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2년 2월 17일 일요일 오전 03시 45분 52초 제 목(Title): 조우석/서평 나의 아버지 여운형 출처:월간중앙 2 해방공간의 거목 夢陽의 못다 이룬 삶 조우석의독서일기 - 나의 아버지 여운형 1936년 베를린올림픽의 영웅 마라토너 손기정 사진 일장기 말소 사건을 말머리 삼아 보자. 이와 관련한 공식화된 영웅적 언론투쟁담과 그것과는 사뭇 다른 소식을 전해 주는 또 다른 진상의 차이란 빛과 그늘만큼 차이가 있음을 우리는 익히 안다. 문제는 알 만한 사람들은 대강 다 아는 그 편차(偏差)에도 불구하고 공식 스토리의 힘이 너무 세다는 점이다. 그래서 ‘과연 어느 것이 사실인가’하고 헷갈리기조차 한다. 우리네 현대사가 그렇고 그렇기 때문에 그냥 내버려두고 싶었던 이야기들 중 하나가 바로 일장기 말소 사건의 진상인데, 이달에 우리가 함께 읽을 책 ‘나의 아버지 여운형’에서 이 이야기가 튀어나온다. 그럴 수밖에 없다.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1886∼1947)이 사장으로 있던 ‘조선중앙일보’가 ‘동아일보’보다 무려 10여일이나 앞서 일장기를 말소한 사진을 실은 매체이기 때문이다. 또 이것을 결심한 주인공도 ‘기자들이 사고를 친’ 동아일보와 반대로 조선중앙일보에서는 여운형이었음이 딸이 쓴 인물평전 ‘나의 아버지 여운형’에 소상하게 서술돼 있다. 앞뒤 정황과 맥락에 대한 정보도 설득력이 있다. 본디 손기정이 올림픽에 출전하기 3년전 몽양은 조선체육회장에 취임했고, 그래서 매 주말이면 몽양은 집 근처 휘문고 교정에서 열렸던 다양한 체육행사를 주관하며 젊은이들과 함께 땀을 흘렸다는 것이다.결정적인 정황적 근거도 있다. 평전에 따르면 손기정은 일장기를 달고라도 과연 올림픽에 나가야 하는가를 몽양에게 물었다는 것이다. 일장기 말소 사건이 욱하는 마음에서 저지른 단발성이 아님을 확인해 주는 대목이다.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렸던 선수단 환송식에서의 일화도 흥미롭다. 몽양에 앞서 환송사를 한 이는 친일파의 거두 윤치호. 그야 물론 “일본의 승리는 우리의 승리”라는 식으로 말했다. 이때 뒷문에서 뛰어든 몽양은 마이크를 나꿔채듯 하며 이렇게 말했다. “제군들! 가슴에는 일장기를 달고 가지만, 등덜미에는 조선반도를 짊어지고 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준·안중근의 후손답게 조선의 명예를 만방에 떨치라.” 그랬던 조선중앙일보사에 손기정의 1등 소식이 날아들었고, 몽양은 사내 간부들의 일부 반대 의견을 무릅쓰고 시상식장의 손기정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워 버리는 결정을 내린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다. 절망에 빠진 우리 민족에게 민족적 기개를 안겨줄 수 있는 기회다.” 그런 과정을 거쳐 조선중앙일보에 사진이 실린 날짜가 8월10일. 동아일보는 이보다 10여일 뒤 이 사진의 동판을 빌려가 같은 사진을 게재했음을 우리는 안다. 자, ‘그 이후’부터가 중요하다. ‘나의 아버지 여운형’을 보면 이 사진이 문제되자 몽양은 총독을 찾아가 사장직 사임과 자진폐간의 뜻을 제기했고, 결국 그 선에서 처리됐다. 1932년 이후 몽양의 언론사주 생활은 그렇게 종료됐다. 1925년 上海시절의 몽양 가족사진.왼쪽부터 홍구(차남).