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chaos (수리샛별) 날 짜 (Date): 1994년11월25일(금) 11시42분04초 KST 제 목(Title): 예불가(6) 네번째의 "해탈향"에서 "해탈"은 모든 장애, 고통, 어려움, 문제 에서부터 벗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생로병사를 위시해서 집착 때문 에 일어나는 개인적인 모든 문제를 고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런 문제들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로운 상태가 되는 것을 해탈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부처님처럼 훌륭한 인격자가 되려면 현재의 상태에서 부단 히 벗어나야 합니다. 쉽게 말해서 현재의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는 조금이라도 더 겸손해져야 하고, 조금이라도 더 양보하는 마 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상태에서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는 것을 삶 속에서 해탈의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는 생사해탈이 목적이라 하더 라도 작은 해탈부터 실천하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자 신을 어떤 고정된 관념 속에서 보지 말고 항상 새로운 각도로 바라 보는 안목이 필요합니다. 늘 새로운 삶을 꿈꾸며, 창조적인 태도로 매 순간을 사는 것이 해탈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그런 삶에 는 향기가 안날래야 안 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해탈을 실천하는 한 방법으로 옷입는 것 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같은 옷이라도 조금만 신경을 쓴다 면 새롭게 변화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외형적인 모습에만 신 경을 기울이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니라 면 외형적인 몸치장 또한 마음의 움직임과 무관하지 않은 것입니다 대부분 수행력이 깊은 사람일수록 마음이 그 사람을 지배하지만 수양이 앝은 사람일수록 몸이 마음을 지배하게 됩니다. 그런 사실 도 모른 채 그저 마음만 중요하고 몸은 별 것이 아니라는 식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잘못입니다. 절에 갈 때는 가능하면 가장 단정하 고 깨끗한 모습으로 가야 합니다. 단정한 몸차림이면 마음은 저절 로 상쾌해지게 마련입니다. 관세음보살의 몸치장을 보면 온갖 장신구로 장엄한 것을 볼 수 있 습니다. 또 절의 단청이나 탱화의 색깔도 대단히 화려합니다. 그것 은 결국 우리의 인격을 형상화해 놓은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관세음보살처럼 우리의 인격도 훌륭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인격이란 몸과 마음을 합하여 지칭하는 것이지 단지 마음만을 뜻 하지는 않습니다. 몸은 아무렇게나 하고 있으면서 마음이 훌륭해지 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몸이 잘 다듬어지면 마음 또 한 정된되는 게 중생의 근본 모습입니다. 하찮은 옷 하나가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는 한 가지 예로 스님들이 승복을 입고 있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승복을 입고 있으면서 아 무렇게나 행동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외모 또한 마음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해탈이란 우리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좀 더 미래지향적이고 발전 적이며, 새로운 삶을 꿈꾸고, 창조하고, 구상하며, 그것을 몸소 실 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매일 대하는 식구들도 새로운 각도에서 신 선한 시각으로 본다면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늘 새로운 모습으로 현재의 상태에서 변화 발전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일상생 활 속에서의 해탈입니다. 어떤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않고서는 공부의 진척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법회에 참석하여 뭔가 배우려는 마음을 갖는 것 이 바로 작은 해탈의 시작입니다. 그러한 마음이 계속된다면 언젠 가는 새로운 모습으로 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 가정에서부터 주부의 역할은 참으로 중요한 것 입니다. 주부의 마음가짐이나 생활태도가 밝고 행복한 쪽으로 바뀌 면 그 가정은 틀림없이 밝고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부는 항상 행복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해탈이라고 하는 것도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쉽게 실천할 수 있습 니다. 또 사람은 마음먹기에 따라 무한히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죽는 그 순간까지가 전부 자신의 인생입니 다. 그 사이를 단 일초라도 빼 버린다면 자기 자신의 전인생은 무 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한 순간 한 순간이 전부 자기의 인생이라면 매 순간을 의욕적이고 신선한 생각으로 가득 채울 수 있도록 노력 해야 합니다. 늘 향상하려고 노력하는 그 마음가짐이 바로 해탈의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삶을 긍정적이고 새롭고 밝고 맑 은 마음으로 성장시키려는 것이 진정한 해탈인 것입니다. 