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2년 4월 28일 일요일 오후 05시 07분 10초 제 목(Title): 조철수/ 용감한 자들 출처: 이머지 2001.10.1 -------------------------------------------------------------------------------- 연재 / 우리 고대문화의 원형을 찾아서-마지막회 -------------------------------------------------------------------------------- 용감한 자들 조철수 민족 문화의 원형을 찾는 작업 가운데 하나는 그 민족의 보편적인 성격을 그들의 문학작품에서 찾아보는 것이다. 어느 민족이나 그 민족의 독특한 성격이 있다고 말한다. 이 민족성은 민족마다 다르게 표현된다. 민족성이 획일적이라는 말은 결코 아니며 넓은 범주에서 공통분모를 찾아 보편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이다. 개인의 성격도 사람마다 다르지만 대략 몇 가지로 나누어 분류하면 몇 범주에서 설명될 수 있는 것과 같이 민족성도 그렇게 분류하여 알아볼 수 있다. 그렇다고 민족성에 따라 주어진 상황에서 모두가 비슷하게 행동한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개인의 특성은 존재하며 그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요소이다. 그러나 한 문화권에서 생성된 민족의 지향성은 문화적 습성에 의해 형성된 민족성에 따라 크게 구분되어 설명될 수 있다. 이러한 범주는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 유식한 사람과 무식한 사람 등의 계층 구분과 관계없이 모두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이는 성격이다. 민족의 보편성을 찾는 작업 가운데 하나는 그 민족에게 보편적으로 많이 읽히는 문학작품을 분석하는 것이다. 민족성을 띠는 민족적인 문학작품이란 그 나라 사람들이 어려서부터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를 말한다. 민족이 애호하는 문학 작품들을 통하여 그 민족 문화의 보편성(혹은 원형)을 찾아볼 수 있다. 문학은 문화를 대변하기 때문이다. 작가가 창작하거나 편집자가 편집한 문학 작품도 여기에 포함되겠지만,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구비문학도 민족의 정서와 성격을 보여준다. 특히 주인공인 인물이 등장하고 전후관계가 엮어지는 이야기에서 민족성을 발견할 수 있다. 영웅이나 神을 찬양하는 찬미가에서는 민족의 특성을 변별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여러 인물이 설정되고 사건이 전개되며 인물 사이에 갈등이 빚어지는 신화·설화·소설에서는 그러한 분석이 가능하다. 이야기에 主役의 성격이 형성되며 청중은 주된 인물과 동일화하려는 경향이 생긴다. 작품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상관관계를 분석하여 각 이야기의 공통되는 점을 이해해 보는 것이다. 이러한 여러 이야기가 일정한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으면 그것이 그 민족문화의 보편성이며 원형을 이루는 성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는 이야기가 오랜 세대를 거쳐오며 대다수 사람들에게 즐겨 읽혀지고 민족의 문학작품으로 자리를 잡았다면, 그 작품을 통하여 고대문화의 원형을 찾을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대표적인 문학작품으로 손꼽을 수 있는 것은 심청전, 춘향전, 홍길동전 등으로 한국민족의 생활에 깊이 들어온 고전문학작품이다. 홍길동전은 조선 선조·광해군 시대에 활동했던 허균이 지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양반의 아들과 기생의 딸 사이의 사랑 이야기인 춘향전도 조선 중기 이후 사회를 반영하는 작품이다. 심청전이나 춘향전은 판소리에서 만들어진 작품이다. 판소리는 18세기 초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판소리 辭說은 옛날부터 구전으로 전해진 여러 설화들을 어느 주제로 엮어놓은 문학체계이다. 따라서 판소리에 전해진 이야기 요소는 매우 오래된 전승이며, 보다 중요한 것은 민중이 함께 호흡한 민족의 이야기라는 점이다. 따라서 고대 한국의 신화에 나오는 神話素를 이러한 고전 문학 작품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서자로 태어나 정실부인의 아들들에게 천대를 받고 가출하여 후에 나라를 건설하는 홍길동은 주몽 신화와 흡사하며, 심청 이야기는 巫敎 신화 바리공주와 비슷하게 전개된다. 한국인이면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는 이러한 이야기들의 각 인물들이 지니고 있는 성격의 유형이 무엇인가를 찾고 그 공통된 분모를 엮어보면 고대 한국 문화의 보편성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고대 한국 신화에 나오는 인물들과도 비교하여 보면 문화의 연속성과 보편성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네 가지 유형의 사람들 인간의 사고 체계에서 가장 기본적인 분류는 선과 악을 구별하는 것이다.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나누는 방법이다. 그러나 개인의 성격을 이렇게 둘로 나누는 것은 너무 협소하다. 여기에서 발전된 방법이 인간의 성격을 넷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이러한 리트머스litmus를 가지고 각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색깔을 보다 또렷하게 보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넷으로 구분하여 설명하는 방법을 명쾌하게 정리한 단락을 초기 유대교의 성문법으로 알려진 미쉬나Mishnah에서 읽을 수 있다. 미쉬나의 〈선조들의 어록〉에 전해진 단락이다. 