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목록][이 전][다 음]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2년 2월 17일 일요일 오전 03시 26분 13초
제 목(Title): 이덕일/ 현실에서의 승자가 역사의 승자는 


출처: 월간중앙 2

현실에서의 승자가 역사의 승자는 아니다

主君의 成敗 주무른 춘추전국시대 최고 킹메이커들

 
이덕일 역사학자  

 

난세다. 눈앞에 큰 선거도 다가왔다. 대권을 향한 후보들의 용틀임이 시작됐다. 
후보 캠프마다 전략가들이 꿰고 있다. 그들의 면면은 곧 대권 승리와 차기 
정권의 성패를 가름할 바로미터다. 오왕 합려의 책사 오자서, 제왕 환공의 책사 
관중, 정나라의 자산과 이리, 진시황의 책사 여불위와 이사 등…. 춘추전국시대 
제왕과 책사들로부터 배우는 난세의 생존법 그리고 싸움에서 이기는 법! 

 
 


바야흐로 책사들의 계절이다. 지방선거와 대선이 있는 올해는 우리나라의 
내로라 하는 후보와 책사들이 사활을 건 한판 승부를 펼칠 것이다. 승자와 
패자가 갈릴 것이며 환호와 눈물이 갈리는 드라마틱한 승부가 벌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 환호와 눈물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에 불과하다. 

역사 속에서 이런 승부가 가장 극명하게 펼쳐졌던 시대를 들라면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일 것이다. 춘추시대(BC 770∼476)와 전국시대(BC 475∼221)는 
권력을 둘러싼 인간의 모든 승부가 적나라하게 펼쳐졌던 시기다. 
춘추시대는 공자가 쓴 기전체 역사서 ‘춘추’(春秋)에서 유래한 시대명이고 
전국시대는 ‘전국책’(戰國策)이라는 역사서에서 유래한 이름인데, 그 시대는 
서주(西周·BC 1111∼770)의 뒤를 이은 동주(東周·BC 770∼221)와 함께 
출발한다. 동주시대가 바로 춘추전국시대인 것이다. 

주나라의 봉건제도는 주나라 왕실이 혈연관계에 있는 친척들에게 각지의 영토를 
분봉해 주고 다스리게 한 제도다. 봉건제도는 혈연을 매개로 한 
종법(宗法)질서를 통해 성립되었는데, 후기로 갈수록 혈연의식이 약화되고 주 
왕실이 제후국의 정치에 별다른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게 되면서 붕괴되어 갔다. 
설상가상으로 주의 유왕(幽王)이라는 용렬한 군주가 나와 봉건체제의 붕괴를 
가속시켰다. 

유왕은 포사(褒?)라는 미녀에게 반해 이미 태자로 책봉한 왕후 신씨(申氏)의 
아들 의구(宜臼)를 폐하고 포사가 난 백복(百福)을 태자로 세웠다. 유왕은 
나아가 많은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왕후 신씨마저 폐하고 포사를 왕비로 
삼았다. 

어느날 유왕이 봉화(烽火)를 올리자 각 제후들이 급히 군사를 이끌고 도읍 
호경(鎬京)으로 모여들었는데, 봉화를 올릴 만한 변고는 아무 것도 없었고 
유왕과 포사가 술을 마시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 모습을 보고 좀처럼 
웃지 않던 포사가 웃자 이를 보기 위해 유왕은 몇번 더 봉화를 올렸고, 
그때마다 제후들은 군사를 끌고 모였다 실망해 돌아갔다. 

드디어 기원전 771년 쫓겨난 왕비 신씨의 부친이 회(繪)나라와 이민족 
견융(犬戎)의 군사를 이끌고 호경을 공격하자 유왕은 황급히 봉화를 올렸으나 
정작 군사를 이끌고 온 제후는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이때 호경이 함락되어 
유왕은 살해되었고 포사는 납치되어 서주는 망하고 말았다. 

