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Ecomy (기억상실증�) 날 짜 (Date): 1996년06월27일(목) 14시40분12초 KDT 제 목(Title): 최남선 최남선 반민특위 법정에 선 독립선언서 기초자 |崔南善, 1890\\1957 |1928년 조선사편수회 위원. 1938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1939년 만주국 건국대학 교수 자열서의 허실 육당(六堂) 최남선, 기미독립선언서의 기초자였으나 일제 말기의 친일행 위로 반민특위법에 걸려 옥고를 치루었던 한국 근대 사학계의 거성. 그는 애국자인가, 매국자인가. 최남선은 이런 물음에 대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자열서(自列書)를 쓴 바 있다. 이 자열서는 1949년 2월 그가 반민족행위자로 지목되어 마포형무 소에 수감되었을 때 쓴 옥중 자백서인데, 그는 &해방이 되자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지나치게 무고(誣告)하므로 이에 대해 @나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썼다&고 집필동기를 밝히고 있다. 따라서 이 자열서는 자신의 과오를 뉘우 치는 @반성문#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죄과가 세상에 떠도는 소리처럼 그렇게 큰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변명하는 @해명서#였다. 최남선이 자열서에서 스스로 시인한 자신의 죄과는 다음의 다섯 가지 조 목이었다. 첫째, 조선총독부의 한국사 왜곡기관인 조선사편수회 편수위원이 된 사실 (1928년). 둘째, 조선총독부의 중추원 참의가 된 사실(1938년). 셋째, 만주 괴뢰국의 건국대학 교수가 된 사실(1939년). 넷째, 일제말기에 학병권유 연사로 활동한 사실(1943년). 다섯째, 악명높은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을 부르짖은 사실. 이상 다섯 가지 죄과 조목에 대해 최남선은 분명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즉, $나는 분명히 한평생 한 일을 한마음으로 매진하였다고 자신한다&고 말 하면서 $조선사편수위원, 중추원 참의, 만주괴뢰국 건국대학 교수, 이것 저 것 구중중한 옷을 연방 갈아입었으나 나는 언제나 시종일관하게 민족정신의 검토, 조국역사의 건설, 그것 밖으로 벗어난 일이 없다&고 단언했던 것이 다. 그러나 최남선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의 모든 행적이 애국애족의 본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는 단지 자신의 유약한 성 격 때문에 지난날 일제의 강권에 못이겨 친일행위를 했던 것처럼 또 한번 조국과 민족에 대해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자신의 범행을 숨기려 하였던 것 일까. 지조를 버리고 택한 학문연구의 길 최남선은 1890년 서울의 비교적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나 불과 18세라는 어린 나이인 1907년에 문화사업에 착수하였다. 그래서 월간잡지 {소년}을 창간한 것이 19세 때인 1908년의 일이었다. 그 뒤 1910년에 조선광문회(朝 鮮廣文會)를 조직하여 {역사지리연구}를 간행하고 1914년에는 {청춘}지를 발간하였다. 그리고 1919년에 이르러서는 3|1 독립선언서를 기초하여 유명 한 $최후의 일인 최후의 일각까지&라는 공약3장(公約三章)의 글귀를 지어 일약 독립운동가로서 이름이 났다. 최남선의 나이 30세 때의 일이었고 이 사건으로 1921년 10월까지 2년 6개월 간이나 옥고를 치루었다. 