유대교가 지향하는 하느님의 法道는 사람들이 토라(율법)에 제시된 종교규범을 따르고 일상생활의 시민질서를 지키는 것이다. 이러한 법규들이 총체적으로 편집된 책이 미쉬나다. 〈선조들의 어록〉은 미쉬나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으로 알려졌다. 유대인이 사는 곳이라면 항상 미쉬나를 설명하는 랍비(유대교 선생)가 있고 〈선조들의 어록〉은 누구나 알고 있는 책이다. (여기에서 특별히 유대교의 대표적인 문헌의 한 부분을 인용하는 의도는 사람의 성격을 아래와 같이 넷으로 설득력 있게 설명하기 때문이다. 또다른 이유는 유대교가 전파되는 곳에는 어디에서나 랍비들이나 유대교 현자들의 입을 통해 인간의 네 유형에 관한 강론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유럽뿐 아니라 동쪽으로 이란, 인도, 중앙아시아, 중국 등에 거류지를 이루며 오랫동안 살아왔다. 아랍지역과 중국 등에서 유대인들과의 교류를 통하여 성서와 성서해석에 대한 이해가 이른 시기에 전해졌으며 중세 아랍학자들도 유대교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선조들의 어록〉에 인간의 성격, 기질 등을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5,10∼15). 사람에게는 네 가지 유형이 있다. “내 것은 내 것이고 네 것은 네 것이다”라고 말하는 자. 이는 보통 유형이다. “내 것은 네 것이고 네 것은 내 것이다”라고 말하는 자. 이는 몰상식한 자이다. “네 것은 네 것이고 내 것은 네 것이다”라고 말하는 자. 이는 자비로운 자이다. “내 것은 내 것이고 네 것은 내 것이다”라고 말하는 자. 이는 사악한 자이다. 여기에서 ‘몰상식한 자’는 히브리어로 ‘땅의 백성’(암-하아레쯔)이라는 단어의 의역이며, 이러한 사람은 율법(토라, 법규)에 대한 지식이 없는 무식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초기 랍비 유대교에서는 ‘암-하아레쯔’라는 단어를 내 것과 남의 것을 구별하지 않고 공동소유의 생활을 하는 공동체에 빗대어 말하는 의도가 있다. 랍비 유대교에서는 사유 재산을 공동체에 헌납하고 집단 거류지에서 공동생활을 했던 엣세네파 사람들이 흔히 이렇게 행동했다고 여겼다. (엣세네파에 관하여 본지 6월호와 8월호 참조.) 자신의 재산이 적었던 사람도 공동체의 재산이 모두 자기 재산인 것처럼 자부심을 가지고 사는 공동체 일원을 가리켜 비유했던 말이다. 또다른 예를 들어, 사람의 기질에는 네 가지 유형이 있다고 말한다. 쉽게 성내고 쉽게 풀어지는 자 어렵게 성내고 어렵게 풀어지는 자 어렵게 성내고 쉽게 풀어지는 자 쉽게 성내고 어렵게 풀어지는 자 이들 가운데 네 번째가 사악한 사람이며, 이러한 기질의 소유자는 내 것은 내 것이고 네 것도 내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이다. 그러나 내 것은 내 것이고 네 것은 네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기질에 있어서 첫 번째에 해당된다. 모든 사람이 이러한 네 가지 유형으로 구분되어 각자 각 유형에 전적으로 속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누구나 네 가지 모두를 어느 정도 가지고 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의 성격이나 기질을 이렇게 네 가지로 나누어 어느 부류에 더 많이 해당되는지를 보는 것은 기본적으로 타당성이 있는 방법이다. 초기 유대교에서 발전된 기본교육 방침은 우선 사람들이 법을 지키고 선과 악을 구별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사회가 바르게 유지되는 길은 내 것과 네 것을 구별하는 정신에서 찾아진다. 재판관의 특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스라엘 역사에 나타나는 하느님은 재판관의 특질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성서에 전해진 이야기에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쉽게 성내고 쉽게 풀어지는 경우가 흔하다. 한편, 헌금을 내는 사람에게도 이러한 네 가지 유형이 있다고 말한다. 자기는 주고 남들이 주기를 원하지 않는 자 남들이 주고 자기는 주기를 원하지 않는 자 자기도 주고 남들도 주기를 원하는 자는 자비로운 자이다. 자기도 주지 않고 남들도 주기를 원하지 않는 자는 사악한 자이다. 헌금을 성전에 내는 의도는 성전에서 축복을 받기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자기가 성전에 헌금을 내면 그만큼 자기는 성전에서 복을 받는 것이다. 그래서 자비로운 사람은 누구나 모두 함께 축복을 받자고 행동하는 사람이다. 그 반대야 물론 본인도 내지 않고(축복을 받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고) 또한 남들도 축복 받는 것을 싫어하는 태도이다. 보통 사람은 자기는 헌금을 내고 축복을 받기를 원하지만 남들은 내지 않아 축복을 받지 않기를 (적어도 속으로) 원하는 사람이다. 남들은 헌금을 내고 자기는 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본인은 이미 헌금을 내지 않아도 축복을 받을 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종류의 사람을 헷갈리고 몰상식한 자라고 말한다. 엣세네파 선생들은 이미 하느님에게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다. 그러므로 다른 유대인들이 성전에 헌금해도 되지만 자기들은 성전에 헌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고 확신했다. 랍비들의 입장에서 엣세네파와 같은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을 몰상식하다고 말하는 것은 당연하겠다. 선생 밑에서 공부하는 제자들에게도 이러한 네 가지 유형이 적용된다. 제자들에게 네 가지 유형이 있다. 자기도 공부하고 남들도 공부하기를 바라는 자 - 착한(좋은) 눈. 자기는 공부하고 남들은 공부하지 않기를 바라는 자 남들은 공부해도 자기는 공부하지 않기를 바라는 자 자기도 공부하지 않고 남들도 공부하지 않기를 바라는 자 - 악한 눈. ‘착한 눈’은 동정심과 좋은 의도를 갖는 성격을 뜻한다. “착한 눈을 가진 사람은 복 받을 것이다. 