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goocom (Ged) 날 짜 (Date): 2002년 4월 22일 월요일 오후 03시 20분 18초 제 목(Title): Re: [상식] 마리 앙뚜아네뜨 음, 전문을 퍼 오는 일은 삼가려 했지만.. -_-; 접속이 안되신다니... 현재 한국 외대 사학과 교수이신 박성래 교수의 글임을 밝혀둡니다. --- 자기와 전기: 고대에서 중세까지 박 성 래 자석에 대해 처음 알았던 사람은 흔히 그리스의 탈레스로 되어 있다. 서양 중심의 역사관에서 보면 그리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탈레스(Thales of Miletus, 640-546 B.C.)가 호박을 문지르면 작은 물체를 잡아끄는 성질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종류의 광물(자철광 종류)은 쇠붙이를 끄는 힘이 있음을 알아차렸다고 전한다. 탈레스라면 역사상 처음으로 일식을 관찰했던 인물로도 전해지고,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처음 주장했다고 알려지는 등 말하자면 4원소설을 시작한 자연철학의 창시자로 널리 알려져 있는 대단한 인물이다. 흔히 알려진 일이지만 전기를 영어로 electricity라하고 전자를 electron이라 부르게 된 것은 바로 라틴어의 호박(琥珀: amber)이란 단어가 바로 electrum이었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호박의 인력 현상은 자석과도 관련되지만, 전기현상의 시작이기도 하기 때문에 결국 이 말은 전기를 가리키는 단어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런 반면 자석을 가리키는 영어 magnet, magnetism이란 단어는 그리스의 Magnesia라는 소아시아의 지명에서 유래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 곳의 돌에 자철광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 후 그리스의 대표적 과학자이며 의사인 엠페도클레스(Empedocles)는 쇠가 자석에 끌리는 이유를 설명하여 그들 사이의 인력이란 것은 다름 아닌 두 물체 사이에 끌어당기는 힘이 두 물체가 모두 내뿜는 어떤 기운이 서로 조화하기 때문에 서로 끌리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서양에서는 그런 방식으로 어떤 신비로운 힘이 서로 끌리는 작용을 하는 경우의 예로 자석이 많이 인용되어 내려왔다. 자석이란 것을 이미 그리스 로마 시대 이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리스의 대표적 철학자 소크라테스(Socretes, 469-399 B.C.)는 "자석은 쇠고리를 끌어당길 뿐 아니라, 그 쇠고리가 다른 쇠고리를 끌어당길 수 있도록 힘을 전해준다. 그 결과 때로는 쇠고리들이 연속으로 이어져 긴 사슬을 만들게도 해준다. 그리고 이런 힘은 모두 원래의 자석에서 유래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그의 제자 플라톤은 {대화편}에 기록하고 있다. 자석과 호박의 인력에 대해서는 아주 옛날부터 서양에서 잘 알려져 있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서양에서는 자석이 남과 북을 가리킨다는 지향성(指向性)에 대한 지식은 별로 발달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 자석이란 것이 알려진 뒤 1천년도 훨씬 더 지날 때까지도 그것이 남북을 가리킨다는 성질은 잘 몰랐던 모양이란 말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는 단연 중국이 먼저였던 것으로 밝혀져 있다. 자석 그 자체에 대한 기록이 탈레스보다는 조금 뒤부터 중국에서도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재미있는 사실은 중국에서 초기의 자석에 관한 기록이 모두 자석(慈石)이란 글자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지금 우리가 쓰는 표현인 자석(磁石)이란 한자가 나오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그 이유는 당시의 글을 읽어보면 금방 알 수가 있다. 기원전 4세기의 책이라고 알려진 {관자}(管子)에 보면 "위에 자석이 있는 곳에 금과 구리가 있다"는 표현이 있다. 즉 자석은 다른 금속과 함께 있음을 지적한 글이다. 여기에서 쓰인 자석이 바로 慈石이란 한자로 되어 있다. 기원전 3세기의 책 {여씨춘추』(呂氏春秋)에는 "자석이 쇠를 끌어당긴다"(慈石召鐵)란 말이 있다. 