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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2년 4월  6일 토요일 오후 12시 08분 51초
제 목(Title): 퍼온글/ 백기완을 울린 무지렁이들 


출처: 월간중앙 

백기완이를 울린 아, 그 위대한 무지렁이들

내·가·만·난·사·람·들·② -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나의 70년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들은 偉人도 무슨 名望家도 아니었다. 
그저 이름없이 평범한 삶을 산 ‘무지렁이’들이 오히려 더 큰 가르침을 
주었다. 때로는 더없는 감동으로, 또 때로는 더없는 분노로 나를 깨우쳐 준 
사람들을 이제는 지나간 기억 속에서 만나 본다. 

 
 



언젠가 젊은이들이 나한테 물어왔다. 사람이 산다는 것이 무엇이냐고. 나는 
대답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이 다른 건가. 아마도 사람을 만나는 것일 거라고 
했다. 이때 그 젊은이들이 어이가 없다는 투로 다부(거듭) 묻는다. 사람이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대체 무슨 뜻이냐고. 
얼참(순간) 나는 갑자기 길을 잃은 나그네처럼 그저 어릿어릿 대답을 못하고 
물끄러미 천장만 쳐다보다가 바람에 나가는 수수목처럼 철썩 고개를 떨군 것 
같았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는 무슨 소리가 절로 삐진 모양이다. 

사람은 사람을 만날수록 상채기(상처)를 입는다. 하지만 사람은 그 상채기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 그 상채기를 넘어설 사람됨을 깨우치는 것이 곧 사람 사는 
것일 거라고. 
그렇다. 걷어채이는 돌멩이는 상채기를 모른다. 그저 깨질 뿐이다. 그러나 
걷어채일수록 생기는 그 상채기에서 꽃을 피우는 것이 곧 사람의 
한살매(인생)일 거라고 했더니만 그 실례를 들어 달라고 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했던 것으로 떠오른다. 

그러니까 그것이 8·15 해방 곧 뒤, 아마도 내가 열세살적 겨울이었다고 
생각된다. 
저 황해도 구월산 하고도 구석진 곳에서 서울로 온 나의 삶은 못내 고른 편은 
못되었다. 아무튼 서울이라는 데 와서 사는 석달 동안 나는 돈이라고는 단돈 
10원 한닢 써보지 못했다. 또 서울이라는 데 와서 사는 석달 동안 속옷이라고는 
단 한번도 갈아입어 보지 못했으며 먹고 싶은 것이 그리 많아도 단 한번도 내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사먹어 보지 못하며 바람찬 한데 길거리에서 헤메고 
다녔다. 때문에 돌멩이가 따로 없었다. 내가 바로 돌멩이라, 만나느니 짓밟히고 
부딪치느니 걷어차이며 살다 보니 그때 나는 무엇이 필요했던가. 돈? 아니다. 
주먹이 필요했다. 

깨뜨리지 않으면 깨져야 하는 주먹. 하지만 서울살이라는 것이 어린 내 
주먹만으로는 안되었다. 힘이든 성깔이든 공부든 지면 죽는다는 깨우침이 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책이라면 그저 닥치는 대로 읽고, 한번 읽으면 덮어놓고 몽땅 
외워 버리고자 하는 것이었다. 

보기를 들어, 어쩌다가 중학교에 다니는 애의 집에 놀러가게 되면 그 자리에서 
그 애의 교과서를 몽땅 따라 외우기 차름(시작)했다. 어떤 때는 남산길 외진 
곳에 섰다가 학교에 가는 애들한테 책 좀 빌리자고 해서는 그 애가 돌아오는 
저녁 때까지 그 교과서를 몽땅 달달 따라 외워둔 다음 그 애한테 돌려주곤 
했으니 금세 날나발(소문)이 도는 수밖에 없었다. 

저 새끼가 비록 거리의 뜨내기이지만 시험공부 할 적에 같이 공부하면 도움이 
된다는 날나발. 이리하여 시험공부 하는 애들 속에 끼이는 날은 제왕의 
호강인들 어찌 나의 호사에 빗댈 것이냐는 투로 느긋하게 퍼지는 날이었다. 
애들과 같이 식은 밥에 김치를 비벼 왓짝왓짝 먹으면 속이 그렇게도 넉넉했다. 
그리고는 떡하니 따사한 방에 누을라치면 아, 서울이라는 데를 이래서 왔구나 
싶기도 했다. 

그리고는 내가 하는 일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렇게 빈둥대다 수학문제를 좀 
같이 풀자고 하면 같이 풀어 주면 되고, 또 영어 문장을 같이 해석하자고 하면 
또 같이 해석해 주면 되고…. 바로 그 점이 신기하게 여겨진 애들이 나에게 
개엿이나 땅콩 따위를 덥석 덥석 쥐어 주는 것이 그렇게 행복하게 느껴질 수 
없었다. 


 
6.25 전쟁중 한 시골 사진관에서 고등학교 교복을 빌려 입고 사진을 찍을 
당시의 소년 백기완.  
내 가슴에 큰 못을 때려박은 신문사 아저씨 

하지만 빌붙은 행복이란 이내 깨지되 박살이 난다는 것을 나는 그때 벌써 알게 
되었다. 
벌컥 하고 방문이 열리더니 내 친구의 아버지인 듯싶은 사람이 눈알을 부리 
부리 벼락을 친다. 
“쟌 뭐야. 이 새끼들아, 공부하라고 했지, 학교도 못 다니는 저 거지새끼 
잠재워 주라고 했어?” 
그러면서 나더러 나가라고 하니 어쩌는가. 

내 친구가 쟈는 공부를 잘해 같이 있는 거라고 해도 내 친구의 아버지는 
막무가내. 하는 수 없이 쫓겨 나오는데 약삭빠른 내 친구가 눈짓을 한다. 
뒷담으로 가 있으라고. 
그래서 한참만에 뒷담을 넘어 다시 들어가기는 했지만 어떻게 알았는지 내 
친구의 아버지가 또 다시 방문을 벌컥 열더니만 나를 바싹 들어다 밖으로 내 
던지고는 대문의 빗장까지 제까닥 지친다. 득실대는 내 몸의 이는 한데서 자야 
얼어죽는다며…. 

아, 그때 그 눈보라 치던 밤. 갈 데가 있으랴, 오라는 데가 있으랴. 털벅 털벅 
눈 위에 밟히는 내 친구 아버지의 모습은 떠올리기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밟은 
메주덩이 같은 얼굴에 눈은 고리눈이요, 코는 매부리코, 얇은 입술에서 터져 
나오는 목소리는 어찌 그리 땅개소리처럼 카랑카랑하던지. 그의 직업은 어느 
신문사의 부장이라고 했는데 왜정 때부터 신문기자로 날렸단다. 

