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ExLife ] in KIDS 글 쓴 이(By): Symond ( 朴 삼열.) 날 짜 (Date): 1998년03월24일(화) 13시08분23초 ROK 제 목(Title): " 정욕과 멸망. " 정욕이란 올바른 생각을 흔들게하는 것으로서 지혜롭고 건강하고 합리적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엄청난 사고를 불러 일으킨다 .. (에이즈 매독등 성병..) 섹스란 거룩한 인간의 즐거움이지 정욕과 엔조이 정도라면 동물에 불과하다. 기분 내키는 대로 부르짓고 싸워대고 즐기는 사람들의 무질서한 정욕은 나라를 멸망시키고 마는데, 여기 민주노조의 정욕이 한국을 멸망시킨 이야기 .. "일본은 세계 어떤나라보다 월급이 많은 나라지만, 그래도 일본만이 팔아먹을 수 있는 물건이 있기에 고임금을 견뎌낼수 있다. 가령 소니가 만든 워크맨같은 것이 그 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는 다르다고 생각된다." "월급도 월급이지만, 쉬는 시간이 많다는 것도 한국 공장의 특징이 아닌가?" 아비코와 같은 라인에서 일한 모리모토는 학생시절 일본 공장에서 2 달 가량 아르바이트를 한 경험을 갖고 있다. "공장은 하루 3교대로 돌아갔다. 평일 근무는 아침 6시30분부터 낮2시 30분 까지였다. 그런데 일을 하면서 재미있는 것을 일에 몰두할 때 쯤 되면 꼭 휴식시간을 갖는다는 점이다. 쉬는 시간이 1시간에 10분씩으로, 하루에 모두 6번. 점심시간 빼고도 하루에 60 분이나 쉬는 것이다. 일본의 경우 오전에 한번, 오후에 한번이 보통인데, 한국 공장은 상대적으로 쉬는 시간이 많다. 쉬지 않고 일만 하는것도 문제지만, 한 시간에 10 분씩 쉰다는 것은 일의 생산성을 오히려 떨어뜨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염려가 들었다." <일본경영시찰단이 본 한국근로자 월간조선97년9월호513쪽> 노동계가 점점 세력이 커지면서 노동운동가들이 이제는 정치계로 진출하려고 한다. 지방자치단체로부터 국회의원선거는 물론 이제는 대통령 선거에도 출마 하려고 하고있다. "노동자 농민이 주인이 되는 세상이 올 때까지 모두 무장 봉기하자" 라는 구호는 해마다 임투 현장에 어김없이 나도는 전단이다. 그리고 화장실에 나타나는 낙서들. "가자, 북으로 어버이수령의 따뜻한 품으로" (김일성이 죽기 전까지 나붙던 구호) (월간조선97년11월호572쪽) 울산에 가보면 아침이나 저녁 때 길이란 길은 다 차로 덮이고 있다. 울산 공단 내 모든 근로자들이 한 사람이 한 대씩 차를 몰고 나오니까. 늘어나는 차에 맞춰 길을 넓히려면 얼마나 막대한 예산이 들까.. 96년 12월노동법 날치기 통과파동으로 소위 "민주노총"이 주최한 항의데모가 서울 여의도에서 개최되는 날. 거제 장승포에서, 창원공단에서, 부산에서 그리고 울산에서 우리의 근로자들이 몰고나온 승용차로 경부고속도로는 7시간 동안 마비가 되고 말았다는 보도를 보았다. 아 살맛나는 세상, 우리 대한민국. (월간조선97년11월호573쪽) 70년대에서 80년대 중반까지 각 기업에서는 종업원들의 근무의욕 고취, 사기진작, 자기계발, 새로운 정보소개등의 명목으로 보통 3박4일에서 4박5일정도 단체 합숙훈련을 실시하고 노사가 함께 뒹글며 일체감을 조성 하는 교육을 했다. 일에 쪼들리다가도 교육을 받고나면 분위기도 좋아지고 개인에게도 자극을 주어 생산성을 올리는 효과도 거두었다. (578쪽) 87년 6.29이후 노조가 이런 교육을 전면 거부하는 곳이 늘고있다. 