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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Ecomy (기억상실증�)
날 짜 (Date): 1996년06월26일(수) 21시59분15초 KDT
제 목(Title): 김활란



김활란

金活蘭(創氏名: 야마기 카쓰란( 天城活蘭):1899-1970)


교육·기독교계 여성지도자의 대명사 김활란

김활란은 일제하에서는 '여성박사 1호'로, 전문학교의 유일한 여성교장으로, 
YWCA창립자로
서 교육·기독교계의 대표적 인물로서 꼽혀왔다. 그리고  8.15 이후에는 
이화여대총장,배화학
원·국제대학·동구학원· 금란여중고· 영란여중고 등 다수 학교의 이사장 등 
직책에 있었으
며, 사회단체로는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여학사협회, 대한부인회, 주부클럽연합회, 
YWCA 등 여
성단체를 설립하고 회장 등 여성단체 임원을 역임하였다.  정부 수립 직후 
유엔총회 때 한국
대표로 참석하였고, 6.25 때는 공보처장, 1965-70년에는 대한민국 순회대사, 한국 
아시아 반
공연맹 이사 등 정치 외교활동에도 활약하였다. 이러한 활동 결과 정부로부터 
1963년에는 대
한민국장 포상을 받았고, 1970년 사망한 이후에는 대한민국 일등수교훈장을 
받았다.  이렇듯 
8·15 이후의 여성명사라고 하면 김활란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런데 이렇듯 교육·여성계에 그의 명성과 지위처럼 일제 말기 반민족행각에 
있어서 교육
·종교계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였다는 것을 아는 이는 드물 것이다. 그의 
일제하 반
민족행위가 그의 공헌, 그에 대한 찬사를 모두 거짓으로 만들지는 않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
나 그 찬사는 반동강이의 우리 국토, 반공의 국시를 지키기 위해 왜곡되어진 우리 
역사 속에
서 나온 찬사란 점을 직시하며 그의 반민족행위를 살펴보자.           

민족주의자 김활란

한창 반민족주의자에 대한 처단문제가 논의될 때 나온 {친일파군상}에서는 그에 
대해 다음
과 같이 쓰고 있다.

김활란 여사는 본의로써 전쟁에 협력할 인물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진의의 여
하는 미상이나 당시 왜경찰의 주목과  엄중한 감시하에 있던 이화여전교장의 직에 
있었던 
관계로 부득이 본의에 없는 자리에 출석도 하였고 말도 하였을 듯하나 좌우간 그의 
언행이 
세인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한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그 횟수가 
빈번하였던 것도 
또한 사실이다.(60쪽)

이렇게 안타까운 표현이 나오기까지는 그의 활동에 대한 기억과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가 민족적 성향을 띠었을 때 그는 어떠한 입장에서 활동을 하였는가.
그가 이화학당 대학과를 졸업하고 이화학당 교사로 있을 때 3·1 운동이 일어났다. 
그 당시
에는 지하독립운동조직에 연결되어 있었다. 1920년에는 이화전도대를 만들어 조선 
각지를 돌
며 포교활동을 하였다. 이 때 기독교는 메시아의 도래란 면과 관련하여 민족의 
자각, 희망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그의 전도활동은 단순한 전도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근우회가 창립되기 
전까진 그의 생활은 주로 학교나 종교활동에 머물었긴 하지만 강연·글 등을 통해 
여성해방론
을 전파하였다. 그의 민족운동관은 무지로부터 탈피, 생활개선 등 개량적인 
실력양성운동론에
서 벗어나 있지 않았던 것처럼 여성운동의 목표도 여성의 교육권·재산권 확보에 
두어 참정권
을 말할 수 없었던 당시의 상황에서 가능했던 전형적인 자유주의 여권론을 
주장하였다. 이처
럼 민족문제·계급문제에 대한 치열함은 부족하였으나 민족적 성향은 계속되었다.
그래서 근우회 조직에도 관여하였던 것이다. 비록 조직기에만 활동하였으나 
좌우합작의 근
우회 창립에 참가하였다. 1928년 근우회에서 활동을 끊은 후 종교단체활동은 
계속하다가 1930
년 다시 미국에 가 박사학위를 받아 '여성박사 1호'로서 귀국하였다.
그가 귀국했을 때 민족해방운동의 양상은 크게 변해 여성계의 경우 근우회가 
해소된 반면, 
사회주의계 여성들은 노농조직 등에서 여성부를 조직하고 혁명적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자유주의적 여권론을 주장하던 여성들은 종교단체나 민족개량주의 단체에 소속되어 
활동하였
다. 김활란 역시 여기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도 농민문제에 관심을 갖고 
농촌사업을 벌였다. 
김활란은 박사논문의 주제가 농촌교육이었고 이화여전에 농촌사업가를 양성할 과를 
두고자 하
는 포부를 가졌을 정도로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여전히 활동방향을 문맹퇴치, 
가정경영에 필
요한 지식획득이나 개인적 차원에서의 경제자립, 봉건적 인습타파, 의복개량 등에 
두었다. 이
들의 운동은 1920년대 말에서 30년대 초반에 활발하게 일어났던 브나르도운동과 
연결되어 있
었다. 그러나 1930년대에 가면 그들의 개량적 시도는 농촌진흥운동에서의 개량적 
구호, 예를
들면 문맹퇴치·금주·금연·절약·저축·미신타파 등의 구호와 접근하고 있었다. 
게다가 김
활란 스스로가 밝히는 것처럼 일제의 비타협적운동에 대한 탄압이 강화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그저 '일제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라는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가 
관심을 가
진 여성해방도 민족해방 위에 꽃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점차 두 과제를 분리해 
가기 시작하
였다. 

