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kisto (석) 날 짜 (Date): 1996년05월01일(수) 20시24분35초 KST 제 목(Title): [퍼온글] 오늘 106주년 메이데이 1 참세상에 있는 과기노조 게시판에서 퍼온 자료입니다. 세상은 지금(시사/정세/노동)(KSTU 6) [2/263] 제 목: [노동] 노동절 이야기 올린이: 김경순(푸소) 95.04.20 12:47:45 조회:42 메이데이 이야기 365일 계속되는 노동운동을 대표하는 하루, 이것이 바로 메이데이인것입니다. 고난에 찬 노동운동의 역사를 돌이켜보며, 선배노동자들의 위대한 희생을 추모하는 날, 노동자의 근로조건과 생활상태의 개선을 위한 대열에 앞장 설 것을 굳게 다짐하고 그 확고한 신념을 표명하는날, 노동운동에 대한 일체의 탄압, 그 음모와 폭력의 장본인들에게 정기적으로 경고하는 날, 전 세계 노동자는 같은 처지에 있는 한 형제이며 굳게 단결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는 날, 그리고 그 단결을 과시하는 날, 이것이 바로 메이데이의 참뜻입니다. ▣ 자료 차례 ▣ - 메이데이의 유래 - 메이데이의 탄생과 의미 - 일제시대의 메이데이 아직도 메이데이는 그냥 하루 쉬는 날 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오늘날의 44시간 노동제를 쟁취하기 위해서 피어린 싸움을 했던 사람들이 있었음을 기억합시다. 또한 얼마전 독일의 금속노동자들은 자주적 단결로 35시간 노동제를 쟁취 하였음을 생각해볼 때입니다. 노동의 역사, 노동운동의 역사는 자주적으로 단결하여 하나하나 쟁취하여 온 역사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보다더 진지하게 우리자신의 존재에 대 해 생각하고, 건강한 노동자로서, 당당하게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각 지부의 노동교육자료로 활용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노동조합정보에서 갈무리하였습니다. 과기노조 조직쟁의국 메이데이의 유래 (석탑 노동문고 '노동자와 노동절'/1985) 1. 백년 전 미국 노동자와 노동운동 백년 전의 미국 메이데이의 유래를 알아보기 위해선 먼저 백년 전의 미국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런데 백년 미국이라 할 때 사람들의 머리에 제일 먼 저 떠오르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대개는 아파치족의 습격과 쫓기는 카우보이, 혹 은 쌍권총을 찬 황야의 무법자와 보안관의 결투가 먼저 머리에 떠오를 것입니다. 또 뭘 좀 안다는 사람들은 흑인노예와 링컨대통령, 혹은 남북전쟁 정도 생각할 것입니다. 사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텔레비젼이나 영화에서 보여주는 것이 주로 그런 것들이니까요. 물론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극히 일부 사람들의 얘기에 지나지 않으며 백년 전 미국의 참모습을 나타내 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백년 전의 미국 사회를 정확히 알기 위해선 우선 당시의 미국 인구가 어느 정 도 되었는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백년 전 미국의 인구는 지금 우리나라의 인구보 다 약간 많은 5천만 명이었습니다. 그중에서 카우보이와 황야의 무법자 그리고 보안관을 자기의 직업으로 하고 있는 사람들은 전국을 다 합친다 해도 당시 인 구의 1퍼센트도 안되었습니다. 결국 우리는 텔레비젼과 영화 때문에 백년 전의 미국에 관해서는 이 1퍼센트도 안되는 사람들의 얘기만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5천만 인구 중에서 직업을 가 진 사람은 1,740만명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그중에서 890만 명 정도가 농업에 종 사했으며 노동자는 850만 명 정도 되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 노동자 숫자와 비 슷하지요. 철강공장 노동자는 14만 명이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보다 두배 정도나 되는 숫자입니다. 백년 전이라면 한참 옛날로 생각되겠지만 당시 미국은 산업이 꽤 발전하던 나 라였습니다. 곳곳의 수많은 공장의 굴뚝에선 시커먼 연기가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왔으며 그 속에선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이 땀을 흘리며 일하고 있었습니다. 용광로 앞에서 하루 12시간 내지 14시간씩 일하며 어둡고 위 험한 탄광 속에서 물이 무릎까지 차오르는 가운데 곡괭이를 휘두르며, 철도를 건설하고 기차를 달리게하며, 기관차.교량.댐을 만들고, 산을 뚫어 길을 내고, 공 장에서 맡겨진 일을 다하면서, 철.석탄.석유.