보통 묵조선(默照禪)이니 간화선(看話禪)이니 하는 말이 있다. 묵조나 간화나 그 구경(究竟)으로 말하자면 다 방편의 문제요, 근원적으로 2원화될 문제는 아닐 것이다. 묵조선이란 오로지 침묵만을 지언(至言)으로 삼는 것이고 그 마음을 청정케하고 그 정신을 오로지하여 묵유내관(默游內觀)하여 그 法의 근원을 철견(徹見)하는 것이요. 일체의 장애를 없애 공공(空空)한 상(相)이 있는 그대로 보응(普應)케하는 것이다. 간화선이란 묵조선과는 달리 인간의 언어를 빌린다. 간화의 간(看)은 참간(參看)이란 뜻이다. 즉 「참고한다」는 뜻이다. 간화의 화(話)란 옛사람들의 화두(古人之話頭)다. 지난 수행자들이 깨달음의 실마리로 삼은 이야기들인 것이다. 간화선이란 이러한 이야기들을 참고하여 항상 그것을 생각하매 어느 삶의 순간에 큰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 화두는 단 한 글자일 수도 있고 긴 스토리일 수도 있다. 이러한 간화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佛祖들의 언어동작이 담긴 이야기체계를 우리는 보통 공안(公案)이라 부른다. 공안이라는 말 자체가 중국문명이 얼마나 관료제의 권위주의를 벗어나지 못했는가를 말해주기도 하지만 그 말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는 바로 「公」의 「大公無私」함의 측면에 있다. 공안이란 「公府의 案牘」이다. 요새말로 하면 「관공서의 문안」이라는 뜻이다. 公이란 천하의 모든 길이 하나로 통하게 되는 至理를 말하는 것이요, 案이란 성현이 진리를 실천한 바를 기록한 正文이라는 뜻이다. 이 公案은 唐에서 唱하여 宋에서 盛하였다. 이 公案이란 사실 별게 아니고 고승들의 삶의 자취요, 깨달음의 궤적이다. 公案이란 원래 모든 수행자들이 의거하여야 할 헌법과도 같은 공문서라는 의미지만 그 실내용인즉 우리나라 헌법과 같은 조문이 아니요, 바로 깨달음을 갈구했던 인간들의 생생한 삶의 이야기다. 우리는 바로 그 이야기들을 통해 간화선의 방편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말했다. 禪은 宗이 아니다. 禪은 삶이다. 禪은 경전이 아니다. 禪은 삶의 이야기인 것이다. 따라서 禪宗의 바이블은 『法華經』이나 『華嚴經』같은 經이 아니고 바로 公案이다. 이러한 公案의 모음집으로서 우리가 『宗門第一書』라고 존숭하는 책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碧巖錄』이라고 하는 희대의 걸작, 최고의 문학인 것이다. 『벽암록』은 北宋初期의 雪竇重顯(980∼1052)의 편저인 『雪竇頌古』 중의 本則과頌에 대해 北宋晩期의 記悟克勤(1063∼1135)이 垂示·著語·評唱을 붙인 것을 일컫는다. 설두중현은 雲門의 四代孫, 즉 香林澄遠·智門光祚를 이은 雲門法系이며 원오극근은 臨濟宗 楊岐派의 嫡孫이다. 그래서 이 『벽암록』은 임제종계열에서 특히 애지중지한 책이지만 禪宗의 公案으로는 그 機鋒의 임제종계열에서 특히 애지중지한 책이지만 禪宗의 公案으로는 그 機鋒의 峻烈함과 그 言語의 直截함이 이 『벽암록』 일서를 당해낼 책이 없다. 『설두송고』라는 『벽암록』의 고층대를 형성하는 책은 설두스님이 『景德傳燈錄』 『雲門廣錄』 『趙州錄』등의 禪錄 중에서 공안 1백개를 뽑아 그것을 『本則』이라 하고, 그 『本則』에 대해 설두스님이 깨달은 바를 자신의 자유로운 스타일로 게송(운문)을 읊은 것을 『頌』이라 했다. 이 本則과 頌이 결국『벽암록』의 골조를 이루는 것이며 本則은 시작할 때 『擧』(다음의 이야기를 들어보자!)라는 말로 시작한다. 그러니까 本則은 설두스님 이전의 공안이고 頌은 설두스님 자신의 작품이 된다. 이 설두가 編하고 作한 本則과 頌에 대하여 근1세기 후에 원오라고 하는 一機一境, 一言一句 그 혜망이 날카롭기가 이를 데 없는 禪師가 本則과 頌에 대하여 각각 著語와 評唱을 붙이고 또 垂示를 붙였는데, 垂示란 本則과 頌 전체를 묶어 자기자신의 경지에서 갈파한, 本則과 頌으로 도입시키는 암시의 밀도 높은 언어다. 