그러므로 이때까지의 최남선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감옥에서 풀 려난 것이 가출옥(假出獄)이라는 약간 의심스러운 절차에 의한 것이었다는 사실 이외에는 그가 변절했다는 아무런 증거도 없다. 출옥 후 그는 동명사 (東明社)라는 출판사를 창립하고 {동명}이라는 잡지를 간행하였다. 그리고 는 {동명}지(1호\\11호)에 ~조선민시론^(朝鮮民是論 1923)을 발표했으며, 1925년 불후의 논문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3년 뒤인 1928년 그는 돌연 조선총독부의 역사왜곡기관 인 조선사편수회 편수위원직을 수락함으로써 변절자라는 지탄을 받기 시작 하였다. @ 3|1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최남선이 아닌가. 그런 그가 왜놈에게 붙다니 이럴 수가 있는가.# 최남선을 민족의 양심으로 알고 있던 당시의 지 식인들은 한결같이 개탄했다. 그러나 자열서에서 최남선 자신은 이것을 변 절이라 하지 않고 방향전환에 지나지 않았다고 변명하면서 단지 그것은 @돈 # 때문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무슨 까닭에 이러한 방향전환을 하였는가. 이에 대해서는 일생의 목적 으로 정한 학연(學硏)사업이 절대절명의 위기에 빠지고, 그 봉록(奉祿)과 그로서 얻는 학구상의 편익을 필요로 하였다는 이외에 다른 말을 하고 싶 지 않다. 그러면서 그는 $나는 의사(義士)가 되기보다 학자가 되기를 바랐기 때문 에 학자보다 의사가 되라는 일반의 기대를 저버렸다&고 해명하고 있다. 내가 변절한 대목, 즉 왕년에 신변의 핍박한 사정이 지조냐 학식이냐의 양자 중 하나를 골라잡아야 하게 된 때에 대중은 나에게 지조를 붙잡아라 하거늘 나는 그 뜻을 휘뿌리고 학업을 붙잡으면서 다른 것을 버렸다. 대 중의 나에 대한 분노가 여기서 시작하여 나오는 것을 내가 잘 알며 그것 이 또한 나를 사랑함에서 나온 것도 내가 잘 안다. 이처럼 최남선은 지조와 학식을 별개의 것으로 분리시키고 학식에는 지조 가 필요 없다는 논리를 펴려 하고 있다. 농부에게 지조가 필요 없듯이 학자 에게도 지조가 필요 없다는 강변을 하고 있는 것인데 과연 학문이란 그런 것일까. 그는 학자인 자신에게 조선 대중이 요구한 @청고(淸高)한 지조#는 다만 상식적 기대라고 반박하고 있다. 그는 @어떤 역경에서라도#라는 말을 강조하면서 자신이 1928년 학문 연 구에 절대절명의 위기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최남 선이 1928년에 절대절명의 위기, 즉 목숨이 끊길 것 같은 위기에 처해 있었 다는 증거는 없다. 물론 넉넉하게 살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절명의 위기에 놓였다는 말은 과장된 말일 것이다. 학자란 본시 가난한 법인데 최남선이 변절 후에 누린 호강이 보통 학자들의 상식적 기준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어찌 되었든 그는 학문을 위해 지조를 버렸다. 이 선택을 @변절#이라 하지 않고 다만 @방향전환#이라 했고 오로지 학문만을 위해 변절까지 불사한 자 신의 과오를 $나의 암우(暗愚)&라고 변명하면서 $걷고 싶은 길 을 걸어서 조선사편수회 수사(修史) 위원&이 되었다고 했다. 조선사편수회 위원이란 직위는 분명 반민법의 처벌대상이 된다. 그러나 최남선은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하기는 하였으나 그 실제 업무에 있어서는 반민족행위에 해당할 아무런 내용도 없었기 때문에 처벌은 억울하다#며 변 명하고 있다. 그의 변명을 들어보기로 하자. 조선사 편수 같은 것은 최후까지 참섭(參涉)하여 {조선사} 35권의 완성 과 여러 사료의 보존시설을 보기도 하였다. 이 {조선사}는 다만 고래(古 來)의 자료를 수집하여 이를 배차(排次)한 것이오. 아무 창의와 학설이 개입하지 않는 것인만치 그 내용에 금일 반민족행위 추구의 대상이 될 것 은 1건 1행이 들어 있지 않을 것이다. 