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1년 10월 1일 월요일 오전 05시 25분 08초 제 목(Title): 진중권/ 정의와 힘 출처: 조선일보 독자마당 작성자 : 진중권 작성자ID : pierot 조회 : 790 추천 : 106 작성일 : 2001-09-30 [문화] 정의와 힘 정의와 힘 하나의 담론은 종종 참/거짓의 인식론적 게임이기 이전에 현실에서 생성되는 힘들의 관계의 표현이다. 담론의 진리성이나 정합성 이전에 그 바탕에 깔린 '의지'를 읽는 전통은 니체에게서 비롯된다. 칼 마르크스 역시 <도이치 이데올로기>에서 당시 독일사회에서 통용되는 담론들의 바탕에서 '계급이해'를 보았다. 프로이트는 의식의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게임의 바탕에 무의식적 '욕망'이 깔려 있다고 보았다. '주체의 죽음'을 운위하는 탈근대의 사상이 니체, 마르크스, 프로이트에게 의뢰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어쩌면 인간은 데카르트가 말하는 주체, 즉 사유하는 존재가 아닌지도 모른다. 내 머리로 판단하고 내 몸으로 행동하는 것은 내 의식이나 내 몸 밖에 있는 어떤 힘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의지일 수도 있고, 계급일 수도 있고, 무의식일 수도 있다. 니이체, 마르크스, 프로이트. 이 세 사람의 담론분석을 관통하는 가장 큰 질문은 이것이다. "그들은 무엇을 원하는가?" 현실이란 물질적 힘들이 충돌하여 일으키는 다양한 사건의 연속이다. 개인적인 힘이든, 집단의 힘이든, 현실은 이 다양한 힘들이 시시각각 변화하면서 만들어내는 벡터로 볼 수 있다. 이 물질적 힘들이 담론이라는 관념의 영역으로 올라올 때에는 대개 보편이익의 외양을 띤다. 이 보편성 요구는 대개 허위의식에 불과하기에, 담론의 세계에서 논쟁은 대개 보편성의 가면 뒤에 숨은 특수이익을 들추어내는 데에 집중된다. 이것이 고전적인 이데올로기 비판의 방법이다. 말하자면 이런 종류의 투쟁에서 관건을 이루는 것은 상대의 논리 속에서 특수이익과 보편이익이 어긋나기 시작하는 지점을 정확히 지적하며 대중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그들은 그 말로써 무엇을 원하는가?" 힘과 정의 우리가 사는 현실 속에도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여러 계급, 계층, 집단들이 존재한다. 이들을 모두 만족시켜주는 절대적 보편성이란 실은 존재하지 않을 게다. 가령 프롤레타리아의 특수이익이 결국은 인간 일반의 보편이익과 합치한다고 주장했던 마르크스주의 실패를 목도한 오늘날, 그 누구도 감히 자신의 이해가 보편이해를 대변한다고 주장하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편성'에의 호소 없이는 담론 자체가 존립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보편성의 요구는 한갓 폭로되어야 할 허위의식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바로 이 보편성 요구가 여러 다롬들 사이에 토론과 논쟁을 가능하게 해줌으로써, 힘과 힘의 물리적 충돌을 합리적 담론의 세계로 승화시켜주는 것이다. 특수한 '힘'과 보편적 '정의'의 요구. 담론은 이 두 요소로 이루어진다. 힘 없는 정의는 무력하고, 정의 없는 힘은 위험하다. '힘'을 내세워 '정의'를 부정하는 것은 파시즘, '정의'의 이름으로 '힘'을 무시하는 것은 무력한 패배주의일 게다. 여기에서 사회적 언어게임을 바라보는 두 개의 관점이 성립한다. 하나는 독일에서 힘을 얻고 있는 근대적 의사소통이론(가령 하버마스)이고, 다른 하나는 프랑스 사상가들이 주장하는 탈근대적인 권력이론(가령 푸꼬)이다. 의사소통이론이 정의라는 '이상'의 실현을 목표로 삼는다면, 권력이론은 '정의'의 미명하에 행해지는 놀이 바탕에 깔린 냉혹한 힘의 '현실'에 주목한다. 논증의 방식도 다르다. 전자가 규범적이라면, 후자는 계보학적이다. 즉 전자가 보편적 규범을 세우는 데에 주력한다면, 후자는 보편적 규범의 족보를 파헤쳐 그 허위를 폭로하는 데에 관심이 있다. 의사소통이론이 합리주의의 전통 위에 서 있다면, 후자는 철저한 니체적 유물론의 바탕 위에 서 있다. 그렇다면 합리주의적인 유물론은 불가능한 것일까? 내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하버마스가 설정하는 이상적 담화상황이란 '마찰 없는 평면의 가정'에 불과할 뿐이다. 그것은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게임을 설명하는 데에는 별로 적절하지 않다. 