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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1년 3월 12일 월요일 오전 06시 59분 45초
제 목(Title): 조한욱/ 계몽사상과 낭만주의 


조한욱 (hocho@cc.knue.ac.kr)  조회수 : 1362 , 줄수 : 66  
EBS 교양강좌 1998년 4월 29일: 계몽사상과 낭만주의  
4월 20일에 행했던 강의는 본 강의실에 올렸던 "모더니즘"과 중복되는 부분이 
많아 생략합니다. 양해 바랍니다. 워드 작업을 도와준 한국교원대학교 
초등교육과 96학번의 이현미 양에게 감사합니다.



 안녕하십니까. 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 조한욱입니다. 지난 주 목요일에는 
과학혁명에 대해 말씀드리면서 결론에서 뉴턴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 
결론에서 뉴턴이 확립시킨 새로운 물리학의 법칙은 이성을 통해 신의 존재를 
파악하려는 계몽사상가들의 이신론의 초석이 되었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오늘 강의에서는 그런 합리주의적 이성의 정신을 계속 추진해 나갔던 18세기 
계몽사상가들에 대해 먼저 말씀드리고, 다름으로 극단적으로 이성주의에 대해 
반발하면서 감성의 중요성을 인식시켰던 낭만주의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의 강의 역시 세 부분으로 나누어, 계몽사상의 출현 배경에 
대해서, 다음으로 계몽사상을 극복한 점과 계승한 점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보통 18세기의 계몽사상은 프랑스가 주도하여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선도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계몽사상가들을 지칭하는 말로 
필로소프(philosophe)라는 의미의 프랑스어가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을 
명확하게 입증해 줍니다. 그러나 그것의 기원은 영국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미 과학혁명에 관한 강의에서 말한 바 있었던 뉴턴의 영향은 섬나라 영국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천체의 운행 법칙을 알아냄으로써 우주에 의미가 
충만해 있다는 것을 밝힌 뉴턴의 중요성은 지성사적인 의미에서 다른 방식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첫 번째로 자연 현상을 연구하는데 과학적인 
방법을 적용하려는 열기가 서유럽을 휩쓸게 만들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두 번째의 중요성은 우주를 하나의 거대한 "기계장치"로 보면서 
그것을 작동시키는 기본적인 법칙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을 인간사에도 
적용시켜 정치나 법률이나 경제 등등의 측면에서도 그런 법칙을, 즉 "자연법"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낙관론적 결론을 도출해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뉴턴이 갖는 이런 지성사적 중요성은 볼테르, 몽테스키외, 콩도르세를 위시한 
프랑스의 대표적 계몽사상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먼저 과학적 방법을 적용하려는 열기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과학혁명의 성과에 힘입어 "과학적 방법"이야말로 인간의 모든 탐구 분야에 
적용되는 유일하게 타당한 방법이라는 깊은 확신이 생겨났습니다. 계몽 
사상가들에게 과학적 방법이란 통상 일반 법칙에 도달하기 위해 개별 현상을 
객관적이고 경험적으로 관찰하는 태도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가설을 
만들지 않는다"(Hypothesis non fingo)라고 말하며 경험적 관찰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뉴턴 물리학이 이룩한 확고한 승리를 염두에 둔다면, 1700년경 
서유럽에서 모든 자연 현상을 연구하는 데 과학적 방법을 적용하려는 열기가 
휩쓸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당시의 과학적 연구는 
상당히 단순하여 전문 교육을 받지 않은 아마추어들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럽의 귀족들과 부유한 사람들은 누구나 망원경을 
구입하고, 나비를 채집하고, 새롭고 획기적인 과학적 연구에 참여한다는 희망에 
부풀어 자신들의 집이나 가정에 실험실을 만드는 등 이른바 "과학적 연구"에 
손을 댔습니다. 