그러자 중원 서쪽의 진(秦)나라 양공(襄公)이 폐위 당한 의구를 임금으로 
받들었는데 그가 바로 평왕(平王)이다. 이것이 동주(東周)의 시작이자 
춘추전국시대의 개막이었다. 진나라 양공은 정작 주나라 왕실로부터 오랑캐로 
취급받던 인물인데, 나중에 중원을 통일하는 진시황(秦始皇)의 조상이기도 
했으니 춘추전국시대는 시작도 진나라에서 비롯되고, 그 끝도 진나라에 의해 
마무리되는 묘한 역사인 것이다. 


생존을 위해 인재를 찾아 헤매다 

동주는 이름뿐이었고 각 제후국은 사실상 독립국가가 되어 서로 각축했다. 춘추 
초기에 약 170여개국으로 확인되는 열국 수가 춘추말 10여개국으로 
줄어들었으니 얼마나 많은 부침이 있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10%도 
살아남기 힘들다는 현대의 IT산업계 같은 시대가 춘추시대였던 것이다. 

정작 주 왕실은 형식적으로 유지되는 상황에서 각 제후국들이 명멸하는 이 
시기는 비단 중국역사뿐만 아니라 세계사에서도 가장 변화가 심했던 시대라고 
할 만하다. 가장 큰 변화는 신분제의 붕괴에서 왔다. 주왕을 정점으로 
제후·경(卿)·대부(大夫)·사(士)가 지배층으로서 서인(庶人)들을 다스리던 
사회가 주나라였으나, 이런 봉건적 신분질서는 춘추 중기 이후 점차 
붕괴되었다. 군주 이외의 특권계급은 원칙적으로 배제되고, 군주와 민(民)을 
기축으로 하는 새로운 신분질서가 만들어졌다. 

이 시기 가장 중요한 계급은 봉건귀족이 아니라 ‘사인’(士人)들이었다. 종래 
피지배층이었던 서인들도 능력만 있으면 사인으로 신분상승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전투 방식의 변화도 중요한 몫을 했다. 과거에는 말과 갑옷, 
전차(戰車)를 마련할 수 있는 귀족들 중심의 전차전 위주였으나 점차 서인층이 
주축이 된 보병전(步兵戰)으로 바뀌어 가면서 서인층의 중요성이 더해갔던 
것이다. 
사인들은 군주의 관료가 되어 군주를 보좌했는데 관료의 지위는 세습될 수 
없었고 그 세력화도 용인되지 않았다. 전국시대 각국의 재상(宰相)들이 대부분 
한미한 가문 출신이거나 타국 출신이었던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춘추전국시대의 군주들은 생존하고 승리하기 위해 인재를 찾아 헤맸다. 중요한 
것은 신분이 아니라 개인의 능력이 되었다. 그 인재들은 때로 공자나 묵자처럼 
사상가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했지만, 더 많은 경우 현대에 비유하면 
인수합병(M&A) 전문가나 구조조정 전문가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능력만 있으면 
군주라는 대주주의 발탁으로 일거에 CEO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군주들은 능력 있는 CEO를 영입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하고 나라를 발전시켜 
나갔다. 춘추오패(春秋五覇)라 불리는 춘추시대의 다섯 제후는 이런 위기의 
시대에 자신의 출중한 능력과 과감한 CEO 영입으로 170여국이 명멸하는 치열한 
전쟁의 현장에서 승리를 거둔 인물들이다. 제(齊) 환공(桓公), 진(晉) 
문공(文公), 송(宋) 양공(襄公), 진(秦) 목공(穆公), 초(楚) 장왕(莊王)이 
그들인데, 오(吳)의 합려(闔閭)와 월(越)의 구천(勾踐)을 들기도 한다. 


才士는 主君을 앉아서 기다리지 않는다 

그런데 당시 재사들은 주군의 발탁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주군을 선택하기도 
했다. 때로는 임금이 아닌 인물을 선택해 임금으로 만들기도 했다. 이른바 
킹메이커들의 시대였다. 
그 중 가장 극적인 예는 오자서(伍子胥:?∼BC 484)이다. 오자서는 
초평왕(楚平王)때 태자의 사부였던 오사(吳奢)의 둘째아들이었는데, 평왕이 
태자 건(建)의 비(妃)를 첩으로 삼고자 하면서 인생의 굴곡이 시작된다. 당 
고종의 비인 측천무후가 부왕 태종의 후궁이었고, 양귀비는 당 현종의 
태자비였듯 중국 역사에서 부친이나 아들의 여자를 취하는 경우는 별로 드문 
예가 아니지만 정상적인 상황도 아니었다. 