그는 빵을 가난한 자에게 준다”(잠언 22:9). 한편 ‘악한 눈’은 탐욕과 질투를 말한다. “악한 눈을 가진 사람은 재산에만 급급하여 궁핍이 그에게 올 줄은 알지 못한다”(잠언 28:22). 자기도 공부하고 남들도 공부하기를 바라는 착한(좋은) 눈을 가진 사람은 헌금을 낼 때 자기도 내고 남들도 내기를 원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자기도 남들도 헌금 내는 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도 공부하지 않고 남들이 공부하는 것을 원하지도 않는다. 랍비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토라 공부는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자기는 공부하고 남들은 공부하지 않기를 바라는 자는 헌금을 낼 때에도 자기는 내지만 남들이 내는 것을 꺼려하는 사람이다. 사람들은 보통 자기가 먼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기는 공부하지 않아도 되고 남들은 공부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헌금을 낼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랍비들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파 공동체는 토라(율법)를 (미쉬나와 같은 랍비들의 방식대로) 공부하지 않고 새로운 복음을 설파한다고 비난했다. 이와 같이 토라에 대해 말한다고 주장하는 예수파 공동체의 견해를 ‘몰상식한’ 헷갈리는 무리로 규정했다. 랍비들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 공동체는 남들은 토라공부를 해도 자기들은 토라공부를 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이다. (신약성서 복음서에서는 랍비들 중심의 유대교파를 바리새파라고 말한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 예수도 그의 제자들을 이러한 네 가지 부류로 나누어 가르쳤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마태 13:1∼23; 마가 4:1∼20; 누가 8:4∼15)에서 읽을 수 있다. 여기에서 예수는 제자들을 이렇게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누었다(마태 13:3∼9). (복음서에 전해진 예수의 비유 가운데 많은 부분이 초기 유대교 문헌에서도 발견된다. 이러한 비유는 어느 특정인의 창작이기보다는 당대 유행하던 이야기로 보편성이 있다고 보아야 타당하다.) 자, 씨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습니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가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쪼아먹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습니다. 흙이 깊지 않아서 (싹이) 곧 돋아나기는 했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습니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렸던 것입니다. 또 다른 것들은 가시덤불에 떨어졌습니다. 가시덤불이 우거지자 그 숨이 막혀버렸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습니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를 맺었습니다. 귀가 있는 사람들은 알아들으십시오. 네 가지 유형은 길가에 뿌려진 사람, 돌밭에 뿌려진 사람, 가시덤불에 뿌려진 사람, 좋은 땅에 뿌려진 사람 등이다. 이 비유에 대한 예수의 해석도 복음서에 전해진다(마태 13:18∼23; 마가 4:13∼20; 누가 8:11∼15). 여기서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예수의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선조들의 어록〉의 네 유형을 비교하면 흥미로운 사실이 발견된다. 착한(좋은) 눈은 좋은 땅에 뿌려진 사람이고 자비로운 사람이다. 즉,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이다”(마태 13:23). 가시덤불에 뿌려진 사람은 아주 사악한 자이다. “이는 말씀을 듣는 사람이지만 현세에 대한 걱정과 재물의 유혹으로 말씀은 숨이 막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마태 13:22). 돌밭에 뿌려진 사람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뻐하며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 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한때뿐입니다. 그리하여 말씀 때문에 박해가 일어나면 곧 걸려 넘어집니다”(마태 13:20∼21). 걸려 넘어지는 이유는 그가 계속하여 하느님의 가르침(토라)을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은 토라를 배우고 금방 ‘네 것이 내 것이고 내 것이 네 것이다”라고 말하는 자이다. 헷갈리는 사람을 가리킨다. 공동체에 들어왔다가 어려워지면 곧 나가는 유형을 말한다. 길가에 뿌려진 사람은 자기는 공부하고 남들은 공부하지 않기를 바라는 자이기 때문에 토라공부를 해도 깨닫지 못할 때에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속에 뿌려진 것을 강탈해 간다”(마태 13:19). (마가 복음서에서는 사탄이 와서, 누가 복음서에서는 악마가 와서 그 마음에서 말씀을 빼앗아 간다고 전한다.) 보통 사람에게는 악마/사탄의 유혹이 많기 때문에 토라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며, 말씀/토라/하느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목적은 이처럼 사탄/악마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을 배우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의 성격을 네 가지로 구분하여 여러 예를 들어 설명한다. 