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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litary ] in KIDS
글 쓴 이(By): Asteau (언젠간학생맧)
날 짜 (Date): 1998년01월24일(토) 12시55분30초 ROK
제 목(Title): 이탈리아 전선의 종결 24 (3)


마지만 불꽃
눈앞에 보이던 불명한 목표물이 사라져 버리는 순간, 팽팽하게 당겨졌던 긴장이 
풀리며 일순 피로와 허탈감이 밀려오는 경우를 우리는 흔히 경험한다
이 1944년의 겨울을 맞은 이탈리아 전선의 연합군이 바로 그런 경우로, 전투가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연합군 장병들의 사기가 눈에 띄게 저하되어 갔다.
2년에 가까운 극심한 전투를 통해 몸과 마음의 기력을 완전히 소진해 버렸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겠지만, 지난 6월에 노르망디에 상륙한 서유럽의 연합군이 단 
6개월만에 독일국경까지 바짝 조여 들어가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동쪽에서는 소련군이 빠른 속도로 독일 본토로 향해 몰려오고 있었으므로 
이제 누가 보더라도 이 전쟁의 승리는 서유럽에서 결정된다는 것이 뻔히 
예측되었구, 그렇다면 이 이탈리아 전선의 연합군은 이제 더 이상 이 전쟁의 
주연이 아니며 전쟁의 승패와도 무관한 싸움을 하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알프스를 넘어 발칸반도까지 진출한다는 원대한 계획에 강한 집착을 품고 있던 
처어칠마저 마침내 그것을 포기함에 때나 이제 연합군은 눈앞에 가로놓인 저 
눈덮인 알프스산맥을 굳이 넘어야할 아무런 필요조차 없었다. 요컨데 그들은 이미 
이탈리아 반도의 끝까지 와 있었고, 아직까지 저 산속에 상당한 규모의 독일군이 
도사리고 있다고는 하지만 공연히 그들을 잡아보겠다고 서둘다가 전쟁이 다 
끝나가는 이 판국에 개죽음을 할 필요는 없다 - 이런 생각이 전 장병들 사이에서 
빠른 속도로 확산되어 갔다. 그리고 당연한 결과로서 각 부대에서 각종 군기사고와 
탈영병이 급증했다.
일년 전에 서유럽으로 전출되어 지금은 그곳에서 다시한번 일약 영웅이 되어있는 
몽고메리 - 이 무렵이는 대장으로 승진해 있었다 - 와 함께 '엘 알라메인의 
대승'을 만들어 내었던 영국 제8군의 노병들은 "이럴 바에야 차라리 우리도 
서유럽으로 보내달라"고 툴툴 거렸지만, 그 조차도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들이 긴 동면을 마치고 다시 공격에 나선 1945년 4월초에는 독일의 수도 
베들린 함락이 목전에 다가와 있을만큼 전쟁은 이미 끝나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역전의 노병들이 다시한번 그 용명을 떨칠 기회가 아주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었다.
땅이 충분히 건조하고 좋은 날씨가 돌아온 4월9일, 제8군은 '코마키오' 호수 
주변에서 최후의 공세에 나섰고 그 며칠 후에는 미 제5군도 '볼로냐' 근교에서 
독일 제10군을 향해 일제 공격을 개시했다.
이 전투는 이미 '전투'가 아니라 '소탕'에 훨씬 가까왔고, 여기서 연합군은 
이탈리아 전선이 개전된 이래 최대규모의 물량을 동원했다.
중 폭격기가 동원되어 독일군이 최후 방어선으로 설정한 고딕라인에다 맹폭격을 
가했고, 그 뒤를 이어 1000문 이상의 화포개 200만발 이상의 포탄을 쏟아 부었다.
게다가 이 이탈리아 반도의 최북단, 포오강 유역은 그동안 연합군을 무던히도 
괴롭히던 산악지대가 아니라 '기갑부대를 위한 천혜의 활동무대'라 할만큼 넓고 
평탄한 평야지대였다.
맹렬한 포폭격으로 지면조차 뜨겁게 달아올랐을때, 화염방사 전차 '처어칠'을 
비롯한 온갖 최신형 장갑차량들이 고딕라인을 향해 쇄도해 들아갔다.
물론 이 신무기들은 베를린 함락이라는 최후의 일격을 소련군에게 양보함에 따라 
사실상 싸움이 끝나버린 서유럽 전선에서 이동된 것이었고, 결과적으로 2년반을 
끌어오던 이탈리아 전선은 이 넘쳐나는 신무기들의 최종화력 시범장이 되어 버린 
것이다.
모든 전쟁에서 어김없이 나타나는 몇가지 정형화된 패턴주의 하나가 바로 패주하는 
군대의 무력함이다. 부대의 건재가 와해되고 패배가 목전에 다가온 군대만큼 
무력하고 허무하게 무너지는 것도 없다는 사실은 이미 이전의 수많은 전례를 통해 
충분히 확인된바 있지만, 이 이탈리아 전선의 독일군은 경우가 좀 달랐다.
그들은 실로 최후의 순간까지 치열하게 저항했는데, 그 이유는 간단하다 - 그들은 
돌아갈 곳이 없었던 것이다.
이미 독일 본토는 초토화되었고, 수도 베를린의 함락이 초읽기에 들어간 
상태였으므로 그들은 오직 살아 남겠다는 개인적인 이유로 싸우고 있었고, 
여기에는 선택의 여지조차 있을 수 없었다.
4월21일, 제5군과 8군은 볼로냐 북방에서 밥류하고 '제노아'와 '트리노'에 
돌입하여 3만명 이상의 독일군을 보로로 잡았는데 결과적으로 볼때 이때 포로가 된 
독일군은 그나마 행운아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무렵 독일본토에서는 독일군 패잔병들이 '끔직한 대우'가 뻔히 보장되어 있는 
소련군의 포로가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그래서 오로지 한발이라도 더 
영,미군의 점령지역에 접근하여 그들의 포로가 되기 위해 싸우고 있었던 것을 
생각한다면 이 이탈리아 전선에서 미군의 포로가 된 그들은 이미 빈사상태에 이를 
독일 제3제국의 군인으로서는 가장 운좋은 종전을 맞은 것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4월말에 이르자 마침내 베를린 함락의 소식이 들려왔고, 독일군은 빠른 속도로 
해체되기 시작했다. 연합군의 기갑부대는 맹진을 계속하여 알프스 산맥의 입구를 
봉쇄함으로써 오스트리아와 스위스로 탈출을 시도하는 독일군의 출구를 막아 
버렸고, 그곳에서 종전을 맞게 된다.
그리고 전쟁이 완전히 끝났을때 그들은 비로소 지난 20개월동안 그들이 치루었던 
악전고투의 의미를 알게 된다.
그들은 이 알프스산 너머에서 20개사단의 독일군 병력을 붙들어 두 있었던 것이다.
만일 그 20개사단이 서유럽 전선에 투입되었더러면 2자 세계대전이 끝나는 날은 
최소한 2~3개월은 더 늦추어졌을 것임에 틀림없고, 끝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장병들의 숫자도 그만큼 더 늘어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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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 o n g m u d o h a             公無渡河 公竟渡河 陸河而死 當泰公河
      G o n g k y u n g d o h a       公竟渡河 陸河而死 當泰公河 公無渡河
      T a h a i e s a                 陸河而死 當泰公河 公無渡河 公竟渡河
      D a n g t a e g o n g h a       當泰公河 公無渡河 公竟渡河 陸河而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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