초평왕이 아들의 여자를 빼앗기 위해 태자를 변방으로 내쫓자, 
비무기(費無忌)라는 신하가 태자가 변방에서 다른 나라 제후들과 짜고 군사를 
일으키려 한다고 거짓 보고했다. 이 무고를 믿은 초평왕이 태자를 죽이려 하자 
그는 송(宋)나라로 도망쳤다. 그러자 초평왕은 태자의 사부였던 오사를 불러 
문책했다. 강직한 성격의 오사는 소인들의 모략 때문에 생긴 일이라며 부자 
사이의 골육지정(骨肉之情)을 중시하라고 간했으나 이는 평왕을 분개시킬 
뿐이었다. 오사를 죽이기로 결심한 평왕은 그의 두 아들도 함께 죽이기 위해 
그들을 불러들이면 죽음만은 면하게 해 주겠다고 회유했다. 그러자 오사는 
“큰아들은 오겠지만 둘째아들은 오지 않을 것”이라면서 이렇게 그 이유를 
설명했다. 

“큰아들은 아비를 살릴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하겠지만 둘째아들은 자기가 
와도 아비를 살릴 수 없음은 물론 자기까지 죽는다는 사실을 알기에 절대로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나중에 초나라의 큰 화근이 될 것입니다.” 
오사의 말대로 큰아들 오상(吳尙)은 왕궁으로 달려와 죽음을 당했으나 둘째아들 
오자서는 아버지의 글을 보자마자 도망갔다. 오자서는 오나라로 도망쳤는데 
그곳에서 오왕의 막료 공자(公子:제후의 아들) 희광(姬光)의 추천으로 왕의 
대부가 되었다. 그러자 오자서는 초나라를 치자고 건의했으나 뜻밖에도 
오자서를 추천한 희광이 반대하고 나섰다. 

“오자서가 초나라를 치려는 것은 아버지와 형을 초왕에게 잃은 개인적 복수 
때문입니다. 지금 초나라를 치는 것은 오나라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자서는 희광 같은 인물이 지금이 초나라를 공격할 적기라는 사실을 모를 리 
없다고 생각했다. 오자서는 희광이 오왕의 세력이 강화되는 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에 초나라 공격을 반대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는 곧 희광이 
오나라 임금의 지위를 바란다는 뜻이었다. 오자서는 서슴없이 희광을 선택했다. 
희광을 오왕으로 만들려면 현재의 오왕은 죽어야 했다. 

이를 위해 오자서는 협객 전제(專諸)를 포섭했다. 그러나 오왕 암살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심 끝에 고안해낸 방법이 생선 요리인 홍소어(紅燒魚) 뱃속에 
칼을 숨겨 들여가는 것이었다. 요리사로 가장한 전제는 홍소어 뱃속에 비수를 
가지고 들어가 오왕 암살에 성공했다. 물론 그 자신도 현장에서 어육(魚肉)이 
되어 죽고 말았다. 이런 과정을 거쳐 왕위에 오른 공자 희광이 유명한 오왕 
합려(闔閭)였다. 


主君이 귀를 막으면…. 

킹메이커 오자서는 합려의 정치고문이 되었다. 합려는 즉위 3년이 되던 해 
초나라를 공격하려 했으나 오자서는 이를 반대했다. 잦은 전쟁으로 백성들이 
피곤하므로 당분간 전쟁을 피하자는 논리였다. 다시 3년이 지나자 초나라가 
공격해 왔으나 오나라는 이를 격퇴했을 뿐 반격하지 않았다. 
다시 3년이 지나자 오자서는 초나라 공격에 동의했다. 

