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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쓴 이(By): Convex (헐Hull歇)
날 짜 (Date): 1994년03월29일(화) 13시08분12초 KST
제 목(Title): 역사학계의 현실- 세미나 발표

심준학님의 글을 옮깁니다.


 한민족의 원형을 찾아서  ()
 제목 : [역사]역사학계의 현실-세미나 발표글
 #153/153  보낸이:심준학  (shimjk  )    03/28 10:02  조회:11  1/22


  
              ***  글 하나 ***                 

<<< 들어가며 >>>                
        
 일제시대의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사학자인 박은식 선생은 "나라는 망해도 민
족은 망하지 않아야 하며 민족이 망하지 않기 위해서는 역사 잃지 않아야 
한다"라고 말하였다.
 역사라는 거대한 수레바퀴는 한순간의 쉼도없이 지금도 돌고 있으며 우리는
 그 한부분을 채워가고 있다. 역사는 단지 과거의 흘러간 것이 아니다. '역사
는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한 E.H카아의 말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을 있게 하며 우리들이 생활하고 느끼며 접하는 모든 것에 투영되어 숨쉬고 
있는 것이다. 바로 민족의 역사에는 민족의 번영과 영광, 시련과 애환이 깃들
어 있다. 

  그렇기에 올바른 역사정신을 간직하고 보존한다는 것은 민족의 장래와 존망
을 결정하는 중지대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것은 민족의 주체성, 즉 민
족의 자각을 대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민족의 올바른 역사와정신을 가지고
 있는가?
 신라의 망굼 반통일 이후로 부터 시작된 사대주의와 외래사상은 일만년 역
사속에 찬연했던 민족의 문화와 정신을 왜곡하면서 그 모습을 달리하며 오늘
에 까지 이르러 우리의 정신을 병들게 하고 있다. 또한 이 땅을 강제점령한 
일본제국주의가 이 민족을 영원한 속국으로 만들기 위해 왜곡, 날조한 민족의
 역사와 정신을 청산하지 못한채 오히려 그러한 사실조차 모른채 그대로 답습
하고 있으며 해방이후 범람하기 시작한 서구의 퇴폐적 물질문명과 외래사상의
 폐해는 민족역사와 정신의 근저까지 흔들어 놓았다. 

 이제 세계사의 흐름을 바라보면서 상처투성이의 억눌려 왔던 민족의 역사와
 정신을 올바로 정립하고 계승, 발전하고 오늘에 재조명하여 새로운 민족문화
를 창달하여야 한다는 사명감이 이 시대 젊은 청년학우들에게 있다고 하겠다. 
        
  1. 일제의 민족문화말살과 
     민족역사의 왜곡

  {먼저 조선 사람들의 자신의 일.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하라. 그럼으로
써 민족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그들의 조상과 선인들의 무위, 무능, 
악행을 들추어내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쳐라. 조선인 청소년들이 그들의 부
조들을 경시하게 하여,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라. 그러면 조선인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에 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게 될 것이며,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때 일본의 사적, 일본의 문화, 일본의
 위대한 인물들을 소개하면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일본이
 조선을 <반쪽(半)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인것이다}

----------  일제때인 1922년 조선총독이 조선인을 반쪽일본인으로 
             만들기 위한 교육시책

  일제는 위와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악랄한 정책을 이행했는
데 대표적인 예로 전통문화와 역사의 말살을 꼽을 수 있다.
 