아래에 이 방법에 따라 몇 가지 예화를 들면서 적용하여본다. 아담과 하와 에덴동산 이야기에서도 네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하느님, 뱀, 아담, 그리고 하와이다. 에덴동산 이야기에서 하느님은 재판관으로 등장한다. 랍비들의 성서해석에 의하면 뱀은 악한 천사 사마엘을 가리킨다고 설명한다. 하와는 사탄 사마엘의 꾀임에 넘어가 죄를 지었다고 말한다. 사악한 자는 당연히 뱀/사탄 사마엘이다. 〈랍비 엘리에제르의 강론〉 21장에 아래와 같은 해석이 나온다. 뱀 위에 탄 사마엘이 하와에게 와서 그녀는 임신하였으며 이후에 아담이 그녀에게 와서 그녀는 아벨을 가졌다. 이렇게 전한다. “아담은 그의 아내 하와를 알았다”(창세기 4:1). 그가 무엇을 알았느냐? 그녀가 임신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카인)의 모습이 아래의 것들 같지 않고 위의 것들 같다고 보았다. 그녀는 들여다보고 말했다. “나는 야웨에게서 사내를 얻었다”(창세기 4:1). 아람어 번역본인 타르굼의 창세기 4:1의 번역도 이와 비슷하다. 아담은 천사 사마엘에 의해 임신한 그의 아내 하와를 알았다. 그녀는 임신하고 카인을 가졌다. 그는 땅의 것 같지 않고 하늘의 것 같았다. 그녀는 말했다. “나는 주의 천사인 사내를 얻었다.” 위의 해석은 하와가 카인을 낳고 야웨에게서 자식을 얻었다고 말하는 것에 대한 설명이다. 에덴동산 예화에서 자비로운 자는 아담이다. 사탄의 간계로 아담의 아내가 속임을 당하여 임신하였다는 것을 아담은 알았으나, 어찌하겠느냐? 그는 아내를 용서하는 자비로운 인물로 유대교 아가다(전설)는 이야기한다. (고대 한국의 처용 이야기와 유사하다.) 여자가 헷갈린 인물로 설정된다. 그녀는 내 것과 네 것을 구별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하와는 자기가 하느님에게 속한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그녀는 카인을 낳은 후에도 “나는 야웨에게서 사내를 얻었다”라고 말할 수 있다) 하느님의 것을 자기 것처럼 집어다 먹은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교 교부들의 신학에서는 하와의 죄를 원죄로 설명한다. 그러나 유대교 랍비들은 하와가 지식을 얻을 탐스러운 열매를 먹었기 때문에 사람은 토라(하느님의 가르침)를 배울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또한 하와는 ‘생명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받는다. 고대 신화의 맥락에서 이해하면, 그녀는 出産母神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다시 말하면, 祈子信仰의 대상이 되었다는 이해이다. 아브라함과 이삭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시험을 받는 이야기가 창세기 22장에 나온다. 이 이야기에 대한 유대교 성서 해석서에 네 가지 유형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이쉬마엘과 엘리에제르와 그의 아들 이삭을 데려왔으며 그는 나귀에 탔다. 이것이 해질 때 창조된 새끼나귀이다. 이렇게 말한다. “아브라함이 아침 일찍 일어나 그의 나귀를 탔다”(창세기 22:3). (중략) 이삭이 모리야 산에 갈 때 그는 서른 일곱 살이었으며 이쉬마엘은 쉰 살이었다. 엘리에제르와 이쉬마엘 사이에 경쟁이 생겼다. 이쉬마엘이 엘리에제르에게 말했다. “이제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 이삭을 제단 위에 태울 번제물로 바친다. 내가 바로 그의 맏아들이며 내가 아브라함을 상속한다.” 엘리에제르는 이쉬마엘에게 대답하여 말했다. “그는 벌써 남편에게서 쫓겨난 아내처럼 너를 쫓아냈으며 광야로 보냈다. 그러나 나는 낮과 밤으로 그의 집을 보살피는 그의 종이며 내가 바로 아브라함을 상속하는 자이다.” 성령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했다. “이 사람이 상속하지 않으며 그 사람도 상속하지 않는다.” (그들이 모리야 산기슭에 도달하자 이쉬마엘과 엘리에제르를 거기에 남아있게 하고 이삭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간다.) 그는 장작을 들어 이삭의 등에 놓았다. 그는 불과 식칼을 그의 손에 쥐었다. 그들 둘은 함께 걸어갔다. 이삭은 그의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 보십시오, 불과 장작을. 어디에 번제양이 있습니까?” 아브라함은 그에게 말했다. “‘하느님께서 번제양(燔祭羊)을 보여주신다, 내 아들아’(창세기 22:8). 네가 바로 양이다.” (중략) 이삭은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했다. “아버지, 나를 묶어 주십시오. 내 두 손과 내 두 발을 묶어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제가 두려워 입에서 말이 나와 당신을 저주하며 힘으로 ‘너의 아버지를 중히 여겨라’(는 계명)를 어기게 됩니다.” 그는 그의 두 손과 두 발을 묶고 제단에 그를 묶어 놓았다. 그는 불과 장작을 준비하여 그것들 위에 (그를) 올려놓았다. 사람이 제단 위에 놓여진 짐승을 잡을 때 하는 것처럼 그는 그의 발을 그 위에 놓았다. 그는 그의 팔과 무릎에 힘을 주어 손을 뻗쳐 식칼을 쥐었다. 이렇게 말한다. “아브라함은 그의 손을 뻗쳐 식칼을 쥐고 그의 아들을 잡으려고(죽이려고) 했다”(창세기 22:10). (중략) 랍비 즈카리야는 말했다. “해 저물 때 창조된 바로 그 숫양이 이삭 대신에 제물로 바쳐지려고 뛰어 왔다. 사마엘(사악한 천사)은 서서 우리의 선조 아브라함의 속죄예물을 소멸시키려고 그를 빗가게 했다. 그래서 숫양의 두 뿔이 덤불에 걸렸다.” 이렇게 말한다. “아브라함이 그의 눈을 들자 그는 보았다. 보아라, 뒤에 덤불에 뿔이 걸린 숫양을”(창세기 22:13). 