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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V ] in KIDS
글 쓴 이(By): charhyna (Penelope)
날 짜 (Date): 2002년 4월 17일 수요일 오전 10시 51분 47초
제 목(Title): [폄] 명랑소녀 성공기 완전 분석


대중문화 평론가 강명석 님의 글이라는 군요.
보면서 오오옷 하고 느껴지는게 있어서 이곳에도 퍼옵니다.
글이 쓰여진 시점은 4월 2일경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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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플크라운] 근대 트랜디 - 명랑소녀 성공기
 
 
요즘 SBS '명랑소녀 성공기'가 난리다. 순식간에 시청률 30%대를 넘어섰고, 그덕에
MBC '선물'은 물론 위태위태하나마 버티고 있던 '명성황후'마저 타격을 입었다.
불과 4회 방송만에 말이다. 이는 KBS '겨울연가'의 인기를 넘어서는
것이고(개인적으로는 '겨울연가'가 상대적으로 과대평가된 면이 많다고 생각한다),
신인으로서 더 이상 오를데가 없었을 것 같았던 장나라의 인기는 이제 그 한계가
어디인지 궁금할 정도로 치솟고 있다. 김희선을 내세웠던 '토마토'이후로, 이렇게
단시간내에 이정도의 반응을 보인 드라마는 오랜만이다. 그리고 이 드라마로 인해
'팝콘'이후 침체에 빠졌던 트랜디 드라마 콤비 장기홍PD와 이희명작가역시 확실히
재기에 성공했다.
 
 
 
하지만 이렇게 정신없이 인기가 치솟다보니 정작 '명랑소녀 성공기'라는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는 하기 힘든 상황이 되고 있는 듯 하다. '명랑소녀' 장나라와 상대역
장혁에게는 포커스를 맞춰도 '황당무계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는 이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는 그냥 '재밌는 드라마' 한마디로 넘어간다고 해야할까. 하긴 이
드라마의 연출자와 작가들이 지금까지 스토리의 현실성이나 개연성은 몽땅 무시한
드라마들을 '전문적'으로 만든데다가 그중에는 표절시비가 인 작품까지 여럿
있었으니 그럴만도 하다. '명랑소녀 성공기'가 부잣집 남자 - 가정부라는 설정만이
같음에도 불구하고 '꽃보다 남자'와 표절시비에 오른 것은 어느정도
'자업자득'이라고 해야할지도 모른다.
 
 
 
명랑한 소녀가 등장하다
 
 
 
하지만, '명랑소녀 성공기'는 그냥 그렇게 넘어가기에는 상당히 찜찜한(?)
드라마다. 이 드라마는 지금까지 방송된 트랜디 드라마들과는 매우 다른 출발점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분명히 전체적인 구도는 신데렐라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신분상승을 이루는 방법은 기존의 트랜디 드라마와 정반대다.
 
 
 
우선 차양순(장나라)이라는 캐릭터를 보자. 그녀는 기존 캐릭터 드라마의
여주인공과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저 밝고 씩씩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런
캐릭터는 이전에도 있었다. 당장 MBC '선물'만 해도 혜진(송윤아)이 그런 모습을
보여주니까. 하지만 혜진과 양순이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하나 있다. 혜진은
씩씩하지만 경식(손지창)앞에서는 다른 사람들앞에서와는 달리 매우 얌전해지고
의존적인 여성으로 변한다. 그도 그럴 것이 경식은 혜진의 '교수님'으로서 보다
높은 위치에 있고, 동시에 아무런 '대가'없이 혜진을 이끌기 때문이다. 아무리
재능이 있다지만 자신의 사무실을 내주면서까지 작업을 도와줄정도로 호의를 보이는
남자를 만나기란 쉽지 않으니까. 일방적인 관계이기 때문에 혜진은 평소 자신의
캐릭터를 버리고 '왕자님 앞의 신데렐라'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리
캐릭터가 당차고 씩씩해도 그것은 그녀의 '개인적'인, 가족이나 친구에게나 통할
캐릭터이지 '사회적'인 캐릭터는 아니다.
 
