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2년 4월 15일 월요일 오전 05시 38분 17초 제 목(Title): 차봉희/ 독일포스트..과 90년대 한국소설 출처: 한신15집 독일 포스트모더니즘 소설과 90년대의 한국 소설* -'현대' 소설미학과 '포스트모더니즘' 소설미학의 분기점을 중심으로- * 본 논문은 1997학년도 한신대학교 학술연구비 지원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임. ** 독어독문학과 교수 차 봉 희** ≪차 례≫ ---------------------------------------- ---------------------------------------- 0. (전체 논문)서 론 Ⅰ. '독일 포스트모던 문학'에 관한 관찰 0. 서론:독일문학에서 포스트모더니즘 문학 수용의 전개과정 및 현황 1. ('역사성')이야기의 소멸(der Verlust der Historizitat) 2. "주체의 종말(Ende des Subjekts)" 3. "서사적 자아성찰성(epische Selbstreflexivitat)"의 문제 Ⅱ. 90년대 한국 소설문학에 관한 관찰 0. 서론:문학적 형상화에서 사실과 허구의 긴장관계 1. 현실의 심미적 구조변화로서 소설적 형상화에서 '사실과 허구의 긴장관계' 2. 형상화하는 '문학적 공간'으로서 소설세계 3. 현실의 서사적 자기반영성과 문학텍스트의 호소구조 4. 독자로서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에 대한 이해의 문제 Ⅲ.(전체 논문)결 론:'포스트모더니즘 소설문학'의 실체는? 1. 독일 포스트모던 소설문학의 성과 2. '한국적' 포스트모더니즘 소설문학의 실체는? ----------------------------------------------------------------------------------------------- 0. (전체 논문) 서 론 "독일 포스트모더니즘 소설과 90년대의 한국 소설"이란 테마를 가지고 한독 양쪽의 90년대 소설 문학을 살펴보고자 하는 본 연구는, 외국문학 전공자로서 한국의 '현실 인식'(여기서:한국 90년대 소설텍스트의 독서·관찰·평가)에서 출발하여 독일소설과 한국소설을 관찰함으로써 우리 문학에 대한 인식은 물론, 외국문학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는 우리 문학의 '자기풍부화'에 대한 단초들을 찾기 위한 의도에서 기획된 것이다. 이는 독문학 전공자로서 연구자 자신의 전공분야인 본토 '독일문학'의 "현재, 여기서"의 문학 주제, 곧 90년대 "독일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에 관한 정보과 지식을 획득하기 위해, 그리고 연구자 자신이 몸담고 살고 있으면서도 잘 알지 못하는 현 한국 문화-사회적 현실, 곧 우리 문단의 '포스트모더니즘적 문학세계'를 이해하기 위함이다. 주로 90년대 등장하여 '포스트모던' 소설이라 지칭된 한국 소설작품에 대한 이러한 접근 시도는 한독 양쪽의 90년대 소설 문학을 비교하려는 의도에서라기보다는 외국문학 전공자로서 갖추어야 할 한국 문학계의 현 흐름에 대한 지식 획득, 곧 '한국 문학의 이해'에 그 주된 의의를 둔다. 이러한 비교문학적 자세에서 이루어지는 문학연구의 목표는 독일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에 대한 진정한 이해에 있겠다.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이란 주제 하에서 이루어지는 관찰작업에서는 한국의 근대화 이후 전반적인 문화형성과정에서 외국 문화(조류)의 수용이 그 주축이 되어 온 점을 감안한다면 한국문학에서 이루어지는 외국문학의 수용 및 구체화(Konkretisation)의 양상도 드러날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 현상은, 지구촌화한 세계 각국에서 지난 80년대 및 현 90년대에 '문화' 사회의 전 분야를 휩쓸었던 지배적인 분위기였다. 한국 사회에서도 80년대 말부터 시작, 문화예술계를 비롯하여 사회 전반을 떠들썩하게 했으며, 현재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세계에 처해 있거나 이미 이것을 벗어나 또 다른 움직임(분위기)의 상황에 처해 있는 게 분명하다. 시간적인 의미에서만은 아니지만 21세기를 눈앞에 둔 현 시점에서 모더니즘적인 것('현대성')과의 단절로, 더욱이 '멀티미디어(다매체)의 시대'에 진입한 현 시점에서 우리 모두가 가히 '탈 현대성'의 시기에 들어섰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독일의 경우 포스트모더니즘의 등장은, 문예학 분야를 중심으로 말해 볼 때, 80년대 중반 프랑스인 들로부터 시작되어 새로운 해석학적 입장들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 이러한 상황에서 갑자기 기저 분위기를 지배하면서 급기야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소위 유행의 첨단을 걷는 지적인 상류사회층(Schickeria)에서 "해체('탈구성')주의적 텍스트 새타이어 유희"가 벌어지게 되었고, 이제는 독일 서적시장을 중심으로 한 문학비평계에서는 물론 문학사에서도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을 진지하게 평가하기에 이르렀다. 한국에서도 지난 80년대 말, 90년대 초반부터 시작·진행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열기는 대단했다. 출판-문화계를 중심으로 볼 때, 예컨대 1989년(정정호. 강내희 편){포스트모더니즘론}(도서출판 터 1989)이 출간되기 시작하여, 그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 분야에서는―이에 관해 과학적으로 조사·정리한 객관적 데이터에 근거한 것은 아니지만―아마도 수 백권에 달하는 역서, 저서들이 출간·발표되었을 것이다. '문학'계를 중심으로 볼 때도 거의 모든 문예지, 계간지들에서는 예외 없이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특집을 다루었다. 단행본으로는 예컨대, (이주동·안성찬 역){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변증법}(도서출판 녹진 1990), {포스트모더니즘의 쟁점}(도서출판 터 1991),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구조주의}(현암사 1991), {포스트모더니즘과 예술}(청하 1991),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구조주의}(현암사 1991), {포스트모더니즘과 한국문학}(도서출판 글 1991), {포스트모더니즘의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서광사 1992), {포스트모더니즘과 문학비평}(고려원 1993), (휴 실버만){포스트모더니즘}, 고려원 1994) 등등 수많은 출판물이 쏟아져 나왔다. 이에 비해 '소설'(이론) 분야에서는 다음의 몇몇 출간물, 예컨대 (김성곤){포스트모더니즘과 현대미국소설}(열음사 1990), (정정호·이소영) {'포스트'시대의 영미문학}(열음사 1996), (김성곤){포스트모던 소설과 비평}(열음사 1996) 등을 들 수 있겠다. 유럽을 중심으로 볼 때, 포스트모더니즘의 현상은―이것을 철학적, 문화-사회적 분야에서의 세계적인 움직임에 해당하는 것으로 또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 및 대중매체화 시대의 문화 현상으로 보건 어떻든 간에―특히 건축, 미술 및 음악 분야에서 이미 60년대 말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듯이, 한 문화권의 각 분야별로 또는 한 나라의 (정치, 종교, 예술, 교육 등등의) 개개 "사회-체계"에서 각기 달리 논의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한국에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논의는, 소위 그것의 수용과 영향의 여파는 우리 사회 전 분야에서 이루어졌다고 본다. 외국의 동향에 민감하고 신속하게 반응하는 한국 문단에서도 번역 및 저술 작업 등을 통해, 그리고 한국 학자 및 문인들의 논의, 또는 실제 예술행위를 통해 눈에 띄게 부각되긴 했지만, 포스트모더니즘 '창작'문학에 관해서 실질적으로, 특히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에 관해서는 진지하고 충분한 논의나 구체화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없는 상황인 것 같다. 물론 90년대 초반 한국에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대단한 열기와 더불어 계기된 것으로 사료되는 바, 한국 '포스트모던 소설'의 주제가 부각되긴 했다. 예컨대 ('오늘의 작가상' 수상)하일지의 {경마장 가는 길}(민음사 1990), 그리고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세계사 1993) 등 한국 소설 작품을 중심으로 "포스트모던 소설"의 주제가 논의되었으며, 이 시기에 수많은 외국 소설작품이 예컨대, 움베르토 에코(이윤기 옮김)의 {장미의 이름}(열린책들 1989)을 비롯하여 외국 소설작품들이 소개되었으며 현재에도 번역·출간되고 있다.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 수용양상은, 90년대에 와서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을 진지하게 논하게 된 현 독일 문학계의 그것에 비교해 보거나 또는 초창기 수용의 열기가 어느 정도 가라앉은 듯한 한국 문화-예술계의 현황으로 미루어 보면, 독일 문학계에서와는 다른 양상의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고 본다. 특히 '포스트모던 소설' 창작작품 자체에 관한, 또는 '포스트모던 소설미학'에 관한 진지한 논의나 연구가 우리측에서는 미진하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창작'문학에 관해 실질적으로 진지하게 논의·구체화되지 않은 채 거의 소강 상태에 이른 현 우리의 수용 분위기는, 우리의 문화-예술계에서 일어났던 포스트모더니즘 문화현상에 대한 지대한 관심에 견주어볼 때도 그러하지만, 역시 독일의 그것과 다르다고 볼 수 있다. 본 연구의 첫 단계에서는 '독일 포스트모던 문학'에 관한 관찰이, 둘째 단계에서는 '한국 포스트모던 문학'에 관한 관찰이 이루어지고, 셋째 단계에서는 앞에 진행된 관찰작업의 결과들을 상호 비교해 보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생산적인 단초들을 종합하여 (이 연구의 최종적인 목표)'한국적 포스트모더니즘 소설문학의 실체는 무엇인가'를 구체화해 본다. "I. 독일 포스트모던 문학에 관한 관찰"에서는, 21세기를 눈앞에 둔 현 시점에서 모더니즘적인 것('현대성')과 구분되는 변별점(곧 연계성)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구체화해 보기 위해, 즉 '현대' 미학과의 분기점을 중심으로 독일 포스트모던 문학에 관해 관찰하며, 그 결과를 포스트모더니즘적 소설미학의 구체화로 이끌어 간다. 여기서는 90년대 독일에서 '포스트모던 소설'로 대두한 작품들에 드러나는 소설문학에서의 질적 변화들, 즉 '모더니즘'적 소설의 특성을 개관한 종합관찰에 근거하여 주로 양자간에서의 미학을 구분해 주는 분기점(Differenzierung)이 어디에 있는가를 관찰, 그 결과들을 구체화하여 독일 '포스트모던 소설'의 실체를 구체화해 본다. 따라서 독일 90년대, 예컨대 문학사에서 "포스트모던 소설"로 평가되고 있는 여러 소설작품들에서 다음 3작가의 작품들**을 중심으로 '소설적 형상화'에 드러나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양상을 찾아내, 이것들을 소위 독일 소설미학을 중심으로 드러나는 모더니즘 미학과 포스트모더니즘 미학의 변별 표지로 삼아, 모더니즘 소설과 포스트모더니즘 소설 양자간에서의 차이(곧 '변화 양상')를 구체화해 본다. **1) 크리스토프 란스마이어(Christoph Ransmayr)의 {마지막 세계}(Die letzte Welt, 1988); 2)인고마 폰 키저리츠키(Ingomar von Kieseritzky)의 {예술가를 위한 해부학}(Anatomie fur Kunstler(1989); {재난(災難)의 책(이야기)}(Das Buch der Desaster, 1988/91); {여성 플랜. 남성을 위한 습작(연습곡)(Der Frauenplan. Etuden fur Manner, 1989/91) 3)보도 쉬트라우스(Botho Strauß)의 {젊은이}(Der junge Mann, 1984) "II. 90년대 한국 소설문학의 관찰"은, 독일 포스트모던 소설텍스트 선발에서와 같이, 한국 90년대의 소설들 가운데 (문학 비평계 및 문학상, 문예지, 문학그릅 등 대중매체를 통해 얽혀짜인 문학-현장인) 우리 문단에서, 특히 '포스트모던 소설'(또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소설)로 언급·논란되거나 평가되는 다음 4편의 작품들**을 관찰대상으로 삼는다. ** 1) 이인화의 장편소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1992) 2) 하일지의 {경마장 가는 길}(1990) 3) 박일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1992) 4) 장정일의 {아담이 눈뜰 때}(1990) 한국 소설작품에 관한 관찰은, 독일 포스트모던 소설문학 관찰에서와 마찬가지로―독일 소설미학을 중심으로 볼 때 거기서는 모더니즘 소설미학에서도 계속되었던―'현실의 언어-예술적 형상화인 소설'의 본질 즉, "언어적 형상화를 통해 이루어지는 현실 규정과 현실 창출의 문제"(das Problem der Erfindung und Bestimmung von Wirklichkeit)란 소설미학적 테마에 주안점을 두어 90년대 출간된 이들 작품에 이루어져 있는 '소설적 형상화'를 살펴본다. 이들 관찰대상의 작품에서 '형상화하는 문학적 공간으로서 소설세계'(소설 쓰기 양식)를 살펴보는 근거는 말할 필요도 없이 모더니즘적인 소설이건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소설이건 간에 어떻든 '문자 매체를 가지고 이루어진 예술적 형상화'라는 테마에서는 벗어날 수 없다는 시각에 근거하고 있다. 그리고 "현실의 반영으로서 소설적 형상화"가 불변이라면, 양자간의 차이는 일반적으로 '문화 사회적 변화양상의 현상'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찰을 위해 그리고 그 방대한 연구범주를 제한하기 위해, '사실과 허구간의 줄다리기로서 꾸며낸 이야기' 또는 '현실의 반영으로서 현실의 언어적 형상화'라는 소설, 즉 '현대' 소설의 본질과 기능 규정에서 볼 때, 특히 "심미적 인식과정의 도구장치로서 소설"(Roman als asthetisches Erkenntnisinstrumentarium)의 기능에 관찰의 초점을 맞추어 제한하고자 한다. 따라서 '독일 포스트모더니즘적 소설'이란 어떤 것인가 구체화하는 작업에서는 "심미적 인식과정의 도구장치로서 소설"이라는 소설적 형상화의 문제를 중심으로 살펴 본 독일 '모더니즘' 소설미학과 '포스트모더니즘' 소설미학의 차이점을 중심으로 '독일 포스트모더니즘 소설미학'의 핵심을 부각시킨다. 마찬가지로 한국 소설문학에 대한 관찰의 경우에서도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소설'로 등장한 작품들이 담고 있는 소설문학에서의 질적 변화들, 곧 80년대 및 현 90년대 소설문학의 특성을 이러한 시각에서의 '소설적 형상화의 문제'를 중심으로 하여 살펴보며 '포스트모더니즘적 소설'로 대두한 작품들의 실체란 과연 어떤 것인가를 인식하는 데에 연구의 주안점을 둔다. 본 연구의 셋째 단계의 작업 "III. '포스트모더니즘 소설문학'의 실체는?"에서는 한국 포스트모던 소설과 독일 포스트모던 소설에서 드러나는 차이 또는 일치점을 구체화하여 한국 포스트모던 소설, 결과적으로 '한국적' 포스트모던 소설의 본질적인 실체(Substanz)의 이해에 이르는 시도가 이루어진다. 이것은 반드시 독일 '포스트모더니즘 소설미학'을 출발점으로 하여 이루어지는, 곧 양쪽의 '포스트모던 소설'에 대한 단순한 비교관찰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외국 것과의 비교 이전에, 한국 (90년대)소설 문학 자체로서의 관찰이 이루어질 뿐 아니라 전체적으로 '모더니즘적 소설'과 '포스트모더니즘적 소설' 양자간의 미학을 구분해주는 변별점을 찾아, 한국에서 '포스트모던 소설'이란 어떤 것인가 구체화하는 데에 그 주안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찰작업의 의의는 문학 체험, 곧 '문학텍스트의 독서, 관찰 및 평가'를 통해 우리 문학에 대한 '참다운' 인식은 물론 외국문학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또는 이루어지는 우리 문학의 풍부화를 위한 단초들을 발견하려는 데에 있겠다. I. '독일 포스트모던 소설 문학'에 관한 관찰 -모더니즘 소설미학과 포스트모더니즘 소설미학의 분기점은? 0. 서론:독일문학에서 포스트모더니즘 문학 수용의 전개 과정 및 현황 독일의 경우, 포스트모더니즘의 경향을 문예학 분야를 중심으로 말해 볼 때, 현 90년대 중반에 와서는 독일 서적시장을 중심으로 한 문학비평계에서는 물론 문학사에서도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을 진지하게 평가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현상이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것이 아니기에 그것이 어떻게 벌어지게 되었는가 하는 맥락은 이해하기도 어렵고 그에 관해 서술하는 것은 더욱 어렵겠지만, 앞으로 전개되는 '독일 포스트모던 소설 문학'의 관찰을 위한 이해의 전제조건이 되는 선지식(先知識)을 위해 독일문학에서 포스트모더니즘 문학 수용의 전개과정 및 상황을 간략히 개관해 본다. 이 개관은 독일 '현대 소설미학'의 변화과정도 드러낼 것이다. 포스트모던 문학(Postmoderne Literatur)이 독일문학에 깃들기 시작한 것은 60년대로 잡을 수 있겠다. 미국의 몇몇 작가 및 비평가들의 보고문에 따르면, 모던 문학이 쇠진되면서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이 독일문학과 최초로 접촉된 시기는 정확히 1968년으로 지적해 볼 수 있다. 그 해에는 프라이부르크에서 열린 레슬리 피들러(L.Fiedler)의 강연이 있었다(강연 테마:"The Case for post-Modernism"). 1967-68년 이 시기의 독일문학에서 이러한 포스트모던적인 면모(postmoderne Ansatze)를 풍기는 문학이라고 볼 수 있는 것들로는, "미국 시(Lyrik)의 영향을 받은 브링크만(Rolf Dieter Brinkmann, 1940-1975)의 문학적 작업들"(vgl. 흑색 리얼리즘 "Schwarzer Realismus"), "페터 한드케(Peter Handke, 1942-)의 문학 이론적인 글들"―한드케의 1976년 이후의 작품들은 물론 더 이상 포스트모던 문학과 연계되어 있다고 보기 힘든 것들이다.―그리고 클라우스 호퍼(Klaus Hoffer, 1942)의 [그라즈에서의 시학-강의들](Grazer Poetik-Vorlesungen) 등을 들 수 있겠다. 이러한 문학의 움직임은 미국문학의 번역, 곧 영미문학의 번역이란 우회적인 간접 통로를 거쳐 이루어졌으며, 이 시기의 독일문학은 그런 대로 그것의 "철학적으로 심오하고 진지하며 육중한 특수 양상("Sonderwege der tiefbodigen Seelengrubler")을 벗어나, 바로 이러한 문학 성격으로부터 해방되는 계기를 얻게 되었다. 1967-68년 이 시기의 독문학에서 포스트모더니즘적인 문학 부류의 것으로 대표될 수 있는 걸작품들("Meisterwerke postmoderner Haltung")로는 다음의 3편을 들 수 있겠다. (1) 볼프강 힐데스하이머(Wolfgang Hildesheimer, 1916-)의 소설 {마르보트}(Marbot, 1981), (2) 클라우스 호퍼(Klaus Hoffer, 1942-)의 장대하고 빼어난 소설 {비어레쉬의 경우}(Bei den Bieresch 1, 1979), 그리고 (3) 게롤드 쉬페트(Gerold Spath, 1939)의 장편소설 {콤메디아}(Commedia, 1980; 요약판 1984).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자세의 분위기는 독일 소설문학에서도 변화("das pure postmoderne Ereignis")를 감지하게 했으니 예컨대, 소설 줄거리로서의 이야기들(Geschichten)이 중복되어 겹쳐져 읽히는 방식이, 그리고 그것들은 마치 먼저 썼다가 지운 글씨가 나중에 쓴 글씨 밑에 투명하게 보이는, 반복해서 사용한 양피지(Palimpsest)처럼 보이는 그런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어, 이런 방식의 소설들은 전통적인 소설 읽기에 익숙한 일반 독자들에게는 물론 혼란스러운 것("Methode der Verwirrung")이었다. 또한 "포스트모더니즘적 자세의 유희유형"(postmoderne Spielarten)도 독일어권 문학에 스며들어갔고, 이에 대한 독일 문학에서의 참여 역시 점점 확대되어 나갔으며, 포스트모던 문학은, 소설적 형상화에서 특히 인용, 몽타주 등의 '예술적 형식 수단'이 이미 "국제적으로 알려진 수단의 수준"에 달하게 된 그런 문학 분야에서는 의심할 여지없이 "미래의 문학"으로 부상했다. 그리고 (인용, 몽타주 등) 이런 방식의 문학적 형상화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귀감 역할을 한 것은 움베르토 에코였다. 한편, 이 시기의 포스트모던 소설문학('문학적 형상화')에서의 '독자'의 문제도 포스트모던 특징을 결정하는 단초로서 부각되었다. 특히 "작가와 독자의 관계(die Beziehung zwischen Autor und Leser)"를 과거의 문학에서와는 달리 아주 밀접하게 형상화하는 것도 그 특징이었다. 이러한 수용사적 맥락에서 볼 때 독일에서는 60년대 그 이후, 프랑스, 영국 등 유럽 다른 나라의 문학권에서와 마찬가지로 포스트모던 소설문학이 아닌 다른 양상으로 문학적 활동이 전개되어 나갔지만(예:80년대의 독일 흑색 리얼리즘 Schwarzer Realismus), 80년대 중반 독일에서의 그것은, 앞에 서론에서 언급했듯이, 프랑스인들로부터 시작되어 세계를 휩쓸게 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유행의 첨단에 다시 부응하게 된 수용현상이라 볼 수 있겠다. 한편, 유럽 '문학' 분야에서 전개된 60년대의 포스트모던 소설문학을 고려해 본다면, 우리 한국 문학에서의 수용은 30년의 시간적 간격을 안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독일 소설문학('소설미학')에서의 전개과정, 곧 변이양상들을 위에 언급한 독일문학에서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수용상황을 중심으로 간략히 요점만 간추려 개관해 본다. (소위)모더니즘 미학적인 소설문학의 발전사에서 몇 가지 현상들만을 중심으로 살펴보아도, 즉 12/13세기 생겨난 소설 쟝르 "Roman"의 발전사적 과정에서 '현대'에 와서 드러나는 획기적인 변화 현상들을 지적해 볼 수 있다. "꾸며낸 이야기"(Fiktion)라는 소설의 본질적인 한 측면('이야기')을 중심으로 본다면, 예컨대 1900년대 초의 토마스 만(1875-1955)의 "예술가소설"(Kunstlerroman; Kunstlernovelle)에서 볼 수 있듯이, 거기서는 (전통 소설미학에서의) "이야기"가 뒷전으로 물러나고 '예술작품 속에 제시된 예술의 문제'(Infragestellung der Kunst im Kunstwerk)라는 소설주제가 부각되는 것도 그러한 특징 중의 하나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소설가'(예술가)가 주인공인 소설작품 속에서 문학('예술')에 관한 문제들을 구체화해나가는 식의 창작소설에서 '(문학)예술이란 무엇인가'하는 이론적인 테마를 소설의 주제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또는 소위 "내적 의식의 흐름"의 형상화로서 소설들이 구현한 "이야기를 벗어난 성격(탈-이야기; Entfablung)의 소설", 그리고 프랑스 50-60년대의 "누보 로망"(또는 Anti-Roman)의 경우, (한국에서 이미 수용·논란된) 70년대 미국문학에서의 "메타 픽션", 80년대 독일의 리얼리즘문학, 즉 새로운 리얼리즘("Neuer Realismus" 또는 "Schwarzer Realismus", sog. Kolner Schule)의 소설들을 생각해 볼 때, 현재 우리가 접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의 특성은―일반적으로 이에 관해 언급·지칭되고 있는(소위 포스트모던 소설 특징들) "상호텍스트성, 탈장르화나 장르확산, 자기반영성(Selbstreflexion), 그리고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 등에, 특히 모더니즘 소설과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을 구분하는 가능성으로서 "탈서사(성)"과 관련한 "story의 문제"를 생각해 볼 때, 모더니즘의 소설미학에 대한 이해를 떠나서 찾아보기 힘든 것으로 보인다. 역시 포스트모더니즘 소설도 그것이 '언어-예술적 형상화'인 한―결국 소설이란!―과거의 소설미학에 따라 이루어질 수밖에 없으며 또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소설이해에서도 그러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독일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의 특성을, 문학적 형상화의 수단(sprachliche Gestaltungsmittel)을 중심으로 하여 모더니즘 소설미학과 포스트모더니즘 소설미학간의 변화양상들을 찾아보려던 본 연구의 관찰시각은 곧 문제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이 점은 특히 문학적 형상화 수단들을 중심으로 한 양자 간에서 차이('변화 양상')는, 예컨대 모더니즘미학의 "다다이즘" 및 "구체시(Konkrete Poesie)" 등 詩 분야에서 쉽게 발견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독일 문학계에서는 의외로 詩문학에서 보다는 小說문학에서 포스트모더니즘적인 면모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데에서도 그러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으로부터 독일 현대 미학에서 주축을 이룬 문학적 예술수단들(stilmittelartige Umkleidung), 예컨대 (상징적인 의미를 전달하는) 의미상(意味像; Sinnbilder)들로서 알레고리(Allegorie), 심볼(Symbol), 메타포(Metapher), 유머(Humor), 아이러니(Ironie), 새타이어(Satire), 패러디(Parodie), 패러독스(Paradox)……등등은 포스트모더니즘 미학에서도 문학적 형상화의 수단으로 머물러 있는 것도 틀림없는 것 같다. 1900년대 세기말의 유럽 공동적이었던 예술적 조류, 특히 아방가르드(Avantgarde) 예술들에서 구체화되었던 문학적 형상화의 수단들 예컨대, 키치(Kitsch), 인용(Zitate), 몽타주(Montage), 콜라주(Collage), 스트레오-타입의 재생양식(Klische) 등등, 일반적으로 사전적인 의미에서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적 '문학적 형상화의 수단들'로 부각되고 있는 "패스티시"(das Pastiche)나 "트라베스티(Travestie)" 등도 현대 미학에서 형상화의 수단으로 사용된 것으로, 다시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에 대두, 반복되고 있는 셈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기에 (Ihab Hassan의 지적처럼)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명칭을 가지고 대다수의 비평가 들도 "아방가르디즘(Avantgardismus)", "네오 아방가르디즘(Neoavant- gardismus)" 또는 이런 동일한 현상을 그저 "모더니즘"이라고 지칭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일 것이다. 다음에서는 90년대 출간된 독문사 및 그 밖의 문학비평 이론서들에서 주로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소설로 다루고 있는, 이 논문의 서론에서 제시한 크리스토프 란스마이어(Christoph Ransmayr, 1954-), 인고마 폰 키저리츠키(Ingomar von Kieseritzky, 1944-), 보도 쉬트라우스(Botho Strauß, 1944-) 등 3작가의 소설작품들을 '독일 포스트모던소설'을 대변하는 것으로 관찰해 본다. 연구관찰대상인 이들 소설작품에 관한 연구는 현실의 언어-예술적 형상화(여기서:'소설적 형상화')에 초점을 맞추어 이루어진다. 따라서 본 연구는, (이 논문의 서론에서 언급한 바) '사실과 허구간의 긴장관계', 또는 '현실의 반영'으로서 '현실의 언어적 형상화'라는 소설, 즉 '현대' 소설의 본질과 그 기능 규정에서 볼 때, 모더니즘적 소설이건 포스트모더니즘적 소설이건간에 어떻든 '언어(문자)매체를 가지고 이루어진 예술적 형상화'라는 이 테마에서는 벗어날 수 없다고 보는 시각에서, 모더니즘 소설미학과 포스트모더니즘 소설미학 양자간에서의 차이를 찾아보는 관찰을 "심미적 인식과정의 도구장치로서 소설"의 기능에 초점을 맞추어 제한하고 있다. 그것들의 소설적 형상화에서 드러나는 양자간의 차이, 소위 독일 소설미학을 중심으로 본 모더니즘 미학과 포스트모더니즘 미학의 변별 표지를 찾아 구체화해 본다. 1. ('역사성')이야기의 소멸 -크리스토프 란스마이어(Christoph Ransmayr)의 마지 막 세계}(Die letzte Welt, 1988)를 중심으로 소설적 형상화에서 "('역사성')이야기의 소멸(der Verlust der Historizitat)"이란 이것이 ('역사')이야기의 부재나 또는 소설의 이야기 줄거리(Fabel; Handlung)를 없애버린 소설이 아니라 전통적인 소설에서의 이야기가 제거된 것(die Liquidation der Geschichte)이란 의미에서, 즉 그런 것들이 도려내어진 동공화(Aushohlung) 형태의 '소설'를 상상해 본다면, 포스트모더니즘적 소설에서의 "이야기의 소멸"에 접근할 수 있겠다. 여기서 "('역사')이야기(Geschichte)"는, 모더니즘 소설미학에서도 그렇듯이, 소설의 '(이야기)줄거리'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간) 역사'를 포함하여 또한 '歷史'와 '小說' 이 양자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실'과 '현실'(Wirklichkeit)을 당연히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이야기의 종말"은 방금 언급한 이것들 모두의 소멸을 내포하겠다. 이 테마는 (독일)소설미학의 전통에서 내내 지속되고 있기에 이것을 중심으로 한 포스트모더니즘적 소설의 특성을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다음의 모더니즘 소설미학에서의 입장들과 비교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예컨대, (1) 누보 로망(nouveau roman; 1950년대 프랑스문학에서 새로운 소설적 형태에다 "앙티 로망", "시선파", "子正同人", "掃蕩小說", "白色小說", "反 혹은 前 小說" 등등의 여러 명칭들이 부가되었던 새로운 소설); (2) 80년대 독일의 (sog. Kolner Schule) "새로운 리얼리즘"(또는 "흑색 리얼리즘")의 소설들, 특히 알렉산더 쿠루게(Alexander Kluge, 1932-)의 구상안(콘셉트) "(역사에 대항하여 이루어지는) 反-이야기"(Gegengeschichte); (3) 헤르만 브로흐(Hermann Broch, 1886-1951), 로보트 무질(Robert Musil, 1880-1942) 등의 후기 현대성(Spatmoderne)의 입장; (4) 현대의 예술적 아방가르드(eine kunstlerische Avantgarde der Moderne); (5) 카프카(Kafka, 1883-1924), 브로흐를 비롯하여 페터 한드케(Peter Handke, 1942-)에 이르기까지 드러나는 "자아상실과 현실상실의 증후근(Syndromen des Ich- und Wirklichkeitsverlustes in Krisensituation)"; (6) 볼프강 힐데스하이머(Wolfgang Hildesheimer, 1916)로부터 크리스토프 란스마이어(Christoph Ransmayr, 1954- )에, 그리고 페터 바이스(Peter Weiss, 1916-1982)로부터 우베 욘손(Uwe Johnson, 1934-1984)에 이르는 소설문학에서 "('역사성')이야기"의 테마 등등, 이러한 현상들을 소설적 형상화 문제에서 "이야기의 소멸"의 테마를 중심으로 살펴본다면, 모더니즘 소설미학과 포스트모더니즘 소설미학의 차이가 드러날 것이다. 지면관계상 다 논의할 수 없기도 하지만 일단 이러한 토론의 바탕을 위해 포스트모더니즘적 소설의 한 예로서 크리스토프 란스마이어의 {마지막 세계}(Die letzte Welt, 1988)에 드러난 "('역사성')이야기의 소멸"의 테마를 다음과 같이 구체화해 본다. {마지막 세계}(1988)의 '이야기 줄거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요약해 본다면, 그것은 역사적 인물인 (기원 후 8세기 Augustus 황제에 의해서 그의 작품 {메타몰포제(Metamorphoses)} 때문에 추방당한 로마의 시인 "오비드(Ovid)"의, 그리고 그의 사라져버린 책({Metamorphoses})의 흔적을, 오비드의 친구 (소설의 화자로서)코타(Cotta)가 찾아나가는 복잡다단한 탐색 작업의 형상화이다. 그는 사라져버린 책의 수수께끼 같은 기기묘묘한 사인(sign; Zeichen)들을 (소설적 형상화에 묘사된) 像들(Bildern), 인물(Figuren), 기묘한 만남(Wunderbare Begegnungen) 등등에서 부딪히게 되지만, 맨 마지막에는 (소설의 화자로서)코타 자신도 "변형"(Metamorphoses)의 비밀에 가득찬 알 수 없는 비-현실 세계로 사라져버리는 듯 "마지막 세계"의 해명 자체가 다시 문학(Literatur)이 되어버리는 인상을 남기는 것이 전체적인 소설의 분위기이다. 이미 주어진 텍스트, 즉 {메타몰포제}와 관련하여 소설적 형상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자신의 문학작품과 함께 사라져버린 역사적 인물 "오비드"를 재구성하는 화자도, 소설의 시작점인 "마지막 세계"의 해명(Auslosung)자체, 즉 역사적 인물 "오비드"를 재구성하며 사라진 책을 찾는다는 목표 자체도 증발해 버린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 소설의 화자나 주인공으로서의 주체가 사라지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남아 있을 수 있는 '어떤 의미의 흔적'이란 흔적은 가능한 한 완전히 지워져버리는 그런 분위기를 낳는다. 이러한 소설적 형상화야말로 바로 (독일)포스트모더니즘적인 "이야기의 소멸"을 낳고 있다고 본다. 여기서 소위 "('역사성')이야기의 소멸"이나 "이야기는 죽었다(Die Geschichte ist tot)"라는 "이야기의 종말" 등은 일반적으로 소설에서의 줄거리로서의 이야기가 부재하는 데서 발생하는 것만은 아니다. 이것은 모더니즘 소설미학에서도 지속되었듯이 '현실의 언어적 형상화인 소설'의 본질, 즉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는 현실 규정과 현실 창출의 문제"와 결부되어 (본 연구에서는 다 다루고 있지 않는 테마들) 예컨대 "상상적인 것 속에 사장된 이야기의 진행"(Verlauf einer imaginaren, abgestorbenen Geschichte)"의 문제, 미디어화한 사회에서 이 테마가 새로운 양상으로 대두되는 "시뮬레이션(Simulation)"(vgl. 특히 Jean Baudrillard의 이론), "실체 이탈(Substanzentzug)"의 문제 등등이 근본적으로 논의되어야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산문작업에서 또 다른 새로운 방식으로 실험·유희해 나가는 독창성이 드러날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마지막 세계}에서의 이 테마에 해당하는 한 측면만을 간단히 지적해 본다면, "기표 연결(Signifikantenkette)의 분열"을 통해서, 즉 인과론적이거나 논리적인 질서의 건너쪽에 놓인 사물의 순수한 질료성(die reine Materialitat)만을 감지하는, 정신분열식의(schizophren) 상태로 밀쳐나는 이러한 기표연결의 분열을 통해서 전통적인 의미연관성(Bedeutungszusammenhange)의 지양을 부각시키는 데서 '이야기의 사멸(死滅)'이 두드러지게 된다고 본다. {마지막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탐색작업의 유희는, 즉 화자가 찾아나가는 곧, 재구성해나가는 형상화의 구조는 탐정소설의 모델에 비추어 볼 때 그런 '긴장도'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이 소설의 작가 란스마이어는 그의 소설을 가지고 일반적으로 이해 통용되는 가공의 이야기(gangige Mythen)나 대중적 인기를 누리려는 그런 문학적 형태를 만들어낸 경우는 아니다(vgl. Unterschied zum Lese-Erfolg Suskinds!). 이러한 면모는, 다음과 같은 방식의 이야기 해체에 근거하는 것 같다. 모더니즘 소설에서는 일반적으로 테마나 또는 내용적인 것, 즉 소설의 주제가 예컨대, 주인공을 중심으로 하여 어딘가로 향해 뚜렷이 얽혀짜이고 집중적으로 응집되는 그런 의미에서의 "집중화하는 실체화"가 이루어진다. 물론 이러한 응집성의 면모는 소설 {마지막 세계}에도 전반적으로 내재하지만, 다만 그렇게 진행되는 가운데서 결과적으로, 무언가를 구성하는―모더니즘 소설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소설의 진행·흐름과정에서 주축이 되고 있는―구심점을 향한 끈이 해체 또는 회피되고 있는 것 같다. 그리하여 "이야기의 청산"이라고 볼 수 있는 그런 어떤 상태가 이 소설에서 구성되고 있다. 그러나 주인공을 중심으로 긴장되어 팽팽하게 진행되는 어떤 구성점을 향해 응고되어나가는 진행과정이 끊어져버려 스톱되는 이러한 분위기의 소설적 형상화가, 일반적으로 우리가 현대 소설에서 보아 온 '열린' 자세의 그것과 같은 것이 아닌지 싶다. 그러나, {마지막 세계}에서 이루어진 이러한 인상의 소설적 형상화는 소설의 '끝'이나 (이야기의)'해답'(또는 완성)을 향해 달려온 종점이 열려있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소위 미해결 또는 미완성으로 열려져 있는 소설의 경우―그것은 예컨대, "독자에 의해서 완성된다는 수용미학적 시각"에서도 그렇지만―어떻든 그런 대로 어딘가를 향해 고정된 방향성을 안은 채 무언가를 가리키면서(예:유토피아) '열린 것으로서의 끝'을 또는 미완성으로서 완성의 성격을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이 포스트모던 소설 {마지막 세계}는 이러한 '열린' 자세의 것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낳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식으로 즉, '포스트모던적인 열린' 상태에서만이 포스트모던 소설의 특징으로서의 "이야기의 소멸"이란 주제가 언급될 수 있겠다. 란스마이어의 소설적 형상화에서 "이야기(Geschichte)"는 신뢰하고 있는 모든 역사적 발전의 질서에서 빠져나와 해체되고, 그렇게 되어 과거의 이야기가 곧 현재의 이야기가 되어버리는 상태를 낳는다. 바로 이런 양상으로 '열린' 상태의 것을 각인해 주는 것이 "('역사성')이야기의 소멸"이다. 