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목록][이 전][다 음]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2년 4월  6일 토요일 오후 12시 13분 17초
제 목(Title): 박한제/ 운남에서 만난 남만 맹획의 후예들


출처: 월간중앙 

‘구름의 남쪽 땅’(雲南)에서 만난 南蠻 孟獲의 후예들



 
 

 
 


― 諸葛亮의 ‘七縱七擒’의 현장을 찾아서― 

諸葛亮의 七縱七擒! 삼척동자도 아는 이 유명한 故事의 현장 雲南省. 그 不毛의 
땅에 ‘南蠻’이라는 야만인이 살고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곳은 
결코 不毛의 땅이 아니었다. 1년 내내 꽃이 피는 봄만 계속되는 ‘春城’이 
그곳의 중심에 있었고, 어디를 가나 푸른 채소가 넉넉하게 자라고 있었다. 
그곳에 사는 소수민족들은 한때 야만인으로 치부되었던 먼 조상들이 살면서 
가꾸어온 그 땅에서 그들 고유의 전통을 지키려고 애쓰고 있었다. 

어느 누가 중국적인 것이 아니라고 해서 野蠻的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 
諸葛亮은 역시 복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이번 雲南 여행에서도 새삼 확인하고 
돌아왔다. 중국 역사상 諸葛亮만큼 세월과 더불어 칭송의 도가 더해지는 인물이 
있을까. 중국 어디를 가나 諸葛亮은 그곳에 있었다. 그러나 가만히 따져 보면 
그는 항상 正義의 사도였던 것은 아니며, 그의 南征이라는 것도 결코 正當으로 
포장되어서는 안된다. 

七縱七擒이라는 것도 그의 英雄 만들기 과정에서 생겨난 말이었다. 역사상 
正義의 戰爭이란 존재하기 힘들었고, 단지 强者와 弱者간의 싸움만 있어 왔을 
뿐이다. 역사가들은 항상 강자의 편을 들기에 급급했다. 그래서 소위 
‘南蠻’의 수령 孟獲은 그 실체와 달리 英雄 諸葛亮에 대비되어 무참하게 
戱化되었던 것일 뿐이었다. 중국에서 가장 많은 수의, 그리고 가장 많은 종류의 
少數民族이 살고 있는 雲南省. 그들이 여전히 그곳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雲南은 아직 때묻지 않은 곳일 수 있었다. 바다 같은 호수 햔海를 곁에 둔 
大理古城에서 만난 白族 아가씨의 해맑은 눈망울이 자꾸 눈앞에 어른거린다.  

 
운남의 수도 곤명과 곤명호 전경.전한 무제가 이 지역을 정벌하기 위해 수도 
장안 근방에 거대한 인공호수 '곤명지'를 만들어 水戰을 훈련시킨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중국에는 아직도 55개의 소수민족이 그 민족명을 내걸고 살고 있다. 91%가 넘는 
한족도 90여 민족의 합체라면 중국대륙이야말로 ‘모든 사람들을 녹여 하나로 
만들어 버리는 거대한 용광로’다. 속단할 수 없지만, 현재 남아 있는 
소수민족들도 언젠가는 한족화할지 모른다. 필자는 지금까지 주로 위진남북조와 
수·당시대의 역사를 민족사의 관점에서 연구해 왔다. 학계에 연구가설로 
제출한 것이 ‘호한체제’(胡漢體制)와 ‘교구체제’(僑舊體制)라는 것이었다. 

이 시대는 중국사상 민족이동의 시대이고, 민족이동의 결과 북방에서는 
이주민인 호족과 한족의 갈등과 통합관계가, 남방에서는 북방에서 피난한 한족 
교민(僑民)과 토착 구인(舊人) 사이의 갈등·통합관계가 이 시대 역사를 
규정하는 가장 큰 변수였다고 보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세계제국인 
대당제국(大唐帝國)의 출현도 바로 이런 민족간의 융합 과정을 거쳐 형성된 
것이라고 본다. 이런 필자의 주장은 그간 중국학계에서 논의되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 일본의 한 중견 학자가 필자의 가설 가운데 특히 교구체제 문제에 
대해 장문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 요지는 남방, 즉 동진(東晉)-남조(南朝)의 
역사 전개에서는 교구간 문제뿐만 아니라 소위 ‘만이’(蠻夷)와 한족의 문제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당연한 이야기다. 필자는 그동안 호한 
문제를 연구하는 데 주로 시간을 소비해 왔기 때문에 남방에서의 소위 
‘이한’(夷漢) 혹은 ‘만한’(蠻漢) 문제에 대해서는 소홀하게 취급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지금까지의 답사여행도 장강 북쪽지역을 중심으로 
다녀왔다. 이제 북방 호족과 전혀 다른 모습의 만이 지역에도 관심을 
돌려보아야 할 때가 된 것이다. 

필자가 첫 여행지로 운남(雲南)을 잡은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첫째, 이곳은 
역사상 가장 많은 종류의 소위 ‘소수민족’이 살았고, 아직도 가장 많은 
소수민족이 이곳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55개 소수민족 가운데 22개의 
민족이 대대로 살아온 소수민족의 삶의 터전이 바로 이곳이다. 1996년 통계에 
따르면 운남성에는 25개 민족이 살고 있으며 그 중 15개 민족은 운남성에만 
있다. 운남 총인구 4,000만명 가운데 3분의 1인 1,355만명이 소수민족이다. 
그런 까닭에 18세기 청나라가 소위 ‘개토귀류’(改土歸流) 조치를 통하여 
중앙의 관료를 파견해 직접 통치를 시행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소수민족들의 자치체제인 ‘토사제’(土司制)가 행해지고 있었다. 현재는 8개의 
소수민족 자치주가 있다. 

둘째, 이곳은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제갈량의 소위 ‘친자남정’(親自南征) 
과정에서 나타난 ‘칠종칠금’(七縱七擒)의 고사가 펼쳐진 역사의 현장이다. 
제갈량이 신기에 가까운 병법을 펴 남만(南蠻) 맹획(孟獲)을 일곱번 
사로잡았으나 일곱번 풀어주어 그에게서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정한 항복을 
받아냈던 부분은 필자로 하여금 한때 밤잠을 설치게 한 명장면의 하나였다. 


 
곤명은 '春城'이라고도 불린다.1년 내내 기온에 큰 변화가 없고 항상 봄기운이 
감돌아 꽃이 끊이지 않고 핀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소수민족 삶의 터전 ‘운남’ 

필자는 그곳으로의 여행을 여러 차례 계획한 바 있다. 1996년 1년간 중국에 
머무르면서 떠날 채비를 거의 마쳤으나 마침 운남의 대리(大理)·여강(麗江) 
지역에 지진이 일어나 연일 텔레비전 뉴스의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두번째는 그해 8월 사천(四川) 답사후 운남을 찾으려 
하는데, 마침 성도(成都)와 곤명(昆明)을 연결하는 성곤선(成昆線)이 홍수로 
두군데나 끊어져 다시 포기하고 말았던 것이다. 

운남으로의 여행은 역시 성도에서 출발하는 성곤선 열차를 타고 가야 제격이다. 
첩첩 험한 산중을 뚫고 가는 이 열차는 427개의 터널과 653개의 다리를 거치는 
중국에서도 보기 드문 난코스다. 곤명까지 급행(特快)열차로도 24시간이나 
걸리는 이 철로는 바로 제갈량이 맹획을 잡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갔던 그 길 
위에 부설된 것이다. 

운남은 그렇게 필자를 받아들이기를 꺼리고 있었다. 필자는 필자답지 않게 지난 
2월 중순 ‘L관광’ 투어팀의 일원이 되어 운남에 가게 되었다. ‘구름의 
남쪽’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운남! 제주-상해-남경-무한을 거쳐 운남성 
경내에 들어서자 기체가 마구 흔들리기 시작한다. 해발 2,000m의 
운귀고원(雲貴高原)에는 흘러가는 구름마저 산마루에 걸려 겹겹으로 포개져 
있었기 때문이리라. 

