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chyoo (문사수) 날 짜 (Date): 1997년07월23일(수) 09시24분17초 KDT 제 목(Title): 부처님은 욕계천에서 나옵니다. 다손님의 글을 보니 역시 관점 조차 제대로 잡혀있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나오는 곳은 욕계천입니다. 욕계 삼천인 도솔천에서 내려오는데 욕계 3천인 도솔천은 욕망을 스스로 만족하는 곳입니다. 그 곳에서만이 해탈과 열반이 가능합니다. 색계와 무색계로 들어가면 해탈은 커녕 해탈의 가능성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중생 33 계에 대한 설명에 자세하게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계에서 욕계천으로 가면 수명이 보통 인간나이 50년이 하루로 1000년, 다음이 인간나이 200년이 하루로 2000년 정도의 수명이 되고 욕계천을 벗어나 색계천으로 가면 수명이 겁 단위로 뛰기 시작하여 한 단계 수행과위가 한단계씩 올라갈 수록 거의 배의 배수씩 수명이 늘어납니다. 이 수명이 늘어난다는 것은 수행을 해서 과위가 올라가면 갈 수록 해탈에서는 점점 멀어진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해탈은 인간계에서 한 단계도 벗어나지를 않아야만이 가능합니다. 인간계에서 그 아래로 가도 해탈에서 멀어지고 인간계에서 그 위로 가면 갈 수록 해탈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다손님께서 해탈을 하시긴 하셨지만 그것은 다손님의 해탈일 뿐이지 부처님의 해탈이 아닙니다. 화엄경을 이야기를 하는데 화엄경 십지품은 한 단계에서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마도 화엄경을 보신 것이 아니라 엉터리 학자들의 화엄 철학서를 보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법비가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비를 무릎까지 먼저 맞고 다음에 허벅지까지 맞고 다음에 가슴까지 맞고 그 다음에 머리까지 맞는다고 하는 것은 화엄경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화엄경의 십지품은 법비를 맞는데 온 몸으로 맞으면서 처음에도 온 몸으로 비를 맞고 그 다음에도 온 몸으로 비를 맞고 그러다 끝내 온 몸이 흠뻑 젖어드는 것입니다. 온 몸이란 지옥에서 비상비비상천 까지의 중생 33 계가 한꺼번에 법비에 젖어드는 것입니다. 다음에 소승 4 과의 아라한은 법과 둘이 아닌 경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법과 둘이 아니라는 것은 진리 그 자체라는 것으로 대승에서 말하는 해탈이나 열반과 하나도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대승에서 아라한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바로 다손님께서 이야기를 하신 그와같은 사고방식과 관점으로 해탈을 오해하게 되기 때문에 대승에서 패기처분한 것입니다. 색계나 무색계는 욕계보다 높은 것이 아니라 해탈에서 더욱 멀어지고 있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손님이 관점을 잡는데 도움을 드리기 위하여 다시 이전에 했던 말을 다시 상기해보면 불교경전은 진리아닌 것을 이야기하고 해탈 아닌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지 진리나 해탈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해탈이나 열반 혹은 진리는 목적이 될 수도 없는 것이고 수행의 결과도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설할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지만 아닌 것은 말하고 아닌 것에 대하여는 논리전개가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경전을 보시면서 이거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면 빨리 "아이쿠! 경전 잘 못 보았구나"라고 아시면 됩니다. 어려운 것은 아니나 또한 대충대충 이거다는 더욱 아닙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