그렇다고 해서 작가 란스마이어가 "이야기(소설) 쓰기"라는 소설적 형상화의 유희만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추방되어 사라진 "오비드"의 책(문학텍스트)과 연결하여 "지시관계의 (조작적인)유희"(Referenz-Spiel)를 벌이는 풍성하고 그지없이 유려한 문학적 형상화로 가득찬 소설적 형상화에서도 그렇지만, 소위 "패스티시-언어(Pastische-Sprache)" 등, 곧 이런 문학적 형상화의 유희가 모더니즘적인 것과 다른 질의 체험들과 여러 양상의 형태들(Formzuge)로 각인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작가 란스마이어가 그의 소설을 가지고 이런 저런 문학적 형상화의 유희에 그치는 그런 유희만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이런 식의 소설적 형상화, (소설 마지막 부분에서의 텍스트)"미친 사람들을 위한 유희(… ein Spiel fur Verruckte)"에서처럼 부질없는 '글쓰기 작업의 유희'인가 하는 짙은 인상을 남기는, 바로 그런 형상화의 유희야말로 가장 "포스트모던 문학적인 경험과 형식적인 면모"를 담고 있는 것이다(vgl. "상상적인 것 속에서 사장된 이야기"의 문제). 그러기에 텍스트와 텍스트들간의 "지시관계의 유희"라는 이런 양상의 소설 구조에 근거하여 독일 문학비평가들이 란스마이어의 이 작품 {마지막 세계}(1988)를 "포스트모던 사고의 ('역사')이야기 소설(Geschichtsroman des postmodernen Denkens)"이라 부를 수 있는 경우라고 보는 것은 적중한 평가이기도 하다. 2. "주체의 종말(Ende des Subjekts)" -인고마 폰 키저리츠키(Ingomar von Kieseritzky)의 소설작품들을 중심으로 포스트모던 소설(또는 사고)의 특징으로서 언급되는 "주체의 종말(Ende des Subjekts)"이란 주제에서, 여기서 '주체'는 모더니즘 소설미학의 "예술적 형상화(kunstlerische Darstellung)에서 창조적 주체 역할"을 하던 '주체', 따라서 "이성적으로 뛰어난 시민적 단자('모나데')로서 주체(Subjekt als vernunftbegabter burgerlicher Monade)"의 종말을 가리키겠다. 이것은 예술적 형상화에서는 "창조적 주체와 그의 예술에서의 상호연관성에 대한 견해"를, 즉 예술적 개인 양식(개성적인 문체)의 독창성이나 이러한 주체의 정신병리학적(psychopathologisch) 감정구조의 형상화 가능성을 청산한다는 것을 의미하겠다. 이것은 "기표 연결(Signifikantenkette)의 분열"과 함께 즉, "주체의 종말"로 인해 "기표 연결의 분열"이 일어나듯 양자가 연결되어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기도 하다. "주체의 종말" 테마와 관련하여, 앞에서 다룬 작가 크리스토프 란스마이어의 소설 {빛나는 멸망}(Strahlender Untergang, 1982)과 {얼음의 공포와 암흑}(Die Schrecken des Eises und der Finsternis, 1987)에 형상화된 "주인공의 사라짐"에 관해 언급해 볼 수 있겠다. 이 작품들도, 어딘가로 증발해버린다기보다는 소멸·해체되어버리는 그러한 소설 구성을 보이는 경우로, 이 소설적 형상화에서는 북극의 얼음 벌판에서 사라진 오스트리아-헝가리 북극탐험대의 이야기를 다시 북극탐험여행을 떠나는 화자로서 재구성되는데, 사라진 북극탐험대의 흔적을 찾아 헤매는 화자도 모든 인간적인 생명을 소멸시키는 북극의 얼음 벌판에서 사라진다. 이 두 편의 소설에서 이루어진, 사라진 탐험대의 여행을 재구성하는 화자도 탐구여행에서 자기 소멸로 해체되는 그런 형상화가 위에서 다룬 {마지막 세계}에서와 같이 이루어지는데, 이러한 소설적 형상화에서는 이야기의 해체('역사성의 상실')가 이루어지면서 동시에 소설적 형상화 자체(곧 '소설작품')는 이야기('역사')를 벗어나는 "탈-역사(das Post-Histoire)의 메타포"가 되고 있다. 포스트모던적인 소설들에서 "주체의 종말" 테마는 인고마 폰 키저리츠키의 경우에서 또 다른 아주 독특한 양상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의 소설작품들에는―본고의 시작에 제시된 {예술가를 위한 해부학}(1989); {재난(災難)의 책(이야기)}(1988); {여성 플랜. 남성을 위한 습작(연습곡)}(1991)―'전형적으로 포스트모던'이라고 볼 수 있는 면모들이 부각되고 있다. 비평가들을 매혹시키기보다는 혼란시키고 있다고 볼 수 있는 키저리츠키가 만들어낸 새로운, 곧 '포스트모던'적인 창작 유형(Machart)의 특성을 풀이해 볼 수 있는 몇 가지를 지적해 보면: (1) "온전히 기능-주체들"(Funktions-Subjekte)에 불과한 작중인물들; (2) "서사적 유희-체계들(epische Spiel-Systeme)의 구상안"의 투영; (3) "계몽의 정지(Stillstand der Aufklarung)"와 "문화적인 규범들의 평준화(균등화;Einebnung)" 등으로, 여기서는 지면관계상 이 테마들만을 중심으로 하여 그의 작품들을 간략히 살펴본다. (1) 인고마 폰 키저리츠키의 산문작품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더니즘적 소설미학에서의) '개성', 심리적으로 동일시할 수 있는 '정체성', '개성적인 것' 등의 질(質)에 전혀 반대되는 경우들이다. 소설의 작중인물들은, 원인-결과로 연결되어 있는 개개의 접목(Fugung)의 어떤 것이든 모든 끈을 단절하고, 또한 합리적인 근거해명의 연결고리를 시종일관하여 끊어버려, 사리에 맞지 않는 언행으로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것(Absurditat)으로 전복되는 상태에 이를 정도로까지 보이는, 마치 회전목마(Karussel)와 같은 그런 어떤 상태에서 뱅글뱅글 돌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이러한 소설 인물들은 모더니즘 소설미학에서의 "창조적 주체와 그의 예술에서의 상호연관성에 대한 견해"를 완전히 청산해버린 경우이지만 그 정도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한 개체(개인)를 "요점만 똑똑 끊어 말하는 식의 그런 사람(Stichwortgeber)"으로, 또 그런 식의 대화를 하는 "유희적인 인물(Spielfigur)"로 만들어버리는 동공화(Aushohlung)의 현상마저 이루어져 있다. "온전히 순수한 기능-주체"로서 또는 "요점만 똑똑 끊어 말하는 그런 사람"으로서의 소설 인물들은, 앞에 설명했던 현대 소설에서의 "이야기의 소멸"의 주제와도 연결된다. 이들은 거기서 언급한 구심점이나 지향점 없이 열려있는 이야기의 진행처럼 "파편화(미완성 단편화; Fragmentierung)와 불연속성(Diskontinuitat)"의 분위기를 부각시키며, 또한 "기표 연결의 분열"과 함께 대두되는 "주체의 종말"도 일어난다. 이러한 유형의 소설 인물들은 모더니즘 소설미학에서의 "창조적 주체"와는 전혀 다른, 어쨌든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소설미학에서에서의 "예술적 주체"라고 볼 수 있겠다. 키저리츠키 스스로 작가로서의 자신을 "포스트모니적인 창작 구성의 위상(Schreibkonstellation)"에 소속시키고 있기도 하지만, "실제로 키저리츠키 만큼 요즘 유행하는 '글을 쓰고 있는 주체(개성)의 사라짐'에 대한 견해를 제대로 소화하여, 더욱이 엄청나게 수많은 텍스트들로 흘러 넘치는 그런 텍스트작업을 마스터하여 이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시종일관 작가적인 작업의 실제('창작')에 옮겨 놓았던 작가는 없을 것이다."라는 비평가들의 지적은 맞는 말이다. (2) "서사적 유희-체계들(epische Spiel-Systeme)의 구상안"의 투영: 모더니즘 소설미학에서 '인간의 이야기'가 이것들로 성립되고 있는 바로 그 요소들인 '합리적인 의미' 및 '정향(오리엔테이션)의 견본'이 체계적으로 산산 조각나 분쇄되는 "서사적 유희 구상(epische Spielentwurfe)"―이것은 드러나지 않은 채 감추어진 해체 구성적('탈구성적') 에너지(Deskonstruktionsenergie)로 그들의 허구화된 양상들과는 상관없이 그때그때 연결되고 있는 공동적인 모멘트가 된다. (3) 키저리츠키의 소설작품들에서 이루어지는 "주체의 종말" 테마를 쉽게 전달하기 위해 (우리 모두가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것의 전형적인 예인 텍스트와 텍스트들이 상호 연결되어 이루어지는 관계들(intertextuelle Bezuge)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을 중심으로 이야기해 보자면, 이 작품들에서 상호텍스트성의 유희는 '코미쉬하게'(komisch) 웃기는 식으로 뒤틀어버리는, 그래서 우리가 이상스럽고 진기한 듯 한참 멍하니 바라보게 되는, 풍자나 패러디 식으로 뒤엎어버리는 결과의 분위기를 낳고 있다. 예컨대, '인용' 작업에서도 상호텍스트성의 문제를 생각해 볼 때, 남의 것을 가져오고 옮겨오는 '인용한다'는 심부름꾼의 "통속적이고 비천한 직접성"에서 "객관화하는 학문적 글쓰기 식의 서법(Diktion)"에 이르기까지 여러 상이한 방식으로 언어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유희-구상"은 모더니즘적인 것과 몹시 다른 분위기를 낳는다. 이를 통해 소위 "계몽의 정지"와 그리고 결과적으로 "문화적인 규범들의 평준화"가 생겨나 그런 분위기 속에서 전달된다(vgl. 모더니즘적인 형상화에서 인용, 몽타주를 비롯한 패러디, 아이러니 등의 '지적' 분위기와의 차이!). 이러한 시각에서 비평가들은 키저리츠키의 산문작품들을 "이단규문의 종교재판(Autodafe)처럼 연출되고 있는 폭죽놀이의 스펙타클(Feuerwerkspectakel)"이라 평한다. 괴상하게 익살맞고 우수꽝스러운 그런 착상들과 그로테스크한 에피소드들이 이곳저곳에서 터져나가는 그런 식의 "폭죽 작품"이 안고 있는 '미식가의 맛(das Kulinarische)'은 모더니즘적인 것에 대비되는,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적인 특성이라 볼 수 있는 "가벼움(Leichtigkeit)"에 속하는 어떤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시각에서 풍자나 패러디, 그로테스크 등의 문학적 형상화들은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것과 모더니즘적인 것에서 그 질적인 면에서 또는 분위기에 있어서 뚜렷이 구분되는 차이를 지니고 있다고 본다. 그야말로 모더니즘적인 그로테스크와 구별되는 즉, 포스트모더니즘적 그로테스크의 분위기를 잘 드러내 주는 문학적 형상화는 바로 키저리츠키의 {예술가를 위한 해부학}(1989), {재난(災難)의 책(이야기)}(1988), {여성 플랜. 남성을 위한 습작(연습곡)}(1991)에서 직접 찾아 볼 수 있다. 3. "서사적 자아성찰성"(epische Selbstreflexivitat)의 문제 -보도 쉬트라우스의 젊은이}(Der junge Mann, 1984) 를 중심으로 "심미적 인식과정의 도구장치로서 소설"이라는 주제에서 '서사적 자아반영(성찰)'과 '인식'의 주제를 중심으로 모더니즘 소설미학과 포스트모더니즘 소설미학의 차이점을 보도 쉬트라우스(Botho Strauß, 1944- )의 {젊은이}(Der junge Mann, 1984)에 드러난 다음 몇 가지 테마에서 논해 볼 수 있겠다. (1) 꿈과 팬터지들이 발견해 나가는 여행길이라고 표현해 볼 수 있는 '인식에로의 길'(Entdeckungsreise)로서 포스트모더니즘 사고의 교양소설(?)로서의 소설적 형상화인 {젊은이}(1984); (2) 서사적 혼합방식의 페치워크(ein episches Patchwork)에서 이루어지는 '문학의 인식 기능'(Erkenntnisfunktion von Literatur); (3) 소설 시간구조의 차원들에서 (TV 채널을 이리저리 바꾸는 접속 스위치 장치와 같은) "전환 방식(Schaltkreis)의 형식"; (4) '빈 공간'을 향한 움직임의 계기(Moment des Leerlaufens)와 나선형의 열린 형상화의 형식들(spiralenformig offene Darstellungsformen)을 지닌 '서사적 자아반영(Selbstreflexion)의 움직임'; (5) "인식의 원칙으로서 변증법"을 보류하는 일단 정지의 자세; (6) "거대 형식(Großformen)"을 벗어난 (현재로선 우리가 전혀 인식할 수 없는) 에너지와 자극력에 따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성찰의 움직임(Reflexion). (1) 1984년 초판된 보도 쉬트라우스의 {젊은이}는 독일 수많은 문학비평가들이 평하듯이, ―독일 교양(발전)소설을 대변하는 낭만주의 작가―노발리스의 "{하인리히 폰 오프터딩겐(Heinrich von Ofterdingen)}과 같은, 또는 클라이스트의 {그륀네 하인리히(Gruner Heinrich)}에 비견되는 현대판 그륀네 하인리히("ein Heinrich von Ofterdingen, ein Gruner Heinrich der Moderne")로서 독일 교양소설의 전통에 연결되어 있는, '(소위)포스트모던 사고의 교양소설'이라 표현해 볼 수 있는 소설적 형상화로서 '인식에로의 길'을 형상화하고 있는 소설작품이다. 여기서는 모더니즘 소설미학에 준한 "심미적 인식과정의 도구장치로서 소설"의 테마에서도 그러하지만 무엇보다도 "교양소설"(Bildungsroman)에서 '자기 자신을 찾아나가는 인식과정이 소설적 형상화'라 볼 때, 곧 '문학의 인식기능'의 테마에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소설미학의 차이를 뚜렷이 찾아볼 수 있게 한다. 소설 {젊은이}의 시작과 끝은 전적으로 사실주의적인 소설 서술의 자세(Erzahlgestus)로 구상·투영된다. 소설의 주인공 젊은이 레온 프라흐트(Leon Pracht)의 "연극적 사명(theatralische Sendung)"을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테아터 경험이 많은 두 여배우들과 함께 쉬트링베르크(Strinberg)의 {율리 양(Fraulein Julie)}을 연출, 상연하고 스스로 연출가로 확고히 자리잡으려고 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복잡하기 그지없는 경험의 로정을 괴테의 {빌헤름 마이스터(Wilhelm Meister)}에서와 같이 '내면에로의 길'을 완성해 나간다. 5개의 커다란 장들에서―Die Straße(Der junge Mann); Der Wald; Die Siedlung (Die Gesellschaftslosen), Die Terrasse(Belsazar. Fabeln am Morgen nach dem Fest); Der Traum(Aus Ossias Skizzenbuch)―한 전개과정(Entwicklung)의 내적, 외적인 단계("정류장")들이 서술된다. 여기서 시간과 공간의 법칙성들은 그 효과(영향력)를 상실하며, 논리는 청산되고, 꿈과 팬터지들이 '발견해나가는 여행길', 곧 '인식에로의 길'을 규정해 나간다. 소설 마지막 장, 대략 20년 후쯤에 해당하는 시기로, 소설적 형상화는 다시 실재의 현실(Realitat)로 돌아와 끝난다. 이것은 소설의 주인공 레온(Leon)과 영화제작자 오시아(Ossia)간의 대화로 이루어지며, 이제 뒤돌아보는 가운데 시도되는 서사적 형상화 방식(epische Darstellungsweise)이 여기서 다시 반영·성찰된다. (2) {젊은이}의 이야기 구조 형식은 짤막한 토막이야기, 독백 적인 기록의 글들(monologische Aufzeichnungen), 보고문, 성찰들, 허구적인 서한문들이 유연성 있게 순서대로 차례차례 전개되는 구조로 얽혀짜여 있는 혼합형식(Mischform)으로, 소위 포스트모던 예술에서 자주 언급되는 "페치워크"를 이룬 "서사적 혼합방식의 페치워크"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다매체 시대의 사회에서 흘러 넘칠 정도로 수많은 정보(Informationsuberflutung)에 직면하여 '이야기하기(서술)의 어려움'에 관한 성찰을 개입시키면서,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할 근본적이고 기초적인 상황(die elementare Situation)마저 차지할 수 없는, 또는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는, 이를테면 '이야기 시작의 거점을 잃은 상황'에 처하게 된 화자의 입장도 반영되고 있다. 소설 {젊은이}에 이루어진 "서사적 혼합방식의 페치워크"는 작가 쉬트라우스의 "낭만주의적인 자기반영(성찰) 소설(Reflexionsroman)의 문학적 구상안"에서 표출된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쇼크로 가득찬 충격적인 꿈을 통한, 또는 꿈속에서의 변신(Traumverwandlungen), 비합리적인 것으로 개방되어 있는 급전환의 선회(Peripetien), 극(極)의 국면의 급전, 주인공의 운명의 격변, 전환점, 연극에서 카타스트로프에 앞서는 것, 신화적인 공포의 상(mythische Schreckbilder), 동화, 꿈, 미래의 상들과 대화의 단락들(Gesprachssequenzen) 등이 서로 뒤섞여 얽혀짜인 것이다. (3) 여기서 소설 시간구조 차원들의 얽혀짜임을 중심으로 관찰해 볼 때, 이러한 수많은 차원들은 (전등불을 껐다 켰다 하는 식의 또는 TV 채널을 이리 저리 바꾸는 접속 스위치 장치와 같은) 일종의 "전환 방식의 순환('Schaltkreis')"으로 이루어진다. 소설적 시간 구조는 "한 때와 지금 '현재'"간에서―TV 채널을 이리 저리 바꾸는 식으로―스위치 전환 방식의 장치로 연결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전환 방식의 순환"에서는 "합리적으로 기능·작동하는 현실상(Wirklichkeitsbild)"을 밀쳐내어 출축·억압하고 있다. 이 소설은 소설미학적 차원에서 볼 때 아직은 '문학의 인식기능'에 머무르는 그런 형상화 수단을 사용하여 (언어적)유희를 하는 경우이다. 따라서 쉬트라우스의 창작미학적 구성기획의 자세(poetischer Konstruktionsplan)는―독일 소설미학 차원에서의―'문학의 인식기능'이란 테마에서 여전히 '현대적인 것'에 토대하고 있지만, 문학적 형상화에 사용된 "서사적 혼합방식의 페치워크"로 탄생하는 '문학의 인식'에 있어서는 현대적인 소설적 형상화에서와는 다른 질적 차이를 낳고 있다. 문제는 (우선 텍스트 구조상으로) 이런 식의 얽어짜기나 또는 (마치 만화경을 통한 반사처럼 요지경 속으로 빠져드는 듯 수많은) "전환·순환의 장치"들이, 앞에서 {마지막 세계}(1988)의 소설적 형상화를 이루는 "패스티시-언어(Pastische-Sprache)"에 관해서 언급했듯이, '글쓰기 작업'에서 그저 단순히 (언어적으로) 유희하는 식으로 작동하지는 않는다는 데 있다. 물론 여기엔 다른 여러 역사적 형상화의 투영들(Darstellungsentwurfe)이나 형태적 모습들(Formzuge)을 가지고 얽어짜고 있기('유희') 때문에도 그렇지만, 이런 움직임('유희') 속에서 밀쳐내어 억압된 '현실상의 이면에서' 작가(Strauß)는 원래적인 고유한 현실(die eigentliche Wirklichkeit)을 예술적인 형상화 안에 포착하려, 또는 사라진·축출된 그것의 흔적을 감지해 보려고 좇아가면서 이루어지는 이 모든 것을 비롯하여, 이런 식의 '포스트모더니즘적' 문학적 형상화는, 아무튼 예술적 형상화에서 아주 진지하게 안간힘을 쓰고 있는 자세에서도 드러나듯이, 그저 단순히 유희하는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며 예술을 위한 예술 식의 '유희를 위한 유희'(Spiel als Spiel)만도 아닌 것임은 분명하다. 이러한 "서사적 혼합방식의 페치워크"에서, 현대 소설미학 차원에서와 다른 것만을 간단히 지적해 본다면, 그것은 본고의 위에서 소 테마로 언급한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4) TV채널을 이리 저리 바꾸는 식으로 스위치 장치의 작동을 하는 "전환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데서 우리는 모더니즘 소설미학 차원에서의 "자아성찰과 인식"의 문제에서와는 전혀 다른, 즉 '인식하는 움직임의 반성(Reflexion)'의 양상이 질적으로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간단한 예를 들어, 이러한 (곧 결과적으로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것'으로 밝혀지는) 움직임은 마치 '빈 공간'을 향한 움직임처럼 보이는 "공전 진행(空轉進行)의 계기"(Moment des Leerlaufens)와 "나선형의 열린 형상화의 형식(spiralenformig offene Darstellungsformen)"을 지닌 자기반영(자아성찰)의 움직임이다. 이것은 앞에서 크리스토프 란스마이어의 소설 {마지막 세계}에서 언급했듯이, 역사적 인물을 재구성하는 화자 코타(Cotta)도 마지막에는 "변형"(Metamorphoses)의 비밀에 가득찬 알 수 없는 비-현실 세계로 사라져버리는 것 같이, 일반적으로 소설에서 주인공을 중심으로 긴장하여 팽팽하게 진행되는 어떤 지향점을 향해 응고·구성되어나가는 진행과정이 뚝 끊어져버리는 것 같은, 그래서 '열려있는' 것으로서의 인상을 줄 수 있지만, 그것이 어떤 구성점을 향해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니기에 일반적으로 (우리의 통상개념에서의)모더니즘 소설이 지닌 '열린' 자세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환기시킨다. 어떻든 모더니즘적 소설의 '열린' 자세는 어떤 구성점을 향해 움직이고 있는 것이기에, 즉 (소위)포스트모던 소설의 그것은 바로 이러한 방향성이나 대상에 대한 부정 또는 부재 때문에서라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정해진, 또는 예견된 시사적인 어떤 것이 그 어디에도 부재하기 때문에 전혀 다른 것이다. 이것은 무언가 '빈 공간'을 향한 움직임이라는 그런 의미에서 "공전 진행(Leerlauf)"으로 구체화해 볼 수 있겠다. 어디에로도 도착하지 않는, 그렇다고 해서 다람쥐 쳇바퀴 돌듯 헛수고하는 식의 "공전(空轉)의 모멘트"가 아니라, 왜냐하면 쳇바퀴를 도는 경우 다시 제자리에 돌아오기 때문에, 그러나 포스트모던 소설적 형상화에서 이루어져 있는 '열린' 자세의 움직임은 "나선형의 형태로 열려있는 형상화의 형식들"을 낳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어떤 구성점을 향한 것이 아니기에, 예견되거나 시사되는 어딘가에로 또는 어떤 것으로 상승하는 것도 아니며, 변증법적 인식의 원(圓; Kreis)에서처럼 종합을 향하는 것도, 또한 그렇다고 해서 다시 제자리로 계속 돌아오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식의 空轉도 아니며 하여튼 무언가를 향해 열린 채 "나선형의 형태로" 끊임없이 돌아가고 있는 그런 식의 움직임 형태이다. 이런 식으로 나선형의 움직임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이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자기반영(자아성찰)'의 모습이다. 고정된 방향과 그 방향의 대상이 결정되어 있지 않은 채 보류된 상태에서의 움직임이란 의미에서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은 이러한 "공전의 움직임" 양상의 '자기반영(자아성찰)'은 낭만주의적 "자기반영(Selbstreflexion)"과는 분명 다른 질의 어떤 것을 드러내고 있다. (5) 이러한 포스트모던적인 사고의 형식들은 "이야기하기의 자기반영(성찰)으로서 이야기 쓰기"의 테마에서 볼 때 모니즘 소설미학과의 차이는 역시 '문학의 인식 기능'의 문제에서 지적해 볼 수 있겠다. 소설 {젊은이}에서 잘 드러나 있는 '자기반영(성찰)의 움직임으로서 인식자세'는 특히 "변증법적 인식" 자세와 다른 어떤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그것은 "인식의 원칙으로서 변증법"(die Dialektik als Erkenntnisprinzip)을 보류하는 일단 정지의 자세이다. 이것은 "나선형의 형태로 끊임없이 돌아가고 있는 움직임의 형태"라는 사고의 구조에서 볼 수 있듯이 변증법적 합일('종합')을 향하는 것도 아니고 아도르노의 "부정의 변증법"적 인식에 해당하는 것도 아니며, 즉 현대 소설적 형상화('미학')에서 이루어지는 '문학의 인식(기능)'과 달리, 어디로 향하는 고정된 방향이 없다기보다는 일단 정지 보류되는, 즉 앞으로 무엇이 생겨날지 또는 어떤 방향으로 등이 결정되거나 시사되지 않은 채 열려져 있는 그런 상태이다. 이것은, 물론 현대 소설미학적인 차원에서 이해되는 열린 상태와는 다른 것('자세')이다. 쉬트라우스의 {젊은이}에서 구체화된 (언어를 통한 '현실 인식'이라는) 소설적 형상화에서 지적해 볼 때 "그는 자신의 像(이미지)들에서, 아주 집중적으로 모아진 실체화(konzentrierende Substantivierungen)에서, 타인에게 말을 거는(Ansprache) 그리고 스스로에게 말을 거는(Selbstanrede) 대화 속에서, 즉 스스로 이들을 넘어서 나아가는 가운데, 마치 뒤로 재켜놓듯이 현실(사실성;die Wirklichkeit)을 완벽하게 뒷전에 숨겨 두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독일 비평가들은 쉬트라우스의 창작미학(Poetik)을 "인식원리로서 변증법을 일단 중지 보류한 변증법의 반영"이라고 본다. (6) 이런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사고와 분위기는 소설 {젊은이}에서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언어화되고 있다. 소설 속에서 대략 20년 후쯤에 해당하는 시기로, 서술묘사의 형상화가 다시 실재의 현실로 돌아와 서술되는 마지막 章에서 주인공 레온(Leon)과 영화제작자 오시아 (Ossia)간의 대화에서 다음과 같이 구체화되고 있다: "Ich kann mir gut vorstellen, daß spatere Menschen uberhaupt keine Großformen mehr erkennen konnen (…) Stattdessen teilt ihr Bewußtsein ein Werk in ganz andere Wahrnehmungsfelder auf, sondiert es nach Energien und Reizungen, die wir jetzt noch gar nicht erkennen (…) Mir ergeht es ja heute schon so, daß ich mich an einen scheinbar verworrenen Film, der jedoch eine tiefere und unbedingte Sicht der Dinge wiedergibt, weit scharfer und langer erinnern kann als an eine glatte, runde Geschichte, die ich oft schon nach zwei Stunden nicht mehr nacherzahlen kann."(Der junge Mann, p.360) "인식의 원칙으로서 변증법"을 보류하는 일단정지의 자세를 본질로 하고 있는 '성찰의 움직임'이, 어떤 구성점을 향해 움직이는 모더니즘적 사고와 전혀 다른, 곧 사고로 형상화되고 있다. 예컨대, 뒤죽박죽 혼란스러운 영화가 또는 영화의 한 장면이 무언가 우리에게 남기는 것처럼 우리의 자극, 감지, 감성, 관심, 주의력(의식의 시선) 등은 현재 어느 방향으로 내닫는다고 지적할 수는 없지만, "현재로선 우리가 전혀 인식할 수 없는 에너지와 자극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며, (한 순간 우리로 하여금 멍하게 했던) 바로 그것은 어떻든―예컨대 일반화, 패턴화된 것들처럼 그런 의미에서의 '고전의 세계관적인 것'들과 같은―"거대 형식(Großformen)"이나 "그런 저런 분명하고 또렷한 이야기(eine glatte, runde Geschichte)"가 우리를 자극했던 것과는 달리, 아니 그보다 더 강렬하게 자극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영향력과 같은 그것의 에너지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즉, "현재로선 우리가 전혀 인식할 수 없는 에너지와 자극력에 따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우리의 의식의 움직임이, 곧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자기반영성'이며, 이것은 곧 현재 우리의 상태, 곧 포스트모더니즘적 세계의 현실(사실성; Wirklichkeit)이 아닐까 싶다. II. 90년대 한국 소설문학에 관한 관찰 0. 서론: 문학적 형상화에서 사실과 허구의 긴장관계 -현실의 심미적 구조변화로서 소설텍스트 "현실의 반영"으로서 문학적 형상화라는 일반적인 소설(Roman)의 본질은―앞에 독일 포스트모던 소설문학 관찰에서 살펴본 바―"사실(Wirklichkeit)과 픽션(Fiktion)의 긴장관계"의 언어-예술적 형상화에 놓여 있겠다. 따라서 소설작품의 관찰 및 이해에서도 이러한 소설의 본질에 준해, "언어적 형상화를 통해 이루어지는 현실 규정과 현실 창출의 문제"를 그 핵심으로 삼게 한다. 이러한 시각은 모더니즘적인 소설이건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소설이건 간에―비록 "탈 장르성" 또는 "장르 확산" 등의 면모가 소위 '새로운' 소설들에서 등장한다해도 역시 소설이란 어떻든 문자 매체를 가지고 이루어진 예술적 형상화라는 이 테마에서는 벗어날 수 없기에―소설작품 관찰에서 핵심적인 것이기도 하다. "사실과 허구" 사이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소설적 형상화라는 유희가 이루어지고, 특히 독일 전통 미학, 곧 모더니즘적인 소설미학에서 보자면, "사실"과 "허구" 그 어느 쪽에도 일치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양쪽에 일치하는 듯 하면서("als ob…"), "사실과 허구의 경계선"을 지워버리지 않은 채 문학적 형상화('유희')를 통해 양자간의 함몰을 꾀하는 곡예와도 같은 언어적 유희의 성공 여부가 소설텍스트의 질을―따라서 소설적 형상화의 방식, 소설의 구조 서술양식, 문체…등등을―결정하게 된다. 사실과 허구의 함몰(Zusammenfallen)로 또 하나의 새로운 "문학 공간(ein neuer poetischer Raum)"이, 소위 소설 세계가 '창조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따라서, "창작텍스트"!), 그 속에서 독자는―독일 전통 소설미학에서 말하는―"문학적 효과(poetische Wirklichkeit)"를 느끼게 되고, 특히 루카치의 리얼리즘적 소설미학에 따르면, "현실의 특수한 반영"으로서 "문학적 진실"(dichterische Wirklichkeit)을 인식하게 되며, 구조미학적 입장에서 말해 보자면, "문학텍스트의 구조적 힘(struktuelle Energie)"에 부딪히게 되며, 수용·영향 미학적 시각에서는 "소설텍스트의 호소구조(Appellstruktur)"가 발휘하는 "심미적(언어-예술적) 유희"에 동참하게 되며, 우리의 한국적 문학정서(상식적인 문학관)에 의하면 문학작품의 "감동"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앞의 서론에서 언급한 한국 90년대의 소설들 가운데 특히, 우리 문단에서 "포스트모던 소설(또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소설)"로 논란되거나 언급·평가되는 다음 4편의 작품들**을 관찰대상으로 택해, 위와 같은 '사실과 픽션의 긴장관계의 문학적 형상화'에 대한 시각에서 살펴본다. ** 1) 이인화의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1992) 2) 하일지의 {경마장 가는 길}(1990) 3) 박일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1992) 4) 장정일의 {아담이 눈뜰 때}(1990) 이들 연구관찰대상의 소설작품은 모두 90년대 초반에 출간된 것으로―다음에 진행되는 관찰에서 자세히 논하지만―소설의 주인공들이 모두 "소설을 쓰고 있는"({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또는 "소설 쓰기를 시작하는"({경마장 가는 길}), "출사표로서의 글쓰기"({살아남은 자의 슬픔})를, 또는 "문학을 선택한" (아담이 눈뜰 때) 작가 지망생의 (작중)인물들이다. 소위 '작가로서의 주인공'이라는 허구화의 장치로 소설적 형상화가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들 작품의 저자들은 또한 소설 속의 주인공들은 하일지의 {경마장 가는 길}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90년대 한국 젊은이들이라고 볼 수 있겠다. 위의 4편의 소설작품들을 관찰대상으로 하여, 이런 식의 비교관찰이 '현실과 픽션의 긴장관계'로 이루어지는 한국 90년대 소설문학의 성격을 구체화해 볼 수 있게 하리라는 전제에서 이 작품들을 함께 다루어 본다. 역시 이들 소설작품 관찰에서도 "현실의 심미적 구조변화로서 문학적 형상화", 곧 소설텍스트의 텍스트성(Textualitat)으로서 "문학적 형상화의 질"에 대한, 동시에 거기에 구체화되어 드러나는 "현실에 대한 서사적 자기반영성(Selbstreflexion)의 문제"를 중심으로 한 작품 관찰 및 그 평가에 주안점을 둔다. 한편, 여기서는 이들 연구대상 작품의 포스트모더니즘적인 면모의 여부를 밝히거나 또는 그것들의 포스트모던 소설로서의 특징을 탐색해내려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외국문학 전공자인 독자'로서 90년대 문제작으로 부각되고 있는 이들 한국 소설작품에 접근하여 한국 소설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려는 것이 핵심적인 것이다. 앞에서 구체화된 독일 포스트모던 소설미학적 평가기준에 따라 예컨대, 이 4편의 작품들에 대한 소설미학적 평가를 목적으로 하기보다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한국 소설문학'의 실체는 과연 무엇인가, 한국 90년대 소설문학에서 '새로운 것'은 어떤 것인가 등을 관찰함으로써 본 연구과제, 한국 90년대 소설에 드러난 문학적 형상화의 인식에 접근하고자 한다. 1. 현실의 심미적 구조변화로서 소설적 형상화에서 '사실과 허구의 긴장관계' -이인화의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 가}를 중심으로 1) 창작텍스트에서 '상호텍스트성'의 문제 한국 90년대에 소위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으로 지칭되는 소설들의 그 실체를 파악해 보고자 하는 본 연구에서는, 일반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규정 특징(Indiz-Merkmal)"처럼 여겨지는 "상호텍스트성(또는 텍스트상호성; Intertextualitat)"의 문제를 중심으로, 우선 본 연구관찰대상들 중의 하나인 이인화의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를 살펴본다. 1992년 발표된 이 장편소설은 "제1회 작가세계文學賞 수상작"이며, 특히 인용, 표절시비의 논쟁까지 불러온 경우이므로, 이 작품에 드러나는 그 형상화적인 측면에서의 특징들을 구체화해 본다면 본 연구 주제, 90년대 한국 소설문학(소설적 형상화)의 새로운 양식이란 어떤 것인가에 접근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을 확실한 불명예의 진창으로 빠뜨린" "표 절 논쟁이라는 추문"의 사건을 낳은 이 장편소설의 줄거리를 간추려 보면, 소설의 주인공은 "의대를 졸업하고도 전문의와 작가의 전망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전업가 길에 들어서는 은우, 의사 사회밖에 알지 못하며 은우가 작가로 변신하는 것을 끝까지 말리다 결국 그와 헤어지는 은우의 애인 레지턴트 윤희, 학생운동을 하다 이제는 변혁운동의 일선에서 이탈한 채 갈등 속에서 헤매는 정임, 전위조직가이면서 수배되어 나날이 쫓기고 있는 규진, 그리고 현실의 가속적 부패성에 절망하여 도덕적 파시스트를 대망하는 문학평론가 박분도 등 우리 사회의 다양한 지식인들이 현실세계와 관계 맺는 모습을 그려 보인 것이 이 작품이다." 이 장편소설의 제목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도 ―작가의 인용제시에 의하면―윌리엄 셰익스피어 {리어왕} 1막 4장에서의 피인용텍스트 "아아 나는 잠들었는가, 깨어 있는가/ 누구,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가 없느냐"에 근거하고 있다. 이 소설의 구조는, 총 18장으로 이루어진 장편의 매 장(章)마다―예컨대, 이수익, 설정식, 김춘수, 정지용, 서정주, 김소월, 오규원 등등―한국 시인의 시텍스트가 각각 장의 시작에 앞서 표제어처럼 인용 제시되어 있으며, 각 장마다 소위 이야기의 주체가 되고 있는 작중인물로서의 '화자'가 바뀌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소설적 형상화과정은, 의사 직을 그만두고 소설가로 등장하는 (사실상 이 소설의 주인공으로서의) 작중인물인 "은우"가 "나"로 서술을 시작하고 있는 (주인공)"나"라는 화자에 의해서 전체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셈이지만, 여기에 작가의 개입, 작가 자신의 창작과정의 서술, 심지어 '독자와 함께 소설쓰기'조차 시도되어 있어서 이야기 줄거리 파악조차 힘들 정도로 복합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 연구자는 이 소설의 줄거리 요약조차도 다른 평자의 것(Wiedergabe)을 인용했다. 한 편의 소설 속에서 전체를 얽어짜는 '구성 끈'(Geflecht)으로서 '이야기'(Geschichte)의 소멸 효과를 꾀한 듯 하지만, 스토리 텔링 식의 소설에 익숙한 독자에게는 복잡하기만 한 횡설수설로 끝나는 듯한 인상을 남기는 장편소설이다. 이인화의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1992)를 두고 벌어진 인용, 표절 건으로 제기된 논쟁을 중심으로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준거로서 "상호텍스트성"의 주제에 접근해 본다. 작가 이인화 자신이 "분명히 밝히고 있듯이 [내가 누구인가?]라는, 그야말로 고전적인 주제인 존재론적 정체성의 문제를 취급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주제를 취급하는데 작가는 혼성모방과 상호텍스트성이라는 가장 적절하고 유용한 기교를 사용"하고 있으며 "한마디로 말해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는 우리 문단에서 근래 보기 드문 수작이며 가장 대표적인 한국의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중의 하나이다."(김욱동)라고 이 작품을 높이 평가하는 평자는 이 작품을 두고 벌어진 인용, 표절 시비 논쟁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작가 자신이 솔직히 밝히고 있듯이 사실 이 작품은 멀게는 니체로부터 가깝게는 공지영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서 한 단락, 또는 그 이상을 비교적 자유롭게 빌려온다. (…) 독창적 작품이 아니라 남의 작품을 단순히 표절, [짜집기한 작품]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 이러한 비판은 20세기 후반을 특징짓는 문화 현상인 포스트모더니즘의 미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비롯된 결과다. 그 동안 포스트모더니즘을 적극 수용해 온 한 사람으로서 필자는 이인화 씨의 창작 방법은 예술적으로 매우 타당할 뿐만 아니라 도덕적 유리적으로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본 연구자는 외국문학 전공자로서, 더욱이 한국 90년대 소설문학에 대해 문외한이란 핸디캡 때문에 그렇기도 하겠지만, 이 작품의 첫 독서에서 어쨌든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속에 다른 작가의 텍스트들이 "독자들은 도저히 그의 작품에서 그것들을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것들이 인용되어 있다"('표절'되었다)는 논평을 읽기 전까지는, 이 작품의 전체적인 문학적 형상화에서 그러한 면모를 전혀 꿰뚫어 볼 수 없었다. 어떻든 이 작품의 첫 독서 감상으로는―거기에 "독자들은 도저히 (…) 그것들을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것들이 표절"되었든 인용되었든 어떻든 간에―이 작품의 전체적인 문학적 형상화는 아주 돋보였으며, 소설의 서술양식, 구조 등등의 측면에서 특히, 한국어로 쓴 표현들에 있어서 매끄럽고 유연성 있게 잘 읽히는 소설이란 느낌을 받았다. 한편, 본 연구자는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속에 타 작가의 텍스트들이 인용(또는 표절)되었다는, "숱한 작가의 작품을 두리뭉실하게 배합해 놓"았다는 논평을 읽고서야 '정말 그런가' 하고 살펴보고자 했지만, 이 창작텍스트 {내가 누구인지…}에 인용·표절되었다는 예컨대, 일본작가 무라까미 하루끼 작품, 요시모토 바나나의 {키친}, 공지영 등등도 전혀 접하지 못한 독자이다. 