운남성이 하나의 지역단위로 성립된 것은 1253년 원(元) 쿠빌라이가 
대리국(大理國)을 멸망시킨 후 1275년 원조가 이 지역에 
‘운남행중서성’(雲南行中書省)을 둔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후 
원·명(明)·청(淸)을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 지역을 중국인들은 
진한시대 이래 ‘서남이’(西南夷), 위진남북조시대는 ‘남중’(南中) 혹은 
‘영주’(寧州)라 불렀다. 운남의 옛 이름은 ‘전’(?)이었다. 전이란 현재 
운남성의 수도 곤명(昆明) 서쪽에 있는 곤명호(昆明湖)의 옛이름인 
전지(?池)에서 비롯된 것이다. 

운남을 지금도 지역적으로 전중(?中)·전북·전남·전서 등으로 나누고 있다. 
운남 최초의 왕국이었던 전국(?國)은 기원전 339년에 세워져 200년간 독립을 
유지했다. ‘사기’ 서남이 열전에 ‘비옥한 평지가 수천리나 펼쳐져 있다’고 
기술돼 있듯 부국이었다. 외부세력이 힘을 뻗치기 시작한 것은 사천 서부 
성도평원을 중심으로 굴기한 촉국(蜀國)과 호남·호북성 일대의 강대국으로 
등장했던 초국(楚國)이었다. 먼저 촉국은 그들의 남부지역에 위치한 전국에서 
축산품과 노예를 획득하려 하였다. 

또 초국도 서부로 세력 확장을 시도하여 위왕(威王;기원전 339∼329) 시기에 
장교(庄펇)를 파견하여 양자강을 따라 거슬러올라가 야랑(夜郞;貴州省 
銅梓縣)을 벌하고 전지까지 진출, 전국왕을 위협하여 귀속시켰다. 그후 
진(秦)나라때 상알(常콅)이 오척도(五尺道)를 뚫고 그곳에 관리를 파견하였으나 
곧 나라가 망하는 바람에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한나라 초기에는 이 지역은 
방기되고 있었다. 

중원 한족이 운남을 본격적으로 경영의 대상으로 삼기 시작한 것은 전한 무제 
시기였다. ‘사기’와 ‘한서’의 서남이전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기원전 
122년 소위 실크로드를 연 장건(張騫)이 사행한 대하(大夏:아프가니스탄)국에서 
동남 신독국(身毒國;인도)을 거쳐 수입된 촉(蜀)의 포(布)와 공(퉟;사천 
西昌縣)의 죽(竹)과 장(杖)을 보았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대하는 한나라의 서남에 있고 중국을 사모하고 있으나 유목 흉노가 그 길을 
막고 있으니 촉과 신독국을 경과하는 것이 가장 가깝고 유리하며 무해하니 
그곳으로 길을 여는 것이 좋겠다는 사실을 무제에게 알렸다. 무제는 장건의 
건의를 받아들여 대하에 이르는 새로운 통로를 열기 위해 왕연우(王然于) 등을 
서남이로 보내 신독국으로 가는 길을 구하였다. 그러나 당시 전국왕 
당강(當羌)이 길을 막아 1년여 동안 머무르다 신독국으로 통하는 길을 얻지 
못한 채 돌아왔다. 

그후 남월(南越)의 반란을 진압하고 그 위세를 몰아 다시 전왕을 입조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전왕은 듣지 않았다. 무제는 마침내 파촉병을 위주로 한 군사를 
일으켜 전국으로 쳐들어가니 마침내 전왕이 항복하여 그곳에 익주군(益州郡)을 
두었다. 무제는 전왕에게 전왕 왕인(王印)을 주며 그곳 주민을 그대로 다스리게 
하였다. 이상이 대강의 경과다. 곤명 근교 석채산(石寨山) 유적에서 당시 
무제가 전왕을 봉한 것으로 보이는 금인이 출토되었다. 이때 처음으로 중국 
판도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운남 지역을 완전히 복속시킨 것은 
아니었다. 

이후 중원에서 운남으로 가는 길이 몇 가닥 뚫렸다. 사천 성도에서 
공래(퉟崍)를 거쳐 서창(西昌)을 지나 장강의 상류인 금사강(金沙江)을 건너 
운남의 영인(永仁)∼대요(大姚)∼상운(祥雲)∼대리로 통하는 길이 가장 잘 
알려진 길이다. 이 길을 진한시대에는 ‘영관도’(靈關道)라 하였고, 당대에는 
‘청계로’(淸溪路)라 했다. 또 하나의 길은 성도에서 의빈(宜賓)을 거쳐 
운남의 
염진(鹽津)∼소통(昭通)∼선위(宣威)∼곡정(曲靖)∼마룡(馬龍)∼심전(尋甸)∼곤명∼녹풍(祿豊)∼초웅(楚雄)∼대리로 
연결되는 도로로, 진한시대는 오척도(五尺道), 당대에는 석문도(石門道)라 
했다. 

이 두 길이 대리에서 합쳐져 영평(永平)을 지나 난창강( 滄江)을 건너 
보산(保山)∼등충(騰沖)을 거쳐 서남아시아 및 유럽 각국으로 연결된다. 이 
간선도로를 ‘촉-신독도’ 혹은 속칭 ‘서남비단길’(西南絲綢之路)이라 한다. 

공부도 좋지만 너무 오래 그것에 몰두하다 보면 지루해지는 법이다. 잠깐 쉬어 
가기로 하자. 운남성의 수도 곤명은 원래 이 지역에 살던 민족인 
‘곤명이’(昆明夷)에서 그 이름을 얻은 것이다. 전한 무제가 이 지역을 
정벌하기 위해 수도 장안 근방에 거대한 인공호수 ‘곤명지’를 만들어 서남이 
정벌에 필수적인 수전(水戰)을 훈련시킨 것은 유명한 이야기지만, 그 호수의 
이름도 바로 이것에서 유래했다. 곤명은 1년 내내 기온에 큰 변화가 없고 항상 
봄기운이 감돌아 꽃이 끊이지 않고 핀다. 

1년 내내 꽃과 녹색이 끊이지 않는 아름다운 봄의 도시 곤명을 그래서 
‘춘성’(春城)이라고 부른다. 어느 시인은 ‘꽃 하나 지지 않았는데 꽃 하나 
다시 피고, 사계절 꽃이 피어 핀 꽃이 끊이지 않구나’(一花未謝 一花開 
四季花開 開不絶)라고 칭송했다. 1999년 5월1일부터 10월30일까지 180일 동안 
‘국제원예박람회’가 곤명에서 열렸다. ‘봄의 도시 어디에나 꽃이 흩날리지 
않는 곳이 없다’(春城無處不飛花)는 대형 광고판이 우람하다. 

꽃뿐만 아니다. 곤명시 서남쪽, 해발 1,886m의 고원 위에는 남북 40㎞, 동서 
8㎞, 면적 340㎢의 중국에서 여섯번째로 큰 담수호인 곤명호가 그림같이 펼쳐져 
있다. 호수 서편의 서산고원에 올라 천길 깎아지른 절벽, 용문(龍門)에서 작은 
배들이 그림같이 움직이는 곤명호를 바라보노라면 금방 신선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지고 말 것이다. 삼청각(三淸閣)에서 용문의 정상 달천각(達天閣)까지 바위를 
뚫고 낸 1,333개의 돌계단은 청 중기 1781년부터 72년간의 공사 끝에 완공된 
것이다. 

아마도 이 길이 없었다면 곤명호의 아름다운 풍경은 그 빛을 잃고 말았을 
것이다. 곤명호는 그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젖줄이 되어 광활한 평야를 이루니 
이 일대를 ‘고원강남’(高原江南)이라고 한다. 장안의 곤명지는 이제 흔적조차 
찾을 길 없고, 북경 이화원 앞의 곤명호도 사이비인 것을 이곳에 오면 금방 
알게 된다. 이 호수는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 항해사에 불멸의 업적을 남긴 
명대의 대항해가 정화(鄭和)를 키워냈다. 정화는 어린 시절 이 곤명호 남쪽 
자락에 위치한 그의 고향 곤양진(昆陽鎭)에서 바다같은 호수를 바라보면서 
대양을 향한 꿈을 키웠던 것이다. 

