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구르미 (구르미) 날 짜 (Date): 2004년 5월 22일 토요일 오전 05시 31분 27초 제 목(Title): Re: [펌/한겨레] 김구 노무현을 비롯한 열린우리당의 우파세력이 김구의 사상적 승계자임을 여러곳에서 언명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김구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상당한 현재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듯 합니다. 해방전후의 역사와 분단이 고착되어가는 과정을 돌아보면 항상 분단의 원인을 캐물으면서 대외적인 조건(냉전의 시작)과 대내적인 조건(좌우합작의 실패)에 대한 엄격한 검토가 불가피하게 되는데, 그간 대부분의 논의들의 전자를 강조했던 바가 없지 않았나 합니다. 충분한 자료가 없어서 그러는데 혹시 관련논문을 갖고 계신분들, 또는 나름대로 의견을 갖고 계신분들의 입장개진 바랍니다. 사실상 여러 관점들이 실제 사료에 뒷받침되지 않으면 그냥 그럴듯한 주장이 되어버리지 않을까 크게 염려되기도 합니다. 1. 일제지배하에서 신간회 운동의 실패를 겪은 이후 해방직후에도 좌우합작에 대한 부정적인 기억을 극복하지 못해냈지 않았나? 임시정부가 돌아온 후 중도좌파계열의 인공을 무시한 것은 어떠한 맥락이었으며 그것이 김구의 좌파에 대한 태도의 한계성에 기인한바가 있지 않은가? 2.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은 자력으로 독립을 이루어내지 못한 한반도에게는 어쩔수 없이 받아들일수 없는 엄연한 국제적 현실이었다는게 구르미의 생각인데. 당시 그에 대한 (국제정세에 무지했던) 한반도 민중의 반응은 당연히 반탁이었을 것이고 이해할만한 것이었지 않을까. 당시 남로당의 경우 코민테른의 지도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의 측면이 있었다는 비판(당시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비판이기도 함)이 가능함. 한반도 민중 뿐만 아니라 주요한 정치세력들의 지도자들 역시 국제정세의 흐름을 정확히 읽어내지 못한 상태에서 지지기반들의 계급적 요구에 따르는 데 급급해 국내 정치가 더 꼬이게 된것은 아니었는지. 3. 임정세력이 귀국후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자리잡지 못하고 거의 무시되어 버린 것, 보다 정확히는 김구가 찬밥취급 받은 것은 그의 민족주의적 철학이 인정받을 만 했는가와 별도로 하나의 정치적, 이념적 경향으로까지 나아가지 못했던 것이 아닌지. 당시 김구의 정치적 주장과 그의 정치적 영향력의 무게에 대한 과도한 것이라면 (노무현의 김구에 대한 평가가 비슷할 듯) 그의 삶으로 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은? 4. 위의 질문들은 당금현실에 적용 시켜 본다면? ---------- 쩝.. 글쓰고 나니 문제의식이 전혀 명료하지 않다는 생각이... ㅠ.ㅠ 해방전후사에 대한 연구들을 전혀 제대로 흡수하지 못한 상태라는 자괴감이 드는군요. 윤봉길과 안중근의 테러에 관해서라면 민족의 의기를 높이는 사건이었다는 그냥 그런 평가이상은 해주기 힘들듯. 테러리즘의 레닌주의적 해석이 그러하지만 테러란 운동의 고립되고 분산된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나타나는 현상이고 운동이 조직화될수록 운동의 발전을 가로막게 되죠. 한때 테러단체로 불리웠던 PLO, IRA, ANC가 대중의 지지를 받는 정치적 조직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봐도 그러합니다.. 그런점에서 임시정부에 대한 평가도 다소 가혹할 수밖에 없을듯. 북한이 안중근과 임시정부를 평가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 보면 되죠. (김일성은 무장세력을 조직할 때 마을마다 청년 둘중 한명은 꼭 남겨두었다고 합니다.) 요즘의 팔레스타인의 자살공격이 슈퍼파워 미국과 이스라엘의 존재라는 특수성(?)으로 정당화되기도 하는데,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무장저항의 필요성은 분명히 있다고 봅니다. 이러한 투쟁방식에 대해서는 팔레스타인 민중이 결정할 문제이긴 하지만 분명히 운동의 발전과정에서 한 단계에 불과하며 더 전진하려면 현재의 방식을 벗어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러한 테러리즘의 문제점과는 별개로 현재 미국의 군사,정치,외교적 에너지를 중동에 집중하도록 만들고 있는 중동(이라크,팔레스타인) 인민들의 격렬한 투쟁덕에 한반도에서 약간 숨돌릴 여유를 갖고 있다는 점도 잊혀서는 안되겠죠. 요즘 파병과 관련한 우파(노무현정권)의 움직임은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