그러기에 "다양한 독서를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발견되지 않은 표절이 수다하게 널려 있으리라는 혐의를 둘 수도" 있는 이러한 작품에, 더욱이 주로 "인용"의 수단으로 이루어진 소위 "상호텍스트성"에 근거하는 이 작품의 소설적 형상화에 "적실한 비판"이나 "합당한 조명"을 할 수 있을까는 의문스럽지만, 본 연구자의 이러한 전제조건(독자의 "기대지평") 하에서 이 작품에 대한 감상으로부터 연구를 시작해 볼 수밖에 없겠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에서의 '인용의 문제', 특히 '표절 시비'의 논쟁에서는―그것이 비판이건 칭찬이건 간에―평자들의 작품관찰 시각 및 방법에 있어서 다소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들은 우선 이 작품에 인용된 수많은 것들이 타 작품의 '표절이냐 아니냐를 논란'하는 것보다는 더 중요한 것으로, 이러한 인용, 차용 또는 표절의 방법이 '문학적 형상화의 수단'으로서 어떤 역할을, 즉 그러한 방식의 소설적 형상화, 곧 그렇게 이루어져 인쇄된 텍스트 자체가 심미적 구조변화의 과정 및 그 구체화에서 '어떤 문학적 효과(poetische Wirkung)'를 발휘하는지 심미적 구성요소들에 대한 분석과 해설을 해야 할 것이라고 본다. "표절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이성욱)라는 논평에서는 예컨대, "차용의 의도성"을 가지고 이 문제를 논하고 있는데, 차용이건 인용이건(그의 말로는:"표절") 어쨌든 타 문학작품에서 여러 가지를 따오는 그러한 "문학적 수단"(예:몽타주)을 사용하여 이루어진 언어적 형상화에서―더욱이 글로 쓰여진 모든 텍스트들을 그런 식의 것으로 볼 때―이미 이루어져 있는, 즉 인쇄된 현재의 창작텍스트에서 생산('형상화') 수단이 되었던 그것의(여기서:차용의) 의도를 따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수단으로(또는 "차용의 의도"로) 인해 생겨나는―하긴 아무런 것도 생겨나지 않는, 차용·인용으로 조립된 텍스트("짜집기한 작품")도 있을 수 있겠지만―즉, 그렇게 이루어진 텍스트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에서의 소설적 형상화의 심미적 구성요소들의 역할, 기능 발휘 및 구조적 변화(예: 문학적 효과) 등을 관찰·분석·해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현실의 반영으로서 소설"이라는 명제에 우리가 일단 아무런 반론을 펼 수 없는 것이라면, 어떤 소설이든지―어떤 소설적 형상화의 수단들을 사용해 이루어진 것이든 지간에―그것의 평가는 "현실의 반영으로서 소설", 즉 거기에 언어로 그려진 '현실의 심미적 구조변화'의 질에서 판가름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로 여기에 작품관찰의 시각도 꽂아져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작품에 대해 부정적으로 비판하는 논자와는 달리 예컨대, "이인화 씨의 창작 방법은 예술적으로 매우 타당할 뿐 아니라 도덕적 유리적으로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평자에게서도 역시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실제 작품의 문학적 형상화에서 "가장 적절하고 유용한 기교"라는 점을 밝혀 평가해야 할 것이다. "이인화 당사자의 지지자" 격의 평론가로서 "표절 논쟁이라는 비판에 대해 포스트모더니즘과 연관시켜 반론"을 제기했던 평자(김욱동)도 그러나 이러한 작품분석 및 근거해명 없이 "[내가 누구인가]라는, 그야말로 고전적인 주제인 존재론적 정체성의 문제를 취급하고 있다."라고 하며, "(…) 주제를 취급하는 작가는 혼성모방과 상호텍스트성이라는 가장 적절하고 유용한 기교를 사용하고" 있어 "우리 문단에서 근래 보기 드문 수작이며 가장 대표적인 한국의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중의 하나이다."라고 주장한다. 그가 말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미학에 따르면"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적인 심미적 범주 중의 하나"로 "상호텍스트성"을 들 수 있으며 "상호텍스트성은 바로 이러한 패스티시 기법에 기초를 두고 있다. 여기서 상호텍스트성이란 어느 한 문학텍스트가 다른 문학텍스트와 맺고 있는 상호관련성을 말한다."(김욱동) 이 평자의 논지에 의하면, 마치 한국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의 특징은, 그렇다면… "예술적으로 매우 타당한 창작 방법"인 타 작가의 텍스트를 '비교적 자유롭게 빌려, 남의 작품을 인용(단순히 표절)하여 짜집기한 작품'이란 것 처럼 들리기도 하여(또는 그러한 오해를 불러일으켜), 결과적으로―수많은 독자로서의 비평가들에서 드러나듯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은 비판이 아니라 조소의 대상이 되기에 이르렀다."고 본다(vgl. 서영채, p.359). 따라서 "혼성모방과 상호텍스트성이라는 가장 적절하고 유용한 기교를 사용"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로만 주장할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에서의 소위 "상호텍스트성"의 실체(작품의 질; 문학성)를, 이렇게 하여 생겨난 그 창작텍스트에서 '현실의 심미적 구조변화'의 양상을 관찰 분석한 다음에야 "우리 문단에서 가장 대표적인 한국의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상호텍스트성의 기교를 사용"하는 그 자체로서만 포스트모더니즘적 소설의 특성이 결정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해야 할 것이라는 것이다. "상호텍스트성"의 개념정의에 대한 언어학적, 문예미학적, 곧 학문적인 근거해명(Begrundung)은 여기서는 지면관계상 다 전제할 수 없기에, 그것을 간단히 소설문학에서(소설텍스트) 작동하고 있는 텍스트와 텍스트들간의 "텍스트상호성"으로 제한하여 논해 본다면, 본 연구논문의 서론에서 언급한 바, 소설적 형상화에서 언어-예술적 형상화의 수단(Kunstmittel)으로서 사용되는 인용(Zitate), 몽타주(Montage), 콜라주(Collage), 스트레오-타입의 재생양식(Klische), 패스티시(das Pastiche)나 트라베스티(Travestie), 키치(Kitsch) 등은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에서 새로이 대두하는 문학적 형상화 수단이라기보다는, 과거의 전통 문학에서, 소위 모더니즘 소설미학에서도 존재했던 것이다. 더욱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으로부터 (독일을 중심으로 말해 볼 때) 현대 미학에서 주축을 이룬 문학적 예술수단들(stilmittelartige Umkleidung, 예컨대 Sinnbilder로서 Allegorie, Symbol, Metapher, Humor, Ironie, Satire, Parodie, Paradox 등)은 소위 포스트모더니즘 미학에서도 문학적 형상화의 수단으로 머물러 있음을 감안하면 그러하다.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우리가 모더니즘 소설미학과 포스트모더니즘 소설미학간의 그 변화양상을 '문학적 형상화의 수단'들을 중심으로 찾아보려고 한다면, 문학텍스트의 심미적 구조(예:현실의 심미적 구조변화의 양상)가 발휘하는 그것의 소위 "문학적 효과"(="시적 효과" poetische Wirkung)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점은, 앞에 독일 포스트모더니즘의 소설 관찰에서 드러나는 바, 바로 여기에, 즉 "현실의 심미적 구조변화 양상과 그 효과로서의 문학텍스트의 심미적 질에, 모더니즘 소설미학과 포스트모더니즘 소설미학 양자간의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에서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소설의 특징을 평가해내려는 작품관찰이나 그에 "적실한 비판" 또는 "합당한 조명"을 위해서는 어쨌든 이 작품 자체에 이루어진―그것이 인용, 차용, 표절의 수단들을 사용해 이루어졌던 어떻든 간에―소설적 형상화의 심미적 구성요소로서 "상호텍스트성", 그리고 그것이 발휘하는 "문학적 효과" 등을 관찰·분석·해설해야 한다는 것은 더 이상 할 필요도 없겠다. 그러나, 이점을 강조하기 위해, 어떤 비평가의 작품에 가한 아이러니컬한 한 비판 문구:"이인화의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제목은 그 책의 진짜 저자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로 해석해도 무방하다."를 인용하여 대답해 보자면,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가 "우리 문단에서 가장 대표적인 한국의 포스트모더니즘 소설 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하면, 바로 이 소설의 "상호텍스트성"의 실체를 문예미학적('과학적')으로 철저하게 관찰하고 분석한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본 연구에서도 소위 수용·영향미학적 시각의 이러한 작품관찰이 이루어져야겠지만, 본 연구자의 한국문학에 대한 문학적 수행능력이 부족한 독자로서의 "기대지평"(Erwartungshorizont)의 문제 때문에, 이것을 다음의 연구로 미룬다. 왜냐하면 소설구조의 분석에서도 그렇지만 서술(묘사)에서의 피인용문들, 예컨대 인용된 시텍스트의, 즉 매 장의 내용과 연결되는, 또는 분리되는 어쨌든 이러한 인용詩가 이 소설의 한 章에서 지닌 역할, 기능, 효과 등의 "상호텍스트성"의 분석, 곧 "문학적 효과"를 낳는 심미적 구성요소들을 관찰하기 위해서는 피인용문들(인용된 시텍스트들)에 대한 연구를 전제로 해야 하고, 또 이에 대한 관찰을 수반해야 하기 때문에 우선 한국문학 전공자가 아닌 본 연구자의 학문적인 능력으로도 그렇지만 시간적으로도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2) 소설적 형상화에서 '독자-작가의 관계'('작가 개입'의 방식) 여기서는 (본 연구의 주제) 소설적 형상화의 한 문제로서 '현실과 픽션의 긴장관계'에 관찰의 초점을 맞추어, 총 18장으로 이루어진 이인화의 장편소설에서 소설적 형상화과정, 즉 소설텍스트 속에 끼어드는 '작가 개입'의 테크닉을 통해 이루어진 '현실과 픽션의 긴장관계'의 형상화 방식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것은 본 연구의 관심사인, 한국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의 성격을 문학적 형상화 방식에서의 다른 양상, 소위 '새로운 것'의 탐색작업, 즉 한국 90년대 소설과 80년대 소설에서 상호 다른 점 찾기에도 부합될 것이다. 뿐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이 작품에 이루어진 '작가 개입'의 테크닉에 대한 관찰 및 분석은―앞에 서문에서 60년대 독일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에 관해 언급되었듯이―무엇보다도 현재 여기서 다루고 있는 소주제, [한국 포스트모더니즘 소설텍스트에서 "상호텍스트성"의 문제]에도 해당한다. {내가 누구인지…}의 소설구조에 있어서는, 소설의 이야기 줄거리 파악조차 힘들 정도로 현란하게 작가 개입, 작가 자신의 창작과정의 서술, 심지어 독자와 함께 소설 쓰기조차 시도되고 있다. 작가가 소설 속(텍스트 안)에 수시로 등장하여 작중인물이나 독자들과 대화도 하고 토론도 하는 이야기(소설 쓰기) 방식은―이 논문의 앞에 서문 [60년대 독일문학에서 포스트모더니즘문학의 수용 전개과정 및 상황의 개관] 에서 언급한 바―"작가와 독자의 유대관계"(die Beziehung zwischen Autor und Leser)가 과거의 문학에서와는 달리 아주 밀접하게 형상화되는 것이 60-70년대 이 시기의 포스트모던 소설문학("문학적 형상화")에서의 특징이었듯이―전통 소설 등에서 고래로부터 활용되어왔던 것으로, 이것은 소설적 형상화가 철저하게 허구의 과정이라는, 즉 '실제'라는 환상을 깨뜨리기 위한 기능 발휘의 역할을 한다. 이인화의 작품에서도 그런 식으로, 곧 소설적 형상화의 ABC로서 '작가의 개입' 방식이 이루어져 있다고 본다. '현실과 픽션의 긴장관계'의 구현방식으로 작동하는 '소설 속에서 작가의 위치·역할' 문제, '작가의 개입', '독자-작가-관계'를 위한 테크닉의 한 예로 외국문학작품의 경우를 들어본다. 독문학 전공자인 본 연구자는 우연히 (1998년 1월 말) KBS 1 방영, TV 영화에서 보게 된 영국작가 존 파울즈의 (소설){프랑스 중위의 여자}가 계기되어 이에 비교해 보게 되었다. 여기서 이루어지는 비교 관찰은 다음의 참고자료를 근거로 하고 있다:"2. 존 파울즈의 소설 {프랑스 중위의 여자}(The French Lietenant's Woman)에 나타나는 포스트리얼리즘적인 <의사소통>의 새로운 전략들"({비교문학}(제18집), 1993.12, p.169-173). 존 파울즈의 소설 {프랑스 중위의 여자}에서는 "소설의 각 장마다 19세기 빅토리아 영국의 사회와 사상을 잘 나타내 주는 여러 작가, 사상가, 저술가들의 글을 제사(epigraph)로 인용하고" 있는데, 이러한 형식도 이인화의 {내가 누구인지…}의 전체 18장으로 이루어진 장편소설에서 매 각 장마다 나타난 인용의 형식에 주목해 본다면, 그 유사성을 감지해 볼 수 있게 한다. 존 파울즈의 소설 {프랑스 중위의 여자}에서는, 작가(파울즈)가 "이 소설을 진행시켜나가는 동안 텍스트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독자들에게 말을 거는 등 지금까지의 소설장르에 대한 통념적인 관습을 거부하라고 타이르고 있다. 이렇게 소설가인 파울즈는 이 소설의 재현적 그리고 의사소통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몇 가지 새로운 기법들을 동원한다. 두드러진 몇 가지만을 (…) 불란서의 누보로망의 작가 로브-그리예가 본격적으로 시작한 르보로망의 메타픽션적인 특징인 <자기반영>(self-reflexion)의 기법이다. 종래의 특히 모더니즘 계열의 소설은 작가란 철저하게 텍스트 뒤에 숨어서 조정하면서 소설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허구가 아닌 실제와 사실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파울즈는 텍스트 안에서 수시로 등장하여 작중인물이나 독자들과 대화도 하고 토론도 함으로 이 소설은 철저하게 허구의 과정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실제'라는 환상을 무너뜨리고 있다."({비교문학} 1993, p.170) 존 파울즈의 소설 {프랑스 중위의 여자}에서 "작가의 개입은 소설의 환상이 일시적으로 깨지는 것은 사실이나 궁극적으로 독자들에게 브레히트(Brecht)의 <소외효과>(Verfremdungseffekt)처럼 우리시대의 문제들에 대한 예리한 인식과 비판의식을 자가져다 주는 상당한 정도의 의사소통적 효과를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비교문학} 1993, p.171) 그리고 이 소설작품에서 "상호텍스트성"의 테마에 관련하여 지적해 보자면, "작품 중간에 내용의 이해를 돕기 위한 설명주가 나오는데, 이런 각주는 그 동안 사실적인 문서기록으로나 쓰이던 것으로 소설형식에서는 낯선 것이었다. 파울즈는 텍스트 속에 사실적 기록이나 실제 작가들의 작품들을 인용하여 작품전개를 돕고 있다."({비교문학} 1993, p.171) 또한 작가 "파울즈는 소설의 각 장마다 19세기 빅토리아 영국의 사회와 사상을 잘 나타내주는 여러 작가, 사상가, 저술가들의 글을 제사(epigraph)로 인용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소설가는 빅토리아시대와 2차대전 이후의 영국을 대조, 비교하고 과거와 현재 가치관을 희화(parody)시킴으로서 독자들인 우리에게 새로운 <역사의식>을 주입시키고 있다. 이러한 전략은 독일적인 <수용미학>이나 영미적인 <독자반응 비평>의 측면에서도 흥미를 끄는 대목이다. 독자들에게 궁극적으로 우리시대의 문제제기와 논의를 위한 독자의 참여는 물론 궁극적으로 우리시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독자들을 적극적으로 개입시키고 참여하게(…)"(비교문학, 1993, p.171). 이러한 "전략"은―본 연구의 관찰주제:소설적 형상화가 이룩해내는 '현실의 심미적 구조변화'를 중심으로 볼 때―"이 소설 {프랑스 중위의 여자}의 의미창출은 물론하고 작가와 독자, 현실과 독자 사이의 의사소통 구조를 극대화시키고 있다고 볼 수 있다."({비교문학} 1993, p.171) 이인화의 {내가 누구인지…}(1992)에서 독자를 향한 서술방식으로 진행되는 '작가 개입'의 방식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관찰해 보면―소설구조상의 여러 측면에서 볼 때―존 파울즈의 소설 {프랑스 중위의 여자}에서 이루어진 '작가 개입', '독자-작가의 관계' 등 소설구조상의 테크닉에 매우 유사하다는 인상이 짙다. 이는, 본 연구에서 "작가의 개입의 방식이 이루어진 외국 소설작품과의 비교 관찰을 시도해 보려는, 다시 말해 그것이 외국 것의 모방('흉내내기')이라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에서의 이러한 서술방식을 우리가 '세계문학에서 처음인가?' 하는 식으로 전혀 '새로운' 것으로 발견하여, 또한 그것을 한국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의 특성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성찰해 보기 위함이다. 이에 대해 답하기 위해서는 물론 우리 한국 문학에서, 즉 이러한 "작가의 개입"의 방식이 우리 전통 소설에서, '현대'(소위 모더니즘 소설)에서, 그리고 80년대의 소설에서는 어떠했는가를 철저히 살펴보아야만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작가 개입의 방식, 소설 속에서의 작가의 위치 및 역할의 문제, 그리고 '독자-작가의 관계' 등, 즉 '현실과 픽션간의 긴장관계의 형상화'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소설 {내가 누구인지…}에서 그런 대목(Textstelle)들을 인용, 제시해 본다. 이 장편소설의―정지용, [유리창 1](1930)이 인용되어 있는―제12장에서 화자 '나'는 자신의 창작 소설 기획에 관해서 이렇게 말한다: "(...) 어제 나는 이 모든 결론을 배반했다. 어제 800매쯤 나간 소설을 그냥 중간에서 마무리지어 잡지사에 넘겨버린 것이다. 도저히 더 버틸 수 없었다. 나는 현실 도피를 해버렸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의가 있을 수 없는 내 인생의 결론을 나는 배반한 것이다. 화면엔 제13장에서 끝내버린 소설의 마지막 부분이 펼쳐져 있다. (…) 두 주인공이 갑작스레 죽는 결말 부분의 필연성을 10매쯤 더 보강하여, 마지막을 <모든 [그럼에도]를 넘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을 써야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으로 끝내 놓았다."({내가 누구인지...}, p.195) 이것은 마치 작가 이인화가 창작일지(보고서)를 그대로 써나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주는 소설적 형상화(창작과정)에서의 작가의 개입이다. 이러한 방식의 작가 개입은 말할 필요도 없이 작가 "이인화"와 주인공 "인우"를 연결시키는 장치에서 이루진 소설구조에서 생겨난 결과이기도 하다. 창작일지나 "작가의 말"을 쓰는 투의 서술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는 '독자를 향한 작가 개입'의 이러한 시도는 과연 어떤 효과를 발휘하는가. 또는 소설 속에서 쓰여지고 있는, 즉 작가로서의 주인공이 작중인물과 (따라서, 독자들과 대화하듯) 작가로서의 주인공 자신의 소설에 대해서 언급한다: "[저…… 내 소설 좀 읽어 봤나? 청탁된 1300매는 못 채웠다네] [응, 대충] 그러자 은우는 서류가방에서 부시럭부시럭 비닐봉지에 싼 원고를 꺼낸다. 뒷부분을 10매쯤 더 썼다는 것이다. (…)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은우에게 할 말들을 정리했다. 은우의 중, 단편들은 데뷔할 당시부터 아주 호평을 받았다. (…) 그런데 이번 장편은 …… 역시 그런 문장으로 장편을 쓰기엔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등장인물들이 모두 <나>로 시작하여 장(章)마다 화자가 바뀌는 형식이라니.(…) 더구나 마지막의 그런 갑작스러운 죽음이라니! 너무나 손쉽게 처리한 것이 역력히 드러나는 결말이다. (…) 문학성도 대중성도 갖추지 못한 작가들을 많은 문예지들이 먹여 살리는 우리 문단의 파행적인 구조 속에서 금방 스스로를 탕진해버리겠지……"({내가 누구인지…} 제14장, p.210-211) 이런 식으로 소설 속에 끼여드는, 즉 작가 자신을 제3자로 객관화하여 작중인물로 하여금 (소설 속의 인물)작가 자신의 소설작품에 관해서 말하게 하는 작가개입의 방식은, 창작소설 속에서의 예컨대 自評과 같은 것들처럼 소설 자체의 수용 양상이나 그 구체화의 경우로 볼 수 있겠다. 그래서 (작가 이인화의 인쇄된 창작텍스트 속에서) 주인공 "은우"는 소설을 쓰고 있는 작가로서 소설 속에 수시로 등장하여 작중인물과 더불어 주인공 작가 "은우" 자신의 소설에 관해 대화도 하고 토론도 한다. 소설을 쓰는 작가로서의 주인공이 대두하는 '작가 개입'의 방식, 즉 작가('이인화')와 주인공('은우')의 연결, 이로써 '현실과 픽션의 긴장관계의 형상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방식이다. 이와 같이 "작가 이인화=소설 속의 주인공 은우=소설의 화자"가 연결·일치되는, 다시 말해 우리가 독자로서 현재 읽고 있는 인쇄된 창작텍스트의 작가 이인화=창작이야기(소설) 속의 주인공 은우=인쇄된 창작텍스트(이야기) 속에서 작가로서 이 소설을 쓰고 있는 주인공 "은우"의 형식으로 이것을 서술하고 있는 소설의 화자 등이 연결되는 것이다. 이런 식의 작가 개입의 방식은 예컨대, "일인칭 소설"이나 "자전적 소설"―서론에서 언급한, 특히 독일 1900년대의 예술가로서의 소설 주인공이 등장하는―"예술가소설"(예: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 등에서 고래로부터 사용되어왔던 수법이기도 하다. '꾸며낸 이야기로서의 소설'이란 개념정의가 불변으로 머물러 있는 한, 모더니즘 소설이건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이건간에 여느 소설들에서든 일반적으로 이러한 형상화 방식은, 소설적 형상화의 관건이 '현실과 픽션의 긴장관계'를 여하히 처리하는가에 놓여 있으므로 모면하기 힘든, 거의 필수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러한 방법을 택하고 있는 근거는―위의 예에서 소설 주인공의 형태로든 또는 어떤 다른 양상으로든 어떻든―작가가 소설 속에서 수시로 등장하여 작중인물이나 독자들과 대화도 하고 토론도 하는 방식은, 그가 만들어낸 창작소설이 철저하게 '허구화의 과정'이라는 것, 곧 '실제'라는 환상을 무너뜨리기 위한 기능 발휘에 있겠다. 이러한 면모는 {내가 누구인지…}에서 소설 스토리 속의 작중인물과 (이 소설 속의 작가의)'현실'의 인물의 연결은 (소설가로서의 주인공)"은우"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장면들에서도 알아볼 수 있다: (?) 예:(김소월의 [여자의 냄새](1925)가 인용된 제17장에서):"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이건 정말 소설 같은 이야기다. 어쩌면 이렇게 내가 쓴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와 똑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나는 내가 지어낸 허구의 여주인공과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정임이 자꾸만 겹쳐지는 것을 느끼고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무엇이 정임의 실재이고, 무엇이 정임의 이미지인가.(…)"({내가 누구인지...} p.253) (遁) 예:({내가 누구인지…}, 제15장, p.254-255) "정임의 실재가 무엇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인생은 소설쓰기와 같다. 중요한 것은 정임의 실재가 아니라 사라진 사랑과 거절된 작품과 죽음의 그림자와 연속적인 절망으로 점철된 내 연애소설에 등장하는 정임의 의미다. 인생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고 실제로 존재하는 것 이외에 그 이상의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 정임은 의미의 해독이 필요한 난해한 소설의 일부일 뿐이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정임이 그녀 자신에게 누구이냐가 아니라 그녀가 나에게 제공하는 것이 무엇이냐이며 그녀가 나를 <위해> 누구이냐인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정임의 의미는 애정이며, 따뜻함과 부드러움이며 포옹, 포옹이다. 그것은 (…) 순간적인 환희와 영원한 소유에 대한 열정이다." (?) 예:({내가 누구인지…}, p.263) "[저리가! 넌 환상이야. 나의 환각이야. 넌 내가 꾸며낸 자아, 넌 내 소설 속의 여자야! 너는 나의 분신, 내 가장 어리석은 사상과 감정의 분신이야. 내가 왜 이래야 하니! 내가 왜 이래야 하니!]" 그 뿐 아니라 소설 속에서 "나는 내가 지어낸 허구의 여주인공과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정임이 자꾸만 겹쳐지는 것을 느끼고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내가 누구인지…}, p.263)에서 볼 수 있듯이, 소설가로서의 주인공 은우는, 우리가 현재 읽고 있는 인쇄된 텍스트 {내가 누구인지…} 스토리 속의 작중인물을 자신이 쓰고 있는 소설 인물과 연결 시키고 있다. 이 소설의 끝 부분에서는, 작가 자신의 창작과정에 관한 것들의 제시 등과 마찬가지로, 소설의 결말조차도 '독자와 함께 소설 쓰기의 시도'라고 볼 수 있는 작가 개입의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 소설의 마지막 제18장에서는 '독자와 함께 소설 쓰기'라고 볼 수 있는 시도가 이루어진다. 이것은 수 페이지(vgl. p.269-270)에 달해 서술되고 있는 장면이기도 하다. 인쇄된 텍스트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를 읽고 있는 실재의 독자 중심으로 볼 때, 즉 실제 이 창작소설의 스토리는 실질적으로 "{내가 누구인지…} p.269"에서 끝나는 셈이다. 즉 "…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나는 맞은편에서 달려온 화물트럭의 거대한 몸체가 우리에게 부딪히는 소리를 들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p.269)에서 이 소설의 줄거리상의 이야기는 끝나는 것이 아닌지 싶지만, 그러나 여기서 한 행을 띈 다음 이 소설(?)은, 또는 작가로서의 주인공의 해설은 다음과 같이 몇 페이지(p.269-270)에 달해 계속된다: "내 소설은……결국 이렇게 끝나는 것인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어처구니없는 결말이다. (…) 아파트를 뛰쳐나와 이 고물차를 끌고 고속도로를 탈 때부터 나는 내 인생이 엮어 가는 어떤 이름 모를 소설의 악마적인 관성(慣性)을 느꼈다. (…) 차에 올라타면서부터 나는 줄곧 내 인생으로 쓰는 이 소설이 어떻게 될까를 생각했다. "(…) 거기서 주인공들은 영동국도를 타고 용인 인터체인지에서 10km 쯤 간 지점에서 트럭과 충돌한다. 둘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차는 전소된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결말……장편을 써내려가던 작가는 (…) 마치 경주에서 자기가 아직 이기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면서도 제멋대로 경주를 포기해버리는 이런 마무리를 보여준다. 내 경우도 결국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글로 쓰는 소설은……고쳐 쓰면 된다. 고치고 또 고치고 또 고치다 보면 얼마든지 나아질 수 있다. 그러나 내 인생으로 쓰는 소설은…… 절대적이고 불가역적이며 일발승부적인 것이다."({내가 누구인지…}, p.269-270) "그러나……정말 내 소설의 주인공처럼 죽어버린다면 이 여행의 필연성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전혀 리얼리티가 없는 이야기다. 독자들은 내가 난데없이 안동으로 가겠다는 이해하기 힘든 충동에 사로잡힌 점, 등장인물들 사이의 팽팽한 긴장과 조화가 부족한 점을 금방 알아차릴 것이다. 독자들은 또 주인공들을 어쩌면 이다지도 비참하게 죽여버릴 수 있느냐는 선량한 동정과 운명이라는 잔인한 작가에 대한 분노를 느낄 것이다. (…) 리얼리티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 자신이 만드는 것이니까."({내가 누구인지…}, p.271) "나는 새로이 내 인생의 행로를 찾았다. (…) 중요한 것은 새로운 욕망, 모방의 의욕, 추체험의 의욕, 영혼의 변장, 위장, 거짓말이다. 나는 이제 800매로 끝난 내 소설을 단숨에 1300매로 고칠 수 있을 것 같다. (…) 비참하게 죽어간 주인공들을 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들처럼 나도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내가 누구인지…} p.275-276) 그리하여 드디어 소설 속의 주인공 은우는, 또는 소설의 다른 결말을 만들고자 하는 (작가로서의 주인공)은우는 "정임을 업고 다 찌그러진 차 밖으로 나오자 차안에 들어왔던 죽음이 멀리 물밀어 가는 것을 느꼈다."({내가 누구인지…}, p.276) 그리고 "나는 정임을 업고 맞은편 도랑에 처박힌 봉고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내가 누구인지…}, p.275) 라는 문장으로 인쇄된 진짜(?) 소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는 어쨌든 소설의 대미(大尾)를 맺고 있다. 3)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소설적 형상화와 현실 인식 이런 식의 '작가 개입'의 방식을 적용한 소설적 형상화는, 작가 이인화 자신이 무엇을 의도했던간에, 소설의 핵심적인 본질: 현실과 픽션 간의 긴장관계를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해서 잘 이루어냈는가? 이것은 역시 작가 자신이 아니라 '독자'가 대답할 몫이라고 보며, 본 연구자의 이 소설 감상에 준해 말해 본다면, 다음과 같은 시각(Aspekt)의 소설미학적 근거에서 실패했다고 본다. '작가 개입'의 방식을 적용하여 이루어진 사실과 허구의 연결, 즉 '현실과 픽션 간의 긴장관계의 형상화'에서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안고 있다. 이 작품에 대한 '독자 반응'에 대한 연구가 전제되어 있지 않지만, 소설의 재미있는 스토리 쫓아가기에 익숙한 독자에게서는, 복잡하게 횡설수설로 끝나는 듯한 인상만 주는 이 소설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을까라고 의심해 보는 본 연구자의 독서경험에 근거하여 볼 때 그러하다. 줄거리 파악조차 힘들 정도로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소설 이해의 문제에 있어서도 그러하지만, 소설의 매 장마다의 다른 화자로서의 작중인물들이 누가 누구인지도 구분도 못하게 혼란스러워 재독(再讀)을 요하는 등, 소설 읽기를 피곤하게 만든다. 스토리를 이해하여 따라 가기도 힘든 판국에, 소설 속에서 행위하는 작중인물들의 구분조차 혼란스러운 이 소설의 분위기는 앞에서 인용한 (독자로서의)어떤 평자의 지적에서 적중되고 있다. "이인화의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제목은 그 책의 진짜 저자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로 해석해도 무방하다." 의사직을 그만두고 소설가로 전업한 작중인물 (사실상 이 소설의 주인공)"은우"가 소설 전체적으로는 주인공이며 "나"라는 화자로서 시작·서술되고 있지만 여기에 작가 개입, 작가 자신의 창작과정의 서술, 심지어 독자와 함께 소설 쓰기조차 시도되어, 소설 속에서 전체를 얽어짜는 '이야기'(Geschichte)의 소멸 효과를 꾀한 듯 하지만, 소설은 꾸며낸 이야기라는 뻔한 사실을 잘 알고 있고 또 거기에 익숙해 있는 독자에게서는, 이러한 혼란스러움 때문에, 작가 이인화가 이런 식으로 "독자를 우롱"하고 있다는 기분마저 들게 한다. 그리고 외국 소설에서 이루어진 '사실과 픽션의 긴장관계'라는 형상화의 흉내내기로 전락하는 듯한 조잡한 인상마저 남긴다. 조금 다른 맥락에서의 지적이지만, 이 작품의 독자로서 어떤 평자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여기서 논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 많은 것을 시사한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평론가 류철균 씨와 작가 이인화 씨는 동일한 인물이다. 그런데 여기서 류철균 씨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자신이 서평을 하고 있다. 우선 양자가 동일 인물이기에 류 씨의 서평은 자신의 소설에 대한 해설이자 창작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글을 읽어보면 주인공 은우의 성격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한편, 공식적인 매체에 자신의 소설에 대해 자신이 서평하는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곤혹스럽다. 어찌 그런 방식이 서평의 객관성을 보장해 줄 수 있겠는가. 독자를 우롱하는 방자함이라 해야 할지, 아니면 치기만만이라 해야 할지, 그러나 이런 것도 포스트모던한 방법이라 한다면 더 이상 할 말은 없다.(…)" 이러한 독서경험과 작품평가를 낳게 하는 원인은, 쉽게 이해하고 많은 재미를 느끼게 하며 또한 "감동"을 안겨주는 그러한 문학텍스트의 질이 결여된, 그런 어떤 메카니즘적인 소설적 형상화에 있다고 본다. 거기엔 '작가 개입'의 톄크닉 실패의 원인도 내재할 것이다. 소위 여러 텍스트들과 관련, 짜집기해서 생겨난 인쇄된 텍스트의 작품평가에서 핵심적인 것은, 실제 텍스트 인용이건 소설(형상화)이론적 차용이건 어떻든간에, 이런 저런 시도들(예:"상호텍스트성")을 통해서 조립된 최종 텍스트가 창작텍스트로서 "새로운 문학적 공간(ein neuer poetischer Raum)"의 구축 여부에 놓여 있을 수밖에 없다고 본다. 소설텍스트가 "(새로이 창조된) 문학적 공간"을 담고 있어 거기서 풍기는 "무언가 살아 숨쉬는 활기와 다양성을 줄 수 있는(etwas Lebendiges), 현란하고 다채로울(Buntes) 뿐 아니라 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게 진기하고(Kostbares) 아주 매혹적인 어떤 것(Reizvolles), 즉 쇠진할 줄 모르는 무궁무진한 창발성(Unerschopfliches)"―이러한 창조적이며 신선한 분위기의 것이 소위 짜집기로 해서 생겨난 인쇄된 창작텍스트 {내가 누구인지…}에서 독자에게 전달되는지? 이러한 "(새로운) 문학적 공간"으로서 소설텍스트가 풍기는 텍스트의 질은, {내가 누구인지…}에는 결여되어 있다고 본다. 거기에서 독자를 향한(?) '작가 개입'의 복합적인 시도에서 "텍스트의 호소 구조적인 효과"가 제대로 발휘되고 있는가 어떤가를 생각해 볼 때도 그러하다. 소설적 형상화의 문학텍스트의 "호소구조"(Appellstruktur)에 대한 이러한 수용·영향미학적 관찰은 이 논문에서 다른 작품들을 가지고 더욱 자세히 다루어지지만, 내가 누구인지…}의 텍스트 호소구조에서, 어떻든 '작가 개입'의 방식은 '작가-독자의 관계' 테마에 연결되기에, 한 가지 것만 지적해 보자면 이 소설의 '소설 끝' 부분에서 이루어진 (소위)독자와 함께 소설의 결말 쓰기 시도의 문제다. 심지어 독자와 함께 소설 쓰기까지 시도함으로써 '픽션의 창작과정'에 독자를 참여시키고 이렇게 하여 사실과 허구간에 벌어지는 유희 속에 독자를 끌어들인 셈이지만, 결과적으로는 과거 전통 소설에서의 열려진(offen lassen; open-ended) 소설의 결말이, 그리고 그것의 문학적 효과가 예컨대, 독자가 마음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게끔 하는 데에 있었다면, 이에 비해 소설 {내가 누구인지…}의 종결 부분에서 '독자와 함께'는 이러한 열려진 소설의 결말에 존재했던 독자를 위한 "여유 공간(Spielraum)"마저 존재하지 않는 셈이라고 본다. 사실과 허구가 유희로서 소설적 형상화과정(예:독자와 더불은 소설의 결말 쓰기 시도)에서, 주인공 "은우"가, 또는 작중인물 "정임"이 죽었는가 살았는가 등 '허구적' 차원에 머무르기 때문에, 또는 그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게 하려고(?) 작가(이인화)가 끝까지 안간힘을 쓰면서 언어적인 유희를 했기에 결과적으로, 독자는 어떻든 독자 나름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사실상은 그의 권리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여유공간까지 빼앗긴 형국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구태여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의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성 여부를 논해야 한다면, '작가 개입'의 또는 독자와 연결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이런 소설적 형상화는, 그것이 여느 모든 소설적 형상화의 ABC이듯이 '사실과 허구간의 줄다리기를 위한 장치'로서 작동하기에, 말할 필요도 없이 모더니즘 소설미학의 질의 것이다. 특히나 독자 나름대로 상상할 수 있게 하는 소설적 형상화의 장치, 예컨대 "텍스트의 호소구조", "문학텍스트의 효과(영향)조건으로서 미확적정성(Unbestimmtheit)", "텍스트 유희(Spiel)"의 문제 등 중심으로 한 독자반응비평 및 수용·영향미학적 시각에서 문학텍스트 질의 평가에 근거한 모더니즘 소설미학의 시각에서 볼 때, 분명 그러하다. 이러한 논지의 이해를 구체화해 보기 위해, 앞에서 지적한 바 ({내가 누구인지…}에서 모방한 것처럼 보이는) 존 파울즈의 소설 {프랑스 중위의 여자}에서 이루어진 "작가 개입"의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소설의 독창적인 결말"과 견주어 보자: "작가(파울즈)는 이 소설의 독창적인 결말을 열어 놓고 있다. 다시 말해 이 소설의 결말은 작가에 의해 고의적으로 적어도 3가지 결말이 가능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소설이란 놀이이며 속임수라는 사실에서 볼 때도 전통적인 로만스에서 처럼 두 남여가 화해하고 결합하는 것이겠으나 그는 현대감각에 맞게 결론 없는 결론, 즉 끝이 열린(open-ended) 마무리를 선택한다. 여주인공 사라는 찰스의 청혼을 거부하고 서로 독립해서 살게 된다. 이 소설의 결말처리 방법을 좀더 생각해보면 우선 찰스가 원래의 약혼녀 어니스티나와 결합하여 행복하게 살아가는 방법, 사라와 찰스가 재결합하는 경우와, 끝으로 "사라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다. (…) 그것이 무엇이든지간에 그녀가 그의 기억 속에 오랫동안 머물렀다고 하지만 결코 개인적으로 찰스를 괴롭히지는 않았다"라는 구절에서 짐작되듯이 사라가 찰스의 결혼제의를 거부하고 각자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식 등이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의 주제의 하나인 인간을 인습으로부터의 해방과 관련지어도 (…) 마지막 결말이 가장 잘 어울린다. 