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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litary ] in KIDS
글 쓴 이(By): Asteau (언젠간학생맧)
날 짜 (Date): 1998년02월14일(토) 14시32분49초 ROK
제 목(Title): 소돔과 고모라 - 27 (5)


소돔과 고모라 - 그리고 함부르크
'함부르크'는 13세기부터 북방과의 해상무역을 통해 번성을 거듭해 온 독일 최대의 
항구도시이며 베를린에 이어 두번째로 큰 도시이기도 하다.
사실 이 '한자동맹'의 맹주가 '폭격기' 해리스 장군의 눈길을 끈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였지만, 함부르크는 그 어느 지역도 유례가 없을만큼 강력한 방공망으로 
인해 선뜻 손을 대기 어려운 상대였다.
하지만 루르 댐에 대한 공격이 사실상 무위로 돌아가자 약이 오른 해리스가 그 
화풀이를 위해 골라잡은 것이 바로 이곳이었다.
그리고 이 함부르크에 대한 공습계획이 입안될때부터 붙여진 '고모라 작전'이라는 
적전명칭은 이미 연합군의 의중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그 음란함과 사악함에 진노한 신에 의해 불로써 멸망되었다는 이 성서 속의 도시 
이름이 상징하듯, 연합군은 처음부터 이 부유한 도시와 150만의 시민들을 말끔히 
'태워 죽이기로' 작정을 했던 것이다.
이 함부르크 폭격은 그때까지도 찬반양론이 계속되고 있던 민간ㅇㄴ에 대한 무차별 
폭격중에서도 가장 무자비하고 노골적인 작전이며, 또한 처음으로 미군과 영국군이 
힘을 모아 공동으로 한 지역을 공격했다는 선례를 남기게 된다.
1943년 7월, 이제 미군의 하루 평군 동원 기체는 300대를 넘고 있었고, 영국군은 
그 갑절 이상의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해리스 대장은 이제와서는 전혀 놀라울 것도 없는 이 1000여대의 폭격기로 최소한 
열흘이상 밤낮으로 함부르크에 폭탄을 퍼붓기로 마음 먹었다.상징적으로 
생각하더라도 밤중에 영국군이 함부르크 시내 전체에다 융단폭격을 가하고 
물러나면 낮에는 미군이 나서서 그 불지옥 속에서도 용케 살아남은 주요목표를 
골라 정확한 조준폭격을 가하고, 기 과정이 열흘동안 계속된다면 아무리 견고한 
방어체제를 가진 함부르크라 하지만 사실상 버텨날 재간이 없을 것 같아 보였다 - 
다만 공격하는 연합군의 폭격기들이 입게 될 손실만이 문제일 뿐이 것이다.
하지만 영국군은 독일군의 대공포화에 대해서 새로운 대비책을 개발해 놓고 
있었는데, '운도우'라는 별명으로 불리운 이것은 별게 아니라 알류미늄판을 잘게 
자른 조각이었다.
폭격대의 선도기가 이런 알미늄 박편을 가득 싣고 나서 공중에다 뿌리게 되면, 
기류를 ㅏ고 한참동안 하늘 가득히 떠다니는 이 물체가 독일군의 레이더에는 마치 
하늘을 가득 메운 항공기의 대군과 다름없이 나타나게 된다.
공중으로 발사된 전파가 어딘가에 반사되어 되돌아오는 것을 포착하여 비행물체의 
존재를 파악하는 레이더의 기본원리를 이용한 이러한 교란방식은 지극히 
단순하면서도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을 만큼 효과적인 것이고, 아직 
초보적인 수준이었던 당시의 레이더를 교란시키기는 더욱 쉬었다.
그런데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이무렵 독일군도 윈도우와 똑같은 방식의 병기를 
개발해 놓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글은 영국군이 이 방법을 금세 배워 
써먹히는 것을 두려워하여 실전에서 사용하기를 주저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거 수년간에 걸쳐 양측이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 개발해온 네이더를 한순간에 
무용지물로 만들지도 모를 이 값싸고 간단한 '비밀병기'는 이제 누구든지 먼저 
써먹는 쪽이 '최소한 한번은' 톡톡히 재미를 볼 수밖에 얺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외에는 영국군은 이 함부르크 공습직전에 암호명 'H2S'라는 새로운 폭격시스템을 
완성시켜 놓고 있었다.