 
 
하지만 양순은 정반대다. 그녀는 가족과 친구들에게는 상당히 싹싹하고 착한
캐릭터다. 하지만 기태(장혁)에게는 단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는다. 일은 일대로
하지만 그외의 것에는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다. 특히 가정부를 그만두게 된 뒤에는
아예 대놓고 기태에게 대든다. 일개 가정부'였던' 여자가 기업체를 이끄는 젊은
갑부에게 대든다? 대체 어떻게? 그건 양순과 기태의 관계가 철저한 '계약'관계에
놓여있는 사이이기 때문이다.
 
 
 
양순이 가정부로 들어가는 이유는 부모가 진 빚을 갚기 위해 가정부로 일한다는
계약 때문이고, 양순이 기태의 집에서 일할때도 철저하게 계약조건에 따라
움직인다. 보통의 트랜디 드라마라면 마음에 안든다는 이유로 단번에 잘라
버리겠지만, 이들은 서로 맺은 계약만큼은 철저하게 존중한다. 기태는 '삼진아웃'
제도를 만들어서 양순이 이것을 어길 경우 내쫓겠다고 말하고, 또 양순은 자신이
기태가 여는 이벤트의 주인공이 되는 조건으로 기태에게 아침 일곱시에 밥을 먹을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망나니인줄 알았던 기태는 '의외로' 그것을 무시하지 않고
계약을 지켜나간다. 또 양순은 갚을 돈을 모두 마련하자 계약종료를 알리며
가정부를 그만둔다. 양순이 기태에게 끌려서 가정부를 계속 한다든가, 기태가
양순을 억지로 잡아두는 일같은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절대로' 움직일 수 없는
계약하에 놓여져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인은 계약앞에 평등하다
 
 
 
그렇기 때문에 양순과 기태는 서로 좋아할 '필요'가 전혀 없다. 기존의 트랜디
드라마가 주인공들의 갈등과 사랑을 우연한 만남과 서로에 대한 이끌림이라는
요소로 만들어냈다면 이 드라마는 철저하게 계약으로 움직이니까. 그외의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일 뿐이고, 남에게 자신의 감정을 쉽사리 표현할 수도 없다.
아무리 기태가 양순을 속으로 좋아한다 해도 무턱대고 그것을 표현할 수는 없다.
철저한 계약관계라는 것은 반대로 계약적인 부분을 제외하면 철저하게 '평등'하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서로 평등한 사이에서 일방적인 호의를 주고 받는다는 것은 다시
지배-굴종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명랑소녀'를 '현모양처'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태는 자신의 호의를 양순이 눈치채지 못하게 전달하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려야하고, 그 방법은 역시 계약을 통해서이다. 쉽게 "너 하고 싶은대로 해"라고
하는 일은 절대로 없다. 양순을 편하게 하기 위해 아침을 먹을때도 양순의
계약위반을 들먹이고, 가정부를 그만둔 양순을 자신의 집으로 부르기 위해 자신이
산 양순의 집에 대한 매매 계약을 들먹인다. 아무리 마음이 있어도 '평등'한
상대에게 그것을 표현한다는 것은 매우 조심스러운 일이 될 수 밖에 없다. 상대는
나보다 가난할뿐 거지도 아니고, 모든 면에서 나와 평등한 존재니까. 자기가 좋다고
상대방의 의사는 묻지 않은채 '퍼다주는' 것은 어떤면에서는 인격모독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계약에 얽힌 이런 둘의 관계는 드라마의 중심을 이끌어나가는 재미, 즉
티격태격 싸우는 둘간의 감정싸움과 근래들어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를 가진 이들의
캐릭터를 만들어나가는 요소로 작용한다. 한쪽이 유리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계약을
맺어야하니 그 '협상'의 과정 사이에서 새로운 싸움이 벌어질 수 밖에 없고, 평등한
존재에게 '약점'을 잡히지 않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때론 일부러 못된척,
일부러 심술궂은척 해야한다. 양순의 입장에서도 계약관계에 있는 상대방에게
약점잡힐 필요없고, 계약관계를 뺀다면 평등한 상대에게 약한 모습 보여줄 필요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양순은 기태에게 틈만나면 대들면서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게 되고, '부잣집 도련님'에게 사투리를 섞어가며 할말 다하는 양순의
캐릭터와 사실은 착하고 여린면도 있지만 계약관계에 있는 양순을 잡아두기위해
'못된척'을 해야하는 기태의 캐릭터는 상당히 매력적이다. 시청자들, 그리고 그들
스스로도 서로의 감정을 잘 알고 있지만(양순은 1년만에 기태가 좋아하는 야구를
상당한 솜씨로 익히게 되고, 심지어 기태는 청혼할 생각까지 한다), 이들은
계약관계에 있기 때문에 서로 '협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계약은 공적인 것이고
감정은 사적인 것이니, 사적인 감정 때문에 공적인 계약을 무너뜨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양순은 기태앞에서 '명랑'해질 수 있다. 양순이 기태에게 대드는 대부분의
장면들은 모두 기태가 계약을 어기려고 할 때나 계약을 이용해 양순을 꺾으려 할
때, 그리고 계약과 상관없이 양순의 사적인 부분에 간섭할 때 생겨난다. 정말
그렇지 않은가. 계약과 상관없는 학교생활에서 '삽질'하고 있는 양순에게 기태가
빈정거릴 자격은 전혀 없고, 양순은 그런 기태에 대해 쏘아붙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왕족과 시민이 만나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런 계약관계의 모습이 하필이면 가정부-부잣집 아들이라는
설정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아마 '명랑소녀 성공기'를 비판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출 듯 싶기도 한데, 그만큼 '시골에서 상경한
가정부'라는 설정은 요즘과는 어울리지 않는 설정이다. 게다가 기태와 양순을
둘러싼 이들의 환경은 더욱더 이상하다. 가정부와 기사가 존재하고, 그들은 철저한
'아랫것'으로서 사장(이혜숙)처럼 마음씨 좋은 인물을 만나면 그래도 좋지만
나희(한은정)처럼 성격 더러운 인물을 만나면 온갖 멸시를 당해야한다(그대신
계약관계가 끝나면 록바에서의 싸움처럼 '평등'하게 주먹다짐을 할 수는 있다).
 
