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chyoo (문사수) 날 짜 (Date): 1997년10월24일(금) 10시05분30초 ROK 제 목(Title): 지혜광명삼매, 장엄삼매 지혜광명 큰 삼매와 장엄 큰 삼매 눈이 내리는 한 겨울에 방안의 화로 위에 서는 물이 끓는 소리가 들립니다. 찻물을 식 히는 주발에 끓은 물을 따릅니다. 혹시나 겨 울의 찬 기온 속에 찻물의 온도가 적당한 온 도 이하로 떨어질 것에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쓰기에 물 보다 찻잎을 먼저 찻주전자에 넣 고 적당하게 따뜻한 물을 붓습니다. 빛깔이 찻잔에 우려낸 차를 따릅니다. 그 리고 두 손으로 받쳐들고 그 찻잔과 찻잔 속 의 작설의 은은하고 연한 색상과 색상만치나 별나지 않은 냄새를 맡아봅니다. 두 손을 움 직이는 생명임을 만 생명 앞에 자랑할 듯이 허리와 고개를 움직이지 않고 도도히 손을 움직여서 찻잔을 입으로 가져옵니다. 찻잔을 든 두 손에는 적당한 온도의 따뜻함이 느껴 집니다. 맛을 음미하기에 넘치지 않을 정도 의 차를 마시고 그 맛을 음미합니다. 저는 작설을 즐기는 다인(茶人)은 아닙니 다. 녹차보다는 커피에 익숙합니다. 녹차를 마시는 경우는 대부분 전날의 숙취를 제거하 기 위하여 1회용 녹차를 맛이 사라질 때까지 우려내면서 오전 내내 몇 개를 없애 버리는 것이 유일하게 녹차를 마시는 경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설을 마시는 옛 선조 들이 한 잔의 차속에 마저 담아두려고 했던 진리로 향한 그 마음은 작설에 대한 차습관 이 전혀 배어있지 않음에도 저절로 알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차를 준비하고 마실 때에는 우리의 다섯 가지의 감각 기관을 모두 깨어있게 합니다. 먼저 끓는 물소리를 듣는 귀가 깨어 있어야 하고 찻잔과 차의 색을 보는 눈이 깨어 있어 야 하고, 찻물의 적당함을 알기 위한 손의 촉감이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작설의 튀지 않는 향을 음미하기 위하여는 코가 역 시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혀가 다섯 가지의 맛이 느끼도록 혀가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마시고 먹는 모든 것에는 우리의 다섯 가지의 감각이 움직입니다. 단지 우리 는 깨어 있음보다는 습관적으로 음식을 먹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일 뿐입니다. 음미한다는 것은 깨어 있다는 것입니다. 소리를 음미해 보고, 색을 음미해 보고, 냄새 를 음미해 보고, 촉감을 음미해 보고, 맛을 음미해 봅니다. 우리 선조들이라고 해서 음식을 언제나 음 미하면서 먹을 수는 없었겠습니다만 작설을 마시는데 있어서 깨어있음속에서의 음미하도 록 할 때에 무엇을 음미하도록 하였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작설의 연둣빛 색깔을 음미하도록 하였을 까요? 혹은 보글보글 거리는 물 끓는 소리를 음미하도록 하였을까요? 차의 향을 음미하도 록 하였을까요? 아니면 따뜻한 온기를 음미 하도록 하였을까요? 아니면 자극성이 없는 맛속에서 다섯 가지의 맛을 음미하도록 하였 을까요? 작설차의 색깔은 연한 연둣빛일 때에 가장 잘 우려낸 색상이라고 합니다만 작설에 색깔 이 있을까? 우리는 이 물음으로부터 작설을 음미하는 세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깨어 있는 맛이란 것에 접근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눈앞에 있는 찻잔 속의 작설의 색 은 연한 연둣빛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볶은 찻잎이 적당한 온도의 물과 결합이 되었을 때의 색상입니다. 