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1년 3월 19일 월요일 오후 02시 01분 26초 제 목(Title): 노형석/서평 마왕퇴의 귀부인 책과사람] “2000여년전 중국이 되살아났다” “심각한 군사상황이 발생했다!” 1971년 12월 중국 양자강 남쪽인 호남성 장사시 교외의 흙구릉 `마왕퇴(馬王堆)'에 방공호를 파던 인민해방군 병사들은 예상치 못한 사고에 혼비백산했다. 땅에 뚫은 굴착기구멍에서 정체불명의 가스가 용솟음치며 폭발한 것이다. 소련 침공에 대비해왔던 군간부들 사이에서는 `계급의 적'들이 설치한 폭탄이 아니냐는 설만 무성했다. 하지만 사흘 뒤에야 이곳을 살핀 호남성 박물관 부관장 후량의 `화동자(火洞子:가스가 분출되는 무덤구멍)'라는 말 한마디에 사태는 반전된다. 2000여 년전의 생생한 여성 미이라와 <주역><노자도덕경> 등의 중국고전 백서, 칠기·그림유물들이 발견된 마왕퇴 한나라 무덤 발굴의 신화는 이렇게 엉뚱한 사건으로 시작됐다. <진시황릉><황릉의 비밀> 등의 고고학 비사로 친숙한 중국언론인 웨난은 역작 <마왕퇴의 귀부인 1·2>(이익희 옮김·도서출판 일빛)에서 72~74년 세계고고학계에 지각변동을 일으킨 마왕퇴 발굴과정과 그 언저리 이야기들을 긴박감넘치게 재구성한 현장실록이다. 당시 발굴관계자들과의 인터뷰, 유물보고서 내용 등을 바탕으로 씌어진 이 실록은 현대사와 고대사를 자유롭게 공간이동하며 읽는 재미가 일품이다. 중국 정치사와 고고학에 대한 글쓴이의 해박한 지식을 곁들여 14장에 달하는 글들은 고대 전한시대와 70년대 문화혁명기 중국의 현실로 읽는 이들을 번갈아 손짓한다. 도판과 함께 글에 실린 유물들의 이력은 놀라움 자체다. 애초 이 무덤은 10세기 오대십국 때 초나라왕 마은과 그의 아들 것으로 여겨졌으나 발굴결과 전한시대 지방제후봉토인 장사국의 대후(수상)이창과 부인 신추, 젊은 아들의 무덤으로 밝혀졌다. 특히 1호분의 부인시신은 피부와 내장이 산사람처럼 보존돼 피부를 누르면 곧바로 원상태로 돌아왔고, 관절을 펼 수도 있었다. 예수 탄생과 고조선 멸망 전 살았던 고대인의 생생한 몸이 드러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분서갱유가 난지 불과 100년뒤 비단백서에 쓰여진 <노자도덕경>와 <주역>원문(3호분 출토)들은 현전 자료들과 내용이 크게 달라 새로운 논쟁을 일으켰다. 소진의 <전국종횡가서>, 세계최고의 천문서 <천문기상잡점>, <경법><십대경> 등도 대부분 전해지지 않은 철학, 역사, 자연과학 저작들이었다. 이밖에 매미날개처럼 얇아 무게가 48~49g에 불과한 비단옷 `소사단의', 동물과 구름문양 가득한 비단백화, 세계 최고의 고지도와 도인도, 칠기 등의 부장품유물은 `실물로 보는 중국고대역사책'이라 할 만하다. 현역기자답게 객관적 잣대로 발굴과정을 뜯어본 웨난의 필력은 문화재발굴을 둘러싼 정치적 음모와 열악한 여건을 뚫고 발굴신화를 만든 산자들의 초인적 의지와 문화재사랑에서 더욱 매력을 발휘한다. 당간부들의 무지와 음해를 딛고 유물보존에 최선을 다한 왕야추, 곽말약, 후량 등의 고고학자들과 초창기 진창에서 뒹굴며 현장인부를 자원한 이름없는 청년, 학생들이 현장의 주역이라면 4인방의 방해공작에 맞서 마왕퇴 유물발굴과 보존방침을 이끌어낸 당시 총리 주은래는 막후의 주역격이다. 특히 임종직전까지 무덤에서 나온 유물그림 모조본을 병상에서 지켜보며 발굴을 뒷바라지한 주은래의 일화는 아름다운 감동으로 와닿는다. 하지만 행간을 읽다보면 어쩔 수 없이 우리 문화재 보존의 부끄러운 역사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마왕퇴 발굴과 비슷한 시기 국내 고고학자들은 해방이후 최고발굴이라는 백제 무녕왕릉 묘실을 하룻밤새 치워버리고 귀한 보물들을 마구 쓸어담아 버렸다. 풍납토성 유적지를 갈아엎고 옛 석탑에 통치자 이름 새긴 수리기를 태연히 집어넣는 이 나라에서 마왕퇴의 인간드라마는 언제쯤 나올 수 있을까.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