제갈량의 칠종칠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운남의 역사·지리적 환경을 먼저 
살피지 않으면 안된다. 운남을 흔히 ‘사천의 뒤뜰’(後院)이라고 한다. 사천과 
운남 간에는 민족적, 물산적, 지형적으로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중국 
고대 서남지역, 즉 감숙·사천·운남(?·蜀·?)에는 주로 저(흷)와 강(羌)족이 
널리 분포하고 있었다. 서남이라는 것도 이 저강족의 일부다. 따라서 후세 
부견(?堅)의 전진(前秦)왕조에서 보이듯 이 세 지역이 하나의 정치적 단위로 
등장할 가능성을 보인 것도 그 때문이다. 

특히 농·촉·전 가운데 촉과 전은 상호 의존관계가 더욱 깊다. 운남성은 
전국시대부터 재부(財富)지역으로 알려졌다. 물산이 풍부하기로는 사천도 중국 
어느 지역에 빠지지 않지만, 그러나 사천만 가지고는 천하를 호령하기는커녕 
하나의 나라로 자립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사천만을 영역으로 했던 촉한이나 
오대의 후촉(後蜀) 등이 그러했다. 유비가 사천(파·촉)과 한중을 묶어 촉한을 
건립했지만, 위와 오나라에 비해 그 물산은 훨씬 모자란 상태였다. 남중 정벌은 
바로 남중을 촉한의 병원(兵源)과 부세(賦稅)의 중요 기지로 만드는 데 목적이 
있었다. 

또 하나는 지정학적 문제다. 장강 상류인 사천을 가지지 못한 중원 왕조는 장강 
하류지역에 취약점이 생긴다. 강물은 아래로 흐른다. 상류에서 하류지역을 
공격하는 것은 훨씬 쉽다. 호북·호남지역에 기반을 둔 세력이 운남을 넘보는 
것은 운남이 사천보다 장강의 상류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즉, 사천이 운남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지 않으면 그들의 상류지세(上流之勢)도 무용하게 되는 
것이다. 

제갈량의 남중 정벌은 일찍부터 계산된 것이었다. 제갈량이 유비에게 제시한 
소위 ‘융중(隆中)대책’의 주 요점은 험요한 형주와 익주를 확보하고, 
‘서쪽으로 제융과 화합하고’(西和諸戎) ‘남으로 이월을 
진무하고’(南撫夷越) ‘밖으로 손권과 결호하며’(外結好孫權) ‘안으로 
정치를 정비한’(內修政理) 후에 북벌하여 중원을 탈취한다는 것이었다. 

삼국이 정립하기 직전, 조조는 북방을 통일하여 ‘천자를 끼고 제후들을 
호령하고’(挾天子以令諸侯) 있었고, 오의 손권(孫權) 세력은 ‘강동에 근거를 
둔 지 이미 3대나 지났으며 나라도 험요하고 백성도 귀부하고’(據有江東 
已歷三世 國險而民附) 있었다. 이처럼 위와 오나라는 입국의 기초를 이미 
다졌으나, 유비는 적벽(赤壁) 대전후 무릉·장사 등 4군을 차지하면서 
형주목(荊州牧)을 자칭하고 있을 정도였다. 210년 유장(劉璋)은 유비에게 
입촉(入蜀)을 청하여 협력해 장로(張魯)의 한중으로 진격하려 했다. 유비는 
입촉후 214년 유장을 몰아휓내고 사천을 차지한다. 




--------------------------------------------------------------------------------
 朴漢濟
1946년 경남 진주(진양) 출생 
서울대 동양사학과 졸업 
동 대학원에서 석·박사학위 취득 
1996~97년 중국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연구원 
현재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한국 중국학회 회장 
저서 “中國中世胡漢體制硏究” (일조각, 1988) 
“인생-나의 五十自述”(한길사, 1997) 
 
 
운남의 지정학적 특성과 ‘융중대책’ 

사천에 들어 유비는 익주(益州)와 동주(東州)와 형초(荊楚) 세력을 주축으로 
촉한 왕조를 건립한 후 익주자사 관하의 월수(越?)·장가(휓캹)·익주 
·영창(永昌) 4군 내의 소수민족을 안정시켜 그 세력권으로 편입시키려 하였다. 
그 가운데 남중의 소수민족을 이끌고 있는 대성(大姓;대체로 漢族의 유력자)의 
설득은 순조롭지 않았다. ‘대성’이란 진나라말 유민과 한대 서남도를 개착할 
때 파견되었던 한인들의 후예가 이 지역에 남아 지방세력으로 성장한 
자들이었다. 

후한 말에는 지금의 운남성 곤명·곡정·소통 지구의 대부분과 
보산(保山)지역과 귀주성 경내에 소위 ‘대성’세력들이 지배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수(夷帥:夷族의 귀족분자)와 함께 서남이의 지방세력으로 
등장해 있었다. 당시 중국 내지에는 군벌이 할거하고 있었는데, 먼저 
유언(劉焉) 부자가 서남이지구, 즉 익주·장가·월수·영창군 등 남부 변경 
군현에 관리를 파견하여 그 지배권력을 확대하려 했다. 또 연이어 촉한을 세운 
유비도 그러하였다. 그러나 이곳의 대성, 이수들도 당시 전국이 군웅할거라는 
형세로 변화해 가는 정국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옹개(雍쿓)와 맹획은 익주군에 근거를 두고 있었고, 주제(朱提:현 昭通)의 대성 
주포(朱褒)는 장가군 태수의 신분으로 장가군을 장악하고 있었다. 월수군은 
‘수대수’(?大帥;?族의 수령) 고정(高定;高定元)의 세력범위였고, 
여개(呂凱)와 일부 한족 관리들은 전서(?西)의 영창군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 
“이제 천하가 가마솥의 발처럼 대립하여 정삭(正朔)이 셋이나 되니 원방에 
사는 우리는 어디로 귀속해야 할지 황당할 따름이다”라고 한 옹개의 말은 당시 
남중지방 세력들의 분위기를 대변한다. 결국 오(投吳)와 촉(投蜀) 양파로 
분열되는 양상을 보였다. 

옹개는 당시 반촉(反蜀)활동을 벌인 대성 이수 중 가장 세력이 컸다. 유비는 
촉한 정권을 세운 후 익주자사(益州刺史)를 회복시키고 바로 남중 각군의 
통치를 개시했다. 먼저 남중 경략을 위해 등방(鄧方)을 내항도독( 降都督) 겸 
주제태수로 임명하여 남창(南昌:현, 鎭雄)에 진주시키려 했으나 전경(?境)에 
들어가는 것이 남중 세력에 의해 제지되었다. 남중의 중추세력인 옹개는 촉한을 
효과적으로 제지하고 자기 세력을 공고하게 하기 위해 멀리 손권의 오와 통하려 
하였다. 

오나라의 힘을 빌려 촉한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교주(交州)에 있는 오의 
관리들과 연락하니, 오나라측도 당시 촉한과 형주 문제로 화의관계가 깨어진 
때라, 옹개의 연맹 제의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오는 이전의 교지(交趾)태수를 
지낸 사섭(士燮)을 시켜 옹개와 연결을 맺으니 옹개는 곧 익주군 태수 
정앙(正昻)을 죽이고, 유비가 파견한 태수 장예(張裔)를 잡아 손권에게 
압송하였다. 손권은 옹개를 영창태수로 임명하여 본격적으로 남중 통제에 
나섰다. 

옹개를 태수로 임명한 것은 그가 영창군을 탈취하여 오의 기반을 확대시키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221년 황제를 칭한 유비는 등방을 대신해 마침 촉에 투항해 
온 이회(李恢)를 내항도독으로 임명하여 다시 남중으로 파견하였다. 이회는 
평이(平夷:현 貴州 華節)까지 진주했으나 전중(?中)지역에는 접근하지 
못하였다. 오는 다시 유장(劉璋)의 아들 유천(劉闡)을 익주자사로 임명하였다. 
이는 이회와 대치시킴과 동시에 파촉지역을 빼앗아 촉한 정권을 소멸시키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삼국 초기 남중지역의 혼란은 이처럼 오와 촉의 대립이 
빚어낸 결과였다. 남중의 대표인 옹개의 ‘투오’(投吳)는 촉한에는 
치명적이었다. 223년 유비는 오를 공격하다 실패하고, 철군 도중 영안(永安) 
백제성(白帝城)에서 숨을 거둔다. 