바로 이 대목을 설명하면서 후한(後漢) 시대의 학자 고유(高誘)는 "돌은 쇠의 어머니이다. 그런데 그 돌 가운데에는 자애로운 돌과 자애롭지 못한 돌이 있어서 자애로운 돌은 자식을 끌어안 듯이 쇠를 끌어들이지만, 그렇지 못한 돌은 쇠를 끌지 못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어머니(자석)와 자식(쇠)의 서로 끄는 힘으로 자석의 인력 현상을 설명하고 있는 시대였던 것이다. 지금부터 거의 2천년 전의 일이다. 같은 후한 시대의 대표적 사상가인 왕충(王充, A.D. 27-97)은 기원 83년에 쓴 {논형』(論衡)이란 책에서 당시의 여러 가지 미신적인 생각에 대해 가차없는 비판을 가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책에는 자석이란 말이 두 번 나오는데, 두번 모두 정전기 현상과 자석을 같은 종류로 파악하여 함께 뭉뚱그려 말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작년에서야 처음으로 번역되어 간행되었으나, 아직 나는 사두지도 못한 책이다. 원래의 책 제16권을 보면 그 대목이 한문으로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돈모는 티끌을 끌어들이고, 자석은 바늘을 끌어들인다."(頓牟?芥 磁石印針)-- 47편 亂龍篇 여기 돈모(頓牟)란 것은 옛날에 흔히 대모(玳瑁)라고 하던 바다 거북의 껍질이다. 남쪽 바다에서 생산되는 이 거북의 껍질은 누런 색에 검은 점이 박힌 아름다운 모양이기 때문에 준(準) 보석으로 사용되었는데, 부도체여서 마치 요즘의 플라스틱 같이 문지르면 정전기를 띄게 마련이었다. 그런데 중국과학사의 권위자로 널리 알려진 영국의 조셉 니덤(Joseph Needham, 1900-1995)의 책 {중국의 과학과 문명}(Science & Civlization in China, Vol. 4, Part 1)에는 이 부분을 "호박(琥珀)은 겨자씨를 끌어들이고, 자석은 바늘을 끌어들인다"고 번역하고 있다. 의미는 마찬가지지만, 원래와는 좀 다른 해석이라고 하겠다. 중국 학자들은 돈모를 대모로 해석하고 있는데, 니덤은 이를 호박으로 본 것이다. 대모나 호박은 모양이나 사용방법이 거의 같았을 것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서로 다른 것이 분명하다. 또 개(芥)란 글자를 겨자씨라 번역한 것은 글자 그대로는 옳지만, 티끌이나 먼지라 옮겨도 좋을 것 같다. 왕충은 이 부분 말고도 많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 방식을 이 책 구석구석에서 보여주고 있다. 덕택에 왕충은 특히 중국이 공산화한 이후 중국 사상사에서 아주 높은 대접을 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특히 이러한 합리주의적 사고 때문에 중국 유물론 사상의 창시자쯤으로까지 높임을 받고 있는 것이다. 여하간 왕충의 이 책에는 자석과 정전기를 같은 성격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그 뿐만 아니라, 왕충은 자석의 남북 지향성에 대한 것도 기록해 남기고 있다. 제17권의 시응편(是應篇)에 나오는 대목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사남의 표를 땅에 던지면 그것이 남쪽을 향한다."(司南之杓 投之於地 其?指南) 여기서 말한 표(杓)란 것은 원래 북두칠성의 자루를 가리킨 말이다. 꼭 반세기 전에 중국 학자 왕진탁(王振鐸)은 이를 일종의 원시적인 나침반으로 복원하여 많은 학자들의 공감을 받았다. 그것은 2천년 전에 등장했던 일종의 점치는 장치로서 네모진 판에 방위(方位)와 점괘(占卦)를 적어 놓고 그 위에 자석으로 만든 숫가락을 던져 돌려주면 그것이 남북을 향하게 될 터이니 이를 이용하여 점을 쳤던 것이라는 해석이다. 이 장치는 오늘날 고대 중국의 과학 유물로 많이 만들어져 팔리고 있다. 나도 거의 10년쯤 전인가 북경의 고관상대(古觀象臺) 구내매점에서 작은 것 하나를 사다가 집에 놓아두고 있다. 이 중국에서 만들어 파는 사남의 설명문에는 바로 위에 소개한 왕충의 글이 있음은 물론이다. 영어와 중국어로 된 설명문에 의하면 이것은 한나라 때 사남의 모형이며, 나침반은 중국의 4대 발명의 하나라고 써 있다. 중국 과학사는 세계의 근대문명을 가능하게 해준 원동력이 나침반, 화약, 종이, 인쇄술 등 중국의 4대 발명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어서 이 설명에는 중국에서 나침반에 관한 기록이 처음 보이는 것은 기원전 3세기 전국(戰國)시대부터라고 한다. 