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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chopin (** 쇼팽 **)
날 짜 (Date): 2006년 5월  5일 금요일 오전 11시 44분 13초
제 목(Title): 1955년 IMF의 한국경제보고서



1955년 IMF가 최초의 한국경제 보고서를 낸 이후 수십년, IMF 초대 한국인 
이사가 문서를 뒤져 찾아낸 최초의 한국경제보고서입니다. 아프리카 대부분의
국가들보다도 가난한 나라였다는 점, 앞으로 발전의 가능성이 없는 나라이기 
때문에 최소의 돈만줘도 된다며 원조를 삭감한 점등 어두운 과거를 볼 수 있는 
내용들이 흥미롭습니다. 세계경제랭킹 탑10진입을 기념하며 되돌아볼만한 글이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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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우등생 한국

한국을 지칭하는 여러 가지 표현 중에 ‘IMF 우등생’이라는 것이 있다.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난 직후인 1945년 12월 설립되어 60년 동안 국제 경제, 금융 
질서를 이끌어 온 IMF 라는 기관의 우등생이라는 타이틀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를 다른 시각에서 보면 한국 말고는 IMF가 지원한 나라 
가운데 딱히 내세울 만한 성공 사례가 별로 없다는 뜻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성공을 과연 IMF의 공으로만 내세울 수 있을까? 여기에 우리 
국민이 한 역할은 과연 어느 정도로 평가되어야 할까? 

우리나라가 IMF에 가입한 것은 전국이 6.25 전쟁의 상처에 아직 시달리던 
1955년 8월 26일이었다. 58번째 IMF 회원국이 된 두 달 뒤, 4명의 IMF 
이코노미스트들이 한국을 방문하여 약 한 달 동안 한국에 머물면서 경제부처 
관련 공무원들을 포함한 주요 관계자들을 만나 한국 경제현황 진단을 위한 
협의를 하였다. 그로부터 다시 두 달 뒤, 1956년 1월 6일, 한국 경제에 대한 
최초의 보고서(1955 Consultations Report, SM/56/3)가 IMF 이사회에 
상정되었다. 

IMF의 초대 한국인 이사로 부임한 후, 우리 직원들과 함께 IMF 도서관과 전자 
문서고를 다 뒤진후 어렵사리 이 문서를 찾아 낼 수 있었다. 일부 활자가 뭉게 
진 타이프라이터로 쓰여진 IMF의 첫 한국경제 보고서를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느꼈던 흥분이 아직도 뇌리에 생생하다. 


IMF의 첫 한국경제 보고서

그 보고서 첫 장 도입부에는 당시 IMF 협의 팀과 면담을 가졌던, 초창기 
한국경제를 이끈 주요 경제관료들의 이름이 나열 되어 있다. 여러분이 거명되어 
있지만, 그 중 몇 분만 들어보면, 우선 제2공화국에서 내각수반을 하셨던 고 
김현철 당시 재무장관의 이름이 보이고, 나중에 부총리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역임하신 고 이한빈 부총리가 당시 예산국 예산1과장으로 보고서에 거명되고 
있다. 신현확 전 국무총리가 당시 상공부 산업국장으로, 후일 한은총재, 
상공부장관 그리고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두차례 역임하셨던 고 신병현 
부총리가 한은 조사부 부국장으로 계셨음을 알 수 있다. 

IMF 재원의 주종을 이루고 있는IMF 쿼터(quota)는 IMF가 기금조성을 위해 
각국의 국민소득과 외환보유고, 무역량 등을 감안하여 각 회원국에 할당하는 
출자금이다. 우리나라의 가입 당시 쿼터는 미화 1250만 달러였는데, IMF 규정에 
따라 그 중 25%를 금으로 납입하였다. 당시 58개 회원국중 우리나라의 쿼터 
비율은 0.14%에 불과했으며, 우리 통화의 공식 환율은 1달러당 500 환이었다. 
(후일 화폐개혁으 
로 10환이 1원으로 바뀜) 경제 규모에 따른 각 회원국의 상이한 쿼터가 IMF 내 
영향력 행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감안해 볼 때 당시 우리의 
경제규모와 IMF내 위상이 어느정도에 머물러 있었는지 이 보고서를 통해 알 수 
있다. 

