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izoa (우소) 날 짜 (Date): 2008년 06월 22일 (일) 오전 09시 34분 17초 제 목(Title): Re: 안중근의 일왕에 대한 생각 백범일지 가운데.. '진사의 큰 아들이 중근으로 그때 나이 열여섯이었는데, 상투를 틀고 자주색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서 동방총을 메고는 날마다 노인당과 신당동으로 사냥다니는 것을 일삼았다.' 안중근의 여순감옥에서의 자서 가운데... '나는 어려서부터 사냥을 특히 즐겨... 차츰 성장하여서는 총을 메고 산에 올라 새와 짐승을 쫓아다니며 사냥하느라 학업은 뒷전이었으며 부모와 선생들이 크게 꾸짖어도 말을 듣지 않았다.... 초패왕도 장수요, 나도 장부다... 너희들은 다시 나에게 학업을 권하지 말라'(박은식, 안중근전) 이런 여러기록에 의존해서 그를 면밀하게 정세판단을 하기보다는 행동하는 사람으로 판단했던 것이죠. 정규군이 있을 수 없는 사정때문에 그가 군인인가 테러리스트인가 논쟁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테러리스트 였다 하더라도 충분히 의미있는 테러였다고 저는 평가하고 있습니다.(일본문서에 의해 그를 군인으로 평가한다는 속설은 이미 여러차례 논파된 바 있습니다.) 매천야록에 기록된 것처럼 망국의 서러움을 겪던 조선인들 에게 하나의 기쁜소식이었을 터, 앞에서도 제가 말한것처럼 이것은 본질적으로 잘못된 테러는 아니죠. 제가 굳이 이토가 온건파였다는 점을 말한 뜻은, 세종대왕이나 이순신이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자면 봉건군주이고 부하를 사소한 이유로 처형하는(*) 극악무도한 군지휘관인 것처럼 과거의 위인들을 오늘날의 기준으로만 평가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 난중일기에 나타난 처형기록은 33건인데, 탈영이나 식량을 훔친 것이 주된 처형이유이다. 또한 해자의 구덩이가 무너지거나 무기검열을 통과하지 못한 경우에 곤장을 때렸다. 사역을 나가 이웃의 개를 못살게 굴었다 하여 80대의 곤장을 때리기도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