그 갓대(증거)로 마치 가보인 양 마루에 걸어둔 일본칼(도), 그것으로 
내려치듯, 득실대는 이는 한데서 자야 얼어죽는다고 나를 내다버리던 아, 그때 
그 신문사 부장님. 그 분은 왜 나한테 그렇게까지 모질게 굴었을까. 간단했다. 
어느날 내가 그의 집 뒷담, 햇볕 고른 데서 이를 잡고 있는 것을 본 것이었다. 
그렇다면 불쌍히 여길 만도 했는데 왜 그랬을까.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그 분은 어린 내 가슴에 맨 처음으로 꽝꽝 큰 못을 
때려박아 치명적인 상채기를 입힌 사람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된다.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저항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준 분이라고 여겨진다. 왜냐. 지금도 
그를 떠올리기만 하면 내 주머구(주먹)에서는 번쩍번쩍 부싯돌이 이니 말이다. 


 
초등학교 교사 출신인 부인 김정숙씨와 결혼할 무렵의 사진.  
걸인 할머니, 그리고 무작정 상경 처녀 

하지만 세상은 그런 사람만 있는 것일까, 아니다. 바로 그날 밤이다. 밤은 
깊었지, 눈은 내리지, 발목까지 빠지는 눈길을 털벅털벅 어디로 갈꼬? 옳거니! 
남대문 시장 안의 내 친구 맹맹이가 심부름을 하는 명태가게까지 가자. 가서 
문이 닫혔으면 그 가게방 처마에서라도 꼬불치자 하고 털벅털벅 가는데 시장 
모퉁이에서 웬 할머니가 손녀딸인 듯싶은 어린 것을 품에 폭삭 안은 채 날더러 
한푼만 주고 가란다. 
그런 할머니는 그때 허구많은 거리의 안타까움이기에 그냥 지나쳤더니만 매우 
나무라는 투로 내 뒤통수를 갈긴다. 

“어린 것이 벌써부터 사람되기는 다 틀렸구만. 이 추운데 날더러 어떻게 
하라고 그냥 버리고 가는 거유.” 
뭐라고? 내가 시방 그 할머니와 그의 어린 손녀를 그냥 내버리고 가는 거라고? 
나는 나도 모르게 조금 전에 나를 한데로 집어던지던 신문기자가 떠올라 그 
할머니한테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할머니, 나는 시방 가진 것이라고는 이밖에 없어요. 우굴 우굴 이.” 
이때 그 할머니가 내 말귀를 잘못 알아들으신 듯 “우거지면 어떻고 시래기면 
어때요. 좀 주고 가요” 그러신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냅다 달아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주 달아나자는 것이 아니었다. 어디든 가서 식은 밥 
한술이라도 얻어다 드리고 가자고 해서 냅다 달려간 곳이 그때 남대문 시장 
안에 있던 설렁탕집 ‘남산옥.’ 하지만 아직은 이른 새벽이라 문도 안 
열어주며 소리를 지른다. 
“신새벽부터 웬 빌뱅이야. 재수 없어, 이 새끼야. 꺼져.” 

그런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슬며시 부엌으로 이르는 뒷문을 밀고 들어갔다. 
그리고는 부뚜막에 흩어져 있는 밥알을 쓸어 한 오큼(옴큼)을 주워 할머니한테 
갖다드리고는 또 다시 어철 어철. 맹맹이네 명태가게에 가니 맹맹이는 벌써 
며칠 전에 어머니가 아프시다고 해서 고향으로 갔다는 것이었다. 

그의 고향이 용인이라고 했던가, 양평이라고 했던가. 어쨌든 그를 찾아 서울을 
빠져나와야 살 것만 같아 그때만 해도 차도 없고 기차도 없는 시골길을 한없이 
어철 어철 가며말며 얼마나 걸었을까. 
눈 덮인 배추밭이 널린 것을 보니 왕십리를 지나는 것 같았고 또 여기저기 똥 
구덩이와 눈밭이 이어지는 것을 보니 광나루를 지나서도 한참인 것 같은데 
저만치 뽀얀 눈보라 속에서 보따리를 가슴에 안은 열댓살쯤 되는 계집아이가 
개새끼와 승강이를 벌이고 있다. 

그 어린 것은 개새끼보고 어서 집으로 가라고 하고, 그 개새끼는 따라가겠다고 
징징대고…. 그렇게 몇날 며칠을 걸었는지 그 어린 것의 발은 숫제 눈덩이다. 
걸친 것이라고는 발목까지 내려오는 곁바지 위에 검정색 깡통치마, 그리고는 
때에 전 흰 무명저고리에 파란 고름뿐, 머리도 어깨도 하얗게 눈을 이고 섰는데 
그의 얼굴은 마냥 얼기만 한 모양이다. 시퍼러둥둥 들뜬 그 처녀가 어철 어철 
다가서는 나에게 반갑게 묻는다. 서울이 어디쯤이냐고. 

이때 내 대답이 한 이틀은 더 걸어야 할 터인데 서울은 왜 가려고 하느냐고 
했더니 그의 대답이다. 자기 집은 본디 강원도 치악산 밑인데 서울로 돈을 벌러 
간다는 것이었다. 
돈을 벌러 가는데 웬 개냐고 했더니, 가라고 해도 아니 가고 며칠씩 이렇게 
따라오니 어떻게 하느냐며 날 저문 북쪽으로 들어가는 그 처녀. 내 신세도 
안타까웠지만 그 처녀의 앞날이 더 안타까운들 어쩌겠는가. 

또 다시 어철 어철. 새벽이 오고 낮이 지나 다시 어두워 가는데 이참에는 내가 
죽을 것만 같았다. 보이는 것은 거무튀튀한 산과 들 뿐 사람이 있으랴, 사람 
사는 집이 있으랴. 배는 고프고 춥고. 나는 그때 사람의 절망이란 것을 내 
온몸으로 겪었던 게 아닌가 생각된다. 절망이란 무엇이던가. 눈을 떠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 보여도 그저 그만인 것, 그런 
절망 말이다. 


영혼의 목숨까지 구해준 달구지꾼 

어쨌든 아무것도 느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느껴야겠다는 생각도 아니 드는데 
저만치 눈 덮인 둔덕 밑에서 아른아른 불빛 같기도 한 소리가 들려와 엉금엉금 
기어가다 말고 나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허허벌판에 딱 한채밖에 없는 
이엉집(초가집)에서 초등학교 2학년쯤이나 되었을까 싶은 어린 계집애의 
노랫소리가 나오지 않는가 말이다. 

애들아 오너라 달 따러 가자 
망태 메고 장대 들고 뒷동산으로 

뒷동산에 올라가 무등을 타고 
장대로 달을 따서 망태에 담자 

저 건너 순이넨 불을 못 켜서 
밤이면 바느질도 못한다더라 

애들아 오너라 달을 따다가 
순이 엄마 방에다가 달아드리자 

노래는 끝이 없었다. 다 부르면 또 부르고, 또 그치면 또 이어지고, 나는 다 
쓰러져 가는 그 집 굴뚝 밑에 쭈그리고 앉아 나도 모르게 그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그리운 고향을 떠올렸다. 시방 저 북쪽 고향에 있는 내 여동생의 
이름도 순이요, 나이도 아홉살이다. 또 우리 어머니도 노상 바느질을 하시는데 
눈이 어두워 바늘귀를 잘 못 꿰시는 것을 보고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왔다. 