첫째 이유는 교육기간 중 회사가 시간외 수당을 지급하라는 것이고 둘째 이유는 기업이 종업원들의 노동력을 더 착취하가 위해 실시하는 세뇌교육이기 때문에 거부한다는 것이다. 이 두번째 이유의 배경이 바로 운동권 세력에 물든, 그야말로 세뇌되어있는 사람들의 주장이었다. 회사에서 교육기간 중 일을 시키지 않고도 임금을 지급하고 며칠 동안 별도로 숙식을 제공하며 각계의 전문가들을 불러 좋은 정보까지 제공하는데 이런 배려는 필요없고 시간외 수당까지 지급하라는 주장이 과연 이땅에 함께 살고있는 사람들의 정당한 요구라 볼 수 있을까. (월간조선97년11월호579쪽) D중공업이 새로운 승용차 생산공장을 세우기 위해 이 공장에 근무할 사원을 뽑아 앞으로 운영할 생산 라인의 용원을 일본스즈키사에 연수를 보낸 일이 있었다. 이곳에서 성실하고 똑똑한 인원을 선발해서 일본 현지 생산라인에 투입하여 일본인들과 함께 일 하도록 했다고 한다. 그들에게 지지 않겠다는 참으로 기특한 오기로 시작했는데 대부분이 3개월 동안 아침마다 코피를 쏟았다는 것이다. 한국과 다른 엄격한 근무시간에 맞추다 보니 과로 때문에 그들의 연수기간이 대략 1 년이었는데 연수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모두 말이 없었다. 그들 중 필자가 잘 아는 사람이 퇴근 후 술자리에서 한 이야기를 듣고 답답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동안 자신들은 한국에 있을 때 대단히 열심히 일했고 일본의 근로자를 막연히 부러워했는데 막상 가서 부딪쳐 보니 한국의 근로 환경이 그들에 비하면 오히려 지상천국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일했고 이제 한국에 돌아가서는 일본인들에게 지지 않도록 열심히 일해야겠다는 각오를 다짐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돌아와서 분위기를 보니 자기 혼자서 그랬다가는 우스운 꼴이 될것 같아 입을 다물고 있다는 것이다. (575쪽) 창원공단의 H중공업에서 있던 일. 어느 날 서울에 있던 사장이 와서 근로자를 격려하고 대화를 나누겠다는 뜻에서, 간부를 시켜 노조 대표와 차 한잔 하자고 요청했더니, 노조 대표의 대답이 "할 말 있으면 사장이 노조 사무실로 오라" 는 것이었다. 사장이 마침 다른 손님이 있어 그러면 퇴근 후 저녁식사라도 같이 하자고 다시 제의를 하니 선약이 있어 안된다는 대답이었다는 것이다. 단체협상이 시작되고 노사대표가 회의를 하면 머리가 허연 아버지나 할아버지뻘 되는 사람들 앞에서 20대 혹은 30대 초반의 노조대표라는 사람들이 맞담배질 하는 것은 예사고 때로는 삿대질과 모욕적인 언사도 다반사가 되었다. (월간조선 97년 11월호 577쪽 중에서) 90년 무렵의 어느 통계자료를 보니 세계 각국의 자동차 생산 실적을 소개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한국에서 생산된 자동차 총 생산량을 생산에 참가한 근로자 수로 나눈 1인당 생산대수를 1로 보았을때 미국의 GM이 4.5대 일본의 도요다가 12대의 수치였다. 어떤 자료를 보면 선진국의 근로자들과 우리 근로자들의 1인당 생산실적은 대략 미국의 1/3, 일본의 1/4로 나온다. 그런데 임금수준의 비교는 어떨까. 