특히 여기에는 사남을 돌려주는 판(즉 地盤)은 낙랑(樂浪)에서 출토된 칠기 유물에 그려진 것을 근거로 다시 만들어 본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낙랑이란 말에는 괄호 속에 "지금의 조선"이란 말도 들어 있다. 실제로 일제 시기 낙랑 고분의 발굴에서 나타난 칠기 하나에는 원과 네모의 하늘과 땅을 나타낸 판(天地盤)이 있고 그 위에는 방위, 간지와 기본 별자리를 그렸던 흔적이 발견되었다. 바로 우리나라에서 발굴된 유물을 근거로 한 나라 때의 사남을 다시 만들어내고, 그것을 상품으로 개발해낸 것이다. 이미 이에 대해서는 우리 과학사를 책으로 쓴 홍이섭의 {조선과학사』(p. 41)와 전상운의 {한국과학기술사』(p. 160)에 모두 나와있다. 그러나 실제로 한나라의 식민지라 할 수 있었던 낙랑에서의 점치는 판 <식점천지반>(式占天地盤) 이외에 한반도에서 언제 어떻게 자석이 알려지고, 전기현상에 주목하기 시작했던가는 아직 연구되어 있지 못하다. 그런대로 흥미있는 기록으로는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나오는 자석을 중국에 보냈다는 기록을 들 수 있다. 신라 문무왕 9년(669년) 정월에 당나라 승려 법안(法安)이 와서 천자의 명령이라며 자석을 요청한 기록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해 5월 신라는 급찬 지진산(祗珍山) 등을 당나라에 보내 자석 2상자를 바쳤다는 것이다. 7세기의 일이니까 당시의 중국에서는 이미 자석을 사용하는 길이 여러 가지로 알려져 있었고, 거기 필요한 천연자석을 신라에서까지 얻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삼국 시대의 자석에 관한 기록이 이 정도 밖에 눈에 띄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신라 또는 그 전의 삼국에서는 어떻게 이용했던가는 아직 알 길 없다. 물론 이렇게 구한 자석은 옥을 가공하는 것과 같은 기술로 갈아서 숫가락같은 모양을 만들어 앞에 말한 사남(司南) 같은 것으로도 사용했다고 중국 학자들은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더욱 분명하게 나침반에 대해 말한 기록으로는 아무래도 11세기 중국의 위대한 과학자 심괄(沈括, 1033-1097)을 들어야 할 것이다. 송나라의 과학자 심괄의 과학 내용은 주로 그의 대표작 {몽계필담』(夢溪筆談)에 기록되어 있는데,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이 과학 고전을 번역해낸 일이 없다. 1088년에 나온 책 {몽계필담}에서 나침반에 관한 부분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방사(方士)는 자석으로 바늘을 문질러서 그것을 남쪽을 향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약간 동쪽으로 기울어 정확한 남쪽을 향하지는 않는다. 그것을 물 위에 띄워 두면 불안정한 것이 흠이다. 손톱 위에나 그릇의 가장자리 위에 놓으면 잘 돌아가기는 하지만 금방 밑으로 떨어져 버리기 쉽다. 가장 좋기로는 자침의 중심점에 밀랍을 달고 여기를 명주실로 묶어서 균형을 잡고 바람 없는 곳에 두면 바늘이 언제나 남쪽을 향한다. 바늘 가운데에는 북쪽을 향하는 것도 있는데, . . . 아직 아무도 그 이치를 설명할 수는 없다. {몽계필담』 제24권 18조 이 문헌은 당시의 중국에서 나침반이 여러 가지로 사용되고 있었음을 가리킨다. 게다가 자기의 편각(偏角) 현상에 대해 처음으로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중국에서의 자석이나 지남침(또는 나침반)의 역사를 말할 때 흔히 등장하는 주제 하나로는 지남차(指南車, 또는 지남거)라는 것이 있다. 앞에 인용한 심괄의 글이 쓰여지기 1천년도 훨씬 더 전에 이미 중국에서는 지남차란 것을 만들어 썼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카조리(F. Cajori)의 {물리학사}(p. 25)에는 이미 "south-pointing chariots"(지남차)라는 영어로 번역되어 나와 있다. 중국의 전설에 의하면 중국 사람들은 이미 고대부터 나침반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카조리는 위에 인용한 심괄의 말도 인용하면서 11세기에서야 확실한 기록이 보인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후의 연구 결과 지남차란 것은 이름과는 달리 지남침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으로 밝혀져 있다. 중국의 시조라는 황제(黃帝)가 치우(蚩尤)라는 괴물을 공격했을 때, 치우가 일으키는 안개 때문에 방향을 알 수 없어서 발명해 낸 것이 바로 지남차라는 것이다. 