 
 
그들의 세계는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고, 동시에 뚜렷하게 '신분'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기태-양순을 중심으로한 부자-가난한자의 세계뿐만 아니라 기태를
중심으로한 부자들의 세계에서도 드러난다. 기태와 나희는 어린시절부터 결혼하기로
약속되어 있는 상태고, 준태(류수영)와 그의 아버지(나한일)는 속마음과는 상관없이
철저하게 기태와 나희집안을 위해 봉사해왔던 존재들이다. 그리고 기태는 마치
왕자님처럼 회사를 이어받는 것이 '당연한'것처럼 되어 있었고, 동시에 그는 늘
준태를 비롯한 자신들의 '신하'들에게 떠받들려진다. 단지 창업주라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즉, 이 드라마는 현대를 모델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중세 유럽에 가까운
설정을 가지고 있는 드라마인 것이다. 신분이 철저하게 나뉘어져 있고, 기득권은
다시 왕족(기태-나희)과 귀족(준태와 그의 친구)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이들은
철저하게 그것을 지키고 산다. 기태는 태어날때부터 왕족이기 때문에 경영자로서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성격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왕족과 함께
나라(화장품 회사)를 지배할 운명인 것이고, 반대로 준태와 그의 아버지는 그들을
보필하는 신하의 입장이기에 뛰어난 능력과는 상관없이(드라마상에서 준태는
악역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매우 뛰어난 두뇌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평생 신하로
지내야 한다. 준태가 기태에 대한 증오를 키우는 이유는 단지 그가 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기태가 창업주의 아들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부와 여자를 모두 가지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누구는 아무리 노력해도 들러리일뿐인데 누구는 물려받은
절대왕권('황후'의 제조법)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영광을 가진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찬탈'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태와 양순은 현재 한국을 살아가는 인물들이 아니라 중세 유럽의
왕족과 '시민'에 가깝다. 분명히 양순은 기태에 비해 열등한 위치에 놓여있고,
왕족도 될 수 없으며, 준태처럼 찬탈할 수 있는 기회도 없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혁명을 하거나 계약을 통해 하나씩 불합리한 점들을 고쳐나가는 수밖에 없다.
시민은 신분적으로는 왕족을 이길 수 없지만 그대신 '실력'이 있다.
 