정확한 통계자료에 의한 비교는 아니지만 미국과 일본의 물가와 생활비를 대비해보면 우리의 임금수준이 오히려 높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1인당 생산실적은 미국의 1/3, 일본의 1/4인데 임금은 그들과 비슷하거나 더 높다고 한다면 어디가 잘못 되었을까. (월간조선 97년 11월호 570쪽 중에서) 임금이 인상되고 사람들의 형편이 나아지는 일이야 누가 마다할까. 그러나 한국 기업들의 임금 인상이 합리적인 과정에서 노사가 인내하면서 합의도출된 결과가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지 않을까. 북한 경수로 건설현장에 나오는 북한 근로자에게 지급되는 임금이 월 1백달러에서 1백50달러라고 하는데, 식당에 그릇 닦는 아주머니도 한달에 최저 90만원에서 1백20만원 사이를 받는데 달러로 환산해 1천-1천3백 달러가 된다. 대기업의 고졸 기능사원들의 1인당 월평균 임금이 90년부터 2천달러를 넘었고 지금은 2천5백달러를 넘었을 것이다. (570쪽) 각기업은 엄청난 비용을 지출하고도 노조의 거센 항의에 굴복하여 생산성에 맞지않는 고임금을 지불하다 보니 결국 국제 경쟁력을 잃고 비틀거리고 있지 않은가. 고임금 등쌀에다 횡포에 가까운 노조의 항의에 두손 들고 아예 공장을 외국으로 옮기고 있는 현상이 타당한 일일까.. (월간조선 97년 11월호 578쪽) 창원공단 입주업체 대부분이 그런 이유로 근로자들에 대해 실시하는 복지혜택이 외국에 비해 터무니없이 높은 경우가 맣다. 근로자의 요구를 듣다보니 별 일이 다 일어난다. 노조의 요구로 도서실이 마련된 것은 바람직한 일로 칭찬할 만한 일이지만 육체미 단련실, 음악감상실, 취미 서클활동실, 테니스코트장과 각종 운동경기장까지 갖춰주었다. 동아리 활동이라고 각 회사마다 사물놀이패라는 것이 조직되어 노사분규만 일어나면 이들이 앞장을 선다. 대개 회사마다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관리직 사원들은 현장 근로자들보다 근무시간이 길어 정시 퇴근시간이 지나도 보통 한두 시간 더 근무하고 있다. 그런데 근무시간을 마친 현장근로자들은 취미활동을 한다고 다른 사람들이 근무하고 있는 시간에 보란듯이 꽹과리를 두들기고 있다. 근래 우리 사회는 우리 것을 찾는다고 사물놀이가 인기를 얻는지는 몰라도 한번 겪어본 사람이면 그 두들겨대는 소음에 넌더리를 치고 이제는 사물놀이패만 보아도 아예 고개를 돌리고 만다. 도서실을 만들어라. 음악감상실을 만들어라, 육체미단련실을 만들라는 요구에 만들어 놓았더니 이용하는 사람은 가물에 콩나기다. (월간조선97년11월576쪽) 복지시설을 이용하는 사람은 가물에 콩나기이다. 그럴수밖에. 월급 많이 받겠다. 자가용 있겠다 퇴근하기 바쁘게 자가용 몰고 드라이브 즐기고 술 먹기도 바쁜데 언제 책 읽고 음악감상하고 육체미 단련한다는 말인가. 노동자의 천국은 미국, 일본이 아니라 바로 이땅이 아닐까. 독서실에 가보면 많아야 서너명이고 음악감상실에는 아무도 없고 육체미 단련실엔 많아야 5-6명인데 기업에서 막대한 돈을 투자해서 건물을 짓고 상당한 예산을 들여 운영하는 시설을 겨우 몇 사람만 이용하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이런 경비는 결국 제품의 가격상승을 초래하는데 이러고도 미국.일본의 기업과 경쟁해서 이길 수 있을까. (월간조선97년11월호576쪽) 모르긴해도 세계 어느 나라의 기업에서 종업언들에게 무료로 점심을 제공하는 나라가 있을까. 그뿐만 아니라 근로자들을 우대한다고 식사의 질을 높이고 부페식으로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자기 마음대로 음식을 담아가는데 먹다 먹다 남겨서 모두 잔반통에 버린다. 