유비 사후 유선(劉禪)이 왕위를 잇자 제갈량이 보정(輔政)의 형식으로 나라를 
이끌게 되었지만, 촉한은 형주도 잃고 ‘군주는 어리고 백성들은 나라를 믿지 
못하는’(主少國疑) 위기에 빠져 있었다. 촉한의 이런 우환으로 남고(南顧)의 
틈이 없음을 안 남중의 대성 이수들은 공개적으로 촉한에 반대하며 
분열·할거를 외치기 시작했다. 옹개는 오로부터 영창태수에 임명된 후 
영창으로 진격의 기치를 내걸었고, 고정은 촉한의 월수태수 초황(焦璜)을 
살해하고 왕을 칭하면서 반기를 들었다. 주포는 장가군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오직 영창군의 군승(郡丞) 여개만이 옹개에게 항거하며 촉한에 동조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촉한측이 이 반란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면 한 왕실(漢室)의 부흥은커녕 
위·오와 같이 삼국으로 ‘정족’(鼎足)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당시 촉한의 형편상 대규모 출병은 힘든 상황이었다. 대규모 
군대를 출병시킬 경우 단기간에 승리를 거두어야 하는데, 남중은 길이 멀고 
험하기 때문에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전쟁 기간이 길어지면 
오나라가 형주로부터 서진할 것이고, 위나라도 한중을 탈취하려고 남하할 것이 
뻔한 일이었다. 제갈량은 소위 ‘남중의 반란’을 신중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제갈량은 먼저 등지(鄧芝)를 오나라에 파견하여 동맹관계를 회복시킴으로써 
옹개와 손권의 관계를 끊게 하고, 건위(퀺爲)태수 이엄(李儼)과 여개를 통해 
옹개를 회유, 설득하였다. 또 주포와 고원 등에게도 전쟁을 택할 경우 
불리하다는 점을 설명하였다. 남중 세력을 촉한의 뒷마당으로 삼되, 가급적 
전쟁을 피하여 국력의 소모를 최대한 막는 것이 가장 유효한 방책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찍이 제갈량이 유비에게 제시했던 방책인 
‘화무’(和撫:西和諸戎 南撫夷越)정책의 일환이다. 제갈량은 남중에 반란이 
일어난 지 3년 동안 군비를 비축하고 오와 다시 연맹관계를 회복하고 
위나라와의 전선에도 잠시 큰 일이 없어지자 225년 친정 길에 나섰다. 


유비 사후 남중의 반란과 촉한의 위기 

사료들에 흩어져 나타나는 제갈량의 소위 ‘남정’(南征) 일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춘(春;3월) 출병, 하(夏) 5월 노수(瀘水;金沙江)를 건너(渡瀘), 
추(秋;9월)에 마침내 4군을 평정하고(遂平四郡) 12월 성도로 
돌아오다’(亮還成都)가 그것이다. 남정의 군사노선은 3로였다. 동로를 통해 
마충(馬忠)이 동남으로 주포를 공격하고, 중로(이전 唐蒙이 만든 案道)를 통해 
내항도독 이회가 옹개와 맹획이 있는 건령(建寧:현 曲靖일대)으로 향하고, 
서로로는 제갈량 자신이 주력군을 이끌고 월수의 고정으로 먼저 진공하는 
방법을 택했다. 

제갈량은 “무릇 용병하는 법에 마음을 굴복시키는 것이 으뜸이며 성을 쳐 
항복받는 것은 가장 치졸한 것이며, 마음을 공격하는 것이 으뜸이며 병사로 
공격하는 것이 치졸한 것이 되나니(夫用兵之道 攻心爲上 攻城爲下 心戰爲上 
兵戰爲下) 원컨대 승상께서는 다만 그 마음을 항복받아 심복케 하소서”라고 한 
마속(馬謖)의 건의를 받아들여 남정의 주된 작전방침으로 삼았다. 공심(攻心)을 
통해 ‘화무’를 도모하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고정은 모우(?牛:현 사천 漢源)·비수(卑水:현 사천 昭黨)·정작(定횶:현 
사천 鹽源) 세 지역에 보루를 쌓고 대비하고 있었다. 제갈량은 안상(安上:현 
사천 屛山)을 거쳐 비수로 진공했다. 옹개와 맹획은 월수로부터 영창으로 
진격하기 위해 이미 강을 건너 월수군의 영역 안에 들어서 있었다. 제갈량의 첫 
작전은 의외로 쉽게 풀렸다. 옹개가 돌연 고정의 부곡(部曲)에게 살해됨으로써 
남중 반란군 사이에 균열이 생기고 반란군은 혼란에 빠졌다. 촉군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고정을 살해하였다. 

지휘자를 잃은 맹획은 하는 수 없이 옹개를 대신하여 왕이 되어 부대를 
수습하고는 노수를 건너 당랑(堂狼:현 會澤)을 거쳐 건령으로 후퇴하여 
재정비에 나섰다. 5월 제갈량은 노수를 건너 맹획을 추격하였다. 이때 건령을 
향해 진격하던 이회는 평이를 거쳐 건령에 이르는 도중, 그곳의 반란부대에 
의해 곤명에서 일시 포위되었다가 그 포위망을 뚫고 남으로 반강(盤江) 
일대에서 작전을 벌여 제갈량군과 만났다. 마충은 장가를 함락시켰다. 

이제 남은 가장 큰 세력은 맹획이었다. 제갈량이 남중지역에서의 군사작전 중 
7차례나 맹획을 사로잡았다가 풀어주면서 다시 도발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는 
것이 유명한 ‘칠종칠금’이다. 그를 심복시켜 다시는 반란을 일으킬 생각을 
갖지 않도록 한다는, 바로 마음을 공격하는 작전의 일환이다. 제갈량이 
군사작전을 끝내고 전지에 도착하니 남중은 완전히 평정되었다. 

이상이 제갈량의 남정의 대강이지만, 제갈량이 승리를 거두었던 데는 그의 
탁월한 재능도 작용했겠지만 사실 과대포장된 면이 적지 않다. 남중 반란 
세력의 허약과 고립성도 문제였다. 그들은 각족의 적극적인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대성과 이수 사이의 모순과 갈등이 촉한에 유리하게 작용한 것이다. 
예컨대 주포는 원래 주제의 대성으로 장가군을 근거로 반란하여 옹개가 
오나라에 투신하여 보호를 받는데 의지하여 장가군을 통치하였지만, 이것은 
장가군의 대성(예컨대 龍·傅·董·謝氏)들과 이수(夷帥:예컨대 濟火)들의 
이익을 침범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들(濟火)이 촉한군에 도로를 트고, 군량을 주며 영접한 것도 그런 모순관계 
때문이었다. 결국 주포는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마충에게 격파당하고 말았다. 
당초 옹개도 익주군을 기반으로 반란을 일으켰지만, 투촉파 이회 등과 
적대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익주군 이족(夷族)들은 옹개를 따르지 않았다. 
옹개는 이처럼 반란 시작 때부터 이족의 반대에 봉착해 있었다. 그는 손권에 
의해 영창태수로 제수되었으나 영창군 대성 여개의 강고한 반대를 받았다. 
여개는 운남지역의 지리에 익숙하지 않은 제갈량에게 
‘평만지장도’(平蠻指掌圖)를 주면서 적극 그를 도왔다. 