그러나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자신의 논리와 욕망에 따라 이 소설의 결말을 자신들이 결정하게 만드는 독자반응과 의미해석의 권리를 가지게 된다. (…)"({비교문학}, p.172) "파울즈는 이 소설에서 여러 가지 장치들과 전략들을 다양하게 새롭게 사용하고 배치함으로써 작가와 텍스트(또는 실재)가 기도하는 여러 가지 내용과 주제들을 독자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 작가는 독자들을 급변하는 역사와 문화 속에서 빗겨 가는 방관자가 아니라 적극적인 동참자(…)로 만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새로운 의사소통적 전략들을 통해서 (…) 영국 작가 파울즈는 프랑스의 누보로망이나 미국식의 메타픽션(또는 쉬르픽션)을 벗어나 2차대전 이후의 새로운 영국적 소설양식이랄 수 있는 포스트리얼리즘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고 볼 수 있겠다."({비교문학} 1993, p.173) '작가의 개입' 및 독자를 향한(또는 독자와 연결되는) 방식, 즉 텍스트 안에서 수시로 등장하여 작중인물이나 독자들과 대화도 하고 토론도 함으로써 이 소설은 철두철미 허구화라는, 곧 '실재'의 환상을 무너뜨리는 이러한 형상화의 기능 발휘의 양상이 소설텍스트 구조("호소구조")의 '심미적 질'을 결정한다. 소설적 형상화에서 사실과 허구의 긴장관계의 문제는, 모더니즘 소설미학이나 포스트모더니즘(또는 리얼리즘미학이나 포스트리얼리즘미학)의 소설미학에서 공통으로 내재한 것이다. 양쪽 미학의 질적인 차이는―앞에 독일 포스트모더니즘 소설문학에서 살펴본 바로는―'어떻게'의, 곧 소설적 형상화 방식의 문제 하나로만 그 구분점이 결정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하여 생겨난 '텍스트의 심미적 질적 차이'에 근거했다(예:"포스트모더니즘적 사고와 분위기"). 예컨대 '작가 개입'의 방식 문제에서 텍스트 뒤에 숨어서 또는 드러나서 조정하는가 어떤가의 '방식'에 따른 것이 아니라, 그러한 소설적 장치와 그러한 소설텍스트의 구조가 발휘하는 "문학적 효과"에 텍스트의 '심미적 질'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적은 물론 모더니즘 소설문학의 시각에 준한 것이지만 다시금 언급하는 이유는 소위 '색다른' 또는 '낯선' 방식의 적용 그 자체로만 텍스트의 질을 '새로운' 것으로 평가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여기서, 독일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소설에 이루어진 "포스트모더니즘적 사고와 분위기"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하여, 한 가지 것만을 더 언급해 보자면, 미해결로 열려져 있는 소설의 경우, 그 소설적 형상화의 '열린' 자세에 있어서 모던 소설과 포스트모던 소설에서의 차이는 ―독일 포스트모던 소설에 관한 연구에서 "이야기의 청산"이란 주제로 다루었던 크리스토프 란스마이어의 {마지막 세계}(1988)를 중심으로 이야기해 볼 때 소위 미해결로 열려져 있는 소설의 경우―, 그것은 "독자에 의해서 완성된다는 수용미학적 시각"을 비롯하여 어떻든 어딘가 고정된 방향성을 안은 채 무언가를 가리키면서(예:유토피아) 열린 것으로서의 끝을, 또는 '미완성으로서 완성의 성격'을 갖추고 있지만, 포스트모던 소설에서는 이러한 '열린' 자세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데 있다는 것이다. 심미적 문학성('허구성')의 이런 질적 차이에서 모더니즘 문학과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을 구분해 볼 수 있을 것이며, 바꾸어 말해 이러한 모더니즘 문학텍스트와의 질적 차이가 포스트모더니즘 문학텍스트의 특성을 결정할 것이다. 이인화의 {내가 누구인지…} 이 창작텍스트는, 위에 언급한 이러한 시각에서의 모더니즘 문학텍스트와의 질적 차이도 갖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 미학적 시각에서의 '문학'텍스트의 심미적 질을 담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점은, 본고의 앞에서 다룬 독일 포스트모더니즘 소설문학 관찰에서 드러난 '포스트모던 문학텍스트의 특성'―"('역사성')이야기의 소멸", "소설적 형상화에서 이루어져 있는 '열린' 자세의 움직임, "나선형의 형태로 열려있는 형상화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서사적 자기반영성(Selbstreflexion)의 모습" 등등―"포스트모더니즘적 사고와 분위기"에 견주어 보면 분명하다. 예컨대 '작가 개입의 방식, 즉 소설적 형상화에서 독자-작가의 관계 양상이 외형상으로 색다르게 보인다고 해서 그것이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곧 모더니즘적인 것과 구분되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것'으로 간주·수용될 수 있는가가 우리의 포스트모던 소설 이해의 문제인 것 같다. 다시 말해, 한국 포스트모더니즘 소설문학의 평가에서의 문제라고 본다. 여기에는 앞에서 언급한 바, 한국 문학에서 이러한 "작가 개입"의 방식이, 즉 우리 전통 소설에서, (소위 모더니즘의)'현대' 소설에서, 그리고 80년대의 소설에서는 어떠했는가를 철저히 살펴보는 연구작업의 병행이 요구된다. 이에 관해서는 본 연구의 다른 관찰대상 작품들을 가지고 다시 자세히 다루게 되지만, {내가 누구인지…} 이 작품이 문학상을 받았을 뿐 아니라 비평가로부터 "우리 문단에서 근래 보기 드문 수작이며 가장 대표적인 한국의 포스트모더니즘 소설 중의 하나이다."라는 격찬도 받아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으로 간주·수용되었다는 기정 사실 자체가 한국 문학형성의 중요한 사실준거(Indiz) 요소라는 점은 한편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방금 위의 작품관찰의 결과에서 지적한 바, 이 소설작품에서 모더니즘 문학텍스트와의 질적 차이,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 문학텍스트의 심미적 특징도 찾아보기 힘든 경우이지만, 이와 같이 소설적 형상화에서 외형적으로 단순히 '새로운' 것으로 보이는 방식이 적용된 문학텍스트가 한국 문단에서 그렇게 평가되듯이―그리고 여기엔 필히 합당한 근거가 있을 것이므로(예:외국 문학 수용에서 문학이론에 대한 오해의 문제)―따라서 이런 식의 문학텍스트의 질이 '한국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성격이라고 규정되어야 할 것이라는 점이다. 2. '문학적 형상화의 공간'으로서 소설세계 -하일지의 {경마장 가는 길}의 소설적 형상화를 중심으로 1) 소설을 쓰는 작가로서의 소설의 주인공 하일지의 {경마장 가는 길}(1990)은 일반적으로 90년대 한국 소설에서 포스트모던 소설로서 평가되는 등, 그 '소설적 형상화'에 대한 인정에서 문단의 주목을 받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 대한 평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다양하다. "리얼리티 자체가 어떤 방식에 따라 언어적으로 구성되는가를 보여주는 새로운 시대 (…)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도래와 함께 소설의 해체를 논하기도 한다. 우리 소설의 경우(…) 하일지의 {경마장 가는 길}이 발표된 후에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최근 우리 소설은 (…) 그 영역이나 형태에 있어서 괄목할 정도로 확장되고 다채로워졌다. (…) 비문학적이라는 혐의를 받으면서 금기시된 소재의 벽을 파괴하고 있는 글쓰기 양식이다. (…) 90년 11년 l1월 30일 초판되어 91년 1월 20일 (…) 3판을 기록하고 있는 하일지의 {경마장 가는 길}도 이런 소설들의 수평적 자기 증식의 하나일 것이다. (…) {경마장 가는 길}의 줄거리는 매우 단순하다. (…) 인물설정은 통속적인 순정극이나 연애소설의 진부한 시츄에이션과 크게 다르지 않다. (…) 그러나 하일지 소설을 통속소설로 폄하하기는 어렵다. 그 이유는 첫째, 최근 문학 논의의 중요한 대상이 되고 있는, 이른바 포스트모던한 소설처럼 미학적 대중주의를 원리로 하여 대중문학의 상업적 요소를 과감하에 차용한다고 (…) 둘째, 내용의 단순함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대부분의 통속소설과 달리 복잡한 형식을 갖기 때문이다." "90년대 들어서면서 나오기 시작한 실험소설들 가운데 가장 논란을 많이 부른 작품"인 {경마장 가는 길}은 한편 "실제 일어난 사건을 그대로 썼다느니 (…) 부도덕한 주인공과 작가의 시선이 일치하여 미학적인 거리가 없다느니, 그렇게 섹스에 관한 묘사가 노골적인 게 포스트모더니즘이냐느니 (…)"(권택영, p.285) 하는 부정적 시각의 평가나 또는 "과천과 제주도, 두 군데 밖에 없는 경마장을 찾지 못해서 시내의 여관만 전전하는 주인공의 소설이 문학적 논쟁이 아닌 사생활 논쟁의 차원에서 화제작이 되고 있다."라는 비양거림의 논평도 받고 있다. 무릇 소설이란, 문학 장르의 시작과 더불어 따라서 모더니즘 소설미학이든 포스트모더니즘 소설미학에서에서든지간에 특히, 그 소설적 형상화의 심미성이라는 예술적·심미적 측면에서의 문제는 무엇보다도 '사실과 픽션의 긴장관계', 그것의 형상화에 대한 평가에서 해결될 것이다. {경마장 가는 길}에 대한 평들의 초점도 이 작품에서 이루어진 소설적 형상화에 중점적으로 근거하고 있다. 이 소설에 나타난 "작품 형태상의 특징"과 "작가의 소설론을 통하여 본 작가의 집요하게 끌고 나가는 묘사의 문제, 작품의 순환적 구조, 경마장의 상징적 이미지와 의미 등의 문제"를 중심으로 이 작품을 관찰·평가하는 임혜경의 "작품 해설"({경마장 가는 길} 민음사, 1990)에서는 "(…) 이런 각도 이외에도 연구할 수 있는 많은 과제를 던져주는 문제작"이라고, 그리고 "하일지는 소설 장르에 활기와 다양성을 줄 수 있는 어떤 비밀을 알고 있는 작가"(p.599)라고 평하고 있다. 이 소설의 줄거리를 살펴보면―이 작품의 평자마다 줄거리 요약에서도 그 작품해석에 따른 묘사가 드러나고 있으므로 의도적으로 평자들의 (작품)줄거리 소개를 인용해 본다.―"근 600쪽에 달하는 분량으로 볼 때 {경마장 가는 길}의 줄거리는 매우 단순하다. 그것은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R이 '한국'에서 겪는 혼란과 고통의 기록이다.(…) 인물설정은 통속적인 순정극이나 연애소설의 진부한 시츄에이션과 크게 다르지 않다. 또 J에 대한 R의 집요한 성적 여구는 마치 포르노처럼 작품 전체의 질료를 섹스로 축소시킨다. (…) 그러나 하일지 소설을 통속소설로 폄하하기는 어렵다. (…) 내용의 단순함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대부분의 통속소설과 달리 복잡한 형식을 갖기 때문이다." "R은 귀국하자마자 그와 프랑스에서 3년 반 동거를 했던 J라는 여자를 만난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그다지 반가이 맞이하지 않는다. 그 두 인물 사이에는 처음부터 어떤 불화가 시작되는데 그 불화를 묻어둔채 주인공 R은 대구에 있는 그의 집으로 내려간다. 대구로 내려간 그는 그의 늙은 부모와 가족들을 만나고, 그의 앞에 주어진 열악한 현실에 직면한다. 그러나 그는 현실을 타개할 아무런 방법이 없다. 그는 그와 전혀 맞지 않는 그의 아내와 이혼하려고 애를 쓰지만 그의 아내는 막무가내로 말이 통하지 않는다. 한편 서울에 있는 J라는 여자와의 사이는 점점 더 허물어져 간다. 그는 끝내 모순 덩어리로 보이는 한국이라는 나라를 떠나 새로운 출발을 하려고 마음먹고 자신의 계획을 J에게 제의하지만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고 모순된 (윤리관을 지닌) 그녀는 결국 그를 배반한다." 소설 속에서 일어나는, 특히 남자 주인공 R과 J라는 여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간추려 본다면, "R이라는 인물이 5년 반 동안의 프랑스 유학생활을 마치고 박사학위를 받아 돌아온다. (…) 유학시절에 동거하며 R이 학위논문과 신춘문예 응모 평론을 써주었던 J라는 여자가 주된 상대역으로 등장하며, R의 자아와 세계가 벌리는 대립과 갈등의 파노라마에 중심적인 매개체의 역할을 맡는다. 요컨대 J의 마음은 R로부터 떠나 있으며 (…) 두 인물 사이의 조화로운 만남은 이미 끊임없이 (…) 적대적인 부딪힘으로 대체된 셈이다."(김종회, p.490) "(…) 외제 박사 R은 그의 학력과 수고에 부응할 만한 아무런 자리도 차지하지 못한다. (…) R에게는 이 평탄하지 못한 자리찾기의 원인을 탐색하려는 현실적 개안이 결여되어 있다. (…) 그러할 때 R의 일그러진 의식은 패쇄된 자아의 회로를 맴돌며서 몇 가지 편집적인 증세를 나타낸다. R은 계속해서 J에게 멸시찬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며 왜 그래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다고 불평한다. 그러면서 프랑스에서와 같이 J와의 온전한 섹스를 갈망하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그에게는 J가 그럴 수 없다는 원론적인 명제만 남아 있으며, 나중에 J와의 간극이 돌이킬 수 없도록 벌어지자 그녀의 부모에게 프랑스에서의 일을 폭로하기도 하고 그 대가로 금품을 요구하기도 한다. 또하나 R이 끈질기게 추구하고 있는 것은 아내와의 이혼이다." "마침내 R은 이처럼 어긋난 인간관계와 문화적 충격을 문면으로 형상화하기 위하여 <경마장 가는 길>이라는 소설을 쓰기로 작정한다."(김종회, p.491) 이와 같이 이 소설의 주인공 R은 "소설 쓰기"를 택한 인물, 즉 소설가로서 주인공이다. 그리고 "삼인칭 주인공에 철저히 초점이 맞추어 있는" 이 소설의 구조는 시작과 끝이 연결되어 있는 소설 구조를 이루고 있다. 근 600쪽에 달하는 소설 {경마장 가는 길}의 대미는, 주인공 R이 "(…) 그리고 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어 급히 써내려가기 시작했다."고 서술되면서 다음과 같이 끝을 맺고 있다. "2월 16일. K가 돌아왔다. 어쩌면 2월 15일 또는 17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지구를 반바퀴 돌아왔기 때문에 막상 도착했을 때 그는 곧 시간의 혼동 속으로 빠져들고 만 것이다. (…) 그리고 알 수 없는 불안에 시달리느라고 그런 것에 대하여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중요한 일은 아니다. 시간이라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지 이미 그에게 주어졌다. 여기까지 단숨에 써 내린 그는 공책 위 삼 센티 정도 폭의 여백에다 좀 큰 글씨로 이렇게 썼다. 경마장 가는 길. " (소설의 맨 끝; {경마장…}, p.586-587). 한편 소설의 첫머리에서는―R이란 이름이 K로 바뀌어 있을 뿐―위와 동일한 텍스로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 "2월 16일. R이 돌아왔다. 어쩌면 2월 15일 또는 17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지구를 반바퀴 돌아왔기 때문에 막상 도착했을 때 그는 곧 시간의 혼동 속으로 빠져들고 만 것이다. (…) 그리고 알 수 없는 불안에 시달리느라고 그런 것에 대하여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중요한 일은 아니다. 시간이라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지 이미 그에게 주어졌다."(소설의 맨 처음; {경마장...}, p.9) 소설이 시작되는 첫머리의 텍스트와 주인공 R이 소설을 쓰기 시작하는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의 것은―R이란 이름이 K로 바뀌어 있을 뿐―이와 같이 동일한 텍스트로 연결되어 있다. "주인공 R이 마지막으로 쓴 여덟 줄의 글로 이 소설의 첫부분과 일치하는"(임혜경, p.596) 소설적 형상화는 '소설을 쓴다'는 행위 주체자로서 주인공 R과 인쇄된 텍스트 {경마장…}의 작가 하일지와의 연결을 낳는 효과를 발휘한다. '주인공과 작가'를 연결시키고 있는 이러한 소설적 형상화를 '사실과 픽션의 긴장관계'의 주제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면, 작가의 '자전적' 사실과 주인공의 '소설적(허구적)' 사실이 밀착되어 있는 점은, 소설의 끝과 시작이 연결되는 형상화 수법의 효과에서 뿐 아니라 이 작품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작가 하일지라는 이름이 프랑스 말 이니셜로" 같기에 이에 대한 "유추의 가능성도 있지만, 소설 속의 주인공이 "글을 쓰는 작가"(글을 쓰기 시작하는 인물)로서 우선 '작가'(하일지)와 주인공의 유사성도 뚜렷이 드러나며, 어쨌든 "소설을 쓰기로 작정한" 소설 속의 주인공 R은 "집요하게 글쓰기의 강박관념을 보여주고 있는" "작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다." 한편, 우리가 이러한 소설구조의 분석 및 ("작품 형태상의 특징", "글쓰기 양식" 등의) 관찰에서, 예컨대 {경마장 가는 길}의 주인공 "R이 마지막으로 쓴 여덟 줄의 글로 이 소설의 첫부분과 일치하고" 있기에, 또는 "작가 하일지와 주인공 R이 어떤 정신적 교감을 가지고 있다는 보다 결정적 단서는 (…) 주인공이 쓴 소설이 제목과 그 첫부분의 내용이 서로 일치하고"(임혜경, p.596) 있고, "소설 밖의 소설이 소설 속의 소설로 전이 또는 전도 (…) 이중의 구조를 띠고 있는 작품 (…) 소설의 시작과 끝이 서로 만나는 지점에서 주인공의 이름이 R에서 K로 변해 있기 때문에 (…) 연속적이 윤회를 계속(임혜경, 597)"하는 소설 구조라는 "작품의 순환적 구조"(임혜경, p.599)의 분석에만 그친다면, 이 작품이 안고 있는 문학적 형상화의 의도 및 효과에 대한 관찰을 놓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그렇게 짜여진 그렇게 생겨난 문학적 형상화가 어떤 효과를 발휘하는지가 관찰·해설되어야 할 것이다(vgl. 수용·영향미학적 시각에서 텍스트의 호소구조에 근거한 작품해석). 왜냐하면 위 평자(임혜경)의 작품해석처럼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과 첫부분이 일치한다는, 또한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이 소설의 첫부분에 나온 (사실상 이 소설의)주인공 R이 아니라, 즉 (앞으로) 쓰여질 소설의 주인공인 K이라는 등, 소설구조상의 관찰에서 '그것은 그렇게 생겼다'는 식의 생김새 그대로를 파악하여 (소설적 형상화의)'사실 확인'에 그친다면, 주인공 R과 작가(하일지)의 연결로 이루진 문학적 형상화의 의도 및 효과에 대한 해석을 빠트리게 될 것이며, 한편 실제적인 '소설미학적' 작품해석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경마장 가는 길}의 소설 구조에서도 "작가의 개입"이라는 소설 기법이 지적되고 있다. "소설의 결미에 이르면 한순간 느닷없이 전지적 작가의 시점이 작품 속으로 뛰어드는 곳이 있다. 필자로서는 적지 않게 당혹했던 이 부분은, 서술 분량으로 볼 때 6백면 가운데 2면이 조금 넘을 뿐이며 그때까지의 소설 전개와 특별히 다른 내용이 함축되어 있지도 않다. 이 부분 이후에 R의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어 에필로그식의 후일담도 아니다. <나>라는 화자가 R의 심적 상태를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이와 같은 예가 된 이유가 무엇일까." 이러한 방식을 "작가의 개입"을 통해 이루어진 형식이라고 본다면, 무엇보다도―"작가의 개입"을 통해, 즉 '주인공과 작가 하일지의 연결'이 이루어지는―문학적 형상화의 '의도' 및 그 '효과'에 대한 관찰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한편, 이 소설의 시작과 끝이 주인공과 작가의 밀착된 관계로 연결되고 있는 이러한 구조를 "작가 개입"의 수법(소설 기법)의 시각에서 관찰해 볼 수 있는 것인지는 생각해 볼 문제이다(이것은 앞에서 관찰한 이인화 소설작품 분석에서 "작가 개입" 방식과는 다르다). '주인공과 작가의 연결'로 이루어지는 소설적 형상화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소설의 역사상 고래로부터 자전적 소설의 형식을 취하는 소설에서 또한 자전적 소설의 양식이 아니더라도 어떻든 소설의 형식에서는 주인공이 작가에 일치되는 것이 은연중 드러나게 되는데, 이는 무릇 모든 소설적 형상화가 본질적으로 '현실과 픽션의 관계'를 내포하듯 특히, 일인칭 소설의 경우, 작가 자신과 소설 주인공의 이러한 연결은 독자의 이해에서도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앞에 언급한 "예술가소설"(Kunstlernovelle)의 경우에서도, 주인공이 '소설을 쓰는 인물'이기에 작가와 일치하는 면모가 더욱 부각되는데, 기실 이런 것은 '사실과 픽션의 긴장관계'를 처리하는 가장 상식적이며 일반적인 소설 장치의 하나이기도 하다. {경마장 가는 길}의 주인공 R과 작가(하일지)의 일치("재현")라는 이러한 형상화의 효과는 독자로서의 비평가에게서도 발휘되고 있다. "작가의 전기적 사실과 상당부분 일치하는 이 소설이 그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가"라거나 또는 "실제 일어난 사건을 그대로 썼다"는 의구심을 품게 하여 이 작품의 문학적 형상화에 대한 평가와 더불어 "문학적 논쟁이 아닌 사생활 논쟁의 차원"에서도 세인의 관심을 끌면서 문제작으로 주목되기도 했다."는 데서도 알아볼 수 있다. 또한 작가(하일지) 자신도 소설을 시작하기 전에, 곧 {경마장 가는 길}의 [작가의 말]에서 "이 책에 씌어진 이야기는 현실세계에 실제로 있었던 일이 아니라 작가가 순전히 상상에 의하여 꾸며낸 것임을 밝혀둔다. (…) 그것은 작가가 책임질 일이 못된다."라고 못박고 있다. 이러한 '작가의 말'은―"사실과 허구의 긴장관계"라는 주제에 있어서 ―현실의 소설적 형상화의 ABC에 해당하는 것으로, 꾸며낸 현실(fingierte Wirklichkeit=이야기)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독자들이 다 알고 있는 상투적인 소설적 형상화의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이것이 소설이다'는 사실은 한편 하일지의 장편'소설' {경마장 가는 길}이란 책 껍질에 쓰여진 것("하일지 장편소설")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 "현실세계에 실제로 있었던 일이 아니라 작가가 순전히 상상에 의하여 꾸며낸 것"이라는 이 텍스트는 실재의 사실과 '거리'를 취하려는 소설형식상의 장치에 불과하다. 고래로부터 여느 모든 소설이 다 그렇듯이, 이 소설을 읽은 여느 독자든지 '작가의 말'을 거기에 쓰여진 그 내용 그대로 받아들이는 독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소설의 본질(생명)이 꾸며낸 부질없는 허황된 이야기라면 어느 독자가 그렇게 빨려들어 이것을 읽겠는가. 이렇게 볼 때, 소설의 주인공 "R"과 작가의 이름 "하일지"에서의 양쪽이 일치되는 "유추의 가능성"(vgl. 임혜경, p.596)도 사실상은 현실의 소설적 형상화의 ABC에 해당하는 수법으로, 소설 주인공의 소설적 사실(사건)과 작가의 자전적 사실을 일치시키면서 동시에 분리시키기 위한 장치들로 소설의 기본적인 유희의 전제조건에 해당한다. 예컨대, 일인칭 소설이라 해서 그것이 반드시 '자전적 소설' 형식이라고, 또한 삼인칭 주인공에 철저히 초점이 맞추어 있는 소설의 구조라고 해서 그것이 '자전적 소설' 형식이 아니라고도 할 수 없듯이, {경마장 가는 길}에서 '소설을 쓰는 작가로서의 소설의 주인공'이라는 이러한 소설적 형상화만을 가지고 이 작품이 '자전적 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게 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소설의 '시작과 끝의 연결' 및 '작가와 주인공의 일치'라는 이러한 형상화의 관찰 및 해석에서 중요한 것은 역시 그것이 자전적 형상화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를 따져보기 보다는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생김새'의 관찰), 그러한 소설적 형상화의 방법(곧 소설방식 및 수법)으로 발생하는 '문학적 효과'가 어떤 것인가를 살펴보는 것이 보다 더 핵심적인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사실과 픽션의 긴장관계를 해소하는 형상화 수법인 '작가와 주인공의 일치'를 택한 작가의 의도와, 바로 이러한 형상화로 인해 생겨나는 효과, 다시 말해 우리들 수용자(독자;비평가)에게 미치는 영향은 어떤 것인가에 이 작품의 질(문학성)이 달려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작가의 전기적 사실과 상당부분 일치하는 소설이 그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가라는 의구심을 품게하는"(김종회, p.494) 독자반응도 그런 효과의 발휘를 입증하는 하나의 예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소설적 형상화의 '심미적 측면'에 대한 관찰에서는, '작가(하일지)가 예컨대 주인공(R)이냐' 또는 "작가가 실제 일어난 자신의 사건을 그대로 주인공 R의 이야기로 썼느냐 어떠냐"(vgl. 권택영, p.285) 하는 추측이나 의구심은―예컨대 이 창작 텍스트("호소구조")의 효과 발휘에 대한 구성요소로서―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문제는 이러한 소설적 형상화가 어떤 문학적 효과를 발휘하는가, 다시 말해 작가는 왜 이런 소설적 형상화를 택하는가에 달려 있겠다. 이것은 작가 하일지 자신이 전문적인 논문을 작성한 바 있는 소위 "소설의 거리"에 한 문제이기도 하다. 이러한 소설 주인공의 형상화 및 소설 구조는 작가(하일지) 자신의 소설이론에 의하면 "재현"이라 하겠다. 그의 "재현" 이론은 "사실주의 이론"의 깊이있는 이해 뿐 아니라 (현실의 반영 또는 재현으로서)문학적 형상화의 미학이론적 핵심을 꿰뚫어 보고 있는 창작가(작가)임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어떤 것, 즉 인간과 인간이 처해 있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기만 하면 대부분의 경우 상당한 미적 가치를 갖는다고 나는 믿는다. 어떤 소설이 만약 소설 미학적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어질 수 있다면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우선 그 소설에서 그리고 있는 것이 인간과 인간이 처해 있는 현실이 아니라고 판단될 수 있기 때문이고,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있는 그대로 재현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 있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나를 사실주의 이론에 너무 천착하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초현실주의 시나 누보로망 따위를 공부해 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것들을 공부하면서 알아낸 것은 그러한 사조의 문학은 내가 말한 이러한 원칙에 더욱 철저하다는 사실이었다."(하일지:{경마장…}의 [작가의 말]) 그러나 어떤 소설가의 이론이 A라고 해서 그가 쓴 소설이 반드시 A(적인 것)로 탄생하지 않듯이(vgl. 그의 "사실주의 이론"과 "재현"이론) 작품관찰자로서 우리는 소설 자체, 인쇄된 창작텍스트 {경마장 가는 길}의 형상화 및 그것의 (문학적)효과를 근거로 하여 논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현실세계에 실제로 있었던 일이 아니라 작가가 순전히 상상에 의하여 꾸며낸 것"이라는 말이 "작가의 말"에 등장한 사실, 그리고 작가가 그것을 구태여 [작가의 말]에 씀으로써 강조·부각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며 어떤 효과를 발휘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작가가 예컨대, 이렇게 뻔한 사실에 관해 다시 언급한다는 것은 상투적인 소설 수단 이외에 반드시 어떤 의도를 가졌거나, 따라서 무언가 그 특정 효과를 발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 문학적 형상화의 공간으로서 "경마장 가는 길" 이러한 작품관찰의 시각에서 볼 때, 여기서 "경마장 가는 길"이란 표제어(단어)는 소설의 제목이면서 동시에 소설 구조의 여러 요소들을 연결, 함께 얽어짜고 있는 소설형식상의 "모티프(Motiv)" 노릇을 하고 있는 징표(Merkmal)이다. "경마장 가는 길"은, 현실과 픽션의 긴장관계, 작가와 주인공의 긴장관계를 문학적으로 창출해내는, 그리고 사실과 픽션의 긴장관계를 분리·종결시키는, 그런 의미에서 그 자체로 완결되는 문학적 형상화의 공간(현장)이다. 그것은 하나의 문학적(시적) 언어(ein poetisches Wort)처럼 울리고 있으며, 이미 하나의 문학적 언어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이 소설 {경마장 가는 길}의 맨 끝에 등장하는 "경마장 가는 길"이란 "소설을 쓰자"는 말과 동일시 될 수 있겠다. 이것이 소설 제목으로서 풍기는 '문학적' 분위기 그리고 이 소설 속의 군데군데에서 등장하는 "경마장 가는 길"이란 단어에서, 마치 한 편의 詩에서(또는 유행가나 대중가요에서도) 노래 후렴구처럼 반복되는 데서 그렇게 느낄 수 있듯이, 우리가 이에 대한 소설미학적 분석 및 해설을, 즉 이에 대한 이런 저런 복잡한 설명을 요하지 않은 채 단숨에 '문학적' 분위기를 감지하는 것은 우리의 (상식적인)문학이해의 논리에 근거하고 있을 것이다. '문학적(시적) 언어'로서 문학적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 이러한 문학적 형상화의 예를 외국문학작품에서 찾아 설명해 본다면―우리 나라에도 번역되어 잘 알려져 있는, 그리고 전혜린 씨의 (유고)수필집의 제목으로 활용되어 한국 독자에게 잘 알려진 (하인리히 뵐의 소설)"그리고는 아무 말도 안했다"를 예들어 볼 수 있겠다(Heinrich Boll:Und sagte kein einziges Wort). "그리고는 아무 말도 안했다"는 독일 작가 하인리히 뵐의 1953년에 쓰여진 소설작품의 제목이다. "그리고는 아무 말도 안했다"라는 이 텍스트는 뵐의 이 소설에서 그 자체로 아무런 각별한 뜻도 없는, 또한 소설 속에서 소설의 줄거리나 주제와 연결되는 중요성도 없는 것이다. 반면에, 전혜린 씨의 (유고)수필집의 제목으로서 "그리고는 아무 말도 안했다"는 '유고집'의 제목으로서 故人의 죽음과 연결된 의미를 담고 있는 셈이다. 한편, 뵐의 소설에서 "그리고는 아무 말도 안했다"는 거기에 등장하는 소설 주인공이 길을 가다가 우연히 흘러 들은 어느 유행가사(Schlagsanger)의 한 구절(소설 속의 "노래 후렴구")에 불과한 것으로, 이것을 작가가 소설 속으로 인용·몽타주해 온 것이다. 이 소설의 제목 {그리고는 아무 말도 안했다}와 동일한 텍스트는 소설 속에서 자연스럽게 곳곳에 등장하고 그렇게 반복되면서, 소설 구조상의 여러 요소들을 연결시키면서 함께 얽어 짜고 있는 (소설구조상의)"모티프" 노릇을 하고 있다. 이것은 앞에 언급한 "경마장 가는 길"이 시적(문학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면서 이러한 소설형식상의 기능을 발휘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고는 아무 말도 안했다"라는 문구 자체는 기실 뵐의 소설 {그리고는 아무 말도 안했다} 속에서 별다른 의미 없는 것으로, "경마장 가는 길"의 경우에서와 같이, 이 소설작품의 독자에게 풍기는 소설적 분위기를 통채로 담고 있는 문학적 형상화의 공간을 연출해 주는 구성체가 되는 언어적 요소이다. 하일지의 창작소설 {경마장 가는 길}에서 "경마장 가는 길"이란 이 텍스트(단어)는 문학적(시적) 언어로서, (하인리히 뵐의 소설작품에서) "그리고는 아무 말도 안했다"가 그렇듯이, 그것은 마치 한 편의 詩작품에서 "라이트모티프"(Leitmotiv)처럼, 또는 유행가사나 대중가요 한 편의 노래(가락) 후렴구처럼 반복되면서, 소설적 분위기를 자아내고, 따라서 '문학적'으로 울려 퍼지면서 "소설 공간"("글쓰기의 공간")을 탄생시키고 있다고 본다. 이것은 문자가 지닌 별다른 아무런 의미(Wortbedeutung) 없이, 즉 텍스트의 뜻(Sinn)이 아니라 소리만 인용되고 있는 '언어적 유희'를 이루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언어적 형상화가 단순히 작가에 의해서 그냥 마구잡이로 탄생한 것은 아니다. 이 모든 것은 작가에 의해서 생겨난, 즉 창조된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경마장 가는 길"이란 단어 그것은 문학(소설)적 형상화의 구성요소로서의 역할을, 그리고 (소설구성요소로서의) "모티프" 기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고 본다. 이러한 소설적 형상화의 측면은 그러기에 이 작품의 (의도적으로 이루어진) 가장 기교적인 부분이며, 바로 여기에서 이 소설의 문학적 형상화―문학텍스트의 심미적 質―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문학'(현실의 문학적 형상화)이 그리고 '소설'(현실의 소설적 형상화)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독자에게서는―물론 포스트모더니즘 소설미학이 아니라 모더니즘적 소설미학('현대' 소설미학)에 대한 이해에 준한 것이지만 ―또한 문학적 형상화, 곧 소설미학에 대한 조예가 있는 평론가라면, 그들에게서는 "경마장 가는 길"이란 문학적 표현에 대한 이런저런 복잡한 근거해명이나 설명 없이 문학어(ein poetisches Wort)로서 풍기는 '문학적' 분위기가 곧 감지될 것이며, 독자들은 문학적 형상화 공간(ein poetischer Raum)으로서 "경마장 가는 길"의 이미지 및 그것의 역할, 그리고 그것이 "글쓰기의 공간"을 지칭한다는 분명한 사실을 곧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경마장의 진짜 의미는 무엇인가? 경마장의 상징적인 이미지는 어떤 것인가? 이에 대한 가능한 답을 유도해낼 수 있는 적절한 예문 ({경마장…}, p.562 인용문) (…) 이 경마장은 작가의 <글쓰기의 공간(espace de l'ecriture)>, <소설적 공간(espace romanesque)>을 의미한다. 이 공간은 경마장이란 단어가 주는 대지에 붙어있는 고착된 의미보다는 "경마장은 지금 공중에 가득히 흐르고 있다"({경마장…}, p.562)는 말이 암시해 주듯이 (…) 이 자유로운 공간은 시작도 끝도 없는, 늘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공간이며 변증법적인 논리가 아닌, 긍정과 부정이 자유로이 왔다갔다할 수 있는 <교차로>, <네거리>인 것이다."(임혜경, p.598-599) "경마장 가는 길" 이것이 어떤 뜻을 전달해야 한다면, 앞에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그것은 "소설을 쓰자"는 말과 동일한 것이다. 그것은 사실과 허구의 함몰로서 소설적 형상화가 이루어지는 현장을 가리키겠다. '작가와 주인공의 연결·일치 및 현실과 픽션의 관계를 중심으로 말해 본다면, 자전적(전기적) 사실과 소설적 사실이, 작가의 자전적 사실과 소설 주인공의 사건(줄거리로서의 소설적 사실)이 하나로 용해되어 이쪽 저쪽에 양 다리를 걸친 채, 무언가 다른 제3의 것, 소위 창작(문학)세계가 이루어지는, '사실과 픽션'이 함몰되는 지점이다. 여기에서 생겨나는 문학적 형상화의 공간으로서 "경마장 가는 길"은 "소설 공간"("글쓰기의 공간")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문학적 표지(標識) 언어로서의 "경마장 가는 길"에서 "경마장"이라는 그것의 일상어적 의미나 "물리적인 의미로 상정"(전영태, p.267)하려는 독자의, 또한 작품비평의 시각은 이 작품(또는 이 문학어) '경마장 가는 길'이 발휘하는 문학적 효과를 감지·수용할 수 없을 것이라고 본다. 예컨대, "R은 소설의 여러 곳에서 경마장에 대한 글을 쓰려 하는 데 경마장이란 어휘의 이미지, (…) 그것이 형상화하는 의미망에 대해서는 (…) 언급도 없다. (…) 이 소설(…)에서는 단지 R의 치열한 자기표현욕이 찾아낸 분출구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1. 또 "과천과 제주도, 두 군데밖에 없는 경마장을 찾지 못해서 시내의 여관만 전전하는 주인공의 소설이 문학적 논쟁이 아닌 사생활 논쟁의 차원에서 화제작이 되고 있다."(전영태, p.267)라는 작품평은―이것은 일부러 비판적으로 희화한(ironisiert) 경우이겠지만 어떻든―"물리적인 의미로 상정"하여 해석해보려는 이러한 자세의 관찰은 이 소설 {경마장 가 길}에 이미 이루어져 있는 문학적 형상화가 발휘하는 효과를 간과하게 될 것이다. 무릇 문학적 형상화란―모더니즘 미학에서―어느 정도 상징적 효과를 핵심으로 한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어떻든 그러하다. 다시 말해, {경마장 가는 길}을 소설미학적으로 관찰하고자 한다면, "경마장 가는 길"이란 텍스트가 이 작품에서 안고 있는 (이미 이루어져 있는 소설세계인) 문학적 형상화의 기능, 어쨌든 그것의 질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이 작품을 관찰·해석하는 시도를 해야 할 것이라고 본다. 하일지의 {경마장 가는 길}에서의 소설적 형상화는―다음에 계속되는 작품관찰 및 분석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바, 특히 사실과 픽션의 긴장관계에서 '현실의 심미적 구조변화로서 문학텍스트'라는 관찰 테마에 연결하여 보면―'모더니즘적' 소설미학에서의 형상화 논리에 근거하고 있으며 또 그렇게 구현되고 있다고 본다. 이 점에 있어서도 본 연구의 관찰대상작품들 4편 중에서 소설(문학)적 형상화에 있어서 가장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경우로 보인다. 3) 문학텍스트의 '호소구조'와 소설 쓰기의 '의도'의 문제 {경마장 가는 길}에서 "소설을 쓰기로 작정한" 주인공 R의 소설쓰기의 의도는 무엇인가? '경마장 가는 길'이라는 "소설을 쓰기로 작정"하는 소설 속의 주인공R은 5년 반 동안의 프랑스 유학생활을 마치고 박사학위를 받아 돌아온 그의 학력과 수고에 부응할 만한 아무런 자리도 차지하지 못하며 이러한 "외재박사 R에게는 이 평탄하지 못한 자리찾기의 원인을 탐색하려는 현실적 개안이 결여되어 있다. 더욱이 유학시절에 동거하며 R이 학위논문과 신춘문예 응모 평론을 써주었던 (이 소설의 주된 상대역으로 등장하는) J라는 여자 인물과의 갈등, 그리고 J의 마음은 R로부터 떠나 있으며 이 두 인물사이에는 "조화로운 만남"은 불가능해지고, 현실적으로는 "끊임없이 적대적인 부딪힘"(vgl. 김종회, p.490)만이 존재한다. "그러할 때 R의 일그러진 의식은 폐쇄된 자아의 회로를 맴돌면서 몇 가지 편집적인 증세를 나타낸다. R은 계속해서 J에게 멸시찬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며 왜 그래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다고 불평한다. 그는 프랑스에서와 같이 J와의 온전한 섹스를 갈망하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그에게는 J가 그럴 수 없다는 원론적인 명제만 남아 있으며, 나중에 J와의 간극이 돌이킬 수 없도록 벌어지자 한편 동시에 아내와의 이혼을 끈질기게 추구(?)