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military ] in KIDS 글 쓴 이(By): Asteau (白首狂夫) 날 짜 (Date): 1998년 11월 5일 목요일 오전 10시 26분 42초 제 목(Title): 영국 공수부대의 역사 <영국> 영국 공수부대의 역사 유명한 영국 공수부대는 2차대전 초기, 독일 공수부대의 활약에 자극받아 창설되었다. 1940년 6월, 처어칠 수상은 공수부대 창설을 명령했고, 그로부터 2주뒤에는 '맨체스터'에 공수훈련센터가 설립되었다. 당시 영국운 독일군의 영국 본토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그 유명한 코만도 부대를 편성했는데, 이들은 유럽대륙 잠입수단으로 공수훈련을 받은 뒤 제11특별항공임무대대로 편성되었고, 이들이 바로 제1공수사단의 전신이 되었다.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처럼 영국이 공수부대의 확층을 서두르고 있던 시기는 바로 독일이 '크레타'에서의 대 피해이후 더 이상의 강하작전을 사실상 포기한 시기와 정확히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1941년 2월 10일, 이탈리아의 '프리아'에서 이들은 첫 실전을 겪는다. 이곳의 공업시설을 파괴한다는 임무는 성공했지만, 탈출하는 도중에 전원이 이탈리아군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제11특별대대는 제1공수대대로 개편되고, 뒤이어 16개의 공수대대가 더 창설되었다. 그리고 이때쯤부터 이들은 유명한 붉은 베레모를 쓰기 시작하여 '붉은 악마'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1942년 후반이 되자 부대수송용과 화물수송용용으로 두 종류의 글라이더가 생산되기 사작했고, 2개 공수여단(각 3개 대대로 편성)과 글라이더 1개 여단으로 하는 제1공수사단과 제6공수사단이 편성되었다. 대전중에 이들이 벌인 대표적인 대규모 공수작전은 1943년 7월의 시칠리섬 강하작전을 필두로 44년 6월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44년 9월의 '마켓가든' 작전, 45년 3월 라인강의 '버시티'작전 등이 있다. 영국 공수부대의 주요 전력 > 데뷔전 (이탈리아 1943) 영국 공수부대의 주요전력은 결코 그 자체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공수부대의 창설부터 종전시까지, 영국 공수부대는 한번도 예외가 없이 미군 공수부대와 함께 공동작전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영국 공수부대가 처음으로 사단규모의 작전에 투입되었던 1943년의 시실리 강하작전 역시 마찬가지로, 1943년 7월 10일에 개시된 이 '허스키'작전에서도 영국 제1공수사단은 미국 제82, 제101공수사단과 함께 투입되었다. 하지만 연합군의 첫 대규모 공수작전이었던 이 작전은 결코 성공을 거두었다고 말할 수 없다. 북아프리카를 이륙한 144대의 글라이더 중에서 거의 반수에 해당하는 72대가 돌풍에 휘말려 바닷속으로 추락해 버렸고, 목표지점인 '폰테 그란테'에 착륙하는데 성공한 병력은 불과 9대의 글라이더와 87명의 병력뿐이었던 것이다. '시실리의 학살'이라 불리운 이 작전이 가져온 유일한 효과라면 독일군으로 하여금 "연합군에도 공수부대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정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최대의 성공 (노르망디 1944) 1944년 6월 6일, 영국 공수부대의 역사에 길이 남을 성공적인 공수작전이 프랑스에서 펼쳐진다. 영국 제6공수사단은 6월 6일 새벽, 노르망디 해안에서 약 10km 떨어진 후방지역으로 낙하했다. 이들의 임무는 영국군이 상륙할 노르망디 해안 좌익의 배후에 교두보를 확보하는 동안 에 해안으로 몰려갈 것이 뻔한 독일군 증원병력의 발목을 붙잡아 두는 것이었다. 6사단을 구성하는 제3, 제5 공수연대는 6일 자정을 기해 일제히 각자 맡은 공격지점을 향해 낙하했다. 제5연대는 비교적 큰 곤란 없이 예정대로 목표지점에 도착하여 글라이더로 운반되어 온 대전차포와 차량까지 확보한 뒤 중요 목표인 '랑빌'읍을 제압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함께 출발했던 제3공수연대는 5연대만큼 운이 좋지 못했다. 독일군의 대공포화에 놀란 수송기들이 서둘러 병력을 강하시키면서 3연대는 대부분 예정 지역보다 더 동쪽에 흩뿌려졌고, 이 과정에서 상당수의 병력이 늪지대에 떨어져 익사하거나 엉뚱한 곳에 떨어졌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이들은 공수부대 특유의 왕성한 투지를 발휘하여 수시간 안에 공격목표였던 '디브'강 위의 다리 5개를 폭파시키는 전과를 올릴 수 있었다. 특히 '멜빌'의 독일군 포대를 폭파하기 위해 투입된 제9공수대대는 독일군의 대공포 사격으로 하늘에서부터 큰 손해를 입었고, 착지 직후에 대대장 '오토웨이'중령이 간신히 수습할 수 있던 병력은 전체 750여명 중에서 겨우 150여명에 불과했다. 중장비마저 모조리 잃어버린 상황에서 그들은 그대로 목표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고, 결국 폭파에는 성공했지만 작전종료 후 살아 남은 병력은 60여명에 불과했다. 날이 밝으면서 이들은 독일군의 맹반격에 직면하여 방어전에 돌입했지만, 곧 이어 몰려든 영국군 상륙부대와 합류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이 작전은 당초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 아른헴 - 붉은 악마의 묘지 (1944) 노르망디가 '붉은 악마'가 거둔 가장 큰 성공이라면 최대의 비극은 단연 네덜란드 '아른헴'에서의 '마켓가든'작전이다. 1944년 9월, 미국 제82/101공수사단과 함께 영국 제1공수사단이 네덜란드 '아른헴'에 낙하했다. 이들 공수부대가 아른헴 일대의 여러 도로와 다리들을 점령하면 그 길을 따라 연합군 기갑부대가 초 스피드로 독일의 '루우르'공업지대로 밀고 들어갈 수 있으며, 이렇게 되면 그 해가 다 가기 전에 베를린 까지도 점령할 수 있다는 '몽고메리' 원수의 야심찬 계획에 의해 추진된 이 마켓가든 작전은 시작부터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연합군은 이 지역의 독일군 방어태세가 빈약하다고 생각했으나 실제로는 2개 SS기갑사단이 진을 치고 있었고, 이들이 즉각 반격에 들어가자 미국과 영국의 공수부대는 착지한 곳에서 독일군에 포위되어 고립 당할 수 밖에 없었다. 예정대로라면 이들은 길어야 이틀동안 진격해 오는 영국 제30군단의 기갑부대를 기다리면 되지만, 예상치 못한 독일 기갑사단의 반격으로 30군단 전차들이 거북이 걸음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공수부대는 엄청난 희생을 강요 당했다. 결국 예정보다 6일이나 초과한 8일 뒤에 약 1만명여명의 1사단 병력 중 2,000여명만이 살아서 그 자리를 빠져 나오는 참담한 결과와 함께 이 작전은 대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To be continued... ------------------------------------------------------------------- G o n g m u d o h a 公無渡河 公竟渡河 陸河而死 當泰公河 G o n g k y u n g d o h a 公竟渡河 陸河而死 當泰公河 公無渡河 T a h a i e s a 陸河而死 當泰公河 公無渡河 公竟渡河 D a n g t a e g o n g h a 當泰公河 公無渡河 公竟渡河 陸河而死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