그의 틀 속에는 의도적으로 의사소통을 왜곡하는 이들을 담화상황으로 끌어들일 구체적인 방법론이 결여되어 있다. 반면 푸꼬의 방법에는 의사소통의 배후에 숨어서 그것을 왜곡시키는 힘들을 충격적으로 보여주는 미적 효과가 있다. 하지만 '권력'이란 말이 거의 형이상학적 범주가 되어, 부정적 권력과 긍정적 권력을 가르는 최소한의 이론적 장치도 결여되어 있다. 그리하여 그의 권력비판은 종종 '발생론적 오류'에 빠지곤 한다. 권력이 작동하는 것은 우리에게 권력의 계보학적 비밀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담론, 세론, 습속 "한 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라는 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종종 도저히 존재론적으로 보수적일 수 없는 집단이 외려 그 사회에서 가장 보수적인 견해를 대변하는 기현상(?)을 목격한다. 지배는 물리력을 이용한 강제를 통해 이루어질 수도 있지만, 그 이전에 담론을 통한 설득에 기반하여 유지되는 법이다. 아마 하버마스는 이 상황을 고전적 혁명이 아닌 의사소통구조의 개혁을 통해 타개하려 했던 것이리라. 그가 '의사소통이론'의 형태로 사적 유물론을 언어학적으로 재정식화하려 한 것은 그 동안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이루어진 지배의 패러다임의 변화를 반영한 것이리라. 오늘날 조야한 물리력의 위협을 통한 권력유지는 낡은 것이 되었다. 그 대신 신문, 잡지, 방송을 통해 의사소통의 구조를 왜곡시키는 것이 권력유지의 방식으로 선호되고 있다. 하이덱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우리의 언어게임을 지탱해주는 바탕으로서의 '세론'(Gerede)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모든 수학적 명제가 결국은 정리와 공리의 수준으로 내려가 자기의 정당성을 입증하듯이, 세간에 떠도는 세론은 그 보다 추상의 수준이 높은 담론이 자기 정당성을 주장할 때 의뢰하는 준거가 된다. 보수주의 이데올로기가 유지되는 것은 바로 이 대중들 사이에서 오가는 세론 덕분이다. 시민혁명 당시의 혁명가들에게 천부인권을 누릴 자격이 있는 '인간'은 당연히 '유산계급의 백인남성'이었다. 이것이 바로 세론이 가진 보수성이다. 사실 우리 사회의 보수성의 가장 깊은 바탕을 이루는 것은 바로 대중들 사이에서 오가며 떠도는 얘기들 속에 있는지도 모른다. 가령 정치적 독재, 가부장독재, 성차별, 지역차별, 외국인 차별을 생각해 보라. 그 누구도 '담론'의 영역에서 이를 노골적으로 주장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세론 속에, 즉 대중의 일상적 담화 속에 분명히 존재한다. 피에르 부르디외는 '습속'(habitus)에 관해 언급한 바 있다. 사실 '세론'이란 단지 가정에서, 직장에서, 거리에서, 술자리에서 혹은 택시 안에서 오가는 '빈소리'로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행동하는 방식, 특히 타자와 관계를 맺는 방식 속에 물질적 형태로 존재한다. 보수성은 머리 속에만 기입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습속이라는 형태로 인간들의 몸 전체에 기입되는 것이다. 보수성의 집요함은 논리의 튼튼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이 습속이라는 몸의 보수성, 즉 관성의 힘에서 비롯된다. 가령 우리 사회의 습속을 이루는 군사문화의 허구를 논파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습속을 깨는 것은 한갓 논리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차원이 좀 다른 문제다. 먼저 몸 속에 기입된 습속이 있다. 그것은 입을 통해 '세론'의 형태로 제 정체를 드러낸다. 그러면 미디어는 '민심'이니 '여론'이니 운운하며 그 목소리를 여과 없이 증폭시킨다. 그리고 이는 미디어를 접한 대중들의 입에 회자되면서 다시 대중들의 몸 속에 깊숙히 기입되어 습속으로 굳어진다. 과거의 이데올로기 비판이 담론, 즉 이념의 추상적 표현에만 관심을 집중했다면, 오늘날의 이념 비판은 대중들의 입에 회자되는 '세론'과 그들의 몸에 의해 실천되는 '습속'으로 나아가야 한다. 세론과 습속이야말로 정말로 현실적인 힘을 가진 구체적인 이데올로기다. 이데올로기 비판은 담론, 세론, 습속, 이 세 가지 영역을 모두 포괄해야 한다. 