운흥(동생)난구(장녀).봉구(장남).몽양 일장기 말소 사건의 진실 이와 적지않이 다를 수밖에 없었던 동아일보의 속사정에 대한 신뢰할 만한 기록은 언론사 연구의 기념비적 저술의 하나인 ‘일제하 민족언론사론’(최민지 지음, 1978, 일월서각)에 나온다. 책에 따르면 동아일보 역시 그 사진 게재로 9개월 정간 조처를 받았고, 바로 이 때문에 지금까지 이 사건은 일제시기 언론투쟁담의 하나로 꼽히고는 한다. 흥미로운 것은 최민지는 문제의 연구서에서 ‘인촌 김성수전’(1976년, 동아일보사)을 인용(387∼391쪽)하며 사건 당시 인촌이 보인 태도와 마음 상태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보성전문학교 이사장실에서 이 사실을 전화로 연락받은 인촌은 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급히 동아일보사로 오는 자동차 속에서 인촌은 히노마루(일장기) 말소는 몰지각한 소행이라고 노여움과 개탄을 금할 수 없었다. …고하(古下·송진우의 호)도 성냥개비로 고루거각(高樓巨閣, ‘커다란 집’ 즉 신문사를 지칭함)을 태워 버렸다고 (편집국의)이길용 기자를 크게 꾸짖으면서 흥분을 가누지 못했던 것이다. 인촌은 더 말이 없었다.” 서론이 다소 길어졌다. 이 글은 새삼스럽게 일장기 말소 사건의 진상을 위한 글이 아니다.나는 당시 동아일보가 조선중앙일보보다 사세(事勢)가 컸던 만큼 상대적으로 일제 당국에 대응하기 어려웠던 점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여기에 숨어 있는 인촌과 몽양의 차이를 견줘보고 싶은 것이다. 어쨌거나 나는 이 일화를 통해 ‘나의 아버지 여운형’ 속에 드러나는 몽양이라는 역사 속 인물의 사람됨이 얼마간 드러나지 않을까 해서 거듭 음미해 보고 싶었다(이 이야기를 새삼스럽게 거론하게 만든 계기는 요즘 나온 주목할 만한 신간 ‘당신들의 대한민국’이다. 귀화한 러시아인 박노자 교수가 한겨레를 통해 최근 펴낸 이 책은 윤치호와 서재필을 ‘매판형 지식인의 원형’으로 규정하는 등 ‘어두운 현대사’에 대한 묵직한 문제제기를 더없이 진지하고 당당하게 전개한다). 자동차 사고(1996년 9월)로 이미 고인이 된 딸 여연구(전 북한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의 이 기록, 서울 혜화동로터리에서 권총으로 피격 사망한 몽양의 사망(47년) 반세기를 넘긴 시점에서 나온 이 책, 그리고 어쨌든 남북간에 보다 넓어지고 탄력이 많아진 공간을 등에 엎고 나온 것이 바로 이 인물평전이다. 현행법상 북한의 저작물도 국내에서 2차 편집 과정을 거치면 일반출판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의연히 중요한 텍스트인 이 책을 뒤적이는 마음은 그리 편안한 것만은 아니다. 그 이유야 너나할것없이 다 안다.우선 역사 속의 몽양은 아직도 현대사 해석 논란의 한가운데 서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역설이지만, 바로 이 점 때문에 이 책이 매력 덩어리로 다가오는 점도 또한 사실인데, 이 점을 책 뒷머리에 해설을 쓴 국사편찬위원회 소속 연구원 정병준은 이렇게 말한다. ‘한국 현대사의 우여곡절을 겪은 정치인 가운데 몽양만큼 찬반과 훼예(毁譽)가 양극을 달리는 인물은 없다. 그에게는 정치인을 이념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수사가 동원됐다. 