반민족행위의 시점

1930년대 중반을 넘으면서 일제는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 건설을 위해 
민족말살정책·황
민화 정책을 강력히 시행하여 내선일체를 내세우며 신사참배, 궁성요배, 
황국신민의 서사 낭
독 등을 강요하였으며 철저한 통제망을 조직하여 우리민족을 전쟁수행의 도구로 
삼기 위해 광
분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지식인층이 일제에게 굴복하여 반민족적 행위에 나서는 데는 각각의 
계기가 
있었다. 기독교계 학교에 속한 인물들은 일제가 신사참배 등의 문제로 일제와 
선교사들의 입
장이 배치되었을 때, 폐교를 무릅쓰고 일제 정책에 반기를 들 것인가 묵수할 
것인가를 결정해
야 할 순간이 있었다. 여기에 각 교파마다, 학교마다 서로 다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북장
로교계에서는 학교 폐쇄를 불사하였다. 평양의 기독교계 학교 대부분과 광주 
수피아고녀 숭일 
등등은 폐교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나 김활란이 몸담았던 이화여전은 일제의 각종 
요구를 수
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결국 일제의 요구에 응하며 이리저리 끌려 다닌 
대표적인 이가 바
로 김활란이었다.
그의 친일은 교장직을 맡았을 때인 1939년 4월 이후부터가 아니라 조만간 맡을 
가능성이 엿
보였던 1936년 말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즉 1936년 부교장으로서 그는 총독부 
사회교육과가 
'가정의 개선·부인교화운동의 촉진'을 목적으로 주최한 사회교화간담회에서 
참석한 것을 비
롯하여 1937년 1월 황민화정책을 철저히 하는 방책으로 실시된 방송에도 
참가하였다.  
그리고 1937년부터는 일제와 관련된 일회적인 모임만이 아니라 지속적인 
단체활동에 나아가
기 시작하였다. 즉 1937년 1월 말에는 학무국 알선으로 조선부인문제연구회를 
결성하였고 중
일전쟁이 터지자 손정규(孫貞圭)와 더불어 애국금채회의 발기인으로 참가하여 
사회자로 활약
하였다. (사진-매 38.7.6) 애국금채회는 일찍부터 매국노라고 손가락질을 받았던, 
일제에게 
작위를 받은 귀족 부인들이 일본의 침략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금비녀를 뽑아 
바치자고 조직한 
단체였다. 애국금채회의 사업은 1.황군의 환송영 1.총후가정의 위문 1.총후가정의 
조문(弔問) 
1.일반가정부인에 대한 시국인식의 강화철저와 국방헌납과 황군위문금품의 헌납 
등이었다. 
이후 그는 이와 같은 목표를 둔 단체나 활동에 약방의 감초처럼 참가하지 않을 수 
없게 되
었다. 그는 곧 '출정가족 간담회'(매. 37.10.6)에 참가하여 친일의 수렁에  빠지기 
시작하였
다. 이전의 경우 일제하 합법적인 계몽운동을 위해 그 정도는 눈감아 줄수 있지 
않겠나 하는 
입장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애국금차회에 가담한 시기부터가 민족역사상 
분명한 반
민족적인 행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1938년 3월 칙령으로 내선일체화란 이름하에 조선교육령 개정 사학에 대한 통제가 
강력해졌
다. 수업중에 조선어 사용을 금하였다. 학생들은 군수공장에 근로동원되고 
학교과정에서도 우
리문화나 전통에 관한 것은 말살해 갔다. 그 가운데 그는 1938년 6월 20일 
이화여전과 이화보
육의 400명 처녀들로 총후 보국의 내조를 위해 애국자녀단(이화근로보국대?)을 
조직하였다. 
한편 기독교 여성단체중 가장 활발한 사회활동을 벌였던 조선YWCA가 1938년 6월 
8일 일본 Y
WCA에 가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바로 이 때 회장은 김활란이었다. 그는 그날 
"......비상시
국에 있어 기독교 여자 청년들도 내선일체의 깃발 아래로 모이지 아니하면 안 
되겠으므로 시
국을 재인식하는 동시에 황국신민으로서 앞날의 활동을 자기(自期)하는 의미에서 
금번 '제네
바'동맹을 탈퇴.....하고 기독교여자청년회 일본동맹에 가담하게 
되었다"(매.1938.6.9)는 발
표를 하고 있었다. 1941년경에 가면 결국 활동이 중지될  것을 이토록 굴욕적인 
태도를 보이
며 단체의 목숨을 연장시키고 있었다. 이 때 지방 YWCA에서 활약하던 인물중에 
신사참배를 거
부하고 일제에 소극적이나마 저항하여 사회적 지위에 초연한 태도를 취한 여성들도 
있었다. 
조선 YWCA를 구상하고 탄생시킨 김필례(金弼禮)가 바로  그러한 인물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김활란의 친일활동은 계속되었다.
1939년 이화전문학교 학생들에게 교복을 입히는 것에 앞장 섰다. 일제에 의해 
전면적으로 
중등과정생들에게 교복을 입히는 것과도 달리 학교에서 자발적으로 실시하기로 한 
전문학교생
의 교복문제는 언론(동아일보)과 학생과 학부모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단체생활상 
필요함을 강
조하며 실시하였다. 이것이 학교에서 한복이 사라지게 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매일신
보},1939.1.18,19)  
이렇듯 그가 학교를 살리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친일을 했다라는 정도로 
면책받기에는 학교
의 최종결정권자인 교장직에 있기 이미 전에 너무 많은 친일적 행위를 했다.
그리고 이와 관련되어 김활란이 교장이 된 데 있어서는 약간의 곡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
다. 당시 이화고녀· 배재고 등 선교사가 경영하던 학교의 교장이 조선인으로 
바뀌어 가고 있
는 상태이긴 했어도 아펜셀러교장이 물러나는 것에 대해 이사회 내에서 약간의 
이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활란이 교장이 되는 데는 당시 이사였고 선교사 대신 
조선인으로선 처음으
로 배재교장이 된 신흥우(申興雨)의 힘이 컸다고 한다(최규애,{참다운 크리스챤 
김활란 여
사},나랏말 출판사,1991.91쪽). 김활란이 1939년 4월 정식교장이 되면서는 
일제에게 굴복하면
서도 학교를 지킨다는 명분 하나로 민족역사상에 학교가 할 많은 역할을 일제에게 
내주고 말
았던 것이다.