그 노래는 모르기는 하되 이런 나를 다독이느라 부르는 것은 아닐까. 해서 나도 
모르게 따라 부르며 흘리며 그러다 그만 기운이 다해 잠이 든 모양이었다. 
어절씨구, 그렇게 잠이 들 것이면 보나마나 아주 아주 잠이 들고 말 것이 
뻔했다. 하지만 내 어찌 그 다급한 사정을 알랴. 그저 깊고 깊은 수렁으로 
고들잠(아주 목숨이 다해서 빠지는 잠)에 빠지는 수밖에. 

이때다. 누군가가 툭툭 쳐 눈을 떠 보니 덥수구레한 웬 아저씨가 나를 반짝 
안아다 그 집 아랫목에 뉘더니 김치를 설설 만 깡보리밥을 밀어주며 한술 
뜨라고까지 한다. 그러더니 그 한밤에 어디론가 나가지 않는가. 나는 그런 
아저씨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 굴뚝 밑에서 잠이 든 나를 웬 재수 없는 빌뱅이냐고 그냥 내버려두었으면 
보나마나 나는 얼어 죽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나를 살리되 자기 집 안방 
아랫목에 뉘어 살렸으니 그 아저씨는 내 목숨만 살려준 것이 아니었다. 사람이 
싫고 사람 사는 서울이 싫던 내 한갓된 절망의 영혼까지 살려준 것이니 그 분은 
쨩(도대체) 어떤 분이었을까. 

“애야, 어머니는 안 계시니?” 
“응.” 
“저 아저씨는 너희 아버지이시구?” 
“응.” 
“뭣을 하시는 분인데.” 
“남의 집을 살지.” 
“남의 집이라니?” 
“주인집 달구지 끌지.” 

나는 그때까지 얼었던 몸이 채 가시지 않았지만 퍼뜩 정신이 들었다. 글줄이나 
쓴다는 신문기자는 갈 데 없어 하룻밤 신세를 지는 나를 한데로 내쫓았다. 
그것도 눈보라 치는 한데로…. 하지만 한 이름모를 달구지꾼은 제 집도 
아닌데도 난짝(답삭) 안아다 아랫목에 뉘어 죽어 가는 나를 살려준 것이니 아, 
사람이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끊임없이 사람을 만나 사람됨을 깨우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내 한살매(한평생)의 말뜸(화두)으로 되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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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基玩
1932년 황해도 은율 출생 
1964년 한일협정 반대운동 
1967년 백범사상연구소 소장 
1974년 반유신 백만인서명운동 
1979년 명동사건으로 구속 
1983년 민족통일민중운동연합 부의장 
1987년 제13대 대통령 후보  1988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現) 
1992년 제14대 대통령 후보 
1999년 계간지 ‘노나메기’ 발행인(現) 
시집 ‘백두산 천지’ 
시나리오 ‘단돈 만원’ 
수상집 ‘벼랑을 거머쥔 솔뿌리여’ 등 저서 다수  

 
 
1990년대 중반 한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백기완 소장 내외.지금은 타계한 송건호 
선생과 계훈제 선생이 백기완 소장 왼쪽에 나란히 앉아 있다.  
‘인생의 스승’ 가대기兄과의 만남 

사람이란 참으로 얄궂은 짐승이라고 생각된다. 이 세상에서 어떤 인물을 가장 
존경하는가. 이에 마주해(대해) 글로 쳐들 때 인물이 따로 있고 말을 할 때 
쳐드는 인물이 따로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더구나 혼자 있을 때 
땅불쑥하니(특히) 외로움을 강요받았을 때 떠오르는 인물이 다른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렇지 않다. 아무려나 글도 글 나름이겠지만 글을 쓸 때나 말을 
할 때나 아니, 나 혼자 모진 독방 한 구석에 쫄쫄이 처박혀졌을 때 마치 
등불처럼 떠오르는 이가 있으니 그 분이 누구일까. 위대한 혁명가? 그도 아니면 
만고의 지성 또는 예술가? 아니다, 놀래지 말지어다. 가대기형이다. 
가대기라니? 가라는 성씨가 있었던가. 없다. 그렇다면 가대기란 성이 없는 
사람이요, 따라서 위인 열사 인명사전에도 올라 있을 까닭이 없는 그런 분이다. 
그런데 어째서 그런 분을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한다는 말인가라고 할 것이다. 

이때 내 대답은 사뭇 뻑적지근하게 배알(저항심)이 꼴려 올라올 수밖에 없다. 
세속의 위인, 열사, 부귀영화를 한손에 거머쥔 권세가, 명망가, 돈 많은 이가 
아니기에 그 분을 존경한다고. 
그러면 가대기란 어떤 분일까. 말 그대로 어깨에짐을 지는 막일꾼이다. 무거운 
짐을 목에 지면 목도꾼, 등으로 지면 짐꾼, 그러나 한쪽 어깨에 짐을 질 것이면 
가대기 또는 갓대기. 그러니까 가대기란 져 날라야 할 것이 많아 사람을 
쌔려(세게) 일을 시켜먹으려고 내세우는 일꾼이니, 어찌 보면 집단노동꾼이자 
노동강도가 싼(센) 일판에서 부려지는 일꾼을 이르는 것이지 사람의 이름이 
아니다. 

내가 그런 집단노동꾼의 한 사람인 그 분을 일러 가대기라고 부르는 까닭은 그 
분의 이름을 모르기 때문이요, 또 그렇게 불러야만 그 분의 모습이 마치 
조형물처럼 입체적으로 빚어지기 때문이다. 
8·15 해방 갓 뒤 똑뜨름(역시) 내가 열세살적 나는 어쩌다 그 가대기형이 어느 
덩메(덩치) 큰 사람과 ‘맞짱을 뜨는’ 것을 내 눈으로 보게 되었다. 때는 
으슥한 저녁 무렵이고, 곳은 서울역에서 북쪽으로 가다 있는 염천교 다리 밑. 
나도 구경꾼으로 낑겨(끼어) 있었다. 

“야, 이 자식아. 지금 북쪽으로는 기차가 못 가게 되어 있잖아. 그러니까 
철로를 떼다 유용한 데 쓰자는데 왜 못하겠다는 거야?” 
“뭐야? 북쪽으로 가는 길이 막힌 것도 원통해 죽겠는데 그 철로를 아닌 밤에 
몰래 떼 오라고? 그래 그것이 사람이 할 짓이냐?” 
“야, 이 자식아. 그냥 하라는 거야? 돈만 받으면 될게 아냐? 좌우간 너 오늘 
내가 시키는 대로 할래, 아니면 내 손에 죽을래? 어떻게 할 거야?” 
“야, 임마. 사람이 어떻게 돈 몇푼 때문에 나라의 동맥을 잘라? 너 그래도 
깡패 두목인 줄 알았더니 양아치였구나.” 
“뭐야?” 

