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dd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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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croce ( 크로체)
날 짜 (Date): 1998년03월04일(수) 14시39분39초 ROK
제 목(Title): cap]양무제가 달마를 만났을때(1)




 
[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guest (guest)
날 짜 (Date): 1998년03월01일(일) 07시44분06초 ROK
제 목(Title): 양무제가 달마를 만났을때/김용옥,신동아
 
 
 
신동아에서 캡쳐했습니다.
벽암록 강화 제일화 입니다.
어느분이 캡쳐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티스트리.
 
 
 
 
 
                              도올 『碧巖錄』 講話 제1화
 
                               양무제가 달마를 만났을 때
 
   아무리 IMF시대라고는 하지만 이 모든 역사나 정치·사회·경제의 긴박한 
문제들이 인간의 문제며 인간의 삶의 방식에서 기인된 문제라는 데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정치나 경제의 문제들이 정치와 경제만의 차원에서 해결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 사회의 문제를 여러 시각에서 총체적으로 조망할 때 
비로소 그 문제의 실상이 실감나게 드러날 것이다. 그래서 「신동아」에서는 
김대중정권의 출범을 눈앞에 둔 이 중대한 역사의 고비에서 인간의 문제를 
총체적으로 조감하는 철학자 도올 김용옥의 글을 연재하기로 했다. 1990년 
『도올세설』의 연재로 「신동아」 독자와 만났던 도올의 붓길이 다시 한번 훈훈한 
인간애와 正道의 가치관을 우리에게 선사하리라고 기대한다. <편집자>
 