하면서 J의 부모에게 프랑스에서의 일을 폭로하기도 하고 그 대가로 금품을 요구"(김종회, p.491) 하는 등 R은 끈질기게 노력하지만 아무것도 R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한편 여자 주인공 J는 R을 떠나 "아이가 셋이나" 딸린 "이혼한 남자"와 결혼하게 된다는 이야기가 암시된다. "이처럼 어긋난 인간관계와 문화적 충격을 문면으로 형상화하기 위하여" 마침내 R은 '경마장 가는 길'이라는 소설을 쓰기로 작정하는 것이다. 주인공 R에서의 "경마장 가는 길"이란 '소설쓰기 의도'는, 위의 주인공 중심으로 간추린 소설 줄거리 요약에서 드러나는 바 그리고 '소설쓰기 의도'의 그 저의(底意)가 독자에게 분명히, 따라서 성공적으로 전달되는 바, 주인공 자신의 억울함과 부당함을 폭로하여, 이로써 자기문제 해소 및 자기정당화의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명백하고도 뚜렷한 목적을 드러낸다. 다시 말해, 자신의 이야기('현실')를 "문면으로 형상화"('소설화')함으로써 자기 침해의 원인이 된 상대편에게 "복수"하겠다는 것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주인공 R의 "형상화 충동"에도 억울함의 폭로, 자기문제 해소 및 자기정당화의 욕구 등이 내재한다는 것은, 이 작품의 독자로서의 비평가에게 수용된 소설 속의 주인공 R의 모습에서 잘 드러난다. "(…) R은 걸핏하면 자기 밖의 누군가를 향해 '분노'하고 '원망'한다. 이 감정적 비난은 (…) 계급과 돈에 토대를 둔 기존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비판적으로 인식한 결과일 수 없다. 그 비난은 중산층의 성공에 대한 부러움, 시기, 열등감의 반어적 표명에 불과하다. 즉 그의 '분노'는 현실을 실천적으로 혁신할 수 없는 무기력이 만들어낸 감정이며, 대상을 향해 상징적인 복수를 감행하는 공격적 방어심리의 하나이다. 그는 자신의 궁핍에 근거를 둔 자기증오를 남에게 응징한다. (…) 그는 자신을 포함한 가난한 자의 빈곤에 저항하거나 그 원인을 규명하기보다는 궁핍을 이용하여 중산층, 그리고 아내에게 상징적 지배를 얻는다. 그는 고통스러운 가난을 쾌락으로 전환시키는 의사 매저키스트에 가깝다."(황국명, p.227) "현실로부터 출구를 모색하던 R은 '형상화'의 강한 충동으로 소설을 쓰게 된다.(J와의 '삶의 전모를 밝히는 글'을 씀으로써 R은 자신의 정신적 피해를 보상한다….)"(황국명, p.231) 소설 주인공의 이러한 "형상화해야겠다는 강한 충동"은 가공할 정도로 집요하다. "작품 속에서 작가가 [나]로 등장하여 R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있는데, [나]는 R에게 J와 당신에 관해 얘기를 소설로 쓰는 것을 보류하는 게 어떠냐고 권하지만 R은 작가의 말을 듣지 않고 결국은 "경마장 가는 길"을 쓰고 만다."(권택영, p.285) 어쨌든 이 소설의 주인공 R은 "집요하게 글쓰기의 강박관념을 보여주고 있는", "작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임혜경, p.597)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주인공 R에서의 소설쓰기 의도는 자신의 억울하고 부당함을 폭로하여, 자기정당성의 회복을 찾겠다는 것이 소설쓰기의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동기이며 뚜렷한 목적이기도 하다. R에게있어서는 부당한 현실―구체적으로는 J라는 인물과 연결된 '한국 현실'의 모든 것―에 대한 "분노"이며, 이것을 온 세상에 다 폭로함으로써 '자아'(주인공 자신)와 마주선 대상('세계')에 대해서 앙가픔하겠다는 글쓰기의 목적이 그의 "형상화해야겠다는 강한 충동"에 담겨 있다. 주인공 R의 이러한 글쓰기의 동기(vgl. 작가의 동기) 및 소설쓰기의 의도에서 드러나는 억울함의 호소, 폭로, 복수, 자기정당성의 주장 및 욕구 등등이란 원래, 글쓰기의 주된 동기 및 그 기능에 해당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쓰고 있는 편지나 일기에서부터 소위 위대한 세계 문학작품에 이르기까지의 '글쓰기'의 의도에 어느 정도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 것이다. 이점은 예컨대, "고발 문학"이나 보고문(Bericht)이나 일지(Protokoll), 다큐먼트 형식의 소설적 형상화 등등에서, 또한 아주 훌륭한 심미적 문학적 형상화를 이룩해냈다고 볼 수 있는 문학작품들에서도 그렇듯이, 이에 대한 문학이론적 또는 소설이론적인 지식이 없는 독자에게서라도 일반화된 상식적인 이해로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수많은 독일 문학작품들 중에서 이러한 예를, 토마스 만(Th. Mann)의 단편 {트리스탄}(Tristan, 1903)을 예로 하여 여기서 간단히 지적해 보면, {트리스탄}의 작중 인물 "쉬피넬(Spienell)"에게서 형상화되듯이 그가 글을 씀으로써 또는 상대방에게 편지를 보냄으로써 상대방에 대한 적개심, 자기 상실감, 모멸감 등을 해소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는데, 이러한 (글쓰기로서의)문학의 기능은 '복수의 모티프'이기도 하다. 언어-예술적 형사화가 대가적인 이 단편 {트리스탄}에서는 물론 단순한 일상적인 의미에서 또는 저열한 의미에서의 '복수'만이 아니라 작가 토마스 만의 문학 주제(예:"시민성과 예술성의 갈등")와 결부된 복합적이고 상징적인 의미에서의, 즉 이러한 맥락에서의 '복수'(Rache) 주제는, 글쓰기로서의 '문학'의 아이러니화(Ironisierung)를 통해 언어-예술적으로, 곧 심미적-문학적으로 형상화되고 있기는 하다. 이와같이 글쓰기의 기능이란, 비열한 또는 저열한 것이든 어떻든간에 상대방에 대한 복수 및 (쉽게 말해 '내가 너보다 더 잘 났다.' 식의 만족감 성취로서의) 자기정당성 찾기 등과 어느정도 관련된 것이라고 볼 수 있듯이, {경마장 가는 길}에서 주인공 R의 '언어적으로 형상화해야겠다'는 이러한 글쓰기(소설쓰기)의 강한 충동도 '자기정당화의 욕구'와 결부되어 있다고 본다. 주인공 R의 특히 "형상화해야겠다는 강한 충동"도 (소설의 주인공 측에서 주장하는) 부당한 또는 잘못된 현실의 고발에 기인하며, 의심할 여지없이 '자기정당화의 욕구'와 결부되어 있다. 소설의 도처에서 드러나는 바 주인공 R은 자신의 부당한 처지를 호소하고 올바르지 않은 상대편("J")의 모든 것을 폭로하는 등 '자기정당화시키기'(Selbstrechtfertigung)를 위해 치열할 정도로 집요하게 노력한다. "자기정당화의 욕구"와 결부된 이러한 글쓰기의 목적은 이 소설 전반에서 면면히 흐르고 있다. 따라서 이 소설에 이루어진 외부의 것들에 대한 치밀하고 소상한 묘사(서술), 주인공의 상대방인 작중인물들에 대한, 특히 J와의 섹스 장면 등 가공하리만큼 치밀한 "촘촘하게 박아놓은 그 지독한 묘사"(임혜경, p.591) 등이 그러한데, 이것들은 평자들이 지적하고 있는 바, 그 나름대로 독자를 설득할 수 있는, 일관되어 흐르는, 근본적이고 철저함의 지속성으로 진행되는 주인공 R의 집요한 자세에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서술방식을 단순히 "성공적인 리얼리즘적 서술양식"으로만 본다면, 이 문학텍스트의 "호소구조"를 완전히 소화(수용)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런 집요한 묘사는 한편, 주인공 R의 독특한 "자기방어" 및 자기 주장의 집요함(의 자세), 글쓰기의 목적 및 그 의도에 뿌리박고 있다는 입증이기도 하다. 지독할 정도로 치밀한 서술과 묘사의 기능 및 그 효과는 특히 작가의 주제, 비판 및 불평(Klage)과 자기정당화의 욕구 충족으로서의 글쓰기를 증빙하는 예라고 본다. 이를테면 "J의 부모에게 프랑스에서의 일을 폭로하기도 하고 그 대가로 금품을 요구"하는 등 R이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것은 독자에게(또는 평론가에게) 기이한 느낌을 주면서 동시에 이 소설의 이러한 형상화 때문에 지루하게 느끼지 않고 빠져들어 읽을 수 있게 하는 이 텍스트가 지닌 호소구조(Appellstruktur)의 효과와도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그밖에 "신파시대 근엄한 교육자의 질책을 연상"하게 하는 "주인공 R의 독특한 어투의 현자적, 도덕적 면모도 이러한 효과를 발휘한다. "R이 시종일관해서 사용하고 있는 말투 (…) <너는 왜 안 먹느냐>, <너는 이런 물건들이 없으면 못 사느냐?> (…)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너를 사랑한다는 그 사람에게 너는 나와 삼년 반 동안 프랑스에서 함께 살았다는 걸 이야기해야 한다는 점이다> 등의 어투는 (…) R의 비극은 현실적인 가치척도를 가진 사람들과 비현실적인 방법으로 맞서야하는 부단한 대결상태의 곤비함 가운데에서 생성된다. 여기에 R의 어투는 일정양의 수확을 거두고 있으며, 처음의 생경함이 가셔질 무렵에는 국외자의 목소리로서 상당한 적절함이 있음을 수긍하게도 한다."(김종회, p.493). 그러나 독자에게 호소력을 낳는("담화 능력") 이런 식의 집요할 정도로 "줄기찬 서술"에서는 한편으로는 또 다른 효과(Wirkung)를, 즉 묘사되고 있는 그 상대편 인물이 마치 어딘가 모자란―독자 측에서 보자면―작중 인물 J 그녀가 마치 '정신이상자'로 낙인찍히고 말 정도로, 즉 그런 쪽의 방향으로 몰릴 수밖에 없을 정도로 집요하고도 치밀하게 "지독한 묘사"를 하고 있다는 것도 어떤 다른 특별한 효과를 발휘한다고 본다. 그러기에 평자들이 지적하고 있는 "리얼리즘…" 운운의 이 소설의 문학적 형상화에 대한 평가는 작품이 생긴 그대로를 본 것이지만, 그러한 리얼리즘적 서술양식이 발휘하는 효과, 즉 이러한 문학적 형상화를 통해 드러나는 작가의 주제 및 의도에서 작동하고 있는 효과에 대한 '텍스트 호소구조'적인 분석을 빠트려서는 안 될 것이다. {경마장 가는 길}의 "소설을 쓰기로 작정한" 주인공 R의 의도가, 그의 "형상화해야겠다는 강한 충동"이 핵심적으로 이러한 "복수"행위 또는 '자기정당화의 욕구'라면, 이것은 작가 하일지에게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주인공 R과 인쇄된 텍스트의 생산자인 작가의 연결 및 일치("재현")로 이루어진 소설적 형상화에서 자세히 분석했듯이, 이러한 형상화를 통해 결과적으로 주인공과 작가의 일치, 따라서 '작가'로서의 (작중) 인물 양쪽에서 '글쓰기 의도'의 일치를 낳게 된다. 그렇다면 주인공 R의 소설쓰기 '의도', 이것은 곧 작가 하일지 자신의 것이 아닌가? 소설을 쓰기 시작하는 주인공(R)과 소설을 실제 쓴 작가(하일지)와의 일치는, 앞에서 그 문학적 형상화를 소상히 분석했듯이, 더 이상 설명할 필요도 없이 작가(하일지)와 주인공(R)의 일치(또는 재현)의 형상화를 통해 결과적으로 작가(하일지)의 자전적 사실과 소설 속의 주인공(R)이 겪는 사건과의 일치를 낳고, 나아가 주인공(R)과 작가(하일지) 양쪽 인물의 사고관, 처지(상황), 글쓰기 목적 등의 일치로 인해, 작가 하일지 및 소설 주인공에게서의 '글쓰기 의도'의 일치도 낳게 된다. 따라서 작가의 의도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자면, 작가 하일지 자신의 부당함을 강렬히 호소하면서 모순된 현실, 상대편("J")과 관련하여 올바르지 않은 부당한 모든 것의 폭로, 그리고 이를 통한 '자기정당화와 복수의 욕구 표출'이라는 메시지 전달이다. 그리고 그것이 작품의 주된 내용과 텍스트의 질을 결정하고 있다고 본다. 소설 주인공(R)과 작가(하일지) 양자간의 일치가 이런 식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텍스트의 구조가 발휘하는 일차적인 역할은 다름아닌 '작가 내가 실제 겪었던 일이요' 라고 독자에게 호소하는 기능발휘이다. 작가와 주인공의 여러 측면에서의 일치나 '작가인 내가 겪은 실제 사실'이라고 독자에게 호소하는 이러한 효과 등은 전통 소설미학적으로 볼 때에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이러한 소설적 형상화의 의도로 생겨난, 즉 '작가인 내가 실제 겪었던 일이요'라고 독자에게 호소하는 텍스트구조적 기능 발휘의 이러한 효과는 그 생긴 대로 그 기능대로 나온 결과이기에 문제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심지어 [작가의 말]에서조차 "이 책에 씌어진 이야기는 현실세계에 실제로 있었던 일이 아니라 작가가 순전히 상상에 의하여 꾸며낸 것임을 밝혀둔다. (…) 그것은 작가가 책임질 일이 못된다."라고까지 못박고 있는 이 소설에서는, 작가 하일지와 주인공 R에서 '글쓰기 의도'의 일치로 인해, 결과적으로는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구체화되는 작가(하일지)의 의도가 소설 속의 주인공 R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부당함의 폭로, 상대방에 대한 "복수", 자기 문제의 해소 욕구 등등의 의도에서 소설 쓰기를 한다는 데서 발생하는 문제이다. 이 문제점은 곧 한국 독자들의 반응에서, 유감스럽게도 이 작품 {경마장 가는 길}의 평가에서 "문학적 논쟁이 아닌 사생활 논쟁의 차원"으로 폄하되고 있는 경우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현실로부터 출구를 모색하던 R은 '형상화'의 강한 충동으로 소설을 쓰게 된다(J와의 '삶의 전모를 밝히는 글'을 씀으로써 R은 자신의 정신적 피해를 보상한다. 역설적이지만, 이로써 그는 J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할 수 없다. 공개된 비밀은 더 이상 비밀일 수 없기 때문이다)."(황국명, p.231) 또는 작가 하일지가 "실제 일어난 사건을 그대로 썼다느니…"(장택영, 285) 하는 소문에 의하면, 이 소설 {경마장 가는 길}은 실제 자전적 이야기(소설)라는, 즉 소설의 여자 주인공 J가 R을 떠나 결혼하게 될 작중 인물은 실제 한국 모 대학의 교수로 실재하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사실이 실증주의적 관찰로 입증된다해도, 이것은 어디까지나 {경마장 가는 길}에서 작가와 주인공의 일치는 아무런 (문학적 또는 도덕적) 문제를 낳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전통문학에서도 그렇듯이, 독자들은 이미 수많은 아름답고 훌륭한 자전적 소설들을 알고 있다. 그러나 (다른 맥락에서의 언급이긴 하지만) 이를테면 주인공 R의 이러한 '비열하고 능청스럽고 파렴치한 행위' 등은 독자에게서 그렇게 거부반응을 일으키지 않겠지만, 소설 주인공 R의 이러한 행태가 작가 하일지 자신의 것으로 동일시되어 받아들여지는 경우, 예컨대 소설 주인공 R의 경우에서는 독자들이 그렇게 분노하지 않지만―위의 평자의 독자반응에서 드러나듯이 한국 독자의 문학 정서(?)에서 볼 때 ―작가(하일지)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하는 데에 문제 발생의 소지가 있을 것이다. 소설적 형상화, 소위 글쓰기 '의도'에는 여러 가지 것들이 있다 하더라도 '사실과 허구의 긴장관계'를 형상화하는 소설 쓰기의 의도에, 즉 (작가 하일지의 이론에 따르면 문학적) "재현"의 의도가 고작 이것밖에 안 된다는 데에 문제가 있을 것이다. 이것도 물론 이 작품의 문학성의 평가에서 문제가 될 수 있는지는 생각해 볼 문제이긴 하지만, 어쨌든 이것은 독자비평반응의 결과에서 발생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여기서 실재의 인물과의 일치 여부를 논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일지의 {경마장 가는 길}이라는 소설적 형상화에서 이러한 준거(Indiz), 앞에서 '작가(하일지)와 주인공(R)의 일치'("재현")의 관찰에서 지적했듯이 {경마장 가는 길}의 작중 인물이나 지명, 거리, 대학…등 주로 고유명사들이 "D대학, Y대학, C대학, S대학, W교수" 등등 "프랑스 말 이니셜"(임혜경, p.596)로 표현되는데, 이런 것이야 여느 소설에서도 작가 마음대로 작중 인물의 이름을 지어내는 작명가이듯이 문제가 없겠지만, 이에 반해 유독 어느 한 특정 인물에 대해서는 "프랑스 말 이니셜"의 이름을 주지 않고 "애 셋 딸린 (…) 이혼남"({경마장…}, p.354) "그 사람이"(p.356; p.350 "그 사람은")이라고 구체적으로 표지하고 있는 점이다. "아이 셋 딸린 이혼남" 그는 여자 주인공 J가 R을 떠나 결혼하게 될 중요한 작중인물들 중의 한 사람이다. 그리고 문제는 (한국 현실 속에서) 소문의 주인공 한국 모대학의 교수라는 실재의 인물의 실제 사항("아이 셋 딸린 (…) 이혼남")에 일치한다는 것이다. 독자로 하여금 이렇게 유추해낼 수 있게 함으로써 이 소설적 형상화({경마장 가는 길})는 "사실과 허구" 사이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문학적 형상화에서 어떤 기능을 발휘하는가? 물론 그것은 독자로 하여금 '작가 자신이 실제 겪었던 일이구나' 하는 의구심과 함께, 동시에 '이건 꾸며낸 이야기일 것이다'라는 반응을 불러일으키지만, 여기서는 무엇보다도 '작가 내가 실제 겪었던 일이요'라고 독자에게 강열히 호소하고 있는 효과요소로서 작동한다. 따라서, 아무리 작가가 소설적 형상화를 통해 "그것은 실제 내 이야기가 아니다"고 외쳐대도 소설 주인공과 작 가와의 사실적 일치가 곳곳에 부각되어 있기에 독자는 '이것이 작가 자신의 이야기구나' 하고 느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음의 소설적 장치들에서도 분명하다. "현실세계에 실제로 있었던 일이 아니라 작가가 순전히 상상에 의하여 꾸며낸 것"이라는, 또는 "작가가 책임질 일이 못된다"는 '작가의 말'에서의 텍스트가 그러하다. 이것은 이 소설 {경마장 가는 길}을 읽는 독자에게 '작가인 내가 겪은 실제 사실이란 것'을 뚜렷이 하는 분위기를 독자에게 분명히 하는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고 본다. "현실세계에 실제로 있었던 일이 아니라 작가가 순전히 상상에 의하여 꾸며낸 것"이라고,―이것은 ABC에 해당하는 소설적 장치의 기술인 바―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작가의 말'에서 구태여 언급되어 강조·부각됨으로써, 마치 이러한 효과, 즉 '실제로 있었던 일이 아니라'라고 간주하게 되는 것을 막는 제동장치를 펴는 격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꾸며낸 이야기라는 소설(적 형상화)의 속성상 여느 독자든지 "작가의 말"을 거기에 쓰여진 그 내용 그대로 받아들이는 독자는 거의 없을 것이며 오히려 '아하, 이것은 작가가 실제 겪었던 사건이구나'라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현실 세계에서 실제로 겪었던 일이요'라고 호소하고 있는, 즉 '작가와 주인공의 일치'(사실의 "재현")에서 역효과를, 또는 작가에 의해서 의도된(?)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고 본다. 어쨌든 "작가 하일지=주인공 R"로 인해 결과적으로 주인공(R)과 작가 하일지에게서 '글쓰기 의도'의 일치를 낳고, 이렇게 되면, 즉 소설과 현실의 일치로 벌어질 여러가지 문제들 중에서도 이 테마에서는, 작중 인물이건 실재의 인물이건간에 남녀의 사랑 및 결혼, 이혼 등의 문제에서 벌어지는, 예컨대 (주인공과 작가 및 작중인물) 이러한 '부도덕한' 인물들의 분규(Konflikt)는 물론, 실제 현실 세계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인신공격, 명예훼손 등의 사회적 또는 법률상의 문제들이 대두하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사실, 이런 저런 갈등과 분규 발생의 문제에 대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또는 이러한 우려를 막기 위해서 "작가의 말"을 통해 "이 책에 씌어진 이야기는 현실세계에 실제로 있었던 일이 아니라 작가가 순전히 상상에 의하여 꾸며낸 것임을 밝혀둔다."라는 장치를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독자는 하게 된다. 그런데, 작가는 "그것은 작가가 책임질 일이 못된다…"고 까지 표현(발언)함으로써, 즉 "작가의 책임" 운운하는 이러한 표현에서, 실제 작가 자신의 (사생활에 관련된)이야기라는 독자의 의구심이 깨어지면서, 동시에 그것을 강조함으로 인해, 방금 위에 언급한 실제 현실 세계에서 벌어지는 인신공격, 명예훼손 등의 문제를 독자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든다. 전체적으로 이러한 측면들이 이 소설의 문학적 형상화를 유감스럽게도 평가절하되게 하는 결과를 낳게 하는 원인이라 본다. 이 문학텍스트의 호소구조가 발휘하는 일차적인 효과가 다름아닌 '작가 내가 실제 겪었던 일이요'라고 독자에게 호소하는 기능발휘에 고착(固着)되기에 '새로운 문학적 공간'으로 탄생한 이 소설적 형상화는 예컨대, 고발문학이나 르포문학, 르포르타주 보고문, 일지 형식이나 다큐멘트식의 그러한 단순한 사실 묘사의 리얼리즘 문학의 질로 나가떨어지는, 또한 어떤 평자의 지적처럼 "트리비얼리즘의 차원으로 떨어지기도 한다."라고 평가될 수밖에 없는 결과를 낳고 있다고 본다. 3. 현실의 서사적 자기반영성과 문학텍스트의 호소구조 -박일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중심으로 1) 작가 지망생 주인공의 "출사표로서의 글쓰기" {살아남은 자의 슬픔}(1992)의 주인공도, 앞에서 다룬 {경마장 가는 길}의 "소설을 쓰기 시작하는" 주인공과 유사하게 작가 지망생 "문학청년"({슬픔…}, p.302)이다. {경마장 가는 길}에서 소설을 쓰기 시작하는 주인공이 인쇄된 텍스트의 저자와 연결됨으로써 '작가로서의 주인공'이 탄생, 그렇게 하여 '소설적 공간'이 형성되듯이,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서도 글쓰기를 택하는 '작가로서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소설적 형상화가 이루어져 있다. 인쇄된 창작텍스트 {살아남은 자의 슬픔}의 끝에서는 소설 속의 주인공이 "자기총괄로서의 글쓰기"를 천명하는, 다음과 같은 텍스트로 소설이 끝난다. "자기총괄로서의 글쓰기, 애국적 사회진출로서의 글쓰기, 출사표로서의 글쓰기 같은 작품을 만들어 보자. 우선 제목부터 정하자. (…) 살아남은 자의 슬픔? 나는 생각나는 대로 노트에 제목을 적어보았다.(…) 그렇다면 제목을 [살아남은 자의 슬픔]으로 하자. 나는 고주사에서 휘갈겨 쓴 종이를 찢어냈다. 그리고 차분한 마음으로 출사표를 써나갔다. 내 가슴은 글에 대한 불꽃같은 열정으로 타올랐다. 마치 나는 뜨거운 핏방울로 혈서를 쓰듯, 제목을 한 자 한 자 적어 나갔다. 살·아·남·은·자·의·슬·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의 대미, {슬픔…}, p.303) 이와 같이 소설 쓰기를 택하는 주인공 "나"가 등장함으로써 주인공과 작가가 중복·연결되면서 '픽션과 사실의 긴장관계'를 형상화해내는 '소설적 공간'이 이루어진다. 특히 소설 제목에 있어서, 소설 주인공이 쓰는, 그리고 작가(박일문)가 쓴 인쇄된 창작텍스트의 제목이 동일하다는 점은, {경마장 가는 길}에서 주인공 R이 마지막으로 쓴, 이 소설의 첫 부분과 일치하고 있는 텍스트에 등장하는 "경마장 가는 길"이란 형식과 유사하다. 소설의 주인공과 작가의 연결로 이루어지는 이런 식의 '소설적 공간' 구성의 수법이란, 앞에서 자세히 관찰했듯이, 일인칭 소설 및 자전적 소설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바 '픽션과 사실의 긴장관계'를 형상화하는 소설문법적으로 볼 때 자연스러운 방식이기도 하다. 한편, 이 두 작품들은―양쪽에서 유사하게 이루어진 '소설적 공간', 즉 이들 개개 작품의 '문학적 형상화 테크닉'의 테마와는 무관한 것이겠지만―민음사 시행의 [오늘의 作家賞]을 받은 작품이기도 하다. 박일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제16회 오늘의 作家賞(민음사 1992)을, 하일지의 {경마장 가는 길}은 제14회 오늘의 作家賞(민음사 1990)을 수상했다. 인쇄된 소설텍스트의 제목과 창작텍스트 속의 주인공이 쓰려는 소설 제목이 일치하는 양상이란 외관상 뚜렷하게 눈에 띄는 유사성일 뿐, 실제 이 두 작품에서 이러한 소설적 장치의 문학적 형상화 자체가 어떤 효과를 발휘하는가는 우리의 독서체험('작품감상')에서 금방 드러나듯 각기 다르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서는 소설 속의 주인공이 (소위)창작 메모 형식의 것처럼 자신의 체험들을 기록해 나가는 형식에서도 그러하지만, 동일한 수법의 소설적 형상화임에도 불구하고 그 풍기는 분위기는 서로 다르다. 이에 관해서는 뒤에서 문학의 의도, 문학적 형상화에서의 "자기반영성"(Selbstreflexion), 문학텍스트의 "호소구조(Appellstruktur)" 등의 관찰테마에서 자세히 다루어지지만, 이러한 것들 중 한 가지 면모롤 미리 제시해 본다면, 소설 속의 '작가'로서의 주인공에 있어서 소설을 쓰려는 '글쓰기 의도'의 문제이겠다. "내 가슴은 글에 대한 불꽃 같은 열정으로 타올랐다. 마치 나는 뜨거운 핏방울로 혈서를 쓰듯, 제목을 한 자 한 자 적어나갔다."(p.303)라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의 (結尾)텍스트에서 우리 독자에게 전달되는 분위기는, {경마장 가는 길}에서:"2월 16일, K가 돌아왔다.(…) 여기까지 단숨에 써 내린 그는 공책 위 삼 센티 정도 폭의 여백에다 좀 큰 글씨로 이렇게 썼다. 경마장 가는 길."(p.586-7)의 텍스트와는 다른 분위기의 것이다. 양 쪽 작품 다 '작가로서의 주인공'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자의 슬픔}의 주인공에서는, {경마장 가는 길}에서의 그것과는 달리(vgl. 글쓰기의 의도!), 출사표로서의 글쓰기"라는 주제가 부각되기 때문일 것이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서는 '작가'(박일문)와 주인공 "나"의 연결이 마치 작가 자신의 창작 일기 또는 일상의 창작 메모, 또는 문학에 대한 고백의 형식처럼 보이게 작동하면서, 동시에 "출사표로서의 글쓰기"를 택하는 작가로서의 주인공이 소설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형식이다. "문학청년"이란 어휘에서도 그러하지만, 이것을 '글쓰기 의도'와 관련하여 지적해 보자면 어떤 비장한 분위기마저 자아내는 듯 자못 진지하고 심각한 면모까지 드러낸다. "(…) 그런 지형도를 그려보자. (…) 나자신에 대한 1980년대의 총괄을 하기로 하자. 그래야지만 나는 1990년대를 제대로 싸워 나갈 수 있을 것이다. (…) 자기총괄로서의 글쓰기, 애국적 사회진출로서의 글쓰기, 출사표로서의 글쓰기 같은 작품을 만들어 보자. 우선 제목부터 정하자. 소리 없는 노래? 길의 노래? 불꽃의 노래? 살아남은 자의 슬픔? 나는 생각나는대로 노트에 제목을 적어보았다. 1990년대에 살아남은 자들은 1980년대 역사의 현장에서 죽은 사람들에게 부끄럽다? 강요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살아남은 것은 부끄럽다. 그렇다면 제목을 [살아남은 자의 슬픔]으로 하자. 나는 고주사에서 휘갈겨 쓴 종이를 찢어냈다. 그리고 차분한 마음으로 출사표를 써나갔다. 내 가슴은 글에 대한 불꽃 같은 열정으로 타올랐다. 마치 나는 뜨거운 핏방울로 혈서를 쓰듯, 제목을 한 자 한 자 적어 나갔다. 살·아·남·은·자·의·슬·픔·"(大尾, {슬픔…}, p.303) 한편, {경마장 가는 길}에서 "경마장 가는 '길'"이 문학적 형상화의 표지어(標識語)로서 소설적 공간('문학')을 구축하고 있다면,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서 표현되고 있는 "길"의 상징성도 "문학"을, '글쓰기'의 세계를 가리키고 있다. 이 점은―부차적인 관찰의 지적이겠지만―{살아남은 자의 슬픔} 소설의 끝 부분에서 주인공의 '메모 형식'과 같은 방식으로(또는 산문시 형식으로) 쓰여진 텍스트 한 부분을 읽어보면 금방 알아볼 수 있다. "다시 길이다. 나는 길 위에 서 있다. 이 길은 지금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다. 전에 와본 적은 없다. 그러나 나는 이 길을 안다. 내가 이 길을 아는 것이 대단히 어려운 일은 아니다. 길에는 저마다 독특한 냄새가 있다. (…) 바람이 분다. (…) 이 길 위에서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꿈과 희망을 가졌다. 그리고 노래를 불렀다.({슬픔…}, p.300) 여기서 "길"의 상징성은―'작가'로서의 소설의 주인공에게 있어서 '소설을 쓰려는' 글쓰기 의도는 서로 다르지만―{경마장 가는 길}에서와 마찬가지로 '문학'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것은 일상어로서의 "길"이란 단어가 함축하고 있는 시적 표현이 그렇기도 하듯이 모든 시인·작가들에게서는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문학적 수용 능력을 가진 독자라면 이런 의미의 상징성이 뻔한 사실이기에 이러한 유사성에 대한 지적은 부차적 관찰에 불과하겠다. 이 작품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전체적으로 "제1부 소리없는 노래; 제2부 길의 노래; 제3부 불꽃의 노래"로 3장(단원)으로 짜여있는 장편으로, 그 내용은 간략히 압축해 "우리 시대의 젊은이"인 주인공의 체험을 "조금 다른 차원의 삶을 살고자 하는 젊은이의 전형적 체험"(vgl. 김우창)을 소설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출사표로서의 글쓰기"라는 주제가 암시하고 있듯이 이 소설작품에서는 소설을 쓰려는 소위 작가 지망생의 주인공 '나'가 "저 어두웠던 지난 80년대를 자신의 20대로 보내고 이제 서른을 앞두고 있는 젊은 영혼의 갈등과 불안, 통과의례들이 混亂만이 아니라 混亂한 문체에 담겨 (…) 형상화"(vgl. 조성기)하고 있다. "현실 없는 젊음의 치열한 현실"이라고 이 작품을 해설한 (제16회 오늘의 作家賞의 수상 작품 심사위원의) 평에서의 작품 줄거리 요약을 인용해 본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는 세 사람의 주요 인물이 등장한다. 극단적인 방황으로 20대를 점철한 '나'와 '나'때문에 운동에 투신하나 거기에서 진실을 발견하지 못하고 끝내 자살하고 마는 라라, 그리고 모든 기존의 가치에 냉소적 태도를 지니고 열정적으로 반항하는 삶을 사는 디디의 이야기가 이 작품의 내용이다. 그런데 이들의 이야기에는 중심이 없다. 이 소설은 80년대 한국사회의 모순을 파헤친 이야기도 아니고, 80년대 운동권 대학생이 겪는 투쟁과 고뇌의 기록도 아니고, 순수 젊음이 현실 속으로 진입하면서 삶의 의미를 발견해 가는 성장소설적 기록도 아니며, 80년대 대학생들의 평균적 생활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세태적 소설도 아니다. 80년대 운동권의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긴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80년대 젊음의 조건이요 배경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이지, 80년대 운동권의 전형적 모습을 드러내 준다고 보기는 어렵다. (…)" "이 소설은 거칠고 혼란스럽고 다소 황당한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전통적인 소설문법으로 볼 때는 불만이 많은 작품이다. (…)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현실 없는 젊음의 치열한 현실을 보여주는 것 같다. 거칠고 서툴지만 신선함과 힘이 있는, 문제제기적 작품이다. '90년대적 요소가 많이 발견되는 것도 작품이 지닌 강점이다." 본 연구자의 느낌도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처음 읽었을 때 이와 유사했다. 특히 '현실의 반영으로서 소설적 형상화'라는 주제를 생각할 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무엇을 서술하려고 하는지 종잡을 수 없고, 또 무슨 말을 하려 하는지, 서술된 것의 맥락을 따라갈 수 없어 이해하기 힘들고 서술된 것의 명확한 메시지 전달이 전혀 없는 듯 전체적으로 조잡하기 이를 데 없는 소설적 형상화라는 인상이었다. 그것은, 현재 한국 대학의 문학 강단에서 문학이론을 강의하는 교수로서의 본 연구자에게서 마치 대학생들이 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서술하는지 이론적인 이해 및 주제파악이 결여된 세미나 레포트를 읽고 난 후의 느낌과도 같은 것이었다. 오늘날 대학의 문학강의에서 느끼지 않을 수 없는 문제점으로 인문학적 지식 및 이해력은 커녕, 논리적 사고가 결여되어 있는, 학문적인 것은 고사하고 상식적인 것들에 대한 몰이해를 비롯하여, 전체적인 맥락도 연결도 없이 중구난방으로 인용해 놓은 (대학생의)레포트처럼 보이는 그런 글쓰기에 유사했다. 그러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레포트가 아니라 소설텍스트이기에―정서불안에 가득찬 한 젊은이의 밑도 끝도 없는 넋두리처럼 보이는 '낙서록'(또는 '인용의 낙서록')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한편, 한국 대학의 문학강의 현장도 그대로 한국의 "현재, 여기서"의 현실을 반영하듯 따라서 '문학'에 관한 대학생들의 조잡한 레포트가 이처럼 우리의 현실(여기서:문학관)을 그대로 반영하듯, 이 소설적 형상화도 그러한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는 통찰을 다시금 하지 않을 수 없었던 독서경험이었다. 본 연구자의 이러한 작품감상은 (독자로서의)평자들에게서도, 특히 이 작품의 '혼란스러움'과 '감동'이라는 평가의 양면성에 대한 지적에서 유사하다고 본다. "과감한 압축이 요망되는 작품이다. 소설의 설득력은 구체적 장면의 제시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작가 평에서 일반적으로 들려주기보다는 실제상황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이점 미진한 구석이 많다. 그러나 기운이 있는 작품이고 우리의 삶의 어느 모서리를 비추고 있다는 점을 취택했다."(유종호) "무엇보다도 이 작품은 서술이냐 묘사냐 하는 전통적인 소설의 이분법을 뛰어넘어 서술에 가까운 묘사, 묘사에 가까운 서술들이 현란한 점묘화처럼 이어져있다. 그런 점에서 신선하고, <출사표로서의 글쓰기>라는 주제가 암시하고 있듯이 순수한 면이 있다. 저 어두웠던 지난 80년대를 자신의 20대로 보내고 이제 서른을 앞두고 있는 젊은 영혼의 갈등과 불안, 통과의례들이 混亂만이 아니라 混亂한 문체에 담겨 이만큼이라도 형상화된 것에 점수를 주지 않을 수 없었다."(조성기) '혼란'과 '감동'의 이러한 양면성을 지닌 작품감상 및 작품평가에서 비롯되어, (본 연구과제의 핵심 테마) 소설적 형상화의 '사실과 픽션의 긴장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이 소설텍스트의 현실에 대한 "서사적 자기반영성"에 중점을 두어 관찰해 보려면, 무릇 모든 작품관찰(또는 실제비평)이란 의당 그렇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겠지만, 이 문학텍스트의 "호소구조"를 관찰해 볼 필요가 있겠다. 이 소설텍스트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논리적 사고가 결여되어 있고 더욱이 정서불안에 가득찬 한 젊은이(대학생)의 레포트 같다는 여운을 남긴다는 주장은 다음과 같은 대목들을 읽어보면 금방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13년이란 시간이 나에게는 <스트룸 운트 드랑>의 나날들이었다. 이제 그 격정의 나날들은 …… 흘러 갔는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누군가는 말할지 모른다. 지난 시기는 카오스의 시기였다고, 이데올로기 과잉의 시대였다고…… 그러나 그러지 않고 또 다른 어떤 길이 있다는 말인가? 나는 생각을 멈추었다. 나는 둘러쓴 이불을 걷고 밖으로 나왔다."({슬픔…}, p.284) "[승려가 소설을 쓴다면 누가 믿겠나?](…) 자현이 입을 열었다. [글쓰는 일이 구도 아니겠는가. 출가 사문의 길도 구도의 길이 아니겠는가. 결국 같은 길이 아니겠는가. 자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생각해 보게. 난 방황과 편력, 그리고 예술의 길을 걸은 나르치스를 더 높이 사겠네. 이봐. 자명당. 붓다의 말씀이 생각나지 않는가……정복한 나라를 버리고 세상의 온갖 애착에서 벗어나,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라.(…)]"({슬픔…}, p.288) "[이봐, 디디. 아직 우리에게는 더 많은 이념과 더 많은 과학이 필요 해. 아직 우리는 빈곤해. 여전히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철학의 빈곤, 중심의 부재, 그런 것들이야. 우리 시대의 작가란 그런 화두에서 벗어날 수 없어.]"({슬픔…}, p.293-4) "나는 길을 바라본다. 담배를 꺼내 입에 문다.(…) 미학적 표현이 가능하다면, 얼음 속의 고독. 이유가 있다. 이 길의 특징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이 길은 서로 간에 적대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길은 여전히 슬프다. 나는 그 길을 가기가 두렵다. 하지만 나는 이 길을 가야한다."({슬픔…}, p.301) 위의 텍스트들에서 예컨대, "카오스의 시기", "이데올로기 과잉의 시대", "더 많은 이념과 더 많은 과학이 필요 해" "미학적 표현" 등등 이들 텍스트에 담긴 단어 하나 하나가 논리적(즉, 학문적)으로 말도 안 되는 불명료하고 부적절한 것들인데다, 더욱이 개념의미의 이해 및 서술의 맥락 없이 나열된 것들이다. 수많은 외국어들이 맥락을 찾기 어렵게 불쑥 불쑥 튀어나오는 잡다한 문구들의 나열 등의 이런 것들은 마치 무언가 많이 아는 지적인 인간처럼 보이는 대학생들의 레포트 같은 뒷맛을 남기는 이 소설텍스트의 대목들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도 힘든 난삽한 낙서록의 인상을 남기는 면모는 여기서 일일히 다 제시하지 않아도 이 작품의 어디를 펴건 매 페이지마다에서 이런 면모에 부딪히게 된다. 밑도 끝도 없는 이런 식의 비논리적이며―소설이기에 '논리'까지 언급할 필요는 없겠지만―산만한 이런 것들은 우선 다른 여러가지 이유들 중에서도 잡다하게 열거된 소위 지적인 피인용문 또는 피인용단어들의 나열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마치 그것은 아무런 근거해명도 없는, 넋두리 같은 것으로 보이게도 하며, 어떤 의미맥락도 찾기 힘들게 만드는 서술들이 "현란한 점묘화처럼 이어져 있"는 이 텍스트는―그것이 어떻든 소설작품이기에―창작 메모의 낙서록처럼 보인다. 이 소설의 주인공 "문학청년"의 모습도 그러하다: "(…) 나는 철든 후, 한 두 달에 한 번 꼴로 방을 바꾸었다. 때로는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때로는 권태를 견딜 수 없어서, 때로는 이사를 하면서 뭔가 새로운 일이 있을 것 같다는 예감으로, 때로는 습관적으로……그렇다. 잦은 이사는, 잦은 나의 유격적인 이동은 습관이다. 이미 그것은 내 몸, 내 정신의 일부인 것이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퍼스컴을 디디에게 주었다. (…)"({슬픔…}의 이야기 줄거리가 끝나가는 부분에서, p.283) "작가 역시 출가 사문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 마찬가지로 작가도 부패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둡고 불안했던, 암담하고 초조했던 문학청년 시절의 절망과, 고통과, 허기짐과, 배고픔과, 목마름……그 모든 결핍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초조하게 담배를 피웠다. 오줌이 마려웠다. 도대체 이 불안에서 언제 해방될 것인가. 불안하구나.……하지만 불안은 나의 힘!". ({슬픔…}, p.302) 한편 중구난방으로 나열된, 산만하고 조잡한 이런 식의 서술보다 어떻게 더 적절하게 '정서불안에 가득찬 오늘날 우리 젊은이("문학청년")의 모습을 생긴 그대로 표현해낼 수 있을까 라고 감탄하게 하기도 한다. "오줌이 마려웠다. 불안하구나"와 같은 이런 언어적 형상화 이외의 어떤 다른 방법으로 젊은이의 이러한 정서상태를 그것이 그것인 대로 더 잘 전달할 수 있겠는가. 마찬가지로―"우리의 삶의 어느 모서리"(유종호)이긴 하지만―한국 현실(여기서:90년대의 젊은이)을 있는 그대로 생긴 그대로 이보다 더 잘 형상화해내겠는가 하는 감탄이다. 그리고 위 텍스트의 "불안은 나의 힘!"