그런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뱃길(발길질)이 들어오는 것을 왼 손목으로 툭…, 
그러자 뱃길질하던 사람이 핑하니 돌아가려는 때참(순간) 번개처럼 달려들어 
마치 역기를 들 듯 난짝(답삭) 들어 올린다. 그리고는 한 서너 바퀴 뱅글뱅글 
돌리다 막 철길에 태맹일(패대기) 치려는데 맞짱은 끝나고 말았다. 


김두한을 꺾은 가대기의 주먹 

높이 들린 사람이 “형님! 졌어, 졌어.” 그렇게 항복선언을 하자 그때야 
비로소 내려놓으며 하는 말은 내 한살매(한평생) 잊지 못할 말귀로 새겨져 
있다. 
“너 임마, 그대로 태맹일 치려고 했어. 하지만 너도 주먹으로 먹고사는 놈, 
그리 되면 아주 죽거나 혹 살아나더라도 다시는 힘을 못 쓸 병신 아니야? 
그래서 살려주는 거야, 임마. 그러니 내 말대로 해. 형님, 그래.” 
“네, 형님.” 
“이제부터는 돈 몇푼 때문에 나라를 팔아먹는 그런 반역행위는 않겠습니다. 
복창해.” 
“알겠습니다. 이제부터는 돈 몇푼 때문에 나라를 팔아먹는 그런 반역행위는 
않겠습니다.” 

이렇게 싸움은 끝났지만 나의 감격은 끝나지 않은 그 염천교 다리 밑의 한바탕 
맞짱. 그때 나는 마침 급성폐렴에 걸렸건만 병원 한번 못 가고 길거리에서 
비칠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시원한 맞짱을 보고는 그만 내 급성폐렴이 말짱 
가시는 듯했다. 그래서 울부짖었다. ‘옳거니, 나도 이다음 크면 저런 천하의 
주먹이 될 테다’라고. 가슴을 치던 그 싸움의 패배자는 누구였을까. 유명한 
주먹 김두한이었다. 
그렇게 김두한이가 깨지는 것을 내 눈으로 본 나는 그때부터 얼추(혹) 
길거리에서 가대기형만 보면 뒤따라가며 형님, 형님 그랬다. 그도 그럴 것이 
어쩐 일인지 그 가대기형이 나를 익히 안다는 것이다. 어떻게 알게 되었느냐. 

어느 날엔가 나와 우리 아버지가 서울역 앞 그 너른 마당에서 만나는 장면이 
그렇게도 인상적이었다는 것이다. 저쪽에서 웬 중늙은이가 “야, 기완아. 이 
새끼야 ”하고 소리지르며 달려오고 또 이쪽에 서 있던 내가 “야, 아바이” 
그러면서 온 빠르기로 달려가다 꽈당! 하고 껴안고서는 서울역 그 너른 마당에 
엎어져 바닥을 뱅글뱅글. 그 장면이 잊혀지지 않는다며 나에게 이따금 붕어떡도 
사주고 또 순대국도 사주던 가대기형이다. 

그때 그 가대기형도 나와 엇비슷한 고민이 하나 있었다. 나는 그때 어떻게든 내 
소망인 축구선수가 되고저 해서는 중학교에 들어가야 했고, 그러고저 해서는 
단돈 1만원이 있어야만 했다. 입학금으로…. 
그런데 그 가대기형도 단돈 1만원이 있어야만 했는데, 그 분의 고민은 그 분의 
집에 가보고 이내 알 수가 있었다. 집이라고는 하지만 저 마포강가 
쪼매난(작은) 이엉집 문간방에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데 그 분의 병이 만만치 
않았다. 

일찍이 빼앗긴 나라를 찾아오마고 집을 나가신 아버지는 8·15 해방이 되어도 
돌아오시지 않고 이에 기다리다 지치신 홀어머니가 병이 나셨는데 병원에 
모시려고 해도 1만원은 있어야만 했다. 또 대뜸 나가라고 하는 셋집에서 다른 
셋집으로 옮기려고 해도 1만원이 있어야 하고. 절단(어쨌거나) 그동안 어머니 
약값으로 진 빚이 1만원. 하지만 가대기 일로는 그 단돈 1만원을 만들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하면 김두한이와 남몰래 손을 잡기만 할 것이면 늙은 어머니를 병원에 
모실 수도 있었을 터인데, 그 분은 딱 자른 것이다. 돈 몇푼 때문에 나라의 
동맥을 끊을 수는 없다고. 


“싸움은 나쁜 놈들하고 하는 거야” 

그때 내 품안에는 돈 3,000원이 꽁쳐져 있었다. 어떻게든 1만원을 만들어 
그것으로 중학교에 입학해 축구선수가 되겠다는 꿈을 이루고저 노동판에서 
먹지도 않고 10원, 20원 꽁쳐 둔 것이었다. 그 1만원 모으기에 지쳐 그 추운 
겨울날 급성폐렴에 걸려 길거리에 쓰러지기도 했다. 거기서 단돈 1,000원만 
썼으면 페니실린도 한 대 맞을 수 있었건만 그 주사도 안 맞고 꽁쳐 둔 돈 
3,000원. 

나는 너무나 안타까워 그것을 슬며시 내놓았다. 그러자 가대기형은 눈알을 
부라리고 그의 어머니는 기어서 밖에까지 나오시며 돌려주셔서 마지못해 되받아 
오면서 아, 그때 나는 얼마나 울었던가. 
그렇다. 나도 이 다음에 크면 이 가대기형처럼 천하 주먹이 되어 세상의 갖은 
양아치들을 죄 때려눕히는 올바른 사람이 되자. 하지만 세상살이라는 것은 
참으로 얄궂다는 것을 나는 일찍부터 겪게 되었다. 그런 가대기형과 내가 
한때나마 헤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 내가 이따금 신세지던 곳은 지금의 서울역 맞은편, 피난민수용소였다. 
거기서 나보다 한 살 위인 살구라는 애와 그렇게 가차이(가깝게) 지낼 수가 
없었는데 한가지 말썽이 있었다면 이 친구의 말이매, 자기 몸의 이란 이는 모두 
내게서 나왔다고 놀리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마지못해 붙을 것이면 판판이 내가 
깨지고는 했다. 

왜냐. 이 친구는 서울놈, 나는 촌놈. 그러니 그 친구가 보고 들은 권투 솜씨를 
내가 버티어낼 수 있는가. 그래서 판판이 깨지던 어느 날은 내가 그 친구를 
씨름으로 메치고서는 막 갈기려는데 누군가가 툭툭 친다. 돌아보니 아뿔싸, 
묏덩어리만한 가대기형 아닌가. 이에 내가 “형! 오늘은 내가 이겼지?” 했을 
때 그만 일이 터지고 말았다. 

천만뜻밖에도 그 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하는 말이 “오늘은 진 놈도 
없고 이긴 놈도 없어 임마. 왜냐? 싸움이란 제 배만 부르고자 하는 나쁜 놈하고 
해야 승패가 있는 법이야. 이밖에 없는 놈들끼리 백날 붙어보면 뭘 해? 함께 
죽는 거야, 인석들아.” 

