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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hobbes (& calvin)
날 짜 (Date): 1996년03월15일(금) 01시07분01초 KST
제 목(Title): 유고사태(번역) 마지막.



(약간 지루해져 가는 관계로 내용을 요약하는 형식으로 쓰겠습니다.)

밀로세비치의 등장과 분열.

세르비아의 코소보지방은 과거 세르비아 왕국의 고향으로써 세르비아인들에게는 

고향과 같은 애착을 가지는 고장이었다. 그러나 이 지방 주민의 90%이상이 

가난한 알바니아인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이것은 남아있는 세르비아인들에게는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세르비아는 과거 몇년동안 이 지방이 하나의 새로운 

공화국이 되거나 또는 알바니아와의 통합으로 다른 민족에게 뺏길것 같다는 불길한

예상을 했었다. 그리고 그럴것 처럼 보였다.

1987년 4월, 세르비아 공산당의 의장은 그가 참석하고 있던 코소보지방의 세르비아인

을 위한 공산당 당간부들과의 회의석상에서 분연히 뛰어 나갔다.  그는 알바니아계의

경찰이 세르비아계를 곤봉으로 패고있는 앞에 서서 세르비아인이 맞는 상황에 대해

좌시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이것은 세르비아에 있는 세르비아인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다.  그리고 슬로보단 밀로세비치는 망신창이가 된 공산당에게 다시한번 

권력을 가져다 줄수있는 기회를 포착했다.  그해말, 마침내 그는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세르비아인의 경제에 대한 불만을 돌리기 위해 밀로세비치는 모든 

적대적인 대중매체를 억압했다.  그리고 그는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경제적 

성공을 그들이 반 세르비아 운동을 펴고있다고 싸잡아 비난했다.    세르비아인들은

티토가 흐렸던 과거 대 세르비아왕국의 영광을 위해 분연히 그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경제문제를 개혁이 아닌 새로운 세르비아 건설로 만회하려 했다.

만약 밀로세비치가 티토와 과거 유고정권이 희석시키려 했던 공포를 다시 깨우려고 

했다면 그는 대성공을 거둔 셈이다. 그는 무조건적인 세르비아우선을 선언하고는

보즈보디나와 코소보를 병합했다.  현재 유고의 가장큰 비극은 밀로세비치와 같은

극단적 민족주의자들 손에 권력을 쥐어줬다는 것이다.  세르비아의 민족주의는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의 민족주의를 자극했다.  따라서 그다음은 전쟁이었다.

1989-90년 사이 철의 장막이 무너지고, 동유럽에서 시민혁명이 시작되자, 유고도 

또한 자유선거를 실시하지 않으면 혁명이 일어날것이라는것을 알아차렸다.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에서는 민족주의자들이 승리함으로써 독립이 기정사실화 

되었다.   20년전 비폭력 독립운동을 펼치던 Maspok세력은 붕괴되고 공산당도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전쟁밖에 없었다.

크로아티아 민족주의당(HDZ)은 과거 20년간의 잘못을 무작정 고치는 작업을 벌였다. 

과거동안 크로아티아정부에서 일하는 세르비아인의 수가 크로아티아내의 세르비아인

비율을 크게 상회하였다.  그들은 즉시 크로아티아인으로 교체되었다. 그리고 

크로아티아인은 로마문자를, 세르비아인은 키릴문자를쓰고 있는데 모든 지방에서의

키릴문자사용을 불법화했다.  그리고 불법화된 크로아티아기를 복권시켰는데

불행히도 이는 과거 세르비아인을 잔학하게 학살한 우스타샤정권의 깃발과 비슷했다.

모든 크로아티아내 세르비아인은 이제 과거 나찌치하의 유태인과 같이 되었다.

모든 신문,방송을 장악한 이들 HDZ는 세르비아가 주장한 바와같이 파시스트국가는 

아니었다.  

이렇게 되자, 세르비아에서는 우스타샤정권의 재등장이라며 종교적, 인종적인 

방법을 써서 크로아티아를  마구 비난했다.   세르비아 게릴라들이 

크로아티아 내에 생기게 되었고, 밀로세비치를 지지하게 되었다.

마침내 1991년의 더운 6월 어느날, 크로아티아가 독립을 선포한 직후 들끓는 

민족주의가 마침내 폭발했다.