여기에서 사악한 무리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물로 올리면 아브라함의 재산을 물려받을 것이라고 서로 싸우는 이쉬마엘과 엘리에제르이다. 이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에 아브라함이 식칼을 들어올리고 이삭을 번제물로 죽이려고 하자 야웨 하느님은 아브라함의 온전한 마음을 확인하고 이삭을 위해 준비된 숫양을 보여준다. 야웨는 심판관으로 등장한다. 내 것은 네 것이고 네 것은 네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비로운 사람은 아브라함이다. 이삭은 자신의 아들이기 때문에 내 것이지만 하느님이 약속해서 준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것이다. 하느님이 달라고 하면 주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라고 행동하는 사람은 자비로운 자이라는 설명이다. 이러한 사람은 자기도 공부하고 남들도 공부하기를 원하는 자이다. 예수의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좋은 땅에 어울리는 사람이다. 랍비들의 어록에 의하면 ‘좋은(착한) 눈’의 소유자이다. 그러나 이삭의 입장에서 보면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면서까지 자신의 믿음을 하느님에게 내세우려는 비정한 아버지이다. 이삭은 네 것과 내 것을 서로 구별하지 못하는 헷갈린 자로 설정된다.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네가 바로 희생양이다”라고 말하자 이삭은 조용히 산꼭대기까지 올라갔다.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겠다는 아버지의 약속을 위해 스스로 희생양이 되겠다는 각오를 보여준다(내 것이 네 것이다). 한편 하느님이 희생양을 보여줄 것이라고 말한 약속을 믿는 것이다(하느님의 번제양은 내 대신이 된다). 자신이 ‘아브라함의 번제물(이삭)’과 ‘하느님의 번제물(숫양)’ 사이를 오가는 헷갈린 상태로 등장한다. 랍비들의 해석에 의하면 이삭은 아버지와 함께 산 위로 올라갈 때 자신이 번제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며, 그래도 하느님이 번제양을 보여준다고 말한 그의 아버지를 믿고 따라갔다는 해석이다. 이렇게 이삭이 헷갈려서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시험을 온전하게 거칠 수 있었으며, 또한 이삭은 묵묵히 제단 위에 손발이 묶인 상태로 번제물이 되어 부모의 말씀을 중히 여겨야 하는 계명을 지킬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이삭의 결박’ 예화에 전개되는 ‘몰상식한’ 이삭에게서 십계명을 배우는 것이다. 에덴동산에 들어간 네 명의 이야기 유명한 랍비 네 명이 ‘숨겨진 지식의 에덴동산(낙원)’에 들어간 이야기는 유대교 신비주의 문헌의 대표적인 이야기이다. 신비주의는 어느 종교에서나 나타나는 현상이다. 명상이나 幻視, 또는 춤, 연금술, 환각제 등을 통하여 신을 아는 신비한 경험을 신비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초기 유대교 신비주의 문헌에 자주 나오는 모티브는 천상의 에덴동산이다. 서기 135년 유대인 반란군의 주도자로서 로마군에 의해 처형당한 랍비 아키바는 살아 생전에 에덴동산에 들어갔다가 온전히 나왔다고 전한다. 한편 다른 세 사람은 모두 도중에 쓰러지거나 길을 달리했다고 전한다. 그 중 한 사람은 동산에 들어가는 문턱에서 그 웅장함에 놀라 기절하여 죽고, 또 한 사람은 하느님의 옥좌 앞까지는 붙들려 올라갔으나 그 현란한 광채에 그만 쓰러졌다고 한다. 다른 이는 옥좌에서 그분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즐거운 마음에 가득 차 에덴동산을 나와서 헷갈리는 사람으로 변했다고 한다. 그러나 랍비 아키바는 사전에 준비를 단단히 하였기 때문에 (즉 토라 공부를 착실히 하였기 때문에) 너무 놀라지 않고 영광의 옥좌를 보았으며 말씀을 듣고 나올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네 명이 에덴동산에 들어갔다. 그들은 벤 아자이와 벤 조마, 엘리샤 벤 아부야 그리고 랍비 아키바이다. 랍비 아키바는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가 (에덴동산의) 깨끗한 대리석에 도착하면, ‘물, 물’이라고 말하지 말라.” 왜냐하면 이렇게 쓰여 있다: ‘거짓말쟁이는 내(하느님) 앞에서 견디지 못한다’(시편 101:7). (그들이 에덴동산에 도착하자,) 한 사람은 보고 (그 자리에서) 죽었다. 또 한 사람은 보고 쓰러졌다. 다른 한 사람은 보고 새싹을 잘랐다. 그리고 한 사람은 온전히 올라가고 온전히 내려왔다. 벤 아자이는 보고 죽었으며 그에 대하여 성서는 이렇게 말한다: “主의 눈에 그분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값진 것이다”(시편 116:15). 벤 조마는 보고 쓰러졌으며 그에 대하여 성서는 이렇게 말한다: “꿀을 찾았느냐? 너에게 충분할 만큼 먹어라. 혹시나 네가 많이 먹고 토할까 걱정이다”(잠언 25:16). 엘리샤 벤 아부야는 보고 새싹을 잘랐으며 그에 대하여 성서는 이렇게 말한다: “네 입으로 네 몸이 죄를 짓게 하지 말라. 천사 앞에서 이것은 실수라고 말하지 말라”(전도서 5:5). 랍비 아키바는 온전히 올라갔고 온전히 내려왔으며 그에 대하여 성서는 이렇게 말한다: “나를 인도하라, 네 뒤를 따라 우리가 달려가겠다. 왕이 나를 그의 방에 데려왔다. 우리는 너에게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니 포도주보다 네 사랑을 더 기억하겠다”(아가서 1:4). 하늘의 에덴동산에 들어가 무아지경의 환상적인 경험을 추구하는 신비주의자들은 탈무드나 성서해석서에 언급되는 서기 2세기의 랍비들이다. 그들은 성서해석을 통하여 그들의 신비경험을 설명하고 입증한다. 벤 아자이는 에덴동산의 생명의 나무의 찬란함을 보자마자 놀라 죽었으며, 벤 아자이와 같은 경건한 사람들(하씨딤)의 죽음은 소중하다고 시편 구절을 인용한다. 