   도올 김용옥
 
 
                                           素序
 
   요즈음 나는 도올서원에서 『벽암록』이라는, 결코 우리에게 친숙하다 말할 수 
없는 책을 하나 대중들에게 강론하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을 강론하기 전에 
나는『조선사람을 위한 성서강좌』라 하여 일년동안 내가 평생 생각하여온 
기독교『성서』의 의미를 강의한 적이 있다. 그런데 어찌되었든 
『신·구약』성서는 일반에게 너무도 널리 알려진 책이고 하니까 많은 사람이 
오리라고 예상했는데, 물론 꽤 많은 사람이 와서 듣기는 했지만 기대만큼 큰 
호응을 얻지는 못했던 것 같았다. 물론 내 자신의 신앙관을 정리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으므로 그런 강의를 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고마움이란 이루 다 표현할 
수가 없다. 
   그런데 이 『벽암록』이라는 책은 일반에게 그리 알려져 있는 책도 아니고 그리 
대중적으로 회자될 수 있는 책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일단 내가 강론한다는 소식이 
신문에 나가자 벌떼같이 대중들이 운집하여 일시에 도올서원을 입추의 여지도 없이 
메워버렸다. 서원에서는 보통 강론이 시작되고 끝날 때 우리식 큰절로 남녀노소 
모두가 함께 맞절을 한다. 그런데 이렇게 절을 할 수 있는 운신의 공간조차 사라져 
맞절을 하는 예식도 치를 수 없는 형편이 되고 말았다. 보통 한 백명이 넉넉히 
들어앉을 공간에 4·5백명이 콩나물시루에 박힌 콩나물대가리처럼 들어앉아 
강의하고 있는 내 발밑에까지 무릎을 맞대고 눈을 치켜뜨고 앉아있으니―, 듣는   
사람인들 고생이 오죽하랴마는 나는 내 강의를 그렇게 열성적으로 들어준다는 
고마움 때문에 힘이 나고 기가 솟구쳐 머리터럭이 청사(靑絲)와도 같았던 젊은날의 
열정을 회복하여 신나게 바람나게 열강에 열강을 토해내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도대체 왜 이렇게 사람이 많이 모여드는가? 나는 시간을 주로 동숭동에서 
많이 보낸다. 내가 환자를 보는 도올한의원도 동숭동에 있고, 내가 우리나라 
대학생들에게 고전을 가르치는 도올서원도 동숭동에 있고, 내가 제자들과 함께 
고전을 강독하는 한국사상사연구소도 동숭동에 있기 때문에 생활권이 모두 
그쪽으로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점심때가 되면 내가 가끔 잘 이용하는 
식당이 하나 있다. 동숭동에는 별로 가고 싶은 식당이 만만치 않은데 값도 싸고 
입맛에 어우러질뿐만 아니라 청결한 곳이 한 곳 있는데 그곳이 바로 방송대 
구내식당이라는 곳이다. 엄밀하게 따지면 내가 방송대 선생이 아니므로 그 식당을 
이용할 자격은 없겠지만, 그래도 대한민국의 교수라는 신분의 보편적 유대감을 
생각할 때 그 정도야 안 통하랴 해서 은근슬쩍 신세를 지고 있는 곳이다.그런데 
그곳 식당에서 일하시는 아주머니들이 날 알아보고 잘 해주셔서 아주 맛있게 
만족스러운 끼니를 매번 때우고 있는 것이다. 천하에 까다롭기로 소문난 미식가 
도올의 설편(舌片)을 그렇게 만족시킨다는 것은 결코 범상한 일이 아니다. 
지도(至道)는 범상함에 있다는 철리를 깨우쳐주는 한 일화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요즈음 책을 한 권 냈다. 지난번 SBS에서 강의한 내용을 재구성해서 
『건강하세요』라는 제목의 책자로 만들어 냈는데 요즈음 베스트셀러 리스트에는 
올라가 있는 모양이다.
   내용이 매일 우리 육신으로 접하고 사는 『똥과 섹스』에 관한 이야기가 
되고보니 많은 사람이 공개적으로 떠들진 못해도 술집골방같은 데서는 입방아를 
많이 찧기는 찧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알고보면 구체적으로 일상건강에 
결정적인 단서가 될 수 있는 훌륭한 정보들이 많이 들어있는 책임에는 틀림이 
없으렷다! 나는 그 책이 나왔기에 그 책을 평소 미식가의 괴로움을 덜어주는 
고마우신, 방송대 식당에서 일하시는 아주머니들에게 드리려고 가지고 갔다. 
그랬더니 아주머니들이 우루루루 모여들어 너두나두 책 싸인을 해달라는 것이다. 
허긴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는   판에 내가 싸인해준다는 책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아주머니 이름이 뭐요?』
   『곽복순이에요』
   『거 이름 좋쉐다』
   『좋긴 뭐가 좋아요?』
   『복이 있고 순하면 더 바랄게 뭐있수?』
   『아니 그래 복이 많아 겨우 구내식당에서 밥순이 노릇하고 있을라구』
   『아니 밥순이가 어드래요. 이 땅의 젊은 학생들이 무럭무럭 자라라고 이렇게 
귀한 음식 만들고 있으면 天運을 잘 타고난 것이지 뭘 더바라?』
   『거 시시껍적한 얘기말구 무인년 덕담이나 하나 써주구레』
   『거 좋지!』
 
   이렇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하나둘씩 붓길이 스쳐지나가는 동안에 나는 매우 
중대한 사실을 하나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그날 내가 『건강하세요』 앞페이지에 
싸인을 해준 아주머니는 열명이었는데 이들 모두가 불교신자라는 우연치 않은 
사실의 발견이었다. 난초를 치기도 하고 한시를 써주기도 하고 대련을 써주기도 
하는 중에 뭔 덕담을 해주면 좋겠냐고 묻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알게된 사실이었다.
   물론 이들이 어느 종교집단에 소속되어있는 사람들도 아니요, 사전에 친분이 
있던 사람들도 아니다. 우연히 모인 사람들이건만 그러한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나라의 고난받고 있는 대중들에게 기독교가 널리 유포되어 
있다는 나의 피상적 인상을 깨기에 충분한 하나의 사회적 사실이었다.
 