공산주의자, 민족적 사회주의자, 좌경적 사회주의자, 민주적 사회주의자, 민족적 사회주의자 또는 사회주의적 민족주의자, 민주주의자, 자유주의자 등 각양각색의 이념적 스펙트럼이 그에게 동원됐다.’(320쪽) 그러나 몽양은 그 모든 정치적 수사(修辭)의 집적물이기도 하고, 동시에 아니기도 하다. 그렇다면 1980년대 불었던 현대사에 대한 비판적 연구 붐 당시 거명돼 토론됐던 몽양, 그 이후 탈 이념의 시대에 다시 잠복했던 몽양은 과연 누구라고 규정해야 할까? 과연 그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이 2000년대 초입에 말이다. ‘나의 아버지 몽양’은 몽롱하게 살고 있는 우리에게 불쑥 이런 질문을 안겨준다. 사실이다. 우리 사회 집단적 기억의 시렁 위에 덜렁 올려둔 채 내처 잊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몽양, 그리고 그의 평전에 나오는 일제시기와 해방 정국의 복잡했던 사안들을 통째로 안겨주는 문제의 책이 ‘나의 아버지 여운형’이다. 그와 관련된 사안들 중 우선 의문이 드는 것은, 예를 들자면 이런 것들이 될 것이다. 과연 어떻게 해서 몽양은 일제하 조국 땅에서 총독부가 허용한 합법적 언론활동과 사회활동을 하면서도 윤치호·김성수·이광수·최린 등 우파 거두들의 매판적 친일활동과 선명하게 구분되게, 긴장감 있는 자기 유지가 가능했을까 하는 점이다. 그것은 결코 작지 않은 수수께끼다. 해방 직후인 1945년 11월 한 여론조사에서 ‘일제시기 최고 혁명가’로 몽양이 19.9%로 1위를 차지했고, 그 결과 ‘조선을 이끌어갈 양심적 지도자’를 묻는 항목에서도 33%를 차지해 다시 1위를 한 것을 보면 몽양은 당시 해내외 지도자들과 또 다른 그 무엇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 또 다른 궁금증이란 이런 것이다. 그토록 차별화된 민족지도자이자 당시 세계 정세의 흐름에도 가장 밝았던 사람 중 한명이 분명한 몽양이 왜 해방된 지 불과 2년도 채 안돼 암살당하면서 뜻을 꺾이고 말았으며, 그것이 어떻게 이 민족의 불행으로 줄달음치는 과정으로 연결되는가 하는 점이다. 일왕 초청받아 면담 과문한 나는 이 책에서 처음 알았지만 몽양은 일제시대 해내외 정세에 대해 생각 이상으로 상당히 밝았던 핵심인사였다. 또 그 ‘다루기 곤란한 이질적 존재’ 자체가 어쨌거나 일제 당국이 볼 때는 ‘먹기도 뱉기도’ 어려웠다. 때문에 서울 용산의 조선군사령부 핵심인사나 총독은 물론 일왕 등이 지속적으로 혹은 간헐적으로 접촉할 수밖에 없었던 거물로 존재했다. 그 상징적 예화가 몽양과 일왕 사이의 흥미로운 면담이다. 1940년 일왕의 초청에 의해 도쿄(東京)에서 비밀리에 이뤄진 이 면담은 일제시대와 그 이후에도 극소수 인사들 외에는 알려진 바 없었다.<박스기사 ‘몽양-일왕 면담 기록’ 참조> 비록 미 군정의 간섭으로 곧바로 꺾이지만, 몽양이 해방 직후 국내 정치세력의 꽃으로 등장시킨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해방 다음날인 16일 그토록 신속하게 결성할 수 있었던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필연적 맥락이 있었던 것이다. 즉, 건준 결성 자체도 그가 중일전쟁 이후 줄곧 낙관적으로 예견했던 일제 패망을 감지 내지 확신하고 1944년 8월 도시를 중심으로 한 ‘조선건국동맹’과 그해 10월 농촌을 중심으로 한 농민동맹을 각각 조직해 일제 패망 이후를 준비하는 놀라운 자체 역량에 힘입은 것이었다. 