반란의 수괴 옹개가 전동·전중지역으로부터 그 세력을 전서로 확장하려면 
반드시 이해(햔海:현 大理)지구를 먼저 점령한 후 영창군으로 진입해야 하는데, 
당시 이해지구를 통치하는 대성인 용우(龍佑)의 이익을 침범하게 되었다. 
옹개는 전동으로부터 고정이 근거하고 있는 월수로 진입한 후 다시 영창군으로 
진입하는 방법을 택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옹개가 월수로부터 영창으로 
진입하면 고정과 이해관계가 충돌하게 되어 있다. 옹개가 피살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옹개의 피살 원인에 대해서는 사서에는 별다른 기록이 없다. 
다만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의 교묘한 이간책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옹개가 월수에 진입한 후 이해충돌로 양 군영 사이에 일어난 혼전중 
피살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삼국지연의’에 의해 널리 소개된 ‘칠종칠금’의 고사는 소설 형식으로 
각색되어 사실과는 다른 점이 많다. 이 문제를 다룬 사서는 정사 ‘삼국지’와 
동진시대 상거(常據)가 편찬한 ‘화양국지’(華陽國志)의 남중지(南中志), 
그리고 당대 번작(樊綽)이 편찬한 ‘만서’(蠻書)가 그 전부다. 그러나 이들의 
기록은 매우 간단하다. 특히 ‘삼국지’에는 
후주(後主)·여개·양홍(楊洪)·마량(馬良)·이회 등의 열전에 흩어져 있을 
뿐이다. 

인구에 회자되는 이 사건을 주도한 제갈량의 열전에 ‘건흥(建興) 3년(225) 춘 
(제갈)량이 무리를 이끌고 남정에 나섰고 그해 가을 모두 평정했다. 
그곳으로부터 군자(軍資)가 나오게 되어 나라가 부요(富饒)하게 되었다. 이에 
군사를 정비하여 대거(大擧:北伐)를 기다렸다’가 전부다. 227년 북벌을 위해 
출정할 때 쓴 ‘(전)출사표’에 ‘오월에 노수를 건너 깊이 불모의 땅에 
들어갔다’(五月 渡瀘 深入不毛)라고 되어 있을 뿐이다. 정작 ‘칠종칠금’이란 
말은 동진시대 역사가 습착치(習鑿齒)가 저술한 ‘한진춘추’(漢晉春秋)에서 
비로소 나온다. 즉 ‘칠종칠금의 전략을 구사하여 맹획의 심복을 받고 전지에 
이르러 남중이 완전 평정되었다’고 되어 있다. 

위와 같은 엉성한 자료를 가지고 당시 전투지점을 확인하는 것은 당초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번 운남기행이 답사가 아닌 여행사 ‘투어’로 변한 것에는 
이러한 지리적 불확실성이 작용한 점도 적지 않다. 사실 딱부러지게 어디라고 
말할 수 없는 까닭으로, 중국인들의 제갈량과 인연 대기 경쟁에서 나타난 위조 
사적들이 각처에 즐비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남정’문제와 제법 인연이 
있는 사람이다. 이미 20년에 가까운 세월이 지난 일이지만, ‘촉한의 
남이(南夷) 경영’이라는 논문에 대해 내 생애 최초로 약정토론자로 선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를 회상하면 세월의 빠름을 실감하기도 하지만, 그때 그 
논문의 발표자에게 본의 아니게 누를 끼친 것 같아 지금도 마음이 편하지 않다. 

제갈량의 ‘남정’과 ‘칠종칠금’ 

남중 반란의 원인이 과연 어디에 있었는가가 문제다. 잘 아다시피 사료는 모두 
중국측에서 쓴 것이다. 역사 공부를 하면서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필봉(筆鋒)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다. 필자는 이것을 ‘문자의 폭력’이라고 
부르지만, 중원왕조와 소위 소수민족간의 관계에 대한 서술은 더욱 더 
폭력적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필봉을 휘두른 자의 주장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이 문제도 마찬가지다. 중국측 기록에 의하면 소위 ‘반란’을 주도한 
익주군 대성 옹개를 따르는 자는 별로 없었다고 되어 있다. 

때문에 옹개는 남중 사람들에게 이 지역에서 조달할 수 없는 물건인 “앞가슴이 
검은 오구(烏狗) 300두(頭)와 진드기의 뇌(腦) 3두(斗), 삼장(三丈) 길이의 
단목(斷木) 3,000근(根)을 관부(官府:蜀)에서 요구하고 있다”고 거짓 선전하며 
반란을 획책했다고 되어 있다. 즉, 진드기의 경우 몸길이가 겨우 1∼2㎜ 
정도인데 3두를 맞추기란 불가능한 일이고, 단목이라는 것도 운남에서는 
생산되지 않는 것이다. 

옹개가 패권을 획득하기 위해 속임수로 민중을 자극한 자작극이라는 것이다. 
옹개측의 기록이 없는 이상 이것도 일방적인 주장일 따름이다. 최근 
중국학계에서는 이수인 맹획을 한족 대성이라고 강변하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그가 한족이어야 이 전쟁이 민족간의 모순이 아니고 계급모순의 
소산이었다는 체제 이념과 맞기 때문이다. 실로 망발이 아닐 수 없다. 

또 학계에서는 소위 ‘오월에 노수를 건넜다’(五月渡瀘)는 구절과 유명한 
만두(饅頭)의 고사를 생성시킨 것으로 알려진 9월 회군시의 도강(渡江)지점이 
어디인가를 두고 쟁론이 벌어진 적이 있다. 당시 노수는 지금의 금사강을 
가리키는 것임이 분명한데 금사강은 현재 사천성 의빈(宜賓) 상류와 장강의 
시발점인 통천하(通天河) 사이의 장강을 일컫는 말로 그 길이가 매우 길다. 
제갈량은 성도를 출발하여 민강 하류를 지나 안상(安上:사천 屛山) 월수로 나가 
비수를 거친 후 고정을 공격한 것으로 짐작된다. 

노수에는 많은 나루터(渡口)가 있지만 현재 대강 세가지 견해가 제시돼 있다. 
1) 현재의 사천 회리현(會理縣) 2) 운남 교강현(巧家縣) 3) 반지화시(攀枝花市) 
일대가 그곳이다. 이런 쟁론이 벌어진 것은 ‘죽은 제갈량이 산 운남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 때문이다. 제갈량이 지난 곳으로 인정되면 관광객이 모이고, 
그들은 위안(元)화를 풀어놓고 갈 것이기 때문이다. 

‘삼국지연의’가 동아시아인에게 끼친 영향은 실로 막대하다. 칠종칠금이라는 
말도 ‘한진춘추’에서 처음 나왔다는 것은 이미 지적했지만, 그의 저자 
습착치는 바로 실로 말이 안되는 ‘촉한정통론’(蜀漢正統論)의 최초 
주창자였다는 사실에 근거한다면, 이것도 촉한을 드러내려는 과정에서 출현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사실 ‘3월 출정, 5월 도노, 추평사군’의 
기사를 믿는다면, 제갈량은 4개월 간 남중에서 전쟁을 치른 셈인데, 그런 짧은 
기간에 칠종칠금이 과연 가능했겠는가. 

그가 맹획과 전쟁을 치른 지점은 어디일까? 과거에 가장 유행했던 설은 대리의 
천생교(天生橋) 부근이었다. ‘삼국지연의’에 보면 ‘사금사종’후 제갈량은 
여개의 의견을 받아들여 서이하(西햔河) 위에 죽교(竹橋)를 만들어 건넜다고 
되어 있다. 서이하는 중국 6대 담수호인 이해의 유일한 출구로, 물살이 매우 
급하기로 유명하다. 

현재 대리백족자치주(大理白族自治州) 입구의 하관(下關)시 서북의 서이하 변에 
반원형의 큰 돌이 있는데 이곳이 제갈량이 건너 맹획을 생포한 곳이라고 한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한나라 제갈무후가 맹획을 잡은 
곳’(漢諸葛武侯禽孟獲處)이라는 9자의 해서(楷書)가 새겨진 청대인이 세운 
석비가 있었다고 한다.(현재 大理 햔海公園 안으로 옮겨져 있다) 그곳이 
‘오금맹획’의 장소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상상하기 힘들다는 견해가 있다. 왜냐하면 대리는 당시 
전서 영창군 태수 여개의 세력범위 하에 있던 곳인데 맹획이 앞뒤로 협공당할 
것이 뻔한 그곳으로 갔을 리 만무하다는 것이다. 대신 최근 가장 유력한 
전쟁터로 부상한 곳이 맹획의 고향 건령, 즉 운남성이 자랑하는 담배공장의 
집중지이며 곤명에서 동북으로 167㎞에 위치한 운남성 제2 도시 곡정 일대다. 

