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However (DOBW) 날 짜 (Date): 2005년 9월 1일 목요일 오후 05시 23분 26초 제 목(Title): Re: [펌] 일제시대 이야기 2 이 아줌마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글을 계속 쓰나보네요. 게다가 객원교수(?)도 되고 성공했군요. 다크맨옹 말대로 역시 강자를 까면 성공하나 봅니다. '노자를 웃긴 도올'인가 하는걸 썼는데 알고보니 자기가 가장 웃긴 사람이었죠. 그 이후에 사과했단 말 못 들었었는데, 혹시 사과는 하고 다시 활동(?) 하는 건가요? 아래 글은 원래 중앙일보에 실렸던 글인데 Philosophy 보드에서 다시 퍼 옵니다. `이경숙 · 김용옥 동양학 논란`을 보고… -------------------------------------------------------------------------------- `도올 현상` 에서 출발, `아줌마 논객 이경숙` 의 등장으로 이어진 동양학 열풍이 세간의 화제다. 이런 열풍에 대해 간간 반론이 있었지만, 정작 정통학계에서는 `논외(論外)` 의 대상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강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런 때 홍광훈교수(서울여대 중문과)가 김용옥 교수와 이경숙씨의 저서.강연.기고 등에 나타난 문제점을 지적하는 글을 보내왔다. 洪교수는 기고에서 특히 이경숙씨의 한문독법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 일반인 관심끌기엔 성공 김용옥씨에 이어 최근 이경숙씨의 등장으로 동양학에 대한 세인의 관심이 높아진 것 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두사람의 공이 일단 인정된다. 특히 이씨는 김씨에 대한 무모할 정도의 저돌적 `도전`으로 언론의 많은 관심을 끌었다. 그의 도전은 동양고전 읽기가 김씨와 같은 화려한 학벌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세상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했다. 평범한 `아줌마` 도 동양고전을 `옥편 한 권 들고 읽어나갈 수 있다` 는 사실은 확실히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런 면에서 이씨의 말대로 그 `음모` 는 일단 성공했다. 그러나 이씨의 `음모` 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 것 같다. 그의 글에는 그 소양이 의심스러울 정도의 기상천외한 해석법이 난무하고 있기 때문이다. 논어 첫 장을 비롯하여 `경귀신이원지(敬鬼神而遠之)` 나 `낙이불음(樂而不淫), 애이불상(哀而不傷)` 등의 구절에 대한 이씨의 해석은 문법적으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해석이다. 그는 언어를 언어로서 이해하지 않고 그만의 `공식` 에 맞추려고 한다. 논어 첫 장을 `독특하게` 뜯어 맞추어 번역하고 `유붕자원방래` 에서 `自(~에서)` 와 `래(來)` 를 합하여 `제 발로 찾아온다` 로 해석한 것이나, `경귀신이원지` 에서 `귀신이원` 을 하나의 목적어절이라 하여 `멀리 있는 귀신은 다만 공경하면 된다` 는 식으로 해석한다. `경이원지` 와 같은 구절은 오늘날에도 중국에서 구어로 상용되는 말이다. 만약 이씨의 해석이 옳다면, 지난 2천여 년 동안 수백 억의 중국사람들은 이 말을 잘못 써온 셈이고, 우리도 지금까지 경원(敬遠)이란 단어를 엉뚱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씨의 책에도 이 같은 억지주장이 곳곳에 보인다.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不貴難得之貨)` 이라고 할 것을 `귀난득` 을 연결하여 `귀하고 얻기 어렵다` 로 해석하거나, `아마 풀무와도 같지 않을까□(其猶□□乎)` 라고 할 것을 `기유` 를 연결하여 `그 움직임` 으로 해석하는 데에는 어안이 벙벙해지지 않을 수 없다. `처중인지소오(處衆人之所惡)` 나 `시지불견(視之不見)` 과 같은 가장 쉬우면서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구절도 엉뚱하게 번역해 놓았다. 특히 후자의 경우는 정반대로 해석해 놓았다. 시(視)와 청(聽), 견(見)과 문(聞)의 의미도 반대로 이해하고 있다. *** 이치 모르면 옥편이 무슨 소용 언어는 약속이다. 약속이 지켜지지 않으면 통용될 수 없다. 그런데 지금 이씨는 한문이라는 언어를 이해하는 고금의 모든 사람들 사이의 약속을 비웃으며 자기 혼자만의 `암호해독법` 이 옳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씨의 말대로 외국 명문대를 나와야 한문고전을 읽을 수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모든 언어가 그렇듯이 한문도 문리를 모르면 옥편만 가지고 해석할 수 없다. 