그러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나는 그런 가대기형이 그렇게 서운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한참 동안 서울역 둘레나 남대문시장 거리에는 가지 않던 어느 날이다. 
그 가대기형이 어디론가 끌려가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것 아닌가. “뭐야, 우리 
가대기형이?” 하고 달려갔지만 그 가대기형은 벌써 갔을 거라는 소문대로 
오늘날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다. 


 
1987년 무소속으로 13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해 서울 명동에서 유세를 벌일 때의 
백기완 후보.  
시든 들국화 한 송이를 주고 떠나간 옛 벗 

나는 요즈음도 서울역을 지나치노라면 그 가대기형 생각이 나 눈시울이 
붉어지곤 한다. 그래서 아마도 1994년 봄이던가. 나는 그 가대기형을 기리고자 
‘단돈 만원’이라는 제목의 영화 극본(시나리오)을 썼다. 그리하여 만약에 
영화촬영을 하게 된다면 내가 직접 영화감독이 되어 “싸움이란 제 배만 
부르고자 하는 나쁜 놈들하고 해야 승패가 있는 법이야, 인석들아. 

가진 것이라곤 이밖에 없는 것들이 백날 붙어보면 뭘 해. 서로 죽는 거야, 
인석들아”라는 가대기형의 말귀를 시적 영상으로 꾸며 세계인의 양심에 
새겨주고자 했었다. 
자, 이제쯤은 이야기를 좀 돌려보자. 입때껏 내가 만난 벗들 가운데 나한테 
가장 큰 우정을 보여준 사람은 누구일까. 이를 말하려고 하니 언뜻 노여움이 
치솟으면서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언젠가 끌려가 닦달받을 때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너 이 새끼, 누구를 존경해. 김일성이지? 솔직히 말해, 이 새끼야. 다 알고 
있어.”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나더러 김일성이한테 전화받지 않았느냐? 대라고 
했다. 이때 내 말이 “전화 가설도 안돼 있는데 무슨 전화를 받겠느냐”고 
했더니만 또 다시 무선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나더러 무선 연락을 받지 
않았느냐고 때려 몰던 그들이다. 

그런데 이참에는 느닷없이 내가 존경하는 사람이 김일성이가 아니냐고 
다그친다. 이것은 얼핏 생각하면 나를 때려 모는 강도가 좀 느슨해진 것 
아니냐고 할지 모르나 짜배기로는(실은) 그게 아니다. 나를 아주 막장으로 
처넣는 무서운 꿍셈(음모)이었던 것이다. 

무슨 말이드냐? 김일성이를 존경하지 않는다고 하면 나더러 거짓말을 한다고 
족치자는 것이다. 존경한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입때껏 내가 낑겨 돌아가던 
민주화운동이나 통일운동이 모두 북쪽과 연결된 것으로 되고, 따라서 나와 같이 
움직이던 사람들도 그 조작틀에 짜 맞추느라 살인적인 매질을 할 것이 뻔하니 
참말로 야릇한 막장 몰기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때 그 상황을 비껴갈 수 있는 몸이 아니었다. 목은 강제로 
끄떡이게 하면 될 것이요, 도장은 억지로 손가락을 잡아 빼 찍게 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만 했을까. 목숨을 걸고 맞받아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대들었다. “좋다. 영사기를 가져와라. 그것으로 
너희들이 내 속을 가르는 대로 낱낱이 찍으면 될 게 아니냐”고 했다. 그러자 
“이 새끼야. 여기가 네 똥창이나 가르는 데인 줄 알아? 아니야, 이 새끼야. 
여기는 신성한 국가안보를 위하여 너의 정체를 까밝히는 데야, 이 새끼야.” 
그러면서 닦달하던 폭력만행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비록 늙은 주먹일망정 
불끈불끈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때 나 때문에 끌려가 닦달받고 탈(병)이 생겨 
죽은 한 이름 없는 친구가 떠올라 눈물이 난다 이 말이다. 


도피 도우려다 함께 끌려가 고초 겪기도 

그게 몇년 전이던가. 어쨌거나 박정희 군사독재타도하자고 들고일어났더니만 
나를 잡으라고 박정희의 불호령이 떨어지고, 그것이 곧 신문 호외와 방송의 
긴급보도로 전해지던 그 날 저녁은 그야말로 스산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마침 
눈이 펄펄 내려 으스스 하기도 했지만 그때 우리 연구소는 포위되고 내가 잘 
가는 찻집과 밥집, 그리고 그 골목으로 접어드는 모퉁이마다 눈깔을 까뒤집은 
정보원과 경찰·군인들이 서성이고. 때문에 나는 톰발리(빨리) 어디론가 
사려야만 했다. 

어디로 갈까. 옳거니! 내가 하는 일과는 전혀 관계 없는 친구한테 전화해 보자. 
그런데 누구한테 할꼬? 첫째로는 내 목소리만 들어도 알아볼 친구여야 할 
것이요, 둘째로는 이미 나를 잡으라고 신문·방송에 긴급보도가 나가 있는 
터이므로 내 목소리를 듣고도 겁을 안 먹고 나를 맞아 줄 친구여야 할 것이요, 
셋째 내 주머니에는 돈이 없다. 그러므로 그래도 저녁은 살 만한 친구여야 
하는데 그렇다면 누구한테 전화를 할꼬? 옳거니! 제약회사에 있는 친구가 하나 
떠올랐다. 그 친구의 사람됨이란 그저 순정의 사나이, 아니 순수 그 자체라고 
할 만했다. 

마셨다 하면 신발까지 잡혀가며 몽땅 퍼마시고, 먹었다 하면 쓰레기 구정물까지 
쓸어넣고, 한번 내쳤다 하게 되면 상대방이 사기꾼이든 협잡꾼이든, 아니 
속임수로 먹고사는 얌사이(얌체짓)이든 전혀 꺼리지 않고 그대로 다 내주는 
친구다.그가 스무살 고비를 막 넘을 적이다. 어쩌다 딱 한번 만난 여자친구가 
창녀로 몰려 감옥갔다는 소리를 듣고는 그대로 감옥으로 달려가 만나고자 했다. 
하지만 그 여자의 이름을 알아야 접견 신청을 할 것이 아닌가. 더구나 
직계가족이 아니면 아니 된다고 하자 “나하고 하룻밤 풋사랑을 맺은 여인인데 
나보다 더한 직계가 어디 있느냐? 만약 접견이 안될 것이면 꽃다발이라도 전해 
달라”고 매일처럼 감옥소 앞에 가서 서서 울던 친구다. 