그는 초나라의 속국인 당(唐)과 채(蔡)나라가 초나라의 지나친 요구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음을 알고 이들과 연맹을 맺은 다음 초나라를 공격한 것이었다. 
이 공격으로 초나라는 무너져 수도 영을 점령당했다.그때 초나라는 초평왕이 
이미 세상을 떠나고 소왕(昭王)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그는 수도가 점령당하자 
도망쳐 버렸다. 오자서는 초나라 평왕의 무덤에서 시신을 끌어내 300대의 매를 
치는 것으로 부친과 형의 원수를 갚았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은 아니었다. 오나라는 남방의 월(越)나라에 대비해야 했다. 
월족(越族)이 세운 월나라는 지금의 베트남 북쪽 
광둥(廣東)·광시(廣西)·구이저우(貴州)·윈난(雲南)성 부근인데 기원전 
496년에 월왕 윤상(允常)이 죽고 그의 아들 구천(勾踐)이 왕위에 올랐다. 오왕 
합려는 월나라가 더 강성해지기 전에 제압하기 위해 월나라를 공격했다. 그러나 
합려는 오히려 월나라 군사에게 기습공격을 당해 죽고 말았다. 
‘오월동주’(吳越同舟)와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유명한 고사를 만든 
두 나라의 악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합려는 죽기 직전 태자 부차(夫差)에게 
꼭 복수해 달라고 유언했고, 부차는 왕위에 오른 지 2년째 되는 해 월나라를 
공격하여 구천의 항복을 받아냈다. 

구천의 막료 범려는 부차의 태재(太宰) 백비를 뇌물로 매수해 월왕 구천을 
살려달라고 빌었다. 월왕이 보낸 선물과 미녀에게 녹아난 부차가 이를 따르려 
하자 오자서가 극력 반대하고 나섰다. 
“월왕 구천은 세력이 강해지면 반드시 오나라를 공격할 것입니다. 그때 
후회해야 때는 늦으므로 반드시 지금 멸망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부차는 오자서의 진언을 무시하고 구천을 살려두었다. 부차는 부왕 
합려와 달리 오자서보다 백비를 중용했고, 백비 또한 오자서를 제거하기 위해 
많은 음모를 꾸몄다. 
부차가 점점 오자서를 멀리하자 백비는 오자서가 제나라와 손잡고 오나라를 칠 
것이라고 무고했다. 부차는 오자서를 시험하기 위해 제나라로 출장보냈는데 
오나라가 월나라에 망할 것이라고 예견한 오자서는 제나라의 포(鮑)씨에게 
자식들을 부탁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부차는 백비의 무고를 사실로 믿게 
되었고 오자서에게 칼을 내려 자결하라고 명했다. 

오자서는 자결하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 
“내가 죽거든 나의 두 눈을 빼어 오나라 궐문 위에 걸어 두어라. 내 눈으로 
부차가 월나라에 멸망하는 것을 보고 말리라.” 
오자서의 예언대로 월왕 구천은 땔감나무 위에 풀섶을 깔고 자고, 짐승의 
쓸개를 맛보며 와신상담하고 있었고, 오왕 부차는 구천이 보낸 미녀 
서시(西施)에게 넋이 빠져 정사를 소홀히 하다 구천의 공격을 받아 패하고 
말았다. 죽음에 이르게 된 부차는 “지하에서 오자서를 볼 면목이 없다”고 
말하고 자결하고 말았다. 
합려는 오자서라는 인재를 잘 사용해 임금까지 되었지만, 그 아들 부차는 
부친의 신하를 홀대한 끝에 패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覇者가 되기 위해 원한도 접고 등용한다 

제(齊) 환공(桓公)이 관중(管仲)이라는 인재를 얻어 춘추시대 첫 패자의 영예를 
얻은 것은 인재 발탁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준다. 관중은 그의 친구인 
포숙아(鮑叔牙)와 관련해 깊은 우정을 뜻하는 ‘관포지교’(管鮑之交)라는 
고사성어를 남기기도 했다. 둘은 함께 사업을 했는데 관중이 항상 포숙아보다 
많은 이익을 가져갔으나 포숙아는 관중의 살림이 어렵기 때문이라며 이를 
당연시 여겼다. 

