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photo ] in KIDS 글 쓴 이(By): LinLing (링링) 날 짜 (Date): 2003년 4월 3일 목요일 오후 06시 08분 34초 제 목(Title): 80년대 식으로 촌스러움, 카메라 http://www.pluto.dti.ne.jp/~sonnar/photo/yashicat.htm http://www.koalanet.ne.jp/~yokoyama/sub5_6.htm http://members.aol.com/waponi/photos/phd.htm 난 80년대 중반경의 그 어정쩡한 촌스러움을 싫어한다. 일본에서 지내던 중학교 시절이 그리 즐겁지 않은 탓도 있다. 그 시절이 현대 자본주의 소비-생산 사이클에 과도한 가속이 붙기 시작하던 시기인 탓도 있다. 아버지한테서 뺏아오다시피 한 카메라. 그 유명한 라이카, 롤라이처럼 클래식한 근사함이나 강고함이 보이는 것도 아니고, 80년대 물건들이 흔히 그렇듯 싸구려티 나는 검정색 플라스틱 껍데기를 두르고 있다. 서울 생활하던 아들이 카메라 타령을 하자 첨에 아버지가 내준 카메라는 코니카였나 그랬다. 두 대 있던 똑딱이 중에서 뭔가 버튼이 더 많이 붙어 있는 것을 내주시길래 신난다고 받아들고 올라왔다. 촌스럽게 생기긴 그놈이 그놈인데 버튼이 많이 붙어 있어서 조금이나마 더 좋아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사진이 잘 안 찍힌다. 왜 이리 포커스가 안 맞는 거야. 색깔도 흐리멍텅 한게 시체같네. 몇 통 찍지도 않고 도로 들고 내려갔다. 버튼이 덜 달려 있고 겉모양이 더 촌스럽다는 이유로 내 선택을 비껴나갔던 놈으로 바꿔서 가져가겠다고 했더니 안된다고 그러신다. 그게 더 좋은거고 사진도 훨 잘나온다는 거다. 버튼도 많이 달린 더 좋아보이는 거 집에 놔두고 촌스런 구식 모델 가져가겠다는데. - 아버지 어차피 사진 안 찍잖아요. 기껏해야 산에 가서 스냅이나 찍으면서. 나도 어차피 애인(현 마눌님)하고 놀러다니면서 스냅 찍으려고 가져갈 생각이었다. 평소에 카메라에는 거의 신경도 안쓰시던 아버지가 80년대식 촌빨냄새가 물씬 나는 싸구려티 나는 카메라를 뺏기지(?) 않기 위해 저항하신 것은 정말 의외였다. 난 우겼다. - 사진 많이 찍을 거에요. 아버지는 걍 그거 쓰세요. 아버지 말씀대로 멍청하게 생긴 놈이 사진은 기가 막히게 잘 찍힌다. 날씨 좋은 날엔 정말 짠하게 찍힌다. 세 통 중에 한 통 정도는 인화점 아저씨가 사진 잘 나왔다고 칭찬하곤 한다. 기분 좋다. 그냥 들여다보고 버튼 누른 거 뿐인데. 하루는 하도 신기해서 이리저리 들여다보고 날짜 설정 버튼 빼면 이것저것 몇 개 안되는 버튼도 눌러보고 했다. 껍데기에는 kyocera TD 라고 씌여 있다. - 교또 세라믹 사에서 카메라도 만들었었군. 그놈들은 이름도 촌스러운데 오만 물건을 다 만든단 말야. 렌즈 옆에 "Carl Zeiss Tessar 3.5/35 T*"라고 아주 싸구려스러운 프린트가 찍혀 있다. - 진짜 칼 짜이스 렌즈인가? 일제니까 엉터리로 써놓은 건 아닐테고, 어디 동남아쯤에서 만든 걸 교세라에 납품했나보네. 최근 캠코더를 구입하고, 디카나 SLR 필카 등에 관심을 가지면서 이것저것 기웃거리다 보니 도대체 저놈의 정체가 뭐길래 저리 잘 찍히는지 궁금해졌다. 빈티지화 될만한 소지는 전혀 없는 보급형 컴팩트 똑딱이라서 그런지 역시 정보가 적다. - 역시. 교세라가 카메라를 만들어 봤자지. - 흠. 그 유명한 야시카를 교세라가 인수했구만. - 어? 야시카하고 생긴게 비슷하네? 