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1년 9월 28일 금요일 오후 06시 03분 38초 제 목(Title): 박노자/ 아프간 난민은 특종 화물? 출처: 한겨레 21 [ 박노자의 북유럽탐험 ] 2001년09월26일 제378호 아프간 난민은 특종 화물? 오스트레일리아 백인들의 인종주의를 노출시킨 ‘탐파호’사건과 테러참사의 관계는… 사진/ 노르웨이 화물선 탐파. 지난 8월26일 438명의 난민을 옮겨 실은 이 배는 며칠 만에 생지옥으로 변했다.(GAMMA) 노르웨이 사람들에게 인기있는 국가 중 하나는 오스트레일리아다. 천혜의 기후에 다양하고 이국적인 지형, 그리고 마음씨가 부드럽고 순박하면서 운동을 잘하는 사람들, 이것이 일반 노르웨이사람이 일상적으로 가지는 오스트레일리아관(觀)이다. 영어를 실습하려는 노르웨이 대학생들이 비행기로 2시간도 안 걸리는 이웃나라 영국보다도 하루 정도 비행기를 타고 가야 할 머나먼 오스트레일리아를 훨씬 더 많이 선택한다는 사실도, 이와 같은 친근하고 호의적인 이미지와 관련이 깊다. ‘민주와 인권의 나라’가 내린 청천병력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의 ‘축복을 받은 듯한 자연’을 동경함과 동시에 ‘민주 국가’이자 ‘문명국’인 오스트레일리아의 ‘민주성’과 ‘인권 존중’정신에 대해서 한치의 의심을 가진 적도 없다. 오히려 ‘선진적인’ 오스트레일리아를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의 민주·인권의 기수’쯤으로 생각해왔다. 그러나 최근의 ‘탐파’사건으로 인해 노르웨이사람들의 오스트레일리아에 대한 이미지는 획기적으로 바뀌는 듯하다. ‘선진성’과 ‘민주·인권’의 외피에 숨겨진 오스트레일리아 지도층과 주류 여론, 그리고 백인사회의 야만성과 인종주의, 인명 경시가 어느 정도 깊은지 비로소 새롭게 파악되기 시작했다. 나아가서 이번 ‘탐파’사건의 영향으로 좀더 많은 노르웨이인들이 고민하기 시작한 주제는, 제3세계의 피난민을 그토록 적대시하고 괄시하는 부유하고 오만한 ‘제1세계’가 과연 지구를 이끌어갈 자격이 있는가라는 것이다. 노르웨이와 오스트레일리아의 역사에 분명히 남을 이 ‘탐파’사건의 시말은 대략 다음과 같다. 지난 8월26일, 오스트레일리아로부터 싱가포르로 가던 노르웨이의 화물선 ‘탐파’는 갑자기 긴급 연락을 받았다. ‘탐파’ 근처에 인도네시아 국적의 배가 침몰되고 있으니 승객과 승무원들을 구조해 달라는 해양 구조청의 메시지였다. 조난 선박의 구조를 당연한 인륜적 의무로 생각했던 ‘탐파’의 선장은, 당장 오스트레일리아의 해양 구조청의 부탁대로 침몰 현장으로 항해하여 구조 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그때까지 아무도 몰랐던 것은, 침몰하는 인도네시아 선박에 타고 있던 43명의 어린이와 26명의 여성과 수많은 부상자가 포함된 438명이 주로 아프간 계통의 피난민들이었다는 사실이다. 구조·기능상 50명 이상을 태우지 못하도록 돼 있는 노르웨이 화물선 ‘탐파’에는 438명을 수용할 수도, 머나먼 노르웨이로 싣고 갈 수도, 음식이나 약, 물 등의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국제법과 해양법의 관례대로 조난자 구조를 우선시했던 ‘탐파’의 선장은, 싱가포르행을 당분간 포기하고 음식·식수와 약의 공급, 그리고 응급치료가 가능한 가까운 항구부터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구조된 피난민들이, 본인들의 애당초 목적지였던 오스트레일리아로 가지 않으면 집단 자살하겠다고 협박이 섞인 애걸을 하기 시작했다. 