민간인 말살 전쟁

게릴라가 갑자기 숲속에서 나타나서 마을을 쑥밭으로 만들고 증원군을 차단하고

명목상 분쟁을 중지시키기 위해온 유고 연방군 탱크는 사실상 세르비아 게릴라를 

방치하고,  크로아티아의 여러 세르비아계 마을들이 이런식으로 세르비아 게릴라의

손에 떨어졌다.  

먼저 유고연방군의 탱크가 포격으로 마을의 저항력을 약화시키고, 다음 게릴라들이

마을로 들어가 자신들과 수십년동안 친하게 지내던 같은 마을 이웃인 

크로아티아인들을 죽이거나 몰아내고 집을 부수고는 세르비아인들을 이주시키는 

이러한 전쟁이 계속 반복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민간인들의 피난행렬이 탱크의

포격으로 공격당했다.  크로아티아인이 돌아올 집을 완전히 폐허화시키는 것이었다.

현재 유고사태의 핵심은 이것이 전쟁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른말을 쓸수가 없어서

전쟁이라고 할뿐이다.  전쟁은 무장한 두개이상의 세력이 민간인을 포함한 

상대의 무장세력과의 교전인데, 이것은 순전히 상대의 무장세력이 아닌  민간인 

학살을 위한 전쟁이다. 

당연히, 크로아티아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공격의 크기는 세르비아의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크로아티아 내의 유력 세르비아인들이 암살되고 

집과 가게가 공격당했다.  또한 마을에 사는 세르비아인들이 끌려나가 총살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르비아의 만행에 비해서 크로아티아의 그것은 너무 

미미하다.  

Cyrus Vance가 1992년 불안한 평화를 만든 직후부터 크로아티아의 1/3을 장악한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의 무장세력은 UN군을 경계로 대치했고 지금도 그렇다. 

그러나 분쟁은 그때가 시작이었다.

크로아티아가 U자를 거꾸로 한 모양이라는걸 상기하기 바란다. 그 거꾸로 된 

U안에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있다. 이나라는 많은 국경을 세르비아와 접하고 

있다.  인구 4백 20만정도인 이 공화국은 이슬람교도,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의 비율이 4:3:2정도되는 공화국이다.  이 공화국안의 크로아티아인과 

무슬림들은 밀로세비치의 소수민족말살정책을 보고 자기들이 세르비아인에 비해 

소수라는 생각을 떨칠수가 없었다.  따라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독립하려고 

노력했지만, 이것은 쉽지 않았다.

세르비아와 밀로세비치가 이 조그만 공화국을 봤을때 그들은 단순히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내의 세르비아인들이 세르비아를 위해 게릴라활동을 

하는것만 본것이 아니라 구 소련의 기습을 대비해 안전하게 중앙에 구 유고시절에

세워놓은 대포공장과 이것이 가지고 있는 많은 탄약고와 비축품, 그리고 무기공장을 

보게 되었다.  따라서, 1992년 3월 JNA(유고연방군:사실상의 세르비아군)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로 진격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내에서의 민간인 학살은

크로아티아에서의 그것보다 더 끔찍했다.  

만약 당신이 아주 소수의 병력이 있을때 그 많은 무슬림들과 크로아티아인들을 몰아

내고 싶을 때 어떻게 할것인가 ? 적의 군사들과 싸워 승리한후 많은 우리편 

사상자를 만들것인가 ?? 물론 아니다. 답은 내가 튼튼히 만들어 놓은 단단한 

요새에서 사정거리안에 있는 적의 민간인을 무조건 쏘고 또 쏘는 것이다. 이럼으로써

우리편 병사를 죽이는일 없이 적의 민간인들이 도시를 떠날수밖에 없도록 공포심을 

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사태의 실체이다.

또한 이것이 바로 인종청소이다.  

(많이 생략했음)


결론

이 사태는 영토 확장을 위해 민간인을 죽이는 전형적인 예이다. 또한 비열하고 

수치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우리가 민족주의를 대하는 태도는 1930년대 영국수상

챔벌레인이 히틀러와의 회담결과인 협정문을 들고 [평화는 우리의 손에 있다.]라고

할때와 다르지 않다. 

(이하 생략..)


우리는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모르나 여전히 살아 가고,
   우리는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나 여전히 살아가고,
      우리는 산다는게 뭔지 모르지만 여전히 살아간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   -  고대 로마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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