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terraic (불의 전차 H) 날 짜 (Date): 1996년08월16일(금) 09시40분50초 KDT 제 목(Title): 대]누구를 위한 친일인가? 먼저 환상님의 좋ㅇㄴ 조언 에 깊이 감사 드립니다. 여러분의 이런 저런 관심이 저희가 하는 아주 작은 일에는 큰 도움이 되니까요. 자신의 삶을 철저히 짓밟히고, 오늘에도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여러 어르신들에 비한다면, 이국의 하늘아래에서 이름 석자도 남기지 못하고 참담히 스러진 이들 에 비한다면 저희으 일이란 너무도 부그럽고 작은일이라 느끼기에... 음.. 전 개화기, 일제시기의 우리나라에 대하여 글을쓴 여러 선교사들의 글에 대하여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들의 글은 일단 사료적인 사치는 있다. 그러나 객관적인 이야기라기 보다는 극히 주관적인 개인ㅈㄱ 의견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가장 기본적인(모두는 아니나 많은 수가 지니고 있던) 사고의 틀은 우매하고 불결하며, 게으른 미개의 땅에 문명 개화의 시기를 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문자 그대로 선교사 엿습니다. 어던 사회에 대하여 그 사회의 문화적 토양을 이해하고, 전통의 측면을 이해하려는 지리학자나, 인류학자, 사회학자라기 보다는.... 결국 그네의 시각은 종교의 문과 서양 우월주의(그렇다고 동아시아 문화 최고라고 외치는 순진 무구한 생각에 찬성하 는 것도 아닙니다.)의 벽에 둘러 싸여 있던 관객에 불과한 측면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한국사회의 맥락을 보기 보다는 자신이 익숙해진 서구의 시각으로 재단하고 평가한 것입니다. 김활란의 예를 들지요. 아니 이나라의 소위 초기 개화인맥으로 부터 이어지는 근대화론자들이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그의 박사 논문은 농촌 계몽이라는 문제에 대한 것입니다.(박사 논문으로 사람의 사고를 평가해 보는 것에 반론의 여지는 있지만.) 한국의 농촌이(당시의 한국 사회의 기반을 이루는 산업이 농업 이고, 도시화율은 낮았다는 것은 기지의 사실이겠죠...:)) 가난과 기아에 허덕이는 것은 계몽되지 아니한 탓이고, 그의 혁파를 위해서 협동조합의 건설과 교육이 절실하다... 그것이 문제를 해결한다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김활란은 덴마크의 농촌 부흥운동의 경우를 배워서 그대로 적용하자고 외쳤습니다. 글세요... 그런 진단이 맞을까요? 계몽만 되면 모든 어려움은 없ㅇ질가요? 당시 한국 농촌의 가장 큰 문제는 기술의 낙후라는 측면 역시 있지만, 강력한 지주 소작농 관계에 얽매여 있었고, 혁신이라든지 발전의 가능성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계몽시켜서 좋은 화장실 짓게하는 문제 만큼, 사회구조적 제야악점들을 지적했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민족이 지니고 있던 현실적인 문제의 적시와 해결 노력을 하기 보다는 미개함과 교육의 결여라는 문젤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교육운동을 했다고 주장 합니다. 글세요. 민족의 각성을 위해서? 음.. 저는 극히 회의적입니다.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학교는 불해앵히도, 돈많은 부호, 지주 (이들은 또한 일제의 식민지배 정책에 나오는 봉건 질서 강화를 통한 향촌 지배와 관련이 있습니다.)의 자재 였고 그들이 배운 내용은 ... 민족문제나 현시 문제 해결과는 거의 관련이 없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학교였으ㅏ 학교라기 보다는 유한 계급의 유희장이나 사교장 적인 성격이 강했다는 몇몇 론자의 주장이 그리 설득력 없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들도 알았을 겁니다. 그 학교의 교장이나 그런 이들도 자기들이 하는 교육 내용이나, 그런 것ㅇ 민족문제나, 그런 것과는 별 ㅏㅇ관 없고 그렇다는것을.. 그들이 지킨 학교들은... 소위 민조주의와는 거리가먼 그런 것이라는 것을... 김활란.. 그니어는 강변했죠.. 학교를 지키기 위해서.. 그대 그학교는 40년대에 농촌 생활개선운동(일제가 편 전시운동)지도원 양성소로 스스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네 음악학과 학생들 동원해서는 일본 전함 만들 모금 음악회하고 그 수익금을 손수 총독부에 전달(신문 기사내용임.)총독부의 갑부들을 감격 시켰죠.... 글세요.. 누굴위해 지킨 것인지.... 이 지루한 글을 서정주의 변명과 촌평으로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서정주는 자신이 친일한 것이 하늘의 듯이라고 생각해서 였다고 최근에 말했어요. 그리고 창씨 개명한 사람 전부 그렇게 생각했다고.. 물리력으로 강제한 것에 끌려간 것이 하늘의 듯이었다는 것도 그렇고, 또하나, 일젠ㄴ 전시 공채를 발해앵해서 일본과 조선 대만에 팔았습니다. 판매 실적 보고에 의하면 조선인의 1인당 채권 소비량은 일본의 1/6, 대만의 1/3정도 였습니다. 군 징용도 마찬가지고... 조선인은 하는데 까지 개기려고 발버둥치고 있었습니다. 얕은 양은 그릇들이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는 동안에.... @terraic 지난 밤새 비가 내리고, 거리의 낙엽들은 슬픔에 울었다. 폭풍우속의 낙엽들... 거기서 너의 얼굴과 너의 숨결을 맛본다. 가야겠다..... <a href="http://plaza.snu.ac.kr/~kimjongy">Youni's Home</a><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