구리를 공급해주고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노동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대가로 노동자들에게 돌아온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1890년 미국 정 부의 조사에 따르면 국민소득의 절반 이상을 전체 국민의 8분의1의 사람들이 차지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맨꼭대기에 1퍼센트의 부유층의 총소득은 전체 국민의 50 퍼센트를 차지했던 맨밑바닥 빈민층의 총소득보다도 많았다고 합니다. 또 미국 전 체 1,200만 가구 가운데서 550만가구는 재산이라고는 하나도 갖고 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물론 전체국민의 재산 중 절반 이상을 16분의 1의 사람들이 차지하고 1퍼 센트의 최고부자들의 총재산이 전체 국민 중 80퍼센트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총재 산이 전체 국민 중 80퍼센트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재산보다 많은 우리나라의 현 실과 비교한다면 그나마 양호한 편입니다. 그런데 갑작스레 번 재산을 어쩔 줄 몰라 탕진하는 이 1퍼센트의 부유층에 관한 이야기는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그들은 말잔등 위에서 저녁 식사를 하면서 사랑하는 말에게 꽃과 샴페인을 먹 였다. 조그마한 흑갈색의 강아지에게 다이아먼드가 박힌 1 만 5천 달러짜리 목걸 이를 달아주고 호화로운 움식을 대접하였다. 어떤 연회장에서는 100 달러짜리 지 폐로 담배를 말아 피웠고 또 어떤 연회에서는 손님들에게 고급 흑진주를 넣은 조 개를 대접하였다. 또 다른 한 연회는 주최자의 광산속에서 베풀어졌다. 이 연회에 부자친구들만 초 대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정도의 오락에 싫증을 느낀 재벌들은 더욱 기기묘 묘한 일들을 생각해냈다. 원숭이를 손님 옆에 앉히고, 금붕어로 변장한 여자들을 연못 속에서 수영하게 하고 파이 속에서 소녀 합창단이 튀어나오게 하는 등의 장 난도 했다. 이빨에 다이아먼드를 끼우는가 하면 애완용 원숭이를 위해서 마차를 대령하고 사람이 시중을 들었다. 개에게 리본을 달아 사륜마차 뒤에 태우고 산책하러 공원 으로 마차를 몰고 가기도 했다. 크로에서스라는 사람은 딸에게 60만 달러짜리 목걸 이를 사줬으며, 또 6만 5천 달러짜리 화장대와 7만5천 달러짜리 연극을 보는 쌍안 경을 사주기도 했다. " 노동자들의 임금이 일주일에 11~15달러 하던 시절의 얘기입니다. 그러나 그것 은 일당이 센 사람들의 얘기이고 일당이 50센트(100센트가 1달러)도 못되는 사람 들도 많았으며 어떤 탄광에선 2만 2천 8백명의 노동자 가운데 5천 5백명이 7살 부터 16살 사이의 소년들이었는데 그들은 일주일에 1~5 달러 받고 일했습니다 1883년 9월 18일 토마스라는 한 방적공은 미국 국회의 노사문제 위원회에 나와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나에게는 형님이 한 분 계십니다. 형님네 식구는 형수와 네 자녀까지 합쳐서 여섯입니다. 형님의 수입이라고는 일당 1.5달러뿐입니다. 형님은 철공소에서 일하고 있는데 보통 1년 중 석달은 일거리가 없어 서 쉽니다. 말하자면 아홉달치 봉급으로 여섯 식구가 1년을 연명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일당 1.5달러짜리 봉급으로 말입니다. 이러니 식구들이 끼니인들 제대로 이을 수 있을 것이며 옷가지야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어린 자식들은 걸핏하면 앓아눕고 하니 말입니다. " 칭얼대는 어린 자식들 그리고 돼지우리 같은 집, 참혹한 가난과 인간이하의 생 활에서 탈출하는 길은 단 한가지뿐이었습니다. 즉 싸우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 나 동양이나 서양이나 마찬가지로 공장이 있으면 노동자가 있고 노동자가 있으 면 인간다운 생활을 위한 몸부림 노동운동이 있게 마련입니다. 백년 전의 미국도 예외는 아니어서 근로조건 개선을 위한 미국 노동자들의 싸움이 이미 수 십년째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메이데이의 유래는 바로 지금으로부터 백년 전 근로조건 개선을 위한 이러한 미국 노동자들의 고난에 찬 투쟁의 역사에서 출발하게 됩니다. 2. 5월 1일을 향해 8시간 노동 8시간 휴식 8시간 교육! 우리도 이제 노동을 안할테야. 일해봐도 보람도 없는 그런 일은 않을테야. 겨우 연명할만큼 주면서, 생각할 틈조차 안주다니. 진절머리가 난다네. 우리도 햇빛을 보고 싶다네. 꽃냄새를 맡아보고 싶다네. 하느님이 내려 주신 축복인데 우린들 아니 볼 수 없다네. 우리는 여덟시간만 일하려네. 조선소에서, 공장에서 그리고 점포에서 우리는 힘을 길러 왔다네. 이제 우리 여덟시간만 일하세. 여덟 시간은 휴식하고 남은 여덟 시간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해보세 이것은 지금으로부터 백년 전 8식나 노동제 실시를 요구하던 미국 노동자들이 가는 곳마다 부르던 노래입니다. 