엄청난 양의 음식 쓰레기가 발생하여 2천여명이 버리는 음식 쓰레기를 전문 수거업체를 불러 처리하는데 전용탱크로리에 담아 창원에서 울산까지 운반하고 울산에서 다시 전용선박에 옮겨 싣고 이 배가 바로 동해 먼바다 공해에서 버린다고 한다. 이 내용을 알고나면 환경을 더럽히는 사람들이 남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될 터인데 이런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월간조선97년11월호576쪽) 주물공장은 쇳물작업이기 때문에 고열이 발생한다. 우리나라 주물공장에는 어디에 가도 대형선풍기가 신나게 돌고있다. 대형 선풍기가 돌면 결국 공장 내의 주물사분진이 날아다니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유명한 히다치 주물공장 안의 어디에도 선풍기를 볼수 없었다. 만약 한국의 어느 공장에서 이랬다면 그 기업주나 경영자는 "노동자의 땀과 피를 빨아먹는 악질" 로 낙인이 찍히고 행패를 당하지나 않았을까. 몇개 다른 업체의 공장을 방문했는데 어느 공장도 작업장 안에서 대형 선풍기를 돌리는 곳을 본 적이 없다. 그중 새로지은 공장은 부분부분 에어컨 바람을 보내고 있었다. 선풍기 한대 눈에 띄지 않았는데 문득 가정용선풍기가 돌고있지 않은가 - 다시 눈여겨보니 선풍기의 방향은 작업자 쪽이 아닌 기계의 콘트롤러 박스에 맞추고 있지 않은가. (일본의공장) 창원공단내 공장들이 그 큰 대형건물 전체에 에어컨을 가동하고있는 곳도 있고 이제는 부분부분 찬바람을 보내주고 있으며 그래도 여전히 대형선풍기를 쌩쌩 돌리고 있는데도 우리의 근로자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혹사당하고있다고 한다면 도대체 얼마나 좋은 환경이 되어야 만족할 수 있을까. (572쪽) 87년 6.29 이후 터져나온 생산현장의 파업은 10여년이 지나면서 방화.파괴등 극단적인 행동이 다소 누그러졌지만 해마다 벌어지는 임금투쟁 단체협상현상에는 어김없이 붉은 깃발에 "노동자의 피를 빨아먹는 악질 자본가" 라는 구호가 등장한다. 마산에서 어떤 선배가 스티로폼을 이용해 제품포장용기를 생산하는 회사를 경영했는데 임금 인상 투쟁의 내용을 보았더니 현대자동차와 대기업의 기술분야 사원들과 같은 수준으로 인상하라는 요구를 했다고한다. 원래 성품이 순진하고 나이도 비교적 많은 사람들로 작업 자체도 극히 단순 노동을 하는 사람들인데 어느 틈에 이들의 뒤에서 교육시키고 선동하고 부추기는 세력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시달리다 지친 선배는 회사의 문을 닫고 파산했다. 이런 사례는 마산 수출 자유지역 안에 있던 회사 중 여러 곳이 문을 닫는 연쇄 파동으로 이어졌다. (월간조선 97년 11월호 570쪽 중에서) 이지역 출신의 유력한 인사가 10년전 30대의 젊은 나이로 이들과 활발한 접촉을 했는데 당시 수출 자유지역 내 꽤나 알려져있던 일본계 전자부품 업체의 근로자들을 부추기면서 "여러분 그 동안 군사정권의 보호를 받는 자본가들에게 여러분들의 신성한 피와 땀을 얼마나 착취 당했습니까.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권리를 쟁취해야 합니다. 여러분 뒤에는 이 XXX가 있습니다. 끝까지 싸웁시다." 라고 선동했다. 당시 이 회사의 현지 책임자로 있던 일본인이 도저히 대화가 되지않아 본국과 상의하고 결국 회사를 폐쇄하고 말았다. 