  일제는 식민정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민속 조사를 실시하고 우리
의 민속신앙들을 미신으로 몰아세웠다. 특히 동제를 중점적으로 탄압했는데 
촌산지순의 연구에 의하면 동제는 일본의 신도와 공통성을 지니며, 여러가지
 고대문화를 보존하고, 현실적으로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불러들이는 기능을
 할 뿐 아니라, 민중심성을 개발하는 가장 으뜸가는 향토 오락이며, 성씨별 
분열을 막고 이를 통합하는 기능을 지니고, 마을 사람들의 심신을 정화시켜 
주기도 했던 것이다. 이러한 기능들은 일제의 반일본화작업에 있어 방해요
소가 되었기 때문에 다각적인 탄압을 진행하였다. 경찰국에서는 중추원시정연
구회의 연구만 자문받아 무녀 취체 법규를 제정하고 무당들을 경신 단체에 가
입시키는 한편, 강력한 취체 행정으로 이를 금압하고, 학무국에서는 신사.신
도 정책을 펴나가 각급학교 학생들에게 신사 참배를 의무화시켰으며, 사회과
에서는 우리의 민속신앙을 미신(미신이라는 말은 이때부터 쓰이기 시작함)으
로 간주하는 사회 교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의 사서20여만권의 소각과 더불어 시작된 조선사의 편찬은 당시의 조선
인들로 하여금 소위 {공명.정확}한 새로운 사서를 읽혀 조선인에 대한 동화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이루어 졌다. 즉 {공명.정확}한 사서의 편찬을 위해
 사료가 필요하다는 구실로 중추원을 앞세워 전국적인 사료수색을 감행하였는
데 1차적으로 1910년 11월 부터 다음해 12월까지 총 5차례에 걸쳐 37년까지 
이루어 졌고 압수대상 서적은 단군관계 조선 고사서, 조선지리, 애국충정을 
고취하는 위인전기.열전류 및 <<미국의 독립사>>까지 포함되었다. 
이들 사서중에는 조선세종때부터 단군관계사서를 수집하여 장서각 및 규장각
에 보관하였다는 기록을 보아 귀중한 단군관계 고사서가 많았으리라 추측 된
다. 조선사 편찬시 상당수의 조선인이 참가하였는데 여기에는 이병도, 신석호
, 최남선, 권중현, 박용구, 이완용, 박영효 등이 있다. 다음에 다시 서술하겠
으나 우리는 이병도씨가 이 작업에 참가하였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조선사의 성격과 구성 내용등을 살펴보자. 일제의 식민사관을 성립
시키는데는 3대요건이 필요하다. 그 첫째가 상고사와 국조의 부정이 둘째가
 동양사의 주체였던 한민족의 역사를 한반도 안으로만 압축해 버리는것 마지
막 세째가 한국 민족은오늘날까지 제대로 완전한 독립을 해본 응 없는 주인
도 없고 뿌리도 없는 유랑민으로서 무능하고 부패하고 민족 분열을 일삼는 망
국근성의 민족인 것처럼 자타가 공인하도록 하는 것이다.조선사는 위의 요건
을 충실히 따랐고 또 단군조선의 말살에 지대한 관심을 보여왔던 당시 일본의
 가장 악질적인 어용사학자 이마니시류(今西龍)같은 자를 중추 인물로 세움으
로써 그 의도가 명백하다고 할 것이다. 시대구분에서도 위와 같은 의도가 엿
보이는데 1916년 1월의 회의때 결의한 시대구분인 상고삼한.삼국.통일신라 등
이 1923년 1월 8일 제 1차 위원회 회의에서 삼국이전.삼국시대.신라시대로 1
925년 10월 8일 제 1회 위원회때는 신라통일 이전.신라통일시대로 압축되었다
. 내용상에 있어서 위와같은 의도는 확연히 들어 난다. 몇가지 살펴보면 조선
의 반도적 지리요건으로 인해 독립이 불가능 하다는 점(반도북부--중국의 식
민지, 반도남부--임나 일본부) 조선역사는 위만 조선으로 부터 시작되었다는
점 조선인은 자립, 자치 능력이 없다(당쟁.반란의 의미 확대) 조선의 조정은
 동학란 때문에 뺙ざ窄 불러 들여 왔으나 일본이 처음 무찌르자 합방해 주
기를 원하므로 합병하여 조선인 일본 천황의 신민으로 잘 살게 되었다라는 등
이 있다.  