조선사편수회가 간행한 {조선사} 35권은 최남선이 말하는 것처럼 $고래의 자료를 수집해서 이를 연대순으로 배열한& 일종의 자료집이다. 따라서 $아 무 창의와 학설이 개입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말처럼 $그 내용에 금일 반민족행위에 해당하는 대상이 1건 1행도 들어 있지 않&는 것 일까. 이 주장의 옳고 그름 여부를 가리기 위해서는 조선사편수회란 과연 어떤 곳이며 최남선은 거기에서 무엇을 했는가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선사편수회는 1911년 총독부에 설치된 취조국(取調局)에서 비롯되었 다. 이 취조국은 @구습(舊習)제도의 조사와 조선사 편찬의 계획#을 설치목 적으로 하였는데, 편찬과 및 편찬위원회로 개편되다가 1925년 마침내 조선 사편수회라는 독립기관으로 발족되었다. 이 기관을 설치한 기본목적은 조선 을 영구히 강점하기 위하여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개조한다는 @동화주의#(同 化主義)에 있었으며, 여기서 편찬하려는 @조선사#란 조선인으로 하여금 @병 합의 은혜#를 깨닫게 하는 역사, 즉 식민사관에 의한 한국사 왜곡작업에 다 름 아니었다. 조선사편수회는 위원회제였는데 조선인 위원으로는 최남선(1928년 이후) 이외에도 이능화*(1925년 이후)가 있었다. 실무진 가운데에는 편사관(編史 官)으로 홍희(洪憙:1925\\1935), 신석호(申奭鎬:1938년 이후), 편사관보로 이병도(李丙燾:1925\\1927), 신석호(1930\\1937), 촉탁으로 홍희(1925년), 이병도(1927년 이후), 최남선(1928\\1936), 신석호(1929\\1930) 등이 있었 다. 따라서 최남선은 위원으로서 위원회에 관여했을 뿐 아니라 실무자로서 도 직접 편찬업무에 참여하였던 것이다. 일제는 {조선사} 35권 편찬작업을 통하여 {삼국사기}를 한국고대사의 기 본사료로 못박고 {삼국유사}의 기록은 @사설#(史說)로 제껴버림으로써, 한 국사를 2천 년 역사로 축소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최남선은 {조선사}에 국조 단군에 관한 기록이 수록되지 않은 점에 대해 항의했으나, 책은 이미 인쇄되어 배본중이었으므로 그의 의사는 전혀 관철되지 않았으며 그도 당초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예측하고 있었다. 요컨대 최남선은 일제의 역사왜곡 작업에 들러리 역할을 했던 것이다. 편수위원직 수락 이후 공공연해진 변절의 길 뿐만 아니라 육당은 조선사편수위원직을 수락한 이후 총독부가 위촉하는 여러 가지 위원직을 맡으며 공공연하게 변절의 길을 걷게 된다. 1936년에는 경성제대에서 @심전(心田) 개발에 관한 강연#을 하였으며 만주국 건국대학 교수로 임명되기 1년 전인 1938년에는 만몽일보사 고문직에 취임하기도 하 였다. 그리고 1937년에는 조선사편수위원으로서의 그의 공로에 대한 일제의 포상으로 조선총독부 최고의 영예직인 중추원 참의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최남선의 일생에서 치명적인 오점은 건국대학 교수직 을 그만두고 돌아온 뒤 조선인 대학생들을 일제 침략전쟁에 몰아넣는 학병 권유 사업에 참여한 일이다. 육당은 1943년 11월 14일과 20일 이틀 동안 이 광수*와 함께 일본 동경 메이지대학 대강당에서 열린 학도궐기 대강연회 연 사로 참가하였다. 그는 귀국 후 {매일신보}에 그 때의 @맹활동#상황을 다음 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우리 일행은 동경을 중심으로 맹활동을 하였다.<> 우리는 지난 14일과 20일 이틀 동안 메이지대학 대강당에서 학도 궐기 대강연회를 열었는데 그 때의 성황과 학도들의 열의는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학도들은 황국을 위하여, 대동아건설을 위하여 싸우겠다는 불타는 결의로 충만한 우렁찬 모습들이었다. <> 나는 원컨대 입영까지 유종의 미를 거두도록 건전한 신 체와 열렬한 순국의 결의로 매진하여 미|영 격멸의 용사로서 황군이 된 참정신을 발휘하는 가운데 잘 싸워주기 바라는 바이다. 