그때까지 극렬하게 투쟁하던 5백여명의 근로자들이 뜻밖에 직장을 잃게되어 서울에 있는 이 사람의 사무실을 찾아갔더니 그는 이미 피해버리고 없었다는 것이다. (당시 이 투쟁에 참여 한답시고 여성근로자 대표가 공장 굴뚝에 올라가 알몸 시위로 경찰,소방차가 동원되기도 했음) (월간조선97년11월호570쪽) 지난 3월5일 오후 9시 서울 쁘렝땅 백화점 앞 을지로 지하보도. 3백 50여명의 집 없는 남자들이 백화점 쪽으로 나가는 계단 한쪽에 모여 저 녁을 먹고 있었다. 늘푸른선교회와 영락교회가 주 3회씩 홈리스들(Home- less·집없는 사람들)을 위해 마련한 '지하도 저녁식당'이다. 이날 메뉴는 밥 한 그릇에 국과 김치. 반찬 그릇과 국 그릇이 따로 없어 플라스틱 그릇 한 개에 밥과 국, 김치를 함께 말아 먹어야 하지만 모두들 그런 것을 가릴 처지가 아닌 듯 했다. 그릇 속으로 말 없이 묻 히는 얼굴에는 허기에 지친 표정만이 떠올랐다. 이날 모인 홈리스들의 숫자는 가히 기록적. 영락교회 한규영 목사는 "날이 갈수록 저녁을 얻어 먹으러 오는 홈리스들이 늘고 있다"고 말했 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70명선에 불과하던 것이 IMF 사태가 터진 12월 부터 갑자기 늘기 시작해 지난달 3백명대를 무너뜨렸다는 것이다. 한 목사는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일용직들이 대부분이지만 요즘은 말끔하게 생긴 사람들도 가끔 눈에 띈다"며 "식사를 하는 분 중에는 얼 마전까지만 해도 남대문시장에서 가게를 갖고 있던 사장님도 있고, 인 쇄소에 다니던 샐러리맨도 있다"고 귀띔해 줬다. 1시간에 걸친 저녁식 사가끝난 뒤 홈리스들은 서울역과 청량리, 을지로 입구 지하철역 광장 등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홈리스들이 가장 많이 몰리는 서울역 대합실. 홈리스들은 원형 의자 에 둘러앉아 잡담으로 시간을 때웠다. 딱히 할 일이 없기 때문에 TV를 볼수 있는 곳은 이들에게 명당으로 꼽힌다. 자정을 넘겨 막차가 들어오 자 1백여명에 달하는 홈리스들이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광장에서 대합 실로 통하는 문이 닫히는 오전 12시30분까지 대합실 빠져 나가야 하 기 때문. 대합실에서나온 이들은 바로 앞의 1호 시청 전철역 지하보 도에 다시 모여들거나 광장 한쪽에 불을 지피고 추위를 쫓는다. IMF 사태로 가장 직접적인 타격을 받는 사람들은 역시 '하루 벌어 하 루 사는' 일용직 근로자들이다. 공사판과 중국집에서 일하며 그날 번 돈으로 숙식을 해결해온 이들은 최근 들어 늘어나고 있는 홈리스들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올해 며 사정이 달라졌다. 지하도를 점령한 일용직들 사이로 '넥타이'가 간혹 눈에 띄기 시작한 것이다. 3월6일 오전 1시 지하철 1호선 서울역 지하보도 한쪽 구석을 차지하 고 앉아 있던 이 모씨(30)도 며칠 전부터 보이기 시작한 신참 노숙자. 부산에서 보일러, 수도관 등 가정용 설비 가게 사장이었던 이씨는 지난 3일부터 노숙자 대열에 끼여들었다. 10년 전 시작한 개인사업이 지난해 11월 부도로 결딴나버리는 바람에 사장에서 졸지에 실업자로, 홈리스로 전락하고 말았다. 10년 전 서울에서 고교를 졸업한 이씨는 부산에서 설계사무소를 하 고 있는 형을 찾아가 가게를 열었다. 