당시 한주일에 적어도 100시간씩 일해야 했던 미국 노동자들은 임금인상, 작업환경의 개선과 함께 8시간 노동제의 실시를 요구 하며 목숨을 건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는 것도 결 국 인간답게 살아보려고 하는 것인데 목숨까지 걸어야 할까요? 그러나 당시엔 그랬습니다. 기업주들과 그들의 친구인 경찰.군대.깡패들이 목숨을 요구했기 때문입 니다. 당시 미국의 노동자들은 힘없는 노동자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노동력제공의 거 부 즉 파업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단결을 통해 모여진 힘은 파업을 통해 발휘되었습니다. 그러나 노동자들으 파업에 부닥친 기업주들은 그리 외롭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오랜 친구인 경찰과 군대가 발벗고 나서서 파업을 파괴해 주 었기 때문입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기업주들은 넘쳐 흐르는 돈을 갖고 폭력을 샀습니다. 당시 미국에는 [핀커튼 흥신소]라는 사설 탐정소가 있었는데, 말이 흥신소이지 돈을 받고서 파업을 파괴 하며, 노동조합을 깨부수고 심지어는 살인까지도 서슴치 않았습니다. 물론 우리나 라에서도 연약한 여성근로자들을 폭행하고 똥을 뿌리고, 직장에서 강제로 끌어내 는 등의 예도 많았습니다. 아마 이런 행위를 한 사람들의 대 선배격이 되는 셈입니 다. 인간다운 생활을 위한 미국 노동자들의 목숨을 건 싸움에 대한 기록은 여기에 다 소개하지 못할 정도로 많습니다. 그중에서 1877년에 있었던 일을 하나 소개하 겠습니다. 당시에 불경기로 인해 실업자가 늘자 교활한 기업주들은 노동자의 임 금을 내렸습니다. 싫으면 나가라, 나가봤자 취직하기 힘들 것이다. 결국 이런 얘 기였습니다. 그러자 철도 노동자들이 제일 먼저 이 임금인하에 반대하여 파업을 일으켰습니다. 철도 노동자들에 의해 일어난 파업은 미국 최초의 전국적인 파업으로 확대됐습 니다. 그러자 즉시 주(州)군대가 출동했으며 이어서 연방군대까지 동원되어 생활을 지키기 위해 일어선 노동자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시민들에게 발포를 하였습니다. 파업은 피바다가 되었고 1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하였습니다. 당시 어떤 신문 은 이를 두고 '임금을 위한 전쟁'이라 불렀습니다. 산업재해로 생명과 신체를 시 시각각으로 위협하는 위험천만한 사업장이 하나의 전쟁터라면 임금인상을 요구 하는 파업은 또 다른 전쟁터였던 것입니다. 공장 부근의 병원은 야전병원이며 또 누가 붙였는지 모르겠지만 노동자를 산업전사(産業戰士)라고 부르는 것은 이런 의 미에서 참으로 적절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저임금과 장시간노동이라는 인간 이하의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한 미국 노동자들의 몸부림은 총알과 몽둥이를 무서워하지 않고 날로 커져만 갔습니다. 거 듭되는 쌍무 속에서 각성한 노동자들은 효과적인 싸움을 위한 방법을 터득해 나 갔습니다. 개별 사업장에선 단위 노동조합을 만들어 뭉치며, 이 노동조합들을 지역 적으로 그리고 전국적으로 엮어서 보다 더 큰 힘으로 만들려는 노력이 일찍부터 있어왔던 것입니다. 이미 1866년에는, 50개의 지방조합과 13개의 시 조합회의, 2개의 전국조합과 5개 의 8시간 연맹으로부터 나온 77명의 대표자에 의하여 전국노동협회가 결성되었 습니다. 전국노동협회는 첫번째 모임에서 다음과 같은 선언을 발표하였습니다. 자본주의적 노예상태로부터 이 나라의 노동자들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현재 가 장 시급히 그리고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은 미국의 모든 주에서 하루 노동 시 간을 8시간으로 제한하는 법률을 통과시키는 일이다. 노동시간을 줄이는 것은 바로 임금을 올리는 길이며 동물과 같은 생활에서 인 간다운 생활로 한 걸음 내딛는 중요한 계기라고 생각했던 미국의 노동자들은 임 금의 감소가 없이 이루어지는 노동시간의 단축, 즉 8시간 노동제의 확립을 일찍 부터 요구해온 것입니다. 뒤이어 생긴 직업별 노동조합 연합회, 노동기사단, 미국 노동총동맹과 같은 노 동단체들도 노동시간의 단축을 당면한 최대의 문제로 규정하고 8시간 노동제 법 률의 제정을 촉구했습니다. 미국 캐나다 노동총동맹은 1884년 연차 총회에서 "1886년 5월 1일의 8시간 노 동제 실시를 요구하는 파업에 모든 노동자들이 가담하자"는 결의문을 만장일치로 채택하였습니다. 이어서 각지에서 [8시간 노동제 추진동맹]이 늘어갔으며 다음해 인 1885년에는 이미 8시간노동제 추진운동이 전국적을 확대되었습니다. 약속한 해 1886년 드디어 약속한 해인 1886년이 되었습니다. 약속한 날인 5월 1일을 향한 움직임 은 이른 봄부터 곳곳에서 나타났습니다. 3월 중에 신흥 공업도시 시카코에서는 가구노동자, 기계노동자, 가스업노동자, 연관공, 벽돌공, 주물공, 운수노동자들이 '5 월 1일 이전에 8시간 노동제를 실시하지 않으면 이 날에 파업을 하겠다고 결의 하였습니다. 