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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kisto (석)
날 짜 (Date): 1996년05월01일(수) 20시26분38초 KST
제 목(Title): [퍼온글] 메이데이 2



 일제시대의 메이데이(석탑 노동문고/'노동자와 노동절'/1985)

  우리는 메이데이란 어떻게 하여   생겨났는가, 다른 나라에서는 메이데이를 어떻
게 보내는가 그리고 메이데이의  참뜻은 무엇인가 하는 점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제 우리나라의 얘기를 할   차례가 온 것같군요. 우리나라에서도 메이데이  행사가 
있었는가, 있었다면   언제부터이며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가 하는 것이 이  장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내용입니다. 
  우선 일제시대의  각 연도별 메이데이 투쟁을  살펴본  후 그  의미에 대해 생각
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일제시대의 메이데이투쟁
  시작한 해 1923년
  1923년 5월 1일자 동아일보는 우리나라   최초의 메이데이 행사를 알리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습니다.
   "오늘! 오늘은 '메이데이'라는 5월  1일이다. 이 날은 횡포한 가본가에게서 쓰린 
압박을 받아가는 노동자에게 가장 뜻있고,  인연있는 유일한 축제일이다. 우리 조선
에서는 천하의 대중과 걸음을 같이  하기위하여 조선노동연맹회의 주최로 경성에서 
대 시위운동을  하려 하였으나 당국의  금지로 부득이 중지하고  예정과 같이 오늘 
오후 여덟시부터 종로 중앙기독교 청년회관(현재의 종로2가 YMCA건물)에서 강연
만 하게 되었더라."
  여기서 조선노동연맹회에   대해 잠시  살펴보아야겠습니다.  조선  노동연맹회는 
1922년 10월에 결성된   노동운동단체입니다. 이 단체는 노동자가 개인별로 가입한   
것이 아니고 전국  각지의 13개  노동조합이 결합하여 연맹의  형태로 만든 것입니
다.  총인원은 3만여명에 달했는데  결성된 그 해 말부터  각종 노동쟁의에 적극적
으로 참여해왔습니다.  그리고  다음해인 1923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메이데이 행
사를 계획한 것입니다.
  원래 조선 노동연맹회에서는 이날 약 1만   명의 노동자를 시내 장춘단공원에 모
아서 기념식을  가진 뒤 시위운동을   하려고 했습니다.  요즘 말로 한다면  데모를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일본 경찰은   이 옥외집회를 허락하지 않았으며, 신
경과민이  된 경찰은 금지명령에도 불구하고 만여명의   노동자가 일대 시위를  감
행할 것이라는  정보에 긴장되어 각  경찰서에서는 서로 연락하면서 시내를 엄중히 
경계하였습니다.
  오후 8시에 시작된 기념강연회에는 약   2천명의 청중이 모였는데 여기선 메이데
이를 기념하는 강연과 '8시간 노동,   8시간 휴식, 8시간 교육'이란 표어의 제시 그
리고 메이데이 만세  삼창 등의 순으로 행사가 진행되었습니다. 또한 노동연맹에서
는 노동절을  축하하는 전단을 뿌렸고 연맹 간부들은 경찰의 조사를 받았습니다.
  한편 노동자들은 처음 계획대로 시위운동은   못할지라도 이 날을 정성껏 기념하
기 위하여 각각  하던 일을  하루동안  쉬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시내 각처에  있는 
여러 직공  중에서도  양화직공(구두 만드는 노동자)으로만 조직된 시내 안동 네거
리  실비제화소와 인사동 양화직공좋바  작업부에서는 전부 파업하고 세창양화협회 
등  여러 양화점에서도 혹은 오륙명 혹은  삼사명씩 파업하였으며, 인쇄직공으로는  
신생활사 인쇄부에서 전부 파업하였습니다.
  한편 전남 무안군 지도면에서는 그곳 청년  수십명이 모여 노동절을 기념하기 위
해 메이데이 만세를 불렀으며  경찰은 즉시 현장으로 출동해 해산을 명령했습니다. 
또 진주, 마산의 노동자와  풍기의 소작인들은 노동강연회 등 기념행사를 가졌습니
다.
  한편 이날  일본 오오사까에서는 사천여명이  모여  대시위운동을 벌였는데 그중 
조선인노동자도 500여명 참가했습니다.