설비 일반 2종 자격증도 땄다. "1년여 열심히 일한 덕분에 개업 다음해부터는 직원도 5∼6명씩둘 수있었고, 월 6백만∼7백만원의 순이익도 보기 시작했습니다." 이씨는 서울의 모친에게도 매달 3백만원 이상 부쳐드리는 효자였다. 그러나 한 동안 잘나가던 사업이 지난해 초여름부터 흔들리기 시작 杉. 자재값이 계속오르는 데다 건축주로부터 돈을 못받는 일이 자꾸 생겼다. 결국 11 월에 1억3천만원의 부도를 내고야 말았다. 부도가 난 돈은 어머니와 형 이 돈을 매워줬지만 이씨는 마음을 잡을 수가 없었다. 허망함을 달래려 고 무작 부산을 떠나 마산으로, 다시 마산을 등지고 서울로 올라왔다. 낮에는 고교 동창들을 불러내 점심을 얻어먹고 나머지 시간은 멍하니 지하철을 탄다. "남들이 놀 때 열심히 일한것이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됐다"고 말하는 이씨는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오전 2시 서울역 광장에 혼자 서 있던 홍 모(39)씨. 새벽 바람이 아 직 차가운 데도 홍씨는 지하도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마산에서 현대 와 대우, 기아자동차의 부품가공 하청업체를 운영해온 홍씨도 지난해 IMF 한파로 쓰러진 사장. 자동차 생산 부진으로 일감이 아예 없어지고 생활 고로 부인마저 떠나버리자 공장을 처분해 직원들 밀린 월급을 주고 지난 1월 단신 상경했다. 울에 올라올 때 가져온 50만원은 이미 떨어진 지 오래. 홍씨는 "처음 올라올 때만 해도 이렇게 직장 잡기가 어려울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했다. 인천과 서울을 오가며 汰揚 구하려 했지만 돈 만 까먹 駭. 여관을 나와 병원의 환자 가족 대기실을 전전하다 옷가방 까지 털렸다. 구직 관련 신문기사와 회사 팸플릿이 들어 있는 작은 손가 방만이 그의 전재산이 됐다. 홍씨는 "직장을 구하러 왔는데 어떻게 지하 도 노숙자 대열 낄 수 있느냐"며 광장의 찬바람을 그대로 맞고 서 있 었다. 자선단체에서 주는 급식도 자존심이 허락지 않아 먹을 수 없었다. 홍씨는 이날 하루 한 끼도 먹지 못했다. 서울역 앞에 늘어선 직업소개소는 매일같이 일거리를 구하려는 사람 들로 붐비고 있지만 정작 사람을 쓰겠다는 곳은 찾을 수가 없다. 역전 직업안내소의 한 직원은 "이제 구인난은 옛 말"이라고 잘라 말했다.몇년 전만 해도 하루 10건 이상 성사되던 구인·구직 연결이 올해 들어 하루 평균 1∼2건으로 크게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공치는 날도 많다. 직업안 내소 직원은 "지난 5일 오후 3시까지 일자리를 찾는 사람은 30명이 넘게 왔는데 사람을 구하겠다는 전화는 단 한건도 없었다"고 말했다. 일용직 들을 위한 인력시장도 경기 침체에 계절적 요인까지 겹쳐 개점 휴업 상 태가 지속되고 있다. 이러다 보니 심지어 대졸자조차도 실력에 맞는 직장은 고사하고 써주 기만하면 일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서울역 앞 J 만화가게는 지난 12월 만화가게 직원을 구하겠다는 벽보를 붙인 후 부도를 당한 대기업 출신의 학사가 일하겠다고 찾아들어 직원으로 채용했다. 만화가게 주인은 "먹여 주고 재워주며 33만원을 준다고 말했더니 두말없이 일하겠다고 나서더라" 며 "이달에도 한 명을 더 구하려고 했더니 찾아온 여섯 명 가운데 두 명 이 대졸자였다"고 말했다. 24시간 영업을 하는 서울역 주변 만화가게는 홈리스들의 숙소로도 사 용되고 있다. 