 이런 과학적 열기를 보여주는 예로서, 1710년 영국의 작가 애디슨은 "니콜라스 
김크렉 경"이라는 작품 속의 인물을 만듭니다. 그 사람의 유언장을 통해 
애드슨은 "과학 연구 열기"를 풍자했습니다. 김크렉은 열렬한 아마추어 
과학자로서 딸들에게는 "죽은 나방을 보존하는 비방"을, "학식이 깊고 훌륭한 
친구"에게는 "쥐의 고환"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그의 어린 딸의 시신을 "와인 
원액"에 담가 자신의 책상 가까이 놓아두었습니다. 물론 이런 김크렉 같은 
부류의 귀족들이 지닌 과학 열기는 유치한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과학의 최신 업적을 따라가려는 열기 때문에, 귀족들은 재능 있는 과학자들의 
연구를 후원해 주기도 하면서 과학이 인간의 가장 위대한 업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유명인사는 거의 누구나 다 실험이라는 것을 해 보았습니다. 볼테르는 화학을 
중대한 도락으로 삼았습니다. 몽테스키외는 물리학을 연구했습니다. 프랑스의 
어떤 귀부인은 마차 속에 시체를 가지고 다니면서 여행을 다니는 동안 
해부학연구에 이용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대체로 유럽의 어느 나라에나 
그 나라의 계몽사상가가 있었고, 지식의 진보를 촉진하기 위한 학회가 
있었습니다. 지적 생활은 결코 수도와 대도시에만 국한되지는 않았습니다. 한 
예로, 18세기 중엽의 프랑스에는 지방 학회가 많이 있었고 독서실과 
대출도서관의 설비도 제법 갖추고 있었습니다. 당시 과학자와 계몽사상가는 
국가의 경계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국가간의 전쟁이 있을 때조차 
이들은 서로 방문하고 통신을 교환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평상시의 
용무』즉, 연구에 대한 18세기의 열정이 어떠한 것이었던가를 보여주는 뚜렷한 
예입니다. 물론 조잡한 연구의 수준에 머물렀다 할지라도 이런 열기 속에서 
과학발전을 위한 토양이 마련되었고, 실지로 결실을 거두게 된 것입니다. 그런 
결실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분야가 생물학과 화학입니다. 
 스웨덴인 린네(1707-1778)는, 생물학에 있어서의 계보에 관한 자연법칙을 
논증하였습니다. 그는 알려진 모든 식물과 동물을 '종'으로  분류하였고, 다시 
몇 개의 '종'을 하나의 '속'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하여 
'속'으로부터 '족'을 거쳐서 '강'에 이르는 계층적인 분류법을 만들었습니다. 
이리하여, 생물학자가 모든 표본을 선정할 때 속의 명칭과 종의 명칭을 
라틴명으로 표기하는 방법이 생긴 것입니다. 이것이 '이명법'입니다.
 근대과학의 화학분석은 블랙과 라부아지에에서 비롯하였습니다. 스코틀랜드의 
교수였던 조셉 블랙(1728-1799)은 공기가 한가지 원소로 성립한다는 낡은 
이론을 분쇄하였습니다. 그는 공기가 같은 몇 개의 물질 또는 가스가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였습니다. 프랑스의 화학자이며 물리학자인 
라부이지에(1743-1794)는, 블랙의 가스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여 '산소'라는 
명칭의 원소를 발명하고, 물은 산소와 수소로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증명하였습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모든 물질은 비교적 소수의 기본적인 화학 
원소로부터 성립하고, 그는 23개의 원소를 검증했습니다.
  이러는 동안에 천문학과 물리학은 뉴턴 등에 의해 17세기에 이미 이루어 놓은 
바 있는 대발전을 강화해 가고 있었습니다. "프랑스의 뉴턴"이라고 불리는 
라플라스(1749-1827)는 천체역학에 관한 뉴턴의 위대한 연구를 완성시키고, 
일련의 수학적 공식과 원리로써 태양계의 운동을 설명하였습니다. 다재 다능한 
미국인 벤자민 프랭클린(1706-1790)은 전기와 번개는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필라델피아에서 번개가 쏟아지던 어느 날 연을 날려서 
연실에 붙어 있는 열쇠에 충전을 시켰습니다. 이 실험은 대서양을 넘어 강렬한 
흥미를 일으켰고, 프랑스 왕족의 교육을 위하여 베르사유에서는 다시 한번 이 
실험이 실시되었습니다.
 다음으로는 이런 과학적 방법을 인간사에 적용시키려는 시도를 이야기하려 
합니다. 여기에서도 그 기원은 영국인 존 로크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계몽 사상가들은 인간 행위에 대한 경험적 연구를 통해 
사회의 작동 원리를 몇 가지 법칙으로 정식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와 더불어 대다수가 인간의 본성은 불변의 것이 아니라, 완성 가능성이 
대단히 높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 점에서 계몽 사상가들은 무엇보다도 존 
로크(1632-1704)의 심리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로크는 매우 영향력 있는 정치 철학자일 뿐 아니라, 철학의 
가장 중요한 분야인 인식론의 창시자이기도 했습니다.