이것은 간단히 설명해서 레이더 전파를 지면을 향해 투사시킴으로써 비행기의 
조종실에 설치된 모니터에 지상의 지형이 화싱으로 떠오르도록 만들어진 것으로, 
캄캄한 오밤중에도 발밑의 의치와 지형을 대충이나마 파악할 수 있는 대단한 
기술전 진보였다.
물론 이것은 컴퓨터에 의해 통제되는 오늘날의 첨단 전자전(電子戰)방비와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지만 이런 초기 전자전의 기술에 있어서 영국은 
독일보다 줄곧 한발 앞서 있었고, 결과적으로 이런 신장비로 무장한 연합군 
폭격대에 의해 함부르크가 잿더미로 된 이후에 독일공군 장과 '헤르만 괴링'은 
다음과 같은 말로 영국군의 앞선 기술을 인정하고 있다.
"전쟁이 끝나면 나도 라디오를 영국제로 바꿔야겠다. 도대체 우리 독일의 기술자란 
놈은 다 무얼하고 있는 건가?"

1943년 7월24일 밤.
중폭격기 740대가 동원된 함부르크 공습이 시작되었다.
영국 공군의 만능 걸작기 '모스키토'편대가 기체 대부분이 목제(木製)로 되어있어 
레이더에 잘 포착이 되지 않는다는 장점과 시속 645km라는 빠른 속도를 십분 
활용하여 함부르크 해안 상공에다 윈도우를 살포하자 독일군의 방공 경계망은 
순식간에 대혼란을 일으켰다.
영국과 독일 양짝에서 엄중한 군사적 기밀에 부쳐져 있던 윈도우의 존재를 
일선부대의 레이더 관제원이 알았을 턱이 없었던 것이다.
레이더 스크린에 갑자기 나타난 수백대의 '적기'는 불과 수초 사이에 2000여대로 
불어났고, 더구나 그 고도와 비행경로마저 제각각 이어서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공황사태에 빠진 독일군의 레이더가 속절없이 밤하늘을 훑고 있는 동안 
H2S를 장비한 중폭격기 편대가 함부르크 상공으로 몰려 들었고, 곧장 지옥의 문이 
확짝 열렸다.
이날 밤 영국공군안 약 5000톤의 폭탄을 투하했지만 격추된 폭격기는 12대에 
불과했고, 투하된 폭탄은 대부분 화재를 일으키는 소이탄이었다.
함부르크는 작전명칭 그대로 처참한 불길 속의 고모라가 되어갔고, 윈도우에 의해 
기능을 상실한 독일군의 방공망은 변변한 저항조차 해보지 못하고 잿더미속에 
묻혀갔다. 월27일 밤에 또다시 722대의 폭격기가 출격했지만 이번에는 
폭격선도기조차 필요없었다. 최초의 폭격이 가해진지 하루반이 지났지만 
그때까지도 함부르크 시가는 밝은 불빛을 피워 올리며 타고 있었고, 그 불빛은 
흡사 불나방을 유인하는 어둠속의 호롱불처럼 폭격기들을 도시의 상공으로 정확히 
끌어 들였던 것이다.
첫날의 폭격으로 상수도의 본과(本管)이 터져 버리는 바람에 이미 진화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이 불지옥 위에다 폭격기들은 또다시 폭탄을 풀어 놓았다.
대 화재는 폭풍을 몰고 온다.
뜨거워진 공기가 높이 상승하면 그 자리를 메우기 위해 잔공기가 몰려오고, 이 
속도고 빨라지면 그것은 거센 강풍이 된다. 물리학적으로 단순히 '대류현상'이라고 
설명되는 이 작용이 함부르크의 종말을 더욱 부채질했다.
시속 300km에 가까운 이 뜨거운 바람은 가로수를 뿌리채 뽑아내고 자동차를 
공중으로 말아 올리면서 불길을 더욱 빠른 속도로 이웃 지역까지 번져 나가도독 
하는 효과를 불러오는 것이다.
거리의 아스팔트가 부글부글 끓어 오르고 지하 방공호에 대피하고 있던 사람들은 
그대로 질식해 죽었다.