건국대학 교수직을 수락했을 때만 하더라도 위당 정인보 등 지우들이 @최 남선이 죽었다#고 개탄할 정도였으니 그의 학병 권유 강연 사건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변절 재확인 행위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최남선은 자신의 학병 권유 행위에 대하여 마치 훗날의 광복을 위 해 민족의 기간요원을 양성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자열서에서 강변하고 있 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이 기회를 이용하여 젊은 청년들이 조직과 전투에 능한 사회 중핵층을 형성하게 하여, 다가오는 신운명에 대비하려 생각했다& 는 것이다. 그러나 1945년 3월 7일 일제 패망 직전에 {매일신보}에 쓴 ~전력증강 총 후 수호의 진로^라는 그의 친일 논설은 아무리 변명한다고 하더라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내용이다. 나는 일본의 국력이 얼마 된다는 것을 숫적으로는 물론 알 길이 없다. 그러나 나는 믿는다. 이 전쟁이 이기리라는 것을 굳게 믿는다. 그것은 일 본 국민의 영혼의 힘이 세계에 절대하기 때문이다. 미|영의 물량이 아무 리 크다 할지라도 그것에는 한도가 있다. 그러나 영혼의 힘에는 한계가 없다. 만일 이 전쟁에 우리들의 운명이 참패를 당한다고 하면<>그것은 인 류의 영원한 비극이요, 벗어날 수 없는 암흑의 운명을 뜻하는 것에 지나 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겨야 한다. 이와 같이 최남선은 속으로는 일제 패망을 확신하였는지 모르나 겉으로는 일제의 필승을 장담하였고, 속으로는 학병이 무사히 돌아와서 광복된 조국 의 간성으로 활약해 주기를 바랐는지 모르나 공인으로서는 대일본제국을 위 해 조선 청년들이 죽어 주어야 한다고 공언했던 것이다. 한편 그는 건국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1940년 10월 30일에 조직된 @동남지 구 특별공작후원회본부#의 고문도 맡고 있었다. 그런데 이 단체는 일본 관 동군의 반공|선무공작 등을 지원한 간첩단체로서 독립군과 항일 빨치산을 상대로 한 @귀순공작#을 주임무로 하고 있었다. 그가 이 단체의 성격도 모 른 채 단지 이름만 걸고 있었는지 매우 궁금할 뿐이다. 한일문화동근론으로 변질된 단군문화론 학자로서 최남선이 범한 가장 큰 죄과는 그가 단군을 연구하면서 일제의 @내선일체론#에 협력했다는 사실이다. 그의 학문적 업적은 1920년대의 단군 연구에 집약되며 그것의 백미는 ~불함문화론^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불함문화론^이 일본과 조선의 정신상의 장기전에 대비하여 국조신앙을 우 리의 정신적 지주로 확립하려 했던 것이라고 주장하며 자신의 단군 연구에 대해서만큼은 학문적 @양심선언#을 하고 있다. 한 사람의 역사학자로서 최 대의 자존심이 걸린 자신의 평생업적에 관한 것이고 만일 이 부분이 무너진 다고 했을 때 육당 최남선은 거의 무(無)로 돌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그가 주장하는 대로 그의 단군 연구는 순결했던 것 일까. 최남선의 ~불함문화론^은 분명히 일제의 단군말살론에 대항하기 위한 논 문으로 집필되었다. ~불함문화론^을 탈고한 직후 그는 {동아일보}에 ~단군 론^을 연재했는데 그것은 일인학자들의 단군말살론에 대한 정면도전이었다. 