2. 오늘날 우리의 사학계

  위와 같이 일본의 의도가 너무도 뻔한 조선사의 편찬은 오늘날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은 커진다. 광복 후 출판된 권위
있는 역사 사전마저 {<조선사>가 비록 일본의 식민통치 아래 유화정책으로 된
 것이기는 하나 색인이 쓴 사료의 이용을 위해서는 많은 편리를 준다}고 망
발을 늘어 놓고 있고 당시 조선사편찬에 참가한 이병도씨(今西龍의 제자)는 
해방 후 사학계의 거두로 우뚝서게 되어 수많은 제자 양성과 더불어 식민사학
의 전파에 지대한 공헌(?)을 세웠다. 현 사학계의 실태와 문제점을 보자. 현
사학계의 주도권을 쥔 자들은 모두 식민사학 1세대인 이병도씨의 제자들로서
(물론 고려대학교에서 후학들을 가르쳤던 신석호씨도 있지만 일찍 타계하였음
) 제 2세대라고 꼽으면 서울대학교파로 고병익, 천관우, 이기백(한림대 한국
사 교수), 차하순, 한우근, 김철준, 김원용씨 등이 있고 비서울대파로 김정배
, 유원동, 변태섭씨 등이 있다. 제3세대로는 혜성같이 나타나 매스컴의 각광
을 받고 있는 동국대학교 교수 이기동씨가 있다. 우선 이들이 저서나 강연회
 등에서 한 발언들을 보면 민족사학에 조금이라도 눈이 뜬 사람이라면 분노가
 먼저 치솟아 오를 것이다. 1976년 발표한 <<한국고대사 연구>>라는 책에서 
만리장성을 우리나라 황해도 수안에서 시작되었다는 궤변을 늘어 놓은 식민사
학의 거두 이병도씨는 몇해전 타계를 하였고 죽기전 친구의 설득으로 조금이
나마 뉘우치고 세상을 떠났다. 다음으로 유명한자는 이기백 교수가 있다. 이
기백교수는 한국사 신론 서문을 <한국사는 아시아 대륙의 한 끝에 붙어 있는 
조그마한 반도의 역사다>라고 시작하면서 그의 학문적 본질을 유감없이 보여
주고 있다. 심각한 것은 한사군을 한반도 안에 끌어다 서술한 <<한국사 신론
>>같은 이자의 책이 영어로 번역되어 외국인에게 까지 한국사를 그릇 인식하
게끔 만들고 있다. 87년 6월 8일자 도아일보의 "국사교과서 개편방향을 보고
"라는 제하의 그의 글을 보자 
"....... 물론 필자 개인의 의견을 말한다면 불만스러운 점이 전혀 없는 것만
은 아니다. 예컨데 고조선을 문화권이 아닌 국가로 보는 경우에, 초기에는 요
녕 지역이 그 중심지였다는 것은 아직 증명되지 않은 하나의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제왕운기에 그렇게 적혀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나, 필자가 우둔한 탓
인지 아무리 읽어봐도 그러한 대목을 발견할 수 없으니 답답한 일이다. ....
." 이씨는 그의 종래의 주장대로 고조선의 영역이 대동강 유역이었다는 것을
 은근히 내세우고 있다. 

