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목록][이 전][다 음]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guest (독광)
날 짜 (Date): 1996년07월11일(목) 18시57분34초 KDT
제 목(Title): 반민특위 일지 II



반민 특위.
일제하의 각종 문서를 토대로 약 7천명의 친일 죄상을 파악한 후 1949년 1월부터
검거 시작.

1월 8일 - 박흥식 검거
1월 10일 - 이종형 검거
1월 13일 - 방의석, 최린,김태석 검거
1월 14일 - 친일 변호사 이승우, 남작 이풍한 검거.

1월 6일 - 이승만의 방송 담화로 반민특위간의 격돌 격화
          "질이 심상한 법안이 아닌만큼 그 죄를 범하게 된 근본적 배경과 역사적
           사실을 냉철하게 참고, 범죄자의 수량을 극히 감축" 하도록 요구.

부위원장 김상돈 즉각 기자회견
"누구를 막론하고 특위의 처사에 간섭 못하며 간섭할 필요도 없다."

1월 25일 - 일경출신으로 수도청 수사과장 노덕술 체포
           (이것이 반민 처벌보다 멸공,치안을 중시하던 이승만에게 충격을 줌)

1월 26일 - 이승만은 특위위원장 김상덕을 불러 노덕술의 석방을 종용.
           이에 김상덕은 범법자의 석방요구는 법률위반이라고 반박.
           노의 석방을 거절.

2월 2일 - 이승만의 특위에 대한 두 번째 담화에서 또다시 제동
          "반민특위는 입법부와 행정부와 사법부의 일을 다 혼합해서 행함으로
           3권 분리의 원칙을 위반"

2월 3일 - 김상돈은 기자회견에서 이를 반박
          "반민법은 헌법에 의해서만 특별법인 이상 그 법에 의한 특위활동에는 u
           위헌요소는 있을 수 없다."

2월 10일 - 공보처에서 "특위가 요청한 행정부 내의 반민자 조사를 중지한다"고 발표

           같은날 특위는 "친일파는 공복될 자격이 없다....공보처장의 담화는 
유감"

2월 12일 - 이승만은 긴급 기자회견에서 공보처장의 발표는 사무착오라고 해명.

2월 15일 - 이승만은 [2.15 특별담화]을 함.
           "사람을 잡아다가 구금.고문 함은 위법이며, 반민법은 치안에 대한
            관련성 문제가 심각하니 개정안을 제출하겠다."
            (반민법 자체의 시비로 초점을 전개하기 시작.)

2월 16일 - 조선일보 '반민자 처단에 암운저미"란 표제로 이승만의 담화에 대해 
유감표명.


특위는 즉각 위원장 김상덕, 검찰관 노일환, 조사관 서상열등이 담화, 고문사실 
부인.

같은날 대법원장 김병로는 "반민법은 특별법"이며 특위의 활동은 정당한 것이라고 
주장.

특위 조사부장 이병홍은 반민법을 "민족적 성전"이라 전제, 이숭만의 개정 발언에 
격앙.

2월 17일 - 의회는 재석 119명 중 60대 11로 담화 취소요청을 결의.
           "치안에 영향이 크다고 했는데 우리나라 치안은 반민자가 담당해야만
            된다는 말이냐"며 공식 반박.

2월 18일 - 이승만은 거듭 개정을 주장.

반민법을 견제하려던 층은 이승만이 정점인 행정부와 반공극우파를 가장한 친일세력
경찰내의 일경 출신 간부들이 대종.

이때 특위 부위원장 김상돈이 새로운 문제로 쟁점.

(김상돈이 일제 말 서교,망원경 총대(동장)으로 있었던 사실이 이승만에게 보고 
됨.)

3월 14일 - 이승만은 신익희와 김상덕을 불러 김상돈의 친일을 통고하면서 특위의
           불공평성을 추궁.

이것이 국회나 특위에 큰충격을 줌.
회의장이 소연한 속에서 김상돈은 신상발언을 하게됨.
정준 의원은 반민법 처벌은 일제하 모든 행위의 조사가 아니며 죄질을 
따져야한다고 주장.

김상돈 해임동의는 2차 투표결과 부결.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 목록][이 전][다 음]
키 즈 는 열 린 사 람 들 의 모 임 입 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