에서는 "문학청년" 주인공의 '문학'에 대한―분명 작가는 꿰뚫어 보고 있는 것으로―한국식의 문학관에서의 (소위)'순수한' 본질도 구체화되어 독자에게 전달되고 있다. 이와 유사하게 "나는 이 길을 가야한다"는 소설적 형상화의 의도, 그리고 목적에서 드러나는 "서사적 자기반영성"에 있어서도 아주 심각하고 '진지한' 분위기가 여실히 전달된다. "나는 길을 바라본다(…) 미학적 표현이 가능하다면, 얼음 속의 고독. 이유가 있다. 이 길의 특징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이 길은 서로 간에 적대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길은 여전히 슬프다. 나는 그 길을 가기가 두렵다. 하지만 나는 이 길을 가야한다."({슬픔…}, p.301). 2) 문학텍스트의 "호소구조"와 현실에 대한 자기반영성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 대한 작품평들에서, 특히 소설적 형상화의 문제에서 "전통적인 소설문법에서 벗어나거나 부정적으로 보이는 요소들"로 평가한 측면은 미흡한 것이라고 본다. 이러한 작품이해에는 "전통적인 소설문법에서 벗어나거나 부정적으로 보이는 요소들"을 담은 소설적 형상화가 발휘하는 효과에 대한 관찰, 예컨대 독자반응비평적 작품해석의 시각이 결여되어 있다고 본다. 문학텍스트의 질(문학성)이란 "텍스트의 호소구조"에 의해서 결정난다는, 독자반응비평적 시각에서만이 아니라 일반적인 소설미학적 원리를 (소설 작품의 생산자나 수용자에게서 진정한 창작이해를 위해) 다시 한번 강조해 볼 때 이러한 평가는 평면적인 작품이해이라고 본다. 본 연구에서는 한국 90년대 소설과 80년대 소설의 '차이', 소위 한국적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소설 특징이 부각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특히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한국 문단에서 일반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적 소설이라 평가된다면 그 소설적 형상화의 '새로움'이란 무엇인가 추적해 보려는 시도에서 이와같은 비판적인 시각들을 미리 제시해 본다. 이 작품의 "마치 수퍼마켓의 진열장처럼"(이남호, p.308) 서술되고 있는 무질서의 "혼란스러운" 서술(묘사)형태에 대한 평들은, 작품이 생긴 그대로를("혼란스럽다") 서술한 것에 불과한 것이지, "서술이냐 묘사냐 하는 전통적인 소설의 이분법을 뛰어넘어 서술에 가까운 묘사, 묘사에 가까운 서술들이 현란한 점묘화처럼 이어져"(조성기) 있는 이 소설텍스트의 호소구조가 발휘하는 효과에 대한 관찰이 빠져 있기 때문에 총체적인 작품 평가를 낳을 수 없다고 본다. 이와 같은 평자들의 관찰 시각에서는, 이 작품이 안고 있는 "형식과 의미질서의 구속성의 무시 (…) 일관성의 결여" 곧 "의미맥락의 허술함"(vgl. 이남호, p.308) 등이 지적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이 소설은 어떤 면에서 소설답지 않은 소설이다. (…) 전위적인 실험적 기법의 소설이라 (…) 형식과 의미질서의 구속성을 아예 무시해 버리고, 일관성이 결여된 화자의 체험을 생각나는 대로 풀어놓고 있는 작품이다."(이남호, p.306)라는 평가에 그치게 된다. 이 작품의 "형식과 의미질서의 구속성의 무시"로 "일관성이 결여된" 이러한 면모는 90년대 성장소설의 범주로 이순원과 장정일을 함께 묶어 관찰하는 김병익의 글에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지나친 장식으로 작품을 산만하게 만들었다는 점"이 동일하게 지적되고 있다. 예컨대, "(…) 중요한 사건의 계기(가령 어머니의 평자들에서 동일하게 자살, 주인공의 운동권 투신, 디디의 자살, 주인공의 입산, 라라와의 결별 등)에 납득할만한 동인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 등으로 많은 미흡감을 느끼게 하지만, 현실 변혁 운동을 통해 입사 의식을 치른다는 것 그리고 주인공이 문학을 선택한다는 것에서 (…)"(김병익, p.1039). 이러한 작품평들의 작품구조분석에서는 이를테면 현재 인쇄되어 발표된 문학텍스트 그 자체 생긴대로의 그 모습은 읽어내지만, 그것이 내품는 영향력과 효과도 해석해냈는가 하는 측면에서는 의문시된다. 작품 생긴 대로의 즉, 인쇄된 문학텍스트 그 자체로서에 대해서는 사실상 올바른 작품관찰이라 하겠지만, 특히 "전위적인 실험적 기법의 소설" 또는 "전통적인 소설문법에서 벗어"난 "형식" 등을 지적하는 경우에서는 문제를 안고 있다고 본다. 작품의 생긴 대로의 모습은 읽어내지만―이것은 실증주의적 문학관찰이 아니고 그 무엇이겠는가―그것이 담고 있는 영향력과 효과는 해석해내지 못한다면, 의당 "전통적인 소설문법에서 벗어나거나 부정적으로 보이는 요소들"로만 지적됨으로써 그 "요소들"이 발휘하는 문학적 효과―현실과 픽션의 관계에서의 '소설적' 효과―에 대한 것을 간과하게 되는 비-역동적인 관찰에 머무르게 된다. 물론 아무 것도 내품고 있지 않은 그런 '언어적 형상화'도 있겠지만, 그러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의 평자들에게서 이구동성으로 모두 "감동"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이 테스트의 (소위)문학적 효과에 대한 관찰의 결여는 분명하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의 주인공을 중심으로 볼 때, 거기에 이루어진 '현실의 문학적 형상화'는 우리의 현실(여기서: 80년대의 한국 젊은이)을 작가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묘사했다고 생각할 정도로 잘 반영하고 있다고 본다. 이것은 앞에서 예든 바, '문학'에 관한 대학생들의 조잡한 레포트처럼 보이는 소설의 서술 방식은 우리의 현실의 사고(예:문학관)를 적중하여 그대로 반영한다는 통찰을 다시 하지 않을 수 없었던 (본 연구자의)작품체험에 근거한다. 산만하고 혼란스러운 서술양식뿐 아니라 그 소설적 형상화의 수단과 구성요소 자체가 우리의 '현재 여기서'의 질과 양상에 있어서 어느 일면을 적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방황하는" 소설 주인공이나 혼란스러운 소설구조의 양상이 한국의 젊은이와 현실의 질을 그대로 잘 드러낸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현실'(한국 사회) 속에서 실제 얼마든지 경험하는 '현실'의 질이 이 소설구조나 묘사양상과 똑 같이, 밑도 끝도 없는 식의 (논리까지 언급할 필요는 없지만) 비논리적이며 횡설수설하는 그런 모습의 것이 아닌가 하는 시각에서 볼 때 그러하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한국사회에서 이론적인 토론이 부재한다는 비판적 시각에서 볼 때, 예를 들어 우리의 현실 주변에서 어떤 사람이 TV나 또는 어디서 연설을 한다든지, 또는 대학생들 모임에서 누군가가 레포트를 발표한다든지 아무튼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전달하려 할 때 합당한 의미맥락도 없고 말도 안 되는 식으로 진행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어떻게인지 무언가를 이해하듯이 소위 대화나 의사소통이라는 커뮤니케이션의 경우, 여기서 이루어지는 언어적인 모든 것은, 물론 웃기는 만담이나 부질없는 閑談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때론 거의 그런 것에 불과한, 의미맥락도 뜻도 없는 그런 저런 것으로 진행되는 현상을 우리는 거의 매일 경험한다. 이런 식의 (한국적)사고 방식도 이 소설의 주인공에게서, 또한 현실의 소설적 형상화에서 (평자들이 지적한)"혼란스럽다", "형식과 의미질서의 구속성의 무시", "일관성의 결여", "의미맥락의 허술함"으로 가득한 소설 구조가 여지없이 폭로하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현실의 반영으로서의 소설"을 생각할 때, 주인공 및 소설구조 등의 형상화에서 평자들에게서 그렇게 느껴진 "형식과 의미질서의 구속성의 무시", "일관성의 결여" "의미맥락의 허술함" 등, 이 소설적 형상화의 특성들은 한국 현실의 질을―소설 주인공의 시간에 맞춘다면 80년대의 현실의 질을―적중하는, 또는 그렇게 할 수 있는 문학적 형상화의 구성요소들이라고 본다. 그러기에 무엇보다도 이러한 테스트 호소구조적인 것들의 효과가 관찰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특히 소설적 서술 양식에 대해 비판적인 평자들은, 소설텍스트의 호소구조가 발휘하는 효과를 분석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이 소설은 80년대 한국사회의 모순을 파헤친 이야기도 아니고, 80년대 운동권 대학생이 겪는 투쟁과 고뇌의 기록도 아니고, 순수 젊음이 현실 속으로 진입하면서 삶의 의미를 발견해 가는 성장소설적 기록도 아니며, 80년대 대학생들의 평균적 생활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세태적 소설도 아니다. 80년대 운동권의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긴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80년대 젊음의 조건이요 배경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이지, 80년대 운동권의 전형적 모습을 드러내 준다고 보기는 어렵다."(이남호, 307) "한국사회의 모순을 파헤친 이야기도 아니고 (…)"라고 했지만, 방금 앞에서 소상히 논했듯이, 우리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의 "텍스트 호소구조"가 발휘하는 효과를 제대로 포착하여 그것의 문학적 형상화의 질을 평가해 본다면, 사실상 한국사회의 80년대 현실, 그것의 질을 정확히 구체화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여기서 ("80년대 한국사회의 모순을 파헤친 이야기"라는) '현실'(Wirklichkeit)에 대한 개념의 문제, 80년대 한국사회의 '현실'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가 논해져야 하고, 그리고 "꾸며낸 이야기로서의 소설"에서 그 '이야기성'의 문제에 대한 상호간의 규명이 전제되어야 하겠지만, 앞에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의 주인공을 중심으로 지적한 "텍스트 호소구조"적인 효과에 대한 것에만 근거해 보더라도 이 소설의 "혼란스럽고 산만한" 형상화 자체는 작가 측에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형상화한 것이 아닌지 생각해 볼 정도로 한국 '현실 반영'에 적중하고 있다. 이러한 텍스트 호소구조적인 효과는, "한국사회의 모순을 파헤친 이야기도 아니고…"라고 보는 평자의 "서술과 묘사, 사건과 화자의 독백이 뒤섞여 있다"는 지적처럼 산만한 "그 서술형태가 우리시대 젊음의 한 속성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는 평자 자신의 확인에도 입증되고 있다. 그러하기에 그는 "80년대 한국사회의 모순을 파헤친 이야기"도, "80년대 운동권 대학생이 겪는 투쟁과 고뇌의 기록"도, "80년대 대학생들의 평균적 생활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세태적 소설"(이남호, p.307)도 아니라고 이 소설을 평하고 있지만, 동시에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으며 "현실 없는 젊음의 치열한 현실을 보여주는" "거칠고 서툴지만 신선함과 힘"이 있는, 이 작품의 "강점"으로 "'90년대적 요소가 많이 발견되는" "문제제기적 작품"의 면모를 지적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소설구조(형식)적인 것에 대한 평자의 비판은 "따라서 이 작품은 그러한 의미맥락을 어렴풋이 뒤로 미루고" "우리시대 젊음의 순수한 방황과 새로운 성격을 드러내는 작품으로 이해하는 편이 바람직하다"라는 작품평으로 곧장 이어진다. 동시에 "이러한 의미맥락의 허술함은 그 자체가 우리시대 젊음이 보여주는 또 하나의 주요한 성격이다"(이남호, p.319)고 평가하는 데서도―거기서는 아무런 작품분석적 관찰 제시 없이―{살아남은 자의 슬픔}의 텍스트 호소구조적 효과가 구체화되고 있는 셈이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의 텍스트구조가 발휘하는 효과는 '혼란'과 '감동'이라는 양면성을 수반한 이 작품의 소설구조적인 것에 대한 비판적인 평들에서 입증된다. 평자들의 소위 부정적인 평가가 거의 모두 유사하듯이(예:"전통적인 소설문법에서 벗어나거나 부정적으로 보이는 요소들"), 또한 이러한 부정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묘한 매력"이나 "감동"을 언급하는데 있어서도 모두 일치하는 것도 이 텍스트의 호소구조가 발휘하는 효과에 대한 입증이다. "미진한 구석이 많지만" "우리의 삶의 어느 모서리를 비추고 있다는 점을 취택했다"(유종호)는 문학상 심사위원들의 평에서도 그러하며, "무엇보다도 이 작품은 서술이냐 묘사냐 하는 전통적인 소설의 이분법을 뛰어넘어 서술에 가까운 묘사, 묘사에 가까운 서술들이 현란한 점묘화처럼 이어져 있다. 그런 점에서 신선하고 (…) 저 어두웠던 지난 80년대를 자신의 20대로 보내고 이제 서른을 앞두고 있는 젊은 영혼의 갈등과 불안, 통과의례들이 混亂만이 아니라 混亂한 문체에 담겨 이만큼이라도 형상화된 것에 점수를 주지 않을 수 없었다"(조성기)는 데서도 그러하다. 이러한 양면성을 안고 있는 작품평이 곧 작품의 질(문학성)을 드러내며, 그 근거는 말할 필요도 없이 이 소설텍스트의 "호소구조" 및 "현실에 대한 자기반영성의 자세"에 들어 있다. 복잡한 소설미학적인 근거해명들을 생략하여 간략히 지적해 보자면, 이 소설이 "우리시대 젊음의 한 속성을 반영"하고 있는,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는, 또한 그 때문에 평자들이 '감동'의 평가를 내릴 수 있게 작동시키는 근원은 바로 이 소설의 "혼란스럽고 산만한 서술형태"의 효과에 근거할 것이다. 평자의 말대로 등장인물의 "방황과 변신 젊음의 순수한 방황과 새로운 성격"(이남호)을 드러내는 문학적 형상화의 방법이 절묘하게 여기서 이루어진 것이 아닐까 라고 느끼는 독자에게서 이 작품은 우리로 하여금 한국 '현실'의 질을 그것이 그것인대로 통찰할 수 있게 한다(vgl. 문학작품의 기능!). "혼란스럽고 산만한 서술형태"라는 소설적 형상화가 우리의 (80-90년대) 현실을, 우리가 그 속에 몸담고 살고 있는 한국사회의 그것을 그렇게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이 텍스트 {살아남은 자의 슬픔}의 구조가 발휘하는 문학성의 여부 및 그것의 질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 포스트모더니즘적 소설의 이해(또한 작품비평)라는 테마에서 볼 때, 무엇보다도 문학텍스트의 질을 결정하는 "텍스트의 호소구조"와 현실에 대한 "서사적 자기반영성"의 관찰을 통해, 이 작품이 지닌 또는 지니고 있을 모더니즘 소설과의 질적 차이도 꿰뚫어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3) 한국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에 대한 작품이해의 문제 우리의 "문학(작품) 비평"의 경우, '소설적 형상화의 (현실)인식 기능'에 대한 이해가 미진할 뿐 아니라, 문학텍스트의 심미적 질을 결정하는 소설적 형상화의 ("텍스트의 호소구조", "자기반영성" 등의) 구성요소들에 대한 관찰이 전무한 것 같다. 특히 80-90년대 현재의 어떤 한국 작품에서 소위 '모더니즘 소설과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의 차이점'을 찾아보려 하는 경우, 또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한국 문단에서 일반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적 소설이라 평가되기에 '한국 포스트모더니즘적 소설'이란 어떤 것인가 그 실체를 구체화하는 작업에서는, 무엇보다도 "심미적 인식과정의 도구장치로서 소설"(Roman als asthetisches Erkenntnisinstrumentarium)의 기능에 대한 관찰은 중요하게 된다. 왜냐하면 바로 이러한 관찰 시각에서―본 연구의 앞에 제시한 '독일 포스트모더니즘적 소설'을 중심으로 볼 때―양쪽 소설미학의 차이가 부각되기 때문이다. 소위 모더니즘적 소설미학과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것을 구분해 생각해 볼 때, 그리고 본 연구 과제에서 처럼 그것들의 소설미학적인 변별점을 찾아 구체화해 보려는 관찰에서는, 특히 한국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소설 가능성의 여부를 주제로 삼아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관찰하는 경우에서는, 평자들이 지적한 예컨대 "전통적인 소설문법에서 벗어나거나 부정적으로 보이는 요소들"이라는 평가는 대단히 중요하게 된다. 그러나 위에서 자세히 논했듯이 '텍스트구조적 효과'에 대한 관찰이 결여된 관찰에서는(예:실증주의적 문학연구), 이를테면 이 소설텍스트의 질이 모더니즘적 소설미학과 다른 소위 '새로운 것'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 소설미학적인 것을 담고 있는 경우라 할지라도 그러한 측면이 간과될 것이기 때문에, 이미 관찰작업('문학비평')에서부터 문제를 안고 있다고 본다. 이 작품의 "혼란스러운 서술·묘사에 대한 비판적 지적과 마찬가지로 소설 구조상에서도 "사건과 사건의 인과관계를 파악하기 힘들고 어떤 대목은 과감히 생략되는가 하면 어떤 사건은 반복해서 이야기된다"라는 작품평에서 볼 때, 이러한 면모는 물론 모더니즘 소설문학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 것이긴 하지만, 그러나 이 소설텍스트의 호소구조적인 요소가 발휘하는 문학적(곧 심미적) 효과는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소설구조상 분명하고 강하게 묶어주는 체계적이고 일관된 '끈'(결속; Handlungsstrange)의 결여가 지적되고 있는데, 이러한 작품평에서도 이 작품의 "산만한 서술형태"와 마찬가지로 그것이 오히려 어떤 효과를 낳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산만한 서술형태"를 낳고 있는 소설적 형상화의 원동력인 '현실에 대한 자기반영성'을 관찰하여 그에 따라 결정되고 있는 문학텍스트의 질을 밝혀내야 할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한국 90년대 소설과 80년대 소설의 차이, 소위 한국적 포스트모던 소설의 특징을 부각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소설적 형상화에서 '새로움'이란 무엇인가 추적해 보려는 테마에 주력하고 있기에 이를 위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의 관찰시각으로 다음의 질문을 던져본다. 본 연구자의 독서체험에 근거하여 현실의 반영으로서 적중된, 또한 이 작품의 평자들에게 "감동"을 안겨 준 이러한 소설적 형상화로서 "산만하고 조잡한 형사화" 자체를 우리는 (한국)포스트모더니즘적인 소설의 특징으로 볼 수 있는가? 다시 말해, 현실의 반영으로서 적중되었다고 보는 이러한 문학적 형상화 때문에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한국 문단에서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소설로 평가되었을까? 한국 현실의 반영으로서 적중된 그것의 이러한 문학적 형상화 때문에, 즉 이런 식의 형상화 요소(예:"혼란스럽고 산만한 서술형태")라는 한가지 근거만으로, 이 작품은 (한국)포스트모더니즘적인 소설로 평가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소설과 현실의 긴장관계라는 소설미학적 테마를 중심으로 볼 때, 현실의 반영으로서 적중된(또는 훌륭한) 소설적 형상화야말로 '모더니즘' 소설의 본질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것은 아무런 '새로운 소설미학적 차이'를 가져올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vgl.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리얼리즘미학이론). (본 연구의 앞에서 다룬) 독일 포스트모던 소설문학에서 모더니즘적인 소설과의 변별점으로 드러난 여러가지 것들 중에서 예컨대―현실의 반영으로서 소설에서 소위 "작가의 의식 자세" 등 소설적 형상화의 구성요소들로서―"현실에 대한 자기성찰성(자기반영성)"의 관찰주제를 중심으로 볼 때, 소설적 형상화의 이 문제는 양쪽 소설 미학에 다 필수적으로 내재해 있는 것이지만, 그것의 '질적 차이'가 뚜렷했다. 독일 포스트모던 소설문학의 특징들에서, 예컨대 쉬트라우스의 {젊은이}에 구체화된 (언어를 통한 '현실 인식'이라는 소설적 형상화에서 볼 때) '자기성찰의 움직임으로서 인식자세'는 특히 "변증법적 인식" 자세와 다른 어떤 것이었다. 그것은 "인식의 원칙으로서 변증법"을 보류하는 일단 정지의 자세이며, 이것은 "나선형의 형태로 끊임없이 돌아가고 있는 움직임의 형태"라는 사고의 구조에서 볼 수 있듯이 변증법적 합일('종합')을 향하는 것도 아니고, 아도르노의 "부정의 변증법"적 인식에 해당하는 것도 아니며, 즉 현대 소설적 형상화('미학')에서 이루어지는 '문학의 인식(기능)'과 달리, 어디에로 향하는 고정된 방향이 없다기 보다는 일단 정지 보류되는, 앞으로 무엇이 또는 어떤 방향이 등이 결정 또는 시사되지 않은 채 열려져 있는 상태로, 또한 현대 소설미학적인 차원에서 이해되는 '열린' 상태와는 다른 것('자세')이다. 모더니즘적이건 포스트모더니즘적이건간에 문학적 형상화에 내재한 이와같은 "현실에 대한 서사적 자기반영성"은, 소설적 형상화의 질이 자기성찰성의 자세에 따라 구체화되어 결정되기에, 그 자세에 따라 양쪽에서 (소설미학적으로)'질적 차이'가 난다. 어떤 작품이 예컨대, 모더니즘적인 소설적 형상화와 이러한 질적 차이가 전혀 없다면 그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소설이라 평가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찰시각에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의 호소구조 및 문학텍스트의 질을 결정하는 "현실에 대한 자기반영성"의 자세를 중심으로―여기서 모더니즘적 소설이냐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것이냐의 문제를 떠나―그 형상화의 소설미학적인 근거해명을 시도해보려 할 때, 우리는 이 테마 중심의 '한국 모더니즘적 소설'에 대한 소설미학적 관찰의 연구들을 전제로 한다. '현실의 심미적 구조변화로서 문학적 형상화 문학테스트'를 생각해 볼 때, 양쪽 소설미학에서의 비교관찰을 위해서도 역시 "현실의 문학적 형상화"의 질→문학텍스트의 질→현실에 대한 자기성찰성(Selbstreflexion)의 질→결국, 작가의 상상력의 질… 등등의 맥락에서 관찰주제 중심의 연구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찰 시각의 주제에 대한 (미학)이론적인 연구논문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한국 모더니즘적 소설'에 대한 이러한 시각에서의 구체적인 연구작업들("정보")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의 서술 양식 및 소설 구조에서, 특히 (평자들도 지적하고 있는) "전통적인 소설문법에서 벗어나거나 부정적으로 보이는 요소들"에서 이 작품의 문학적 형상화에서 '새로움이란?'의 추적을 위한 소설미학적 관찰을 해 볼 수 있는 연구 가능성을 지적하는 데 그친다. "전통적인 소설문법에서 벗어나거나 부정적으로 보이는 요소들" 중에서 예컨대 "시간 뿐 아니라 사건의 배열도 혼란스럽다"는 측면도 작품평에서 지적되고 있는데, 이러한 측면에도 위에 언급한―{살아남은 자의 슬픔}의 문학적 형상화에서 '새로움'의 추적을 위한―소설미학적 관찰의 가능성이 내재해 있다고 본다. "이 소설은 매우 산만한 느낌을 준다. 특히 시간이 혼란스럽다. 전체적으로 회고의 방식에 의존하고 있긴 하지만, 그 회고 역시 시간순서를 무시한다. 현재에서 과거를 회상하기도 하고 과거에서 이전의 과거를 회고하기도 한다. 시간 뿐아니라 사건의 배열도 혼란스럽다."(이남호, p.321) 이러한 소설의 시간구조의 양상은―앞에서 관찰한 독일 포스트모더니즘 소설들에서 특히 보도 쉬트라우스의 {젊은이}(1984)에서의 시간구조("소설 시간구조 차원들의 얽혀짜임")에 비교 관찰해 볼 수 있는 경우로 사료된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의 소설구조에서 "시간 순서를 무시"하고 현재와 과거, 회상 등의 소설적 형상화적 기법에 대한 비교관찰의 가능성을 위해 보도 쉬트라우스의 소설 {젊은이}에서의 소설 시간구조 차원들의 얽혀짜임을 다시 언급해 본다면, 소설 {젊은이} 거기서는 이러한 수많은 시간구조적인 구성요소들의, 그 차원들의 얽혀짜임이 마치 전등불을 껐다 켰다 하는 식의, 또는 TV 체널을 이리 저리 바꾸는 접속 스위치 장치처럼 작동하는, 일종의 "전환 방식의 순환 형식"(Schaltkreis)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한 때와 지금 '현재'" 간에서 마치 TV 채널을 이리 저리 바꾸듯 전환 방식으로 연결되는 이러한 시간 구조상의 소설적 형상화에서는―'사실과 픽션의 긴장관계를 중심으로 관찰해 볼 때―"합리적으로 기능·작동하는 현실상(Wirklichkeitsbild)"이 밀쳐내어져 출축 또는 억압되고 있다. 이 소설 {젊은이}는 소설미학적 차원에서 볼 때 아직은 모더니즘적인 소설미학의 '문학의 인식기능'에 머무르는 그런 형상화 수단을 적용한 경우이긴 하지만 {젊은이}의 문학적 형상화에서 사용되고 있는 "서사적 혼합방식의 패치워크"에서 이루어지는 '문학의 인식 기능'에 있어서는 현대적인 소설적 형상화에서와는 다른 질적인 차이를 낳고 있는 경우이다. "전환 방식의 순환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소설 시간구조상의 문학적 형상화는, 일반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소설 특징으로 언급되는 "탈 장르화(장르확산)" 등의 테마에서 부각되듯이, 영상예술 및 TV 문화 등 매체변화의 주제와 연결하여 관찰될 수 있는 테마이기도 하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앞에서 "서사적 자기반영성"의 자세를 중심으로 한 한국 모더니즘적 소설에 관한 연구의 전제에 대한 필요성에서 언급한 바와 마찬가지로, 한국 전통적인, 또는 80년대 (그 이전의) 소설문학에 대한―특히 "소설의 시간구조"(Zeitstruktur)의 관찰테마를 가지고 이루어진―연구가 전제되어 있지 않기에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일단 소위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의 특징을 구체화할 수 있는 '새로운 것'에 해당하는, 즉 비교관찰 가능성의 어느 일면만을 여기서 시사해 보았다. 이러한 비교는, 아직 한국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소설의 특징이 규명되어 있다고 볼 수 없고 또한 독일 포스트모던 소설의 특징으로 언급된 경우에서의 것에 연결시켜 보는 것이긴 하지만, 소위 '색다는 것'으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소설 특징을 찾아보는 데에는 일조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의 실체는 어떤 것인가]를 밝히려는 관찰작업에는 독자로서의 비평가의 포스트모더니즘적 소설에 대한 이해의 문제도 내재해 있다고 본다. 앞에서 다룬 독일 포스트모던 소설의 특징들을 중심으로 한 간략한 비교관찰에 근거해 볼 때, 한국 포스트모더니즘적 소설작품에 대한 이해에는―소위 외국문학의 '올바른 수용' 및 '오해'의 문제를 고려해 볼 때―많은 문제들이 산재해 있다고 본다. 어떻든 한국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의 예컨대, 개념규정은 일차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소설이라 평가되는 또는 그렇게 지칭되는 그 작품이해에 근거한다. 따라서, 한국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이해(소설관)에서는 무엇보다도 독자로서의 비평가(일차적인 수용자)의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에 대한 이해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고 본다. 독자로서의 비평가의 이러한 문제는 문학상을 받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의 평가에서 시사되는 바, 한국 포스트모더니즘적 소설에 대한 평가는 아이러니컬하게도―{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소설인가 아닌가의 문제를 떠나서―그것이 어떻든 모더니즘적인 문학관에 입각한 독자로서의 비평가의 시각에서 분석·평가되면서, 물론 이것은 그렇게 수용하는 인물과 그에 앞서 이 작품을 평가한 비평가가 동일한 인물이 아니라는 전제에서 하는 말이지만, 그것이 동시에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소설로 알려진다는 데 있다. 그것의 실체가 제대로 이해·인정·평가되지 않은 채, 곧장 그런 어떤 것으로 규정·수용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한국 포스트모더니즘적 문학에서는 어쨌든, 창작 작품의 '생산자'인 작가에게서 뿐 아니라 '수용자'로서의 비평가에게서도 포스트모더니즘적 소설에 대한 이해의 문제가 내재한 것은 분명하다. 4. 독자로서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에 대한 이해의 문제 -장정일의 {아담이 눈뜰 때}(1990)를 중심으로 1) "문학을 선택한" 주인공 "아담" 장정일의 {아담이 눈뜰 때}에서도 소설의 주인공 역시 {경마장 가는 길}이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의 '소설을 쓰기 시작하는' 또는 '작가 지망생'인 주인공들처럼 "문학을 선택"한다. 그리고 {아담이 눈뜰 때}의 마지막 부분이 소설의 첫 부분과 동일한 텍스트로 연결되는―위에서 살펴본 두 소설작품에서와 유사한―소설적 형상화에도 주목해 볼 수 있다. (114페이지 가량의) 이 소설 {아담이 눈뜰 때}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대구에 내려온 나는(주인공 "아담"), 등록금의 매우 적은 일부를 털어 중고의 사벌식 타자기 한대를 샀다. 나는 늘 타자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왔고, 스무 살이 되어서야 그것을 갖게 되었다. 나는 이것으로 무엇을 쓸 수 있을 것이다. 편지나, 일기, 아니 어쩌면 진짜 창작을 말이다. 그리고 만약, 내가 소설을 쓰게 된다면 제일 먼저, 이렇게 시작되는 내 열아홉 살의 초상을 그릴 것이다."({아담…}, p.123-124)라고 서술되면서 다음과 같은 텍스트로 끝나고 있다: "내 나이 열아홉살, 그때 내가 가지고 싶었던 것은 타자기와 뭉크화집과 카세트 라디오에 연결하여 레코트를 들을 수 있게 하는 턴테이블이었다. 단지, 그것들만이 열아홉살 때 내가 이 세상으로부터 얻고자 하는 전부의 것이었다."({아담…}, p.123) 그리고 방금 인용한 위의 동일한 텍스트로 이 소설은 시작되고 있다: "내 나이 열아홉살, 그때 내가 가지고 싶었던 것은 타자기와 뭉크화집과 카세트 라디오에 연결하여 레코트를 들을 수 있게 하는 턴테이블이었다. 단지, 그것들만이 열아홉살 때 내가 이세상으로부터 얻고자 하는 전부의 것이었다."(이 소설의 시작; {아담…}, p.9) 우리가 읽고 있는 소설텍스트 {아담이 눈뜰 때}의 시작과 끝마치는 부분이 동일한 텍스트로 중복 연결되어 있다. 이와같이 소설을 쓰려는 행위자로서 소설 주인공과 작가와의 일치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서는 마치 작가 자신의 창작일지(일상의 창작메모) 또는 창작에 대한 고백의 형식으로 이루어졌다면, 장정일의 {아담이 눈뜰 때}에서는 (작가의)인쇄된 텍스트와 동일한 제목("아담이 눈뜰 때")의 소설을 쓰기 시작하는 주인공을 설정함으로써 소설의 주인공("아담")이 창작텍스트 저자(생산자)에 연결되고 있는 양상으로 {경마장 가는 길}에 매우 유사하다. {경마장 가는 길}에서 소설의 마지막으로 쓴 여덟 줄의 글이 그 소설의 첫부분과 일치하고 있는 점, 그리고 소설의 시작과 끝이, 또한 작가와 소설주인공이 쓰고 있는 소설의 '제목'의 일치 등은 두 작품에서 매우 유사하다. 물론 이것은 {아담이 눈뜰 때}의 창작과정 자체가 ("문장을 쓴다는") 문학 청년으로서의 소설 주인공이란 연결로, 그 소설적 형상화가 '현실과 픽션의 관계'에서 그것의 분리 및 연결을 처리하는 하나의 "소설 공간"을 형성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을 선택한 '작가로서의 주인공'―소설주인공의 표현에 의하면, "문장을 쓴다는 것"을 선택한―"아담"의 이야기는 대충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주인공 "아담"은 혼자 사는 가난한 청소부 어머니의 둘째 아들로 명문대학에 응시했지만 실패하여 재수를 하게 된다. 아담은 재수학원에 다니지만 록에 탐닉해 있고 디스코텍에 출입하며 여자 친구들과 부지런히 섹스 관계를 맺으며 연상의 여자 혹은 남색자에게 몸을 팔다시피 하여 원하던 화집과 턴테이블을 얻어내는 한편 도서관에서 미친 듯 책을 읽고 소설 번역도 시도하다가, 대학에 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등록을 포기하는, 퇴폐적이며 우범적이기도 한 일탈적 성장과정을 밟는다. 주인공 아담은 고교 시절 이미 시를 쓰는 문학소년이었지만, 재수를 하는 동안에도 입시 공부를 제쳐놓고 광적인 책읽기를 계속하며 추리소설을 번역해본다. 그는 그 번역작업을 통해 "내 삶을 창조적으로 이끌게 되리라 여겼고, 생산적 고통을 수반하는 것이길 원했"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글쓰기란 병든 현대 사회로 몰고 가는 자본주의 산업 체제, 그것의 무분별하고 방만한 자유에 견제를 거는 것이다. 그는 "내가 사는 세계는 뭔가? 어쩐 이유로 이렇게 뒤죽박죽인가. 나는 또다시 블랙홀로 빠져드는 느낌"을 얻으면서, 창조적 글쓰기, 그것의 고통만이 그것을 억제하고 "가짜 낙원에서 잃어버린 실재를 되찾는 (…) 노력"임을 확인한다. 결국 아담은 대학에 합격하고도 그 등록금을 포기해 버린다. 지하상가의 청소부인 어머니가 마련한 그 등록금을 가지고 서울로 올라오지만, 창녀와 하룻밤을 보내고서는 그녀의 전송을 받으며 귀향길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서 그는 합격한 대학을 포기하고 그 등록금으로 타자기를 산다. 그는 자신의 첫 소설로 '열아홉 살의 초상'을 그리려 한다. '소설적 형상화'에서 사실과 픽션의 긴장관계의 관찰 주제 하에서 살펴본다면, 앞에서 다룬 연구 대상 3편의 소설적 형상화와 유사하게 {아담이 눈뜰 때}에서도 '작가로서의 주인공'이라는 소설적 장치를 통해 "소설적 공간"(창작문학적 형상화)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소설구조도 위의 다른 작품들에서처럼 소설텍스트로서 형상과가 탄력성있게 아주 잘 이루어진 경우이다. 이것은 소설의 시작과 끝이, 또한 소설을 쓰는 작가와 주인공의 소설 '제목'이 일치하는 것 등과 같은 단순한 방식에서만은 아닌 것 같다. 예컨대, 이인화의 장편소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에서 이루어지는 '작가 개입'의 방식을 빌어 소설 주인공과 작가와의 이러한 일치가 이루어지듯 혼란스럽고 산만한 소설적 형상화에 비해, 소설을 쓰려는(또는 쓰기 시작하는) 주인공 "아담"과 (소설을 쓰는) 작가의 일치로 이루어지는 소설의 제목 "아담이 눈뜰 때"에 있어서도 그러하지만, 이에 연계되어 소설 주제와의 얽어짜임도 보다 탄력성있는 것이다. "아담이 눈뜰 때"에서 "눈뜰 때"는 아담이 이브('섹스')에 대해서 "눈뜰 때"와 소설을 쓰기 시작하는 주인공 아담의 '창작'에 대한 "눈뜰 때"라는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문장을 쓴다는 것"을 선택한 소설주인공과 작가의 일치가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아담이 눈뜰 때"는 물론 섹스에 대한 시각에서의 함축의미만이 아니라 창조하는(창작하는) '문학'에 대한 것도 내포하게 된다. "그가(장정일) 꿈꾸는 작가란 창조주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나름대로 최초의 인간, 즉 아담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주인공 "아담", "그리고 아담의 옆에는 이브가 다가온다." 이와 같이 {아담이 눈뜰 때}는 섹스에 대해서 "눈뜰 때"와 '창작'하는 작가로서의 "눈뜰 때"를 연결하면서, 이렇게 문학을 선택한 주인공 "아담"이 소설을 쓰는 작가로서 형상화되는 아주 매끄러운 소설적 형상화를 구축한다. 본 연구자의 첫 독서 경험에서의 감상으로도, 이러한 전체적인 소설구조상의 짜임새, 그로 인해 생겨나는 일관되게 얽혀짜이는 줄거리, 이것을 작동시키며 이끌어가는 소설 모티트의 힘 등, 어느 측면에 있어선 아주 세련된 (구조적인)형상화를 이루면서 문학적 공간으로서 소설 세계의 탄생을 느낄 수 있었다. 소설적 형상화의 이러한 탄력성은, 특히 그것을 그렇게 이룩해내는 전체의 흐름을 연주(연출)하고 있는 어떤 멜로디를 타고 흐르는 듯, 아무튼 '음악'의 논리 같은 것에 따라 흘러가는, 곧 얽혀짜이는 소설구조의 분위기에 근거하는 것 같다. 창작 텍스트로서―앞에서 관찰한 이인화의 작품, 특히 "상호텍스트성의 문제"에서 논한, 그러나 거기서는 이루어지지 못한―즉, "새로운 문학적 공간"(ein neuer poetischer Raum)을 이런 (음악의 논리에 따른?) 분위기로 이룩해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독자 반응의 느낌을 낳는 경우이다. 본 연구에서는 이 분야에 관한 학문적인(여기서:문예미학적) 지식이나 또한 이에 대한 기존의 연구가 없어 여기서는 보다 전문적인 분석에 임할 수 없으므로, 이 소설텍스트의 심미적-형식적 측면에 대한 연구는 뒤로 미루고, [90년대 한국 포스트모더니즘 소설 특징이란 무엇인가]라는 본 연구주제에 초점을 맞추어, "문학을 선택한" 주인공 아담에게서 '문학'이란 어떤 것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문학을 선택한" 주인공 아담에게서 '문학'이란? "나는 작가가 될 수 있을까?"({아담…}, p.122)고 주인공 아담은 고뇌하면서 문학을 선택한다. "문장을 쓴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일 것이다.(…) 문장을 쓰는 일에서 나는 내가 그토록 원했던 '창조의 아픔'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 고통은 가짜 낙원을 단호히 내뿌리치고 잃었던 낙원, 실재, 진리를 되찾는 데 쓰이는 아픔이다. 가짜 낙원에서 잃어버린 실재를 되찾기 위해서는 두 가지 노력이 필요하다. 먼저 나는 내 오성의 능력을 과신하지 말아야 하며, 자유를 자제해야 한다. (…)"({아담…}, p.122) "문장을 쓴다는 것"은 "창조의 아픔"이며 그것은 "가짜 낙원을 단호히 내뿌리치고 잃었던 낙원, 실재, 진리를 되찾는 데 쓰이는 아픔"이란 어떤 것인가? 