   『이상할 것 없어요. 대개 말이죠. 시장같은 데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 중엔 
교회 가는 사람이 많아요. 이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대강 장사했잖아요. 그 
사람들은 대개 예수쟁이들이 많죠. 그런데 이런 데서 밥짓고 그러니까 고용되어 
사는 사람들 중엔 절 가는 사람들이 더 많아요. 그러니까 장사꾼하구 인텔리들 
중엔 기독교인들이 많구요, 그냥 소리없이 순응해서 사는 직업인들이나 
아주머니들은 절에 더 많이 가요. 그러니까 야소교도들 중엔 전투형이 많고 
불교도들 중엔 순응형이 많다고 말할 수 있죠. 그러니까 기독교는 재력이 많고 
설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래서 예수쟁인 조금만 모여도 왁자지껄하죠. 그래서 
우리나라엔 기독교도가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수적으로 보면 오히려 보이지 않는 
조용한 군중속에 불교가 더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어요』
                                   불교, 그것이 궁금하네
   그날 동행을 했던 나의 한 제자의 말이다. 상당히 일가견이 있는, 우리 사회의 
한 종교현상을 간파한 탁견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기독교를 진취적이고 동적이고 
전투적이라고 하고, 불교를 순환적이고 정적이고 순응적이라고 과연 이분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가? 그리고 기독교도들과 불교도들의 삶의 양태의 성향을 과연 
그렇게 이원적으로 구획지어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 하더라도 
얼핏 우리사회의 신앙의 형태가 지닌 대체적 성향의 한 단면을 잘 간파한 말임에는 
과히 대차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나라 일반 대중이 기독교편이냐 
불교편이냐, 야소의 승리냐 싯달타의 승리냐 하는 것을 편가름하려는데 나의 
언어갈등(葛藤)의 소적(所的)이 있질 아니하다. 대중이 절엘 더 많이 가느냐? 
교회엘 더 많이 가느냐? 이따위 문제는 나의 언어가 소기하는 바가 아니다. 허나 
그날 내가 방송대 구내식당에서 느꼈던 중요한 문제의식은 우리나라의 보이지 않는 
선남선녀들이 소리없이 불교라는 진리체계에 삶의 가치를 두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의 새로운 발견이었다. 그러한 사실의 표출이 바로 도올서원을 꽉 메우고 있는 
대중들의 운집이라는 하는 예기치 못한 현상이 아니겠는가?
 
   도대체 불교란 무엇인가? 불교는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불교를 믿어서 도대체 어쩌자는 것인가? 심산유곡의 명승지를 찾아가서 공양을 
하거나, 그곳에 가서 자녀합격기도를 하거나, 자연을 파괴하는 절건물이나 
증축하는데 시주하는 것이 불교를 믿는다고 하는 신앙 행위의 전부인가? 불교는 
과연 우리 삶에 어떠한 가치를 심어주고 있는가? 불교는 무엇이냐?
   그렇다고 기독교는 무엇이냐? 이러한 질문은, 이미 규정될 수 없는 것을 
규정하라는 강요이므로, 그 질문 자체가 엄중한 하자를 내포한 것이지만, 그러한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기술(description)」에 동원되는 많은 방편들이 잘 
처리만 된다면 어느 정도 그 주관적 윤곽을 잡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의식에 대해 우리에게 속시원한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책이나 인간이 
손쉽게 곁에 나타나질 않는다는 답답함이 나의 삶의 체험의 여정이었다는 독백은 
비단 나의 독백으로 끝나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더구나 불교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경우, 그러한「벙어리 냉가슴」은 증폭되어 나타난다. 우리나라의 기독교의 역사는 
개화의   역사와 일치한다. 그리고 개화의 주역은 우리나라 20세기를 선두에서 
지휘했던 선각자들이요, 지식인들이요, 유학생들이요, 상류계급이었다. 그리고 
기독교라는 언어의 진원은 서양이었다. 헤브라이즘에서 출발하여 헬레니즘의 옷을 
입고, 라틴의 치장을 거쳐, 근세 이성주의로 화려한 행군을 계속한 서양의 
언어였다. 20세기 양식사학(Formgeschichte)의 치밀한 성과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신학의 언어는 매우 합리적이고 정돈이 잘 되어 있다. 최소한 기독교를 
알고자 하는 많은 사람의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으리만큼 그럴듯한 언어들이 
차곡차곡 축적되어 있다. 
   그런데 불교는 어떠한가? 불교 언어를 전공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산스크리트어나 팔리어에서 출발하여 위진남북조의 한자라는 언어의 옷을 입고 
수당에서 개화한 불교언어, 그리고 그것이 다시 서구라파 
이성주의·실존주의에까지 둔갑한 불교언어의 화려한 행군이 결코 기독교 언어의 
역사에 뒤지거나 초라하다는 얘기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질과 양에 
있어서 방대하고 고답적인 언어의 성과가 오늘 우리에게 살아있는 가치관으로 
전달되어있는 모습이란 기독교의 그것에 비하면 너무도 조촐하고 소박하고 
초라하다고 말할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20세기동안에 불교는 방치되어 
있었다. 지성의 현장에서 추방되어 있었다. 식자의 관심에서 소외되고 매몰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더욱 어렵고 난해하고 고답적이고 기행적인 언어들만 
난무하고 갈구하는 대중의 심령에 던져진 땡중들의 봉갈(棒喝)이란 무지의 깨우침 
아닌 무지의 전승이요 무지의 확대일 뿐이었던 것이다. 나는 입추의 여지도 없이 
도올서원을 메운 대중들의 법석에서 바로 대중들의 참다운 갈망의 소재를 
깨달았던   것이다. 그들은 『벽암록』이란 텍스트에 대한 나의 강론을 듣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들은 참으로 불교 그것이 궁금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궁금증과 갈증은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 사회에 널리 유포되어 있는 하나의 현상이다. 그리고 
재미있게도 나의 도올서원 법석을 메운 사람들은 불교도에 국한되어있질 않다.
   절간에 다니면서 알고싶어도 알 수 없었던 얘기들, 보다 정직하고 솔직한 
얘기들을 듣고 그것을 삶 속에서 실천하고 싶어하는 많은 생령들의 갈망은 
불교도라고 하는 트레이드 마크에 국한되지 않는다. 광신적이라 말할 수 없는 
건강하고 상식적인 기독교인이든, 기독교에 실망과 좌절과 분노를 느낀 길잃은 
양이든, 아예 종교라는 이름에 귀속하기를 싫어하는 중성적 인간이든, 자신의 
삶에만 충직한 밋밋한 인텔리든, 모든 제도성을 거부하는 무정부주의자든, 불교에 
대한 관심은 이들 모두에게 공통된 것이다.
 