4월 초순에는 가축 수용장의 3만 5천 노동자들이 파업에 참가하기로 결정하였고, 4월이 깊어감에 따라 석탄운반공, 미장공, 푸줏간 노동자, 장난감공 장 노동자, 신발공장 노동자, 양품전 점원, 인쇄공 등이 연이어 파업참가를 결의 하였습니다. 4월 말에 이르러 파업을 결의한 노동자의 숫자는 6만 2천명에 이르 렀습니다. 약속한 날 5월 1일 5월 1일 시카고의 날씨는 더할 수 없이 화창하였습니다. 웬일인지 북서쪽으로부 터 불어치던 바람마저 그치고 햇살도 따사로왔습니다. 거기다가 공장들마저 기계 소리를 멈추었습니다. 상가는 문을 닫았고 운전수들도 쉬고 있었습니다. 공사장의 망치소리도 멈추었고 거리에는 인적이 끊어졌으며 공장굴뚝으로부터 높이 오르던 연기마저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축수용소는 고요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참으로 조용한 날이었습니다. 이날은 토요일, 정상적으로는 작업이 있는 날입니다. 그러나 수만명의 노동자 들은 외출복으로 차려입고 아내와 자녀의 손을 잡고서 웃으며, 재잘거리며, 농 담을 주고받으며 떼지어 거리로 모여들고 있었습니다. 거리는 온통 축제로 들떠 있는 것같았습니다. 기성복으로 단장한 노동자들의 모습은 약간 촌스러워 보였 지만 기쁨에 넘쳐 있었습니다. "우리 집에선 모조리 다 나왔어, 고양이까지 말이야."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 러나 길 건너편과 가까운 건물의 옥상에는 무서운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습니다. 노동자들이 행진하게 될 길 건너편에서는 무장경찰들이 전투태세를 갖추고 늘어서서 여차하면 공격해 들어올 자세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주요 건물의 옥상에서는 경찰.폭력배.민병대 등이 소총을 비롯한 각종 전투장비 를 갖추고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주(州) 방위군 본부에서는 천 삼백명의 주 방위군이 기관총을 앞세우고 출동준비를 갖추고 있었으며 여차하면 즉각 시내로 들어 올 참이었습니다. 시가행진이 시작되었습니다. 수 천명씩 떼를 지어 출발하고 있었습니다. 제가끔 숨가쁘게 고동치는 가습을 안고 벅찬 연대감을 느끼며 어린아이들은 의기양양하 여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자기 뒤를 잇고 있는 웅장한 행렬을 자꾸만 돌아보았 습니다. 그것은 단결된 노동자의 힘이 어떤 것인지를 웅변하고도 남음이 있었습니 다. 아무런 유혈사태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일대 결전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되었 던 것과는 딴판으로 평화가 깃들었다는 것이 어쩌면 거짓말과도 같이 느껴졌습 니다. 5월2일 다음날은 일요일이었습니다. 그렇게도 노리고 있었는데 헛탕을 쳐버린 5월 1일 의 일에 화가 치민 경찰은 드디어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30명의 무뢰한을 맥커믹 농기계 공장에 들여보내서 공장을 폐쇄하고 농성을 하고 있던 노동자들을 몽둥이 로 까부수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숫적으로 우세하였으며 무뢰한들은 쫓겨 나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바로 이때 갑자기 경찰이 나타나더니 농성중인 노동자를 향해 권총을 쏘기 시작했습니다. 노동자들은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경찰은 쫓 겨가는 노동자들의 등을 향해 쏘아댔으며 노동자들은 쫓겨가며 총을 맞고 쓰러 져 갔습니다. 살해된 사람은 여섯명이었으며 그 속에는 어린 소년도 있었습니다. 5월3일 5월3일 밤 맥커믹의 공장 노동자들의 살해에 항의하는 대중집회가 시카고의 헤 이마키트 광장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약 30만명의 노동자가 모인 이 집회는 질서 있게 진행되었는데 집회 도중에 비가 내렸기 때문에 청중들은 많이 돌아갔습니다. 집회가 끝날무렵 180명의 기동경찰을 이끌고 경찰서장이 나타났습니다. 경찰서 장은 즉각 해산을 요구하였고 노동자들은 평화적인 집회라고 맞섰습니다. 이때 누군가에 의해 던져진 폭탄이 터졌으며 어둠속에서 청중들은 어쩔줄을 몰라 갈 팔질팡 하였고 경찰은 난폭하게 마구 총을 갈겼습니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 습니다. 이 소동에서 노동자 200여명이 죽거나 다쳤으며 경찰 한명이 즉사하였습 니다. 이것이 바로 미국노동운동사에 그리고 세계 노동운동사에 뚜렷이 자취를 남긴 미국 기업주와 경찰의 합작 조작극인 저 악명높은 [헤이마키트 사건]입니다. 누가 이 들불을 끌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일은 이것이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노동자의 단결된 힘이 나아가는 큰 길의 골목골목에서 기다리며 도사리고 있던 기업주와 경찰의 음모와 폭력이 또 한번 발작을 했던 것일 뿐입니다. 