관중이 고향에서 무직으로 빈둥거리자 사람들이 비난했으나 포숙아는 그가 
무능해서가 아니라 아직 때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변호했다. 또 관중이 
전쟁터에서 도망쳐오자 그가 겁이 많아서가 아니라 고향의 노모 때문이라며 
감싸주기도 했다. 그래서 관중은 “나를 낳은 분은 부모지만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아다”(生我者父母, 知我者鮑叔)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 무렵 제나라는 왕위 계승 문제를 놓고 분쟁중이었다. 관중은 왕위 
계승권자였던 공자(公子) 규(糾)를 돕고 있었는데, 규의 이복동생 
소백(小白·환공)이 호시탐탐 그 지위를 노리고 있었다. 이에 관중은 소백을 
암살하기 위해 활을 쏘았다. 복부에 화살을 맞은 소백이 쓰러지자 관중은 
성공한 줄 알고 도망갔다. 그러나 사실은 소백이 복부에 차고 있던 
구대(鉤帶)를 맞춘 데 지나지 않았다. 

결국 왕위 계승 싸움은 규가 소백에게 죽는 것으로 귀결됐다. 소백이 즉위하니 
그가 곧 환공(桓公·재위 기원전 685∼643)이다. 관중과 함께 규를 따르던 
소홀(召忽)은 규가 죽자 주군을 따라 순사(殉死)했으나 관중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관중은 친구 포숙아의 추천으로 환공의 재상으로 발탁되었다. 포숙아의 
추천을 받은 환공은 관중의 등용을 망설였으나 천하의 패자가 되려면 꼭 필요한 
인물이라는 말에 과거의 원한을 씻고 등용한 것이었다. 

관중은 환공의 신임을 산 후 제나라의 국력 강화 계획을 추진했다. 그의 국력 
강화 계획이란 한마디로 ‘창고가 실해야 예절을 알고, 의식이 족해야 영욕을 
안다’(倉實而知禮節, 衣食足而知榮辱)는 것이었다. 요즘 말로 하면 국가경제가 
튼튼하고 국민경제가 부유해야 부강한 나라가 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관중은 황하(黃河) 하류에 자리잡고 있는 제나라의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소금 생산을 늘리고 매매되는 소금에 세금을 붙였다. 

춘추시대의 내륙 국가들은 제나라의 소금을 수입하지 않을 도리가 없어 많은 
이익을 남길 수 있었다. 제나라는 이 돈으로 쌀을 사 쌀이 귀한 다른 나라에 
판매하니 국부가 증대했다. 
또한 관중은 강력한 군사력이 강국의 기본 요건이라고 생각해 
오가병제(五家兵制)를 실시했는데 이는 일정 규모의 상비군을 둔 것이었다. 
이와 별도로 한 가구에서 병사를 한명씩 차출해 조직한 3개 민병군을 두어 
평시에는 농사를 짓고 전시에는 상비군의 지휘를 받아 전투에 임하게 했다. 
이를 통해 평시에는 군사비를 줄이면서도 전쟁시에는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강군을 지닐 수 있었다. 

관중은 이처럼 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으로 환공을 춘추시대 최초의 패자로 만들 
수 있었다. 여기에는 한때 자신을 암살하려던 인물을 과감하게 등용한 환공의 
그릇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특기할 것은 관중이 다른 나라를 군사적으로 정복해 환공을 패자로 만든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외교적 방식으로 환공을 패자로 만들었는데 그 방법 중 
하나가 회맹(會盟)이었다. 회맹이란 제 환공의 주재 아래 각국의 제후들이 한 
자리에 모여 회의를 하는 것으로, 이는 곧 제 환공의 패권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이런 방식 때문에 관중은 공자의 칭찬을 받기도 했다. ‘논어’ 
‘헌문’(憲問)편에는 공자의 제자 자로(子路)가 “환공이 공자 규를 죽이자 
소홀은 따라 죽었으나 관중은 죽지 않았으니 어질지 못한 것 아닙니까”라고 
비난하는 구절이 나온다. 공자는 이에 대해 “환공이 제후들을 규합하는 데 
군사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관중의 힘이었으니 누구의 어짊이 그의 어짊과 
같겠느냐?”고 관중을 옹호했다. 