최초의 IMF한국경제 보고서에 실린 모든 내용들은 더 이상 한국 경제에 
들어맞지 않는다. 심지어 국토 면적도 늘어났다. 그러나 딱 한 줄, 그 보고서 
제 2장 요약편 (Summary of Discussions) 의 첫 문장만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것은 “대한민국은 한반도의 남부를 차지하고 있다 (The Republic of Korea 
occupies the southern part of the Korean Peninsula.)” 이다. 50년 전에 
씌어진 이 간단한 한 줄의 문장을 보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남북 
분단의 현실에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은 나 혼자만의 느낌일까? 

1954년 중반을 기준으로 추정한 당시 인구는 2170만 명이었다. 현재 인구의 
절반도 되지 않는 숫자이다. 그럼에도 IMF 보고서는 “한국의 인구밀도는 평방 
킬로 미터 당 230명으로, 세계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나라 중의 하나”라고 
적고 있다. 더욱이 경작가능 면적은 전국토의 4분의 1에 불과하고 산업이 
발달되지 않아 인구의 압력은 더욱 가중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IMF 협의 팀이 한국 경제에 관해 당시에 가장 우려하던 것은 물가 상승이었다. 
이 보고서는 1945년 해방이후 1955년 상반기까지의 물가 통계를 제시하고 
있는데, 10년간 소비자 물가가 무려 1131배 (%가 아님)나 뛰었다. 이는 10년 
동안 점증적으로 상승한 것이 아니라 대부분 6·25 동란 와중에 오른 것이다. 
전쟁이 끝난 다음 해인 1954년에도 물가는 전년대비 50%나 상승하였고, 1955년 
상반기중에만 다시 33% 상승하였다고 동 보고서는 적고 있다. 

한국 경제의 재건과 성장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될 인플레를 잡기 위해, 당시 IMF 
협의팀은 어떤 처방을 제시했을까? 금융측면에서는 한국은행이 화폐공급의 
증가를 억제할 것을, 재정측면에서는 정부가 균형예산을 편성할 것을 
권고하였다. 

당시 우리 정부의 재정은 크게 세 부문으로 구성되었는데, 일반 부문, 국방 
부문, 재건 부문이었다. 1955년 12월 국회에 제출된 1956회계연도 예산안을 
잠깐 살펴 보자. 정부 수지는 일반부문과 국방부문을 합쳐 1490억 환의 지출을 
계상하는 반면, 이를 위한 재정수입은 280억 환의 해외 원조를 합쳐도 1260억 
환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230억 환의 적자가 발생하게 되는데, 그 중 90억 환은 
국채발행으로, 140억 환은 한국은행 차입으로 조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재건부문의 경우 전액 외국원조로 충당되는 복구공사 프로젝트들이었는데, 그 
규모는 1250억 환에 이르렀다. 당시 한국 정부는 최종 재정수지는 미국의 
방위예산 원조 규모가 결정되어야 알 수 있다고 말한 것으로 보고서는 적고 
있다. 1954-55 회계년도의 미국 방위예산원조액은 194억 환에 달했다. 그러나 
1955-56 회계연도 원조규모는 합의가 되지 않아 우리 예산에 계상조차 되지 
못했다. 

IMF 한국경제 보고서의 국제수지 부문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한국 
국제수지의 가장 큰 특징은 한국의 국제수지가 외국 원조와 미군과 유엔군이 
한국에서 지출하는 비용에 의존하고 있는 규모이다.” 1954년 한국의 수출은 총 
수입액의 10%에도 못 미치는 2400만 달러에 불과하여, 경상수지는 2억 3500만 
달러의 적자를 기록하였다. 당시 총 외환보유고는 1억 2000만 달러였는데, 일본 
정부에 대한 4700만 달러의 부채가 있어 이를 갚을 경우 1956년 중반에 
외환보유고가 5000만 달러 이하로 떨어지게 될 것을IMF 협의 팀은 우려하고 
있다. 