이런 서술은 매우 중요한 증언이다. 여연구는 이 대목을 책의 1부 ‘비껴온 서광’의 맨 뒷장(章) ‘광복전을 위하여’에서 비교적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지만, 일제 최말기인 1940년대란 과연 어떤 때이던가. 일제가 전쟁에 깊숙이 빠져 허우적거리면서 조선땅을 죽음의 골짜기로 몰아넣던 무시무시한 폭압의 시기 아니던가. 평전에 따르면 개인적으로 이 시기 몽양은 유언비어 유포죄로 6개월을 복역하고 나온 뒤 고향 경기도 양주에서 농사짓는 척하고 있었고 ‘몽양이 폐인이 됐다’는 웃기는 관제(官製) 소문이 ‘경성일보’에 기사로 나던 무렵이었다. 이때 몽양은 조선건국동맹과 농민동맹의 도별 하부조직을 결성했고 중국 중칭(重慶)·베이징(北京), 일본 등지와 연락을 추진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몽양은 일본 당국으로부터 일본-중국 화평공작의 주선 역할을 제의받지만 호기롭게 퇴짜를 놓고 있다. 그의 행보의 놀라운 점을 근거 없이 영웅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제 당시 친일파의 최고 거두로 당시 조선의 원로 대접을 받던 윤치호의 행적과 너무도 비교된다. 지식과 명망 그리고 재력 등에서 조선의 대표적 엘리트였던 윤치호는 “일제시대 우리에게 일본 정권의 명령과 요구에 응하는 것 외에 어떤 대안이 있었겠나?”하는 그다운 논리의 발언을 하고 있었다. 지난해 나온 출판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기록물 중 하나인 단행본 ‘윤치호 일기’(역사비평사)에 나오는 대목이다. ‘일본에 병합됐던 시기 조선의 위상은 어땠습니까. 독립적인 왕국이었나요? 아니오. 조선은 일본의 일부였고, 미국 등 세계 열강도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즉, 조선인들은 좋든 싫든 일본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일본의 신민으로서 조선에서 살아야 했던 우리에게 일본 정권의 명령과 요구에 응하는 것 외에 어떤 대안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누군가가 일본의 신민으로서 한 일을 가지고 비난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630쪽)이러저러한 사정이 겹쳐 몽양은 일제 하에서 가장 긴장감 있고, 책임 있는 사회 엘리트로서의 행로를 밟았다고 판단된다. 예전 한국에서 출간된 책 ‘몽양 여운형’(출간연도는 노출이 안됨)에서의 서술 인용도 그 때문에 설득력이 있다. 이 책을 쓴 이기형은 ‘몽양은 놈(일본인)들의 심정을 살펴가며, 어떤 때는 호령하고 어떤 때는 어루만지기도’ 했다는 것, 때문에 일본인들은 ‘그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라’ 허둥댔다는 것이다. 딸의 시선으로 바라본 아버지의 모습이라서 한계도 있을 것이고, 때문에 또 다른 진실을 담고 있다고 판단되는 이 책은 일제시기에 그렇게 여유 있고 낙관적이던 몽양이 해방정국에서 암살되기 전까지 무려 12차례나 테러의 표적이 됐고, 결국 좌·우익의 소용돌이 속에서 급기야 침몰하고 마는 과정을 책의 제2부 ‘민족 화합의 길’에서 서술한다. 이 대목을 읽는 이의 마음은 그 누구랄 것 없이 답답할 것이다. 아니 참담하기조차 할 것이다. 