하룻밤 묵는 데 필요한 돈은 2천∼3천원의 만화책 대여비 와 1천5백원 하는 라면을 합해 5천원이 채 되지 않는다. J만화가게에도 이날 10여명의 홈리스들이 이리저리 누워 잠을 청하고 있었다. 하루 5천원만 있으면 만화가게에서 잘 수 있지만 홈리스들은 대부분 1주일에 1만원도 벌지 못한다. 만화가게 숙식은 사실상 그림의 떡인 셈 이다. 홈리스들은 주로 지하철 1호선 서울역 지하보도와 영등포역, 청량 리역, 쁘렝땅백화점 앞 지하보도,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 지하광장 【 종이박스나 신문지를 깔아놓고 잠을 청한다. 아예 밤에 잠을 자 지않는 홈리스들도 많다. 이들은 서울역 앞에서 밤을 보내거나 거리를 어슬렁거리다 해가뜨면 지하철을 타고 잠을 떼운다. 홈리스들의 수는 갈수록 늘어 보건복지부가 지난달 말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현재 서울에서만 홈리스들이 8백명에 이르고 있고 매일 '6∼8명' 의 신참 홈리스들이 거리로 쏟아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늘 어나는 홈리스들에 대한 정부 대책은 사실상 무대책에 가깝다. 최근 MBC 'PD 수첩'에서 홈리스 실태를 보도하자 서울시 지하철공사는 홈리스들의 안식처 중 하나인 2호선 충정로역에 청원경찰 4명을 배치, 이들의 보금 자리를 빼앗아 버렸다. 혐오감을 준다는 이유에서지만 별다른 잠자리 대 책도 없이 거리로 내몰았다. 서울 중구는 서울역 대합실에서 매주 2∼ 3회꼴로 홈리스 소탕작전을 벌여 은평구의 부랑자 갱생원인 은평마을로 보낸다. 그러나 대부분의 홈리스들이 은평마을 입소를 거부하고 있어 단 속과 방면의 악순환만 계속될 뿐이다. 이들을 먹여주고 부족하나마 잠자 리라도 주는 것은 교회나 일반시민들이 맡아 하고 있다. 79년 춘천에서 상경한 강 모씨. 이렇다 할 기술이 없는 강씨지만 엄연 한 한 집안의 가장이다. 지난해까지는 공사장에서 일하며 그런대로 먹고 살았지만 일감이 없어진 이후 자식들을 고향의 아이들 할머니댁으로 보 냈다. 아직 45세인 강씨는 충분히 일할 수 있는 나이. 그러나 지난해 12 월이후 돈을 벌어보지 못했다. 강씨는 "고향에 있는 두 아들에게 창피한 생각이 든다"며 고개를 숙였다. ---------------------------------------------- UCLA 출신의 한 홈리스 IMF 직격탄에 영어강사에서 노숙자로 ---------------------------------------------- 3월5일 저녁 서울 을지로 쁘렝땅백화점 지하보도의 노숙자식당을 찾 은 S씨는 첫 인상부터가 다른 노숙자들과 달랐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 가죽 점퍼, 깨끗하고 잘생긴 얼굴…. 37세라는 실제 나이보다도 훨씬 어려 보이게 만드는 숱 많은 검은 머리에는 헤어 스프레이가 뿌려 져 있었다. 노숙자의 찌든 모습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도 거리 생활에서 얻은 감기가 낫지 않아 끊임없이 잔기침을 하고 있었 다. 전 직업은 영어강사. 지난 75년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 갔던 재 미교포 1.5세다. 