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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Ecomy (기억상실증�)
날 짜 (Date): 1996년06월27일(목) 15시02분29초 KDT
제 목(Title): 최린



최린
반민특위 법정에 선 독립선언의 주역

·崔麟, 창씨명 佳山 麟. 1878∼?
·1934년 중추원 칙임참의.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회장






변절의 극치

"기미독립선언을 주도한 피고가 왜 일제에 협력하게 되었는가?"
재판장 서순영(徐淳永)이 매섭게 추궁하였다.
"기미년 당시 일제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다고 해서 그들은 그 후 나
를 주목하고 위협하고 또 유혹하여 끝내 민족을 배반하는 행동을 하고 말
았다. 오직 죄스럽고 부끄러울 뿐이다."
피고는 목멘 소리로 대답하고 머리를 숙여 버렸으며, 방청석도 침통한 
분위기였다. 이윽고 답변이 계속되었다.
"내가 택할 수 있는 길은 세 가지뿐이었다. 첫째는 망명하는 길이요, 
둘째는 자살하는 길이며, 셋째는 일본 군문(軍門)에 항복하는 길이었다. 
첫째와 둘째 길을 택하지 못한 것은 늙은 부모에게 불효할 수 없어서였
다."

우리는 일제 침략하에서의 민족해방운동으로 흔히 3·1 운동을 꼽고, 이
를 준비했던 인사들을 '민족대표'로 기억하고 있다. '민족대표' 33인 가운
데서도 천도교측 인사로서 3·1 운동 준비를 실질적으로 주도했던 사람으로 
최린을 떠올리게 되는데, 위의 글은 3·1 운동으로부터 꼭 30년이 지난 
1949년 3월 30일 반민특위 재판정에서 최린 자신이 친일행각을 구차하게 변
명하던 모습이다.
이 날의 공판을 지켜봤던 한 기자는, 공교롭게도 법정 정면에 엄숙히 걸
려 있는 독립선언서가 최린을 모욕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고 썼다. 독립선언
의 주역으로서 일제 법정에 서서 당당하게 열변을 토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그가 친일파로 법정에 끌려나와 고개를 떨구던 모습을 두고 흔히들 험난했
던 근대사의 격랑 속에 끝내 지조를 지키지 못하고 훼절했던 한 인간의 말
로를 운운하게 된다.
독립선언의 주역과 친일파라는, 서로 극과 극을 달리는 두 모습만을 현상
적으로 대비시켜 보면 그의 개인적 삶은 분명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변절
의 극치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자라온 환경과 살았던 시대의 
역사 속에서 그의 삶의 궤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를 반드시 변절이라고 
부를 수도 없을 듯하다. 오히려 독립선언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예외적인 
현상이었을 따름이었던 것이다.