그렇다고 일반인이 동양학에 접근할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 좋은 번역본을 읽고 그 내용을 잘 이해하면 되는 것이다. 이씨가 과연 자신이 말한 `음모` 이외의 다른 음모가 없다면 지금이라도 `허사사전` 등을 벗하여 한문의 문리를 터득한 다음 동양학 글쓰기에 나서고 남의 잘못을 지적하기 바란다. 김용옥씨를 이씨와 비교하는 것은 김씨에 대한 큰 실례다. 적어도 한문해독 면에서는 `9단과 9급` 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씨에게도 실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첫째, 검증되지 않은 것을 정설처럼 말하는 부분이 있다. 그는 `학이시습지` 를 설명하면서 공자가 일생동안 추구한 `학` 의 대상이 `육예(六藝)` 라고 했다. 그가 말하는 육예(禮.樂.射.御.書.數)는 기예에 불과하다. 학문의 목적이 `도(道)` 와 `인(仁)` 에 있음을 논어는 곳곳에서 증명하고 있다. `학이` 편에 "도가 있는 곳에 나아가 바르게 되면 배움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는 말이 그 예다. 그리고 `술이` 편의 "도에 뜻을 두고, 덕에 근거하며, 인에 기대고, 기예에서 노닌다" 고 한 대목은 `도` 와 `덕` 과 `인` 이 근본이고 `기예` 는 말단임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주례(周禮)』에는 "만민을 가르치는데 첫째가 육덕(六德)이고, 둘째가 육행(六行)이며, 셋째가 육예" 라고 했다. 김씨의 주장대로라면 공자는 일생동안 그 말단만을 가장 중점적으로 배우고 가르쳤다는 말이 된다. 공자가 육예로써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말은 『사기』의 `공자세가` 에 나온다. 그러나 『사기』에서의 `육예` 는 모두 `육경(六經)` 을 가리킨다. `백이열전` , `골계열전` , `태사공자서` 등에 명확하게 밝혀져 있다. 또 공자를 가장 심하게 비판한 장자의 `천하` 편에도 유가가 배우는 것은 `육경` 이라고 하였다. 둘째, 김씨는 공자의 `인간적인 면` 을 부각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논어의 자구를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 대표적인 예가 `사무사(思無邪)` 와 `발분망식(發憤忘食)` 에 대한 해석이다. `사무사` 를 `사랑하는 마음은 사악함이 없다` 로 해석할만한 근거는 찾기 어렵다. `발분망식` 은 오늘날까지 일상용어로 쓰일 정도로 해석에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이를 "화날 때는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린다" 고 해석하고 있다. *** 거친 번역 걸러냈어야 논어 전체가 바로 공자의 인간다운 면을 자연스럽게 보여 주고 있는데, 굳이 원전을 곡해하면서 그것을 강조할 필요는 없다. `술이` 편에서 `나는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이 아니다` 거나 `덕을 닦지 못하고 학문을 익히지 못하고… 이것이 나의 근심이다` 고 한 부분에서 우리는 공자의 인간다움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굳이 사랑을 말하고 희로애락을 절제 없이 드러내는 저급의 인간으로 묘사해야 반드시 인간다운 모습이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셋째, 김씨의 원전번역에는 엄밀함이 결여된 부분이 적지 않다. 그 대표적인 예가 노자 첫 구절인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 의 번역이다. 여기서 `도가도` 는 분명히 `도는 말할 수 있으면` 이라고 번역해야 한다. `도를 도라고 말하면` 으로 번역하면 그 말 자체가 모순된다. 노자는 `도` 를 이미 `도` 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노자의 뜻은 `도를 도라고 말할 수 없다` 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는 것이다. 여기서 두 `도` 자는 서로 아무 상관없다. 동사로서의 `도` 는 지금의 구어에서도 `말하다` 는 뜻으로 쓰이고 있지만, 노자 당시에도 단순히 `말하다` 는 뜻으로 널리 쓰였다. 시경, 좌전, 곡량전, 논어, 맹자, 장자 등에 그 용례가 무수히 나온다. 김씨와 같은 학자는 지금까지 분명히 동양학의 대중화에 많은 기여를 했고 앞으로도 더 큰 일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그런 만큼 박학다식을 자랑하기보다는 대중에게 보다 올바른 동양학을 보급하는 데 더 힘써 줄 것을 간곡히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