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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Davin (다빈)
날 짜 (Date): 2005년 9월  8일 목요일 오후 06시 49분 19초
제 목(Title): [펌] 일제시대 이야기 7


“제1부 일제시대란 무엇인가?-7”  
 
 우리는 식민지였던 적이 없다.   
 
 clouds[구름~~]     
 
 두만강 북쪽에는 ‘간도’라는 이름의 땅이 있는데요, 이 땅의 이름이 
‘중간에 있는 땅, 틈새 지역’이라는 뜻의 간도(間道)인 이유는 후금(청)의 
태조 누르하치가 운명할 때의 유언으로서 만주족의 발원지를 원형 그대로 
보존하라고 했기 때문에, 청조 3백년동안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던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간도는 누르하치의 탄생지로서 만주족의 메카였던 
셈이지요. 그래서 오랫동안 사람이 들어가 살지 않고 비워져 있었기 때문에 이 
지역 전체가 무인지대로서 거주 지역 가운데에 빈 공간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간도라고 불리게 됐던 겁니다. 이 간도에 사람이 들어가기 시작한 것은 
구한말 조선의 난민들이 두만강을 넘어 북안으로 이주하면서부터입니다. 이때는 
청나라가 만주에 대한 통제를 거의 포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태조의 유훈이 
무시되는 것도 모른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주족은 명나라를 정복한 후에 대거 자신들의 고향인 만주를 버리고 중국으로 
이주했습니다. 발원지는 간도와 같이 적막강산으로 변해버렸죠. 원나라 때 
몽고족이 그랬던 것처럼 북방 유목민의 대규모 식민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민족의 대 이동이었습니다. 신대륙 발견 후의 유럽인의 대규모 이주도 
같았습니다. 신대륙의 원주인이었던 인디언은 대륙을 뒤덮고 내달리던 버팔로와 
함께 멸종의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버팔로 가죽과 인디언의 머리 가죽은 
백인들 사이에서 같은 짐승의 가죽으로 매매되었습니다. 백인의 집 거실 벽에는 
들소나 사슴의 박제된 머리와 인디언 추장의 장식된 머리가죽이 나란히 
걸려있었지요. 남미의 마야와 잉카인들도 스페인의 한줌도 안 되는 군대가 
모조리 박멸해 버렸습니다. 말 그대로 씨도 안 남기고 다 죽여버렸지요. 
그리고는 그 땅에 스페인 사람들이 옮겨 갔습니다. 호주는 수백 명의 영국인 
죄수들이 버려진 유형지였습니다. 백인사회의 낙오자요 부랑자들이었던 
범죄자들이 원주민을 몰아내고 시드니를 건설했습니다. 필리핀은 스페인과 
미국이 다투던 전리품에 지나지 않았고, 인도차이나는 프랑스가 군함 두 척을 
보내서 간단하게 손에 넣었습니다. 저항이랄 것도 없었습니다. 수억의 인구를 
가진 인도를 영국이 차지하는데 그리 많은 군대가 필요치 않았습니다. 
대영제국이 소유한 강대한 함대의 일개 분견대로서 충분했습니다. 

오히려 이런 열강의 지배에 강력한 반격을 가하고 패배를 안긴 것은 아프리카의 
줄루족이었습니다. 결국 진압되긴 했지만 창과 방패를 든 줄루족만큼 열강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예는 달리 없습니다. 만약에 일본이 근대화의 길을 걷지 
못해서 열강의 함대가 일본에 상륙을 했다면 줄루전쟁의 재판이 되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조선의 동학이나 중국의 의화단보다는 나았겠지만 결과는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의 선진열강과 미개한 중세국가들의 힘의 차이는 오늘날 우리들이 상상하는 
정도를 훨씬 뛰어넘는 것입니다. 맞서봐야 당랑거철이란 말이 지나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저항이나 투쟁이라는 것은 말하기는 쉽지만 거의 의미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소련의 무력침공에 핀란드는 필사적으로 항거했고 영웅적으로 
싸웠습니다. 그 유명한 겨울전쟁에서 소련에 통렬한 패배를 안기기도 했지만 
결국은 국토를 내주고 굴욕적인 항복에 동의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중국 같은 
경우는 워낙 땅이 넓고 사람 수가 많다 보니 뜯기고 잘라져 나가도 숨이 
붙어있을 수가 있어서 살아남았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경우는 어떠했는지 한번 봅시다. 우리는 독립국대 
독립국으로서 외견상, 문서상으로는 대등한 나라대 나라의 통합으로 일제시대가 
열렸습니다. 이게 협박이던지 협잡질이던지, 사기든지, 야바위든지 관계없이 
모양상으로는 국가대 국가의 협정에 의한 통합이라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는 
애깁니다. 앞서 들었던 수많은 세계의 다른 나라들과는 본질적으로 전혀 다른 
양상입니다. 