시세의 변화와 출세에 민감한 중인집안의 청년정객

최린은 1878년 함경도 함흥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집안은 중인 출신으로 
상당한 재산이 있었다고 한다. 이 때는 안으로 봉건사회가 해체되어가고 있
었으며 밖으로는 개항과 함께 서구문물이 밀려들어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당시 중인들은 오랫동안 양반들로부터 억압을 받아온 까닭에 봉건체제의 변
화, 나아가 조선왕조의 변혁을 갈망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시세의 변화
와 출세에도 극히 민감한 양면성을 갖고 있었다. 최린 역시 이러한 양면성
을 갖고 있었으며, 특히나 출세에 대한 집념은 대단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 점은 그의 삶의 행로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그는 어린 시절 고향에서 한학을 배우고, 1896년 당시 개화파 정권에 줄
을 대고 있던 아버지의 권유로 19세에 함경남도 관찰부 집사가 되었다. 그
런데 이 해 10월 새로 부임한 관찰사 서정순(徐正淳)이 갑오개혁의 신제도
를 실시하여 순검(巡檢)을 '인민보호관'이라고 하면서 도내 유지의 자제들
을 모집하였다. 순검이 무슨 대단한 벼슬자리인 줄 알고 응모했던 그는 미
관말직임을 알고 곧바로 박차고 말았다. 젊어서부터 유난히 야심이 컸던 그
가 궁벽한 지방 감영의 미관말직에 만족할 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1901년 상경하여 벼락출세의 길을 찾으며 전전긍긍하다가 1902
년 활빈당과 일심회에 가담하게 되었다. 당시 활빈당은 일본에 망명해 있던 
박영효*를 추종하는 불평객들의 집단으로 부호들의 재물을 탈취하여 박영효
의 정치자금을 마련하고자 시도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여 곧 해산되고 말았
다. 이 무렵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도 조선 정부로부터 임관통지가 
없어 귀국하지 못하고 불만만 쌓아가던 일단의 청년장교들이 있었는데, 일
본에 망명해 있던 유길준이 이들을 국내에 있던 불평 정객들과 연결시켜 대
한제국 정부를 전복하고자 일심회라는 단체를 조직하였다. 야심 많던 최린
은 오세창, 유동근 등과 함께 여기에 가담하게 된다. 그러나 곧 발각되어 
조택현, 장호익, 김형섭 등 주모자들이 체포되었으며 최린은 체포를 모면하
고 일본군의 도움으로 부산을 통해 일본으로 망명하였으니, 일본이라는 나
라로 정치적 도피를 할 수 있었던 경험을 한 셈이었다.
이듬해 최린은 일심회사건 연루자들에 대한 특사령이 내리자 귀국하여 개
화파의 주선에 의해 외부주사에 발탁되었다. 그 후 1904년 26세의 늦은 나
이로 황실유학생에 선발되어 다시 일본에 건너가 도쿄부립제일중학을 거쳐 
메이지대학 법과를 다니면서 일본을 통해 서구의 근대문물을 익히게 되었
다. 이 때 그는 같은 중인 출신으로 3·1 운동에서부터 친일행각에 이르기
까지 비슷한 정치적 궤적을 그렸던 최남선*을 같은 황실유학생으로 처음 만
나게 되었고, 1920년대 이후 정치적 보조를 같이하게 된 김성수, 송진우, 
장덕수* 등보다는 한 발 앞서 일본 유학을 마치고 1909년 귀국하였다.
이 무렵 일본에서 최린은, 충청도 부자 이상헌으로 이름을 바꾸고 망명해 
있던 손병희를 만난다. 그의 일생에 있어 중요한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그
가 손병희를 알게 된 것은 일심회 일로 같이 활동했던 천장욱이라는 사람의 
소개에 의한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후 손병희를 자주 만나면서 장차 그가 
천도교에 입도할 수 있는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는 귀국하여 정계 진출을 
모색하였으나 이미 국운이 기울어 '한일합병'과 함께 모든 정치단체가 해산
되는 상황이었다.
그러자 그는 종교단체인 천도교가 바로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펼칠 수 있
는 입지가 되리라 판단하고 1910년 천도교에 입도하여 곧 손병희의 측근이
자 일급 참모로 활약하게 되면서, 이후 천도교는 일생 동안 그의 활동기반
이 되었다. 당시 손병희의 주위에는 천도교를 정치활동의 발판으로 활용하
고자 했던 권동진, 오세창 등의 개화파 인사들이 모여 있었다. 그가 3·1 
운동의 준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게 된 것도 손병희의 측근에 있으면서 권
동진, 오세창 등 천도교 간부들과 함께 1차대전 후 변화하는 세계정세의 흐
름을 민감하게 감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독립선언의 주역, 흑막 속의 자치운동 주모자로