  다음의 대화를 보자

진관수:그런데 여기서 여러 선생께 여쭈어 보고 싶은 것은 
       {규원사화}를 어떻게 보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기백:한영우씨가 한국학보에 쓴것이 재미 있읍니다. 그런데 
       거기서는 도가사학이라고 했어요. 
       그런것이 걸리는데, {규원사화}의 선구적인 것은 고려말에 
       있었나 봐요. 
진관수:{규원사화}와 같은 계열이라고 하는 "단기고사}....발해의 
       대야발이 만들었다는 것이 있다는데, 본다 본다 하면서 
       아직 못 보았읍니다 만...
이우성:{단기고사}는 이조말에 만들어진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규원사화}라는 것도 모를 일입니다만.
이기백:이런 것들이 혹은 단재가 애기한 묘청이라든지 풍수도참과 
       연결된 그런 계통이 아닐까요?
이우성:여기 도가는 도교적인 도가가 아니라 화랑 국선하는 선(仙), 
       단군도 선인지후(仙人之後)라 했지만 그 선에 연결이 되는것 같아요. 
       그렇다면 도가라고 말하기 보다는 선가라고 말하는 것이 
       좋을성 싶어요. 그 선가는 약간 노장사상과 관련이 있기는 
       하지만 바로 노장사상의 그런 도가는 아니니까요.
이기백:그렇다면 잘 이해가 되는데, 여하튼 지금 사료적인 가치는 
       인정할 수 없는 책들이 아니겠읍니까?
이우성:단군임금의 역대 임금이 다 나오니 그것을.....
진관수:환웅밑에 고시가 한반도를 다스리고, 신지가 만주를 다스리고,
       치우가 하북 산동을 다스리고 했다는 건데요.
이우성:요 임금시대에도 직계가 다 나오고, 그리고 기자의 호동왕도
       다 나오지 않습니까? 여하튼 단군의 이름까지 다 나오니 재미
       있어요
       (삼성문고 {우리역사 어떻게 볼것인가}

이자들은 어디서 온 작자들인가? 진정 한국역사학계를 대표할 만한 자들인가
?  또한사람 김원용씨가 있다. 이자는 일본이 날조해낸 황국사관이 여지없이
 박살나는 다까마쓰 고분 발굴장소에 가서 일본, 북한, 중국학자들이 고구려
인 작품이라고 인정하는 마당에 당나라 화풍이 보인다느니, 고분의 주인공이
 고구려로 망명온 중국인이라느니 하고 우겼던 자이다. 또 이자는 을지 문덕
이 중국사람이라고 우겼던 자이다. 마지막으로 혜성의 사나이 이기동씨가 있
다. 87년 5월 29일, 30일에 있었던 역사학 대회에서 고대사 되찾기 운동을 "
민족주의가 팽배했던 70년대와 유신체제의 분위기의 연장"이라고 몰아붙이고
 있다. 그는 또 "실증사학이 마치 식민사관의 장본인인양 단정되고 일부 민족
 민중사관이 고조되는 분위기에선 고대사 연구는 존립기반이 질식되는 불길한
 예감마저 든다"고 한탄해 마지 않았다. 