최종 학력은 UCLA 경영학과 2년 중퇴. LA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살던 S씨는 92년 3월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당시 여자문제로 마음고생을 하다 '머리좀 식히겠다'며 한국행을 결심한 . 서울에서의 그의 생활은 순탄했다. 한국어와 영 低 동시에 자유자재 로 구사하는 S씨는 희소가치가 있었다. 어린이들과 직장이들을 대상으로 10팀 정도를 모아 영어를 가르쳤 월 2백50만원 이상은 거뜬히 벌던 S씨가 어려워지기 시작한 것도 역시 IMF 때문. 학부모들이 아이들을 하 나 둘씩 빼가고, 수입이 줄어든 직장이들도 회화팀에서 빠져나갔다. 4명 으로 한 팀을 만들어 팀당 20만원씩 받았기 때문에 사람이 빠져나가면 나머지 회원들의 부담이 커지게 된다. 결국 강사를 그만뒀다. 수입 없이 놀다 지난 1월 거리로 나올 때 쥐고 있던 1백50만원은 그날 밤잠든 사이 도둑맞았다. 하루 한 끼로 버티는 진짜 노숙자가 됐다. 가 끔 서울역 대합실에서 미국 관광 들을 대상으로 통역 안내를 하며 용돈 을 번다고 했다.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이런 모습으 안된다" 고 말했다. ---------------------------------------------- 홈리스의 '하루 일과' "항상 깨끗해 대접...칫솔-면도기 휴대 ---------------------------------------------- 홈리스 생활 3개월째인 김 모(37)씨의 아침 일과는 수원행 지하철에 서 시작된다. 오전 5시 서울역 대합실 화장실에서 세수와 양치질을 한 뒤 지하철 서울역으로 내려가 오전 5시20분 수원행 전철 첫 차에 몸을 싣는다. 매일같이 타는 수원행 전철. 물론 무임 승차이다. 밤새 얼었던 몸을 의자에 기대고 잠을 청한다. 종착역에서 내리지 않고 기다렸다가 다시 의정부로 떠난다. 남의 사정도 모르고 가끔 깨워대는 시민들이 귀찮아 일부러 따로 앉을 자리를 잡는다. 옷에는 항상 칫솔과 면도기를 넣고 다닌다. 행색이 깨끗해야 가끔 호텔 화장실에서 더운 물로 씻을 수 가 있기 때문이다. 오전 10시. 제기동 '소망의 집'에서 2백원을 내고 아침 겸 점심을 먹 는다. 식사를 마치고 제기동에서 여의도까지 걷기로 했다. 돈은 없고 시간 은 남으니 다른 수도 없다. 어제는 잠실 석촌호수까지 걸어가서 하루를 보냈다. 여의도 KBS별관 앞의 작은 공원에서 남이 읽다 버린 신문을 주워 읽 었다. 신문을 읽다 보면 일자리를 알아보고 싶지만 엄두가 나지 않아 그냥 포기한다. 오후 7시. 배가 고프니까 날씨가 더욱 춥게 느껴진다. 자리를 털고 일어선 김씨는 다시 서울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막차가 들어오는 오전 12시30분까지 역 대합실 서 TV를 보고 안면 있는 '동료'들과 대화 도 나눈다. 오후 8시. 저녁을 얻어 먹으러 나섰다. 을지로까지 가서 공 짜밥을 얻어먹고 11시30분쯤 서울역으로 돌아왔다. 서울역 홈리스들이 가장 싫어하는 시간대는 대합실이 폐쇄되는 오전 12시30분부터 3시까지. 광장으로 나와 '동료 '과 모닥불을 지펴놓고 시간을 보냈다. 주머니에 남아 있는 돈은 단돈 1천원. 이번 주 일요일에도 교회순례를 해야 한다. 일요일 하루 시내 교회들을 돌면 7천원을 벌 수 있다. 이것 이 유일한 '주당' 수입이다. (김태훈 주간부기자-이경호 출판사진부 기자). .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주간조선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