  1924년
  1923년과 1924에는   소작쟁의가 전국적인   규모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점차 
의식이 높아져  가던  노동자와  노동운동.농민운동 단체의 대동단결을  요구하였고  
전국적인 총동맹을   조직하자는 여론이   들끓었습니다. 이에 조선   노동연맹회를 
비롯한 167개 단체가  모여 1924년  4월 18일 조선노동총동맹의   창립대회를 개최
하였습니다.
  이 대회에서는 노동문제에 대하여
  1. 각 지방의 노동단체를 조직 원조하며 지방의 노동자 상황을 조사할 것
  2. 노동운동의 근본정신에 배치되는 단체를 파괴할 것
  3. 강습소, 팜프렛 등으로 노동자의 의식을 현저히 높일 것
  4. 노동시간은 8시간제로, 임금은 최저 1일 1원 이상으로 할 것
  등을 결의했습니다. 창립총회에 이어  임시대회가 열리자 일본 경찰은 대회의 해
산을 명령했는데   이에 분노한 5,6백명의  군중은  노동가를 부르면서  자연스러운  
대열을 짓고  시가를 배회하며  시위운동을  감행하였습니다. 그 결과 서울  시내는 
갑자기  긴장되어  곳곳에서 군중과 경찰의 충돌사건이  발생하여 30여명이 체포되
었습니다.
  노농총동맹은 집행위원회  간부 전부가 이  사건으로  검거 수감되었기때문에 메
이데이를 여러가지로  기념하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버렸고 기념강연회마저도 
금지당했습니다.  평양에서도 노동운동의  시위운동은 물론 어린이날  기념 시가행
진까지도 경찰에 의해  금지되었으며 강연회는  방해를 받았고 대신 메이데이 기념
전단 5천매가 살포되었습니다.
  인천 가등정미소의 노동자들은 노동시간   줄이라, 중국인 노동자 내보내라고 요
구하며  일천명이  동맹파업하였고  조선 매일신문사의  인쇄부직공  14명은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하였습니다. 서울 연지동  소재 신생활사 노동자 20명은  메
이데이 기념 파업을  했으며 당시  파업 중이던 길주  양화공들은 기념행사를 가졌
습니다.
  일본 동경에서는  4천여명이 기념행사를 가졌는데 '긴  머리의 조선사람'들도 섞
여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오오사까에서는   제일 조선노동연맹회를 포함한  52개 
단체에서 3만명이 모여 시위운동을 감행했습니다.
  1925년
  근로조건 개선을 위한  노동자들의 투쟁은  1920년대  들어와 점차 활발해졌으며 
이것은  수많은 노동쟁의와  노동단체의 설립으로  나타났습니다. 여기다가 1923년
의   첫 메이데이  행사를 시발점으로 하여   매년  5월1일이 노동운동의 상징적인   
날로 등장하자 일본 경찰은  메이데이 행사를 탄압하는 데 열을 올렸습니다.
  한편 1922년부터  우리나라에선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하고 기념하여 왔는데 
당시의 어린이날 행사는 요즘과  달라 며칠  전부터 시내 곳곳에 어린이날을  알리
는 포스터를 붙이고   전단을 살포했으며  5월 1일엔  어린이들을 앞세우고 시가행
진을 하는 등 제법 요란하였습니다.
  그런데 해마다 이 날은 메이데이라   하여 노동자들이 각지에서 파업하고 시위운
동을 감행하니까 이를 저지하는 데 골머리를  썩이던 일본 경찰은 치안상의 이유를 
들어 어린이날 기념 시가행진까지 금지시켰습니다.
  이렇게 되자  어린이날  행사를   추진하던 소수의  어른들은 메이데이는 메이데
이고  어린이날은 어린이날이 아닌가 하면서   경찰당국에 옥외행사를 허가해 달라
고 졸라댔지만 메이데이  행사를 막기에 급급하던  경찰은 이  부탁을 잘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이리하여 결국   그 어른들은 메이데이를 원망하면서  1927년부터는 5
월의 첫째  일요일로  어린이날을 옮기에 된  것입니다. 참으로 한심한 사람들입니
다.  어른들이  평등하지 않은데 어떻게 어린이들이   서로 평등할 수  있겠습니까?  
메이데이를 기념하여 파업 중인 노동자들의 어린   자녀와는 애초부터 무관한 어린
이날이었던 것입니다.