 
 
시민이 자신이 가진 실력으로 하나씩 자신에게 유리한 계약을 만들어나갈 때 시민은
왕족과 평등해질 수 있고, 동시에 왕족에게 자신의 가치를 인식시킬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왕족의 천품과 시민의 실력이 결합해 새로운 시대로 움직이는 근대의
탄생과도 연결된다. 스토리가 진행됨에 따라 양순은 기태를 위기에서 구해줄
것이고, 기태는 그 '대가'로 양순의 신분을 상승시켜줄 것이다. 이는 왕족의 권위와
시민의 재력과 능력이 합쳐져 중세를 뚫고 근대로 나아갔던 유럽의 그것과 흡사한
형태다. 시민이 왕족에 도움을 주면 그 시민은 시민이면서도 'Sir'가 될 수 있듯,
양순은 자신의 능력을 통해 정정당당한 '계약'으로 한국의 '귀족사회'에 진입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명랑소녀 성공기'에서 기태가 양순에게 반하는 초반의 몇 장면에서도
나타난다. 기태가 양순을 보고 반하는 첫 번째 계기는 양순이 이벤트의 주인공으로
갑자기 달라진 모습을 선보였을때다. 물론 이것은 전형적인 전개다. 하지만
중요한건 이때 기태가 양순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무시하고
살아왔던 존재가 알고보니 자신에게 도움이 되고, 동시에 가꾸기에 따라 매우
달라질 수 있는 존재였던 것이다. 또한 기태는 무의식중에 이미 양순의 가치를
알아보았고, 동시에 이벤트중에 양순에게 가장 어울리는 옷을 골라서 입히기도
한다. 그는 성격도 좋지않고 아직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가치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걸 꾸밀줄 아는 '타고난' 성품이 있는 것이다. 또한 기태는 양순이 빨래를 너는
장면에서 양순에게 끌리기 시작한다. 양순이 뭔가 우아하고 분위기있는 행동을
하는데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일상적인 행동에서 매력을 느끼는
것이다. 이는 '왕족'인 기태가 '시민'인 양순의 매력을 새롭게 발견한 것에 가깝다.
왕족으로서는 전혀 알 수 없었던 세계가 펼쳐지면서 왕족을 시민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I love base ball !
 
 
 
그리고 이런 양순과 기태의 관계, 시민과 왕족의 계약관계는 다른 캐릭터들을
구성하는 방법에 다시 확장되어 적용된다. 처음 이 드라마에서 어떤 분명한
캐릭터를 가지고 있는 것은 양순과 기태, 그리고 준태뿐이었다. 그 외의 모든
인물들은 모두 '배경'같은 존재였다. 다른 트랜디 드라마들이 처음부터 여러
조연들을 주연과 만나게 하고, 그때부터 어떤 캐릭터를 만들어내면서 그들이 모이는
과정에 초점을 둔다면, 이 드라마는 이미 인물들은 모두 '배경'처럼 모아둔채 그
'배경'들이 양순과 기태를 중심으로 점점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에 초점을 두고
있다.
 
 
 
첫회에서의 나희나 기태의 또다른 친구, 혹은 주수봉(권해효)이나 보배(추자현)같은
인물들이 어떤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는가? 나희는 그저 머리가 빈
철없는 여성일뿐이었고, 주수봉은 왜 나왔지 싶을 정도로 비중이 미미했으며,
보배는 그저 양순의 돈을 뺏으려는 불량학생일 뿐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은 양순과 기태의 세계로 나뉘어져 그 속에서 점점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기태와 결혼을 예정에 두고 있던 나희는 기태에 대한 집착을 서서히
보여주면서 자연스럽게 양순과 적대관계를 이루게 되고, 보배는 알고보니
석구(윤태영)의 동생으로서 결국 양순의 친한 친구가 된다. 기존의 트랜디
드라마들이 먼저 전체적인 세계를 보여주고, 모든 갈등과 애정관계를 한꺼번에
드러낸다음 사건을 진행시킨다면, '명랑소녀 성공기'는 양순과 기태에 한정되어있던
세계가 이들의 움직임에 따라 점점 넓어지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드라마는 쓸데없이 조연 캐릭터를 잡고, 그들에게 대사를 주는 시간을 허비하는대신
양순과 기태와의 사건 중심으로 드라마를 이끌고 나가면서 자연스럽게 다른
캐릭터들을 만들어나간다.
 
