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military ] in KIDS 글 쓴 이(By): Asteau (白首狂夫) 날 짜 (Date): 1998년 11월 2일 월요일 오후 02시 25분 45초 제 목(Title): 독일 공수부대의 주요전력 독일 공수부대의 역사 재미 있는 것은 오늘날 대부분의 나라에서 공수부대가 육군 소속인 것과는 달리 독일군의 공수부대는 공군이었다는 점이다. 1935년에 처음으로 육군에 제22공수 보병사단이 창설되었지만 이것은 이름만 사단일 뿐, 실제 병력은 대규모 정도로 실전부대가 아니라 공수 강하전술에 관한 연구를 담당하는 일종의 연구소에 가까웠고, 그나마 곧 공군에 통합되고 만다. 1936년에는 '스텐달'에 공수낙하 훈련소가 세워지고, 여기서 패출된 인원들로 1938년에 공군 제7항공사단이 창설되었다. 그리고 그 예하의 불과 1개 연대에 불과한 이들이야말로 2차 대전의 서전에서 '천하무적 하늘의 사냥꾼'전설을 만들어 낸 주역이었던 것이다. 독일 공수부대의 주요전력 > 노르웨이 전선 (1940년) 독일 공수부대의 첫 데뷔전은 1940년 4월 6일에 개시된 노르웨이 전투다. 본격적인 유럽 대륙의 개전을 앞두고 연합국과 독일군의 지상군이 처음으로 맞붙은 이 전투에서 그 무렵 창설된 지 얼마되지 않은 독일 공군 제1공수 연대의 1개 대대가 참가하여 세계 최초로 실전 낙하산 강하작전을 기록하게 된다. 원래 계획에 의하면 개전의 첫 순간인 4월 9일에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에 1개 중대가 낙하산으로 강하할 예정이었지만 악천후로 인해 이 계획은 취소된다. 결국 오슬로를 점령하는 임무는 수송기로 노르웨이군 비행장에 강행착륙한 제163보병연대에 의해 완수되었고, 그에 따라 실질적인 첫 공수작전은 그 닷새후인 4월 14일 '스타방게르'와 '돔바스' 항구에 상륙하는 영국군을 축출하는 반격작전에서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날 투입된 불과 1개중대의 독일공수부대는 곧장 영국군의 머리위로 떨어지거나 거센 바람이 날려 뿔뿔히 분산되어 버리는 바람에 그다지 주목할 만한 전과를 남기지 못했고, 이로 인해 연합군 역시 공수부대가 간직하고 있는 무서운 잠재력을 눈치채지 못한채 끝나고 말았다. > 서부전선 (1940년) 약 일년여에 걸친 지루한 대치상태 끝에 마침내 독일이 프랑스와 그 주변국을 향해 진격을 개시한 1940년 5월 10일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독일 공수부대의 데뷔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네덜란드에 강하한 독일 공군 제1공수연대는 순식간에 네덜란드 전역의 주요 도로와 교량을 점거함으로써 유사시에는 운하의 둑을 터뜨려 침공군에게 수공(水功)을 가한다는 네덜란드군의 전통적인 방어전략을 무력화시켜 버렸다. 그 유명한 독일 기갑부대의 전격전도 따지고 보면 이처럼 기습강하작전으로 진격로를 확보해 준 공수부대의 활약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던 것이다. 특히 벨기에는 불과 438명의 독일 공수부대에 의해 한나라의 군대 전체가 무너지는 꼴을 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벨기에군은 독일 국경에 건설된 '에반 에말'요새에 국가의 방위전력 전체를 집중시키고 있었고, 개전의 첫 순간에 '발터 코흐' 대위가 지휘하는 독일 공수부대 '코흐 전투단' 438명이 이 요새를 기습했다. 이틀간의 전투끝에 독일 공수부대는 에반 에말 요새를 점령하는 동시에 알베르 운하에 걸린 3개의 다리를 점령하는 대전과를 올렸고, 이 다리를 통해 전차부대가 쏟아져 들어가는 것으로 이 나라의 운명은 끝나버렸으니, 벨기에는 사실상 500여명도 안되는 독일 공수부대에 의해 함락되었다고 해도 큰 무리가 아닐 것이다. > 크레타 메르퀴르 작전 (1942년) 그리스령 '크레타'섬에 대한 공수작전은 대전시간 중 독일군이 펼친 가장 대규모의 강하작전인 동시에 독일 공수부대가 내리막길은 걷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그리스 본토를 독일군에 내어준 영국 원정군이 모두 크레타 섬으로 도망치자 독일 공수부대의 총수 '쿠르트 시투덴트'장군은 대규모 공수부대를 이 섬에 낙하시켜 영국군을 일소해 버릴 것을 제안했다. 히틀러가 이것을 승인함에 따라 무려 4개 연대 23,000여명의 공수병력이 500여대의 수송기와 역시 500연대의 글라이더를 이용하여 크레타섬에 강하했다. 