점차 강력해지는 미국 노동자들의 단결력에 겁먹은 기업주들은 경찰과 머리를 맞대고 그 불길을 꺼버릴 음모를 꾸몄으며 그들이 던진 폭탄이 터지는 소리는 바 로 '탄압개시!'의 신호탄이었습니다. 노동운동 지도자 8명이 사건의 주모자로 체포되었습니다. 선량한 시민이 억울 한 누명을 쓰고 진범에게 체포된 것입니다. 이어서 각지에서 노동운동 지도자들 이 폭동죄 또는 음모죄로 체포, 기소되었습니다. 곳곳에서 검거 선풍이 일었으 며 한 노동신문의 편집인은 '노동자들은 공포정치에 떨고 있다. 독점자본의 앞 잡이인 부패한 경찰과 검찰당국이 시민들을 도매금으로 감옥에 처넣고 있다'고 절규했습니다. 8시간 노동제 실시를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함성에 총알과 폭탄으로 응답한 그들은 [헤이마키트 사건]의 주모자로 체포한 8명에 대해 재판이라는 절차를 거 쳐 7명에게 사형을 그리고 나머지 1명에게는 15년 징역형을 선고 했습니다. 사형 선고를 받은 7명 중 2명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고 1명은 사형집행 전날 자살했으 며 남은 4명은 사형되었습니다. 그들은 죽고 미국의 노동운동은 끝나버린 것일까요? 사형선고를 받은 노동운동 지도자 중 한명은 법정의 최후진술에서 재판관을 향해 이렇게 항변했습니다. "만약 그대가 우리를 처형함으로써 노동운동을 쓸어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한다 면, 그렇다면 우리의 목을 가져가라! 가난과 불행과 힘겨운 노동으로 짓밟히고 있 는 수백만 노동자의 운동을 없애겠단 말인가! 그렇다, 당신은 하나의 불꽃을 짓 밟아 버릴 수 있다. 그러나 당신 앞에서,뒤에서, 사면팔방에서 끊일 줄 모르는 불 꽃은 들불처럼 타오르고 있다. 그렇다, 그것은 들불이다. 당신이라도 이 들불을 끌 수 없으리라." 메이데이의 탄생과 의미(석탑 노동문고 '노동자와 노동절'/1985) 우리는 미국 노동자들의 상태와 노동운동 그리고 1886년 5월 1일의 8시간 노동 제 요구 총파업의 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그러한 미국노동자들의 투쟁을 길이 기념하고 8시간 노동제 확립을위한 계속적인 싸움을 벌여나가기 위해 전 세계 노동자의 공통죈 명절로서 메이데이가 탄생하게 되는 과정과 세계 각국의 메이데이 투쟁을 살펴보며 그 후 메이데이가 갖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 겠습니다. 1. 메이데이의 탄생 세계 노동자의 날로 1889년 7월 프랑스 혁명 100주년 기념일에 세계 20개국에서 391명의 노동조합 대표가 빠리에 모여 국제적인 노동운동 기구인 국제 노동자대회(제2인터내셔날) 창립대회를 열었습니다. 이 대회에서는 노동보호,동맹파업의 자유, 결사의 자유, 전쟁과 평화에 관한 문제 등과 함께 8시간 노동제의 획득이 결의 되었으며, 8시 간 노동제의 쟁취를 위한 미국 노동자들의 위대한 투쟁을 전세계에 확산시키고 전 세계 노동자의 단결을 과시하기 위해 5월 1일을 국제적인 노동자의 명절로 할 것을 결정하였습니다. 당시에 나온 선언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8시간 노동의 노동력을 보다 새롭게 하는 활기를 주고 인류의 퇴화를 방지하고 대다수 노동자로 하여금 인간다운 지적, 도덕적 생활로 이끄는 수단이 된다는 것은 오늘날 점점 명백해졌다. 우리는 노동자가 이 절박한 시위 운동에 참가하 여 이 희망을 실현시키려는 우리의 의사를 더욱 강고하게 할 것을 주장한다. 5월 1일은 휴업하자! 5월 1일은 시위운동을 하자! 노동절을 축복하자! 즉 1890년 부터 매년 5월 1일은 전세계 노동자가 일제히 단결하는 날이며, 또한 8시간 노동제와 노동자보호 규정을 획득해야 할 투쟁의 날로서 시위운동과 집회 의 방법에 의해 동맹하업을 결행하자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후 1891년 국제 노동자 대회 대표들은 벨기에의 수도 브랏셀에 모여 메이데 이의 기념의 의의와 성격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2년 뒤인 1893년에는 스 위스의 츄리히에서 대회를 갖고 8시간 놀오제 확립을 위한 국제적인 대 시위운 동을 실행할 것, 그리고 이를 영원히 실행할 것을 촉구했으며 굳은 신념을 갖고 실천하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실천방법으로서 이 날에 동맹파업할 것과 시위운 동 할 것을 다짐했습니다. 5월 그날이 다시오면 1889년 국제 노동자대회의 결정에 따라 다음해인 1890년 5월 1일 부터 독일, 영국, 오스트리아, 헝가리, 불가리아, 이탈리아, 스페인, 벨기에, 스위스 그리고 미 국의 크고 작은 공업도시에서는 전 세계 노동자의 단결과 투쟁의 결의를 시위하 는 노동절로서 메이데이 행사가 성대하게 펼쳐졌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행사가 평화롭게 진행되진 않았습니다. 