손병희를 위시한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의 천도교 지도부가 1차대전의 
종결과 함께 정치적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대략 1918년 말경부터라
고 한다. 그러나 이들이 처음부터 독립운동을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세계
적으로 풍미하고 있는 민족자결주의의 물결 속에서 잘 하면 일제통치하에서
나마 자치(自治)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도쿄에 건너가 일본 
정계 요로에 이를 교섭하는 운동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러나 1919년 초 도
쿄 유학생을 비롯하여 해외 각지에서 독립운동이 추진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최린은 국내외의 혁명적인 분위기에 고무되기 시작하였으며 또 
이러한 시세의 흐름에 뒤떨어져서는 사후 판세가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전개
될 수도 있다는 판단에 이르게 된다. 그리하여 재빨리 독립선언을 발표하는 
것으로 방향을 선회한 것이다.
이러한 정황으로 짐작되듯이 3·1 운동 시기에 최린이 일제에 대결하는 
자세는 결코 투철한 것이 아니었다. 최린은 3·1 운동의 재판정에서 '한일
합병'에 대해 "조선이 병합된 것은 러일전쟁의 당연한 결과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며, 또 당시 조선의 정치는 지독한 악정이어서 도저히 조선의 안녕
·행복을 유지·증진하기 불가능한 상태였기 때문에 병합에 찬성하지 않았
지만 피치 못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진술하였다. '민족대표' 최린
의 입에서 나온 이 말은 안타깝게도 일제가 조선을 '병탄'하면서 선전했던 
내용 그대로였던 것이다. 그만큼 그의 생각은 일제의 침략논리에 세뇌되어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또 현재의 조선인의 지모와 실력으로 독립국을 유지할 수 있겠느냐는 재
판장의 물음에 "일본 정부의 도움을 얻으면 독립국으로 설 수 있다"고 대답
하였으니, 이 말은 곧 일본의 도움이 없으면 독립국으로의 유지가 어렵겠다
는 뜻이 된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그의 독립사상의 실체가 어떤 것이
었는가를 짐작하게 되는데, 총독부 당국은 그 점을 이미 간파하여 독립선언
으로 성망(聲望)을 얻은 그를 본격적으로 회유하여 자신들의 품안에 끌어들
이기 시작한 것이다.
최린은 3·1 운동으로 3년형을 선고 받았다. 그런데 총독 사이토(齊藤實)
를 비롯한 당국자들은 최린을 '문화정치'에 이용하고자 1921년 12월에 가출
옥시켰다. 이후 그는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을 천도교에서 발행하는 {개벽}
에 게재하는 등 일제 당국자의 '문화정치' 이념에 충순하기 시작하여 민족
주의세력의 타협화를 유도하는 '문화운동', '자치운동'에 앞장 섰다.
1920년대 사이토 총독의 통치정책에 호응하여 벌였던 그의 활동 가운데 
가장 집요하게 전개되었던 것이 바로 자치운동이었다. 그는 1924년 초 {동
아일보}의 송진우, 김성수 등과 함께 자치운동을 추진하기 위한 단체인 '연
정회' 결성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광수의 {동아일보} 사설 [민족적 경륜]
에 비난이 쏟아지자 일단 이를 유보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1926년에 들
어 사이토 총독의 정치 브레인이었던 아베(阿部充家)의 간여 아래 송진우, 
김성수, 최남선 등과 다시 자치운동조직인 '연정회'의 부활계획을 주도하였
으며, 해외 민족주의세력의 후원을 얻기 위해 외유의 길에 올라 이승만, 안
창호, 장덕수 등을 만나 교섭하기도 했다.
한편 그는 민족주의적 요소가 많았던 천도교를 분열시키고 그 가운데 신
파의 주도권을 장악하여 자치운동 분쇄를 위해 결성된 신간회에 참여한 구
파측과 정치적으로 대립하였다. 또 민족주의자들이 상당수 망라되어 조직했
던 '조선농민사'를 자치운동의 기간부대로 삼고자 이를 천도교 신파측의 천
도교 청년당의 산하단체로 편입시켜 버렸다.
이런 최린은 1930년대 초까지 사이토 총독이나 사카다니(阪谷芳郞) 등 일
본 정계의 거물들과 교류하면서 집요하게 자치운동을 벌여 나갔다.
그러나 자치운동이란 실질적으로 일제의 식민지 통치를 용인하는 것으로 
독립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최린 자신도 아베와의 대담에서 밝혔듯
이 "조선은 독립 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가 끝끝내 자치운동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했던 것은 그의 권력욕 때문
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며, 그런 점에서 자치운동은 가장 그다운 운동이었다
고 할 수 있다. 아베에게 "나도 민중의 신임(?)만 얻으면 반드시 조선의회
의 한 사람이 되기를 사양치 않겠다"고 말한 대목이 그것을 뒷받침해 주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다시는 민족자결주의에 속지 않겠다"던 가야마 린(佳山 麟)

