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aw ] in KIDS 글 쓴 이(By): guest (정 상 희) <163.152.90.60> 날 짜 (Date): 2000년 10월 11일 수요일 오후 01시 23분 31초 제 목(Title): 법과 문학사이-안경환 교수님 칼럼- ▶ 월리스 스티븐스 「지상의 허구를 위한 습작」 ------------------------------------------------------------------------------- - "법률가와 시인의 세계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법률실무를 할 때나 시를 쓸 때나 똑같은 마음이다. 각각의 일에 모든 정성을 쏟는다." 20세기 중반의 미국의 대시인 월리스 스티븐스(Wallace Stevens, 1879-1966)에게는 시심(詩心)과 법심(法心)이 따로 없다. 그의 법과 문학 세계에는 '사이'라는 것이 없다. 시인 스티븐스의 세속적 직업은 보험사건 전문 법률가였다. 엄숙한 표정에 짧고 성긴 백발, 큰 얼굴을 지휘하는 주먹코, 어깨 너비의 두 배나 되는 몸통, 단정한 양복에 빨간 넥타이, 전형적인 손해보험회사 부사장에게 어울리는 행색이다. 저적권의 법적 보호에 힘입어 '작가'라는 직업이 탄생한 이래 문학사의 거목들은 대부분 창작 그 자체를 생업으로 삼는 전업작가였다. 창작이란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야만 가능한 일이라 또다른 생업을 가질 여유를 주지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스티븐스는 카프카와 마찬가지로 극히 예외적인 인물이다. 이들은 평생을 '돈 쓸 시간도 없을' 정도로 바쁘다는 변호사로 일했다. 그러면서도 일과 후에는 작품을 썼다. '낮 퇴계 밤 퇴계'운운하는 우스개소리도 있지만 이와는 다른 의미에서 '낮 스티븐스'와 '밤 스티븐스'는 하는 일이 달랐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나 전심전력이었다. 그만큼 스티븐스의 삶은 그의 문학세계만큼이나 엄정한 절제의 연속이었다. 대표적 장시(長詩) 「지상(至上)의 허구(虛構)를 위한 습작」(Notes Toward A Supreme, 1942)에서 그는 시가 갖추어야 할 3대요소로 시는 추상적이어야 하고, 변화해야 하며, 그리고 기쁨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그의 시론(詩論)은 그것 자체로서 하나의 고유한 세계이다. 허구와 추상성의 지론에 걸맞게 스티븐스는 일상 신변에서 일어나는 인간 삶의 구체적인 모습에는 냉담하리만큼 무관심한 인물이었다. 일과 시간에는 누구보다 철저했던 만큼 자신의 법분야에서는 가히 대가의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보험법 실무도 따지고 보면 자신의 표현대로 "한 사람의 주머니에서 다른 사람의 주머니로"재화를 이동시키는 지극히 자신만의 추상적인 작업에 불과했던 것이다. 퇴근 후 스티븐스는 자신만의 세계로 침잠한다. 작가의 서명을 받으러 시집을 들고 회사로 나타나는 팬을 돌려보내듯, 결코 회사 일을 집에 가져오는 일이 없다. 물론 손님을 청하는 일도 없고 자신의 작품을 현증할 정도로 절친한 심우(心友 ; 헨리 처치[Henry Church])와도 주로 편지로 교감한다. 독서, 사색, 산보가 스티븐스에게는 시작(詩作)을 위한 예비작업의 전부이다. 무남독녀 할리의 눈에 비친 아빠는 식사가 끝나면 "자기 방에서 책만 읽는 사람"이었다. 그 딸이 대학을 중퇴하고 일찌감치 독립을 선언할 때에도 편지 한 장으로 아쉬운 부정(父情)을 절제한다. "인생의 중요한 그 무엇도 돈벌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란다. 나는 네가 자신도 모르는 가운데 서서히 인생의 가장 위대한 단면을 꿰뚫는 지성과 상상력을 갖추기를 기대했었단다." 아버지와 형 둘 또한 법률가였지만 스티븐스는 하층계급 출신의 아내와 결혼함으로써 결코 접근할 수 없었던 아내가 신경쇠약에 시달렸어도 남편 스티븐스에게 그것은 하나의 허구적인 사실에 불과했다. 법률가이면서 한 번도 고객을 직접 대면하거나 법정을 출입하지 않은 그는 "삶이란 인간에 관한 이야기이지 장소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내게는 정반대인 것이 문제이다." 대가의 삶과 문학관에 감히 무슨 평을 할 수 있으랴. 다만 남과 달리 사는 외로움이 곧 자부심이었으리라. 세계에서 가장 '시인'이 많은 나라가 한국이라고 한다. 시집이 가장 많이 팔리는 나라 또한 한국이라고 한다. 개중에는 '법조시인'을 포함하여 '전문가'가 아닌 '시인'의 시집도 많다. 일단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말해두자. 언제부터인가 국토를 휩쓸고 있는 전국민의 가수화운동과 함께 시인화운동이 벌어진다고 해서 나쁠 것이 없다. 단순한 여력이나 파한거리로 시를 쓰는 것은 아닐 테니까. 스티븐스처럼 자신의 전부를 걸고 쓰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