또한 '창조의 아픔'을 누릴 수 있는 '문학'이란 주인공 아담에 있어서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작품의 독자로서의 평자들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장정일의 {아담이 눈뜰 때}를 (90년대 한국문학에서)"성장소설"로 관찰하는 평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문학을 선택한다는 점에서 (…) 만나고 있는 점은 오늘의 우리의 진정성의 추구를 위해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김병익, p.1036- 1037) "억압으로부터, 정치적 혹은 자본주의적 억압으로부터 저항과 탈출의 계기로서, -------------------------------------------------------------------------------- 그 진정성의 가장 진지한 표지가 되고 -------------------------------------------------------------------------------- 있는 문학이 선택되었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아직은 반성과 비판의 자정력을 가지고 있고 극복과 지향의 잠재력을 일구고 있다는 증거로 기능할 것이다. (…) 그것을 90년대의 세대들은 문학, -------------------------------------------------------------------------------- 고통에의 -------------------------------------------------------------------------------- 기억과 창조에의 고통인 문학에서 기대한다. 그 기대가 성취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어쩌면 바위를 돌로 깨려는 가냘픈 제스처로 그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절망적인 노력, 무모한 도전이 바로 진정성의 추구가 아닐 것인가. (…) 예술가의 길을 선택함으로써 두 전환기적 풍경 속에서 우리 삶의 진정한 지향의 의지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김병익, p.1038-1039, 밑줄은 연구자의 표시) 그리고 (서영채)[장정일을 이해하기 위하여]에서 다음과 같은 견해이다. "장정일의 소설이 보여주는 가장 큰 특징은 엄숙성에 맞서는 유희성과 소박한 리얼리즘에 맞서는 분방한 비현실성으로, 나아가 각각의 대립항 사이에서 형성되는 서사적 긴장으로 정리될 수 있다. 유희성과 비현실성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 문학 예술 일반의 의미에 대한 (…) 근본적인 질문으로 연결될 수 있다. 장정일의 서사가 표현하고 있는 유희적 성격에 대한 강조는 -------------------------------------------------------------------------------- 문학적 엄숙주의 -------------------------------------------------------------------------------- 에 대한 부정이다. 그것은 진지성에 대한 부정과는 전혀 맥락이 다르다. 엄숙주의란 실정화되어버린 진지성, 이미 자기 갱신의 힘을 상실한 늙은 진지성이며 그러므로 진지성에 대한 한갓된 포즈에 불과하다. 새로운 시대의 전망과 그 전망을 실현하고자 하는 열정이 존재하는 곳에서 진지성은 영원한 젊음을 유지할 수 있다. 거기에는 어떤 유희적 요소도 등장할 여지가 없다. 유토피아에 대한 열정으로 충일한 문학의 시선은 자기 밖의 어떤 지전을 향해 있기에 자기 자신으로 향할 겨를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열정이 사라지는 순간 문학은, 엄숙주의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의 육체를 돌아다보아야 한다. 장정일의 서사가 보여주는 유희적 성격은 바로 이와같은 -------------------------------------------------------------------------------- 문학의 자기 반성과 자기 생산의 산물이다. 문학의 진지성이 문학의 사회연관성이나 역사연관성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문학의 자기 생산에 대한 추구는 진지성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오히려 진지성이 깃들 새로운 육체이다."(서영채, p.376-377; 밑줄은 연구자의 표시) "문학을 선택한" 주인공으로 해설하는 위의 작품해석에서 지적하듯, 장정일의 소설주인공 아담은 "또다시 블랙홀로 빠져드는 느낌"(…)을 얻으면서, 창조적 글쓰기, 그것의 고통만이 그것을 억제하고 "가짜 낙원에서 잃어버린 실재를 되찾기 (…) 노력"임을 확인하는, 분명 "문학을 선택한" 새 세대의 젊은이다. 인쇄된 문학텍스트 {아담이 눈뜰 때}의 주인공 아담에게 있어서 '문학'이란 무엇인가 드러나는 대로 그것들을 간추려 본다면, 위의 평자들의 지적에―거기에서 이해된 "진정성" 및 "진지성"의 문학관에―일치하는가 확인해 보기 위해 이 창작텍스트 {아담이 눈뜰 때}에서 우리가 실제 느끼는 분위기에 비교해 본다. 평자들의 지적처럼, 주인공 아담은 "고교 시절 이미 시를 쓰는" "문학을 선택한" 주인공이다. 한편, 실제 소설텍스트에서 "고교 시절 이미 시를 쓰는" 인물이란 다음과 같은 모습의 문학 지망생("문학소년")이다. ({아담이 눈뜰 때}의 주인공)"나는 백일장 전문의 고교문사였다. 나는 각종 대학에서 고교생을 대상으로 개최하는 백일장과 각 도시에서 주관하는 백일장에 거진 격월로 참여하고 있었고, 고교 잡지의 문학상에도 응모를 했었다. 한창 날리던 때의 내 성적은 사할 오품대쯤 되었을까? (…)"({아담…}, p.14-15) 또는 "실제로 문예반 친구들에게 평론공부를 한다고 공갈을 쳐 놓았지만 진짜 평론을 쓰고 있지는 않았다. (…) 평론을 쓴다는 것은 핑게였다. 나는 매일같이 학교를 대표해서 백일장에 끌려나가는 일에 진력이 나 있었고, 쉬고 싶었던 것이다. 게다가 글을 쓰느라 대학에 낙방하고 싶지는 않았다. 수업을 빼먹고 백일장에 가서 시를 쓸 때 마다 원고지 칸칸 속에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라왔다."({아담…}, p.15) 그리고 주인공 아담의 상대역 "이브"격인 (역시 글을 쓰려는, 그리고 나중에 문단에 데뷔하게 되는 작중인물)'은선'의 말을 들어보면, "빨리 추천받아서 대학생활을 재미있게 보내고 싶단 말이야. 얼마나 멋있어? 대학교 일학년 때 시인으로 등단하는 것 말이야."({아담…}, p.15) 그리고 "도서관에서 미친 듯 책을 읽고 소설 번역도 시도"하며 문학독서에 열중하는 ("문학을 선택한") 주인공 아담의 모습은 대충 이러하다. "그들은 내가 소설책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는, 걱정된다는 듯이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였으나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 웬만한 국내소설은 다섯 시간 정도면 꼼꼼히 완독할 수 있었다. 나는 여섯시나 일곱시쯤이면 자리에서 이러나 저녁의 도심을 돌아다녔으나, 이 도시에 하나밖에 없는 지하도엔 내려가지 않았다. 어머니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학원에…) 친구들과 호프를 한잔씩 했고, 담배는 아직 배우지 않았다. 어느 날은 섹스가 너무너무 하고 싶어 은선에게 전화를 했다. 벚꽃이 한창 봉우리지는 사월이었다."({아담…}, p.29-30) 이러한 모습의 소설 주인공 및 작중인물이 생각하는 문학이란 것이 위의 평자들의 깊이있는 해석처럼 그렇게 진지하고 심각한 것일가? 또한 "나는 작가가 될 수 있을까?"라도 고뇌하면서 "문장을 쓴다는 것"을 선택하는 주인공이 말하는 "문장을 쓴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 "진짜 창작", "창조의 아픔" 등 이러한 육중한 단어들은 실재의 아담, 곧 소설 속에서의 그의 모습에 부합되는 분위기의 것인가? 다시 말해서, 이 작품의 독자로서의 평자들이 해석하는 "진정성의 추구",―사실상 최고도의 미학적 경지(境地)인―"엄숙성에 맞서는 유희성", "문학의 진지성" 또는 "소설쓰기란 가짜 낙원 속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통로" 등등은 "문학을 선택한 아담"의 소설 속에서의 모습에 일치되는 성질의 것인가? 그리고 "진정성의 추구" 또는 "소설쓰기란 가짜 낙원 속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통로"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독자로서 스스로 묻지 않을 수 없다. 어쨌든, 우리는 이 작품의 독자로서 어느 평자처럼 "과연 그가 추구고자 하는 실재나 낙원이나 진리는 무엇일까"라고 묻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한편, 소설 속에서 소위 '아담과 이브의 첫 만남의 섹스 장면에서도 우리(독자)는 아담에게서 문학관을 구체화해 볼 수도 있기에 이것도 예들어 본다. 앞에서 언급한 소설의 제목과 주제의 얽혀짜임, 즉 '섹스'에 대해서 "눈뜰 때"와 '창작'하는 작가로서의 "눈뜰 때"의 이중적 의미를 고려하여 소설 속에서의 ("문학을 선택한" 주인공)"아담"에게서 문학관을 구체화해 볼 수도 있겠기 때문이다. "은선이는 이불깃을 이빨로 물고 한참 웃었고, 두 팔을 벌리고 나를 불렀다. [이리와, 아담, 너는 내 첫 남자야] 그날 우리는 어른이 되었다. 오래 전부터 은선이와 나는 대입시험을 치르는 날 어른이 되기로 약속을 해놓았었다. 그건 오줌을 누듯이 누구나 다 하는 일이었고,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 크리넥스로 다리 사이를 닦으며 은선이 말했다. [이제부터 나는 너를 아담이라고 부를테야] 그러나 나는 그녀에게 나의 이브라고 불러주지 못하는 것을 미안하게 생각했다. 은선은 붉게 물든 크리넥스 뭉치를 휴지통에 모두 던져 넣었다."({아담…}, p.18) "오줌을 누듯이 누구나 다 하는 일이었고,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라는(여기서:섹스) 것은 소설의 제목 및 주제의 (상징적인)이중의미에 맞추어 해석해 본다면 '글을 쓴다는, 문학을 한다는 것도, 주인공 아담의 말처럼 "문장을 쓴다는" 것도 "오줌을 누듯이 누구나 다 하는 일이고,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인가 묻고자―물론 "섹스"에 그리고 창작문학에 "눈을 뜰 때"의 그것이 다른 어떤 복합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더라도―이것을 인용해 보는 것은 아니다. "문학을 선택"하는 주인공 아담의 '문학'에 대한 분위기에서 독자가 받는 인상(느낌)이, 위의 평자들의 것과 무언가 다르다는 것이다. 이것은 본 연구에서 다룬 예컨대, 박일문 {살아남은 자의 슬픔}의 "글쓰기의 출사표"를 던지는 주인공의 문학관이 풍기는 그것과는 다른 어떤 것이 아니냐는 점을 지적해 본다면 좀 더 분명해질 것 같다. 본 연구자의 감각에 이상이 없다면 그렇게 느껴지는, 이를테면 '저질의 가벼운(또는 경박스러운)' 분위기와 소설의 끝부분에 등장하는 "진짜 창작", "창조의 아픔" 등 엄청나게 무게있는 어휘들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가, 그리고 그런 연결로 생겨난 결과 이런 것들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게 되는지 독자로서 다른 독자들에게 묻고자 함에서 이런 것들을 문제제기로 소상히 제시해 보았다. 소설 속의 주인공, "문학을 선택"하는 아담이 말하는 "창조의 아픔"이란 과연 무엇을 가리킬까? 여기엔 어떤 해석이 기대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우선 가장 확실한 대답은―이와 유사한 여러가지 문학에 관한 질문들의 맥락에서 이루어진 작가(장정일) 자신의 대답―"그것은 아무도 모른다"일지 모른다일 수도 있을 것이다. 또는 작가(장정일)의 말―어떤 맥락에서 어떤 의미로 언급되었던지간에―"나는 내 독자들이 자유를 얻기를 원한다."에 기대어, 이것은 오직 독자의 몫으로 남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진짜 창작", "창조의 아픔" 등―그렇다고 이것이 말장난이나 그런 언어적 유희를 의미하려는 것은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 또 우리는 무언가 다른 것에, 소위 모더니즘적인 사고와 다른, 즉 진지한 어떤 것이란 없다는 그런 어떤 시각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장정일의 소설 {아담이 눈뜰 때}의 '작가로서의 주인공'에게서의 '문학'에 대한 이해, 소위 문학관은, 이 소설의 전반에 깔려 있는 것들의 종합적 이해에 근거해 보면, 후기 자본주의 산업사회 및 다매체 시대에서의 그것('문학')에 자리하고 있다고 본다. 이것은 우선 소설텍스트 속에 그려진 문학에 대한 시각을 구체화해 보면 분명하다. 그것은 소설 속에서 주인공이 방문한 "문학강연회장"의 "약관 이십대의 젊은 평론가"의 입을('인용') 통해 구체화되고 있는 데서도 알아볼 수 있다. "[가공할 기계, 기술의 발전은 (…) 예술을 비전문인에게 양도하도록 위협할지 모르며, 그런 위협에 대면한 예술가들은 스스로를 비전문화 시키는 전술을 가지고 자신의 위치를 재조정하며, 위협 자체를 무화시키려 들 것입니다. (…)" "첫째, (…) 컴퓨터의 발달로 창작의 문외한도 소설과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됩니다. -------------------------------------------------------------------------------- 컴퓨터 조작으로 -------------------------------------------------------------------------------- 만들어지는 하이퍼 픽션은 이미 수종이 나왔으며, 서구의 대중음악 (…) 컴퓨터로 음악을 만들어 즐기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 인간만의 고유능력이라 믿어왔던 -------------------------------------------------------------------------------- 창작능력의 일부를 컴퓨터에 -------------------------------------------------------------------------------- 게 넘겨주어야 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 [둘째, 문학의 경우 출판, 인쇄의 발달로 누구나 쉽게 책을 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시집 한 권을 내려면 집 한 채를 팔아야 할 만큼 출판, 인쇄는 성가시고 어려운 일이었으나 (…) 약삭빠른 상혼과 푼수 없는 신문·방송이 일조 하는데, 팔십년대 말미에 (…) 아마추어 시집 (…) 저는 문단데뷔 절차를 신뢰하는 편인데 (…) 문화의 모든 분야에서 통과제의를 생략해버리는 가속도성은 당연히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촉진하려는 자본의 논리에서 비롯되며, 일회용의 인스턴트 문화를 만들어 냅니다.] (…) 셋째, (…) 즉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에로의 이행을 우리는 (…) 모더니즘이 개별개체의 범주나 개별개체 나름의 자립영격 또는 개별개체의 밀폐된 영역을 필요로 했다면 포스트모던의 주체는 자아나 개체의 종말을 고함과 함께 자아중심의 심리병상의 종말을 선언하기 때문이지요. -------------------------------------------------------------------------------- 모더니즘 -------------------------------------------------------------------------------- 작가가 순수성, 진품성, 아우라 등의 신적 권위로 자신을 감싼다면 -------------------------------------------------------------------------------- 포스트모던의 작가는 차용, 인용, 발췌, 각색 등의 자기 공개를 통해 -------------------------------------------------------------------------------- 대중 가운데로 내려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아담…}, p.105-106; 밑줄은 연구자의 표시) 여기엔 (후기 자본주의 산업사회에서) '문학'을 이루는 구성요소:생산-매개-수용-가공의 "문학 현장"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갖추어져 있다. 문학의 출판, 판매 등의 유통구조, 그리고 문학상, 문단 데뷔 등의 문학제도, 문학작품의 영화화 등의 가공작업(Verarbeitung), 컴퓨터 시대의 작가의 소멸 등, 한 마디로 요약해, 소설텍스트 {아담이 눈뜰 때}의 속에 그려진 문학에 대한 견해(문학관)는 한국 90년대의 "문학-체계'(Literatur-System)"에 대한 핵심적인 현실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비록 그것이 이 소설을 쓰는 작가(장정일)가 다른 데서 인용해왔든 어떻든간에 이 소설 속에서 글쓰기를 선택하는 주인공 "아담"의 문학에 대한 이해 등을 포함해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매체현실(Medienwirklichkeit)의 문학제도(예:문단에 데뷰한 '이브' "은선"의 경우) 및 문학-체계 등 후기 자본주의 산업사회에서의 "문학 현장" (literarisches Leben)에 대한 현실인식이 제대로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 그러하다. 이 작품 {아담이 눈뜰 때}의 관찰에서 우리 독자에게 중요한 것은 주인공 아담(또는 작가 장정일 자신)이―후기 자본주의 산업사회(또는 다매체 시대)에서의 문학, 그것의 문화-사회적 기능에 대해 현실인식을 제대로 하고 있는 젊은이로서, 곧 이러한 문학의 주변세계('문학 현실')에서 다름아닌 "문학을 선택한다"는 사실이다. 소설 속에 이루어진 주인공(아담)과 작가 장정일의 일치 때문만이 아니라 작가가 위에 제시한 문학관을 소설 속에 그리고 있기 때문에 어떻든 작가 장정일의 문학관도 분명, 소위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에로의 이행을 실현한 한국 현재의 대중문화사회에서의 그것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적어도 한국 80년대와 90년대의 그것을, 소위 신세대의 작가들과 구세대의 그것의 구분 및 차이를 담고 있다. 바로 이러한 주인공에게서의 "문학 선택"이란 무슨 목적에서이며 무슨 의의를 가질 것인가가 따라서 이러한 시각에서 관찰되어야 하겠고, "문학 선택"이란 주제도 그렇게 살펴보아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아니면 "문학 선택"이란 무슨 의의나 있는 것인가 살펴보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의라도 있는 것인가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독자로서 소설 속의 주인공(아담)이 말하는 "진짜 창작", "창조의 아픔" 등을 이러한 (문학관의)차별의 시각에서가 아니라 소위 모더니즘 문학관에서의 그것으로―특히 "창작"이나 "창조의 아픔"이란 동일한 언어적 껍질(단어)에서―이해·수용했다면, 거기에 담겨져 있을지도 모르는 차이나 다른 어떤 것(새로운 것?)을 간과할 수도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90년대 소위 신세대의 작가들에서의 "문학"이란, "오늘의 우리의 진정성의 추구"(김병익, p.1035)나 "문학적 엄숙주의에 대한 부정"(서영채, p.376) 등에서 드러나는 그러한 "문학"의 목적, 의의, 의도에서 동일한 것인가? 다시말해 "문학을 선택"한다는 행위에 있어서 소위 신세대 작가들에서의 그것을 구세대(?)의 자세에 곧장 연결시켜 동일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무엇보다도 "문학의 진정성의 추구"란 테마에서, 여기엔 구세대와 신세대 작가들에서 동일한 것이 아니라 무언가―소위 과거 문학(문학관)에 있어서의 그것과 동일하지 않은―다른 어떤 것이 내재하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관찰 시각에 따라 "가짜 낙원 속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통로"(박태현, p.341)로서 문학을 택한 주인공 아담이 말하는 "창조의 아픔"은 과연 어떤 실체의 것일까? 마찬가지로 "진정성의 추구"란 소설주인공 아담에게서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가, 또는 갖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글을 쓰는 목적("왜")에 대한 작가 장정일 자신의 말:"시간보내기", "따분하고 짜증나는 시간 보내기 일 뿐이다!"라는 것이 혹시 "창조의 아픔"에 대해서 무언가를 말해 줄 수 있을까? 작가 장정일 자신의 문학관이 주인공 아담의 그것과 일치한다고 볼 수 없는 데서도 그러하지만, 물론 소설 속의 주인공 아담의 문학관이 반드시 작가 자신의 문학관에 일치되는 것도 요구되지 않으며 또한 그럴 필요도 없는 것이겠지만, 그런 대로 고려해 보지 않을 수 없는 문제이다. 따라서 "문장을 쓴다"는 "창조의 아픔"과 "따분하고 짜증나는 시간 보내기"로서의 문학 등 이러한 상반된 표현들은 어떤 연결을 낳는가 생각해 본다. 한편, 주인공 아담과 작가 장정일의 문학관을 비교한다는 것은 사실상 작가의 작품관찰에서도 그렇지만, 또한 주인공 아담의 "진짜 창작", '창조의 아픔' "진정성의 추구"에 대해 무언가 종잡을 수 있게 밑받침해 줄 어떤 것을 발견하기 위해서도 아무 의미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때문에, 특히 90년대의 이런 소위 '새로운' 작품들의 관찰에서 중요한 것은, 과거의 "문학"이란 단어 자체에서 그것의 말 그대로 전달되는 것 뿐 아니라 그것의 이해에 있어서도, 즉 구체적으로 지적하여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사고) 양쪽 측면에서, 그것의 뜻(vgl. 내용의미의 실체)을 구분해가면서 관찰하고 이해하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라고 본다. 한편, 본 연구에서처럼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미학의 구분점 및 변별적인 차이를―더욱이 한국 80년대 소설의 특징과 구분되는 90년대 소설문학의 성격을―구체화해 보려는 관찰시각의 경우에서는 이러한 측면의 관찰은 필수적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관찰자세는, 작품 속에서 그런 저런 차이를 찾기 위해 관찰한 결과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이 문학작품(소설텍스트) 자체 및 이에 대한 평가(비평)에서 이런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에 취해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요는 90년대의 이 소설텍스트에 등장한 단어들이(여기서: "문학", "진짜 창작", "창조의 아픔" 등) 우선 그 말 그대로 전달되는(풍기는) 것이 과거의, 즉 전통 미학이나 또는 모더니즘 미학에서 말하는 그것("문학")과 같은 것인가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소설 속의 주인공 아담이 말하는 "문학"("창조의 아픔")은 그 단어 그대로는 역시 전통적인 문학관에서 사용되어왔던 언어의 차용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점은 소설 속의 주인공 아담의 문학에 대한 태도나 분위기에서도 분명히 드러나지만, 작가 장정일 자신의 표현, "작가나 문학이 대단한 무엇이나 되는 걸로 전 사회적으로 가르치고 그리 배워왔는데……그거 거짓이다."라고 발언하는 작가 자신의 견해에서도 드러난다. 작가 장정일 자신이나 소설 주인공 아담이 말하는 "문학"이란 그들이 그렇게 "배워왔"던(또는 수용해 왔던, 그래서 그렇게 조성된) 언어 표현, 따라서 과거 전통 문학관에서의 언어 차용에 불과한 것이라는 점은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아담의 "문학"―그것은 작품감상에서 분명해지는 바, 모더니즘적인 분위기의 것은 아니라는 그런 독서경험도 여기에 근거할 것이다. 사실상 모더니즘의 시각이건 포스트모더니즘의 것이건간에 '창조의 아픔'이란 이 단어들은 다 존재할 뿐 아니라 글쓰기의, 곧 '언어적 형상화'의 "고통", 작품쓰기=노동(Arbeit)으로서의 노고의 "고통"은, 언어적 형상화로서의 문학이란 불변의 사실 때문에, 과거건 현재건 양 쪽에 다 공통으로 내재하는 것이다. "진짜 창작", "창조의 아픔", "진정성의 추구" 등등의 단어들도 따라서 주인공 아담에서도 그리고 작가 장정일에게서도 과거의 전통미학이나 모더니즘 소설미학의 문학관으로부터 가져온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모두가 소통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의 언어조차도 갱신하지 않는 이상, 우선 독자에게 읽히기 위해서라도, 곧 일차적인 소통의 연결점을 갖추기 위해서라도 지금까지 사용하던 과거의 동일한 단어를 차용해야 하듯이, 이것은 설명할 필요도 없는 (피할 수 없는 뻔한 논리적) 제약성(Unbedingtheit)에서의 귀결이기도 하다. 위에서 여러 가지로 언급한 사항들에 근거해 볼 때, 이 작품 {아담이 눈뜰 때}는 예컨대, 작가의 의식이나 문학관의 시각 등등은 전통적인(모더니즘적인?) 문학관과 차이가 나는 또는 변화된 어떤 것들을 감지하게 하는 그런 것을 분명 내포하고 있을 것이다(따라서 포스트모던?). "창작", "창조" "진정성" 등의 어휘들이 그 말 그대로는, 즉 외형적인 단어들 그 자체에 있어서는 전통 문학관(모더니즘 소설미학)에서의 언어 차용에 불과한 것이라면, 거기엔 다른 어떤 것을 담고 있다고 추산해 볼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독자로서―이 소설에 드러난 문학의 이해도 과거의 것과는 다른 것이라는 점을 구체화했듯이―"문학"이란 단어의 언어적인 외형 껍질은 같지만 여기엔 무언가 다른 것을 담고 있을 수 있다는 관찰시각이 요구된다. 그러나 한편 그것이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도 배제할 수는 없으며, 또한 이것은 배제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하지만 '그건 아무 것도 아니잖아'라는 결론이 비록 나온다할지라도 우리는 그때까지(또는 적어도 거기에 도달할 때까지) 이 작품을 관찰해야 가히 이 작품 {아담이 눈뜰 때}에 정당화되는 작품이해 및 작품해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소설 속의 주인공 아담이 말하는 "창조의 아픔"("문학")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 이것이 그려진 소설적 형상화의 한 대목(Textstelle)를 다시 읽어보자. "한없이 느리고 덜그럭거리는 보통열차를 타고, '고향 앞으로 갓'을 하면서, 나는 내가 대학에 다니거나, 번역문학가, 혹은 문학평론가가 되는 것보다 큰 일을 할 수 있으리란 생각에 빠졌다. 나는 작가가 될 수 있을까? 문장을 쓴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것은 내 온 몸으로 이 세계의 가속도에 브레이크를 거는 일일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내 존재의 의미를 끊임없이 반추해 되새겨야 할 것이다. 문장을 쓰는 일에서 나는 내가 그토록 원했던 '창조의 아픔'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 고통은 가짜 낙원을 단호히 내뿌리치고 잃었던 낙원, 실재, 진리를 되찾는 데 쓰이는 아픔이다. 가짜 낙원에서 잃어버린 실재를 되찾기 위해서는 두 가지 노력이 필요하다. 먼저 나는 내 오성의 능력을 과신하지 말아야 하며, 자유를 자제해야 한다. 거기에 필요한 것이 겸손이다. 그리고 좋은 세계는 쉽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 것이므로, 단시일에 명확히 잡히지 않는다고 해서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러기에 인내가 필요하다. 겸손과 인내는 문장을 쓰고자 하는 나뿐 아니라, 가속도의 낙원에 살면서 좀더 나은 세계를 꿈꾸는 모든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이다. 대구에 내려온 나는, 등록금의 매우 적은 일부를 털어 중고의 사벌식 타자기 한대를 샀다. 나는 늘 타자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왔고, 스무 살이 되어서야 그것을 갖게 되었다. 나는 이것으로 무엇을 쓸 수 있을 것이다. 편지나, 일기, 아니 어쩌면 진짜 창작을 말이다. 그리고 만약, 내가 소설을 쓰게 된다면 제일 먼저, 이렇게 시작되는 내 열아홉 살의 초상을 그릴 것이다. 내 나이 열아홉살, 그때 내가 가지고 싶었던 것은 타자기와 뭉크화집과 카세트 라디오에 연결하여 레코트를 들을 수 있게 하는 턴테이블이었다. 단지, 그것들만이 열아홉살 때 내가 이 세상으로부터 얻고자 하는 전부의 것이었다.({아담…}, p.122-123) 3) '가벼움'과 '경박함'은 포스트모더니즘적 소설의 특징인가? "장정일의 {아담이 눈뜰 때}에 나오는 수많은 외국가수의 이름들" 그리고 "레코트 플레이어를 얻기 위해 전축상 주인에게 자신의 뒤를 대주고 호모 섹스의 위안부처럼 전락하는 아담"의 섹스에 대한 태도는 80년대와 90년대의 한국 문화-사회적 주변 현실을 구분해 주는 징표인가? 그리고 이것들은―{아담이 눈뜰 때}가 포스트모더니즘 소설로 평가되듯이 (한국)포스트모더니즘적인 것을 표출해 주는 신호인가? 아니면, 독자로서의 어떤 해설자의 지적처럼 90년대 젊은이 "아담"의 "경박스러운 행동"("경박스러움")에 속하는 모든 "이런 것들은 소설의 장식적 요소"인가? 한편, 이것들은 "그런 것을 알지 못하면 그의 소설을 이해할 수 없는 본질적 요소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인지? 수많은 외국가수의 이름들, 숱한 비디오물, 소위 "성 개방" 정도의 모랄일랑 아예 벗어난 행위 등등 이런 것들은 물론 오늘날 "소설의 장식적 요소"일 수도 있고, 또한 한국 90년대 쓰여진 소설이기에 현실의 반영요소, 즉 소설의 변화된 주변 환경 속에서의 '현실'의 구성요소로서 작동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소설의 장식적 요소"로, 또는 "그런 것을 알지 못하면 그의 소설을 이해할 수 없는 본질적 요소의 역할"을 하기보다는 우리의 (한국 90년대 변화된 그리고 새로운) 문화-사회적 주변 현실의 반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현실의 반영이라는 소설의 본질을 고려해 보아도 그렇지만, 소설작품 속에 출현하는 이런 저런 소위 문화-사회적인 것들은 소설의 ("장식")구성요소로만 등장하는 것이 아님은 우리의 일반적인 독서감상에서도 분명하다. 이점은, 독자로서의 해설자(비평가)가 언급한 바, 이런 소위 새로운 문화-사회적인 것들을 쫓아가기 어려움(?)과 마찬가지로 작가 장정일 자신도―"나는 최신 정보 수집에 열심이었다. 광고 커피를 유심히 보고 새로 나온 팝송 가사집을 읽으려고 서점에 일주일에 한 번 씩 갔다.(…)"(이영준, p.318)는 그의 말에서처럼―"소설의 장식적 요소"를 위해 이런 저런 '새로운' 문화-사회적인 것들을 열심히 소설적 형상화에 끌어들이는 노력을 하고 있는 데서 볼 때 더욱 그러하다. 그렇다고 해서, 즉 이러한 현실의 (소위 시대적) 문화-사회적 반영이 우리 젊은이의 현실을 제대로 형상화하는 소설적 구성요소로 평가된다고 해서, {아담이 눈뜰 때}에서 발견되는 이런 류의 것을 곧장 포스모더니즘적 특징 요소로 간주해 볼 수 있는지는 생각해 볼 문제이다. 이런 식의 외형적으로 두드러진 문화-사회적 변이현상('분위기')의 반영 그 자체만으로 포스모더니즘적인 성격이, 특히 모더니즘적인 것과 구분되는 변별점으로 부각될 수 있느냐는 소설미학적으로 깊이 성찰해 볼 문제이다. 본 연구논문의 앞에서 독일 포스모던 소설 관찰, 특히 모더니즘과 포스모더니즘 미학의 차이를 찾아보는 소설적 '형상화'에 대한 관찰에서, 예컨대 새로운(또는 색다른) 형상화 방식(도구장치) 그 자체가 소설미학적 차별적인 특징을 결정하지는 않았듯이, 이런 문화-사회적으로 변화된 색다른 분위기 그 자체로만으로 포스모더니즘적 성격이 결정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느 비평가의 지적처럼 {아담이 눈뜰 때}와 같은 "이 '소설'들이 어정쩡하게, 혹은 공공연하게 '포스트모더니즘' 경향에 속하는 작품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원인은 누구에게 있는가"도 생각해야 할 것이며, 그 원흉(?)은 "장정일 자신인가. 출판사인가. 소위 실험 혹은 전위의식에 충만한 작가들의 공범의식인가. 아니면 이미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를 선언 혹은 실천하고 있는 매체들인가. 이에 친화적인 비평가들이나 학자들인가. 문학제도인가. 아니면 한국 후기 자본주의의 필연적인 문학적 성취인가. 아니면 미국 혹은 서구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착오적 수용의 결과인가"도 근본적으로 파헤쳐 보아 제대로 된 현실인식, 그리고 그와같이 하여 (한국)포스트모더니즘적인 소설적 형상화의 실체 인식에 도달해야 할 것이다. {아담이 눈뜰 때}와 같은 소설적 형상화에서, 만일 우리가 주인공 아담의 "경박스러운 행동"을 비롯하여 "포르로 문학"이란 것이 언급될 정도로 어딘가로 치닫고 있는 성 개방의 문제, 온갖 유행의 물결… 등등 이러한 문화-사회적인 것들이 불러일으키는 분위기에서 포스트모더니즘적 특징(사고 및 분위기)을 찾아보려 하거나 그것들을 근거로 하여, 예컨대 '가벼움'과 '경박함'이 포스트모더니즘적 소설의 특징이라고 그렇게 낙인찍는다거나 한다면,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적 문학의 이해에 있어서 성급한 행위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경박스러운" 모습이 곧 포스트모더니즘적 사고 및 분위기로 연결되어 해석된다면, {아담이 눈뜰 때}와 같은 이러한 소설적 형상화를 통해 구현되어 있는, 또는 있을지도 모르는 '한국의 현실인식'(vgl. 문학작품의 기능!)을 놓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바로 그러한 면모에서 구태여 모더니즘적 소설과 포스트모더니즘적 소설의 차이를 찾으려 한다면,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소설적 형상화의 실체 인식에 이르기도 힘들 뿐 아니라 그것은 그 작품 자체에 대해서도 정당한 해석 행위는 아닐 것이다. 신세대와 구세대 간의 차이에 또는 '80년대 소설의 특징과 90년대의 그것과의 차이'에 해당하는 이런 모든 소위 문화-사회적인 것들은 분명 우리의 변화된 주변 현실의 반영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작품 자체가 드러내는, 소위 '현실의 심미적 구조변화의 텍스트성'(심미적 質)에 관찰 시각을 꽂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런 작품에서 발견되는, 예컨대 문화-사회적으로 새로운(?) 그런 것들 중의 하나로 대두한 외형적인 것("장식")에서 두드러지는 차이의 양상에 대한 관찰과 그것의 확인작업에만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 한국의 문화-사회적 주변 현실의 변화, 곧 소설의 주변 환경도 변화된 현실의 확인에서 분명해지는 바, 따라서 소설문학에서 "현실과 픽션의 긴장관계"도 질적으로 달라지고, 마찬가지로 이것을 형상화하고 있는 작가의 상상력의 질―소위 전통미학의 표현으로는 "작가 의식", 본고의 연구주제로는 "서사적 자기반영성"―도 다르다는 것을 생각해야 하겠다. 세계화, 정보화, 대중매체화의 시대에서 이제, 그야말로 모든 것이 가능한, 심지어 "가상 현실"까지 등장한 기술발전의 세계에서, 무엇보다도 소설의 본질 "현실과 픽션의 긴장관계"에서는 과거의 모더니즘 미학의 소설적인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상상력"의 문제가 대두한다(vgl.작품의 "허구성"과 작가·독자의 "상상력"). 작가의 그리고 우리 독자의 "상상력" 조차도 변화된 주변 환경의 조건에 처한 "상상력"의 질의 문제이다. 따라서 우리 독자도 현실과 픽션의 긴장관계를 형상화하는 창작가(소설가)와 마찬가지로 독자(수용자)로서 그리고 비평가로서 이러한 변화에 대한 제대로 된 현실 인식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vgl.다매체 시대에서의 "현실구성" 및 "매체현실"에 대한 인식). 따라서, 장정일의 {아담이 눈뜰 때}에 나오는 "그런 것"들이 이것들을 "알지 못하면 그의 소설을 이해할 수 없는 '본질적 요소의 역할'을 담당"하는지 어쩐지는 물론 그런 류의 작품 자체에서 해결될 문제이지만, 역시 이것도 독자에게서 해결을 보아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독자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에 대한, 또는 수용자(대중)의 포스트모더니즘 문화에 대한, 방금 언급한 맥락에서의 이러한 이해의 문제가 내재해 있는 한, 이런 저런 작품들은 합당하게 평가·인식되지 못하거나 손쉽게 저속한 대중문화의 어떤 한 문학양상으로 떨어지게 되고 말 것이다. 이것은 우리 문단에서 예컨대 '새로운 인기 소설=대중문학'이라는 도식의 양상을 발생시키는 경우에서 드러나듯이 문학 독자로서 우리들이 한국 현실 속에서 매일 감지하고 경험하고 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소설적 형상화의 실체란 어떤 것인가에 접근하려면, 요는 소설적 형상화의 서사적 자기성찰의 질, 곧 문학텍스트를 만들어낸(창작!), 그리고 거기에 담겨져 있는 '문학적 상상력의 질'(심미성)에 대한 통찰을 수반함으로써 그렇게 하여 이 작품의 텍스트성을 독자로서 읽어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결국 이러한 작품 텍스트성(문학성)의 수용은―무릇 모든 문학작품의 이해, 수용 및 구체화가 그렇듯이―작가에게서의 문학적 상상력의 문제와 독자에게서의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에 대한 이해의 문제 양쪽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명료한 자의식을 보여주고 있는" 작 장정일의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에 대한 이해는, 앞에 언급한 포스트모더니즘적 소설적 형상화에 대한 독자들(예:작품 평자들)의 수용자세(작품이해)에 비해 훨씬 더 무르익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아담이 눈뜰 때}가 풍기는 문학적 분위기에서도 그러하지만 작가 자신이 이 방면에서 문학이론적으로 잘 무장되어 있는 면에서도 그러하다. (그의 발언)"문학이 직업이 아니라면 구역질이다."라는 표현도 앞에서 언급한 산업사회에서의 문학관을 대변하며, "글쓰기를 자기 삶의 방식으로 택한 데 대한 억울함과 짜증", 또는 "문학이 자기 구원도 명예욕도 아닌 직업이라는 것은 어떤 이유보다 고귀하게 느껴졌다."라는 "직업으로서의 문학" 등의 표현에서도 드러나는 바, 문학에 대한 작가 장정일의 이러한 태도는 분명 여러 측면에서 포스트모던적인 사고에 속하는 것이다. "쓰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전통 문학관에서의 '작가의 충동'이나 '작가 의식' 또는 "누구를 위해서 글을 쓴다"는 목적 의식 같은 것은―단순한 시사적인 지적이긴 하지만―오늘날 우리 자신들도 피부로 느끼고 있듯이 이미 다 웃기는 것이 되어버렸다는 점을 감안해 본다면 그러하다. 그리고 그런 '진지함'의 자세는 과거의 모더니즘적인 것이고, 그리고 과거의 문학적 태도에 반대되는 무언가 다른 것을, 복잡한 문예미학적 근거해명을 떠나 손쉽게 포스트모던적인 징표로 삼는다면, 작가 장정일의 문학에 대한 이러한 태도에서는 그런 (포스트모더니즘적) 사고의 측면을 부정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우리는 독자로서(그리고 비평가로서) 전제해야 할 것이다. "(장정일의 육성을 들어보자:) "스스로 '경험'하거나 '사유'하지 않은 채 날것의 '정보'를 조합하여 편리하게 소설을 쓰려는 신세대들의 경박함은, 훗날 문학사가에 의해 1992년 '표절시비'로 얼룩진 해로 기록하게 할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날것의 '정보'와 '표절'은 백지 한 장 차이밖에 되지 않습니다. (…) 그런 신세대 문학의 한계와 특성을 정직하게 보여주려 했습니다." 