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dd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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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chyoo (문사수)
날 짜 (Date): 1997년10월30일(목) 17시38분05초 ROK
제 목(Title): 말법 시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득도한 그 때도 말법시대입니다.

다음에 석가모니 육신의 삶이 끝난 후 500년이 지나서

대승불교가 나올 때에도 말법시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활동하던 때에도 말세입니다.

말법 시대가 아닌 적이 한번도 없는 것이 말법 시대입니다.

기독교나 불교집단과 같은 종교집단이

역할을 잘하고 있건 그렇지 않건 그것은 또한 말법 시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새로운 천년이란 언제나 새로운 천년입니다.

서기를 기준으로 하면 세기말이나 각자의 생년월일을 기준으로 하면

언제나 세기의 시작입니다.

백세 이상을 장수한 사람은 세기말이라는 구분을 가지고 있어도

대부분은 세기말을 한번도 만나지 못한 채로 운명을 합니다.

혼란스러운 시절은 지금만 혼란스러운 것이 아니라

끝없는 옛날 부터 혼란스럽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기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혼란의 시대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것 처럼,

백년전의 이 땅의 사람들도 혼란을 느끼면서

새로운 시대를 갈망하였습니다.

이백년전의 지구상에도 역시 혼란의 거듭일 뿐이었습니다.

혼란이 한번도 잠자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지구상에는 무수히 많은 당시로는 신흥종교가 난립을 하다가

사라지기도 하고

근근히 유지되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혼란상과 혼돈을 느끼고

있기에 그것을 물려주지 않으려는 노력을 하게 되는 것도

이치적으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백년후에 이 땅에서는 혼란을 느끼고 혼란을 극복하려는 것은

역시 끝이 나지를 않습니다.

인격적인  사랑은 혼란을 기본으로만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혼란과 혼돈은 인격적 사랑이 자리하게 되는 필수 조건입니다.

그러므로 혼란과 혼돈은 또한 건강입니다.

건강한 사회와 건강한 인생은 혼란과 혼돈의 도움이 없이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혼돈 보다 더욱 무서운 것은 획일적 질서입니다.

획일적 질서는 혼돈일 수 밖에 없는 생명의 자유를

덮어 버리게 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정치라는 이름으로

역사의 순환은

혼돈이 혼돈으로 존재하고자 하는 본질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에 의하여

일어납니다.

혼돈이야 말로 본래부터 있는 참으로 크나 큰 축복입니다.

종교는 하나님이나 부처님이란 이름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습니다.

혹은 사랑이나 자비와 같은 이름과도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이란 이름으로 하나님을 찾고 있다고 하여도

이름은 하나님이지만 섬기는 것은 사탄일 수가 있는 것이고

부처님이란 이름으로 부처님을 찾고 있다고 하여도

이름은 부처님이지만 섬기는 것은 마왕일 수가 있는 것이

종교입니다. 아니 일 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탄이고 마왕입니다.

사랑이라고 하지만 이름은 사랑이지만

결과는 사랑이 아닌 것으로 될 수 있고

자비라고 이름하지만 결과는 자비가 아니게 될 수 있는 것이

종교입니다. 사랑과 자비가 질서적 성격이면은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금강경에 보면

수보리 존자가 묻습니다.

스승께서 육신을 거두신 후 500년이 지난 말법시대에도

스승의 말을 믿을 사람이 있습니까?

그때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말법 시대에 어떤 사람이 있어서

이 경전을 받아서 읽고 사구게 만이라도 다른 사람을 위하여 말해주면

그 사람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다고 합니다.

만일 수보리 존자가

스승께서 육신을 거두신 후 10000 년이 지난 말법시대에도

스승의 말을 믿을 사람이 있습니까?라고 물었어도

같은 답이 나왔을 것입니다.

질서를 잡으려고 하는 것은 그 어떤 것도

불교일 수가 없습니다. 불교는 질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위험한 것은 불교와 기독교의 질서화 뿐 만이 아니라

새로운 질서를 내세우는 것 역시 그저

불교와 기독교의 질서화와 같은 것일 뿐입니다.

헌 질서를 깨고 새 질서를 만드는 것은

역시 혼돈을 혼돈으로 있게 하지 못하는 것의 반복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새 질서는 헌 질서를 깨기위하여 헌 질서 보다 훨씬

강력한 질서를 요구하게 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강력한 새로운 사랑

이럴 때에

불교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동일생명이지

동일생명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 때문에

불교는 부정을 사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너와 나는 하나이니 사랑하고 더불어 사는 질서있는 삶을 만들자.

긍정은 이렇게 되기 때문에

부정을 하는 것입니다.

너와 나는 본래 둘이 아니다.

본래 둘이 아니라는 것은

너와 나가 사랑을 하도록 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나가 사랑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 조사는

"하나라고 해도 틀린 말이다"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불교라는 질서가 세상에 존재하지 못하게 된다고 하여도

그것은 오히려 반가운 일입니다.

말법, 말질서, 말불교야 말로

참다운 불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교 혹은 기독교에 상대하는

말불교, 말기독교라는 새로운 질서의 성립은

불교나 기독교라는 질서와 그저 동일한 것일 뿐입니다.


새로운 질서를 내세워도 혼돈은 끄덕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새로운 질서를 주창하는 가운데에

느껴지는 고통과 새로운 질서로 혼란을 덮으려고 하는

엄청난 에너지가 끝내 혼돈으로 빨려들어감을

볼 수 밖에 없을 때에

질서를 잡으려고 시도하는 사람들과

질서에 저항하는 반질서라는 또 다른 질서가

둘다 불가능함에 느껴야 하는 고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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