著語는 本則과 頌의 구절구절마다 매달아 놓은(著) 일종의 논평(語)과 같은 것인데, 너무도 황당무계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언어를 초월케 만드는 언어로서 쉽사리 이해가 갈 수 없는 함축적이고 묵시적인 단평이다. 본칙과 송의 구절구절에 자신의 언어를 개입시키매 본문의 맥락과 조화와 부조화의 긴장을 일으키는 妙機를 야기시키고 있다. 著語는 本則과 頌을 잘 이해시키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본의에서 너무 과도하게 빗나가 독자를 곤혹스럽게 만든다. 허나 그 곤혹함이야말로 바로 논리적 인과를 거부하는「不立文字」의 본질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착어에 비하면 『評唱』은 요새말로 논문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는 주석부분이다. 평창은 本則과 頌에 각각 붙어 있으며 이 평창이야말로 선종의 준열한 혜망과는 달리 평이한, 원오의 학식이 넓고 깊음을 잘 드러내주는 언어다. 『벽암록』이란 바로 설두의 本則과 頌과 원오의 垂示·著語·評唱을 합쳐서 부르는 것인데, 垂示만은 100측에 다 붙어 있지 않을 때도 있다. 『벽암』이란 원오스님이 湖南 殼州의 夾山 靈泉院에 머무를 때 그 方丈室 편액에 『猿抱兒歸靑唵後, 鳥啣花落碧巖前』(원숭이가 새끼를 품에 안고 푸른 절벽뒤로 돌아가고 새가 꽃을 물어 푸른 바위 앞에 떨어뜨린다)이란 글귀가 걸려 있었는데 그 중 『벽암』이란 말을 취하여 『벽암록』이라 한 것이다. 『벽암록』이 성립한 연대가 朱子學이 성립한 시대와 같은 세기에 속하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朱子學이 불교가 말살된 터전 위에서 새로 흥기한 것이 아니라 바로 禪宗의 文學이 최절정기를 이룬 시대의 터전에서 싹튼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때, 주자학의 샘물의 배면에 『벽암록』과 같은 사유의 암반이 있었다는 역설을 같이 기억해야 할 것이다. 朱子의 排佛은 바로 중국화된 佛學의 薰香의 한가운데서 기억해야 할 것이다. 朱子의 排佛은 바로 중국화된 佛學의 薰香의 한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벽암록』과 같은 파라독스를 이해하지 않고 宋儒 유학적 단편만을 말하는 것은 그 宋儒的 사유의 본질을 왜곡하거나 그 협애한 억견만을 고집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이미 安東林선생에 의한 『벽암록』의 역본(玄岩社, 1978)이 있고, 또 최근에는 연세대학교 辛奎卓교수가 장경각에서 선림고경총서로 펴낸 『벽암록』(1993) 역본이 있다. 나의 東京大學 중국철학과 직계후배인 신규탁교수의『벽암록』은 직역에 충실하였고, 『장자』의 좋은 역서를 내신 안동림선생의『벽암록』은 그 의미를 잘 알 수 있도록 의역한 것이며 두 책이 다 장단점은 있으되 같이 참고할 만한 좋은 번역들이다. 영어판으로는 Thomas and J.C. Cleary에 의한 The Blue Cliff Record(Shambhala, Boulder & London, 1977)를 꼽을 수 있고, 일본어판으로는 최근에 岩波文庫에서 이리야(入矢義高)·미조구찌(溝口雄三)·스에키(末木文美士)·이토오(伊藤文生)가 공동 譯注해낸 『碧巖錄』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역서들이 단순한 번역이고 어의의 해설일 뿐 그 내면적 의미를 풀어헤치고 있질 않다. 