  어린이를 보호하고 올바르게 키우는 것은   부모에게도 큰 책임이 있는데 혹독한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에게 자기 자식들을 잘  보살필 수 있
는 시간적 여유,  경제적  여유 그리고 정신적 여유가 어디 있었겠습니까?  보살핌
을 받기는커녕, 가난한 노동자의  어린 자녀들은 일찍부터 아버지의 작업복을 줄여  
입고 어린이가 아니라 한사람의 노동자로서 공장에 나가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
로 정말  어린이를 존중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부모부터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의 
쇠사슬에서 해방되어야 할  것입니다,. 결국 당시의  요란한  어린이날 행사는 메이
데이와 관계없는 사람들의 어린 자녀를 위한 행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한편 일본  경찰에선 이미 4월부터   메이데이와 어린이날의  집회, 선전, 시위를 
금지한다고 밤표하였습니다. 심한   감시와 탄압을 받고 있던 조선 노동총동맹에서
는 (1)8시간노동제의 실시  (2)노동조합의  승인 (3)소작권 확립 (4)악법철폐(치안유
지법의 철폐와   언론, 집회, 시위, 결사의 자유보장),   검속제도의 철폐 등의  6개 
항목이 든  전단을 인쇄하여 각 지방에 살포하였습니다.
  또 원산에선   메이데이 파업이 크게   행해졌는데 여기엔  원산 노동조합,  원산 
청년회,   덕흥인쇄소, 원산 고무공장  등의  노동자가  가담했으며 요시다, 미도모, 
고무라 등 3개  인쇄소의 노동자들도 메이데이 기념파업을 하였습니다.
  서울의 양화직공조합에선   노동절  기념파업을   했으며 평양의   냉면집노동자 
208명도  파업을 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광주, 순천,  나주, 대구, 마산, 울산, 해주 
등지에서도 각종 기념행사가 있었습니다.
  1927년
  노동운동에 대한 경찰의 탄압은 날로   심해져서 메이데이에 관해 협의하는 것까
지 금지당하는 등 일체의 집회가 금지되었습니다.
  전주와 김천에서는 기념행사를  가졌고  김제에서는 시위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한편 마산,  진해, 청도 등지에선 기념행사를  하다가 금지당했습니다.
  동경에선 2만여명의 군중과 이를 둘러싼   1천여명의 경찰이 함께 메이데이 집회
를 가졌는데 여기엔 조선사람 3백명이 참가하였습니다.
  1928년
  여러곳에서 노동절  기념행사가 금지되었으며   노동운동가들에겐 대대적인 단속
이 있었습니다.  이런 중에서도 김제   노동조합은 5월 1일 오전11시  조합회관에서  
2천2백명이 모여  메이데이 기념식을  거행하였습니다. 
  기념식은  기념사, 5분간 묵념  등으로  진행되었고,  조합원 일동은 총파업을 하
여 경찰을 극도로 긴장시켰습니다.
  원산에서는 원산 노동연합회 산하  42개  가맹단체와 노동자 2천여명이 총파업을 
단행하였는데  당시 동아일보는 이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였습니다.
    "노동자들은 오전 8시부터 연합회 회관에  모여들기 시작하여 동 회관 앞 큰길
은 교통이 차단되었으며  시위운동을 하려 할 때에  원산경찰서로부터 동서 고등주
임이 사복겯아찰 78명과 함께  달려들어 해산을 명하였으나, 구름같이 모여드는 노
동자들은 헤어지지를 아니하고 물밀듯이 모여들어  경찰과의 사이에 여러번 시비가 
있었다."
    "흥분한 노동자들은 술을 구루마로 실어다  놓고 마시며 결국 원산시내에 흩어
져서 자못 메이데이 하루는  노동자 천지로 화하였으며, 표어를 써서 높이 단 깃발
은 압수를 당하였고  오후 8시부터는 전등을 가설하여 불야성을  이루는 회관 옥상
에서 라디오를 공개하여 메이데이의 장엄을 과시하였다 하더라."
  이 원산 노동연합회는  원산의 여러  노동조합이 모여서 결성된  일종의 지역 노
동운동 연합체입니다.  원산  지역 노동자의 90퍼센트  이상이 가입한 이 연합회는   
회의실까지 갖추어진 2층 회관,  입원실이  10개나 되는 노동병원,  소비조합, 이발
소 등의  운영과 함께  활발한  복지활동을 펼쳤으며 모든  노동쟁의를 노동자에게 
유리하게 해결한  쟁쟁한 실력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   연합회를 눈의 가시처럼  생각한  일본경찰이  경리장부를 압수하여 부정을 
캐내려고 발악하였으나 단 한푼의  부정도 발견할 수 없었던 청렴결백한 조합운영, 
쟁쟁한 실력을 갖춘  헌신적인 지도부 그리고 무엇보다도  산하 조합원들의 철통같
은 단결력은 우리나라  노동운동 사상 가장 모범적인 조합활동을   한 원산 노동연
합회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이  원산노동자들은 바로 다음해인 1929년 1월부터 4개
월동안 진행되어 우리나라 노동운동사뿐 아니라  세계 노동운동사에도 큰 발자국을 
남긴 '원산 총파업'의 주인공이 되게 됩니다.