기원전 2세기 중반에 일어난 마카비 항쟁의 하씨딤(경건한 자들)이나 서기 132∼135년 바르 코크바 항쟁에서 로마 군대에 의해 처형당했던 경건한 자들처럼 ‘경건한 자’(하씨드)는 하느님의 길을 찾으며 순교했고, 이러한 순교는 신비의 경험이며 에덴동산을 보는 것과 같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그는 소심한 (예를 들어, 항상 淨한 것과 不淨한 것을 구별하기만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생명의 말씀인 토라의 위대함을 보고 놀라 죽었다는 이야기이다. 벤 아자이는 아키바의 사위였다. 보고 쓰러진 벤 조마는 에덴동산에서 배워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즉, 꿀과 꿀 옆에 달려있는 것을) 모두 먹어버려 탈이 났다는 이야기이다. 에덴동산에 들어간 네 명의 이야기에서 가장 수수께끼 같은 인물은 엘리샤 벤 아부야이다. 그가 새싹을 잘랐다고 말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 탈무드 등 여러 문헌에 언급된다. 초기 유대교 문헌에 ‘새싹’은 메시아를 지칭하는 단어이다. ‘새싹’은 초대 교회의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隱語로도 사용되었다. 엘리샤 벤 아부야는 에덴동산에 들어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개종했다는 뜻이다. 그가 새싹을 잘랐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마지막 날의 새싹이라고 확정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다른 새싹을 거론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엘리샤는 랍비들이 새싹을 해석하는 의견을 잘랐다는 뜻이다. 벤 아자이와 벤 조마, 엘리샤 벤 아부야, 그리고 랍비 아키바이다. 에덴동산에 잘 들어갔다가 온전히 나와 하느님의 법을 더욱 열심히 가르친 랍비 아키바는 좋은 땅에서 백배 천배의 열매(제자들)를 거두어 낸 자비로운 사람이다. 에덴동산을 보고 쓰러졌다는 벤 조마는 에덴동산의 이야기에서 배워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꿀과 꿀 옆에 달려있는 것을) 모두 먹어버려 탈이 났다고 말하며 이런 사람은 말씀에 숨이 막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악한 유형이다. 에덴동산을 보고 죽었다는 벤 아자이는 ‘경건한 자’로 하느님의 길을 찾는 사람이다. 토라의 길은 선과 악을 구별하는 능력을 배우는 것이다. 그는 네 것과 내 것을 구별하는 기본적인 것에만 열중한 인물이었다. (랍비들이 추구하는 이상향은 자비로운 사람이다.) 엘리샤 벤 아부야는 예수파로 전향했다는 이야기이며 그야말로 토라의 말씀을 헷갈린 자라고 말한다. 랍비들의 입장에서 보면 변절한 엘리샤 벤 아부야는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의 복음을 구별하지 못한 몰상식한 사람이라고 평한 것이다. 내 것(랍비들의 해석)이 네 것(복음)이고 네 것(새싹)은 내 것(토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고대 한국의 신화·설화와 대표적인 문학작품 등에 나오는 인물들의 성격을 위에서 읽은 예화에서처럼 그 유형에 맞추어 찾아보고 그것들이 어떻게 엮어지는지를 살펴본다. 〈선조들의 어록〉에 열거된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읽어본다. 모든 이야기가 이러한 네 가지 유형으로 두드러지게 나오는 것은 아니며 적어도 세 가지 유형을 찾아 볼 수 있는 이야기를 읽어야 전체적인 구성을 이해할 수 있다. 웅녀와 호녀 고대 한국 문화를 설명하는 데 단군신화는 중요하다. 단군신화의 이해는 한국의 문화 형태를 설명하는 척도가 될 수 있다. 단군신화에 엮어지는 인물들은 환웅과 웅녀 그리고 호녀와 단군이다. (熊女와 虎女에 대한 것은 본지 5월호 참조.) 하늘에서 내려와 神市를 세우고 弘益人間의 뜻을 실현한 환웅은 당연히 임금으로 재판관의 역할을 한다. 단군은 단군신화에서 특별히 활동한 내용이 나오지 않지만 그의 아버지처럼 도읍을 옮겨 朝鮮이라는 나라를 건설한 임금이기 때문에 바른 임금의 道를 따른 사람으로 볼 수 있다. 웅녀는 天子와 혼인하여 아들을 낳기를 꿈꾸어온 여자로 그 꿈을 실현하고 그녀의 아들이 조선의 태조가 되었다. 웅녀는 태조의 어머니가 된 것이다. 생명의 母神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웅녀는 칠성신으로 섬겨졌고 기자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웅녀는 에덴동산 이야기의 하와와 같은 인물이다.) 인간과 신의 세계를 넘나드는 범주에 속하는 인물은 주로 헷갈리는 유형에 속한다. 호녀는 단군의 유모로 설정할 수 있다. 호녀는 자신도 환웅의 은덕을 입어 아들을 생산하여 자신의 입지를 세울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고 밖으로 나간다. 스스로 포기하고 그 영광을 웅녀에게 돌리는 인물이다. 극적으로 상상하면 웅녀와 호녀는 자매지간으로 이야기될 수 있으며 고대 신화소에 어울린다. 호녀는 자비로운 인간 유형에 속한다. 이렇게 단군신화를 이해하면, 한민족이 호랑이 신화를 愛好하는 이유를 읽을 수 있으며 아이를 원하는 여인이 헷갈리는 웅녀의 형상인 칠성바위에 가서 정성을 바치는 심성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바리공주와 무장승 지난 호에 읽은 바리공주 이야기에서 바리공주의 아버지 오구대왕은 사악한 인물이다.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 자신의 딸을 죽음의 땅으로 가게 유도하는 인물이다. 태어나자마자 아버지에게서 버림받은 바리공주는 열다섯 살이 되어 왕궁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병환을 고쳐주기 위해 서역의 생명수를 얻어올 것을 약속한다. 서역은 저승이고 저승여행에서 돌아오는 것은 신적인 존재만이 할 수 있다. 바리가 신이 될 수 있는 것은 신과 혼인하는 경우에 가능하다. 이래서 무장승의 아내가 되어 아들 일곱을 낳고 이승으로 돌아온다. 바리공주는 이승과 저승의 두 범주를 넘나드는 전형적인 인물이며 두 범주의 것을 모두 얻은 인물이다. 