이 일대에는 제갈량에 얽힌 전설이 많다. 곡정 성북 5㎞ 지점의 백석강(白石江) 
강변에는 제갈량과 맹획이 회맹한 부조도(浮雕圖)가 대형 대리석 위에 그려져 
있다. 1987년에 완공된 이 그림에는 100여명의 이한(夷漢) 인물과 60여종의 
금수(禽獸)와 장려한 산천이 그려져 있다. 또 곡정 시내에는 제갈가(諸葛街)가 
있으며 성밖 구룡산(九龍山) 기슭에는 제갈정(諸葛井)이 있는데, 
‘독수’(毒水) 두자의 석비가 세워져 있다. 

이것은 잘 아다시피 맹획이 독룡동(禿龍洞)의 동주 타사대왕(朶思大王)의 
도움을 얻어 제갈량의 군대와 대적할 당시 물을 마시면 벙어리가 되고, 살이 타 
시커멓게 변한 후 썩으며, 몸이 솜처럼 힘이 없어지는 독천(毒泉;啞 滅 黑 
柔泉)이 있던 곳이란다. 또 곡정을 한때 ‘둔하’(屯下)라고 하였는데 제갈량이 
맹획을 정복하고 이곳에 둔전을 열고 선진 문물을 전파한 곳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곡정 일대가 현재 중국인들에게 칠종칠금의 고사가 얽힌 곳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삼국지연의’를 보면 이 독룡동이라는 곳도 서이하 근방으로 
묘사되고 있으니 나관중의 지리 지식은 우리를 매우 혼란스럽게 한다. 

이번 여행은 필자로서는 유감스러운 것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원래 투어단의 
일원으로 따라 간 것이기 때문에 일정에 포함된 곳이 아니면 바로 옆에 있는 
비석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운남의 산천을 둘러보는 데는 적잖은 
도움이 되었다. ‘삼국지연의’에는 많은 동굴이 나온다. 맹획이 마지막으로 
오과국(烏戈國)의 국주 올돌골(兀突骨)의 도움을 얻어 일곱번째 전투를 벌인 
곳이 바로 ‘반사곡(盤蛇谷) 전투다. 

제갈량이 가장 많은 살상을 감행하여 오과국 인민이 살아남은 자가 없게 만들어 
버림으로써 그로 하여금 회한의 눈물을 자아내게끔한 이 전투의 현장감을 곤명 
남방 관광지 석림(石林)에서 느낄 수 있었다. 석림은 ‘사방을 돌아보니 매복할 
만한 수풀이 없고 보이나니 석산(石山)이요, 석벽(石壁)이요, 
석곡(石谷)이다’라는 ‘삼국지연의’의 묘사를 떠올리게 했다. 제갈량과 
겨루어 유일하게 전투다운 전투를 벌였던 맹획의 처, 축륭부인(祝融夫人)의 
고사는 대리의 백족과 여강(麗江) 납서족(納西族)의 풍습에서 그런대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축융부인의 고사가 서린 ‘석림’ 

여하튼 제갈량의 남정이 후세에 미친 영향은 컸다. 남정후 제갈량은 그곳을 
확실하게 장악하기 위해 군현화(郡縣化)에 진력했다. 당시 성도의 이름과 같은 
‘익주’군이라는 명칭을 없애고, 건령군(建寧郡)으로 하고 군소재지(郡治)를 
전지에서 미현(味縣:曲靖)으로 옮겼다. 새로이 운남군(雲南郡)과 
흥고군(興古郡)을 신설하는 등 이전의 남중 5군을 7군으로 조정하였다. 그중 
건령·주제·영창·운남·흥고 등 5군은 현재의 운남성 경내에 두어졌다. 사천 
남부에 둔 월수군, 귀주성 서북부에 둔 장가군을 서남이 지역에 넣어 모두 
9군으로 편성되었다. 

동시에 이회를 건령군 태수로, 여개를 운남군 태수로, 영창군승이었던 
왕항(王伉)을 영창군 태수로, 마충을 장가군 태수로 임명하였다. 맹획 등 대성 
이수들은 남중에서 분리시켜 촉한 정권 내로 흡수했다. 맹획을 
어사중승(御史中丞), 맹염(孟琰)을 보국장군(輔國將軍), 찬습(習)을 
영군장군(領軍將軍)으로 기용한 것이 그러하다. 한나라 때의 서남이의 
군현제보다 훨씬 합리화되어 중앙 조정에 의해 조종됨으로써 중앙집권이 어느 
정도 가능하게 되었다. 

옹개·고정 등이 거느리던 ‘경졸청강’(勁卒靑羌) 1만여가(家)를 성도로 
사민시키고, 그들을 ‘오부’(五部)군으로 편성하여 위나라 정벌군의 
중요성분으로 활약하게 하였다. 약자들은 군량미 생산을 위해 둔전민으로 
투입했다. 제갈량은 건령군 미현에 ‘오부도위’(五部都尉)를 두어 둔전 사무를 
관리하니, 이로부터 전지 지구가 남중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이 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즉, 곤명이 운남의 새로운 중심으로 떠오른 것이다. 

남정후 3년만인 228년, 제갈량은 제1차 위 정벌을 위해 출사한다. 남중의 촉한 
편입은 남안(南安) ·천수(天水)·안정(安定) 등 현재 감숙성 남부에 포진한 
3군에 분포하고 있던 저강(흷羌)세력을 우군으로 삼는 데 크게 작용하였다. 
특히 천수지구의 정치대표인 강유(姜維)를 받아들이고, 이듬해 제갈량은 저강의 
항복을 받고 무도(武都)·음평(陰平) 2군을 얻었다. 이로써 촉한 정권은 
기본적으로 저강과 서남이가 분포하는 농·촉·전 지구를 통일하여 촉국의 
국가적 기초를 확립한 것이다. 

제갈량은 남중 경략을 통해 북벌의 걸림돌을 치우고 군비와 병력도 
확보하였다고 평가하지만, 운남은 그렇게 녹록한 곳은 아니었다. 그후 오랜 
기간 운남의 역사는 이들 주민에 의해 독자적 혹은 반독자적으로 전개되어 
갔다. 제갈량이 오장원의 전투에서 죽자, 그 여세를 타 263년 위나라 장수 
등예(鄧乂)가 촉한 정벌에 나서자 촉국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봉착했다. 후주 
유선은 군신회의를 소집했다. 남중으로 피난하자는 주장이 나왔으나 
초주(?周)는 남중지구의 주민들이 가혹한 공출로 반촉 심리로 가득차 있어 
반란이 일어날 것이라며 위나라에 항복을 주장하였다. 

촉한이 망하고, 265년 사마염(司馬炎)이 위나라를 찬탈해 서진(西晉)을 
건립했다. 곧 남중의 4군을 익주에서 떼어내 이 지역에 영주(寧州)를 설립하여 
운남지구를 직접 통치하기 시작했다. 사천과 운남의 행정적 결별인 셈이다. 
280년 서진은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전국을 19주로 나누니 영주는 그 중 하나가 
되었다. 284년에는 영주자사를 없애고, 남이교위(南夷校尉)를 두어 58부의 
이족을 통치했다. 주·군·현 대신 ‘교위’를 둔 것은 군사통치로 변환한 것을 
의미한다. 이런 변화는 통상의 군현조직으로는 그 통제가 불가능했다는 현실과, 
경제적 착취의 필요성이 강화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여하튼 이런 변화는 이 
지역의 대성 및 이수와 서진왕조의 모순이 격화되었다는 방증이다. 

302년 이 지역 대성들이 연합하여 건령태수 두준(杜俊)을 축출하자, 섬서·감숙 
일대로부터 사천으로 진입한 저수(흷?)·청수(靑?), 즉 저강족 유민 수십만가가 
이특(李特)·이웅(李雄) 통솔 하에 성도 부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서진은 
당시 종실 왕들의 권력투쟁으로 남중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이웅은 304년 
성도를 함락하더니 306년에는 황제로 자칭하고 국명을 성(成)이라 했다. 성국의 
성립은 이 지역에 촉한의 통치국면을 회복시킨 것을 의미한다. 남중의 중하층 
대성과 이수가 성국과 연합하여 서진에 반발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이웅이 
이끄는 저수·청수는 남중의 곤명(昆明)과 수(?) 등과 족속의 원류상 밀접한 
관계에 있다. 즉 남중과 성국의 반진(反晉)연합은 실제로 서북과 서남 저강 
각족의 인민들이 연합해 서진왕조의 압제에 투쟁한 것이었다. 