한번 생각을 해 봅시다. 힘이 없어서 정복당하고 학살당하고 마소의 신세로 
전락한 전 세계 대다수 식민지백성들이 수치스러운 것일까요, 조약에 의해 
나라간 통합의 형식을 취한 조선인이 부끄러운 것일까요? 두 가지가 다 부당한 
강요의 결과이고, 원치 않은 일이고, 반갑지 않은 사태이며, 결코 바람직스럽지 
않은 역사임에는 틀림없으나 이 두 가지를 놓고 상대 비교를 한다면 그 당시 전 
세계의 약소국가, 약소민족 중에서는 우리는 당당하고 자랑스러운 편에 
들어가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당시 조선은 국토의 면적, 인구의 수에서 열강의 먹이감이 됐던 수많은 나라들 
중 아주 작은 나라에 들어갑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정말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상대였습니다. 청국은 3,4천명의 군대로서 조선을 점령하고 
좌지우지하였고, 일본군이 조선의 수도를 점령하는데 1개 여단으로 
남아돌았습니다. 왕궁인 경복궁은 1개 대대면 끝이었습니다. 청국이 명목상 
종주국으로 위세를 부리고 있어서 그나마 다른 열강들이 포크와 나이프를 
함부로 들이대지 못했을 뿐입니다. 청나라의 종주에서 벗어나자 말자 조선의 
운명은 독수리 나는 들판에 내던져진 병아리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이것은 
조금도 과장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백 년 전 우리나라 조선의 위치와 실상이 
이러했다는 것입니다. 핏대를 세우면서 아니었노라고 반박하실 필요는 조금도 
없습니다. 사실은 사실대로 인정하고 넘어가면 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논점은, 우리는 전쟁으로 정복돼서 
남의 나라 식민지가 된 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우리가 똑바로 알아야 할 
중요한 진실입니다.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한일합방이 억지춘향이긴 했으나 그 
문서가 보증하는 것은 일본인과 한국인의 법적인 대등이고, 인격적, 신분적, 
계급적 동일이었습니다. 우리는 결코 노비문서에 도장을 찍은 일이 없는 
것입니다. 한일합방 조인서의 어느 구절, 어느 문구에도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다는 조항은 없습니다. 일본이 지배국이 되고 조선이 피지배국이 
된다는 조항도 없습니다. 설사 한일합방을 우리가 인정한다 치더라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조선인 중 어느 누구도 노예계약에, 식민지각서에 도장을 찍은 바 
없고, 동의한 바 없습니다. 이것이 역사의 진실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런 한일합방조차도 거부하고 걷어찬 사람들입니다. 그로부터 36년 
동안 우리는 끈질지게 그 조약의 무효를 주장했고, 취소를 위해 투쟁했습니다. 
전적인 우리 힘으로 취소시키지는 못하였으나 끝끝내 우리 민족은 합방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근거를 역사의 법정에 내밀 수 있도록 확보했던 것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또 다른 다수의 조선인이 합방에 동의하는 쪽에 줄을 선 
것도 사실입니다. 역사라는 법정이 있다면 일본은 일본측의 수많은 증인을 
불러낼 수 있고 그들 입장에서의 증거도 제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은 
사실로서 인정하고 팩트를 토대로 우리는 결론을 도출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이 일제시대라는 특이하고도 예외적인 사건에 대해 올바른 판결문을 
작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글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는 제가 따로 연재하는 ‘동북아 전쟁사’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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