그것은 언어도단의 세계이며 불립문자의 세계이며 직지인심의 세계이기 때문에 그러할 수밖에 없다는 변명도 가하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엔 용기가 부족한 것이요, 그 언어의 궁극에 부닥쳐 그 언어를 초탈해버리는 지근이 못 미치는 것이요, 자기의 깨달은 바를 如如한대로 풀어내는 素朴하고 진솔한 마음이 모자라는 것이다. 『벽암록』의 언어는 우리의 합리적인 언어의 질서속에 있질 아니하다. 허나 그것은 초합리(trans-rational)지 비합리(irrational)가 아니다. 초합리가 되었든 비합리가 되었든 모두 합리의 궁극에서만 느껴지고 밝혀지는 것이다. 합리의 궁극에까지 도달치 아니하는 초합리는 비합리일 뿐이며 그러한 비합리는 용졸한 인간의 잡설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선승들 중에는 진실로 존경할 만한 인물들이 많으나 현금 우리나라의 禪界를 지배하는 병폐는 초합리를 합리의 벼랑길에서 밝히지 아니하고 또다시 무지의 기만속으로 얼버무리고만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무식한 인간이 무식한 얘기만 하면서 그것을 불립문자라 하고 그것을 언어도단이라고 하면서 자기기만적 언행을 일삼고 있는 것이다. 선은 삶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삶의 진실이다. 삶의 진실은 언어를 통해 다 밝힐 수 없는 것이지만 언어를 통해 투영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인간 삶의 平常心이요 本分事다. 玄妙한 機境을 論究하는 것이 아니다. 나 도올이 이제 와서 『벽암록』을 번역한다는 것은 별의미가 없다. 번역 그 자체를 상고하려면 시중의 安本이나 辛本으로도 그 문맥을 어느 정도는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벽암록』에서 本則과 설두의 頌만을 취한다. 그리고 원오의 장황설은 나의 해설의 자료로서 참고할 뿐 번역의 대상에선 제외한다. 허나 원오의 垂示는 좋은 導論이라 생각되어 본칙 앞에 붙인다. 도올의 『벽암록』강화는 垂示, 本則, 頌의 우리말 번역과 그에 대한 나의 생각을 실은 案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도안」을 통해 우리 시대의 불자들이 함께 웃고 울고, 함께 우리자신의 삶과 사회의 문제를 생각하는 마당을 만들어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벽암록』은 宋代의 어록체라고 하는 백화문학의 조형을 이루는 구어체로 쓰여 있으며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한문」의 틀을 벗어난다. 十三經을 읽는 한문실력으로만은 해결될 수 없는 독특한 문학양식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당시의 완벽한 구어체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문어적 표현과 일상적으로 자유롭게 말하는 구어적 표현이 기묘하게 짬뽕되어 있는 특이한 언어양식인 것이다. 當代의 해탈한 선사들이 자신의 생각을 표출하는 수단으로서 출전에 얽매이는 정통문언을 고집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냥 되는대로 전달만 된다면 내깔긴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불교계의 문제도 바로 이러한 언어양식에 정통적으로 능통한 학자가 부재하다는 사실에 있으며 이것은 반드시 『朱子語類』나 元代의 희곡 등 白話文學 전체의 확고한 실력기반 위에서 용해되어야 할 문제라는 것을 부기해둔다. 전거로 삼은 판본은 조선조 세조 11년에 제작한 을유자로 찍은 삼성출판박물관 소장본을 썼다. 그 자세한 것은 신규탁의 『벽암록』을 보라. ......Amor vincit omni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