조선에 대해 그토록 무지했고 준비조차 없었던 점령군인 미 군정청과의 갈등도 그렇고, 하지 중장과의 예고된 갈등 서술도 마치 어제의 일처럼 답답하기 짝이 없다.또 있다. 신탁통치 문제를 둘러싼 그의 아슬아슬하고도 어려운 선택이 남한과의 불화로 연결되고, 각기 제 갈 길로 가는 남북 분단의 힘에 비례해 깊고 깊게 골이 패어가는 좌·우익의 사이, 그리고 좌익 내부의 갈등 사이에서 고난도의 외줄타기를 하는 몽양을 바라보는 마음도 짠하기 그지없다. 그가 추진하려 했던 좌우 합작과 남북 연합은 무섭게 돌진하는 분단의 원심력에 밀려 실패로 귀결됐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사실 우익진영과의 합작을 논의한 유일한 좌파이자 동시에 미 군정청에도 드나들었던 것이 사실인 몽양은 이와 함께 북한의 소련 진주군과도 접촉했던 거의 유일한 남한 정치인이라는 너무도 독특한 위상을 갖는다. 1935년 대루감옥에서 출감하는 도산 안창호 선생을 대전역에서 만난 몽양(왼쪽). 즉, 기본적으로 앞에 소개한 정병준의 분석처럼 몽양은 비합법적 조직가 내지 지하 혁명가에 속한다기보다 대중정치인이었다. 따라서 그는 이념 수행자라기보다 현실정치인이었기 때문에 그의 이념에 대한 섣부른 재단은 어려운 법이다. 다만 그의 기본적 지향은 너무도 자명하고 분명하다. ‘외세에 대해서는 대외 자주’ ‘민족 내부에서는 민족 독립’ ‘정치적으로는 합리성에 기초한 연합과 연대’ 이 3개의 지향을 해방공간 속에서 실천하려다 좌절한 사람이 바로 몽양이다. 그 점에서 이 책을 엮은 이의 말대로 일단 그를 탄력적인 ‘진보적 민족주의자’로 분류하는 작업에 나는 공감한다. 이런 분석이 반세기 훨씬 전에 사망한 현실정치인에 대한 분류이면서도, 아직도 터널의 끝이 쉬 보이지 않는 분단 시대를 사는 이 땅에서 미완의 것임을 확인할 수밖에 없는 것이 가슴아프다. 그러저러한 이유로 효과적인 문제제기가 많다는 점에서 이 책은 좋은 출판물임에 틀림없다. 여연구가 일본에서 출판되는 잡지 ‘통일연구’에 연재했던 이 책의 내용은 분명 북한이라고 하는 정치체제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한 서술이 있고, 그 점 때문에 김일성에 대한 서술 등에서 현재까지도 쉬 받아들이기 어렵고 주저되는 대목이 적지 않다. 분명 그것은 이 책의 한계일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기왕 반세기 동안의 이념적 편향을 씻어 주는 효과가 있다는 점에서 크게 흠이 된다고 지적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는 판단도 든다. 즉 ‘이념이 큰 변수였던 시기인 일제말∼해방 전후라는 사안을 남과 북이라는 정치권력이 허용한 이념적 토대 위에서만 연구해야 했던’ 상황이 심어준 고정관념으로부터 일정하게 벗어나게 해준다는 긍정적 효과 때문이다.따라서 이 책을 대중적 출판물 형태로 나오게 만든 공은 엮은이 신준영(월간 ‘민족21’ 편집장)의 공로임이 분명하다. 여연구의 글을 모으고, 여기에 다양한 자료 5편을 첨가해 버젓한 책의 꼴을 부여한 사람이 그이기 때문이다. 내가 알기에 책의 편집 과정에서 본래 원고의 일정 대목, 물론 극히 일부를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삭제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은 긴장관계에 놓여 있는 남북간의 복잡한 상황과 반세기 전의 상처를 염두에 두면 매우 현명한 처사임이 분명하다. 