야마기 카쓰란(天城活蘭)이 되어 학병·징병을 권유하며

특히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이후 일제는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지원병제에서 
나아가 징용
·징병·정신대 등 강제연행이 시작되었다. 이에 관련하여 정책을 실시하고 
선전하기 위한 각
종 친일단체를 결성하여 우리 민족의 정신까지 앗아가려는 온갖 책동을 다하였다. 
여기에 친
일여성단체를 만들고 여성명사들을 동원하는 등 여성들도 본격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하였다.   
김활란은 임전대책협력회 위원,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 국민총력연맹 
평의원, 조
선교화단체연합회 부인계몽독려반, 조선언론보국회 이사 등 각종 친일단체의 
임원직을 맡았
다. 그리고 여성대중에게는 노력동원, 가정의 절약과 저축을 강조하였다. 
그는 1941년말 야마기 카쓰란(天城活蘭)으로 창씨하였다. 그리고 부인궐기촉구 
강연, 결전
부인대 강연, 방송 등을 통해 일제침략정책을 미화하고 내선일체·황민화시책을 
선전하며 일
반여성이나 여학생들에게 어머니나 딸·동생으로서 징병·징용·학병동원에 대한 
이해를 촉구
하였다. 
확장되는 전선을 일본인 군인으로만 막을 길이 없자 전면적인 징병제를 실시하여 
이땅의 남
아들을 그들의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삼고자 한 결정에 대해 그는 "이제야 
기다리고 기다리
던 징병제라는 커다란 감격이 왔다" 라고 하면서 "지금까지 우리는 나라를 위해서 
귀한 아들
을 즐겁게 전장으로 내보내는 내지의 어머니들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러나 
반도여성 자신들이 그 어머니 그 아내가 된 것이다......이제 우리도 국민으로서의 
최대 책임
을 다할 기회가 왔고, 그 책임을 다함으로써 진정한 황국신민으로서의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
다. 생각하면 얼마나 황송한 일인지 알 수 없다. 이 감격을 저버리지 않고 
우리에게 내려진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할 것이다."(김활란,'징병제와 반도여성의 
각오,'{신시대}, 1
942년 12월)라 하였다.
그리고 "학도병출진(學徒出陣)의 북은 울렸다. 그대들은 여기에 발맞추어 
용약(勇躍)떠나련
다! 가라 마음놓고! 뒷일은 총후(銃後)는 우리 부녀가 지킬 것이다. 남아로 
태어나서 오늘같
이 생의 참뜻을 느꼈음도 없었으리다. 학병 제군 앞에는 양양(洋洋)한 
전도(前途)가 열리었
다. 몸으로 국가에 순(殉)하는 거룩한 사명이 부여되었다......"('뒷일은 
우리가'{조광}1943.
12.)라고 하며 일제가 학도병을 끌어내는 데 동조하였다.
그리고 그는 후에 자서전 {그 빛속의 작은 생명}에서 일제 때 가장 안타깝고 
분하게 여겼던 
일중의 하나가 1943년말 전시비상조치방책으로 이화전문학교가  농촌지도원 
연성소가 된 것을 
꼽고 있다. 이 시기는 사실 그가 친일행각을 중단할 계기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때도 그
의 친일행위는 중단하기는 커녕 이렇게 말하였다.

"아세아 십억 민중의 운명을 결정할 중대한 결전이 바야흐로 최고조에 달한 이 때 
어찌 
여성인들 잠자코 구경만 할 수가 있겠읍니까 ...내지의 학도들과 함께 
전문대학법문계 반도 