  한편 진주, 철원,   전주, 봉화, 장성, 이리, 김해, 청진,  기장,  벌교등지에서 메이
데이 기념식이  있었고  해주, 성진, 괴산,  영광 등지에선 기념 강연회가  있었는데 
영광에선 강연회  개최 후 시위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1929년
  노동절 집회는   옥내외를 불문코 금지되었으나  성진, 청진,   마산 등 각지에서 
기념행사가  있었습니다. 마산에서는  580명의 노동연맹원들이 농악과 노래 그리고 
춤으로 이 날을 기념했습니다.
  1930년
  전주에선 기념식을 가졌고 광주  노동자들은 기념야유회를 개최하였습니다.
  1931년
  노동절 경계가  삼엄한 가운데 마산의  부두노동자들은  일제히 파업에 돌입하였
으며 원산의   인쇄노동자들도  파업하였습니다.   청진에서는 5백여명의  노동자가  
시위운동을 하였고  밀양에서도  시위운동이  있었습니다. 서울에선 지하 투쟁위원
회가 조직되었고   용산, 동대문 등지의 공장지대에 전단이   살포되었습니다. 나남
과 성진에서도  전단이 살포되었으며 회령과   광주에선 기념식과 기념야유회가 개
최되었습니다  또한 부산의 철도 노동자들은 선동 강연회를 가졌습니다.
  1932년
  인천에 있는 조선인촌(성냥공장)에선  남녀 직공  356명이  임금 50% 이상 인상, 
8시간  노동제 실시, 경찰간섭 반대 등 10개항에  걸친 요구서를 회사에  제출하고 
파업을 감행함과  동시에  동력을  정지시키고 공장내에서 농성하였습니다. 그리고 
서울, 부산,  개성, 진남포, 인천, 논산등에선 메이데이 기념전단이 살포되었습니다.
  1933년 이후의 메이데이
  1933년 5월  1일엔 전국 각지에서  기념전단이  살포되었으며 1934년엔 함흥형무
소에서 사상범  7백명이  만세를 부르며  메이데이를 기념하였습니다. 흥남 질소비
료공장에선  노동절  전단이 살포되었는데 이  공장 노동자  6백명은 넉달 후 처우
개선  등을 요구하며  파업하였습니다. 1935년에는 흥남,  안변, 함흥 등지에서   전
단이 살포되었으며  1936년엔 함흥형무소에서 사상범   35명이 메이데이 만세를 외
쳤으며   부평에선 전단이살포되었습니다.  이후에도 매년   산발적인 전단  살포로  
메이데이가 기념되었습니다.

  2. 일제하 메이데이 투쟁의 의의
  일제시대의 노동운동
  일본 제국주의는  우리나라  노동자들을 혹독하게  학대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루 
평균 13시간 내지  16시간이라는 장시간노동과  일본 노동자의 절반도 안되는 저임
금 그리고  도저히 인간의  노동이라  부를 수 없는 동물적인  작업조건  속에서도 
우리 노동자들의  의식은 점차   저항의 칼을 갈며 투쟁의 날을  세웠습니다. 조선 
총독부가 치안유지의   필요에서 사실보다 줄여서 발표한   통계를 보면, 3.1운동이 
일어나기 전  해인  1918년에 이미 50건의 노동쟁의에  4,443명의 노동자가 가담했
으며 1920년부터 1923년까지의 4년 동안에는 모두  235건의 노동쟁의에 15,842명의 
노동자가 참가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메이데이 행사가 거행된  1923년에는  전국에 3천5백개의 공장
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원산 총파업이   일어나기 전  해인 1928년 우리나라  전체  
노동자는 120만 명이었으며 그중  공장  노동자는 8만8천 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은 
날품팔이,  즉 자유노동자였던  것입니다.
이렇듯 조직력이 강한  공장노동자의 수가 적고  또한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는 불
리한 여건 속에서도  우리의  각성한 선배 노동자들은 일찍부터  각종 단체를 통해 
단결하였으며 노동운동은 끈질기게 진행되었습니다.