오스트레일리아 해양 구조청의 요청대로 구조 작업을 완수한 그가 ‘민주와 인권의 나라’로 인식했던 오스트레일리아의 협조를 기대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민주와 인권의 나라’인 오스트레일리아가 ‘탐파’에 대해 취한 태도는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국무총리 허바드(Howard)가, 굶어죽을 지경에 이른 피난민들이 오스트레일리아의 ‘안보’를 위협하는 양으로 그들에 대한 초(超)강경 방침을 밝힌 것이다. 비자 없는 그들이 오스트레일리아 땅에 한순간이라도 발을 내디디면 오스트레일리아의 ‘주권 침해’가 이루어지니 발을 내디디지 못하게 하겠다는 것이 이 방침의 이상야릇한 골자였다. 게다가 허바드 국무총리는, 이를 계기로 오스트레일리아를 ‘만만한 피난처’로 생각하는 일체의 잠재적 피난민들에게 교훈(?)을 주어야 한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기관총으로 총살해버려야지…” 주요 ‘공적’(公敵)인 아시아 피난민들에게 일거에 타격을 주어 본때를 보여주자는 것은, 허바드 정부의 공식 방침으로까지 정해졌다. ‘공적’이라는 게 굶어 죽어가는 남자와 만삭의 여자, 정서불안 증세가 있는 나약한 어린 청소년들로 구성된다는 사실은, 오스트레일리아 주권의 용맹스러운 ‘지킴이’를 자칭한 허바드에게 아무런 관심사도 되지 않았다. 선거가 임박하는 상황에서 그에게, 보수표의 잠재적인 이탈을 막고 우익적 심리를 자극해야 하므로, 아프고 배고픈 아시아인들은 일개의 ‘잠재적인 호재’로만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싣고 온 배가 미국이나 주요 강국이 아닌 노르웨이의 배인 만큼 별다른 정치적인 고려의 대상이 되지도 않았다. 처음에 오스트레일리아의 항구로부터 “오스트레일리아 아무 항구에 정박하여 구호물자 지급을 받으면 된다”는 언약을 받은 ‘탐파’의 선장은, 가장 가까운 오스트레일리아 영토인 크리스마스섬으로 배를 몰고 갔다. 그러나 정부의 방침이 크리스마스섬으로 전달되자마자, ‘탐파’는 구호물자는 물론 오스트레일리아 영해(領海) 진입 허가와 정박 허가까지도 거절당했다. 조난 선박에 입항과 구호물자 지급을 거절하는 것이 국제 해양법의 명백한 위반이라는 사실을 오스트레일리아 당국이 분명히 알면서도, 아시아 피난민들을 국제 해양법의 적용 밖의 존재로 본 셈이다. 음식도, 식수도, 약물도 모자란 ‘탐파’는, 며칠 안에 일종의 생지옥으로 변했다. 약 15명의 피난민들이 탈수증세와 기아상태로 실신하고, 그중 몇명이 빈사상태가 되기에 이르렀다. 절망에 빠진 몇명의 청소년들은, 아예 집단자살의 계획을 만들기 시작했다. 대형참사를 예상한 ‘탐파’호 선장은, 부득이하게 오스트레일리아 당국의 허가없이 항구 진입을 시도하여 긴급구호요청을 보냈다. 그러나 오스트레일리아 허바드 정부의 응답은 가장 냉소적인 관측자들마저도 경악에 빠뜨렸다. 8월29일, 오스트레일리아 공군 특공대는 ‘탐파’호를 불의에 습격하여 장악하였다. 피난민들은 오스트레일리아 해군 선박에 옮겨져 거기에서 ‘최종 처리’를 기다리게 되었다. 특기할 만한 것은, 오스트레일리아의 특공대 소속 의관(醫官)들이 빈사상태에 빠진 피난민에게 응급치료마저 시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시아 피난민들을 단순한 ‘작전의 대상물’이나 일종의 ‘특종의 화물’로 취급한 셈이다. 과연 이 정도의 ‘toughness’(강경한 태도)를 보여야 보수표 몰이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인가? 이 과정에서 북유럽사람들이 가장 놀랐던 것은, 오스트레일리아 대중의 반응이었다.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70% 이상의 오스트레일리아 국민들이 허바드 정부의 강경노선을 적극 지지하였다는 것이다. 거리에 나가서 보행자들에게 ‘탐파’호 사건에 대해서 의견을 물었던 기자들은, “아프간사람과 같은 모든 이슬람 쓰레기들을 기관총으로 깨끗히 총살해버려야지, 뭐가 말이 이렇게 많나”는 반문을 일부 보수적인 백인 오스트레일리아인들에게 들어 아연실색하기도 했다. 