물과 결합되기 전에는 검 은 색의 색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볶아 지기 전에 새벽 이슬을 맞은 차나무에서 돋 아 나는 새순은 짙은 녹색입니다. 그리고 그 차나무의 줄기의 색깔은 여타 잡목과 다를 바가 없는 색상이며 그 차나무가 먹고 있는 영양분도 다른 식물과 다름이 없는 것들입니 다. 그 영양분을 공급하고 있는 작설을 위하 여 존재하고 있는 헤아릴 수 없는 생명체의 색깔은 오만가지의 색깔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색깔은 연한 연둣빛이지만 참으로 작설의 색깔은 무색이라고 해야 맞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차의 색을 보면서 무색을 볼 때에 음미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 을 것입니다. 작설의 빛깔이 조금 진하다 아 니면 조금 연하게 되었다라는 색깔에 대한 기준을 두고서 보는 것을 음미라고 한다면 이를 "다도(茶道)"라고 부르기는 곤란할 것 같습니다. 작설의 냄새는 "무향(無香)"일 때에 향을 음미한 것입니다. 작설의 소리도 "무성(無 聲)"입니다. 작설에는 다섯 가지의 맛이 모두 있다고 합니다만 따지고 보면 작설 뿐만이 아니라 모든 음식의 맛에는 다섯 가지의 맛 이 모두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섯 가지가 조화되어 만드는 맛의 수는 헤아릴 수가 없 고 그 헤아릴 수가 없는 맛이 다시 작설의 맛이 되니 작설의 맛도 역시 "무미(無味)"입 니다. 작설차의 따뜻함이 작설의 참된 촉감 일 수가 또한 없으니 작설의 감촉은 "무촉 (無觸)"입니다. 차를 끓이는 데에 법도가 있 다고 하는데 그 법도 속에 깃들어 있는 정신 의 바탕을 거슬러 올라가고 헤아려서 따져보 면 물을 끓이고 찻잎과 물을 결합시키는 것 으로 작설차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다 법은 결국 "무법(無法)"입니다. 결국 작설은 없는 것입니다. 작설이 없음 을 음미할 때에 우리는 생명의 참다운 따뜻 함과 은혜를 알 수가 있고 이 따뜻함과 은혜 야말로 작설차인 것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커피에서 작설차를 마시 고 작설차에서 커피를 마십니다. 작설차의 이름이 커피고 커피의 이름이 작설입니다. 앞으로 어떤 이름의 차가 나와도 그 차는 "무(無)"를 특성으로 하는 작설입니다. 작설 은 앞으로도 많은 이름이 나옵니다. 따뜻함 과 은혜의 원리는 끝이 나지를 않습니다. 작 설차라는 차에서 들어가서 미래에도 끝이 나 지 않고 나올 수밖에 없는 참다운 작설의 세 계를 알 수가 있습니다. 지혜로 음미되는 따 뜻한 생명의 원리는 이름이 달라진 미래의 작설을 예고합니다. "불자여, 어떤 것을 지혜 광명의 갈무리인 삼매라 하는가. 불자여, 저 보살 마하살이 이 삼매에 머물면 오는 세상의 모든 세계 모든 겁에 나시는 부처님을 알며, 이미 말하였거 나 수기를 받지 않았거나 가지가지 이름이 각각 같지 아니함을 아나니, 이른바 수 없는 이름, 한량없는 이름, 그지없는 이름, 같을 이 없는 이름, 말할 수 없는 이름들이니라." 그런데 작설은 "무(無)"이지만 작설이라는 이름과 연한 연둣빛 색상 속에서 차에 대한 음미의 세계는 보다 그 가치가 뚜렷해집니 다. 이를 "장엄(莊嚴)"이라고 합니다. 지혜로 서 작설의 참 맛인 무미를 음미하는데 작설 의 역할이 뚜렷해집니다. 이러한 장엄의 세 계를 아는 것을 장엄 대 삼매라고 합니다. "불자여, 보살이 이렇게 모든 여래의 한량 없는 빛깔과 한량없는 형상과 한량없이 나타 남과 한량없는 광명과 한량없는 광명 그물을 보나니, 그 광명의 분량이 법계와 같아서 법 계 안에서 비치지 않는 데가 없으며, 여럿으 로 하여금 위가 없는 지혜를 내게 하며, 또 부처님 몸에는 물드는 일이 없고 장애가 없 고, 가장 기묘하고 청정함을 보느리나. 불자여, 보살이 이와 같이 부처님 몸을 보 지마는 여래의 몸은 더 커지지도 않고 작아 지지 않느니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