인간의 일생은 한 번 밖에 없는 예술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평생 을 통해 자신의 예술품을 다듬고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매 순간을 보다 아름답게 자신의 작품을 장식할 수 있도록 해탈의 의미를 되새기며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오분향의 마지막으로 "해탈지견향"은 해탈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하 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지견"은 '지혜'라는 말과도 통합니다. 아울러 "해탈지견"은 다른 모든 사람들을 해탈의 경지로 이끄는 중 생제도를 뜻하기도 합니다. 불교는 자신의 해탈과 함께 다른 사람의 해탈을 동일시하기 때문 에 전법을 통한 중생제도는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해탈에 대한 바른 이해, 즉 "해탈지견향"이란 나와 더불 어 모든 사람들의 해탈을 함께 성취하려는 교화활동을 뜻합니다. 해탈에 대한 바른 견해가 섰다면 자기 자신도 그렇게 살아야겠다 고 생각하고 바로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그래야 올바른 이해가 되 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제대로 알게 되면 자연적으로 실천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이 둘이 아닌 상 태가 되어야 합니다. 앞의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의 각각 항목이 참으로 자기 것이 되어서 하나가 된 상태가 바로 "해탈지견 향"입니다. 이상으로 오분향의 설명을 다시 정리하면 "계향" "정향" "혜향" " 해탈향" "해탈지견향"은 그 하나하나가 독립적으로 중요한 뜻을 지 니며, 그것이 또한 순서대로 실천될 때 완전한 것이 됩니다. 오분향에는 부처님의 모든 법문이 함축되어 있으며, 부처님과 모 든 수행자들이 갖춘 무량한 공덕이므로 우리도 그것을 본받아야 합 니다. 오분향을 통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궁극적으로 어떤 것인가를 배 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님들께서는 평생을 통해서 < 예불문>의 구절을 하나하나 음미하면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실제 로 오분향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오분향은 읽고 또 읽어 도 향기가 가시지 않는 그런 내용을 담고 있는 중요한 가르침인 것 입니다. 오분향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압권해 놓았다고할 수 있습니다. 계. 정.혜 삼학을 통해 해탈하게 하며, 그 해탈을 남에게 전함으로서 해탈지견이 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삼학이라 할 때의 學은 단순한 글공부가 아닙니다. "계" 를 지키고, "정"을 찾고, "혜"를 얻는 것 모두가 학인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참선하는 사람을 공부인이라고하는 것입니다. 자 기 자신이 불자라고 생각한다면 항상 공부인의 자세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세상은 광명으로 늘 빛나고있다. 광명운대 주변법계 공양시방 무량불법승 光明雲臺 周遍法界 供養十方 無量佛法僧 <옮김> 광명의 구름대 법게에 주변하여 시방의 한량없는 불.법.승께 공양 합니다. <풀이> 지혜의 광명 온 우주 법계에 충만하여 시방삼세에 한량없는 불.법 .승 삼보님께 공양올립니다. <해설> 오분향 다음으로 이어지는 위의 구절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광 명의 구름 덩어리가 온 법게에 두루 가득하여, 어느 곳에서나 헤아 릴 수 없이 많은 불.법.승 삼보께 공양을 올린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광명운대"에서 광명은 바로 진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한 마디로 진리의 세계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람직한 삶은 부처님의 말씀대로 진리에 입각하여 사는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수행이 높은 깨달은 사람은 생활 자체가 바로 진리의 구현인 것입니다. 진리라고 말하면 좀 막연하고 추상적인 느낌이 들지만 다른 말로 표현하면 바로 광명이라는 것으로 대신할 수 있습니다. 진리란 곧 광명인 것입니다. 광명은 진리를 현상적으로 나타낸 말입니다. 불교에서는 광명과 관계되는 이야기가 매우 많습니다. 경전이 설해지기 전에 먼저 광명을 놓는 일부터 시작합니다. 또 사리탑이나 스님들이 방광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쉽게 이야 기해서 법당 안에 인등을 켜는 일도 광명과 관게되느 일이며, 초파 일에 등을 다는 일도 광명인 것입니다. 광명은 곧 빛을 뜻합니다. 빛은 어둠을 밝히는 역할을 합니다. 만약 빛이 없다면 우리는 사물 을 잘 분별할 수 없을 것이며, 길을 가다가도 부딪히고 넘어져서 온통 피투성이가 될 것입니다. 빛이 없다면 이 세상은 순식간에 혼 란스러워질 것입니다. 여기에서 광명의 의미가 확연히 드러나는 것 입니다. 앞에서 오분향은 불교인의 인격 완성에서 오는 다섯 가지 덕을 말 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광명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光 은 오분법신향을 몸소 실현시키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진리에 대한 막연한 생각을 구체화시키는 것이 광명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삶이 상처로 얼룩졌던 것은 광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 혜의 광명은 항상 우리를 밝은 곳으로 이끌어줍니다. 부처님께서 <금강경>에 광명에 대한 말씀을 설해 놓은 대목이 있습 니다. 그것은 "심주어법 이행보시 여인입암 즉무소견 약보살 심불 주법 이행보시 여인유목 일광명조 견종종색(心住於法 而行布施 如 人入暗 卽無所見 若菩薩 心不住法 而行布施 如人有目 日光明照 見 種種色)"입니다. 