이로 인해 조선인의 반일여론이 비등하였고 또 그 때문에 최남선이 조선사 편수회 위원으로 포섭되기도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최남선의 ~불함문화론^을 그보다 훨씬 이전에 썼던 그의 단군연 구, 예컨대 그가 변절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던 29세 때의 논문인 ~계고 차존^(稽古箚存:{청춘} 14호)과 비교해 보면 양자간에 현격한 논리의 차이 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1918년에 쓴 그의 상고사 연구 ~계고차존^은 한국의 전통적|고전적인 고 대사관을 그대로 수용하여 순수하고 티없이 맑은 글이란 느낌을 주고 있으 나, 1926년의 ~불함문화론^은 단군조선을 출발점으로 하는 조선사라는 일국 사적 범주를 넘어서서 아시아 전역 내지 세계사의 광활한 범주로 확대시킴 으로써 그것은 이미 조선사가 아닌 아시아문화사로 변질되고 있다. 불함문 화권은 조선과 일본을 중심으로 형성|발전하였으며 두 민족이 비록 혈통적 으로 같지는 않으나 문화적으로는 본시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는 결론에 도 달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한일문화동론(同根論)은 이미 1930년 라디오 방송원고로 알기 쉽게 풀이되었으니 새삼스러운 주장이 아니었다. 1937년에 쓴 ~조선문화 당면의 과제^({매일신보}, 1937. 2. 9\\11)는 그의 ~불함문화론^이 어떻게 내선일 체와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으로 기울고 있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일본과 조선은 원래 같은 문화 원천이 2개의 지류로서, 일본의 근본적 으로 깊고 깊은 강이 만세에 흘러서 여일(如一)할 조선은 불행하게도 절 단되는 운명에 놓여 그 의식도 흐려졌던 것인데, 시운을 만나서 이제야 분류가 재회하여 같은 원류를 가진 파도에서 춤추게 약속받은 것이다. 변절기에 있어서 육당은 이처럼 그의 역사학을 오용하고 있는데, 그 대표 적인 사례가 ~가라! 청년 학도여^({매일신보}, 1943. 11. 20)이다. 여기서 그는 한국의 무사도를 일본의 무사도에다 견주어 세계 무사도의 쌍벽이라 하면서 신라 무사의 무용성(武勇性)을 발휘하여 성전에 나가라고 고무하고 있다. 제군! 대동아의 성전은<>세계 역사의 개조이다. 바라건대 일본 국민으 로서의 충성과 조선 남아의 의기를 발휘하여<>한 사람도 빠짐없이 출진하 기를 바라는 바이다. 누가 이 글의 필자를 일찍이 3|1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사람이라 할 것인 가. 심산 김창숙 선생이 대구 감옥에서 14년 옥고를 치르고 있을 때였다. 일 본인 간수가 심산에게 육당의 ~일선동조론^을 읽어보라고 주었다. 마지 못 해 이 책을 받아 본 심산은 $도시 이런 흉서(凶書)가 있는가&라 개탄하면서 책을 잡아 비틀어 단자(單子)처럼 만들어 마룻바닥에 동댕이쳐 버렸다. 그 리고 나서 심산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기미 독립선언서가 최남선의 손에서 나오지 않았는가. 이런 자가 도리 어 일본에 붙은 역적이 되다니 만번 죽어도 그 지은 죄는 남을 것이다. ■ 박성수(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한국사) 주요 참고문헌 崔南善, ~不咸文化論^, {朝鮮及朝鮮民族}, 第一輯, 朝鮮思想通信社, 1927. ______, ~자신의 암우를 탄한다^, {반민자 대공판기}, 한풍출판사, 1949. {매일신보}. {육당 최남선 선생 전집}. @ ~~ ~~ ~ ~~~ ~~~~ ~ ~ 바람과 함께 떠나는 __=||=__-__-__ ? _ %% _ ###_ | :^^^^^^^^^^^^: ~~ ~` 기 차 여 행 '~~ ~ ~ ~ /_/ \ / \ / \| :- -:--:--:--: ~~~ ~~\ /~~ ~ ~ `-`@==@'`@==@'-'=`- ** -- ** -' ~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