메이데이의 유래가 된 미국에서 그러했듯이 각국 노동자들의 8시간 노동제 확립을 위한 시위운동은 지 배권력의 박해 아래서 수많은 희생을 치르며 성스럽게 거행된 것입니다. 근래 자유노조 운동과 그 지도자 바웬사로 유명한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 서는 1890년 메이데이에 80만명의 노동자가 동맹파업하여 다수의 희생자를 내었 으며 프랑스의 1891년 메이데이에는 모든 노동운동 그룹이 노동절의 시위에 가 담하였습니다. 이때 프랑스 정부는 군대를 동원하였고 군대와의 충돌에서 10명이 피살되었습니다. 또한 노동운동 지도자는 시위를 주동한 혐의로 기소되어 징역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아르헨티나의 노동자 총동맹은 1902년 메이데이 시위운동을 거행하면서 5월 1 일을 공휴일로 지정할 것을 요구했으며 멕시코 노동자들은 1913년 메이데이 기념식에서 일요일을 휴일로 할 것과 하루 8시간 노동을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이에대해 멕시코 정부는 강력한 탄압으로 응답하였으며 노동운동단체는 폐쇄되 고 수 많은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투옥되었습니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지 세번째 해인 1916년 독일 노동자들은 성대한 메이데이 시위운동을 거행하며 제국주의적 전쟁에 반하했고 지도자는 체포되었습니다. 이웃나라 일본의 메이데이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1905년 경부터 소수의 사람들이 분산적으로 메이데이를 기념하여 왔지만 본격적인 메이데이 행사는 1920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920년 5월 1일 동경에서는 15개 노동단체에서 1만명이 참가하여 제1회, 메이데이 행사를 가졌으며 다음해 부터는 전국 각지에서 성대한 기념행사가 펼쳐졌습니다. 이때 일본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제의 즉시 실현, 최저임금제도의 확립, 실업의 방지, 병역제도의 혁신 등의 요구를 결의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내의 군국주의 파쇼세력(파쇼란 말은 폭력적인 독재정치를 뜻합니다)이 권력을 장악하고 전쟁준 비를 서두르며 식민지를 점차 넓혀감에 따라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도 극도로 심 해져서 1935년의 제 16회 메이데이 행사를 마지막으로 그 다음해부터는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파쇼세력이 패망할때까지 일본의 노동운동은 암흑기에 들어갔습 니다. 일본의 노동자들은 '작업복 대신 군복을 입고 망치대신 총을 들고'미쳐 날뛰 는 군국주의 파쇼세력의 이익을 위해 혹은 싱가폴에서 혹은 만주에서 의미없는 죽음을 맞이해야 했으며 나머지 노동자들도 혹은 탄광에서 혹은 공장에서 군수 물자의 생산에 동원되어 배고픔과 장시간노동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군국주의 파쇼세력이 패망하자 노동운동은 다시 전개 되었으며 1945년부터는 메이데이행사도 부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진 않았습니다. 1952년 메이데이행사에서는 무장경 찰이 가스총과 권총을 발사하는 등 대대적인 탄압을 하여 사망자 2명, 중상자 5 백 명을 포함하여 천 수백 명이 다쳤습니다. 그리고 천 3백명이 체포되었으며 260 명이 재판받았습니다. 이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일본 노동자들은 해마다 메이데 이행사를 성대하게 거행하여오고 있으며 지난 1984년 제 55회 메이데이에서는 전국 406개 지역에서 모두 390만 명이 모여 행사를 가졌습니다. 그 후의 미국 5월 1일을 국제적인 노동절로 탄생시킨 미국은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요? 1886년 5월 1일 공업도시 시카고에서 파업에 참가한 노동자의 수는 모두 20만명 이었으며 그 가운데 5만은 8시간 노동제를 쟁취해냈습니다. 거기다가 파업에 참 가하지 않고 요구를 쟁취한 노동자가 15만 명, 모두 합하여 20만명의 노동자가 이날에 8시간 노동제를 획득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어떻든간에 커다란 성과였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기업주가 그저 양보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겨우 한달후인 같은 해 6월 이미 20만 가운데 3분의 1이 8시간제를 상실했고, 그 수는 이후에 점차 증가했습니 다. 5월 1일의 총파업으로 쟁취한 8시간 노동제는 악명 높은 조작극 '헤이마키트 사건'을 구실로 삼은 기업주들의 반격에 의해서 대다수가 빼앗겨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 노동자들은 다시 일어섰습니다. 