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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litary ] in KIDS
글 쓴 이(By): Asteau (白首狂夫)
날 짜 (Date): 1998년 11월  9일 월요일 오후 05시 49분 53초
제 목(Title): 미국 공수부대의 약사



미국 공수부대의 약사

근대적인 대규모 공수작전의 아이디어를 처음 내놓은 나라는 미국이지만, 불행히도 
미 육군은 둘째 가라면 서러울 만큼 보수적인 색채가 강한 군대다. 그 때문에 2차 
대전 직전까지도 미육군에서 대규모 공수작전의 중요성은 그다지 거론된 일이 없다.
미 육군의 공수부대가 편성된 것은 독일군이 펼친 전격전에서 공수부대가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목격한 직후인 1940년 여름에야 겨우 1개 
공수대대(제501공수대대)를 출범시키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처럼 어렵게 출발한 미군 공수부대지만, 다른 나라와 달리 미국은 아주 유리한 
입장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공수부대를 편성하기 시작한 영국과는 정 반대로, 
미국은 충분한 양의 수송기와 물자를 일찍부터 확보할 수 있어 훈련과 편성에 
어려움이 크지 않았던 것이다.
1942년까지 미국은 완전편제의 4개공수부대를 확보할 수 있었고, 비행기와 동시에 
글라이더(이것도 독일군이 그 효용성을 입증했다)의 연구개발도 활발해져 곧 
낙하산 부대와는 별도로 글라이더 강하를 전문으로 하는 부대까지 편성되기 
시작했다.
이처럼 다른 나라에 비해 장비와 물자에 여유가 있던 미국은 야포나 차량 등의 
중장비도 공수부대에 비교적 쉽게 충당할 수 있었고, 마침내 42년 8월 15일에는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존속되고 있는 82 공수사단과 101 공수사단의 2개 공수사단을 
편성하기에 이른다.
이들 공수사단은 그 정원이 약 8,300명 정도로, 당시의 일반적인 미군 보병사단 
규모의 절반 정도에 불과 했지만, 어쨌든 단시간에 사단급의 공수부대가 편성 
되었다는 사실은 당시 미 육군이 공수작전에 의외로 큰 관심을 기울였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은 그 전해에 있었던 독일의 크레타 강하작전에서 비롯된 듯 하다. 
독일군은 여기서 큰 타격을 입고 다시는 대규모 공수작전을 실시하지 않았지만, 
미군과 영국군은 바로 이 전투에서 '공수작전으로도 대규모 전투부대를 보내어 
적지를 점령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했다는 것은 무척 아이러니컬 하다
미국의 공수부대는 팽창을 거듭하여 2차 대전 끝 무렵에는 5개의 공수사단을 
보유하기에 이른다.

> 나드잡 비행장 기습 (1943년)
영국군과 합동으로 수행한 공수작전이 아니라, 미군에 의한 단독 작전을 
꼽아본다면 그것은 유럽전선이 아니라 태평양 전선에서 찾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태평양 전선에서 벌어진 수차례의 크고 작은 강하작전의 시작이자 가장 대표적인 
공수작전이 바로 1943년 9월에 실시된 뉴기니아 '나드잡' 비행장 기습작전이다.
일단 공세의 주력은 오스트레일리아군 제9사단과 7사단이었지만, 503대대에 맡겨진 
비행장 점령 임무는 대단히 중요했다.
오스트레일리아군 제9사단은 바다로부터 상륙하고 제7사단은 503대대가 비행장을 
확보하면 수송기로 그곳에 착륙, 시내로 진입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이 임무를 위해 대대는 3개 중대로 나뉘어 제1중대가 비행장에 직접 낙하하고, 
2중대는 인근 마을에 낙하해 1중대의 서쪽을 엄호, 3중대는 1중대의 동쪽을 
엄호하기로 했다.
비밀 엄수를 위해 작전개시 하루 전인 9월 4일까지도 작전 내용을 전혀 알지 못한 
채로 훈련에 열중하던 503대대는 5일 오전 10시 30분에 강하를 개시했다. 기밀 
유지가 엄격했던 덕분에 이들은 일본군의 저항을 거의 받지 않았고, 작전 도중 
32명의 부상자와 3명의 사망자를 냈을 뿐이다. 그나마 사망자 중 두명은 낙하산의 
이상 때문에 발생한 추락사였다.
비행장 외곽의 울창한 수풀 때문에 아군끼리의 오인사격이 수 차례 벌어졌지만 
경상자가 두 명 발생하는 것으로 그쳤고, 곧 이어 투하된 오스트레일리아군의 
25파운드 야포 2문과 12문의 화염방사기를 동원하여 일본군을 손쉽게 일소할 수 
있었다.
확보된 비행장으로 공수된 오스트레일리아군 제7사단은 라에 시를 향해 공격을 
개시했고, 결국 9월 16일 라에시는 연합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 버시티 작전 - 유럽전선 최후의 대규모 강하작전 (1945년)