 
 
그렇기 때문에 이 드라마속의 조연들은 그저 조연이라기 보다는 '롤 플레이어'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나희와 준태는 각각 양순과 기태와의 관계 때문에
확실한 악역을 담당하고, 거친 성격을 가지고 있는 보배는 양순을 만나게 되면서
그녀를 도와주는 역할을 하며, 주수봉같은 인물은 그들의 '팀장'으로서 두뇌의
역할을 한다. 또 양순의 부모는 매우 무책임한 '도둑'의 역할이다. 양순을
중심으로한 세계는 도둑, 운전사, 거친 학생, 그리고 시민이면서도 왕족의 일을
돕는 실무진으로서의 중간계층등 정해진 직업에 따라 캐릭터가 나눠지고, , 기태의
세계는 같은 왕족이거나 귀족이면서 각자의 대립관계에 따라 캐릭터가 결정된다.
캐릭터에 얽메여서 모든걸 처음부터 설명하려하기 보다는 뚜렷한 두 주연 캐릭터를
중심으로 사건을 만들어나가고, 그 사건에 따라 다른 캐릭터들을 만들어가기에
스토리는 매우 스피디하고, 캐릭터는 오히려 더욱 뚜렷해진다. '머릿수' 채우러
나온 것이 아니라 각자 자신들이 맡은 역할이 있으니까 말이다.
 
 
'명랑소녀 성공기'에서 이 월드컵 시즌에 기태와 양순 모두 축구가 아닌 야구를
들고 나온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기태가 양순의 청혼을 위해 자신의 집에
홈플레이트를 만들어두었듯, 야구는 타석의 타자가 주자를 집으로 불러들일 수 있는
운동이다. 대부분의 운동들이 자신이 직접 득점을 올린다면, 야구는 타인이 자신을
불러들일 수도, 혹은 자신이 타인을 데려올수도 있는 운동인 것이다. 이는 기태가
양순이 힘을 합쳐 결국 목적을 이루고 가정을 이루게 되는 모습과 유사하다. 또한
야구는 동시에 각자의 포지션이 분명하게 정해져 있는 스포츠라는 점에서 이
드라마의 캐릭터들이 가진 각자의 역할과 비슷한 모습을 띄고 있다.
 
 
 
올해 최고의 극본?
 
 
 
또한 이 드라마의 각본은 위의 요소들을 최대한 잘 살리면서 일반 트랜디 드라마의
전형을 깨나가는 구성을 보여준다. 기존의 트랜디 드라마들은 거의 모든 스토리가
어떤 한 기간안에 결정나는 것을 기본으로 했다. 만약 많은 시간이 흐른다면 그것은
작품의 후반부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과감하게 4회가
끝나고서 1년이라는 시간을 건너뛴다. 트랜디 드라마가 속도감이 있는대신
지나칠정도로 비슷한 사건들이 반복되면서 처음의 신선했던 남녀관계가
진부해지는반면, 이 드라마는 스토리를 한창 진행시키다가 그 상태에서 1년을
건너뛰면서 다시 양순과 기태의 인물관계를 시작하도록 하고, 동시에 그들이 서로에
대해 생각하고, 서로를 발전시킬 수 있도록 만든다.
 
 
 
1년이 지나도 기태는 양순을 잊지 못하고, 양순은 기태의 회사에 입사해서 야구를
배우면서 서로 더욱 가까워질 계기를 마련하게 되고, 동시에 기태가 한번 몰락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불과 1-2개월의 시간을 두고 위기와 해결이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준태가 1년이라는 시간동안 기태를 서서히 몰락시켜
나가면서 스토리의 반전을 이뤄내는 것이다. 기존의 트랜디 드라마들은
기업드라마의 형식을 띄고 있었어도 위기가 닥쳐오는 것은 여주인공들일뿐(이
드라마의 연출자와 작가가 만든 전작들이 특히나 그랬다), 그 회사의 위치나
'왕자님'의 위치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정말로 기태를 한번
몰락시킴으로서 6회이후 새롭게 기태와 양순이 출발할 수 있게 만들면서 다시한번
스토리에 추진력을 붙이게 되고, 동시에 위기가 아무리 닥쳐도 매번 주인공들이
승리하는 도식적인 트랜디 드라마의 틀에박힌 구성을 깨버린 것이다. 보통 트랜디
드라마가 6회가 지나면 점점 엇비슷한 '이벤트'들이 벌어지고, 그것을 방해하는
세력과 주인공들간의 경쟁이 반복되면서 탄력을 잃어가는반면 '명랑소녀 성공기'는
반대로 드라마의 중반부에서 '처음부터 다시'를 외치는 것이다. 주인공의
몰락이라는 설정은 매우 신선하고, 동시에 이는 양순이 보다 당당하게 기태와의
관계를 정립할 수 있는 요소가 될 것이다. 시민이 왕족에게서 작은 권리를 요구하는
것 정도가 아니라, 시민이 새로운 왕조의 '개국공신'이 되는 것이다.
 