자공(子貢)이 다시 “관중은 자신이 주군으로 모시던 규를 죽인 환공을 
도왔다”고 비판하자 공자는 “관중이 환공을 도와 패자가 되게 하고 천하를 
통일해 바로잡았기 때문에 지금도 백성들이 그 혜택을 받는 것”이라며 “어찌 
필부필부(匹夫匹婦)들이 조그마한 신의를 위해 알아주는 사람 없이 스스로 
개천에서 목매어 죽는 것과 같겠느냐?”며 관중을 옹호했다. 말하자면 관중은 
개인 규나 개인 소백(小白:환공)에게 충성한 것이 아니라 천하 질서와 
백성들에게 충성한 큰인물이라는 뜻이다. 

관중의 행적과 사상은 ‘관자’(管子)에 전해지는데 그의 사상은 제자백가 중 
법가(法家)의 선구자로 꼽힌다. 후술하겠지만 법가는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상이었으니, 관중은 생시에는 춘추시대를 처음 
제패하고 사후에는 사상으로 전국시대를 제패한 셈이다. 


 
생존·승리를 위해 끊임없이 개혁한다 

춘추전국시대의 군주들은 생존과 승리를 위해 개혁을 서슴지 않았다. 개혁하지 
않으면 도태되는 시대였던 것이다. 그래서 개혁정치가들이 등장하는데 그 중 
한명이 정(鄭)나라의 자산(子産)이었다. 정나라는 강국 진(晉)과 초(楚) 사이에 
끼어 그 입지가 매우 불안했다. 게다가 제(齊)와 진(秦)도 정나라를 노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나라는 귀족들 사이에 극심한 내분을 겪고 있었다. 
정자산의 부친 자국(子國)도 이런 귀족들 사이의 암투에 휘말려 살해되었다. 

기원전 543년 정나라의 재상에 오른 자산은 정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기 위한 
개혁정치를 실시했다. 그러나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한 성읍(城邑)을 정나라 
대부 백석(伯石)에게 헌상한 것이었다. 이 조치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자 
그는 “나라 안 명문대족의 안정과 화목을 얻지 못하면 나라가 안정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자산은 많은 기득권을 가진 귀족들을 적으로 돌리기보다 
회유하려 했던 것이다. 

자산이 상하간의 위계질서를 철저하게 지키도록 한 것도 이런 귀족층 
회유조치의 하나였다. 또한 이는 군주권 강화의 일환이기도 했다. 당시는 
신분질서가 무너져 제후의 예법을 일개 대부가 도용하는 현상까지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또한 자산은 약소국으로서 강대국과 맞서는 것은 위험하다는 
생각에서 정나라의 체면을 유지하면서 대국을 섬기는 현실주의적 외교정책을 
수행했다. 

이런 조치들을 통해 위계질서가 어느 정도 잡히자 자산은 대대적인 내정개혁에 
착수했다. 그는 성읍과 농촌의 토지구획을 정리했으며 이에 맞추어 농민들의 
노동력을 재배치했다. 놀고 먹던 성읍의 귀족들에게도 직업을 갖게 했다. 이런 
강도 높은 개혁을 시행한 지 1년쯤 지나자 많은 사람들이 자산이 벼슬과 전답을 
빼앗아 갔다며 그를 원망했다. 

그러나 자산은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개혁을 추진해 나갔다. 약 3년의 세월이 
흐르자 개혁의 성과가 나타나고 원망은 칭송으로 바뀌었다. 정나라가 안정을 
찾게 되자 이웃의 다른 나라들도 정나라를 넘보지 못하게 되었다. 정자산이 
재상으로 있던 20여년 동안 정나라는 안정을 구가할 수 있었다. ‘사기’ 
‘정세가’(鄭世家)에는 그가 세상을 떠나자 백성들이 하나같이 부모를 여읜 듯 
슬퍼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의 예는 개혁이 화두인 우리 사회에 한 
참고자료가 될 것이다. 

춘추시대의 정자산이 점진적인 개혁정치가였다면 전국시대의 이리(李?)는 
급진적인 개혁정치가였다. 전국시대에는 
제(齊)·위(魏)·조(趙)·한(韓)·진(秦)·초(楚)·연(燕)의 일곱 나라가 
전국칠웅(戰國七雄)이 되었다. 이리는 그 중 위나라에 속한 인물이었다. 
위나라는 춘추 말기 진(晉)나라가 삼등분될 때 그 북쪽을 차지한 나라로서 
첫번째 제후는 위문후(魏文侯:재위 BC 445∼386)였다. 위문후는 누구보다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국내외의 많은 인재를 불러들였는데 그 중 한명이 
이리였다. 

