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2년 2월 24일 일요일 오후 05시 31분 17초 제 목(Title): 손원제/ 경제학에 관한 책.. 출처:한겨레21 [ 문화 ] 2002년02월20일 제397호 너희가 경제학을 믿느냐 원숙한 학문으로서의 과학성에 대한 반론… 복잡한 계산으로도 현실의 문제를 치유하지 못한다 사진/ 경제학은 숱한 천재들의 지적 공헌에 힘입어 그 과학적 성격을 발전시켜왔지만, 여전히 정확한 예측 능력을 확보하고 있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경제학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런 물음은 뜬금없는 소리로 들릴지 모른다. 경제학이 최고의 사회과학이라는 믿음은 일반화한 신념이기 때문이다. 특히 수학의 정치한 정식들을 이용해 각종 경제현상들을 간명하게 해석해내는 신고전파 또는 한계효용학파 경제학자들에게 이는 의문을 불허하는 자명한 공리와도 같다. 사회과학 가운데 경제학만이 노벨상의 대상이 된 이유는 경제학이 정치학과 사회학 등 여타 사회과학과 달리 수학을 통해 연역적 추론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과학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라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그 결과 미국 중심의 주류 경제학계에서 발간되는 각종 권위있는 경제학술지는 얼핏 보면 수학학술지와 구분하기 어려우리만큼 온갖 숫자와 방정식으로 넘쳐나고 있다. 뉴욕 월가의 투자회사에서 일하는 루마니아 출신의 한 경제학자는 “과거 루마니아 같은 공산국가에서 자본주의 경제학을 배우는 데 어려움이 컸겠다”는 지적에 “미국에서 온 저명한 경제학술지는 전혀 검열없이 보고 독학할 수 있었다”며 “그것이 경제학에 관한 것인지 아닌지 도저히 (당국으로선) 짐작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경제학은 원시적 초보학문? 이처럼 수학과 결합해 자연과학적 성격을 강화한 덕에 경제학은 경제만이 아닌 온갖 사회현상을 재고 연산할 수 있는 측정수단으로서의 자격을 부여받고 있다. 가령 경제평론가이자 소설가인 복거일씨는 그의 책 <진단과 처방>(문학과지성사 펴냄)에서 뛰어난 계산장치로서의 경제학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가격이란 계량 수단을 가졌으므로, 경제학은 사람들의 행동을 계량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자연히 경제학은 보편적이고 계량적인 일반 법칙들을 설명의 대상에 적용하는 진정한 학문의 모습을 일찍 갖췄다.” 그는 이런 점 덕분에 “경제적 접근은 사람의 모든 행동들을, 돈과 관련이 있든 없든, 의사결정 단위가 개인이든 조직이든, 설명하고 예측하는 데 뛰어나다”고 주장한다. 경제적 행동은 물론이고 결혼, 출산, 시간의 사용, 정치적 연합, 선거 또는 범죄처럼 일반적으로 경제적 행동으로 여겨지지 않는 행동들을 설명하고 예측하는 데서도 경제적 접근은 뛰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경제학이 원숙한 학문으로서 자연과학에 근접한 과학성을 지니게 됐다는 주장에는 “과연 그러냐”는 회의와 “그렇지 않다”는 반론들도 만만치 않게 제기된다. 가장 직접적인 의혹은 과연 경제학이 현실의 문제를 스스로의 주장처럼 제대로 진단하고 예측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에서 비롯된다. 가깝게 최근 일본의 10여년 장기불황을 과연 경제학자들이 예측했던가. 앞으로도 어떻게 그 암울한 처지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에 대해 경제학은 그 어떤 속시원한 해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1997년 한국의 구제금융 위기만 해도 과연 어떤 경제관료며 학자들이 이를 정확히 예측했던가를 돌이켜보면 경제학의 자만에 쏟아지는 비난의 눈초리는 이해할 만하다. <유시민의 경제학 카페>(돌베개 펴냄, 02-338-4143, 1만2천원)는 이처럼 경제학의 과학성에 대해 근본적 물음을 던지고 있어 눈길을 모은다. 