그 친구가 떠오르자 나는 탁하고 무릎을 치자마자 전화를 걸었다. 
“따르릉….” 
아니나 다를까. 내 목소리만 듣고도 나를 알아보고는 얼떵(빨리) 오되, 곧바로 
대포집으로 오란다. 들어서자마자 시끌한 서울역 뒤켠 어느 대포집. 하지만 
왠지 꺼림칙한 기분이 들어 딴 데로 옮겼다가 그날밤 그의 초라한 집에서 
하루를 묵은 것이 탄로나 내가 잡힌 다음 그도 끌려가 닦달받게 되었다. 
“너, 이 새끼야. 백기완이 좋아하지?” 
“그렇소. 하지만 백기완이, 백기완이 하지 마시오. 백기완 선생이라 
해주시오.” 
“뭐야? 그 역적 놈을 선생이라고 하라고? 아무튼 얼마만치나 좋아해? 
존경하리만치 좋아해?” 
“그렇소. 내가 아는 백기완 선생은 자기가 좋다, 아니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목숨걸고 해댑니다. 그 점이 좋아서 존경합니다.” 

“그래, 존경한다면 마음으로만 하는가. 무엇인가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게 있을 
게 아닌가.”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꽃다발을 주곤 합니다. 마음이 담긴 
꽃다발.” 
“그러니까 꽃다발도 주고 돈도 준다는 게 아니야?” 
“그야 그렇죠. 있으면 있는 대로 다 나눠 쓰니까요.” 
바로 이 대목에서 그 친구가 걸려든 것이었다. 너 이 새끼, 백기완이한테 
반체제 자금 얼마씩 댔어. 말하라고 족치는 것이니 그것은 그 친구가 태어나 
처음 겪는 시련, 그만 그 충격이 당뇨병으로 되어 시름시름 앓다 죽고 말았다. 

몇 년 전 어느 가을날이다. 그가 더 이상 살기 어렵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니 참말로 젊은 날의 그 우람하던 체격, 그 괄괄하던 성깔은 간 데 없이 
깡치(수수깡)만 남은 뼈에 가죽만 메마른 얼굴을 주름 짓는다. 그리고는 어디서 
났는지 다 시들어 가는 들국화 한 송이를 내주며 하는 소리였다. 
“기완아. 너는 세상을 사랑하구 있지?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사랑해 보지 
못했어. 다만 나도 하나는 해보았지. 나도 친구는 한번 사랑해 본 놈 
아니가?”라는 그의 말에는 이미 죽음이 서려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돌아나오며 혼자 울었다. 

그러니까 그것이 1952년이던가 53년 겨울이던가. 부산 피난시절이었다. 그때 
나는 어쩐 일로 부산에서 발행되던 ‘중앙일보’(요즈음 중앙일보가 아님)에 
천재라고 소개된 적이 있었다. 그 천재가 거리를 헤매고 있다고. 내가 무슨 
천재인지는 나도 모르는 일이지만 말이다. 

남김없이 사랑해 보고 떠난 친구 

어쨌거나 이때 나를 만나겠다고 신문사로 찾아온 고등학생이 하나 있었는데, 
그게 바로 그 친구였다. 그리하여 만났더니 그 친구는 대뜸 그때 남포동에 있던 
중국 호떡집으로 나를 끌고 가 호떡을 사는데 어떻게 사느냐. ‘커빙’이라는 
손바닥만한 밀가루 반죽 떡 서른 개와 주머구만한 만두 서른 개를 시켜 똑같이 
나누어 놓고도 모자라 ‘떠탕’이라는 중국 콩국을 한 그릇씩 시켜놓고 하는 
수작이었다. 

“너는 공부의 천재라지만 나는 먹는 데 천재다. 그러니 우리 한번 먹기 내기를 
해보자”고 해서 가까워진 친구다. 그 뒤 그는 나와 함께 농민운동, 
나무심기운동을 했지만 세속의 말로 그는 민주주의와 해방 통일을 위한 싸움의 
투사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세상과 마주해 일정한 비판 정신을 갖고 사는 
진보적 지식인도 아니요, 또 어떤 이름이든 이름이나 날리고자 하는 풍각쟁이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저 마음이 꼭 사람 같애, 친구가 배가 고프다고 하면 밥보다 술을 먼저 사고, 
또 술을 샀다 하면 홀랑 벗고 몽땅 사던 아, 한 시대의 술꾼이었다고나 할까. 

어쨌든 한 친구를 좋아하다 그것 때문에 병을 얻었지만 그것을 잘 내색도 
아니하고 그렇다고 속으로 원망도 아니하고 떠나간 아, 그 나의 벗. 
지난해 가을이다. 나는 왠지 자꾸 그 친구가 생각났다. 그래서 물어 물어 그 
친구의 무덤을 찾았다.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사람의 무덤인 양 이름 모를 
풀들에 덮여 있는 것을 보면서 나는 그렇게 하염없을 수 없었다. 사람의 
한살매란 무엇일까. 잘 살고 못 사는 것은 무엇이며 명예, 권위, 영광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한껏 자라다 저렇게 시들어 가는 잡초에게도 있는 한갓됨은 
아닐까. 

마침 비탈에 핀 들국화 한 송이를 꺾어 그의 무덤 앞에 놓으며 나는 다짐했다. 
‘여기는 무덤이 아니로세. 그래도 한 친구는 남김없이 사랑해 보고 누운 한 
세월이로세.’ 
이렇게 새긴돌(시비)을 하나 세우리라고 다짐했다. 
요즈음 되어 가는 꼬라지다. 나를 잘못 보는 사람들이 그리 많은 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나 백기완이라는 사람은 한살매를 베풀기만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베푼이 상’이라도 만들어 맨 처음으로 그것을 받아야 할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다. 


무일푼 백기완을 장가보낸 허섭 형님 

그런 말씀이야말로 천만의 말씀이다. 천번을 짜 맞추어도 이가 맞지 않는 
수작이요, 만번을 갖다대도 귀퉁이 한곳인들 맞아떨어지는 데가 없는 
개수작이다. 그 갓대(증거)로 나라는 사람은 내 장가도 내 힘으로는 못 가고 
남이 보내주어 가게 된 사람이니 말이다. 
어즈버 더듬컨대, 그것이 1957년 여름이던가. 그때 나는 시방도 같이 살고 있는 
우리 집사람과 혼인하기로 하고 청첩장을 돌리는데 마치 ‘마실이’처럼 
돌려버렸다. 

‘마실이’란 누구일까. 나이가 찼으되 장가들 낌새는커녕 남의 시집·장가 
잔치에 낑겨들 짬까지 막혀버린 떠꺼머리다. 그것이 이 집 저 집, 이 마을 저 
마을의 떠꺼머리들을 한 사랑방으로 불러모으러 다니는데 메라고(무엇이라고) 
하면서 다니느냐. 자기가 오늘 저녁 장가들게 되었으니 다 모이라는 나발을 
불며 다니는 머슴놈을 일러 ‘마실’이라고 하는 것이다. 

마실이가 그러고 다니면 어떻게 될까. 된장 냄새 한번 물씬한 시래기국에 까실 
까실 노란 조밥을 사발째 엎어말아 욱신욱신 처먹던 숟가락을 내동이치면서 
“뭐야, 그 마실이가 마침내 장가를 든다고? 어디 보자”고 이 집 저 집 이 
마을 저 마을의 떠꺼머리, 숫난이(총각)놈들이 눈발을 헤쳐가며 꾸역꾸역 
사랑방에 모인다. 하지만 그 꼴은 무슨 꼬라지가 되던가. 