관중과 함께 법가로 분류되는 이리는 과감한 개혁정책을 추진했다. 그 중 
하나가 관작의 세습을 폐지한 것이었다. 이는 정자산의 개혁방식과는 다른 
급진적인 것으로서 이리는 귀족들을 ‘음민’(淫民)이라고 비난하면서 음민은 
사회 발전에 방해가 되는 무용지물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위문후에게 음민에게 
주는 녹봉으로 사방의 재사들을 초빙해 나라를 부강하게 해야 한다고 진언했다. 

이리는 개혁의 요체는 경제력의 발전에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종래의 토지제도를 폐지하고 생산력을 최고로 높일 수 있는 토지제도로 
바꾸었다. 이런 토지개혁 정책은 생산성을 급속도로 확장시켜 위나라는 부강한 
나라가 될 수 있었다. 이리의 인재 초빙 방침에 따라 등용된 인물이 
오기(吳起)다. 오기는 무졸제(武卒制)라는 새로운 군제를 채택해 성과를 
올렸다. 무졸제는 군사 개개인의 전투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한 
제도로서 군사력 강화에 획기적이었다. 

이런 개혁정책의 성과로 위나라는 당시 강국 진(秦)나라와 맞붙어 낙수(洛水) 
동쪽 다섯 성을 빼앗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정자산과 이리의 예는 각 나라의 
사정에 맞는 개혁정책이 따로 있음을 말해 준다. 다른 나라에서 성공했다고 
우리나라에서도 성공하리라는 보장은 없는 것이다. 


儒家는 당대에는 실패한 사상이었다 

춘추전국시대는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시대로도 유명하다. 전통질서의 붕괴는 
전통적인 속박에서 벗어나 개인의 학식과 능력을 통한 신분상승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또 전쟁이 일상화된 이 시대는 우주와 인간에 대해 많은 사유를 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제자백가라 불리는 일군의 학자들이 나타났다. 제자백가는 
저마다 혼란한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는 저마다의 철학과 정치에 대해 
설파했다. 

공자(孔子:BC 551∼479)가 창시한 유가(儒家)는 당초 수많은 제자백가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송(宋)나라 몰락귀족의 후예라고도 알려지고 있는 
공자는 귀족 신분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제시한 현실 구제의 원리는 
‘주나라로 돌아가자’는 복고적인 것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현재까지도 
중국이 개혁의 진통을 겪을 때면 보수주의자로 비난받지만, 그는 주나라의 
질서로 돌아가는 것이 전쟁이 일상화된 춘추시대의 혼란을 극복할 수 있는 
방책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는 법률과 형벌에 의한 통치에 반대하고 주나라의 
규범인 ‘예’(禮)가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기본원리라고 주장했다. 그는 
군자(君子)의 덕목 중 특히 ‘인’(仁)을 강조했는데 이것이 그의 도덕철학의 
중심개념이었다. 

맹자(孟子:BC 371∼289)는 공자가 제시하지 못했던 인(仁)을 실천할 수 있는 
도덕적 능력의 필연적 근거를 성선설(性善說)로 설명했다. 인간은 본성이 
선하기 때문에 사단(四端), 즉 
측은(惻隱)·수오(羞惡)·사양(辭讓)·시비지심(是非之心)을 가졌고 이 사단의 
발로인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맹자가 공자의 인을 계승한 데 비해, 공자의 예를 계승한 순자(荀子:BC 
298∼238)는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는 성악설(性惡說)을 주창했다. 그는 
맹자처럼 선천적인 도덕능력 대신 후천적인 개조의 가능성을 확신하였다. 그 
개조는 성인에 의해 확립된 예(禮)의 준수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러나 유가는 당대에는 실패한 사상이었다. 공자가 여러 나라를 주유했으나 단 
한군데에서도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없었던 것은 당시 제후들이 형식에 불과한 
주나라 질서로의 환원이 아니라 자신을 천하의 패자로 만들 수 있는 현실적인 
방책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현실에서는 법가(法家)가 승리할 수밖에 없었다. 유가가 
이상을 추구할 때 법가는 현실을 추구했다. 진시황을 도와 전국 통일을 
이룩하게 한 여불위(呂不韋)와 이사(李斯)는 법가의 진면목을 그대로 보여준다. 