학도들은 우렁찬 진군을 일으키어 특별지원병으로서 오는 1월 20일 에는 영예의 
입영을 하
게 되었읍니다. 이번 반도 학도들에게 열려진 군문으로 향한 광명의 길은 응당 
우리 이화전
문학교 생도들도 함께 걸어가야 될 일이지만 오직 여성이라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참여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싸움이란 반드시 제 일선에서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
서 우리 학교가 앞으로 여자특별연성소 지도원 양성기관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인 동시에 생도들도 황국여성으로서 다시 없는 특전이라고 감격하고 
있읍니다..."
(매일신보, 1943년 12월 25일)

이화전문학교가 여자청년연성소 지도자 양성과로 되어 기존학생들은 3개월 간 
교육, 신입생
은 1년 간 교육을 시켜 전조선에 설치된 여자청년연성소 지도자를 배치하여 
농촌여성을 계몽
한다는 일제의 방침대로 되자, 1944년 이화여전 학생모집에는 150명 모집에 
40명밖에 지원하
지 않았다. 게다가 재학생들도 격감하였다. 그리고 제자들 후배들이 그를 외면하고 
학교를 떠
났다. 그때도 그는 그냥 그대로 있었다. 아무리 그가 자기 본심과 다른 행동이었다 
하더라도 
그가 하는 모든 것은 이미 공인으로서의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는 공인으로서의 
책임있는 행
동보다는 껍데기뿐인 이화를 잡고 놓지 않으려는 몸부림으로 나타났다. 그가 
조선민족 민중을 
향해 한 그 숱한 반민족적 연설·글·방송을 어떻게 주어 담을 것인가.
이러한 친일적 지식인 여성들의 활동이 대중에게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그들중 
많은 수가 
1920년대에 참가하였던 까닭에 일제에 대해 적극적인 투쟁은 커녕 안면몰수한 
친일행위는 민
중에게 분노와 실망을 가져다 주었다. 특히 지식인들에겐 패배주의를 유포하였다. 
김활란과 
같이 교육계에 있었던 특히 서울의 여학교 
교장---신덕·송금선·이숙종·신봉조·조동식·배
상명---은 모두 약속이나 한듯 같은 길을 갔다. 교육계에 종사한 이들의 친일적 
행위는 어린 
학생들에게는 그저 보고 따르는 스승이었기에 특히 친일의 발언만이 허용되고 
일체의 민족적 
행위나 발언은 봉쇄되었던 시기인지라 학생들에게 미친 악영향은 상대적으로 컸다. 
자서전과 측근자였던 김옥길의 기록인 {김활란 박사 소묘}에 1944년경 악성안질에 
걸려 실
명할 우려가 있다는 의사의 말에 "남의 귀한 아들들을 사지(死地)로 나가라고 
했으니, 장님이 
되어도 억울할 것 없지..." "당연한 형벌"이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자서전에서 
자신의 친일행위에 대한 언급은 당시에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합리화하거나 당시 
자학적 태
도를 보일 뿐 그 당시의 자신의 행위에 대해 진실로 반성한 귀절을 찾기는 어렵다. 
단지 친일
한 많은 이들이 자서전이나 전기를 남겼지만 대부분 친일행위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다. 대신 
일제 말기에는 학교를 지키기가 매우 어려웠다는 식의 발언과 통제와 탄압이 
강화되기 이전 
민족적 행위에 대한 과대포장만이 보이는 데 비하면 자신의 입장을 솔직히 
표현하였다는 점은 
다른 이와 다른 점이다.