경제학에 관해 알려주는 책으로선 보기드문 경우다. 시사평론가이자 방송토론 진행자로 잘 알려진 저자 유시민씨는 독일 구텐베르크대학에서 경제학 박사과정을 수료한 경제학자이기도 하다. 97년 환란 위기의 여파에 휩싸여 박사 논문을 쓰지 못한 채 급거 귀국해야 했던 IMF 피해자의 한명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그가 다루고 있는 경제학의 범위는 무척 폭넓다. 그는 한계효용이론으로 유명한 신고전파만이 아니라 케인스학파와 최근 새뮤얼슨에 의해 이룩된 신고전파종합(신고전파와 케인스학파의 절충·종합)을 아울러 주류 경제학 전체의 문제를 자근자근 짚는다. 그러면서도 가까운 우리 주변의 실제 사례를 통해 결코 어렵지 않고, 흥미롭게 경제학의 기본 개념과 원리들을 전달하는 미덕을 발휘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관심을 끄는 건 경제학이 여전히 원시적 상태의 초보학문에 지나지 않는다는 진솔한 성찰과 자기비판이다. 예측·치유·분배의 문제에 눈감아 이 책은 경제학에서 여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을 제시하면서 경제학의 과학성과 그 예측능력에 대한 경제학자들의 확신을 조목조목 반박한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저절로 모든 경제적 문제들을 해결할 것이라는 신고전파의 주장과 시장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는 국가의 보이는 주먹이 말끔하게 해결하리라는 케인스학파의 기대는 모두 근거없는 환상에 불과하다고 그는 주장한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경제학이 과학이라고 하기에는 원시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저명한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의 입을 빌려 경제학이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이렇게 나눈다. “경제학이 원시과학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의학과 비슷하다. 당시 의학교수들은 인간의 신체기관과 작용에 관한 수많은 정보를 축적했고, 이를 토대로 질병을 예방하는 데 매우 쓸모있는 충고를 해줄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병에 걸린 환자는 제대로 치료할 줄 몰랐다. …경제학자는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단히 많이 알고 있지만, 치료할 수 없는 게 많다. 무엇보다도 가난한 나라를 부유하게 만드는 방법을 모른다. 경제성장의 마법이 사라진 것처럼 보일 때 그것을 회복하는 법도 모른다.” 저자가 보기에 경제학이 모르는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경제학 교과서에서 소득분배 이론이 말끔하게 사라진 이유 또한 경제학이 그것을 정확하게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리카도는 오늘날 국제 자유무역 이론의 근거가 되는 비교우위론을 확립한 영국의 고전파 경제학자이다. 그는 분업과 자유로운 거래를 통해 만들어지는 부가 어떤 법칙에 따라 지주와 자본가, 노동자 세 계급에 분배되는지를 규명하는 것이야말로 경제학의 주된 임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경제학의 역사는 이에 대해 크게 두 가지의 응답을 보냈다. 칼 마르크스는 축적된 자본을 생산적 노동에 대한 계급적 착취의 산물로 규정하는 가치이론으로 분배의 문제를 해명했다.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은 1960∼70년대 정치한 수학적 모델을 통해 자본가와 노동자가 생산에 기여하는 만큼의 이자와 임금을 자기 몫으로 찾아간다는 한계생산력 분배이론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 이론은 도대체 생산에 투여된 실물자본의 가치를 어떻게 측정할 것인가 하는 기술적 문제에 부닥치면서 현실적 설득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수리적으로도 자본의 소득비율인 이자율의 계산에서 경제학자들은 애초의 분배이론을 뒤집는 희한한 반론에 봉착했다. 