  또한 임금인상을  요구하고 노동시간 단축을   위해 싸우는  것이 다만 노동자와 
기업주 사이에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그 기업주들을 뒤에서  받쳐주고 
있는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통치자와의 대결에서 결정된다는  사실을 체험을 통
해 느낀  우리나라 노동자들은 민족해방 없이는  결코  자신들의 처지가 개선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당시에 생겨난 각종 노동단체의 강령이나   선언을 보면 단순한 경제적인 이익만
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요구도 나타나는  것은  바로 이때문인  것입니다.  
이러한 노동자  대중의 투쟁역량이 강화될수록   이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날로 심
해져갔습니다.
  1925, 26년부터 노동운동이   한층 더 치열해지자 일본  제국주의 파쇼세력은 발
악적인  탄압정책으로 맞섰으며 1930년에 이르자   기존 노동단체마저도 강제로 해
산시키기 시작하였고  정당하게 일으킨  노동쟁의까지도 주동자를 마구 검거하였으
며  일체의 집회는 금지당하였습니다. 이와같이 강화되는  일본 제국주의의 탄압으
로 말미암아   우리나라의 노동운동은 큰  수난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1935년에서 
1936년  사이에는 거의 모든 지방 노동단체는  그 기능을 정지당하고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된 것입니다.
  메이데이 투쟁의 의의
  모든 노동운동은 자연발생적인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19세기 초 영국에선 기
계의   도입에 따른 새로운   생산방법 때문에  많은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거나 
임금이 인하되었는데 당시   영국 노동자들은 이  저주스러운 기계를 파괴함으로써 
그들의  생활을 개선하려고 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처구니없는  일로 보이
겠지만 이  영국노동자들은  오랜 세월을  통해 많은 대가를 치르면서   보다 나은 
투쟁방법을 개발해내었습니다. 그리하여 1900년에는 독자적인  노동자의 정당을 만
들기에 이르렀으며 이 노동당은 그후 여러차례 집권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절박한  생활상의 요구가 도화선이  되어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는 노동
운동은 그  투쟁이 깊어갈수록 보다 뚜렷한  목적을  지닌 의식적인 운동으로 발전
하며  정확한  판단과 치밀한 준비 그리고  강인한  투쟁정신으로 무장한 과학적인 
운동으로  바뀌게 됩니다. 메이데이 투쟁은 그러한 목적의식적인  노동운동에 있어
서 하나의 빛나는  봉우리인 것입니다.
  일본 군국주의  파쇼의 가혹한 식민지정책  아래서  신음하던 우리나라 노동자들
은 자연발생적인 노동쟁의를 거듭하면서  단결과  조직의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했
으며 이것은  수많은 노동조합의  결성으로  이어졌습니다. 나아가 보다   조직적인 
노동운동을 펼치기  위해  노동조합을  비롯한 각종 노동단체가   모여서 전국적인 
노동자 조직을  만들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리하여 1920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전
국적인 노동자조직인 조선노동공제회가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이처럼 점차 빈번하게   일어나는 노동쟁의, 보다 높아지는  노동자 의식 그리고   
점점 활기를 띄어가는   조직적인 노동운동이  바로 1923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메
이데이 행사를 탄생시킨 밑받침이 된 것입니다.
  일본에서의 메이데이 행사는  당국의 검열을  받는  표어를 사용하고 시위운동의 
구역제한 지시에 따르면   허가되었지만 우리나라에선 시위운동과  선전운동 등 일
체의  행사가 금지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노동운동이 단순히 노동자와  자본가 사
이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본제국주의 통치자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파업, 시위운동, 전단   살포, 기념식, 기념강연회, 기념야유회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펼쳐진 메이데이투쟁은  국내에선 유일하게  매년 정기적으로 벌어지는  민족
해방운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의 탄압이 점차  광기를 띄어감에 따라  
전국적인 노동자  조직체부터 타격을 받기 시작했으며, 공개적인 투쟁은  불가능해
졌고 생존권을 수호하기 위한  노동자들의  투쟁은 비합법적인  지하조직, 폭동 그
리고  무장투쟁의 형태로 바뀌어져갔습니다.
  따라서 1930년대에  들어서서 메이데이 투쟁이  점차  활기를 잃어가고 나중에는 
기념전단을 살포하는 정도로  그치게  되는 것은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우리
나라의 노동운동이 암흑기에 들어서면서  일부  노예적인 순종을 하거나 아니면 일
본  제국주의에 직접적으로 대항하는 투쟁으로  그 모습을 바꾸었기 때문인 것입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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