 
 
나라짱과 TJ가 만들어나가는 근대 트랜디?
 
 
 
또한 이 드라마의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하는 장나라와 장혁의 연기역시 볼만하다.
놀라운 재능을 갖춘 현모양처형의 착한 여주인공 - 모든 것이 완벽한
남주인공이라는 등식을 뒤집은 이 드라마에서 장나라와 장혁은 그 독특한
캐릭터들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이미 예고편부터 화제를 모았던 장나라의 사투리
연기는 그 사투리가 정확하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장나라에게 '맞춘'
사투리를 구사한다는 점에서 대단한 것이다. 그녀의 사투리는 마치 그녀만이 가진
것인 듯, 매우 자연스러운 억양을 가지고서 충청도 사람의 고정적인 이미지, 즉
조금 답답하고 느린 듯 하면서도 사실은 그 무심한듯한 말투속에 상대방을 질리게
하는 고집과 대찬 성격의 캐릭터를 표현하고, 장혁은 비뚤어진 부잣집 아들과
알고보면 착한 성품을 가진 순진한 남자의 모습을 위악적인 연기와 조금은 어색한
듯 웃는 표정연기를 통해 잘 소화하고 있다. 이들은 트랜디의 전형을 벗어난
인물들의 이미지를 정확하게 연기함으로서 오히려 새로운 트랜디드라마 캐릭터의
전형을 만들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 언급한 '명랑소녀 성공기'에 대한 이야기들은 사실이 아닐수도
있다. 작가가 어떤 생각으로 극본을 쓴 것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고, 작가는 그저
'본능적'으로 드라마를 썼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쩌면 작가는 중세 유럽역사에는
전혀 관심도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실제로 그렇다 하더라도
이 드라마는 매우 '근대적'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언급한 이 드라마의 요소들을
모두 조합해보라. 그것은 철저하게 한국의 이전 트랜디 드라마, 특히 이희명 작가
자신이 만들어낸 트랜디 드라마의 형식을 모두 깨나가는 것이다. 남녀 주인공의
캐릭터는 물론이고 캐릭터의 형성과정, 사건전개 모두 한국 트랜디에서 보여준
전형적인 요소들과 모두 반대되고 있고, 그것은 지금까지의 설정만 현실적인 트랜디
드라마에 비해 오히려 더욱 현실적이다. 계약관계에 따라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여주인공, 그리고 자신의 성품에 상관없이 그것을 존중하는 남성 캐릭터의 모습이나
'절대왕권'인줄 알았던 남자 주인공의 위치가 여지없이 흔들리는 설정은 이전의
어떤 트랜디 드라마들보다 신선하고, 동시에 정치적으로도 보다 올바르다.
 
 
 
지금까지의 트랜디, 특히 이 드라마의 제작진들이 만들었던 예전의 트랜디
드라마들이 중세의 것이었다면, '명랑소녀 성공기'는 근대 트랜디 드라마다. 그것의
외양이 비록 만화를 능가하는 비현실성과 우연으로 가득한 스토리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지라도, 이 드라마는 그 만화적인 재미속에 '근대 트랜디'의 정신을
(적어도 지금까지는)담아내고 있다. '명랑소녀'라는 제목부터가 그렇지 않은가.
한국의 트랜디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이 '명랑소녀'라는 것은 엄숙함과 신성이
지배하던 중세에서 인간의 유쾌한 웃음, 즉 명랑함을 발견해낸 사람들의 작업과
비슷한 것일지도 모른다. 과연 '명랑소녀 성공기'가 남은회까지 이 '근대의 정신'을
지켜나갈 수 있을지 궁금하다.
 
 
 
글 : 강명석(LENNON@hite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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