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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2년 4월 15일 월요일 오전 05시 35분 19초
제 목(Title): 이성욱/ 코리아 파이팅? ....


출처: 컬티즌 

코리아 파이팅 ? 차라리 늘씬한 육체를 탐닉하는 것은 어때 ? /이성욱 
   

   
이성욱/문화비평가 leesw61@hanimail.com 1961년 생. [문화 읽기 : 삐라에서 
사이버문화까지] [혁명의 문화사 - 프랑스 혁명에서 사빠띠스따까지] 등의 
공저를 냈다. 계간지 [문화 과학] 동인이며 민예총 문예 아카데미에서 강의하고 
있다. [시사 저널] 등 매체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누구나 한번은 대개 그렇겠지만 스포츠에 '미친' 적이 있었다. 내 경우 그 
징후와 증상은 이렇다. 70년 멕시코 월드컵, 74년 독일 월드컵 본선진출 
16개국의 출전 선수 이름을 거의 다 외우게 된다. 강박적 편집증후군같은 
것이다. 68년 멕시코 올림픽, 72년 뮌헨 올림픽 즈음이면 거의 뱀파이어가 
되었다. 만월이 되면 멀쩡한 사람이 뱀파이어가 되고 늑대로 돌변하듯이, 그 
만월이 하나도 아닌 다섯 개씩이나 되는 오륜기가 뜨면 내 몸은 저릿저릿해지기 
시작하면서 아주 다른 모습으로 표변하곤 했다. 그리고 관련 신문기사를 모두 
스크랩하면서, 그 스크랩북이 마치 비전의 무공비급이나 되는냥 보고 또 보고 
했다. 이 역시 강박과 편집증의 표현일 법하다. 하지만 그것은 나름대로 
스포츠를 즐기는 내 방식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새로운 방식을 발견하게 된다. 소련 여자 배구선수들이 어느 날 
갑자기 대단히 '섹시'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섹시라는 기호에 대한 해석은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 문화적 코드의 세례와 
해석의 경험을 통해 가능해진다. 그렇기에 '꼬맹이'가 소련여자배구 선수들보고 
느꼈던 섹시함이라는 감정의 일단은, 사후 판정이지 당시의 해석이 아니다. 
아무려나 그럼에도 엉덩이에 꼭 끼는 유니폼을 입고 나와 필사적으로 뒹구는 그 
여인들의 몸뚱아리는 나로 하여금 불편할 정도로, 싸한 느낌에 어쩔 줄 
몰라하게 만들었다. '꼬맹이'의 언어로는 나포되지 않았을 그 광경은, 나중 
생각해 보건대 성적인 기호를 동원해야 설명되는 것이었고, 더 나중에 생각해 
보건대 그것은 '육체라는 것'에 대한 나름의 경탄과 호기심의 소산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소련 여자배구선수와의 관계는 이후 좁게는 올림픽 넓게는 스포츠와 나와의 
관계방식을 바꾸어 놓는 분기점이 된다. 고쳐 말해 스포츠를 즐기는 내 나름의 
방법과 밑천이 생긴 셈이다. 그로부터 나는 스포츠에서 보고 즐기고자 하는 
것을 육체로 표상되는 어떤 야생성으로 치게 되고, 나아가 야생성이라는 
추상범주로 명명화되는 육체 세부의, 각각의 디테일들의 다아내믹을 즐기고자 
했다. 

이 버릇은 시드니 올림픽에까지 계속된다. 유도선수들의 거친 숨소리, 
수영선수들의 몸에 새겨지는 등고선들, 돌고래 등처럼 매끄러운 체조선수들의 
몸의 굴곡선 등등 즐길 것이 너무 많다. 이렇게 보는 것은 그들의 본적지가 
한국인지, 미국인지, 호주인지 아니면 카메룬인지 그런 것은 관심 밖이라는 
결과를 가져온다. 결국 올림픽에 대한 철저한 개인화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요컨대 선수들의 국적에 나를 동일화시키는 데에 극구 반대하는 효과로 
이어지는 셈이다. 

근자의 어떤 광고 이를테면 축구 한일전 때만 자신이 한국인임을 확인하느냐고 
비아냥대는 광고가 나는 좋다. 물론 코리아 운운하는 결론은 끔찍하지만. 사실 
그런 셈이다. 일상에서 한국이라는 것의 정체에 대해서는 가요무대에 나오는 
원로가수들의 정체성에 대해서보다 더 관심 없는 존재들이 이즈음 청춘들이다. 
그러나 그들도 간간이 열혈 애국청년이 된다. 대개 스포츠에 관련된 
일에서이다. 

그것이라도 있으니 대견치 않느냐고? 일본 우익들이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일본이라는 국가적 정체성에 관심 없던 젊은이들이 축구를 통해서 일본의 
국가성을 각성하게 되니 참으로 흐뭇한 일이 아니냐고. 니폰 울트라 같은 
일본의 축구 서포터 대부분 역시 우리의 청춘들처럼 국가 혹은 민족에 대한 
궁리를 하기에는 개인의 쾌락을 사냥하는 일이 더 바쁠 터이다. 하지만 역사는 
바로 그런 멀쩡한 개인주의적 존재들이 어느 날 갑자기 국가와 민족과 자신을 
동일화시켜 국가와 민족의 대의에 자신을 헌납하는 일에 열광한다. 그 대의의 
결과가 난징대학살이고 736 생체실험 부대의 마루타이며 식민지 여성의 
위안부화였다는 사실은 구문이다. 그때 그 일본 우익들의 슬로건이 울투라 
니폰이었다. 

문제는 민족주의이다. 근대 이후 이 민족주의는 부화되기 적당한 시기만 오면 
언제나 동급최강의 괴수가 되어 다른 민족을 밟았다. 근대 올림픽은 애초 
스스로를 국가간의 일로 생각하지 않았다. 개최지를 국가별이 아닌 도시별로 
호칭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현상은 대개 이념을 배반한다. 올림픽은 첫 
발걸음과 동시에 민족주의의 레이스가 되었다. 순진한 청춘들은 올림픽에 
출전한 '국가'대표의 국가성에 자신을 기꺼이 헌납한다. 그 헌납의 멘탈리티는 
언제나 타민족, 타국가를 밟아야 한다는 무의식을 노둣돌로 삼아 발기한다. 
올림픽이 거듭될수록 개인은 사라지고 국가 혹은 민족이라는 이름의 
퀴클롭스(그리스 신화의 외눈박이 거인)만이 서로 '맞짱'드는 형국으로 되어 
갔다. 퀴클롭스의 눈을 찌르는 법? 다음주에 이야기하자.  
 


무우를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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