  이상 여러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학자들의 성향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자들
이 주름잡고 있는 사학계의 현실속에서 웃지 못할 일들이 벌어 지고 있는 실
정이다. 실례로 비록 식민사학자들에게서 배웠지만 일부 뼈대있는 소장 학자
들이 그 천편일률적인 식민사학에 싫증을 느끼고 이에 반기를 들려고 하면 그
들은 대 스승인 이병도 박사가 그런짓을 좋아하지 않으니 그러지 말라고 말렸
다고 한다. 그래도 듣지 않으면 밥줄이 끊어지는 고통을 당하게 되니까 어쩔
 수 없이 식민사관에 매달릴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학자들 중에서
 기골이 있는 사람은 그래도 이에 굴하지 않고 자기의 독특한 민족사관을 학
교에서 가르치다 보면 식민사학자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나 화살을 퍼붓는 통
에 한국땅에서는 도저히 살아남을 수가 없어서 미국으로 도피하는 실례도 있
었다고 한다. <<국사통론>>을 쓴 건국대학교의 박형표 교수가 그 대표적인 예
이다. 
근래에 들어서는 기독교까지 이런 작업에 끼어들었다. 이들은 단군조선의 역
사적 사실을 국사교과서에서 아예 빼버리자는 위원회를 조직하여 맹렬히 활동
하고 있고 한국민족이 이스라엘 백성의 한 갈례라는 것을 입증하려고 시도하
고 있다. 또 이것이 않되니까 한국의 국조를 단군으로 인정하고 이 단군 국조
가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파생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오늘날 대표적 사회명
사로 주목받고 있는 연세대교수 김동길씨(지금은 사퇴하고 정치일에 뛰어들었
음)의 단군성조에 관한 그의 견해는 "곰과 인간의 염색체수가 다른데 어찌 열
매를 맺을 수 있는가? 또 불확실한 신화시대를 우리의 정사에 집어넣고자 힘
쓰는 사람들의 의도는 흡사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아시아 대륙과 미국이 육지
로 연결되어 있던 그 옛날의 일을 미국사에 정식으로 포함시키려고 하는 것이
나 다름이 없다. 물론 그런 얼빠진 미국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고구려, 백제
, 신라가 우리들에게는 확실한 역사의 시작이다. 이 나라들이 출발이 대개 기
원전 60년에서 20년사이라는 말은 이 나라의 역사가 한 2천년쯤 된다는 말이
다. 그렇다고 부끄러울 것도 없고 떳떳하지 못할 것도 없다." 이사람은 대체
 무엇을 믿고 이런 소리들을 할까? 이사람의 머리에는 일제가 그렇게 바라던
 식민사관으로 꽉꽉들어차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상으로  일제가 저질러온 민족문화와 민족역사의 말살을 살펴보았고 민족
 역사인 경우 해방후 우리 사학계의 실태까지 살펴보았다. 글의 초두에서 밝
혔듯이 당시 일본은 조선인의 반일본화 시책에 있어 가장 효과적인것은 민족
역사의 철저한 왜곡이라고 보고 교과서적인 조선사 편찬을 위해(다른 어떤 교
재보다 교과서가 가장 권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주류의 우리 민족사서 소
각내지 압수할 필요가 절실했던 것이다. 그들의 수십년에 걸친 압수에도 불구
하고(우리는 이를 압수를 위한 발악이라 표현하고 싶다) 민족의 몇몇 선각자
에 의해 민족사서가 오늘날에 이르러 빛을 보게된 것은 참으로 다행이라 할 
수 있겠다. 위 글중 식민사학자들의 대화에서 비쳤던 규원사화, 단군세기외에
 환단고기가 오늘날에 출토된 민족사서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다. 수많은 전
화나 환란속에서 사라져간 민족사서의 고갈속에서 그나마 이것들의 가치는 국
보급이라 아니할 수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사학계에서는 이 사서들이
 '신빙성이 없다','황당하다'라는 이유로 천시되고 따돌림 받는 이유는 어인
일인가?
최근에 들어 고고학의 발달과 고적의 출토등으로  이들 사서들의 가치가 인정
받기 시작했다. 앞윷 이러한 경향은 점점 뚜렷해질 것이라 믿고 환단고기를
 처음 본  일본사람들이 '아시아의 지보'라 하였고 중국사람은 '서역까지 밝
혀주는 주옥의 지보'라 예찬했던점을 상기시켜본다.
 
 다음은 민족사서의 하나인 환단고기의 내용을 중심으로 상고사 부분을 논술
형식으로 풀이하겠다.

3. 민족의 맥

  1만년역사!!!

 5천년 역사를 놓고도 왈가왈부하는 판에 1만년이라 하니 이글을 읽는 분은 
놀라실 것이다.
다음은 우리 역사의 맥을 적은 것이다.

환(한)국 (桓國)   7세 3301년 B.C 7199
배달국(倍達國)    18세 1565년 B.C 5885
조선(朝鮮)        47세 2096년 B.C 2333
북부여(北夫餘)    6세 182년 B.C 239    -- 낙랑국, 중삼한, 위만, 
                               동부여(가섭원 부여)
고구려(高句麗)    34세 846년 B.C 178   -- 백제, 신라, 가야 : 사국시대
대진(大震)        15세 259년 A.D 668   -- 신라(통일신라) : 남부국가시대
고려(高麗)        34세 475년 A.D 918   -- 요, 금
조선(朝鮮)        26세 528년 A.D 1392  -- 청

 이 표는 생소한 점이 많을 것이다. 왼쪽은 우리역사의 맥이고 오른쪽은 우리
 민족의 또다른 나라이다. 여기서 여진, 거란이 나오는데 여진족은 우리 민족
에게서 갈라진지 2000년 경이고 거란은 그보다 오래 되었는데 우리에게는 형
제나 다름없는 핏줄을 가지고 있다. 동이족으로 부터 거란, 흉노, 선비, 몽고
, 여진족이 갈라졌음이 또한 환단고기에 기록되어 있다. 