새뮤얼슨 같은 이는 “한계생산력 분배이론은 하나의 우화”라고 말하기에 이른다. 유씨는 “대다수 경제학자들은 아예 이 문제를 순전히 이론적인 문제로 치부한 채 외면해버리는 쪽을 택했다”며 “이는 경제학이 완전한 과학이 아니라 자본의 이해에 봉사하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는 단적인 증거”라고 말했다. 틀린 공식… 이익추구=복리증진 ‘외부효과’(external effect)의 문제도 경제학자들의 오만과 무지를 일깨우는 사례로 꼽힌다. 외부효과란 어떤 사람이 한 일 덕분에 한푼의 대가나 보상도 없이 경제적 이익이나 손해를 보는 현상을 말한다. 사과밭 옆에 벌통을 차린 양봉업자 덕에 대가없이 과수원 주인은 접붙이기가 잘되는 이득을 보거나, 자동차 배기가스 탓에 보행자가 나쁜 공기를 마시는 손해를 보게 되는 등의 경우에 해당한다. 물론 경제학은 이에 대해 이론적 해결책을 갖고 있다. 자동차를 많이 타는 만큼 환경세를 부과해 공기오염에 대한 책임을 물리는 것이다. 영국 경제학자 피구가 처음 제시해 피구세라고도 불리는 방식이다. 사진/ 불평과 분배의 문제는 경제학이 풀지못한 대표적 난제로 꼽힌다. 급식을 기다리는 실직 노숙자들. 그러나 문제는 남는다. 인간 사이에 일어나는 시장거래 바깥의 무수한 인과관계를 어떻게 다 파악해 그 손실과 이득을 따질 수 있겠는가. “인간은 일상적인 생산소비활동이 야기하는 나쁜 외부효과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것을 금전으로 환산해내는 기술만큼은 개발하지 못했다.” 실로 피구조차도 외부효과의 세율을 어떻게 결정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반박들은 결국 하나의 지점을 향해 나아간다. 시장 또는 정부가 합리적으로 사태를 계산해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경제학의 믿음을 그 뿌리로부터 재검토하는 일이다. 경제학의 기본 가정은 ‘이기적 인간’이라는 공리에 바탕하고 있다. 이기적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합리적으로 생산하고 거래하고 소비하는 인간이다. 인간이 스스로의 이익을 추구하면 다른 간섭 없이도 저절로 사회적 복리가 증진되리라는 절대적 믿음 위에서 경제학의 온갖 이론이 펼쳐져나온다. 그러나 실제 인간의 행동은 꼭 이론과 같지 않다. 모럴 해저드는 이를 명백히 보여준다. 모럴 해저드는 요즘 흔히 비도덕적 행위를 지칭하는 데 쓰이고 있지만, 원래 보험에서 유래된 용어이다. 자동차보험에 가입하기 전에 조심조심 차를 몰던 사람이 보험 가입 뒤엔 보험회사를 믿고 전보다 안전운전에 신경을 덜 쓰는 현상을 일컫는다. 사실 이것은 “자기의 금전적·비금전적 이익을 최대화하고 비용을 최소화하려는” 의도에 따른 것으로 개인으로선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이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합리적 개인의 이익 추구가 사회 전체의 후생 증대로 나타난다는 공리에 정면으로 어긋난다. 지은이는 이런 점을 들어 “경제학자의 존재근거는 이데올로기의 생산”이며 “이데올로기는 때로는 진실을 담지만, 그 진실이란 것도 알고보면, 반쪽짜리이게 마련”이라고 질타한다. 수학보다는 역사학에 가까워야 이러한 질타는 이른바 ‘복잡계 경제학’ 또는 ‘비선형 경제학’의 논의와 깊은 연관을 갖고 있다. <경제학 카페>에선 복잡계 경제학이 다뤄지지 않는다. 유씨는 “복잡계 경제학에 대해선 몇권의 책을 읽어봤을 뿐이며 깊이있게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복잡계 경제학은 개개인이 완전경쟁에 나선다면 인류의 복지가 더 향상될 것이라고 보는 기존 경제학의 가정이 지극히 추상적이고 단순하며, 그 때문에 복잡한 현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본다. 사진/ 경제학이 가정하는 완전경쟁 시장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용호 기자) 영국 경제학자 폴 오머로드의 <경제학의 부활>(주명건 옮김, 세종서적 펴냄)은 이러한 논의를 잘 보여준다. 