그 이튿날 날이 밝자 날아온 미군 폭격기들은 이제 더이상 파괴할 것이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음을 확인했지만, 이런 공습은 8월2일까지 9일간이나 계속되었다.
이 잔혹한 학살극이 끝났을때 함부르크는 이미 지도상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시가지 전체가 페허와 잿더미로 변했고 10만여명의 시민들이 죽어버린 것이다.
함부르크의 끔찍한 비극은 히틀러총통을 비롯한 제3제국의 제도자들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다.
독일 도시가 공습을 받을 때마다 "그 10배로 갚아준다"거나 "강철 같은 의지로 
복구작업에 임하라"는 의례적인 말알 앵무새처럼 되뇌이던 히틀러마저도 
함부르크라는 말이 나오면 금세 입을 굳게 닫아 버렸고, 총통의 전용 열차가 그 
잿더미 옆을 통과할 때면 창문의 커튼을 내려 버림으로써 애써 그 장면을 목격하는 
것을 피했다.
이 대참사에 대해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공군장관 괴링은 시민들의 
희생을 애도하는 의례적인 전문을 내레 보냈으나, 함부르크 시청의 관리ㄷ를은 
현명하게도 그 전문을 발표하지 않았다.

"만일 그 전문이 발표되었더라면 틀림없이 분노한 시민들이 폭동을 일으켰을 
것이고, 그걸로서 제3제국의 생명은 그만큼 더 짧아졌을 것이다."
군수장관 '쉬페어'는 종전후에 이렇게 증언했는데, 그것은 적절하고도 지각있는 
판단이었다.
러시아 전선에서 싸우고 있던 독일병사들 중에서 고향이 함부르크인 장병은 효가가 
최소되었고,다른 지역으로 가는 휴가병들도 함부르크 근처에는 접근하지 말라는 
경고가 내려졌다.
패배주의자, 반전주의자를 색출하기 위해 번득이는 게쉬타포의 날카로운 눈을 
의식하면서도 목소리를 낮추어 "어쩌면 우리는 전쟁에서 패배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말을 입에 올리는 사람이 늘어갔다.
그나마 함부르크의 비극이 불러온 단 하나의 긍정적인 효과라고 하면 그동안 
지극히 관료적이고 고압적이던 나치의 고위관료들이 다소 풀이 죽었다는 점과 
턱없는 자만심에 젖어있던 그들이 비로소 현실을 인정하고 진진하게 대비책을 찾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특히 직접 디자인한 사치스런 실크군복을 입고 거들먹 거리며 무위도식의 나날을 
보내고 있던 괴링은 이 참화 이후로 다소 정신을 차린 듯 했다. 그는 본토 
방공망을 강화하기 위해 전투기의 생산을 대폭 늘리는 것과 함께 러시아 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전투 비행대까지 본토방어임무로 전화시키는 조치를 취했고, 공군차관 
'에르하르크 밀히'원수도 다음과 같은 말로 괴링의 이런 조치를 지지했다.

"병사들은 참호속에서 공격이 끝나길 기다릴 수도 있지만 후방 시민들의 고충은 
점점 더 감당할 수 없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괴링의 이런 모처럼의 노력도 결과적으로 무위로 돌아가고 마는데, 그것은 
히틀러가 그의 이런 제안을 단호히 거부했기 때문이다.
"공격, 오직 공격이다! 적의 이런 공격을 응징하는 방법은 똑같은 방법과 규모로 
반격을 가하는 것이지, 울타리나 단속하고 있는 것은 패배주의나 다름없다.
이 독재자는 한시바삐 복수랄 하겠다는 치열한 적대감에 쌓인 나머지 현실 감각을 
잊어버린 것이지만, 당연히 제3제국에서 히틀러의 명령에 대해 반대의견을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결과 이미 바닥이 보이기 시작한 항공기용 알루미늄 자원은 전투기가 아니라 
JU188이나 He177 같은 신형 폭격기의 생산에 돌려졌고, 이런 조치는 이윽고 
19345년 하반기부터 이른바 '베를린 공습'이 시작되자 완전히 방향이 잘못 잡혀 
있었다는 사실이 여지없이 드러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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