노르웨이 신문들의 비아냥과 자성 사진/ 오스트레일리아 하워드 총리. '백호주의' 전통을 가진 보수표를 의식해 난민들의 구조요청을 단호히 거절했다.(GAMMA) 노르웨이의 집권 여당인 노동당의 ‘이념 동지’여야 할 오스트레일리아의 야당인 노동당마저도 허바드 정부의 처리 방식을 지지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이민자문제에 관한 한 노동당도 매우 보수적이라는 것은, 오스트레일리아 노동당 관계자들의 변명에 가까운 설명이었다. 녹색당이나 사회주의 평등당 등 일부 비주류 좌익 정당들과 인권단체들은 소리를 높여 허바드의 반인륜적인 행각을 비판했지만, 그야말로 ‘사막에서 외치는 외로운 절규’였다. 악명이 높은 ‘백호주의 정책’이 철폐된 지 거의 30년이 다 된 현 시점에서도, 오스트레일리아 국민의 대다수인 백인들의 의식 저변에 인종주의와 이슬람에 대한 적개심이 어느 정도 두텁게 깔려 있는지, 그리고 그 정서가 정치적으로 얼마나 잘 이용되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탐파’사건으로 경악에 빠진 노르웨이에서는, 인류의 보편적인 박애 본능이 인종주의적인 편견에 가려진 오스트레일리아 국민들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노르웨이 정부가 유엔 등의 국제기관에 항의문을 제출한 것은 물론이고, 노르웨이 신문에서는 허바드의 ‘주권 위협론’에 대해 “200여년 전에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을 정복한 백인들이 원주민들의 주권을 존중했느냐?”고 비아냥거리면서 그 허구성을 지적했다. 차후의 노르웨이·오스트레일리아 관계에서, 오스트레일리아 정부와 국민들이 이번 사태에서 보여준 노골적인 인종주의와 생명경시문제가 커다란 장애요소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노르웨이에서는 자성의 목소리도 높았다. “문제의 피난민들을 노르웨이에서 어떻게든 받아들이자”는 일부 인권단체의 제안은, 정부나 언론에서 신중히 검토되지 않았다. 물론 거리상 당장 실현하기 어려운 제안임에 틀림없지만, 피난민들의 입국을 억제하는 경향이 있는 게 아니냐는 것이었다. 결국 문제의 피난민들이 뉴질랜드를 비롯한 몇개의 지역 국가들에 일단 수용되는 것으로 사태는 진정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물론 이 조치는 ‘탐파’호 피난민들의 고생의 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영구정착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9월11일 허바드 정권의 피난민 조치가 ‘불법’이라는 오스트레일리아 법원이 내린 판결은 피난민에 대한 때늦은 선처가 그래도 이루어질까라는 기대를 심어주기도 하는데, 아직까지 새로운 방침이 정해지지 않았다. ‘탐파’는 이제 원래의 예정대로 싱가포르로 향했다. 그러나 오스트레일리아 백인들의 인종주의적 정서를 노출시킨 이번의 사건이 남긴 상흔은 크다. 결국 사경을 헤매는 제3세계 인간들을 태연하게 따돌릴 수 있는 오만한 제1세계가 분노와 증오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사가 아니겠는가? ‘탐파’사건에서 보인 백인사회의 비인간적인 정서들을 고려하면 9월11일 미국에서 대형참사를 저지른 자살 테러리스트의 맹목적인 반(反)서방 증오심이 어떤 것인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상층부를 이루는 국가들이 오만하고 대다수인 하층부 국민들의 분노와 증오를 불러일으키는 반인륜적인 행위를 자행하고 있는 현실에서 앞으로 세계 체제의 앞날이 밝을 수 있는지 의문이다. 박노자/ 오슬로 국립대 교수·한국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