사이토 총독의 조종하에서나 가능했던 최린의 자치운동 행각도 만주침략
이 터지고 일제의 파쇼화정책이 노골화되면서 설 땅을 잃게 되었다. 침략전
쟁 수행을 위한 동원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그를 이용하려는 일제의 회유가 
본격화되었고 그의 출세욕은 아무런 저항없이 이를 받이들이게 했던 것 같
다. 1934년 4월 중추원 칙임참의가 되어 세인들의 이목을 끌더니 11월에는 
내노라 하는 친일파 박영철* 등과 함께 '시중회'(時中會)를 조직하여 대동
방주의(大東方主義)를 내걸고 일선융합(日鮮融合)을 외치기 시작하였다. 이
제 본격적인 친일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곧이어 1937년 총독부의 기관지 {매일신보}의 사장에 취임하여 '동양평화
의 대정신'이라는 연제하에 내선일체로 국민적 적성(赤誠)을 발휘할 것을 
외쳐댔으며, 중추원 참의 지방강연 행각에 참여하여 충성스런 황국신민이 
될 것을 떠들어댔다.
1940년에는 일제가 전시체제를 한층 강화하여 결전체제로 끌어올리기 위
해 내선일체와 전시경제체제의 완성을 목표로 전국의 모든 직장과 개인을 
얽어넣은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이사가 되었다.
1941년에 접어들자 그는 {삼천리} 사장 김동환*과 함께 임전체제하에서 
자발적인 황민화운동을 하기 위해 '임전대책협의회'를 조직한 뒤 각지에서 
강연행각을 벌였는데, 9월 4일 부민관에서 열린 임전대책연설회에서 '읍소'
(泣訴)라는 제목의 연설을 통해 조선 사람은 희생심이 부족한데 이 비상시
국을 희생적 각오로 떨쳐 일어서야 할 것이라고 강변하였다.
이 해 10월 '임전대책협의회'이 윤치호* 계열의 '흥아보국단'(興亞報國
團)과 통합하여 '조선임전보국단'으로 재발족될 때, 최린은 회장에 취임하
였다. 그리고 12월 14일 부민관에서 조선임전보국단 주최로 열린 미영타도
대연설회에서 그는 "루즈벨트여, 귀가 있거든 들어보라. 내가 윌슨에게 민
족자결주의에 속아 천황의 반신(反臣) 노릇을 하였다. 이 절치부심할 원수
야! 이제는 속지 않는다. 나는 과거를 모두 청산하고 훌륭한 황국신민이 되
었다는 것을 알아라"라고 까지 하여 자신이 주도했던 독립선언 자체를 깡그
리 부정하고 있으니, 이 대목에 이르면 그가 벌인 친일행각이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가히 짐작케 한다. 그런 그였기에 일제의 패망이 눈 앞
에 다가온 1945년 6월까지도 '조선언론보국회'를 결성하여 회장으로서 언론
총진격 대강연회를 열어 본토결전작전에 호응할 것을 외치고 있었다.
이처럼 그의 생애는 출세에 민감한 중인 출신이라는 집안 배경과 적극적
이고 야심많은 성격, 그리고 많은 신진지식인들이 세례 받았던 근대화지상
주의와 실력양성론이라는 사상적 조류, 끝으로 일제의 끊임없는 협박과 회
유가 교차되면서 한때는 독립선언의 주역이 되기도 하였으나 결국은 민족을 
배반한 친일파의 거두가 되고 말았다.
민족반역자 최린은 반민특위에서 석방되어 서울에 칩거하던 중 한국전쟁 
때 북으로 납북되어 그 후의 정확한 근황을 알 수는 없다.
          ■ 김경택(연세대 사학과 박사과정, 반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주요 참고문헌
여암선생문집편찬위원회, {如菴文集} 상·하, 1971.
市川正明 編, {3·1 독립운동} 1·2, 1989.
김영진 편, {반민자대공판기}, 한풍출판사, 1949.
고원섭 편, {반민자 죄상기}, 백엽문화사, 1949.
{민족정기의 심판}, 혁신출판사,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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