한 마디로 1955년 한국 땅을 처음 밟은 4명의 IMF 협의 팀이 바라 본 한국 
경제의 미래는 암울했다. 관개시설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하늘만 쳐다 보는 
천수답 중심의 농업, 기반시설·기술·자본이 없어 경쟁력이 없는 산업,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기만 하는 물가, 전후 복구를 위해 돈 쓸 곳은 많은데 
제대로 걷히지 않는 세금… 1955년 IMF 최초의 한국경제보고서는 한국 경제의 
현재와 미래에 관해 
단 한 줄의 희망적인 문구도 적고 있지 않다. 


한 가난한 나라 이야기

지난 2004년 10월4일 워싱턴에서 IMF 연차총회가 열렸다. IMF 수석부총재이자 
미국의 대표적 여성경제학자인 앤 크루거 (Anne O. Krueger) 여사는 IMF 
연차총회에 참석한 아프리카 국가들의 재무 장관, 중앙은행 총재 오찬에 
초대되어 연설을 했다. 그 연설은 아주 감동적인 것으로 연차총회가 끝난 
후에도 한동안 워싱턴 일가에서 인구에 회자되었다. 아래 그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지하자원이라고는 거의 없는 한 가난한 농업국가를 떠올려 주십시오. 이 
나라는 너무 가난하여 GDP의 10% 이상을 외국 원조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심각한 가난과 높은 대외 의존도로 몇몇 경제학자들은 과연 이 나라가 해외 
원조 없이 자력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 조차 의문을 가집니다. 경작가능 
면적대비 인구밀도 세계 최고, 인플레율 세계 최고, 수출은 GDP의 3%에 
불과한데 그 중 88%가 1차 가공품인 나라. 

이것은 아프리카의 어느 나라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1950년대 아시아에서 
세 번째로 가난했던 한국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저는 결코 당시 상황을 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은 발전하지 못할 
것이므로 아주 낮은 수준의 소비를 지속할 수 있는 정도의 원조만 제공하면 
된다는 논리로 미국이 한국에 대한 원조 삭감을 결정했을 때, 이는 한국인들을 
일깨우는 촉매제가 되었습니다. 한국인들은 번영은 고사하고, 경기 침체와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획기적인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누구도 한국의 실험이 성공하리라고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한국이 얼마나 
크게 성공했는지를 되짚어 보면, 1960년부터 2000년 사이 한국의 실질 1인당 
GDP는 10배 늘어났습니다. 이것은 중국·브라질·인도·말레이시아·멕시코 
등을 능가하는 경이적인 성장 실적입니다. 

1960년에 브라질과 멕시코의 1인당 GDP는 한국보다 높았습니다. 그런데 
2000년까지 한국의 1인당 GDP는 거의 브라질의 3배, 멕시코의 3.5배 수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는 30년 넘게 해마다 30% 이상의 수출성장률을 기록한 
수출주도형 성장전략의 결과입니다. 

한국은 대부분의 국가들보다 더욱 성공적으로 발전했지만, 한국만이 유일하게 
발전 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다른 나라들도 유사한 
경제정책을 추구함으로써 급속한 생활수준의 향상을 누렸습니다. 한국은 그들이 
이룩한 것에 있어서가 아니라, 발전을 위해 투입한 그들의 헌신의 정도와 
집념에 있어서 다른 나라들보다 뛰어났습니다. 

1950년대에 한국은 아주 불리한 입장에 놓여 있었습니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의 하나였지요. 1961년 전세계의 국가 수가 지금보다 훨씬 
적었던 시절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60위를 기록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들의 1인당 국민소득은 한국보다 높았습니다. 

아프리카는 경제적 기회의 대륙이며, 그래야만 합니다. 아프리카에는 풍부한 
천연자원과 인적 자원이 있습니다. 아프리카는 건전한 경제정책을 채택하기 
시작하였고 그 성과가 가시화되는 등 발전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사례는 비전, 
헌신,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국의 이익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가질 때 얼마나 더 
큰 성과를 이룩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Anne O. Krueger IMF 
수석부총재의 연설 원문: 
http://www.imf.org/external/np/speeches/2004/100404.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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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쇼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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