황제라는 인물부터가 전설이지만, 그가 발명했다는 지남차 역시 전설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같은 이름을 가진 지남차란 것은 실제로 4세기 진(晉)시대에는 천자의 행렬에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것은 나침반을 달아 둔 수레가 아니라, 인형이 수레 꼭대기에서 언제나 같은 남향을 가리키도록 톱니바퀴 장치로 조절하게 만든 수레였다. 자석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고 밝혀져 있다. 나침반을 항해에 사용한 초기의 기록으로는 고려를 방문한 1123(고려 인종 1)년의 중국 사신의 기록을 들 수 있다. 당시 중국 사신을 따라왔던 서긍(徐兢)은 {고려도경』(高麗圖經)이라는 기행문을 남겨 고려 시대의 우리나라 사정에 대해 귀한 자료를 전해주고 있다. 그 가운데 중국 사신들이 탄 배가 고려로 항하고 있을 때 나침반을 사용한 기록이 있는 것이다. 1123년 5월 28일의 기록이다. -- 이날 밤에는 배를 세울 데가 없었다. 별과 북두칠성을 보고 배를 운행해 갈 수 밖에 없었다. 만약 어둡다면 물위에 띄운 지남부침(指南浮針)을 써서 남북을 가릴 수 있다. 밤이 되어 봉화불을 켜자 8척의 배가 모두 이를 따랐다. 서긍 {고려도경』제34권 반양초 여기 서긍이 말한 나침반은 그날 밤 실제로 사용했다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적어도 그 배에 나침반이 있었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하지만 역시 분명한 사실은 아직도 나침반은 그때 그때 물위에 띄워서 남북을 가려 보는 방식이어서 영구적인 장치로는 만들어 놓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 책보다 10년쯤 앞의 책에도 "밤에는 별을 보고, 낮에는 해를 보고, 그리고 어두운 날이라면 지남침을 보고" 항해한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지남침이란 말로 표현되어 있지만, 역시 물위에 띄운 장치를 가리키는 것일 가능성이 있다. 그 시기에는 주로 물위에 물고기 모양으로 길게 만든 자석을 띄워 사용했기 때문에 지남어(指南魚)란 말이 남아 있기도 하다. 이런 기록들을 근거로 중국에서는 나침반이 항해에 실용된 것이 10세기부터라고 판단하고 있다. 물론 육지에서는 그 보다도 더 일찍부터 비슷한 장치로 남북을 판단하는데 활용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서양에서는 자석의 방향성을 알고 활용한 예를 1190년에서야 발견할 수 있는 것으로 밝혀져 있다. 알렉산더 네캄의 글에 처음으로 항해에 나침반을 사용하는 기록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랍에서는 오히려 이 보다 조금 늦게서야 나침반의 사용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하튼 나침반의 발명과 사용은 중국이 세계 최초인 것이 분명해 보인다. 게다가 근대과학의 발달 원인을 설명하면서 과학사상가 프란시스 베이컨은 3대 발명을 말한 일이 있다. 나침반, 화약, 인쇄술의 3대 발명이 서양의 근대화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는 설명이 그것이다. 중국 학자들이 얼마나 이를 강조하는지에 대해서는 니덤의 중국과학사를 요약해 그림과 함께 설명한 책이 몇해 전 우리나라에서도 번역되어 있어서 참고할 수가 있다. 로버트 템플이 지은 {그림으로 보는 중국의 과학과 문명}(까치, 1993)이 그 책이다. 중국인들이 나침반의 발명을 중대한 사실로 강조하는 까닭은 바로 <3대 발명>의 역사 해석에 있다. 그들은 베이컨이 지적한 <3대 발명>에 종이를 넣어 <4대 발명>으로 확장하고, 그것 모두가 중국의 발명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여 세계 문명의 원류가 중국이라고 강조하려는 것이다. 앞으로도 자석과 나침반은 세계 과학사에서 중요한 문제로 계속 주목을 받을 것이 분명하다. Businesses used to be like christianity; if you were faithful and obedient, you could obtain bliss in the afterlife of retirement. Now it's more of a reincarnation model. If the worker learns enough in his current job, he can progress to a higher level of employment elsewhere. <Dogber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