1888년부터 1890년에 걸쳐 각각의 직종, 각각의 지역에서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는 투쟁이 다시 시작되었으며 미 국총동맹은 1889년 7월 4일, 9월 2일, 1890년 2월22일, 5월1일 등 4회에 걸쳐 전 국 각 도시에서 8시간 노동제 요구를 중심으로 한 대중집회를 갖기로 결의하였 습니다. 그 마지막 회에 해당하는 1890년 메이데이 총파업은 전국에서 수십만 노 동자가 참가하여, 결국 기업주들을 굴복시켰습니다. 이리하여 8시간 노동제는 대부분 획득된 것처럼 보였지만 기회만 있으면 기업주들은 다시 노동시간의 연장 을 강요해왔습니다. 따라서 투쟁은 몇 번이고 계속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2. 메이데이의 의미 이제까지 우리의 8시간 노동제 확립을 위한 미국 노동자의 투쟁과 이를 기념하 여 국제 노동단체에서 메이데이를 제정한 사실 그리고 각국의 메이데이 행사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평소 우리에게 생소한 메이데이에 대 해 다 알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참으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메이데 이가 언제 어떻게 생겨났느냐 하는 사실보다 그렇게 생겨난 메이데이가 갖는 진한 의미가 무엇인가, 메이데이의 탄 생과 그 후 걸어온 길을 통해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하는 점 입니다. 메이데이란 메이데이란 1886년 5월 1일에 있었던 미국 노동자들의 총파업을 후세에 길이 기념하는 날입니까? 메이데이는 세계 각국에서 8시간 노동제 확립을 요구하며 시위하는 날입니까? 예, 맞습니다. 하지만 메이데이의 참뜻이 거기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1521년 5월 1일 이탈리아의 루카시(市)의 견사노동자(누에고치 에서 실을 뽑아내는 노동자)들이 새로운 근로조건을 요구하면서 시위운동을 행한 것이 메이데이의 기원이라고 말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노동절의 기원은 호주에 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즉 1856년 4월초에 호주의 노동자들이 8시간 노동제의 확립을 요구하면서 8시간 연맹을 결성하고 그 해 4월 21일부터는 하루 8시간 이상 일을 하지 않겠다고 결의했는데 이때 호주 노동자들이 힘이 강했기 때문에, 별 무 리없이 승리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성과를 기념하여 매년 4월 22일은 휴일 로서 지냈는데, 이것이 노동절의 시초이며 이러한 사실이 미국 노동자들에게 영 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메이데이의 참뜻은 변하지 않습니다. 메이데이가 없는 미국의 노동절이 언제인지 아십니까? 아마 미국의 노동절이 5월 1일이 아니고 9월의 첫째 월요일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모두들 고개를 갸우뚱 거릴 것입니다. 미국에선 1882년에 이미 노동절 제정의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저 유명한 1886 년의 총파업이 노동절을 제정하기 위해 일어난 것이 아닌 것처럼 미국에서의 노 동절 제정 움직임은 노동자의 근로조건 개선 운동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습니다. 미국 정부는 노동절을 제정해달라, 그리고 이 날을 국가 공휴일로 해 달라는 요 구를 쉽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리하여 1887년부터 이미 몇개 주에서는 6월 첫째 토 요일을 노동절로 정했습니다. 1893년에 날짜가 9월 첫째 월요일로 바뀌었으며 다 음 해인 1894년 미국 국회에서는 이 날을 국가 공휴일로 정했습니다. 이리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노동절(레이버데이)은 9월 첫째 월요일이 된 것입니 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것은 다른 나라의 노동절인 메이데이와 미국의 노동절이 날짜만 다른 것이 아니라 그 의미도 상당히 다르다는 사실입니 다. 미국의 노동절은 요즘 우리나라의 '근로자의 날'과 비슷합니다. 노동자의 수고 를 치하하면서 그냥 하루 쉬는 날일 뿐입니다. 그러면 1886년 5월 1일에 있었던 미국 노동자들의 8시간 요구투쟁을 기념하는 날이 언제일까요? 기이하게도 미국 노동자들은 메이데이를 기념하지 않습니다. 물 론 여기엔 몇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미국 자본가의 막강한 힘이 미국 노동 운동의 숨을 거의 죽여놓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해외시장에서 벌어오는 막대한 이익으로 말미암아 비록 빈부의 격차 는 크지만 미국의 노동자들은 다른 나라 노동자들보다 상대적으로 나은 생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즉, 세계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미국 자본가들의 힘은 한 편으로는 격렬한 노동운동을 누르고 또 한편으로는 엄청난 이익의 일부를 노동 자들에게 나누어 준 것입니다. 