뻔한 것이다. 그 마실이 놈이 장가를 가는 것이기는커녕 꾀죄죄한 꼴로 저쪽 
윗목에서 해해대고 웃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이를 보자 화가 난 떠꺼머리들이 
왕창 달겨들어 저놈, 저 마실이 놈을 맨장가라도 보내자고 발바닥을 둘러메고 
장작개비로 철썩철썩 치니 그 사랑방은 어떻게 될까. 한바탕 웃음꽃이 피는 
마실이 되는 것이다. 

내가 장가가게 되었다고 청첩장을 돌리자 내 둘레의 사람들이 나를 보되 옛날에 
맨장가를 들던 그 마실이쯤으로 여기는지 백기완이 그거 방 한 칸 얻으려고 
날나발(헛소문) 꾸미는 것 아니야 라고 빈정댔다. 
아니나 다를까. 나는 청첩장을 돌린 지 이틀만에 그것을 다시 걷고 다닐 수밖에 
없었으니 어쩐 일 때문에 그랬을까. 나의 맨 큰형님, 백기성이가 간첩으로 
잡혔다는 보도가 신문·방송에 나버린 것이다. 그때나 이제나 우리 집안은 
38선으로 둘로 갈라져 살아온다. 


간첩으로 붙잡힌 형님, 그리고 연기된 결혼식 

어머니는 내 고향 북쪽 아버지는 남쪽, 큰형님은 내 고향 북쪽 작은형님은 
남쪽, 큰 누님은 내 고향 북쪽 작은누이동생은 남쪽, 우리 할머니는 내 고향 
북쪽 나 백기완이는 남쪽, 이렇게 여덟 식구가 딱하니 둘로 쪼개져 살아오는데, 
바로 그 큰형님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넘어오시다 휴전선에서 잡힌 것이다. 그런 
우리 형님을 무슨 큰 죄나 저지른 사람처럼 간첩으로 몰며 시끌벅적이니 내가 
어떻게 정한 날짜대로 장가를 갈 수 있는가 말이다. 

절단 새 보금자리랍시고 들어앉을 방 한 칸을 마련할 수 없이 되었다. 그때만 
해도 우리 집이라는 것이 원효로 4가, 바로 함석헌 선생이 사시던 집 둘레의 
엉성한 바람막이 집. 거기에 세간이라고는 양은솥 하나, 냄비 하나, 밥그릇과 
국사발 셋, 그리고 숟가락 세개밖에 없으니 거기서 어떻게 새살림을 꾸민다는 
말인가. 하지만 우리 둘은 마음을 다졌다. 나는 둘로 깨진 나라를 하나로 하고, 
우리 집사람은 알알이 깨진 우리 집안을 다시 일으키고. 

그건 그렇다고 치더라도 후더분한 여인의 앞자락만한 방 한 칸쯤은 얻을 수 
있어야 첫발을 내 디딜 수 있지 않은가 말이다. 아니 어떻게 어떻게 해서 방 
얻을 돈을 마련할 수 있다고 치더라도 그 돈으로 먼저 간첩으로 몰려 감옥에 
계시는 형님의 뒷바라지도 하고 재판도 하고 그래야 할 판이었으므로 우리 둘은 
눈물을 머금고 돌린 청첩장을 다시 거두기로 했다. 

이때 발칵 뒤집힌 것은 색시 될 사람의 집안이었다. 본디 북쪽이라는 곳은 
역적모의를 하다 쫓겨간 유배지라, 그 쌍놈들의 본디가 어련하겠느냐고 
벅적이니 어떻게 하는가. 우리 둘은 머리를 짜매고 다시금 날짜를 정해 
청첩장을 찍어 돌렸지만 안팎의 사정은 더 나빠져 갔다. 

재판비용도 어지간하고 셋방 값도 어지간히 오르고. 하는 수 없이 두 번째 
청첩장도 다시 거두니 어떻게 되었을까. 백기완이야말로 장가가자는 것이 
아니라 장가갈 꿍셈만 노리는 놈이라고 입방아에 입방아가 내 귀를 따갑게 
했다. 

나는 주먹을 쥐고 새벽부터 거리로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막일이라도 해서 
장가갈 밑천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막상 막일이라도 하려니 할 데도 
없고, 또 일자리를 얻어 보아야 날마다 있는 것도 아니고. 하는 수 없이 
길거리의 떨어진 깡통, 돌멩이, 휴지조각 따위를 보는 대로 차면서 지나가는데 
누군가 어깨를 툭툭 친다. 
“뭐야, 이거.” 
그러면서 돌아서자마자 한대 엥기려고(때리려고) 하는데, 아뿔싸 보아하니 내가 
좋아하는 허섭이 형님이시다. 
“너 어째서 그렇게 온몸에 뿔이 돋쳤어.” 
“장가들려고 두 번이나 청첩장을 돌렸다가 거두지 않았겠어요? 아, 방 한칸 
얻을 돈이 있어야지요.” 
“뭐야? 네깐놈 어디에 색시가 붙겠어? 참말로 색시감이 있어?” 

그래 있다고 했더니 그러면 내일 광화문 어디로 나오라고 한다. 옳거니, 
술이라도 한잔 사주시려고 그러는구나 하고 약속 시간에 딱 맞추어 갔더니만 
아, 이게 웬일일까. 보따리를 밀어주며 어서 갖고 가란다. 얼떵(급히) 갖고 
나와 펼쳐보니 참말로 그것은 꿈인데 짜배기로는(사실) 꿈이 아니라 엄청난 돈 
15만원이 아닌가. 
그때 대학 등록금이 3만원쯤 했으니 15만원이라면 다섯 사람의 대학 등록금 
값이다. 

그때 허섭이 형님은 그 엄청난 돈을 만들 수 있는 처지가 못되었다. 인천에서 
무슨 고아원을 하시면서 많은 재산을 디리 대고(갖다 바치고) 또 그때 이승만 
정권의 탄압을 받아 감옥도 갔다 오시는 파란을 겪으면서 살림까지 어려워져 
공덕동 어느 구석에서 셋방을 살고 있었다. 아무려나 15만원짜리가 못되는 
셋집이었다. 

그런 딱한 분이 나한테는 그런 엄청난 돈을 밀어주다니 참으로 놀랄 일이었다. 
어쨌거나 나는 그분 덕에 북쪽에서 남쪽으로 와서 처음으로 목돈을 주고 방도 
얻고 장가도 들었으니…. 
아, 나 백기완이라는 사람은 쨩(도대체) 무엇일까. 나야말로 날라리다 이 
말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베푼이 상’이라도 만들어 상을 주게 된다면 
나는 그 허섭이 형님한테 드리고 싶은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그 허섭이 
형님은 그때부터 지금껏 한두번 뵈었을 뿐 어디서 무엇을 하시며 살고 계신지, 
아니 살아나 계신지, 단 하루도 그 분을 잊은 적 없이 살아오며 혼자 
중얼거리곤 한다. 나라는 사람은 입때껏 남의 신세만 지며 살아왔구나. 


