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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chopin (** 쇼팽 **)
날 짜 (Date): 2007년 3월  9일 금요일 오후 11시 44분 30초
제 목(Title): [펌]서만주왕조 요를 동만주 금이 대체


동부 만주 삼림 속에서 살던 여진족은, 서 만주 선비족의 후예인 거란족 요 
왕조가 운영하던 2원 통치조직의 효용성을 일찍이 체득했고, 1126년에는 북중국 
전체를 정복했다. 중국 역사상 1126년이란 한족이 만주족 왕조에 의해 두 
번째로 중원으로부터 쫓겨 난 사건을 상징한다. 고려와 금 나라의 창건자들은 
모두 옛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천명했다. 왕건은 신생왕국을 고구려를 본 따 
고려라 불렀고, 금 나라는 실제로 만주 전체를 점거했고, 금사(金史) 기록을 
보면, 완안부 시조 자신이 본래 고려(혹은 고구려)에서 왔고, 여진과 발해는 한 
가족이라고 말한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고려를 신라의 후계자로 
상정하여, 같은 시대의 발해 (689-926) 237년 역사를 제외한 채, 통일신라 
(677-935) 258년의 역사만을 삼국사기에 첨부했다. 一然, 李奎報, 李承休, 
柳得恭 등의 글은, 요동을 포함하는 고구려의 만주 전 강역에 대한 법통을 
역사적 근거로 뒷받침 하려는 노력이라 볼 수 있다. 


동부 만주 삼림족이 서부 만주 유목민을 대체:
거란족의 요(遼)를 여진족 금(金)이 대체
서울대 교수 홍원탁


금사(金史): 완안부 시조는 본래 고려(혹은 고구려)에서 왔다
1034-44 년간이 되자, 북동 변방지역에서 발해 유민, 생 여진족, 
고려인 등이 합세하여 거사를 한다는 보고가 계속 들어오고, 거란족의 요 
조정은 토벌 원정군을 계속 보내야만 했다.  거란족은 (발해 주민을 구성했던) 
말갈-여진 사람들을 요 나라의 구성원으로 흡수했었다. 그래서 요의 통제를 
받게 된 여진족은 “길들여진” 여진족이라 불렀고, 그 밖의 여진족은 생 
여진족이라 불렀다.  동북방에서의 끊임없는 반란과 진압 전쟁은 요 나라의 
국력을 고갈시켰다. 1125년, 동부 만주의 여진족이 요 나라를 접수했다.

금 나라(1115-1234)를 세운 아골타(阿骨打)는 고려와 접경한 
산악지대의 완안 부족(完顔部) 지도자 이었다. 아골타는 이미 11세기 중에 다른 
생 여진족들을 복속시키며 지배 영역을 확장시켰다. 금사 본기 제1권을 보면, 
금의 시조(900년 경의 인물인 완안부의 시조 函普를 의미)가 본래 고려에서 
왔다(혹은 고구려 출신이다)라고 말한다. 또, 태조 아골타가 일찍이 “여진과 
발해는 본래 한 가족”이었다고 말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대금국지(大金國志)는 금 나라의 시조(완안부의 시조를 의미)가 본래 
신라에서 왔고 성씨가 완안 이었다고 말한다. 만주원류고는, 금사가 금 시조를 
고구려 출신이라고 기록을 했지만, 요사와 금사는 왕왕 신라와 고구려를 
혼동했었기 때문에 그렇게 기록이 된 것이며, 김(金)이라는 신라 왕들의 성은 
이미 수 십대를 걸쳐 전해 내려온 것이기 때문에, 나라를 세우면서 신라 왕성을 
본 따 국명을 금이라 한 것이 분명하다고 말한다. 

동 만주의 삼림족
목초지의 유목민과는 달리, 여진족은 사냥과 고기잡이에 못지않게 
농업에 의존했다. 여진족은 소규모로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고, 사냥을 
하고, 물고기를 잡는 등 (반 유목, 반 농경) 혼합 경제를 영위했다. 그들은 
삼림족 이면서도 훌륭한 기병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 고유의 부족 조직과, 
사냥을 통해 숙달된 활 쏘기 말 타기 등은, 주변의 유목민에 손색없는 군사적 
전통을 만들어 냈다. 부족 가구들은 세습적 지도자의 휘하에 모여 무리를 
지었다.  여진족들은 변변치 않은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들에 나가 힘들게 일을 
해야 했지만, 일단 전쟁이 벌어지면 전리품을 얻기 위해, 마치 가족 내 일인 
듯, 싸움에 총력을 집중했다.  