이 주장은 경제학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개인간 거래의 기계적 총합을 내는 것이 아니라 상호 의존적인 전체로서 경제현상을 바라보는 체제분석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므로 단순한 가정에 기반해 이상적 세계가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대한 수리학적 추상이론을 연구하기보다는 처음부터 데이터를 조심스럽게 수집해 사실에 근거한 이론을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본다. 수학이나 물리학보다는 역사학이나 기상학, 고생물학과 더 비슷하다는 것이다. 유시민씨는 “경제학은 과거 통계의 분석을 통해 비교적 확실한 데이터를 만들 수는 있지만, 그를 근거로 미래를 예측하고 현재의 질환에 대한 처방전을 마련하는 능력은 갖고 있지 못하다”며 “경제학자를 너무 믿지 말라”고 말했다. 주류 경제학의 도전 세력 기존 경제학의 패러다임에 대한 가장 강력한 도전 세력은 ‘생명경제학’이다. 이 견해는 기존 경제학이 가공할 환경파괴와 자원고갈, 심화되는 남북격차, 대중적 빈곤화, 만성적 인플레, 높은 실업률 등의 문제를 해결할 만한 이론적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기는커녕 지금까지의 파괴적 산업경제를 추종하고 뒷받침하는 데 머물렀다고 본다. 이 견해도 경제학의 목적이 복지 증진에 있다는 애덤 스미스의 주장에 동의한다. 그러나 인간 복지의 증진은 생산과 소비의 단순한 극대화보다 더 큰 내용을 포함한다고 주장한다. 복지는 꼭 물질적 풍요로만 측정될 수 없으며, 사회문제와 환경문제, 나아가 지식, 정서의 측면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존 경제학은 물질적 후생의 수준에만 집착하는 물질적인 환원주의에 머물러 공업화 중심의 경제성장만을 강조해왔다고 지적한다. 생태경제학의 중심은 런던에 본부를 둔 경제학자들의 모임인 TOES(The Other Economics Summit)이다. 이들은 1984년과 85년에 런던과 본에서 연 회의의 결과를 모아 <생명의 경제>를 펴냈다(국내에선 격월간지 <녹색평론>에 번역돼 실렸다). 이 책에선 경제성장 지상주의와 국민총생산(GNP) 개념 등 기존 경제학의 중심 논리들을 적극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기존 경제학이 집중하는 효율성의 문제를 지표화한 것이 GNP이며, 생명경제학은 이 대신 인격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기본필요와 환경, 자원, 지구의 모든 생명과의 공존 등을 기준으로 한 주체적인 지표를 새롭게 개발하고 확립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이 견해는 환경경제학과 닮은점이 있다. 환경경제학은 기존 경제학에서 도외시됐던 폐기의 문제에 새롭게 주목한 기존 경제학의 새 분과학문이다. 공공재로서 가치가 없다고 여겼던 환경에 경제적 가치를 부여하고 환경오염자에게 환경세나 오염쿼터 등 외부효과 비용을 부담시키는 방식을 찾는다. 그러나 환경경제학은 결국 개인의 이기심에 호소해서 환경을 개선하려 한다는 점에서 기존 경제학의 패러다임을 벗어나지 않고 있다. 반면 생태경제학은 인간이 무한한 욕망을 이기적으로 추구하는 존재라는 기존 경제학의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편 현존하는 전통적 경제관 가운데 기존 경제학의 패러다임에 반하는 것으로 이슬람의 경제관이 있다. 이슬람경제관은 경전 코란과 하디스에 기반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모든 부는 알라의 것이며, 인간의 소유는 차용에 불과하다. 또 인간을 물질적 부를 추구하는 존재로만 바라보는 기존 경제학과 달리, 도덕적 가치를 무시하는 생산행위를 금기시한다. 이에 따라 비생산적인 토지매매행위를 금하며, 이자 또한 생산활동에 직접 참가하지 않는 자들의 소득원이 될 수 있다는 이유로 금지한다. 손원제 기자 wonje@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