40여년만에 만난 ‘명동 꼽창이’ 

어쨌든 이렇게 해서 나는 장가를 들었지만, 그 와는 다르게 나라는 사람은 남의 
장가들 밑천을 홀랑 까먹은 나쁜 사람임을 있는 그대로 내뱉고 싶다. 
그러니까 그것이 벌써 4년전 1998년 6월말 경이던가. 인천 가까운 어느 곳에서 
옛날 이야기를 좀 해달라고 해서 갔다가 비가 억수로 내리는 밤, 전철을 탔는데 
나보다 나이가 열살도 더 돼 보이는 더듬한(어리어리한) 늙수구레가 딴지를 
건다. 

“이봐, 민족의 지도자도 만원 전철을 다 타나? 그러니까 이렇게 빽빽이 
만원이지.” 
본디 인격이 없는 나인지라 조금은 느낌이 언짢았다. 하지만 그래도 오래 산 
덕으로 잔꾀는 있어서 “서민들이야 다 전철을 타는 것이 아닙니까” 그랬더니 
“나야, 나” 그런다. 나라니? 
“아, 나 몰라? 어느덧 40여년 전 명동 구석에서 곱창 장사를 하던 나 
꼽창이라니깐.” 
“뭐야.” 

찬찬히 보아하니 바로 그 친구다. 
곱창도 팔고 낙지볶음도 하고. 그리하여 돈을 좀 벌면 장가를 들거라던 그 
친구가 아니냐는 말이다. 하지만 짜배기로는 그 집은 거의 내가 망쳐놓았다. 
아니, 그의 장사는 내가 깽판을 놓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출출하기만 하면 노상 가서 먹어대니 견디어 내겠는가. 그래서 어느 날 갑자기 
채알(천막)째 거두어 갖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던 그 친구를 다시 만났으니 어찌 
그냥 헤어지겠는가. 우리는 비가 억수로 퍼붓는 어느 역 앞에 내려 곱창집을 
찾았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서 그랬을까.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곱창집이란 없어 하는 수 
없이 어느 삼겹살집에서 주거니 받거니. 거나해진 것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나오면서 돈을 내려고 하는데 어럽쇼, 틀림없이 강사료랍시고 받았던 봉투는 
오간 데가 없고, 전철표밖에 없는 거라. 
이리하여 우리 두 늙은이들의 낯짝이 말이 아니게 되었을 때다. 그래도 그 집 
아주머니가 나를 알아보고 점잖은 분이 실수하신 것 같은데 언제고 지나갈 일이 
있으면 다시 오라고 한다. 이 갑작스러운 사태에 나는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그래도 정신을 차려 백번 고맙다고 허리를 굽히고 나오는데 억수로 내리는 
빗소리보다 더 크게 그 친구의 목소리가 내 가슴을 때린다. 

“야, 백기완이 너 이 새끼야. 너 좀 변해, 이 새끼야. 땡전 한 푼 없이 다니는 
꼴이 어쩌면 그렇게도 47년전하고 똑같아? 이 새끼야.” 
“그런가? 그래 나도 좀 변할게. 그때 다시 만나자구.” 
그러면서 헤어지는데 내 두 볼에서는 썽난 빗줄기보다 더 세게 무엇인가가 
흐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얼마 있다 내 사무실 통일문제연구소에 왔더니 벌써 
보름째 문을 닫고 있어서 그런지 갖가지 신문들이 산더미처럼 대문간에 그대로 
쌓여 있고, 마루에는 이따만한 쥐새끼들이 왔다갔다 한다. 


내게 용기를 준 ‘전철 소매치기’ 

이를 보자 본디부터 인격이 없는 나는 부수기 차름(시작)했다. 보는 대로 왱강 
뎅강. 
필통·화분·책장·책꽂이·낡은 텔레비전·냄비·숟가락·물잔·전화통…. 
전화통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우리 통일문제연구소에는 전화가 넉대씩이나 
있었다. 그런데 1998년 1월 김대중씨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던 그날부터 1998년 
6월까지 자그마치 여섯달 동안 어쨌든 전화가 단 한번도 울리지 않았으니 우리 
통일문제연구소는 빚도 많고 턱없이 외롭게 되고 해서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참으로 오랜만에 전화 한통이 울리며 주문이 들어왔다. 나더러 
옛이야기나 좀 해달라고. 그래서 갔다가 그 옛친구를 만나 내 꼴새만 구겼으니 
이제 통일문제연구소 따위를 그냥 내버려두어 무엇한다는 말인가. 
닥치는 대로 부쉈던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낡은 냉장고(최민 군이 집에서 
쓰던 것을 준 것임) 마저 집어던지려다가 열어보니 먹다 남은 소주병이 있는 
것을 보고는 나는 머뭇대지 않을 수 없었다. 

저것도 집어던질까 말까. 그렇다. 속에 있는 것은 마셔버리고 병만 부시리라 
했다가 나는 정신이 퍼뜩 들고 말았다. 안되지, 이래서는 안되지. 그러면서 
깨진 것들을 치우고 비에 젖고 있는 앞마당의 신문지를 뒤지다 말고 나는 
정말로 놀라고 말았다. 반쯤 젖은 흰 봉투에는 이런 글귀가 있지 않은가. 
‘선생님, 죄송합니다. 용기를 내세요.’ 

아마도 어느 소매치기가 전철칸에서 내 것을 슬쩍했다가 내 꼴새가 못내 마음에 
걸렸던지 얼마는 빼서 쓰고 나머지를 보낸 것으로 생각되지만 어쨌거나 거기서 
용기를 얻어 나는 붓을 들기 차름(시작)했다. 
그리고는 널리 알렸다. 
“‘벼랑을 거머쥔 솔뿌리여’라는 제목으로 책을 써 연구소를 살리고자 하니, 
세상사람들이여, 책이 나오기도 전에 만 권만 미리 좀 사주시오” 라고. 

또 그 글을 쓰는 몇 개월 동안 나는 굳게 잠긴 통일문제연구소 때문에 ‘한 
발자욱만 더’라는 시를 써 벽시처럼 걸었다. 그것은 내가 나를 달구는 
비나리였지만 짜배기로는 지금으로부터 47년 전 내가 노상 퍼먹음으로써 
곱창집도 망치고 그 때문에 장가도 못 가고 늙어버린 꼽창이라는 그 옛친구한테 
띄우는 뉘우침의 글월이기도 했다. 

한 발자욱만 더 
한 발자욱만 더 
밀어내 보다가 
죽어도 죽자 

한 발자욱이 안되면 
단 한치 단 한치만이래도 
더 밀어내 보다가 
쓰러져도 쓰러지자 

아, 어이타 이놈의 세상은 
밀어낼수록 캄캄한 수렁 
하지만 여기서 주저앉는다는 건 
패배보다 더 끔찍한 과거라 

밤이사 칭칭 드세지만 
한 발자욱만 더 
한 발자욱만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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