이름만 바뀌고 거의 그대로잖아? 이 못생긴 놈의 정체는 야시카 브랜드로 마지막으로 출시된 AF 똑딱이 컴팩트 모델 Yashica AF-T DX 를 이름만 바꾼 것이었다. 칼 짜이스 테사 렌즈는 작은데도 불구하고 아주 뛰어난 해상력과 색 재현력을 가지고 있으며 이 모델의 자동측광 자동포커스 기능은 아주 빠르고 정확하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극단적인 상황만 아니면 핀이 나가거나 노출이 이상하게 된 사진은 한 번도 없었다. 맑은 날엔 콘트라스트가 강한 사진을 얻을 수 있고 흐린 날엔 부드러운 사진을 얻을 수 있다. 웹서핑을 통해 거의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페이지들을 열람해나가면서, 촌스럽게 싸구려 티나게 생긴 주제에 사진은 잘 찍히는 이 카메라에 대한 비웃음은 점점 존경심으로 바뀌어갔다. 사진이 잘 나오는 것을 알면서도 줌도 안되고 못생겼다는 이유로 업그레이드 목표 상위권에 찍어두었던 카메라가, 덩치가 큰 것만 빼면 스냅용으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물건이라니. 아 속물스러워라. 이걸 만든 사람들은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딴데서 원가 절감하느라 싸구려티나는 자재를 썼고 다양한 기능을 넣지는 못했지만, 속으로는 이 카메라의 실력과 깊이를 알아주는 유저가 반드시 있을 거라고 예상하면서 만든 것이 분명하다. 성실하게 제 구실을 다하는 훌륭한 물건을 만들어낸 개발자에게 경의를. 이놈이 우리집에 들어온지 벌써 20년이 다 되간다. 그 실력과 내막을 이해하고 경외하게 되기까지도 그만큼 걸렸다. 태어날 아이를 위해, 멀리서 손주 보기를 기다리는 노친네를 위해 캠코더는 장만을 했지만 아무래도 한눈에 쨍하는 사진들이 찍고 싶어 D-SLR에 자꾸 눈이 돌아간다. 아니다, 그건 장비병 때문에 그런거다. 스냅용으로 보급형 디카를? 마누라도 쉽게 찍으려면 자동모드로 잘 찍히는 놈을 골라야 할텐데. 걍 저놈의 똑딱이를 쓸까. 이래저래 디카가 편한데 인화할 생각을 하니 필카가 있긴 있어야겠고. 옆자리 직장 동료의 장롱에는 정체 불명의 미놀타 SLR이 굴러다닌다고 한다. 같이 뒤져보니 아마 XD 아니면 XE 모델같다. Rokkor 렌즈 애호가들이 찍은 사진들은 감정이 풍부하다. 미놀타를 잘 꼬드겨서 헐값에 넘겨받을까? 단종된 렌즈 수집하다가 나중에 후회하지나 않을까? 도대체 아버지는 어떻게 외모에 현혹되지 않고 숨은 실력파 카메라를 고르셨을까? 요즘처럼 인터넷으로 사용자 평가를 뒤지고 다닐 수도 없었을텐데. 얼마 전까지 집에 장롱 SLR이 있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던 시기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없는 살림에 어렵사리 장만한 카메라로 필름값 겁내가며 찍은 아이의 스냅들이 기가 막히게 잘 나왔을 때 아버지가 느꼈을 기쁨을 이해하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는 커서 장롱 속에 D-SLR이 있는 사람들을 부러워할까? 아니면 HD-CAM이 있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게 될까? 아버지가 보고 싶다. ......웃기냐? 응? 웃기냐? 응? 퍽퍽퍽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