나는 이를 '이데올로기 비판의 유물론적 원칙'이라 부르고자 한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이제까지 철학자들이 세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해 왔다. 이제 문제는 그것을 변혁시키는 것이다. 변혁의 대상은 몸 속에 기입된 흔적, 아니 그 이전에 몸의 집요함이다. 우연과 놀이 들뢰즈는 "우연"에 대해 이야기한다. 90년대를 풍미했던 '포스트모던'이라는 흐름은 적어도 우리 사회에서는 보수적으로 이해되고, 또한 보수적으로 실천되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실은 귀중한 유물론적 계기가 포함되어 있다. 세계의 다양성, 가변성, 우연성에서 추상하여 동일성, 불변성, 필연성에 주목하는 것이 관념론의 특징이다. 그에 반해 유물론은 자기 동일적으로 영원불변하는 필연적인 존재보다는 시시각각 변하는 물질의 흐름 속의 생성에 주목한다. 포스트모던의 사상에는 세계의 다양성, 가변성, 우연성을 바라보는 감각(aisthesis)의 회복이라는 지극히 유물론적 계기가 들어 있다. 그러나 우리의 소위 '유물론자'들은 이 구체성의 영역을 벗어나 검증이나 반증의 위험이 없는 높은 추상의 차원으로 올라가 발언하기를 좋아한다. 현실은 필연과 우연이 함께 어우러지는 '사건'의 세계다. 비판이 힘을 얻으려면 바로 이 사건의 세계 속에 들어와 계열화되어야 한다. 우연은 예측할 수 없기에 물론 거기에는 위험이 따른다. 하지만 이 위험을 받아들여 놀이를 계속하려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하여 디오게네스의 말대로 "우연에는 용기를..." '운명에 대한 사랑'(amor fati)란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기라는 숙명론이 아니다. 현실은 인간의 파악능력을 넘어서는 우연이 함께 만들어 간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 우연과 함께 즐겁게 놀이를 할 준비를 갖추는 것을 말한다. 중요한 것은 "주사위를 던지면 1에서 6까지의 숫자 중의 하나가 나온다"는 진리의 표명이 아니라, 실제로 주사위 놀이를 하는 것이다. 어느 때, 어느 곳, 어느 상황에서도 고루 타당한 말. 그것은 언어의 휴가일 뿐이다. 우리의 비판적 담론들은 현실과 맞물리지 못하고 공전하고 있다. 그것은 현실 속에 들어가 그 속의 힘들과 맞물려야 한다.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그 언어체계 속의 어휘들의 렉시콘을 외우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표현을 가지고 구체적인 상황들 속에서 놀이를 할 수 있는 능력의 획득을 말한다. 이는 담론의 영역에도 그대로 적용이 된다. 문제는 담론이 아니라 그것의 사용이다. 낱말의 의미가 그것의 사용에 있듯이 담론의 의의도 그것의 구체적 사용 속에 있다. 다양하게 변화하는 우연의 세계 속에서 닥쳐오는 문제들을 해결해내는 놀이. 우리에게는 이 유희의 정신이 필요하다. 별자리 벤야민이었을 게다. "산만한 지각"에 관해 얘기한 것이. 나는 이 개념을 인식론적 모델로 사용하고자 한다. 즉 현실의 구체적 사건에 개입하여 발언을 할 때, 그 발언들은 견고한 건축학적 구성이 아니라 개개의 건들을 비추는 단편들의 형태를 갖출 것이다. 여기서 나는 '잡글'의 복권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잡글'은 대개 우연한 계기에 쓰여진다. 먼저 우연히 사건이 발생하고, 이어서 청탁이 들어오고, 거기에 반응함으로써 비로소 잡글이 탄생한다. 여기서 글을 쓰는 과정은 저자의 의도에 완벽하게 지배되지 않는다, 거기에는 주사위(aleatorik)의 요소가 개재된다. 잡글들은 일관된 사고의 산물이 아니기에 첫눈엔 매우 혼란스러워 보인다. 쓰는 이조차 정신이 산만해진다. 그러나 바로 거기에 잡글의 가치가 있다. 그 안에는 저자의 주관적 의도를 무시하고 현실의 객관적 진행이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그럼로 어쩌면 이 산만한 지각의 단편들이 하나의 원근법적 시점에 입각하여 쌓아올린 체계보다 현실의 객관성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벤야민은 어디선가 '별자리'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다. 이 역시 나는 미학에서 끄집어내어 인식론적으로 사용하려 한다. 담론의 세계를 보라. 기사가 있고, 컬럼이 있고, 논단이 있다. 거기에 잡지가 있고, 방송이 있고, 정치권의 설전이 있다. 