하지만 크레타섬의 영국군과 뉴질랜드군은 암호해독기 '울트라'를 통해 이 병력이 '말레메'와 '레팀논', 그리고 '이클라리온' 비행장에 낙하한다는 사실을 소상히 알고 있었고, 이처럼 '불시의 기습'이라는 장점을 잃어버린 독일 공수부대는 두발이 땅에 닿기도 전에 하늘에서 완전히 일방적인 '집단학살'을 당하고 만다. 천신만고 끝에 크레타의 영국군을 모두 지중해 건너의 아프리카로 쫒아보내는데 성공하지만, 이 전투에서 독일 공수부대도 4,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는 대피해를 입었다. 이로서 크레타는 '독일 공수부대의 묘지'로 불리우게 되었고, 그 엄청난 피해에 놀란 히틀러가 다시는 이런 대규모 공수작전을 실시하지 않기로 결심함에 따라 그 후로 공수부대는 사실상 보병부대나 다름없는 신세가 된다. 이후 전투의 무대가 북아프리카를 거쳐 이탈리아로 옮겨가고, 러시아로까지 넓혀짐에 따라 독일 공수부대도 이 모든 전선에 빠짐없이 참가했다. 특히 그 유명한 이탈리아의 '몬테 카시노' 전투는 순전히 공수부대가 단독으로 연합군에 맞선 전투였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이 당시의 독일 공수부대는 더 이상 공수부대라고 부를 수 없는 상태였다 - 공수부대의 생명이라고나 할 기습 강하작전을 완전히 포기하고 평범한 지상군부대로서 활약했기 때문이다. 1944년부터 독일공수부대는 부쩍 양적인 팽창을 보여주지만, 그 내용을 알고 보면 그다지 좋은 현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이 무럽부터 제공권이 완전히 연합군의 수중으로 넘어간 유럽 하늘에서 독일 전투기가 완전히 사라져버림에 따라 할 일이 없어진 전투기 조종사나 정비병 같은 인원들이 모두 공수부대로 전속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름만 공수부대 일 뿐이지, 당연히 과거와 같은 강도 높은 훈련을 받지 못했고 하늘을 찌르는 높은 사기도 없는 2선급 병력이었던 것이다. 일반 보병 만큼도 지상전투 경험이 없는 약체부대로 변질되어 버린 이들이 모두 러시아 전선으로 보내진 것도 특별한 이유가 있다기 보다는 인적소모가 극심했던 러시아 전선의 만성적인 병력 부족을 메운다는 것 이외의 의미는 없었다. > 발지전투 (1944년) 1944년 겨울의 발지전투는 독일공수부대에게 있어서 흡사 꺼져가는 촛불이 마지막 불꽂을 내뿜는 것과 같은 최후의 몸부림이었다. 독일군은 마지막 안간힘을 쥐어짜 벨기에의 '아르덴노'에서 대대적인 반격을 계획했고, 여기에는 당연히 그때까지 남아있던 독일군의 모든 전력이 총집겼되었다. 독일군의 공수부대 잔존병력은 대부분 지상전력의 일부로써 이 전투에 투입되었지만, 제9공수사단의 데르 하이테'대령이 지휘하는 1,000명의 강하대원들은 오랫만에 문자 그대로 '최후의 공수작전'을 펼치게 된다. 1944년 12월 15일, '말메디' 북방에 강하하여 미군이 이 지역으로 증원부대를 투입하는데 사용할 것으로 예상되는 2개의 주요도로를 점령하는 것이 이들의 임무였다. 하지만 그들은 비행장으로 실어나르 트럭의 연료조차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강행된 이 최후의 강하작전은 그 결과 또한 비극적이었다. 심한 악천후와 장비부족으로 인해 "10%미만의 성공 확률"을 믿고 출격했던 수송기의 대열은 연합군의 맹렬한 고사포 사격으로 반수 이상이 하늘에서 산산조각이 났고, 간신하 투하된 강하대원들도 목표지점에서 크게 벗어나 독일군내의 '본'과 네덜란드로 뿔뿔히 흩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무사히 목표지점에 착지하는데 성공한 대원은 120여명에 불과했고, 임무수행을 포기한 그들은 근처 숲에 몸을 숨기고 아군전차대의 도착을 기다렸다. 하지만 온다던 독일 제6기갑군의 전차들은 일주일이 지나도 오지 않았고, 굶주림과 혹한, 그리고 피로에 지친 공수부대는 전원 미군에 투항하고 만다. To be continued... ------------------------------------------------------------------- G o n g m u d o h a 公無渡河 公竟渡河 陸河而死 當泰公河 G o n g k y u n g d o h a 公竟渡河 陸河而死 當泰公河 公無渡河 T a h a i e s a 陸河而死 當泰公河 公無渡河 公竟渡河 D a n g t a e g o n g h a 當泰公河 公無渡河 公竟渡河 陸河而死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