   『그것 참 너무 안타깝수다』
   『안타깝긴 뭐가 안타까워?』
   『아니 그래 도올서원에서 한번 강의하고 그냥 내버릴라우?』
   『불교란 내버릴수록 좋은게라우』
   『그래도 좋겠지만 대중보시를 위해 어디 기고래도 한번 허시구레』
   『됴ㅎ디!』
 
   주변의 압력은 가중되었다. 이것 참 자화자찬하기 미안허지만 내 강의가 너무 
좋으니 그걸 좀 많은 사람이 공유하도록 보살심을 발휘해달라는 것이다. 나는 
기억한다. 天下無不逼出來的文章! 천하에 명문치고 쫓기어 나오지 않은 것이
   없다네! 그래 한번 휘둘러볼까? 따르르르릉!
 
   『부장님, 이러쿵 저러쿵 사정이 있는데 한번 실어볼까요?』
   『됴ㅎ디!』
 
   IMF시대야말로 새로운 가치관이 필요할 때, 서양 따라가다, 세계화 운운하다 
이꼴 이짝 났는데 우리에게 묻혀진 이야기들 그것 좀 파내는 것이야말로 신선감이 
있겠다는 부장의 말씀이었다.
 
   『아 좋죠! 20세기가 컨스트럭션의 세기였다면 21세기는 디컨스트럭션의 세기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거품 걷어낸다는게 다 뭐겠어요? 그게 다 
디컨스트럭션이라구요. 교수님말대로 20세기가 유위의 세기였다면 이제 우리 
민족이 무위의 가치를 배워야 합니다. 21세기는 무위의 세기가 되어야 한다구요.
   기독교를 유위적 가치의 전형이라고 한다면 불교야말로 무위적 가치의 전형 
아니겠어요? 기독교와 서양의 컨스트럭션에 대해, 이제는 불교와 동양의 
디컨스트럭션의 예지를 배워야 한다구요. 20세기를 기독교와 개화(타자화)가 
지배했다면 이제 21세기야말로 불교와 자기화가 우세한 세기가 되어야 
하지않겠습니까? 제발 좀 긁어대주세요. 제발 좀 신선한 얘기들 좀 해주세요. 
IMF다해서 맨 돈 얘기만 하니까 식상해죽겠어요. 돈의 윤리를 얘기해야 할 게 
아닙니까? 돈 이전에 사람얘기를 좀 해야 할 게 아닙니까?』
 