열 다섯 나이에 서역/저승에 가서 약수를 구해올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은 헷갈린 인물 즉, 내 것이 네 것이고 네 것이 내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는 용감한 성격이다. 바리가 이승에 돌아와 巫祖神이 되는 것도 전후관계에 맞는 구성이다. 바리는 단군신화의 웅녀 모습typus이다. 아버지 오구대왕이 죽고 상여가 나갈 때에서야 비로소 바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오구대왕은 죽을 때까지 혹시나 하며 그녀를 얼마나 기다렸겠고 얼마나 원망했을까. 실상 바리공주가 무장승과 함께 살면서 일곱 아들을 낳은 다음에 특별히 해야할 일이 있어서 서역/저승에 머문 것은 아니다. 오구대왕이 죽기 전에라도 돌아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바리공주 신화는 엮어지지 않는다. 바리공주가 사악한 오구대왕에게 마음고생이라도 하라고 벌을 주는 장면인 것이다. (사악한 자는 벌을 받아야한다는 것은 대부분의 문화권에서나 보편적인 철칙이다.) 한편 무장승은 아들 셋이나 다섯만 낳으면 다시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고 아내를 좇아 이승으로 올라온 인물이다. 자신의 이득을 이웃을 위해 주는 자비로운 사람이다. 바리공주와 무장승의 성격 유형 관계는 하와와 아담의 경우 같다. 심청과 심봉사 심청은 바리공주 타입typus의 인물이다. 심청도 열다섯 살 나이에 저승여행을 자처하고 나온다. 그녀의 아버지 심봉사가 몽운사 화주승에게 약속한 공양미 삼백 석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팔아버리는 선행을 한다. 심봉사는 사악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궁핍한 형편을 염두에 두지도 않고 화주승의 감언이설에 정신이 팔려 삼백 석을 내겠다고 말한다. 화주승은 심봉사의 차림으로 보아 어림도 없는 이야기라고 만류하자 심봉사는 화를 내며 부처님에게 빈말하겠느냐고 글로 적게 하여 약속한다. 심청은 인당수에 빠져 용궁으로 실려간다. 반면에 심봉사는 딸 때문에 얻은 재산 덕분에 뺑덕 어미를 첩으로 두고 살게 된다. 그런 사이에 심청은 용왕의 도움으로 환생하여 天子와 혼인을 하게 된다. 심봉사는 결국 뺑덕 어미에게 버림받고 홀로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어 딸을 그리워하고 자신의 행위를 한탄하지만 딸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눈을 뜨기는커녕 벌을 받은 것이다. 심청이가 용궁에서 삼 년을 지낸 후에야 이승에 올라와 맹인잔치를 열고 심봉사를 찾는다. 용궁은 龍神話를 말하며 용신화의 기원은 서역에 있다(본지 6월호 참조). 심청이가 연꽃을 타고 환생하는 것은 서역과 연관된 용신화의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심청은 인당수에 빠져 용궁으로 갈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거기에서 신적인 힘을 얻어 돌아오면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다는 확신을 배운 것이다. 부처님에게 삼백 석을 봉양하고 빌어보았자 눈을 뜰 수 없으며 서역의 呪術로 기적을 행할 수 있다는 行間의 내용이다. 춘향과 이도령 춘향은 어떤 유형의 사람일까? 이도령은 양반의 자제로 기생의 딸과 혼인을 하고 약속대로 그녀를 찾아 돌아오니 자비로운 인물이다. 춘향은 이도령과의 백년가약을 굳게 믿고 (비록 기생의 집에서 합환주를 나누며 약속한 것이지만) 양반댁 규수의 행실을 하며 과거 보러 가버린 이도령을 기다린다. 변 사또가 부임하여 이름난 미녀 춘향에게 술 따르라고 이르지만 춘향은 거절한다. (춘향 母 월매가 이름난 기생이었으나 일찍이 그만 두고 참판과 함께 세월을 보냈다고 하더라도 춘향은 기생의 딸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사또가 불러들이는 기생들 가운데 춘향도 끼게 되는 것이다.) 사또가 기생의 딸에게 수청을 명하는 것은 상례이며 이를 거절하면 벌받는 것도 당연하다. 춘향은 자기 생각에 이미 양반댁 부인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네 것(양반의 신분)이 내 것이고 내 것(기생의 딸)이 네 것이라고 확신하는 유형이다. 한민족이 애호하는 대표적인 소설 춘향전의 주인공은 두 신분의 범주를 오락가락하며 헷갈리는 인물이다. 심청이나 바리공주, 춘향 등 모두 헷갈리는 상태에서 시작하지만 끝내 높은 위치로 올라가는 패턴이다. 심청은 황후가 되고, 바리공주는 무조신이 되며 춘향은 정열부인이 된다. 홍길동 홍길동은 서자로 태어나 집안의 천대를 받고 가출하여 도적무리의 수령이 되어 탐관오리를 처형하고 재산을 탈취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영웅이다. 허균이 지었다고 전해진 홍길동전은 조선시대의 사회상을 이야기하는 것도 되겠지만, 허균은 고대 한국의 전승 신화소를 충분히 활용하여 소설을 창작한 것이다. 특히 주몽 신화에서 주몽의 탄생이나 그의 성장 과정, 그리고 주몽이 집을 떠나 새로운 곳에 가서 나라를 건설하는 등의 신화소는 홍길동전에 역력히 나타난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홍길동을 헷갈리는 인물로 설정한 것이다. 고대 한국 문화의 영웅은 사회의 신분 계층이나 인간과 신의 범주를 헷갈리며 새로운 도전에 결단을 내리는 인물이라는 점을 파악한 것이다. 홍길동의 아버지 홍 판서는 한낮에 졸다가 용꿈을 꾸고 태몽이라고 여겨 안방에 들어가 부인과 잠자리하기를 요구한다. 정승의 체면에 그리하지 못한다고 피하자 홍 판서는 몸종을 이끌고 정을 나누었다. 이렇게 태어난 홍길동은 청룡의 정기를 타고난 庶子이다. 뜻을 이루면 임금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화를 크게 입을 것이라고 모함한 무당의 간계로 홍길동은 집을 떠나게 된다. 홍길동은 도적 무리의 수령이 되어 해인사의 재물을 훔치어 내는 데 성공한다. 이후 탐관오리들의 재물을 약탈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민중의 영웅이 된다. 그는 군사와 진배없는 도적떼를 보내어 장안으로 가는 뇌물을 빼앗고 불쌍한 백성이 있으면 창고의 곡식을 내어 구제한다. 그의 신출귀몰한 재주는 헤아리지 못할 정도이다. 