성국이 남중을 점유한 후 이웅은 이수를 건령왕으로 봉하여 통치하였다. 영주를 
영주와 교주(交州)로 분리하여 통치하고 이전 촉한국의 법제를 회복하여 안정을 
꾀하였다. 그러나 성국의 정책도 오래 가지 못했고 이수의 통치도 점차 
가혹해지기 시작했다. 이웅이 죽자 이수는 이웅의 아들 이기(李期)를 죽이고 
388년 칭제하여 국호를 한(漢)이라 칭하였다. 이수에 대해 반란을 생각한 자가 
10에 9나 되었다고 할 만큼 그의 정치는 가혹하였다. 이수가 죽고 그의 아들 
이세(李勢)가 왕위를 이었다. 

동진 왕조도 서남지구의 회복을 시도하려던 차라 영주자사였던 찬안(顔)이 
345년 동진에 투항했다. 347년 동진의 군벌 환온(桓溫)이 사천을 경략하여 
한국(漢國)을 멸망시킴으로써 이 지역은 다시 동진에 귀속되었다. 동진 왕조는 
이 지역을 다시 익주와 영주 2주로 나누어 통치하게 되었다. 이 지역에 대한 
역사적 흐름을 보면, 중원 왕조는 사천과 운남을 가능한한 분리하여 이 지역의 
힘을 분열시키려 했고, 사천지역에 들어선 왕조는 가능한 한 운남을 그 권역에 
편입시키려는 노력이 경주되었다. 

환온은 그의 부장 주무(周撫)에게 이 지역의 통치를 맡기니 주씨가 3대 40년간 
사천 일대를 다스리게(三世爲益州 四十一年) 된다. 이즈음 저족(흷族) 부견의 
전진 왕조가 종족적인 근접성을 기초로 점차 그 세력을 서남 방향으로 신장해 
왔다. 373년 전진은 촉을 공격하여 주씨를 대패시키고 익주를 점령하니 운남 
등지의 서남이 등이 모두 귀속하였다. 

남중지역의 서남이가 전진의 부견에 귀속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 전진은 
저강인이 건립한 정권이었기 때문이다. 소위 ‘서남이’의 그 족속적 원류를 
따져보면 한∼진(漢∼晉)시기의 곤(昆), 수(?), 당대의 
백만(白蠻)·오만(烏蠻)이 모두 저강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저강어로 왕을 
조(詔)라고 하는데, 그들은 부견을 부조(?詔)라 칭하며 귀부하였던 것이다. 
당대 운남 오만족이 건립한 육조(六詔)에서 왕을 ‘조’라 칭한 것도 그 
때문이다. 

한∼진시기 중원지역에서 이곳 운남으로 이동해온 소위 대성은 
동북지역에서부터 점차 전 지역으로 확장되어 갔다. 그들은 서로 갈라져 
싸우면서 자기의 세력을 확장시키기도 하였다. 성한국 점유 기간에 남중의 
유력세력은 곽(튦)·찬()·맹(孟) 3씨였다. 그 가운데 339년 곽씨와 맹씨가 
싸우면서 약해지니 찬씨가 최강의 세력으로 부상했다. 현 육량현(陸良縣) 동남 
20리 지점의 정원보(貞元堡)에 남아 있는 ‘찬용안비’(龍顔碑)는 
유송(劉宋)시기(458) 이곳의 대성 찬씨가 건립한 것이다. 

이 비문은 동진 말년 중앙권력이 영주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력을 잃고 찬씨를 
자사로 하는 영주 통치가 이루어진 사실 등 당시 이 지역의 상황을 알리고 
있다. 유송 60년간 13명, 남제(南齊) 23년간 4명의 (영주)자사가 파견되었으나 
그들의 임무는 이 지역의 반란을 토평하는 일 정도였다. 중앙조정과 이 
지방간의 모순이 격렬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양(梁)나라가 남제에 이어 등장한 후 이 지역은 다시 북조의 북위(北魏)와 
양나라가 번갈아가며 통제하였다. 552년 이후 이 지역은 다시 남조의 관할이 
되지 못했다. 서위(西魏)∼북주(北周)∼수(隋)가 이 지역을 통제해 가지만, 
대성 찬씨 세력을 완전 배제하지는 못하였다. 

수 문제 양견(楊堅)이 597년 사만세(史萬歲)를 파견하여 찬씨를 토벌함으로써 
‘찬씨할거영주’(氏割據寧州)시기 500년간의 역사는 종말을 고한다. 
이처럼 운남지역은 중원왕조의 권력이 미치는 듯 했지만, 제대로 다스린 것도 
아니었다. 이 지역에서 당나라 때의 남조국(南詔國:737~902)과 송나라 때의 
대리국(大理國:937∼1252)이 엄연한 독립왕조로 등장하는 것은 이 지역의 
민족적, 자연지리적 독자성이 그만큼 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독자적 역사를 끌어간 운남의 저력 

7세기말 대리시 서북 창산(蒼山) 기슭, 이해 연안을 중심으로 육조라는 
부족연합국가가 출현했다. 8세기초 티베트 토번(吐蕃)국을 견제하려는 당의 
지원을 받은 이족(族) 계통의 몽사조(蒙舍詔)가 육조를 통합하여 
남조(南詔)국을 개국하여 150년간 당에 입조한다. 당의 지방장관과 갈등으로 
남조국이 이반하자, 당 현종(玄宗)은 두차례에 걸쳐 대군을 파견하여 평정하려 
했다. 751년 검남(劍南)절도사 선자중(鮮子仲)이 6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왔으나 
이곳에서 대패했다. 

754년 검남유수(留守) 이복(李宓)이 7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다시 이곳에 왔지만 
그 결과는 전군이 몰사하는 참극을 맞았다. 당시 세계를 호령하던 대당제국의 
군대도 그들 앞에서는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 남조 국인들이 당군의 시체를 
염습하여 장사를 지내고 묻은 곳이 바로 대리 태화성(太和城) 경내에 있는 
만인총(萬人塚)이다. 훗날(766) 남조왕 각라봉(閣羅鳳)이 당과의 화친을 위해 
세운 ‘남조덕화비’(南詔德化碑)는 3,800여 글자로 되어 있는데, 당시 그 
참담했던 패전의 실상을 지금까지 소상히 알리고 있다. 만인총 앞에는 여전히 
‘대당남정장사지묘’(大唐南征將士之墓)라는 비문이 있다. 이렇게 엄청난 
패배만 남긴 전쟁도 ‘남정’(南征)이라 하니 중국인들의 몰염치함이 새삼 
느껴진다. 

이 전쟁은 백거이(白居易)로 하여금 ‘어깻죽지를 잘라버린 신풍의 
늙은이’(新豊折臂翁)라는 휴머니즘이 짙게 깔린 염전(厭戰) 
풍유악부(諷諭樂府)를 짓게 만들었다. 악부는 사천과 운남의 경계를 따라 
흐르는 노수(瀘水)를 ‘산초 꽃이 질 무렵 독기가 안개처럼 서리고 군사가 걸어 
건너는 강에는 끓는 물이 솟구쳐 오른다’(椒花落時휕烟起 大軍徒涉水如湯)고 
묘사하고 있다. 그 전쟁으로 ‘천만사람이 갔으나 한사람도 돌아오지 
않았고’(千萬人行無一?) ‘만인총 위에는 곡소리만 
애달프다’(萬人塚上哭퐻퐻)고 했다. 24세의 나이에 스스로 어깻죽지를 
잘라버리지 않으면 안되었던 애달픈 사정을 말하고 있다. 당의 운남 침략이 
백성들에게 남긴 깊은 상처이다. 