   오케이! 역사는 시작되었다. 불교는 진리의 종교요 깨달음의 종교다. 기독교도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고 진리를 말하고, 수없는 가시밭길 십자가의 
깨달음을 얘기한다. 허나 기독교의 진리와 깨달음과 불교의 진리와 깨달음은 
다르다. 기독교의 진리와 깨달음이란 그 자체로 자족한 것이 아니요 반드시 
하나님이라고 하는 절대자에로의 귀의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허나 불교는 깨달음 
그 자체를 하나의 궁극적 사태로 간주한다. 인간의 「깨달음」 그 
무상정등각이야말로 그 위에는 아무것도 없는 실존의 궁극이다. 
인간의「깨달음」그 위에는 신도 있을 수 없고 절대자도 있을 수 없다. 모든 
존재성 그 자체가 거부되는 궁극이다. 따라서 「궁극」이라는 말 자체가 
「절대」라는 말로써도 표현이 될 수 없는 그러한 궁극이다. 그러한 궁극은 
「존재」가 아니라「마음」이다. 따라서 불교는 마음의 종교요, 존재의 종교가 
아니다. 따라서 불교에 대한 믿음이란 어떠한 타자에로의 귀속이 아니라 내 마음의 
수행이다. 흔히 기독교를 의타(依他)종교라 말하고, 불교를 의자(依自)종교라 
말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뜻이다. 따라서 불교는 신앙이 타자(他者)를 갖지 
않는다. 불교에서의
타자란 내 마음 속의 타자일 뿐이며, 그것은 내 의식의 분열상일 뿐이다. 그것은 
결국 나의 식(識)이라고 하는 장 속에서 이루어지는 능(能)과 소(所)의 분열일 
뿐이다. 따라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神)의 문제도 그것이 존재성이나 대상성을 
갖는 한 유식(唯識)의 한 계기일 뿐이다.
   기독교를 의타종교요, 불교를 의자종교라 말한다면, 불교의 궁극적 
대상은「나」(我)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불교의 三法印(세 가지 지고의 원리) 
중의 하나가 바로 「諸法無我」라는 것이다. 모든 法에는 我가 없다는 것이다. 
불교의 출발은 苦요, 삶의 고통이다. 지금 우리 민족이 당면한 IMF도 「苦」라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외환위기로 인한 물가상승이나 실직이 모두 우리 삶의 
고통과 통고로 연결된다는 데 그 근원적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苦의 
궁극적 원인은 IMF가 아니라 바로 「我」라는 것이다. 이때 我라는 것은 나의 識에 
나타나는 執의 총체상이다. 따라서 그것은 부정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기독교를 의타종교라 하고 불교를 의자종교라 했을 때 얼핏 이해하면
기독교야말로 자아를 부정하고 타자에게로 귀의하는 것이요, 불교야말로 자아를 
긍정키만 하는 자만(自慢)의 종교라 생각할 수도 있다. 허나 기독교의 부정은 
부정이 아닌「헌신」이다. 불교는 의자(依自)라는 의미에서 강렬한 자기긍정에서 
출발하지만, 자기긍정의 궁극은 바로 강렬하고도 철저한 자기부정이 되는 것이다.
 「諸法無我」란 곧 모든 진리의 궁극에는 我가 부정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멸집(滅執)의 상태요, 我를 구성하는 모든 집(執)으로부터 해탈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러한 아집(我執)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인간의 언어(言語)라는 
것이며,선가(禪家)에서 갈등(葛藤)이라 부르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에게서 존재의 
해탈이라고 하는 것은 언어의 부정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가 없다. 이러한 언어의 
부정을 「불립문자(不立文字)」라고 하는 것인데, 불교가 중국에 들어와서 
중국인의 심성속에서 대승화되어가는 과정에서 그 궁극적 과제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이 불립문자라는 것이다. 불립문자가 소기하는 바는 곧 
직지인심(直指人心)이다. 언어를 뛰어넘어 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가리킨다는 
것이다. 직지인심이야말로 우리의 논의가 최초로 지적했던 바로「깨달음」이라는 
의미의 본래면목인 것이다.





 

                                           ......Amor vincit om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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