여진족은, 항복한 한족이나 거란족까지 포함해, 정복한 부족들을 
자신들 본래의 부족장의 지휘하에 새로운 군대 단위조직을 만들어 흡수했다. 
일찍이 (349-410 기간 중 전연, 후연, 서연, 남연 등 명칭으로 등장했던) 
선비족 연 왕조는 북중국을 통일한 또 다른 선비족인 탁발족 북위(386-534)에게 
망한 것이다. 700여 년 후, 거란족의 요 나라는 (북송으로부터 중원을 빼앗아) 
북중국 전체를 차지한 또 다른 만주족인 여진족에게 망한 것이다. 

2원 통치제도의 답습
여진족 금 나라는 (선비족의 후예인) 거란족 요 왕조의 2원 통치조직을 
답습했다. Twitchett and Tietze는 금 나라의 “정부 행정 조직의 기본적 
체제는 여진족 고유의 전통과, 요 나라로부터 물려 받은 제도와, 한족 송 나라 
영향 등의 복잡한 상호작용의 결과이며,” 여진족 금 나라의 “사회-군사 
조직은 만주족 [청 나라] 팔기군 조직의 선구자이었다”라고 말한다.  

여진족은 1126년에 송의 수도 개봉을 포함 해 북중국 전체를 정복했다. 중국 
역사상 1126년 이란 한족이 만주족 왕조에 의해 두 번째로 중원으로부터 쫓겨 
난 사건을 상징한다. 양자강 남쪽 항주에 송 나라의 새 수도가 세워졌다. 
1141년, 송 조정은 화이강(淮河) 이북의 전 지역을 정식으로 떼어주고 금 
나라에 조공을 바치면서 신속(臣屬)하기로 약속했다.  북중국을 모두 상실하기 
이전의 송을 북송(960-1126)이라 부르고, 남으로 쫓겨난 후의 송을 
남송(1127-1279)라고 부른다.

선비족 정복 왕조의 지배 귀족 씨족 출신인 수와 당 왕조의 창건자들은 
팽창정책과 대국의 위세를 천하에 과시할 수 있었다. 당 왕조의 후계자임을 
자처하는 송 나라는 당의 잔해를 거두어 나라를 세웠으나, 317년에 진 나라 
지배자들이 남쪽으로 달아 났듯이, 여진족 금에 의해 중원에서 완전히 
축출되었다. 뿐만 아니라 남송은 달리(大理), 월남 등을 포함 한 수많은 남방 
영토를, 몽골에게 멸망되기 오래 전에, 상실했다. 

여진족 조정은 1153년에 수도를 하얼빈에서 북경으로 옮겼고, 
1161년에는 개봉으로 옮겼다. 금 나라 지배자들은 많은 여진족들을 북중국 
정복지로 이주시켜 수비대 임무를 수행토록 했다. 하지만 많은 수의 
여진족들은, 금 나라 시대 내내, 만주에 그대로 남아 옛 전통적 생활을 
계속했다.

여진족 금나라는 유목민 고유의 기병대에 손색없는 기병을 보유하는 
전방 수비대들을 유지했다. 세습적인 여진족 군호(軍戶)들은 한족 농민들로부터 
빼앗은 농토와 노예들을 배정 받았고, 한족들과는 분리되어 정착시켜졌다. 
하지만 여진족 병사들이 영농-수비대 생활방식에 완전히 적응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금의 정복을 피해 달아난 일단의 거란 귀족들은 서방으로 계속 이동을 
하여 서요 왕조(흑거란, 1124-1211)를 수립했다.  다분히 몽골적인 이들 
거란족이 몰려와 돌궐 유목민들을 복속시킨 것은, 100여 년 후, 징기스 칸의 
진짜 몽골족의 출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거란족과 마찬가지로 여진족도 자신들 고유의 문자를 사용하고, 수도 
개봉에 여진 언어 학교를 만들어, 자신들의 종족적 정체성을 보존하려고 
노력했다.  금의 세종(世宗, 1161-89)은 여진족 지배층에게 전쟁과 사냥 훈련을 
시키기 위한 프로그램을 실시했다. 귀족들은 정기적으로 수도 개봉을 떠나 
내몽골 혹은 만주 땅에 천막을 치고 혹독한 생활로 단련을 하면서, 말 타고 활 
쏘는 기술을 연마토록 강요되었다. Crossley(1997: 23)에 의하면, “세종의 
실험은 성공적은 아니었지만, 후에 중국대륙을 통치하게 되는 만주족 
황제들에게는 본보기가 되는 동시에 경고도 되었다.” 하지만 한족에 파묻혀 
버린 여진족 이주민들의 중국화 추세를 효과적으로 막아낼 수는 없었다.