아직도 온전한 원고 전문(全文)을 읽을 수 없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딸의 시선으로 그린’ 이런 대중적 출판물과 더욱 신뢰할 만하고 값진 또 다른 인물평전이 출간되기를 기대한다. 몽양과 일왕의 비밀접촉 내막 “어찌 조선사람에게 친일을 설교하는가” ‘나의 아버지 여운형’의 108∼119쪽에는 몽양과 일왕 사이의 비밀접촉 전모가 그려져 있다. 해방 전후에 대한 사료로서 가치가 높을 대목을 발췌해 소개한다.<편집자> “1940년 3월 조선군사령부의 정훈 소좌가 아버지를 불러 ‘선생님은 중국 사정에 밝고 왕정위(汪精衛)와 친분이 있으니 대륙으로 가서 왕정권을 도우며 일·중 친선에 협력 바란다”는 말을 했다. 모호한 표정을 짓는 그에게 소좌는 “실은 육군성 병무국장 다나카 다카요시에게서 연락이 왔다”고 했다. 도쿄(東京)로 건너간 아버지는 조카 여경구를 통역으로 데리고 다녔다. 아버지는 일본말에 능했지만 민족적 자존심의 표현이었다. 다나카도 비슷한 주문을 했으나 거절했다. 다음날에는 전 총리 고노에(近衛文磨)가 도쿄회관으로 아버지를 불러내 애원 겸 위협을 했다. 역시 거절하자 다음에는 천황이 부른다는 전갈이 왔다. 아버지는 긴장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다나카와 고노에를 만난 얘기는 널리 퍼졌지만, 천황과 대결한 이야기는 아직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해방을 전후해 한동안 소문이 돌았으나, 아버지가 그 소문을 일축해 버려 곧 가라앉았다. 1976년 경구 오빠가 운명하기 전에 내게 이 사실을 말해 줬다. 그때 일을 (기록으로) 써놓았던 것을 내게 유서로 넘겨줬다. 여경구의 기록 지정장소에서 까만 승용차를 타고 엄엄(嚴嚴)한 호위 속에 궁성다리 앞에서 차를 내렸다. 다리 건너 건물로 안내됐다. 긴 복도를 따라가는데 갑자기 무릎을 꿇고 기어가라고 명령했다. “나는 천황이 상봉을 청해 온 외국인이다. 우리의 예법대로 한다”며 아저씨는 곧장 걸어가자 승강이가 벌어졌다. 시비는 단상 위 군복 입은 왜소한 사나이가 손짓을 해서야 끝났다. 그가 천황이었다. 몽양: 무엇 때문에 조선인 여운형을 만나자고 했나? 천황: 듣던 바와 같군. 남아라더니. 당신이 조선인으로 태어난 게 아깝다. 한가지 부탁이 있는데, 일본제국을 위해 나의 사신이 되어 중국에 가서 일본 군대가 지나갈 길을 열어 달라고 청하라. 당신의 재능과 수완을 믿는다. 몽양: 어찌 조선사람에게 친일을 설교하는가? 내게 재능과 수완이 없어 천황의 마음을 돌려 세우지 못하는 게 한스럽다. 천황: (노하여)내가 사람을 많이 만나 보았으나 너처럼 오만무례한 자는 처음이다. 죽든지 명령을 듣든지 택하라. 몽양: 죽는 게 무서워서야 어찌 내가 반일을 하나. 친일주구 몇명 때문에 당하는 일시적 치욕은 이제 우리 힘으로 씻게 될 것이다. 이것이 진리다. 너의 곁에 이 진리를 말해 주는 자가 없겠으니, 내가 수고로이 온 것이다. 천황: …죽여 달라고 청하러 나에게 왔다는 말인가? 내 부하 중에 선생 같은 분이 없으니 나를 도와달라. 몽양: 나의 일은 끝났다. 죄를 뉘우치고 중국과 조선에서 군대를 철수시키면 가능하다. 천황: (호위병들에게) 길을 내주고 문밖까지 안전하게 배웅하라. 여선생, 오늘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하자. 피차를 위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