해방 후엔 반공전선에 서서

8.15는 우리민족에게 해방은 안겨주었지만 분단되어 군정이 실시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우리 국가 사회를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로 제기되고 합법공간에서 
각종 사회운
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런데 남한에서 미군정이 실시되자 어제 '적국영미'(敵國英米)를 외치던 이들이 
이제는 그
들이 기독교인이며 영어를 구사하는 장점을 가지고 이제는 미군정 당국자들에게 
접근하였다. 
미군정청은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기는 커녕 항일운동가들을 고문 탄압하던 
이들까지 그대로 
인수받아 그들에게 권력을 남용할 기회를 주었기에 친일 지식인들의 군정청 접근은 
오히려 당
연한 일이었다.
이 때 김활란은 이화전문학교를 종합대학으로 승격시키기 위해 미군정을 열심히 
드나들었
다. 8.15 직후에는 사회단체 활동에 별로 앞에 나서지 않았지만, 1946년 
반탁운동이 고조될 
때 그도 우익계열의 독립촉성중앙부인단에 참가하는 등 반탁운동에 앞장섰다. 
그리고 민정 이
양시기에 그를 보호하고 그의 지위를 유지시켜줄 정치세력으로서 이승만을 
선택하였다. 일제
하에서는 직접적으로 사회주의를 비난하지 못하였으나, 8.15 이후가 되면 
냉전논리와 자본주
의국가 건설이라는 사회상황에서 이제는 정치이념적으로 자기색깔을 분명히 하여 
반공단체활
동에 가담하였다. 
그리고 분단을 기정사실화한 제헌의회 선거에 여성의 정치진출을 강조했던 당시 
여성계의 
입장에서 김활란도 서울 서대문구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하였다. 대한부인회 
대표로서 나온 이 
선거에서 낙선하였으나 그의 정치적 활동은 꾸준히 계속되었고 그의 사회적 지위는 
점점 확고
하게 되었다.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

그는 경찰이나 군대·행정기관에 소속되어 직접 항일운동가와 민족성원을 탄압한 
이들과는 
다르지만, 문화·교육가의 역할이 결코 가벼울 수 없는 만큼 그들이 민족사에 남긴 
오점은 분
명히 해야한다. 특히 애초부터 매국노로 출발하지 않은 그들의 굴복이 오히려 우리 
민족의 자
괴심을 불러 일으킨다. 
반민족적 행위의 경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생전에 이렇다 할 반성의 말 
없이 가고, 
현재의 우리는 여성계의 대모로서 그를 인식한다. 역사교과서에선 그가 도중하차한 
근우회에
서 활동의 중심인물 내지 회장으로 적고 있다.
일제에게 굴복하기 보다는 죽음을 무릅쓴 투쟁을 한 이보다 어떠한 이유든 간에 
강자의 압
박에 못이겨 굴복한 이를 우리는 더 널리 알고 추앙의 인물로 설정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의 
실정이다. 이제 이렇게 된 연유에 대해, 그리고 민족적 자존심·긍지가 
어디에서부터 나오는
가 하는 질문을 던질 시점이다.                            
                                        ■ 강정숙(영남대 강사·여성학)

주요 참고문헌
동아일보
매일신보
김활란, {그 빛 속의 작은 생명}, 여원사, 1965.
김옥길, {김활란 박사소묘}, 이화여대출판사,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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