장정일의 {너에게 나를 보낸다}(1992)에 쓴 후기의 첫머리―에서 드러나듯, 작가 자신의 포스트모더니즘적 문학에 대한 이해도 핵심을 찌르고 있다. 장정일과의 문학에 관한 대담자가 독자를 위해 추천한 "장정일의 텍스트의 참고서로는 앙리 르페브르의《현대세계의 일상성》과 장 보드리야르의《소비의 사회》"를 들어볼 때 그리고 그의 독서가로서의 (막강한) 독서편력을 감안해볼 때 그러할 뿐 아니라 (한국의 "포스트모던에 대해":) "아직 탈 근대를 이야기할 단계에 도달하지 않았다. 계몽주의 문턱에도 다다르지 못했다. 이성과 합리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나라에 제대로 된 게 뭐가 있는가."라고 발언한 그의 지적은 우리의 현실을 그런 대로 꿰뚫어보고 있다고 본다. 장정일의 작품 문학적 형상화, 그것의 질이 즉, 그의 이러한 문학이론적인 것에 일치하느냐 어떠냐는 별개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아담이 눈뜰 때}에 구체화된 그의 문학적 형상화에서 보면(vgl. 모더니즘적 소설미학에서 '현실의 심미적 구조변화') 어떻든 본 연구대상직품들 가운데서 그런 대로 가장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요소 및 분위기를 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아담이 눈뜰 때}의 포스트모더니즘적(?) 소설의 특징에 관해서는, 다음에 전개되는 "(한국)포스트모더니즘 소설문학의 실체는?"에서 더 자세히 다루어진다. III. (전체 논문의 결론) '포스트모더니즘 소설문 학'의 실체는? 1. 독일 포스트모던 소설문학의 성과 본 연구에서는 (크리스토프 란스마이어, 인고마 폰 키저리츠키, 보도 쉬트라우스 등 3작가의 소설작품들을 중심으로) '독일 포스트모던 소설문학'에 관해, 그리고 이인화, 하일지, 박일문, 장정일 등 주로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소설로 간주된 4편의 소설작품을 중심으로 90년대 한국 소설문학에 관해 살펴보았다. '독일 포스트모던 소설문학'의 관찰에서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양쪽의 소설미학적 분기점을 찾아보려는 시각에서 소설적 형상화의 '사실과 허구의 긴장관계', 즉 현실의 심미적 구조변화로 형상화된 텍스트의 질(텍스트성)을 중심으로 드러나는 특성을 구체화해 보았고, 거기서 부각된 핵심적인 변별점,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적 소설문학으로 평가할 수 있는 징표는 소설텍스트가 담고 있는, '언어적 형상화'를 통해 이루어지는 (현실)'인식'의 질에 있었다. 그것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양쪽 소설텍스트의 변별점을 구체화해주는 핵심 요소라고 볼 수 있는 것으로, 문학적 형상화 수단 자체, 즉 소설형식의 기술적인 측면에서(technisch)보다는 현실의 심미적 구조변화로 생겨나는(asthetisch) 소설텍스트의 질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었다. "이야기하기의 자기반영으로서 이야기쓰기"의 테마에서 '문학의 인식기능'을 중심으로 볼 때, 포스트모더니즘적인 '텍스트성'을 좌우하는 관건은 역시 "서사적 자아성찰성"의 문제와 관련하여 드러났으며, 바로 거기서 모더니즘 소설미학과 구분되는 포스트모던적인 사고의 형식들을 찾아 볼 수 있게 했다. 그것은 본 연구에서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사고와 분위기"라는 표현으로 지적되었던 것으로, 소설적 형상화에서 뚜렷하게 드러나는 이러한 상이한 인식자세는, 단도직입적으로 지적해,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양쪽 세계관의 차이라고 말해 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보도 쉬트라우스의 소설 {젊은이}(Der junge Mann)의 소설적 형상화에 담긴 "서사적 자아성찰성"의 질은 '모더니즘적 소설'에서 이루어진 것과 분명 달랐다. 거기에 표출된 '서사적 자기반영의 움직임으로서 인식' 자세는 "변증법적 인식" 자세와도 다른 어떤 것으로, 이를테면 "인식의 원칙으로서 변증법"을 보류하는 일단 정지의 자세와 같은 모습이었다. "나선형의 형태로 끊임없이 돌아가고 있는 움직임의 형태"를 취한 이런 '자기반영성'의 사고구조는, 어디로 향하는 고정된 방향이 없다고 보기도 힘들지만 어떻든 일단 보류되는, 그래서 앞으로 무엇이 생겨날지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지 등이 시사되지 않은 채 열려져 있는 상태로, 바로 이점이 모더니즘적 소설적 형상화가 해내는 '문학의 인식(기능 발휘)'과 다르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변증법적 합일('종합')을 향한 것도 아니며, 아도르노의 "부정의 변증법"적 인식에 해당하는 것도 아니며,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것'이다. 특히 소설의 '열린' 결말을 생각해 볼 때, 이런 모습의 포스트모더니즘적 서사적 자기반영성의 양상은, 곧 그것의 인식자세는 모더니즘적인 것과 달리, '빈 공간'을 향한 움직임과 같은 그런 양상의 의미에서 "空轉 進行"(Leerlauf)으로 구체화해 볼 수 있는 "나선형의 열린 형상화의 형식"을 취한 독특한 자기반영적 움직임의 성격을 띤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적 '자아성찰의 움직임'은―이것은 모더니즘이나 포스트모더니즘 소설미학 양쪽에 내재한 "서사적 자기반영성"의 문제이지만―어떤 구성점을 향한 면모가 뚜렷하지 않은 '성찰의 움직임'이기에, 예견되거나 시사되어 어딘가에로 상승하는 것도 아니며, 변증법적 인식의 원(圓)에서처럼 종합(Synthese)을 향하는 것도, 또한 그렇다고 해서 계속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식의 공전도 아니며, 무언가를 향해 열린 채 끊임없이 "나선형의 형태로" 돌아가고 있는 움직임의 형태(Reflexion)이다. "이야기하기의 자기반영으로서 이야기쓰기"의 주제 중심으로 관찰해 본 작품관찰 및 분석에서 드러나는 이러한 성격의 '열린' 자세의 움직임 상태는 바로 소설텍스트들이 풍기는 "포스트모던적인 사고와 분위기"에 근거한다. '사실과 픽션의 긴장관계'를 형상화하는 '서사적 자기반영성'의 이러한 모습은, 포스트모더니즘적 소설에서 흔히 눈에 띄는 "서사적 혼합방식의 페취워크"에서도 확연히 드러나는 바, 낭만주의적 "Selbstreflexion(자기반영성)"의 그것과는 분명 다른 질의 어떤 것을 드러내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적' 문학적 형상화는 그저 단순히 언어적 유희(Spiel)를 하는 식으로 이루어지는 유희의 결과도 아니며 '예술을 위한 예술'(l'art pour l'art) 식의 '유희를 위한 유희'(Spiel ist alles)만도 아닌, 어떻든 현대 소설미학 차원에서와는 질적으로 다른 심미성을 분명 담고 있다. 역시 이러한 포스트모던적인 사고의 형식(모습)들은, 모더니즘 소설미학에서와는 다른 '문학의 인식 기능'의 주제에 자리하고 있으며, 이와같이 상호 다른 질을 갖춘 '문학의 인식 자세', 즉 상이한 형상화의 질(심미성)을 낳게 하는 문학적 사고와 형식들에 양쪽의 소설미학적인 차이가 놓여 있다고 본다.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사고와 분위기는 (소위 모더니즘적인 사고에 젖어있는) 본 연구자에게서는 처음엔 매우 황당한 것이기도 하여 혼란스러웠고, 한편 커다란 쇼크이기도 했다. 특히 보도 쉬트라우스의 소설 {젊은이}에 구현된,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의 끝이 전하는 (소위 요즘 한국 시체말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런 식'의 분위기의 전달(체험) 예컨대, 뒤죽박죽 혼란스러운 영화가 또는 그런 영화의 한 장면이 아무것도 전달하는 것 없이 그저 그런 여운을 남기는 것처럼 무언가 허망하달까 이해할 수 없이 약간 어처구니없는 그런 기분이었다. 그러나 어디로 튈지 모르는 식의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적 분위기가 어떤 구성점을 향해 움직이는 모더니즘적 사고와는 전혀 다른 질의 사고의 형상화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또다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인식의 원칙으로서 변증법"을 보류하는 일단 정지의 자세를 본질로 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성찰의 움직임과 그것의 에너지, 그리고 그것만이 현재의 우리 자신의 몫으로 남겨진, 또한 유일하게 확실한 것이라는 것에 대한 설득은 또다른 '새로운 인식'에의 차원을 열어주는 기쁨도 맛보게 했다. "현재로선 우리가 전혀 인식할 수 없는 에너지와 자극력에 따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을" 뿐이라는 현실의 포스트모더니즘적 자아성찰성이 결국 현 우리 자신의 '의식의 움직임'이라는 것 등, 포스트모던 소설들에 형상화된 이런 분위기의 모든 것들이 놀랍게도 우리의 "현재, 여기서"의 세계를 적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어느 방향으로 내닫는다고 지적할 수는 없지만, 우리의 자극, 감지, 감성, 관심, 주의력, 의식의 시선 등 끊임없이 살아움직이고 있는 에너지만이 감지되는 우리 인간의 상태가 현재 우리의 상태,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세계의 현실(사실성; Wirklichkeit)이라는 인식이 나에게 구체적으로 다가왔으며(vgl. 문학작품의 인식 기능에 대한 입증 준거), 그리고 문학작품의 이러한 현실 인식 기능에, 곧 독일 포스트모던 소설들의 '문학적' 형상화에 수용자로서 압도되었다. 무언지 알 수는 없지만 감지되는 영향력과 같은 그런 에너지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즉 어디로 튈지 모르는 식의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사고와 분위기는 모더니즘적인 그것과는 분명 다르며, 바로 이것을 표출해내고 또 그렇게 독자에게 전달해주는 '문학작품의 인식 기능' 그 자체가 곧 독일 포스트모더니즘적 소설문학의 커다란 성과라고 본다. 2. '한국적' 포스트모더니즘 소설문학의 실체는? 독일 포스트모더니즘적 소설문학에서 받았던 이러한 느낌은, 본고에서 관찰대상으로 다룬 한국 소설작품에서는 동일하지는 않았지만, 한국 '특수한' 현실의 질이 '한국적' 포스트모더니즘의 양상으로 형상화되고 있다는 데서 재삼 '문학의 인식 기능'을 확인하는 감동을 받았다. 지금까지의 작품관찰의 결과에 근거하여, 앞에서 다룬 작품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1992), {경마장 가는 길}(1990), {살아남은 자의 슬픔}(1992), {아담이 눈뜰 때}(1990)를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적 징후"와 연결하여 차례 차례 종합 정리해 본다면, '한국 포스트모던 소설'이란 어떤 것인가 하는 그것의 실체 파악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이인화의 장편소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에서는 한국 문단에 소개된, 예컨대 외국의 포스트모던 소설의 징표들, "상호텍스트성", "탈장르화(장르확산)", "자기반영성", 그리고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 "탈서사적 재현전략"(모더니즘 소설과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의 구분 및 차이로서 story의 문제) 등등 일반적으로 상식화된 포스트모던 소설적인 단초(Ansatze)가 두드러지는 경우이지만, 본 연구 관찰에서 밝혀지듯, 이 작품에서는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것들이 '외형적'으로 부각될 뿐, 이 소설텍스트의 문학적 형상화의 질은, 특히 사실과 픽션의 긴장관계를 중심으로 관찰해 본 결과, "포스트모더니즘적 사고나 분위기"를 발휘하는 그런 성격의 것은 아니라고 본다. 구태여 앞에서 관찰한 독일 포스트모던 소설에 이루어진 "포스트모더니즘적 사고와 분위기"에 비교해 본다면, "현실의 심미적 구조변화"로서 탄생한 이 창작텍스트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에는 거기서 담고 있는 포스트모던 소설적인 면모를 풍기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독일 포스트모던 소설적 형상화가 보여주는 "주체의 종말", "('역사성')이야기의 소멸", "열린 자세의 움직임", "나선형의 형태로 열려있는 형상화의 형식들", 그리고 이러한 "나선형의 형태"의 움직임을 취하고 있는 "서사적 자아성찰성" 등 포스트모던적인 분위기의 핵심적인 질에 견주어 보면 그러하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것으로 보이게 하는 것에 불과한 그런 인상의 작품이 "우리 문단에서 근래 보기 드문 수작이며 가장 대표적인 한국의 포스트모더니즘 소설 중의 하나"라고 간주되는 현실 인식에서, 그리고 그것이 결국 외국 것의 수용이기에 '한국적'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이란 개념을 생각해 보게 한다.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우리 한국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이 안고 있는 '문학'텍스트의 심미적 질, 그것은 양쪽에서의 '소설미학'적인 측면에서의 질적 차이에 해당할 것이다. 물론 한국과 외국(독일) 양쪽에서 서로 질적으로 다른 문화-사회적 '현실', 더욱이 지구촌화한 오늘날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우리의 독특하고도 특수한 한국 현실의 질의 문제를 감안한다해도, 이것은 어떻든 현실의 심미적 구조변화(글쓰기 양식)라는 소설적 형상화에서, 곧 실제 인쇄된 창작텍스트에서 드러난 현상의 인식이기에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그리고 문학적 형상화의 문제에서 (예:이인화의 '작가 개입'의 방식 등 독자-작가-관계의 구현 방식) 외형상으로만 '색다르게' 보인다고 해서 그것이 단순히 그저 새로운 방식으로 간주·수용될 수 있는가가 우리의 문제인 것 같다. 이것은 곧 '포스트모더니즘 소설문학'의 실체란 진정 어떤 것인가를 파악하는 실제 작품평가에서의 문제이며, 다시 말해 그것이 외국 것의 수용이기에 한국 독자로서 (외국)포스트모더니즘 문학에 대한 이해의 문제라고 본다. 한편 이러한 문제의 해결들이 '한국적' 포스트모더니즘 소설문학의 실체를 구체화해 줄 수 있으리라고 본다. 따라서 문학적 형상화에서 사실과 픽션의 긴장관계를 중심으로 살펴본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의 연구결과에서 드러나는, 그리고 다른 작품평가들에서도 지적된 바, 이 작품은 모더니즘 문학텍스트와의 별다르게 독특한 질적 차이도 갖고 있지 않으며, 소설적 형상화에서 단순히 외형적으로 '색다른' 것으로 보이는 방식이 적용된 이와 같은 소설텍스트가 한국 문단에서 "가장 대표적인 한국의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중의 하나"로 평가·수용되듯, 다시 말해 포스트모더니즘적 문학텍스트의 핵심적인 심미적 특징도 뚜렷이 담고 있지 않는 문학텍스트의 질이 결국 '한국적'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성격으로 규정·대변되는, 그리하여 '한국적'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은 그렇게 형성되어나가는 것임이 확인된다. 90년대 한국 소설에서 포스트모던 소설로서 평가되어 문단의 주목을 받는 작품 하일지의 {경마장 가는 길}(1990)은 "하일지의 {경마장 가는 길}이 발표된 후에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음을 볼 수 있"듯이 이 소설의 경우 사실상 '한국 포스트모던 소설'의 발단, 계기 및 귀감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경마장 가는 길}의 소설적 형상화를 중심으로 관찰해 본 연구결과에 의하면, 이 작품의 소설적 형상화의 질은―특히 (독일)소설미학적으로 볼 때―전적으로 '모더니즘적' 소설미학의 것이라고 본다. 그것은 본 연구에서 {경마장 가는 길}의 소설적 형상화에 대한, 특히 문학적 형상화의 공간으로서 "경마장 가는 길" 테마 중심으로 관찰된 연구결과에 근거하면 그러하다. 모더니즘적 소설미학의 형상화 논리에 근거하고 있으며 또 그렇게 구현되고 있다는 이러한 평가는, 소설적 형상화에서 사실과 허구의 줄다리기의 문제가 모더니즘 소설미학이나 포스트모더니즘, 또는 리얼리즘의 소설미학에서 공통으로 내재한 것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실과 픽션의 관계', 즉 작가의 자전적 사실과 소설 주인공의 소설적 사실의 관계를 자세히 관찰·분석하는 가운데서 소상히 밝혀진 바, {경마장 가는 길}의 소설적 형상화는 예컨대, 독일 포스트모던 소설에 이루어진 그러한 "포스트모더니즘적 사고와 분위기"를 풍기고 있지는 않다. 포스트모던적인 것의 핵심적인 특징인 "나선형의 형태의 움직임(Reflexion)"을 취하고 있는 "서사적 자아성찰성", 곧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자기반영성, "('역사성')이야기의 소멸", "열린 자세의 움직임"으로 창출되는, 즉 포스트모더니즘적인 형상화의 면모가 뚜렷하지 않다는 것이다. 소설적 형상화의 심미적 측면에 대한 관찰에서도 그러하듯이 예컨대, "(소설을 쓰는) 작가로서의 (소설의) 주인공"의 일치 및 "문학적 형상화의 공간으로서 경마장 가는 길" 등은 전통 소설미학의, 따라서 '모더니즘' 소설미학의 ABC에 해당하는 형상화수법이다. 이점에 있어서 이 작품은 본 연구의 관찰대상작품들 4편중 소설적 형상화가 가장 뛰어난 경우이기도 하다. 이점은 "현실의 심미적 구조변화"로서 문학텍스트라는 소설미학적 맥락에 연결된 본 연구의 핵심적인 관찰주제의 시각에서도 분명히 드러나는 바, 하일지의 {경마장 가는 길}의 소설적 형상화는 모더니즘적 소설미학에서의 형상화 논리에 근거하여 구현된 것이라고 본다. 다시 말해, 형상화의 측면에서 이 작품을 포스트모더니즘 소설문학으로 평가하고자 한다면, 그것의 '텍스트성'이 모더니즘 소설과 포스트모더니즘적 소설간의 질적(심미적) '차이'를 담고 있어야 하고, 또 그런 '텍스트구조적인 효과'를 발휘해야 하는데, 바로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적 사고와 분위기"의 핵심 구성요소인 '포스트모더니즘적인 텍스트성'이 부재한다(이에 대한 입증은 텍스트구조가 발휘하는 효과에 대한 독자반응에 있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앞에 독일 포스트모더니즘 소설문학에서 살펴본 바로는―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소설미학 양쪽에서의 차이란, 형상화 방식의 문제 하나로만, 즉 '어떻게'에서 그 구분점이 결정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여 생겨난 '텍스트의 질적 차이'(vgl. "포스트모더니즘적 사고와 분위기")에 근거한다는 본 연구의 시각에 입각한 것이다. {경마장 가는 길}의 문학적 형상화가 전적으로 모더니즘적 소설미학의 것이라는 점은, 한편 작가(하일지) 자신의 문학이론에서, 또는 문학적 형상화에서의 '사실과 픽션의 긴장관계' 테마 중심으로 지적해 보면, 그의 소설미학의 이론에서도 분명하다. 이것은 작가 하일지 자신이 전문적인 논문을 작성한 바 있는 소위 "소설의 거리"에 대한 문제로, 특히 그의 "사실주의이론"과 "재현"이론에서 그러하다(vgl. {경마장 가는 길} [작가의 말]). "어떤 것, 즉 인간과 인간이 처해 있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기만 하면 대부분의 경우 상당한 미적 가치를 갖는다고 나는 믿는다.(…) 나를 사실주의 이론에 너무 천착하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초현실주의 시나 누보로망 따위를 공부해 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것들을 공부하면서 알아낸 것은 그러한 사조의 문학은 내가 말한 이러한 원칙에 더욱 철저하다는 사실이었다." 그의 이러한 주장에서 잘 드러나는 바, 작가 하일지는 문학적 형상화에서의 소설미학이론적인 핵심을 꿰뚫어 보고 있는 창작가임은 분명하다. 특히 그의 "재현"이론은 "사실주의 이론"에 대한 깊이있는 이해일 뿐 아니라 그가 주장하는 현실의 반영 또는 "재현"으로서의 문학적 형상화는 (한국 문단에 팽배한) 단순한 리얼리즘 문학(platter Realismus), 곧 평면화된 리얼리즘미학에서의 그것을 가리키지 않은 것도 분명하다. 사실과 픽션의 관계를 처리하는 문학적 형상화에 내포된 '인식(Erkenntnis)의 문제' 등을 깊이 인지하고 있는 그의 "재현"이론은 모더니즘적 소설미학에 속하는 것이다. 물론 작가의 창작('실제')과 미학'이론'은 별개의 것이긴 하지만, 그러나 소설텍스트("호소구조")의 '심미적 질'에 대한 판단은 분명 독자에게서 결정나기에, {경마장 가는 길}에서의 소설적 형상화는 모더니즘적 소설미학의―작가 하일지 자신의 소설이론에 의하면―"재현"미학의 구현이라 하겠다. 그런데, 왜 한국 문단에서 하일지의 소설작품 {경마장 가는 길}이 '한국 포스트모던 소설' 논란의 계기가 되고 가장 귀감적인 것으로 등장하는가? 그것은 여러 가지 이유들 중에서도 한 가지만 지적한다면, 모더니즘 소설과 다른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의 변별적 징표로 부각되는 문화-사회적 변화 양상의 현상들에서 드러나는 '차이'에 있는 것 같다. 앞에서 언급한, 특히 외국의 포스트모던 소설의 여러 면모들 가운데 첨단적인 문화-사회적 "유행"이나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 "대중문학의 상업적 요소" 등 이러한 것들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문화' 자체에서 드러나는 부정할 수 없는 변별 표지이기도 하다. 소설의 경우, "현실의 반영으로서 소설적 형상화"라는 주장이 우리 모두에게서 불변으로 머무른다면, 그리고 모더니즘적인 소설이건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소설이건간에 어떻든 '문자 매체를 가지고 이루어진 예술적 형상화'라는 이 테마에서 아무런 차이도 드러나지 않는다면, 결국 일반적으로 '문화-사회적 변화양상의 현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떻든 문화-사회적 변화양상의 준거가 한국 문단에서도―독자로서의 비평가들에서도―{경마장 가는 길}의 포스트모던 소설의 변별표지 요소로서 작동한 것 같다. "최근 문학논의의 중요한 대상이 되고 있는, 이른바 포스트모던한 소설처럼 미학적 대중주의를 원리로 하여 대중문학의 상업적 요소를 과감하게 차용한다." 포스트모더니즘적 소설문학의 징표로서 '문화-사회적 변화양상의 현상'에의 차이를 근거로 하여 평가되는 이러한 시각에서, 이 작품 {경마장 가는 길}에서 특히 고려되 어야 할 것은, 어떤 평자도 지적하듯이 그리고 실제 이 소설텍스트 2 가 그렇듯이 작품 전체의 ―가 섹스 묘사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3 작품으로 인해 '섹스' 테마가 한국 포스트모더니즘 소설문학의 징표와 관련하여 대두되었다는 측면이다. 예컨대 "그렇게 섹스에 관한 묘사가 노골적인 게 포스트모더니즘이냐"는 반문과 함께 한국 90년대 소설에서 '섹스' 테마가 어떻든 '한국적'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의 특징인가 하는 관찰시각이 자리잡았다고 본다. 평자들의 (올바른 지적)"하일지 소설을 통속소설로 폄하하기는 어렵"지만, "인물설정은 통속적인 순정극이나 연애소설의 진부한 시추에이션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또한 "(작중인물) J에 대한 (주인공) R의 집요한 성적 욕구는 마치 포르노처럼 작품 전체의 질료를 섹스로 축소시킨다." (…) "비문학적이라는 혐의를 받으면서 금기시된 소재의 벽을 파괴하고 있는 글쓰기 양식이다."에서도 분명하듯이, "이른바 포스트모던한 소설처럼 미학적 대중주의를 원리로 하여 대중문학의 상업적 요소를 과감하에 차용"한다. 이러한 방식이 {경마장 가는 길}에서 분명 작동하고 있고, 또 그것은 한국 포스트모더니즘적 소설문학에서의 어떤 특수 양상으로 대두하게 된 것도 분명하다. 또한 우리는 여기서 이 작품의 영화화("경마장 가는 길")에 관련해서 이러한 맥락에서의, 소위 "미학적 대중주의 원리"로 작동하는 한국 포스트모던한 소설의 일면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문화-사회적 변화양상(현상)의 차이'를 변별 표지로 관찰하는 경우, 한국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실체 인식을 위한 작업에서는 우선, 한국 독자로서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에 대한 이해의 문제가 대두하며, 이 문제를 관장해나가야 할 '특수한 독자'로서의 비평가 및 문학연구자의 과제가 부각된다고 본다. 그리고 거기엔 과거의 한국 문학에서, 즉 한국 모더니즘 소설문학, 80년대와 90년대의 문학에서 이 테마(예:'성'모랄과 문학) 중심의 소설텍스트에 관한 천착이 요청된다. 모더니즘 소설문학과 포스트모더니즘 소설문학의 차이를 '문화-사회적 변화양상의 현상'에서 찾아보려는 경우에 발생하게 되는 이러한 문제들은 결국, 그 형상화의 수단 방식에 대한 관찰에서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포스트모더니즘 소설문학에서 드러나는 '색다른 것'에 대한 접근 그리고 그에 대한 시각의 문제 및 해석(평가)의 자세로 귀결된다고 본다. 이것은 한국에서 외국 것의 수용 경우, 문화-사회적 측면에서 전반적으로 내재한 문제이기도 하다. '문화-사회적 변화양상의 현상'에서의 차이들을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특성으로 보려는 시각은, 장정일의 {아담이 눈뜰 때}에 대한 평가작업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장정일의 {아담이 눈뜰 때}에 나오는 수많은 외국가수의 이름들" 그리고 "레코트 플레이어를 얻기 위해 전축상 주인에게 자신의 뒤를 대주고 호모 섹스의 위안부처럼 전락하는 아담"의 섹스에 대한 행태는 우리 80년대와 90년대의 한국 문화-사회적 주변 현실을 구분해 주는, 또한 이 소설작품을 포스트모더니즘적 소설로 평가하게 하는 징표로 작동하기도 한다. {아담이 눈뜰 때}에서도 그러하지만 "여주인공들은 섹스중독증 환자처럼 등장"하는 그의 {너에게 나를 보낸다}(미학사, 1992),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미학사, 1994)에서도 "특유의 성적 이미지와 묘사들이 난무하고 있"으며, "언젠가 죽기 전에 멋있는 포르노소설을 쓰고 싶다고도 했다"는 작가 자신의 말로는 "다만 소설적으로 흥미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성에 관심을 기울였는데, 이상하게 섹스만 묘사하는 작가로 알려져버렸다."는 맥락에서 볼 때 그러하다. 소위 "성 개방" 정도의 모랄일랑 아예 벗어난 행위, 많은 외국가수의 이름들, 숱한 비디오물 등 이런 것들은 우리 한국의 현실의, (90년대 쓰여진 소설이기에) 90년대 현실의 반영요소들이라고 본다. 변화된 그리고 소위 새로운 문화-사회적 주변 현실의 반영이다. 이것들은 따라서 소설적 형상화에서, 소설이 생성되는 '변화된 주변 환경' 속에서의 '현실'의 구성요소들이며, "소설의 장식적 요소"로서 작동한다. 그러나 "그런 것을 알지 못하면 그의 소설을 이해할 수 없는 본질적 요소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 그렇다고 해서 독자로서 우리가 어떤 해설자의 지적처럼 90년대 젊은이 "아담"의 "경박스러운 행동"("경박스러움")에 속하는 모든 것들이 당연히 우리 현실 반영이라는 그 사실 확인에 그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것을 알지 못하면 그의 소설을 이해할 수 없는 본질적 요소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라 볼 수 없는 것이기에 우리는 바로 이러한 것들에 근거하여 곧장 '한국'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것을 표출해 주는 신호를 여기서 찾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인화의 장편소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에서 지적한 것과 마찬가지로, '색다른' 문학작품의 이해 및 평가는 그 '새로운 방식'에 있다기보다는 소설적 장치와 그러한 소설텍스트의 구조가 발휘하는 "문학적 효과"에, 그 창작텍스트의 '심미적 질'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 까닭은 (사실상 뻔한 논리로) 소위 '새로운' 또는 '낯선' 방식의 적용 그 자체로만 텍스트의 질을 새로운 또는 색다른 것으로 만들 수 없다는 점이다(예:"매체현실"에 대한 문학적 인식의 필요성). 이런 모든 소위 문화-사회적인 것들은 물론 소설의 ("장식")구성요소로만 등장하는 것만 아니라 사실상 우리의 현 주변 현실의 반영이기에 '문화-사회적 변화양상(현상)의 차이라는 테마 중심으로 한국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실체를 인식하려 할 때, 한국 독자로서―"포스트모더니즘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를 비롯하여―포스트모더니즘 문학에 대한 이해의 문제가, 특히 '특수한 독자'로서의 비평가(연구자)의 과제가 대단히 중요한 자리를 점하게 된다고 본다. 장정일의 {아담이 눈뜰 때}도, 하일지의 {경마장 가는 길}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한국)포스트모더니즘 소설문학의 징표들을 담뿍 담은 것으로 부각된 것은, 특히 '섹스' 테마를 비롯한 바로 이러한 '문화-사회적 변화양상의 현상'에서의 차이들에 근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을 성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아담이 눈뜰 때}의 소설적 형상화도, 하일지의 {경마장 가는 길}과 마찬가지로, 본 연구 관찰에서 드러나는 바로는, 형상화된 텍스트(질)의 심미적 효과 문제에서는 모더니즘 소설미학의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고 본다. 본 연구에서 '가벼움과 경박스러움'은 포스트모더니즘적 소설의 특징인가?' 또는 "엄숙성에 맞서는 유희성" 등의 단초들을 중심으로 간략히 살펴본 바로는, {아담이 눈뜰 때}가 풍기는 문학적 분위기는 그런대로 본 연구대상작품들 가운데서 가장 포스트모더니즘적인 분위기를 안고 있는 것이었다. {아담이 눈뜰 때}의 작가 장정일 경우는 작가 자신이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명료한 자의식을 보여주고 있"을 뿐아니라(vgl. 박남훈, p.215) 포스트모더니즘 (문화)이론에 일가견을 가진 경우임에도 볼구하고, 이에 비해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이라 간주된 {아담이 눈뜰 때}의 소설적 형상화는―본 연구의 핵심적 관찰 주제 "텍스트구조의 심미적 효과"의 측면에서 볼 때―예컨대 독일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소설에 이루어진 "포스트모더니즘적 사고와 분위기"를 풍기고 있지는 않다.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장정일의 전반적인 문학에서 드러나는 '장정일적'인 의미에서의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의 분위기가 담고 있는 그런 어떤 것이―독일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소설문학 관찰에서 언급된―"현재로선 우리가 전혀 인식할 수 없는 에너지와 자극력에 따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을" 뿐 우리의 몫으로 남겨진 건 오직 그 에너지에 대한 감지뿐이라는, 즉 그러한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자아성찰성의 질을 담고 있는지 어떤지는, 그의 다른 작품들에 관한 연구를 통해 관찰해 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무언가 '빈 공간'을 향한 움직임과 같은 그런 "空轉 進行"의 모습을 한 인식자세, 곧 '포스트모더니즘적 서사적 자기반영성'의 양상에 비교될 수 있는지 등은 본 연구에서 다루지 않은 '상상력'의 문제와 연결된 문학텍스트 구조의 심미적 질(효과)에 대한 앞으로의 연구, 예컨대 (문학텍스트의 효과구조에서) 소위 "세기말적인 상상력"… 운운의 테마 연구에서 다시 천착해 볼 수는 있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서사적 자아성찰성"(포스트모더니즘적인 자기반영성)의 테마에서도 그러하지만, 특히 소위 '어디로 튈지 모르는 식'의 그런 "공전 진행"의 모습을 한 핵심적인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사고의 질적 측면에서 볼 때, {아담이 눈뜰 때}의 특히, 텍스트구조적인 문학성, 심미성, 유희성의 질적 문제에서만 보자면, 분명 포스트모더니즘적인 방향의 것이라기보다는 '모더니즘적'인 것의 면모가 더 짙다. 포스트모더니즘적인 한국소설의 이해 및 평가에서 대두하는 이와같은 독자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에 대한 이해의 문제는 박일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1992)에서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앞에서 언급한 바, 특히 한국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소설 가능성의 여부를 주제로 삼아 이 작품을 관찰하는 경우에서 지적한 '특수한 독자'로서의 비평가가 안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 문제는 문학상을 받은 이 장편소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의 평가에서 시사되는 바―{살아남은 자의 슬픔} 이 작품이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소설인가 아닌가'하는 평가의 문제를 떠나서―이 작품이 한국 포스트모더니즘적 소설로 평가되는 경우, 그것이 어떻든 '모더니즘적인 문학관'에 입각한 (독자로서의)비평가의 시각에서 이해·평가되면서 그렇게 즉,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것의 실체가 밝혀지지 않은 채,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것으로 인지·평가·수용된다는 것이다. 본 연구에서 여러 측면의 관찰을 통해 지적된 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의 소설텍스트의 질에 대한 평가는, 단적으로 말해, 소설텍스트의 질 평가에서(예:이 작품의 "산만한 서술형태", "혼란스러운 서술·묘사 및 소설 구조"에 대한 비판적 지적) 그 소설적 형상화에서 부딪히게 되는, 즉 그 작품이 생긴 그대로를 서술하는 그 생김새의 사실 확인에 그칠 뿐 이런 소설텍스트의 "호소구조"가 발휘하는 효과에 대한 관찰, 분석 및 근거해명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평가'된다는 것이다. 이와같이 작품의 그 생긴 대로의 모습은 읽어내지만(vgl. 실증주의적 문학관찰!) 그것이 내뿜는 영향력과 효과는 간과해 버린다면(vgl. 수용·영향미학적 문학관찰의 결여!), 가히 그 소설텍스트의 질을 평가했다 할 수 있을까고 비평가의 관찰자세를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작품평가들에서 현재 인쇄되어 발표된 문학텍스트 그 자체가 발휘하는 영향력과 효과를 해석해냈는가가 의문시되기에―또한 {살아남은 자의 슬픔}도 문단에서 일반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적 소설로 평가되기에―우리의 한국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소설들도 그것의 실체가 밝혀지지 않은 채 포스트모더니즘적 소설로 명명되고 있지 않느냐 하는 데 대한 문제제기이다. 포스트모더니즘적인 한국 소설의 실체란 요약하여, 그것의 실체가 제대로 이해·인정·평가되지 않은 채, 곧장 그런 어떤 것인양 규정되고 그렇게 알려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그 불명확성의 문제 자체에 근거하고 있다고 본다(vgl. 외국 유명 메이커의 상표 도용에나 견주어 볼 수 있는 그런 상태의 우리의 외국문학 수용의 현황!) 이것은 소위 새로운 성격을 드러내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 대한 평가의 문제로, 그것이 과거의 모더니즘적인 문학관의 시각에서 평가되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것의 예컨대 "전위적인 실험적 기법의 소설" 또는 "전통적인 소설문법에서 벗어난 형식" 등 그것이 소위 '새로움'에 대한 것으로 부각되면서도―물론 이 '새로움'에 대한 관찰 시각도 문제가 있지만―이에 대한 소설미학적 근거해명이 부재한 채 그렇게 평가된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것은 예컨대 "우리시대 젊음의 순수한 방황과 새로운 성격을 드러내는 작품으로 이해하는 편이 바람직하다."는 식으로 "또 하나의 주요한 성격"으로 부각되기만 한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의 문학적 형상화에서의 '새로움'이 있다면, 이 경우 그것이 질적으로 어떤 것인지 (문예미학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채 '새로운' 것으로 등장한다는 문제가 한국 포스트모더니즘적 소설의 실체 파악에 내재한 핵심 문제라고 본다. 왜냐하면 새로운 문학작품의 이해 및 평가는 그 '새로운 방식'에 있다기보다는 소설적 장치와 그러한 소설텍스트의 구조가 발휘하는 "문학적 효과"에, 그 창작텍스트의 '심미적 질'(문학성)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한국' 포스트모더니즘적 소설문학에서는 창작작품의 작가에게서 뿐 아니라 독자로서의 비평가에게서도 포스트모더니즘적 소설에 대한 이해의 문제가 내재하고 있다고 본다. 한국 포스트모더니즘적 소설은, 아이러니컬하게 표현해, 그것이 진짜 존재한다 해도 그것이 포스트모더니즘적 소설미학의 이해로 평가되기보다는 아무런 미학적 근거해명 없이 그것이 무언가 색다르다는 그것만으로 그렇게 부각되며, 그리하여 우리는 종국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적인 한국소설의 실체 인식 및 평가에서 '그것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질문으로 되돌아오게 되는 결과를 낳고 있는 이러한 현상 자체가 한국 포스트모더니즘적 소설 이해의 실체라고 본다. 이것은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소설적 형상화의 실체의 인식에 내재한 한국 독자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에 대한 이해의 문제이다. 모더니즘 문학이건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이건간에 모두가 외국으로부터 수용된 것이기에, '한국적' 포스트모더니즘적 소설의 실체 파악, 또는 우리 문학의 풍부화를 위한 단초로서 그것의 형성(또는 '구체화')을 위해서는 어떻든 '특수한 독자'로서의 비평가(연구자)의 올바른 과제 수행에서 해결되는 것이 급선무인 것 같다. 무우를 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