첫 눈에 이 모든 것은 카오스처럼 보인다. 밤하늘에 어지러이 널린 별들을 보라.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어지러이 널린 별들의 숲 속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고대인들은 밤하늘의 시각적 이미지를 구성하는 방안을 창안해 냈다. '별자리 그리기.' 담론의 스펙트럼을 그리는 것은 별자리 그리기와 같다. 그 중의 어느 별은 죽어서 사라지기도 하고, 별똥별이 되어 땅에 떨어지기도 하고, 허공을 헤매다가 다른 별에 그 자리를 내주기도 한다. 그때마다 별자리의 모습은 시시각각 달라진다. 담론의 분석은 정태적이 아니라 시간 축을 따라 변하는 스펙트럼의 형상을 그 역동성 속에서 포착해야 한다. 그 스펙트럼은 존재의 영속성을 갖는 따블로가 아니라 순간적으로 포착된 무상한 생성의 이미지, 즉 빛의 그림자 '마테르나 마기카'(laterna magica)다. 벤야민은 현대에 들어와 발생한 아이스테시스의 변화에 대해 얘기한다. 근대의 미적 체험이 조용한 관조의 모델이었다면, 현대의 지각은 '촉각적'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이 역시 나는 미학에서 끄집어내어 인식모델에 적용시키려 한다. 실제로 잡글은 촉각적이다. 그것은 대중을 자극한다. 그것은 대중의 몸에 직접 기입이 된다. 바로 거기에 잡글의 유물론적 성격이 있다. 가끔은 논리적 설득이 필요 없을 때가 있다. 아니, 더 이상 논리적 설득의 문제가 아닌 적나라한 힘의 표출을 볼 때가 있다. 이 힘을 받아치는 데에 가장 효과적인 무기는 역시 대중의 신체에 직접 다가갈 힘을 가진 글쓰기, 바로 잡글이다. 잡글은 쇼크를 주어 대중의 몸을 변화시킨다. 잡글은 대중과 함께 웃으며 과거와 명랑하게 작별하는 축제 분위기를 만들고, 이 축제 속에서 대중의 몸은 거듭난다. 폭력과 웃음 데리다는 <법의 힘>에서 "권위"의 신비스런 원천을 캐묻는다. 칼 슈미트와 벤야민의 논리의 동형성에 당혹스러워 하면서, 그는 끝까지 벤야민을 구원하려고 애를 쓴다. 신화적 폭력에는 무혈의 신적 폭력으로. 이 "무혈의 신적 폭력"이라는 말이 주는 섬뜩한 뉘앙스를 의식하면서도 그는 이 시대에 다시 벤야민을 구원하려고 애를 쓴다. 굳이 여기서 이 논의와 관계된 복잡한 법철학적 논의 속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다. 그저 나는 그 끔찍하게 들리는 벤야민의 테제를 이런 식으로 이해하기로 했다. 폭력에는 폭력으로. 권력이 행사하는 신화적 폭력에는 웃음의 폭력으로. 니이체는 가장 커다란 비판은 상대의 이상을 비웃어주는 것이라고 했다. 신적 폭력이라는 말속의 '신'은 조우커다. 대중을 공포 속으로 몰아넣는 협박과 위협의 폭력에는 그들을 이 공포로부터 해방시키는 희롱, 조롱, 우롱의 폭력을. 벤야민의 말대로 "가끔은 횡경막의 발작이 그 어떤 논리보다 더 깊은 지혜를 주는 법이다." 상대의 악에서 나의 정당성을 끄집어내는 것은 노예의 철학이다. 우리는 자신을 긍정하며 새로운 가치들을 창조해야 한다. 니체의 목표는 "한 사람의 긍정적인 철학자, 즉 징후들을 읽어내고 처방을 내리는 의사/해석자, 부정적인 가치들을 파괴하고 새로운 가치들을 창조해내는 비평가/예술가가 되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의 치유적 기능에 대해 얘기한 바 있다. 그의 말을 이데올로기의 영역으로 옮겨놓으면 '(허위의식으로서) 이데올로기는 문법적 착각의 문제'가 된다. 긍정적인 철학자는 사회의 담론 속에서 이 병의 징후들을 읽고 처방을 내린다. 나아가 이 병적 징후들이 만들어낸 부정적인 가치들을 파괴하고 새로운 가치들을 창조해낸다. 우리가 창조해야 할 새로운 가치란 리요타르의 말대로 "미적 에토스"라 부를 수 있을 게다. '정치를 예술화'하는 신화적 폭력에 맞서는 나의 방법은 '예술을 정치화'해야 한다. 아니, 이 대중문화의 시대의 어법에 맞게 '정치의 키치화'에 맞서는 '키치의 정치화'라 하는 게 낫겠다. 어쩌면 벤야민이 영화예술에 기대했던 혁명적 효과를 우리는 인터넷의 디지털 세계 속에서 기대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새로운 "미적 에토스". 그것은 가상과 현실 사이의 근대적 이분법을 철회하고, 예술에서 얻어진 미적 감각으로써 흔히 의식하지 못하고 넘어가는 우리 사회의 병적 징후들을 포착하고, 예술에서 얻어진 상상력을 그 부정적 가치들을 파괴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사회적 상상력으로 발전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