노동자들이 열심히 싸워서 따낸 것이 아니라, 그냥 주는 것을 고맙게 받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다가 소위 노동운동 지도자라는 사람들도 이런 현실에 큰 불만을 갖 고 있지 않으며, 노동조합을 무슨 이권 단체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지도자들도 많 습니다. 미국의 어떤 노동조합 지도자가 마피아(미국의 폭력, 범죄 조직)와 관련이 있다느니, 기업주 측에 매수되었느니 하는 신문기사를 간혹 볼 수 있는 것도 다 이 때문인 것입니다. 메이데이의 유래가 자기 나라에서 비롯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이를 잊 으려 하고 있으며, 백년 전 미국 노동자들의 피맺힌 절규도 '과거의 불미스러웠던 사고' 정도로 여기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기업들을 갖고 있는 곳 도 미국이지만 노동운동이 상당히 낙후된 곳도 미국이게 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1886년의 저 위대한 투쟁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미국 노동자들이 메이데이를 기념하지 않는다고 해서 메이데이 참뜻이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메이데이의 참뜻 우리는 앞에서 1886년 미국 노동자들의 8시간 노동제 확립을 위한 총파업과 1889년 국제 노동자대회(제2인터내셔날)에서 알고 넘어가야 할것은 8시간 노동제 확립 요구는 미국뿐 아니라 많은 나라에서 오래 전부터 외쳐왔던 것이며 국제적 인 모임에서 결의한 것도 1889년이 처음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1886년의 국제 노동자대회(제1인터내셔날) 창립총회에서도 8시간 노동제의 획득을 국제적인 노동 운동의 공동목표로 결정했는데 당시 독일대표는 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 습니다. "우리는 노동시간의 제한이야말로 노동자 생활의 개선과 해방을 위한 최우선 적인 조건이라 생각한다. 그것은 노동자 대중 즉, 전체 국민의 다수를 이루는 사 람들의 체력과 건강을 회복시키기 위해 필요하다. 그것은 지적 발달과 사교적 교제 와 사회적, 정치적 활동의 가능성을 노동자에게 돌려주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우리 는 하루노동시간을 8시간으로 할 것을 제안한다. 이 제안은 미국 노동자들이 이미 널리 요구하고 있는 것이며, 대회에서 채택된다면 세계 노동자의 공통의 기치가 될 것이다." 이 대회가 열렸을 땐 이미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프랑스, 독일 등지의 노동자 들이 8시간 노동제의 확립을 위한 힘든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영국 노동 자들은 20년에 걸친 투쟁 끝에 1848년 드디어 하루 10시간 노동제를 획득했으며, 다시 8시간 노동제의 확립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8시간 노동제는 앞서 얘기한 독일대표의 말대로 세계 노동자의 공 통의 기치가 되었으며 수십 년의 투쟁을 거쳐 제1차 세계대전이후부터는 미국과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에 와서는 미국, 소련, 캐나 다, 프랑스, 호주의 노동자들은 일주일에 40시간 이하의 노동을 하며 영국, 서독, 이탈리아, 네덜란드, 덴마크등지의 노동자들은 주 45시간 이하 노동을 하고 있습 니다. 그런데 노동시간이 이만큼 단축되었다고 해서 메이데이의 의미도 점점 작아질 까요? 그렇치 않습니다. 돈을 받고 노동력을 파는 제도다 존재하는 한, 노동자의 근로조건과 생활상태의 개선을 위한 투쟁은 없어질 수 없으며, 노동자대중의 이익 을 위협하는 일체의 것에 대해 노동운동은 날카롭게 저항합니다. 이 지구 상에서 노동자의 노동이 멈춰지는 순간이 없듯이 노동운동의 맥박도 쉬지 않고 뛰어야 합니다. 365일 계속되는 노동운동을 대표하는 하루, 이것이 바로 메이데이인것입니다. 고난에 찬 노동운동의 역사를 돌이켜보며, 선배노동자들의 위대한 희생을 추모 하는 날, 노동자의 근로조건과 생활상태의 개선을 위한 대열에 앞장 설 것을 굳 게 다짐하고 그 확고한 신념을 표명하는날, 노동운동에 대한 일체의 탄압, 그 음모와 폭력의 장본인들에게 정기적으로 경고하는 날, 전 세계 노동자는 같은 처 지에 있는 한 형제이며 굳게 단결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는 날, 그리고 그 단결을 과시하는 날, 이것이 바로 메이데이의 참뜻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