(1)환인(桓仁)의 환국(桓國)시대:
  
   환국은 천산 동방으로 [동서가 2만리, 남북이 5만리]의 방대한 문명의 대
국으로 파내류국으로도 불리웠다. 당시 천산에 거하며 듣도하여 덕이 높던 성
자가 천왕으로 추대되어 환국을 통치하였는데 그 이름을 안파견(安巴堅)이라
고 하였다. '만인의 아버지'라는 뜻의 안파견 환인은 초대 환인으로서 환국을
 다스렸는데 환인(桓仁)이란 통치자와 제사장의 관직명이다. 당시 롼국은 12
환국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안파견 환인은 자신의 형제 9인으로 하여금 각 환
국을 나누어 다스리게 하였으며 이를 통칭하여 [광명의 제국]이라 불렀다(삼
성기하, 태백일사, 규원사화]
 제1변의 남, 북 문명의 정통을 계승하여 중아 아시아에서 태동한 이 환국문
명은 제2변의 동, 서문명으로 맥이 이어졌다. 이에 대한 고고학적 근거는 최
근 120년 동안의 고고학적인 발굴 결과, 중동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는 약 5
,500년 전에 현서양문화의 뿌리인 슈메르문명이 있었으며 이 문명을 건설한 
슈메르족은 동방에서 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김상일, 인류문명의 기원과 한
) 또 북미의 오리건주에서 발굴된 짚신 75켤레가 동이족의 짚신과 흡사한데 
방사성 탄소의 측정에 의하면 이는 약 9천년전의 것이라 한다. 미국 워싱톤 
박물관(스미소니언)에는 이외에도 나무절구, 소쿠리, 광주리, 베틀, 어망, 물
레 등 우리 선조들이 쓰던 생활도구와 동일한 것이 많다고 한다.
  인류문명의 발상지인 천산산맥은 그 주맥이 동북쪽으로 뻗어나가 소련과 캐
나다 국경인 베링해협까지 이어져 있었. 아시아 대륙과 아메리카 대륙이
 붙어 있었던 약 25,000년 전부터 서서히 시작되었던 동방족의 이동은 1만년 
전까지만 해도 육교의 역활을 하던 베링해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으로까지 
진행되었다. 
  
 (2)환웅(桓雄)의 배달국(倍達國)시대

  환국의 정통정신을 계승한 분은 후기 환국 말경에 당시 [자식들의 마을(庶
子部)]의 수장(首長)이었던 성자 환웅으로, 환웅은 야만 생활을 하던 인간을
 널리 구제하고 싶은 꿈을 간직
하고 있었다. 이에 환인께서 중국의 감숙성(돈황현)에 있는 삼위산(三危山)과
 동방의 태백산을 살표보고 태백산으로 가고 싶다는 환웅의 뜻을 허락하여 태
백산으로 파견하였다.(6천년전)
  이때 환인천제께서는 제세(濟世) 핵랑군(核郞軍)이라 불리운 문명 개척단 
3천명과, 천부(天符)인(印)3개를 주고 개천입교(開天立敎), 홍익인간(弘益人
間), 제세이화(濟世理化)를 만세 자손의 홍법으로 하라는 명을 내렸는데, 
환웅께서는 이를 배달국을 여는 개국의 창시 이념으로 하셨다.

  당시 환웅의 동방 백두산 문명 개창시에 송화강-백두산 일대에는 토착민인
 웅족과 호족이 살고 있었는데, 원주민은 호족이었고, 이주민은 웅족이었다.
 호족은 사납고 약탈에 능했으나 점차 이들은 웅씨족에 의해서 융합되었다. 
웅(雄)의 음은 검이며 검(儉)은 곧 신(神)으로 불리었다. 또한 호(虎)는 불(
市)로, 불은 시로 변하였다. 그리하여 두 민족의 협력 건국으로 인하여 환웅
께서 수도를 신시(神市)라 하고 나라 이름을 배달(倍達)이라 하였다. 