그러나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 불한당이다. 임금이 나랏일을 근심하고 홍 판서는 그의 서자 때문에 병환이 들어 눕는다. 홍길동은 스스로 잡혀 임금 앞에 나선다. 임금 앞에 나선 홍길동은 여덟 명으로 둔갑하여 임금에게 백성의 재물을 빼앗지 않았으며 오직 의롭지 못한 사람들의 재물을 빼앗아 먹었다고 자신의 충정과 결백을 아뢴다. 그리고 스스로 죽을 것이니 노여움을 덜어 달라고 임금에게 말하고 여덟 홍길동은 한데 어우러져 죽는다. 자세히 보니 진짜 홍길동은 간데 없고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 일곱 개뿐이었다. 홍길동은 사람을 헷갈리게 만드는 술수가 있는 마술사이다. 홍길동의 꿈은 병조판서가 되는 것이다. 그에게 임금이 병조판서에 봉한다는 교지를 내리면 스스로 잡힐 것이라고 四大門에 글을 써 붙어 놓는다. 이래서 홍길동은 병조판서가 되고 이후로는 다시 作亂하는 일이 없어졌다. 삼년 후에 홍길동은 임금에게서 벼 삼천 석을 얻어 도적 삼천 명을 거느리고 바다로 떠나 성도라는 곳으로 간다. 그곳에서 군대를 강하게 만든다. 그곳에 부자인 백용이라는 사람에게 딸이 있었는데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백용은 그 딸을 찾아주면 사위로 삼고 재산의 반을 주겠다고 말한다. 홍길동은 사람 모양을 한 짐승들의 우두머리를 활을 쏘아 다치게 하고 짐승들을 소탕하여 백용의 딸을 구한다. 이 짐승들은 거타지나 작제건이 섬에서 활을 쏘아 죽인 늙은 여우와 같은 악귀들이다. 귀신들을 몰아내고 부자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 홍길동은 이웃의 율도국을 치고 왕위에 올라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청룡 꿈으로 태어나 왕위에 오른 홍길동은 龍神話의 문화적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심청이나 처용, 태조 왕건의 탄생설화에 나오는 작제건의 용신화와도 연관된다(본지 7월호 참조). 특히 홍길동이 성도에서 사람 모양의 짐승들인 妖鬼들을 물리친 것은 邪의 힘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홍길동전은 단순히 사회정의나 계급타파를 주장하는 의도에서 쓰여진 작품이라기보다는 그 이면에 악귀를 쫓아내는 驅魔의 종교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어떠한 자가 용감한가? 〈선조들의 어록〉 4,1에 아래와 같이 네 가지 질문에 대하여 답하는 내용이 나온다. 어떠한 자가 지혜로운가? 누구에게서나 배우는 자다. 어떠한 자가 용감한가? 자기 본성을 누르는 자다. 어떠한 자가 부유한가? 자기 몫에 기뻐하는 자다. 어떠한 자가 중히 여겨지는가? 인간을 중히 여기는 자다. 이 네 가지 질문을 네 가지 유형과 대조하여 보면 헷갈리는 사람이 어떠한 부류인지 알 수 있다. 유대교에서 말하는 지혜로운 사람은 자비로운 사람이다. 자기도 공부하고 남들도 공부하기를 원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배우는 자가 바로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주로 선생이나, 학자 등 명예가 중요한 사람들이 택하는 직업일 것이다. 욕심이 있어야 부유해질 수 있는 것은 상식이다. (물론 부유한 자가 모두 욕심꾸러기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부자가 되려면 내 것에 네 것을 보태어야 한다. 이것이 경제의 원리라고도 말한다.) 사악한 유형이 이러한 범주category에 속하지만 부유하다고 모두 사악한 것은 아니다. 이상적인 사악한 사람은 자기 몫에 기뻐하는 자이다. 올바른 기업인이 가져야 하는 정신이다. 나머지 가운데 내 것은 내 것이고 네 것은 네 것이라고 질서를 잘 지키는 유형의 사람은 어떠한 자일까? 인간을 중히 여기는 자이다. 법을 지키고 사회 관습과 윤리를 존중하는 부류의 사람들을 가리킨다. 준법정신이 이를 대표한다. 유대교에서 가장 기본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율법nomos이다. 공무원의 기본 윤리이다. 따라서 용감한 사람은 헷갈리는 사람이다. 네 것이 내 것이고 내 것이 네 것이라고 생각되어야 용기가 생긴다. 국가를 위해 전쟁터에 나가 싸우는 용감한 군인은 적의 것이 내 것이라고 생각하며 결국 내 것(목숨)이 국가의 것(순국)이라고 확신한다. 국가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운동선수도 이러한 부류에 속한다. 자신의 명예와 국가의 영예가 함께 걸려있는 것이다. 이러한 유형의 사람으로 종교인을 들 수 있다. 위에서 읽은 예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헷갈리는 사람은 종교적 권능이 있는 사람이 많다. 귀신을 쫓아내거나 자신이 신의 범주에 속한다고 판단하여 행동하는 경우에 나타난다. 순교인들은 대부분 이런 유형의 인간이다. 고대한국의 문학작품에서 헷갈리는 인물들이 주역을 맡는 경우가 많은 것은 한국의 종교 역사에서도 쉽게 발견될 수 있다. 옛날에는 巫敎, 어제는 불교, 유교, 오늘은 기독교로 전향하는 강한 종교성을 가진 민족임이 드러난다. 한국에 천주교가 들어온 지 200년 되었고 개신교는 100년 정도 되지만 서너 명 가운데 하나가 기독교인이라는 것은 놀라운 이야기이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나라가 위험한 상황이 되면 신흥 종교가 붐을 일으켰다. 용맹스럽고 헷갈리는 종교인들이 성행하는 곳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위에서 읽어본 고대 한국의 이상적인 용감한 사람은 자기의 본성을 누르는 자들이다. 바리공주나 심청, 춘향, 홍길동 모두 자신의 본성을 누르고 아버지(조국)를 위해 노력하고 성공한 영웅들이다. * 조철수 교수의 <우리 고대문화의 원형을 찾아서>는 이번 호를 마지막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좋은 글을 써주신 교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무우를 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