1945년 3월 24일.
하늘을 까맣게 뒤덮은 항공기의 대편대가 라인강을 건넜다.
이들은 미국 제17공수사단과 영국 제6공수사단으로, 라인강 건너편 독일땅에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한 '비시티' 작전의 첨병이었다.
무려 2만1,680명의 공수부대와 약 3천대의 수송기, 글라이더가 투입된 이 작전은 
연합군의 라인강 도하를 성공적으로 끝내기 위한 전초작업이었다. 비록 
빈사직전까지 내몰려 있다고는 하지만 독일군의 저항은 여전히 드세었고, 이들을 
라인강 연안에 그대로 놔두고서는 강을 건너는 연합군의 주력부대가 포탄의 비를 
뒤집어쓸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3월 24일 새벽부터 연합군은 독일군 진지에다 치열한 예비 폭격과 포격을 
퍼부었고, 그날 오전 10시 20분경에 영,미 공수부대가 일제히 목표지점 상공에서 
낙하를 개시했다.
엄청난 예비포격과 폭격으로 큰 피해를 입은 데다 사기가 꺽인 상당수의 독일군이 
저항을 포기하고 항복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독일군은 여전히 결사적으로 저항해 왔고, 또 투하된 공수부대의 
일부는 예정된 강하지점을 크게 벗어나 떨어지는 등, 초기의 혼란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11시 30분 경에는 거의 모든 부대가 지상에서 재편성을 마칠 수 있었고, 
오후 2시경이 되자 마침내 공수부대는 수km 떨어진 곳에 있던 연합군 주력부대와 
합류했다.
버시티 작전이 그간의 다른 공수작전과 다른 점이라면 이때부터 공수부대가 적 
기갑전력에 대해 상당히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과거에 비해 충분히 진전된 대전차병기의 기술적 발달 덕분으로, 특히 
미군의 75mm와 57mm대전차 무반동총은 독일군 기갑부대에 엄청난 타격을 입혔다. 
치열한 예비 포격과 폭격에도 불구하고 작전지역 안에 적잖은 독일군의 장갑차와 
자주포, 전차가 남아 있지만, 이들은 대부분 공수부대에 의해 격파 당했다.
24일 저녁쯤에는 예정된 목표를 성공적으로 장악할 수 있었고, 이날 하루에만도 
연합군 공수부대는 수천명을 포로로 자고 다수의 독일군 전차 및 야포를 파괴하는 
등 독일군에게 궤멸적 타격을 입혔지만, 아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이 날의 
전투로 전사자 500여명, 부상자 1,250여명이라는 피해를 감수할 수 밖에 없던 
것이다.
연합군의 라인강 도하작전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연합군 지상부대와 합류해 진격을 
계속한 영-미 공수부대는 3월 28일까지 약 7천여명의 독일군을 다시 포로로 잡는 
대전과를 세웠다.
버시티 작전은 2차대전 최후의 공수작전이자 하루동안에 수행된 
공수강하작전으로는 사상 최대 규모이지만, 그 전해에 있었던 '마켓가든'작전에 
비하면 훨씬 성공적으로 끝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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