그 뜻은 '마음을 법에 머물러 보시하는 것은 어두운 곳에 있는 사 람이 물건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고, 보살이 마음을 법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것은 눈 밝은 사람이 햇빛 아래서 여러 가지 사물을 보는 것과 같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다시 풀어서 해석해보면, 마음이 자기만의 소견과 편견과 고집과 굳어진 사상에 의해 생활할 것 같으면, 어떤 사람이 캄캄한 데 들어가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활동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마음이 만약 자기만의 고집과 편견과 아집에 집착하지 아 니하고 어떤 사물을 실상대로 진실하게 관찰할 수 있는 안목이 있 다면 그 사람은 눈도 밝고 햇빛이 환히 비춰서 아무 탈없이 다치지 않고 길을 갈 수 있는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우리들의 소견이나 고집, 편견들은 결코 지혜가 아니며, 슬기도 아니며, 빛이 아닙니다. 사물이나 감정, 사건 등을 실상대로 간찰 할 줄 아는 밝은 눈이 열릴 때 우리의 삶은 참으로 환한 광명의 삶 이 될 것입니다. 밝은 눈이란 바로 깨달음의 슬기요, 지혜의 빛인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도처에서 깨달음의 안목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삼라만상의 일어나는 일체의 모습을 삿쏛대로 파악하는 광명 의 눈을 가지는 것을 뜻합니다. 광명의 눈이 있다면 아무리 멀고 험한 길이라도 상처받지 않고 목적한 곳에 다다를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은신 진리의 말씀은 곧 지혜의 광명에 대한 것임 을 명심해야 합니다. 불교의 의식 가운데 촛불을 켜고 등에 불을 밝히는 의미는 모두 지혜의 빛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광명입니다. 앞에서 오분법신향으로 무장한 사람은 광명스러운 삶이라고 했습 니다. 그런 사람은 엄청난 밝기로 이 세상을 비추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 빛을 따라 밝은 곳으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엄경>에서는 부처님의 광명을 "유여천일출(猶如千日出) "이라고 하여 '마치 천 개의 태양이 동시에 뜨는 것과 같다'고 했 습니다. 부처님은 참으로 밝은 완벽한 과영의 화신인 것입니다. 부 처님께서는 오랜 세월을 걸쳐서 우리에게 올바른 삶의 빛을 비춰주 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나마도 지금까지 별 일 없이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자 기의 앞길만이라도 비출 수 있는 지혜의 등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것마저 없다면 이리 저리 부딪혀서 큰 상처를 입게 될 것입 니다. 그러한 모습들을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빛을 잃어 어둡고 캄캄한 세상은 우리에게 치명적인 상처만 남길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분법신향이 각자의 마음 속에 원만히 상숙되어 광 명을 밝히는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광명을 우리의 육신으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바로 웃음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참으로 밝게 웃는 모습은 광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웃는다는 것은 밝은 인상을 말합니다. 밝은 인상으로 환하게 웃는 모습은 옆의 사람까지 기분 좋게 만드는 일입니다. 반대로 무겁고 침울한 표정은 옆사람까지 칙칙한 기분을 안겨 줍니다. 그것은 진 리의 세계에서 위배되는 일입니다. 진리를 우리의 생활 속에서 승 화시킬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 바로 웃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웃음을 절대 잃지 말아야 합니다. 출근할 때 웃고, 퇴근 할 때 한 번 웃어주는 것보다 더 귀하고 값진 선물은 없는 것입니 다. 웃음이라고 해서 실없는 사람처럼 히죽히죽 웃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광명을 몸소 실천하는 사람은 온몸 전체에서 행기 로운 웃음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광명운대"에서 운대는 구름 덩어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주변법 계"는 법의 세계에 두루두루 펼쳐져 있다는 말입니다. 흔히 세속적 인 표현으로 지구 전체를 나타내는 말을 세계라고 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온 우주를 통틀어서 법계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밤 하늘에 반작이는 별들의 세계는 물론 텅빈 공간까지를 전부 합하여 법계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법이라고 하는 것은 곧 진리의 세계 를 일컫는 것이므로 온 우주가 모두 진리의 세계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 어디에도 진리가 없는 곳은 없다고 해서 법계 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일화 한 가지를 소개하겠습니다. 어떤 스님이 개 신교 목사와 함께 우연히 기차 안에서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목사는 자신의 하나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라고 하여 없는 곳이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스님은 그럼 변소에도 하나님 이 있겠다고 말했더니 목사는 발끈하여 화를 냈다고 합니다. 어떻 게 신성한 하나님이 변소간에 있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세계는 어디에도 없는 곳이 없습니다. 진리가 어느 한 곳에만 있다면 그것은 이미 진리가 아닌 것입니다. 진리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평등하게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변법계 "는 진리의 구름 덩어리가 온 법계에 두루 가득하여 없는 곳이 없 다는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