필자는 여행단원에 끼여 곤명발 대리행 비행기에 올랐다. 산과 거대한 호수 
사이에 넓은 평야지대를 가진 대리, 운남지역의 옛 중심지이며 백족들의 삶의 
근거지다. 비행시간 35분에 비행기는 어느 산봉우리 위에 건설된 대리비행장에 
우리를 내려놓는다. 대리석이 많이 나서 그 이름을 얻은 대리. 당나라 때부터 
채굴이 시작되어 지금도 30∼40개의 광구에서 세계에서 가장 질 좋은 대리석이 
채굴되고 있다. 미얀마에서 150㎞ 떨어진 대리는 13세기 몽골의 침략을 받기 
전까지는 서남 실크로드의 중간거점으로, 남조-대리왕국의 수도로서 500여년간 
번성했던 곳이다. 

티베트고원 동남단에서 운귀고원(雲貴高原)까지 뻗어 있는 
횡단산맥(橫斷山脈)의 몇 갈래 지맥 가운데 평균 3,500m의 
운령산맥(雲嶺山脈)의 남단 주봉인 창산 19봉우리 사이로 난 18계곡의 물이 
폭포처럼 흘러내려 중국 제7대 담수호인 이해를 이룬다. 사람의 귀모양처럼 
생겼다 하여 이름붙여진 이해는 해발 1,900m 고지 위에 이름 그대로 바다를 
이루고 있다. ‘눈 덮인 창산 구슬 같은 이해’(銀山玉햔)라는 말에서처럼 
‘동양의 스위스’ 대리는 창산과 이해를 빼고서는 운위될 수 없다. 

하관(河關)의 바람, 상관(上關)의 꽃, 창산의 눈, 이해의 달이 
‘대리사경’(大理四景)이라나. 즉, 풍화설월(風花雪月)의 고장이다. 이 
아름다운 고장에 서남이 맹획의 후손인 백족들이 창산 기슭에서 대리석으로 
집을 짓고 이해에서 가마우지로 고기를 잡으며 살고 있다. 
대리고성(大理古城)은 대리국의 도읍이었을 때 축성된 것으로 남문과 북문이 
아직 남아 있다. 대리고성 북서쪽으로 1.5㎞ 지점에 있는 
삼탑사(三塔寺:崇聖寺)에는 당대 장안의 소안탑(小雁塔)을 본떠 남조국 초기에 
만들어진 탑 3개가 정답게 서 있다. 

69.13m 16층 대탑을 사이에 두고, 43m의 10층짜리 소탑 2개가 호위하고 있다. 
그 중 소탑 하나는 지난 1996년 지진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다. 쾌청한 날이면 
창산과 작은 호수에 비치는 탑의 모습이 아름다워, 삼탑사 남쪽 1㎞ 지점에 
삼탑의 그림자를 모아두기 위해 연못을 파 특별히 공원(三塔倒影公園) 하나를 
만들었단다. 대리 여행은 3월이 적격이다. 1년에 한번, 3월에만 열리는 
‘삼월가’(三月街)라는 장이 서면 맹획의 후예들이 물자를 들고 와 서로 
교역하고, 경마와 가무 퍼레이드를 벌인다. 

백족의 대축제다. 남자보다 여자들이 더 많이 일하는 백족. 백족의 아리따운 
아가씨가 따라주는 삼도차(三道茶)를 뒤로 하고 관광버스는 다시 산을 
기어오른다. 맹획의 또 다른 후예인 납서족을 만나러 여강(麗江)으로 가기 
위해서다. 버스가 한숨을 쉬는가 싶더니 언제 나타났는지 오색 무지개가 우리가 
탄 차를 따르고 있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무지개다. 

여강 시내에 들어서니 옥룡설산(玉龍雪山) 13봉이 눈을 가로막고 있다. 
악형산(岳衡山)이라는 본명보다 수정같이 영롱한 용이 누워 있는 모습이라는 
의미의 옥룡설산으로 더 잘 알려진 이 산은 해발 5,596m나 된다. 그 산 아래 
해발 2,400m여의 소도시 여강이 납서족을 고이 안고 긴 역사를 그들과 함께 
써왔다. 납서족은 19세기까지도 이집트 고대 유적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상형(象形)·도화(圖畵)문자인 동파(東巴)문자를 상용했다. 

지금도 거리의 간판 등에 한자와 병기되고 있다. 동파문자로 쓰여진 동파경은 
2,300여 존(尊)의 신들을 믿는 초다신교인 납서족 민족종교인 동파교의 
경전이다. 원래 2만권이 넘는 방대한 기록이나 대부분 유실되고 현재는 
5,500여권이 보존되어 있다. 동파경은 경서라기보다 서사문학서로, 납서족의 
역사와 문화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다. 

서남이, 즉 맹획의 후손들은 아직도 해발 2,410m의 여강고성 안에 살고 있다. 
이 고성은 송말 원초(宋末元初)에 만들어진 것으로 80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 모습이 ‘백옥의 큰 벼루’(大硯)와 같다고 하여 여강을 
‘대연’(大硏)이라고 부른다. 명대 토사(土司)였던 목씨(木氏)의 인새(印璽) 
모양을 따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사방가(四方街)를 중심으로 사통팔달의 거리가 
줄지어 있다. 가도에는 다섯가지 채색의 석보도(石鋪 )가 깔려 있고, 
옥룡설산에서 눈 녹은 물이 그 옆으로 흘러가고 있다. ‘가가마다 흐르는 물, 
호호마다 늘어진 버들’(家家流水 戶戶垂楊), 그래서 여강은 ‘동방의 
베니스’라는 미칭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여강고성은 중원의 여느 도시와 달리 성장(城牆)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일설에는 여강지역의 세습적인 통치자인 목(木)씨가 기피해서라고 한다. 
‘목’(木)에 성장을 두르면 ‘곤’(困)자가 되기 때문이란다. 실은 여러 
부족들이 정답게 지내다 보니 굳이 성장을 두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리라. 


여강에 살고 있는 맹획의 후손들 

운남은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이다. 그래서 유사이래 무수한 민족이 보금자리를 
틀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운남에서의 인류의 역사는 150만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근래 발견된 원모인(元謀人)은 40만∼50만년 전에 살았던 
북경원인(北京猿人)보다 100만년 앞서 이 운남 땅을 찾아와 살았다. ‘운남의 
산차는 천하제일이고, 여강의 산차는 운남제일’(雲南山茶甲天下 
麗江山茶甲雲南)이라고 한다. 산차 맛을 뒤로 하고 다시 곤명행이다. 

이제 제갈량의 이야기로 마무리지어야 할 것 같다. 제갈량은 이 평화로운 
여강에도 전쟁의 흔적을 남긴 것인지, 아니면 후세인들이 조작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필자의 운남 여행 마지막 귀착지인 여강에도 제갈량에 읽힌 
이야기가 전하고 있었다. 여강에서부터 서쪽으로 53㎞, 장강의 상류 통천하에서 
동남으로 흘러내린 물이 옥룡설산에 막혀 다시 동북으로 물꼬를 트는 곳을 일러 
‘장강제일만’(長江第一灣)이라고 한다. 강면이 넓고 물 흐름이 완만하여 
제갈량의 ‘오월도노’가 바로 이곳에서 이뤄졌다는 설이 그것이다. 

어찌 이 이야기를 맹획의 후손들이 만들어냈거나 유전시켰을 것인가. 제갈량을 
사모하는 중원인들이 이곳에 와서 해댄 억지소리가 아닐까. 여하튼 원의 
쿠빌라이도 혁속도강(革束渡江)때 이 지점을 통해 장강을 건넜고, 홍군(紅軍)이 
대장정(大長征)을 감행할 때 일시 머물렀던 나룻터 석고(石鼓)가 바로 이 
강변에 위치해 있다. 

운남은 오랫동안 중원과는 격절된 곳이었다.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부족한 것을 
별로 느끼지 않았기 때문에 굳이 외부와 접촉하려 하지 않았다.외부세력이 
그들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을 뿐이다.제갈량의 소위'남중'정벌이란 것도 
삼국시대판'부시의 대아프간 작전'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 목록][이 전][다 음]
키 즈 는 열 린 사 람 들 의 모 임 입 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