여불위는 원래 위(衛)나라의 거상(巨商)이었는데 조나라 수도 한단(邯鄲)에서 
인질로 와 있던 진(秦)나라 소왕(昭王)의 손자 이인(異人)을 발견하고 그를 
임금으로 추대하기로 결심했다. 이인의 부친은 진소왕의 둘째 아들 
안국군(安國君)으로 20여 명의 서자가 있었으므로 이인에게 왕위는 먼 
이야기였다. 그러나 여불위는 안국군의 부인 화양부인(華陽夫人)이 한명의 
적자도 낳지 못한 점을 이용해 막대한 자금으로 화양부인을 매수해 이인을 
양자로 삼게 하는 데 성공했다. 


현실의 勝者가 역사의 승자는 아니다 

여불위는 이인이 자신의 애첩 조희(趙姬)를 흠모하자 그를 이인에게 줄 정도로 
그를 철저하게 돌봐주었다. 그런데 그때 조희는 이미 여불위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조희가 낳은 아들이 훗날의 진시황인데 그 부친이 
이인인지, 여불위인지를 놓고 아직까지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사마천은 
‘사기’ ‘진시황 본기’에는 이인의 아들이라고 적었으나 ‘여불위 
열전’에는 여불위의 핏줄이라고 적어 논란의 단초를 열었다. 

진소왕이 죽자 안국군이 왕위를 이었으니 그가 진효문왕(秦孝文王)이다. 그는 
1년간 복상을 마치고 정식으로 즉위한 지 사흘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여불위의 노력으로 태자가 된 이인이 뒤를 이었는데 그가 바로 
장양왕(莊襄王)이었다. 그 또한 3년만에 세상을 떠나고 조희가 낳은 정(政)이 
왕위를 이었으니 그가 진시황이었다. 여불위는 이인이 왕위에 오르자 
상국(相國)이 되고 문신후(文信侯)에 봉해졌다가 장양왕이 죽고 정이 기원전 
246년 왕위에 오르고 난 뒤에도 직책을 사임하지 않고 계속 가지고 있다가 
자신이 천거한 이사(李斯)와 진왕 정에 의해 제거되었다. 

이사는 초나라 사람으로서 순자의 제자였으나 세상을 다스리는 데는 법가가 
유용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여불위의 추천으로 진왕의 시종관이 된 이사는 
얼마후 여불위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 되었다. ‘사기’ ‘이사열전’은 
이사의 계략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진왕이 이사의 계략대로 각 제후국에 모사를 파견해 금력으로 움직일 수 있는 
명사들은 후한 선물로 매수하고, 듣지 않는 자는 예리한 칼로 죽여 군신을 
이간시켰다. 이렇게 한 다음 장수를 보내 공격했다.’ 
이사는 냉혹한 성격의 진왕 정과 손잡고 천하통일의 길로 나섰다. 진나라에 
인질로 와 있던 연나라 태자 단(丹)이 협객 형가(荊可)를 매수해 진왕을 
암살하려 하는 바람에 절대절명의 위기를 겪기도 했으나 진왕과 이사는 기원전 
221년 중국을 통일하는 데 성공했다. 진왕은 진시황(秦始皇)이 되었다. 

이처럼 현실에서는 이상을 추구했던 유가(儒家)가 패배하고 법가(法家)가 
승리했으나 유가 사상은 한나라 때부터 중국의 지배사상이 되어 현재까지 
동아시아 사회를 지배하는 사상으로 남아 있다. 현실의 승자는 여불위와 
이사지만 역사의 승자는 공자와 맹자였던 것이다. 더구나 현실의 승자 여불위와 
이사를 존경하는 사람은 없지만 공자와 맹자는 아직도 많은 존경을 받고 있으니 
어떤 측면에서 인생은 현실만 추구할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춘추전국시대는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물론 지금도 현실은 승리에 모든 
가치를 두는 책사들의 것이겠지만….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 목록][이 전][다 음]
키 즈 는 열 린 사 람 들 의 모 임 입 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