 (3)단군 조선시대

  동아문명의 선도역활을 하셨던 신시 배달국 시대의 통치자인 환웅은 큰 스
승이라는 뜻이다. 부처님을 모신 법당을 대웅전(大雄殿)이라 아는데 이는 거
룩한 스승을 모신 성전이라는 뜻이다. 환웅이란 당시 우리 광명민족을 이끌어
 주신 거룩한 스승(환(桓):크다, 밝다 웅(雄):수컷, 스승)이라는 뜻이다. 
배달국의 말기 환웅께서 웅씨 왕녀와 결혼하여 낳은 분이 초대 단국 성조이시
다. 단군성조께서는 신묘(辛卯, B.C 2370)년 5월 2일에 탄생하셨다. 신인의 
덕으로 원근에서 외경하여 14세 되는 갑진년에 웅씨왕으로부터 비왕으로 임명
받아 24년간 대읍국의 국사를 섭정하였다. 38세 되는 무진년에 단국으로부터 
돌아와 마지막 거불단 환웅천황께서 돌아가시자 아사달에서 천제로 추대되어 
제위에 올랐다. 단군왕검은 제사장과 통치자를 겸임한다는 의미의 관명입다. 
단군성조께서는 환인과 환웅 천황의 정통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아 예 신교(神
敎)정신을 부흥시켰고, 동방문명의 독자적인 문화를 창조하였다. 
  우리가 잘알고 있는 노아의 대홍수는 단군성조께서 87세 되시던 정사(丁巳
)년 2월 17일에 단국 조선의 대영토에서도 똑같이 일어났다. 홍수가 범람한 
다음해인 88세 되던 무오년 7월 5일에는 운사 배달신으로 하여금 강화의 전등
산에 삼랑성(三郞城)을, 마리산에는 제천단(참성단)을 쌓게 하였다. 105세 되
시던 갑술(B.C 2217)년에는 태자 부루를 도산에 보내시어 <도산회의>를 소집
하고 순임금이 특파한 우(禹)에게 [5행치수(五行治水)의 비법]을 전수케 하셨
다.  
  초대 단군 성조께서는 세계문명의 시원국가인 환국과 환웅천황의 대도 정신
의 법통을 정통으로 전수 받으시고 황하, 양자강 유역, 만주 등의 동아시아 
대부분을 통치하셨다. 전영토를 삼한(三韓)으로 나누어 [부단군(副檀君)]격인
 왕을 두어 다스렸다. 


  이상 환단고기를 중심으로 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한 우리 역사의 뿌리를 살
펴보았다. 위의 내용은 아직까지는 확실하게 증명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왜
냐하면 우리는 당시의 사람이 아니기에 보고나 듣거나 느낄 수가 없기 때문이
다. 다만 그 당시 사람들이 남긴 유적과 사서를 중심으로 간접적으로나마 공
감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일면을 볼때 당시 우리 조상들이 광대한 영토와 선진적
 문화를 창조할 수있었던 힘은 과연 무엇이었는가를 다시금 되묻게 한다. 외
래문화와 외래사상이 판을 치는 이때에 한갖 국수주의자가 되기 싫어서 우리
것이 아닌 세게문화와의 마구잡이 모방과 탐릭은 민족의 원형조차 붕괴시켜버
리는 일을 초래하지 않을까 두려울 뿐이다. 한없는 우리것에 대한 사랑에 밑
 바탕을 두면서 세계문화와의 접목을 이룬다면 새로운 문화창조의 원동력이 
되지 않을까 싶다. 

참고서적 : 환단고기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 - 서희건, 고려원
           소설 한단고기 - 김태영
           한민족과 증산도
           민속문화론 - 임재해, 문학과 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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