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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V ] in KIDS
글 쓴 이(By): riceworm (@~쌀벌레~*)
날 짜 (Date): 2002년 4월 17일 수요일 오전 11시 39분 42초
제 목(Title): <4.21이제는...> "망각의 전쟁 - 황해도 신



저는 지난주 편 볼 때 꾸벅꾸벅 졸면서도 그 장면장면이 참 기억에 남더군요.
편집을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공판받으러 나갈때 '독재타도'를 외치던 그 모습.
노오란 색 필터를 끼운듯한, 또는 오래된 역사책의 한페이지 같은 느낌을 
주던...

역시 다큐멘터리도 옷을 잘입어야 대중에게 어필하는듯 합니다.



1. 프로그램명 :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망각의 전쟁 - 황해도 신천 사건 -" 

2. 방송일시 : 2002년 4월 21일 (일) 23:30 ∼ 00:25 

3. 주요 내용 

살면서 그런 안개는 처음 봤어. 
느닷없이 발 밑도 잘 안 보일 정도로 잿빛 안개가 끼었어. 
그런데 해가 뜨고 안개가 서서히 걷혀서 보니 시체가 얼마나 많은지... 
- 신천 출신자 인터뷰 중. 

■ 남과 북의 엇갈린 증언! 미군 학살인가, 반공 의거인가 

1950년 10월 황해도 신천. 
분명히 그 곳에서는 수많은 민간인들의 학살이 있었다. 
하지만 전란 속에서 벌어진 그 희생에 대해서 남과 북은 서로 상반되는 견해를 
보이며 아직 정확한 사실 관계조차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 전장의 바깥에서 
이루어진 민간인들의 대규모 희생. 한반도에서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극단적으로 
치달았던 시기, 신천에서는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남북 생존자들의 
증언과 신천에 들어간 미군의 인터뷰, 남북한 전사 기록과 
미국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굴한 문서들을 통해 황해도 신천 사건의 실체에 
접근해본다. 

■ 저는 신천군 화약 창고에서 살아 나온 000입니다. 

"서울을 탈환한 미군들이 38선을 넘어와 10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52일 동안 
신천군 주민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35,383명의 무고한 양민을 잔인하게 
학살했다." 

지난 해 11월 조선중앙방송에서는 황해도 신천군에서 6.25 전쟁 중 살해된 
것으로 보이는 59구의 유해가 새로 발굴됐다고 발표했다. 이것은 1950년 10월 
유엔군의 북진과 함께 신천 지역에 주둔했던 미군이 저지른 학살의 
증거라는데... 과연 한국전쟁 중 신천에서 미군은 또 한번 노근리에서와 같이 
무고한 민간인들에게 총구를 겨눴는가? 학살 사진들과 희생자들의 유품을 
전시한 북한의 <신천 박물관>, 유해 발굴 당시 북한의 중계 방송 장면, 당시 
학살 현장에서 생존했다는 북한 주민들의 현지 증언을 직접 들어본다. 

■ 방송 사상 최초 인터뷰! 신천 출신 봉기 가담자가 전하는 신천의 비극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는 노동당과 인민군에 대항한 우익 지하조직과 
신천군민의 저항이며 반공투쟁 사건이다." 

신천 출신 월남자들은 북한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국군과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진을 시작하자 전세가 
불리해진 공산군들은 지주, 성직자를 포함한 우익 반동분자 들을 처형했다. 
이에 공산당에 반대하는 우익 청년들은 10월 13일을 기해 반공 봉기를 
일으킨다. 토지 개혁으로 인해 이미 지주와 소작인의 갈등이 심화되어 있었던 
신천에서 좌·우익의 충돌은 예견되어 있었다. 그로부터 남북한 양쪽의 어떠한 
공권력도 들어서지 않았던 두 달간, 신천의 모든 치안은 봉기를 일으킨 반공 
청년들의 손에 맡겨졌다. 곧 이은 빨갱이 색출 작업. 밤낮으로 좌우익의 
주도권이 바뀌는 혼란의 시기. 기준도 없는 이념적 잣대에 가족도, 친구도, 
이웃도 지켜줄 수 없었던 상황. 당시 봉기에 직접 참여하고 치안대 활동을 했던 
신천 출신자들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 최초 공개! 미국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굴한 신천 사건 관련 문서들 

수많은 희생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남북한간에 교집합을 찾을 수 
없었던 황해도 신천 사건. 제작진은 한국전의 또 다른 축인 미군 부분에 대한 
확인에 들어갔다. 육군전사를 비롯한 각종 한국전 자료에 따르면 당시 유엔군 
북진시 신천 지역에 들어간 부대는 24사단 19연대. 북한이 주장하는 학살의 
주범 미군 해리슨을 찾는 작업과 함께 뉴욕에 있는 미국국립문서보관소에서 
24사단 19연대의 전쟁 일지를 확인했다. 월남자들이 주장한 10월 13일의 
반공봉기는 미국 문서에서 '만세 사건' (Mansai affair)으로 기록되어 있었고, 
또한 당시 24사단에서는 '민간 업무' (Civil Affairs)라는 이름으로 당시 
신천의 봉기군 사령관의 이름과 인구수까지 파악이 되어 있었다. 한국전 당시 
모든 지휘권을 넘겨받았던 유엔군. 그들은 공권력 부재의 한 마을에서 있었던 
학살 사건에 대해 어느 정도의 책임이 있는가. 그리고 한국전에 임했던 
미군들의 태도 는 어떠했나. 24사단 19연대 소속이었던 미군의 인터뷰를 통해 
들어본다. 

■ 남겨진 이야기 

제작진은 프로그램 준비 기간 중 적지 않은 취재의 어려움을 겪었다. 우선 
사건의 참여자이며 목격자인 신 천 출신자들은 반세기를 지배하고 있는 
냉전의식과 공포감에서 아직도 자유롭지 못했다. 북한에 남아 있는 가족들에 
대한 염려, 본인의 안전에 대한 위기감으로 많은 신천 출신자들은 출연을 
거부했다. 그리고 어렵게 출연을 허락하신 분들도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 꿈에도 그리는 고향이지만 이산 가족 방북 신청도 하지 않았다는 
그들에게 지난 전쟁은 단순한 역사적 사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로 남아있었다. 




      v v
    ..@"@..            나비가 되고픈 푸른 애벌레의 꿈이여
     ((~))
      (  )                        하늘에 닿고픈 미물의 욕심이여......
     (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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