고려와 금이 모두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천명
요와 북송(960-1127)을 정복한 후, 금 나라 지배자들은 고려 조정에 
신하-주군 (臣屬) 관계를 요구했다. 고려는 영토 보전의 대가로 금의 요구를 
수용할 수 밖에 없었다. Ledyard(1983: 324)에 의하면, “고려는 본래의 영토를 
보전하는 동시에 압록강 아래 땅을 추가시킬 수 있었다. 송 나라가 여진족에게 
북중국 전체를 빼앗긴 반면, 고려는 외교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여진족의 
침략을 회피할 수 있었다.” 송 왕조는 (북송, 960-1127, 남송, 1127-1279) 
계속 남쪽으로 쫓기어 내려가다가 마침내는 완전히 멸망되었는데, 놀랍게도 
고려 왕조(918-1392)는 거란의 요(916-1125), 여진의 금(1125-1234), 몽골의 
원(1206-1368) 등을 모조리 겪으면서, 이들 모두보다 더 긴 수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

고려와 금 나라의 창건자들은, 자신들의 뿌리를 추적하면서, 모두 다 옛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천명했다. 왕건은, 비록 영토는 압록강까지 밖에 이르지 
못했지만, 자신의 신생왕국 명칭을 고구려를 본 따 고려라 불렀고, 금 나라 
창건자는, 왕건 보다는 한 발 늦었지만, 실제로 그 넓은 만주 전 강역을 
점령했고, 금사에 기록된 바와 같이, (완안부) 시조 자신이 본래 고려에서 
왔다고 (혹은 고구려 출신이라고) 주장을 했다. 일찍이 발해는 일본열도의 
야마도 왕국과의 공식 외교문서에서 자신을 고려라 불렀었다.  금 나라를 세운 
완안 씨족의 국가수립 이념은 생 여진족을, 고구려 사람을 선조로 하는, 발해의 
유민으로 간주하는 것이었다. 

1136년, 고려 조정에서는, (묘청의 故土수복 이념--요즘의 평양인 
西京이념--으로 대변되는) 고구려 법통을 신봉하는 파가, (한반도 지배만으로 
만족하는 신라 귀족 후손 김부식으로 대표되는) 신라 후계자임을 신봉하는 
유학(儒學)파와의 싸움에서 패했다.  이 싸움에서 유학파의 승리는, 1170년에 
무신의 난이 일어날 때까지, 문신 지배체제를 확립했다. 1145년에 완성된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김부식은 사대주의 사상을 수용하고, 고려를 한반도에 
한정된 신라의 후계자로 상정하여, 같은 시대의 발해 (689-926) 237년 역사를 
제외한 채, 통일 신라 (677-935) 258년 역사만을 삼국사기에 첨부했다.

발해와 신라를 북조와 남조로 설정
일연(一然), 이규보(李奎報), 이승휴(李承休), 유득공(柳得恭) 등의 글은, 
고구려의 정신적 후계자들이, 김부식의 왜곡을 교정하고, 요동을 포함하는 옛 
고구려의 만주 강역에 대한 법통을 역사적 근거로 뒷받침 하려는 노력이라 볼 
수 있다.  유득공은 고려 조정이 발해와 신라의 역사를 “북조와 남조의 
역사”라는 구도로 편찬을 하지 못한 사실을 개탄했다.

유득공은 발해고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려가 발해사를 편찬하지 
않았으니, 고려의 국력이 떨치지 못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옛날에 고씨가 
북쪽에 웅거하여 고구려라 하였고, 부여씨가 서남쪽에 웅거하여 백제라 
하였으며, 박-석-김씨가 동남쪽에 웅거하여 신라라 하였다. 이들이 삼국을 
이루어 마땅히 삼국사가 있어야 했는데, 고려가 이를 편찬하였으니 옳은 
일이다.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하자 김씨가 남쪽을 영유하였고, 대씨가 그 
북쪽을 영유하여 발해라 하였다. 이들이 남북국을 이루었으니 마땅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된 
일이다. 무릇 대씨란 누구인가? 바로 고구려 사람이다. 그가 소유한 땅은 
누구의 땅인가? 바로 고구려의 땅으로, 발해가 동쪽과 서쪽과 북쪽을 물리치고 
이전보다 더 넓혔던 것이다. 김씨가 망하고 대씨가 망한 뒤에 왕씨가 이를 
통합하여 고려라 하였는데, 남쪽 김씨의 땅은 전부 거두었지만, 북쪽 대씨의 
땅은 모두 거두지 못했다. 일부는 여진족 땅에 편입되기도 하고, 일부는 거란족 
땅에 편입되기도 하였다. … 발해가 요 나라에 멸망되었어도 … 발해 수도 
홀한성이 함락되었을 때 고려로 도망해 온 사람들이 세자 이하 10여 만 명이나 
되었다. … 장건상은 당나라 사람이었으면서도 오히려 발해국기를 편찬 했는데, 
고려 사람은 어찌 발해 역사를 편찬 할 수 없었단 말인가?



동아시아 역사 강의: 3-3 (2005. 8. 6.)
정리: 강현사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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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쇼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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