 『인간 오성론』(1690)에서 로크는 그때까지 지배해왔던 가정을 폐기했습니다. 
즉 관념은 본유적으로 타고난다는 데카르트의 주장을 거부하고, 대신에 모든 
지식은 감각 작용에서 생겨난다고 주장했습니다. 로크에 의하면, 태어날 때의 
인간의 이해력은 "백지"(라틴어로는 tabula rasa) 상태와 같으며, 따라서 
여기에는 아무 것도 기록되어 있지 않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사물을 경험하기 
시작할 때, 다시 말해 감각의 힘으로 외부 세계를 인식하기 시작할 때에야 
비로소 어떤 것이 인간 정신 속에 남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을 연장시킨다면 환경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계몽사상가들의 견해에 의하면, 만약 일부 귀족이 평민에 비해 무언가 우월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귀족이 특별한 지식이나 덕성을 타고났기 때문이 아니라 
훌륭한 교육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계몽사상가들은 모든 인간은 교육을 
통해 가장 완벽한 귀족들과 동등자가 될 수 있으며, 인간이 보편적으로 진보할 
잠재력은 무한하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사실상 소수의 계몽 사상가들은 
대단히 낙관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기에, 세상의 모든 악폐는 완전히 제거될 
수 있다고 주장할 정도였습니다. 이들이 보기에 어떠한 악폐든지 간에 그것은 
신의 계획에 따라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었고 또 인간이 바꿀 수 
있는 잘못된 환경의 산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낙관론은 콩도르세에 의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자연은 인간의 기능을 완성시키는데 어떠한 제한도 
두지 않았다. 이 완성의 진행이 제한을 받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소멸할 때까지라는 제한 밖에는 없다." 이것이 콩도르세의 
결론이었습니다.
 다음으로는 프랑스가 주도한 계몽사상의 내용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7세기 영국에 근원을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계몽사상은 18세기에 
스코틀랜드·독일·이탈리아·영국·신세계로까지 퍼졌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상은 18세기의 세계주의적 성질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의 지도적 
지위는 계몽사상 전체에 씻을 수 없는 발자취를 남겨놓았습니다. 이성의 시대는 
프랑스의 문화적 패권 절정기에 도달하였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미국의 
계몽사상가인 토마스 제퍼슨의 말을 인용한다면, 누구든지 두 개의 모국이 
있는데 그것은 『자국과 프랑스』라고 합니다. 프랑스어는 계몽사상의 
의사소통을 매개하는 공용어가 되었으며 파리의 살롱은 계몽적 저작의 일반적 
경향을 결정하는데 이바지한 바 많았습니다. 또한 프랑스에서 편집되고 출판된 
『백과전서』는 계몽사상을 전달하는 수단을 제공했습니다.
 그런데 대다수의 계몽 사상가들은 현실 지향적인 문필가로서 우주에 대한 
새로운 과학적 설명을 널리 전파하고, 그 당시 사회가 직면한 문제들에 대해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을 적용하여 사회를 개혁하고자 한 
인물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무엇보다도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생각되는 제도들을 
변화시키고자 했기 때문에, 알아듣기 어렵게 보일지 모를 표현들은 의도적으로 
피했습니다. 대신에 이들은 표현의 명료함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으며, 때로는 
논문이 아니라 이야기나 희곡의 형태로 자신의 사상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다음으로는  계몽주의의 대표적인 사상가들에 대해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Ⅱ. 

 먼저, 누구나 공인하는 계몽사상가의 제일인자는 프랑스 태생의 
볼테르(1694-1778)였습니다. 영국 종교개혁 강의에서 말씀드렸던 계몽주의의 
화신인 볼테르는 다양한 문학 양식을 동원하여 방대한 주제들을 다루었습니다. 
아마도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데카르트주의 즉, 합리론이 팽배해 있는 
프랑스에서 영국 경험론의 대의 명분을 대표한 데 있을 것입니다.
 젊은 시절에 거만한 귀족을 모욕한 죄로 영국으로 추방된 볼테르는 베이컨과 
로크의 사상에 완전히 경도되었다가 3년 후 프랑스로 돌아왔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볼테르 사상 형성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며, 볼테르가 다른 프랑스 사상가들을 설득하여 검증 불가능한 
데카르트의 학설 대신, 경험으로 입증된 뉴턴의 과학 체계를 받아들이도록 
했다는 데만 그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볼테르는 프랑스 사상가들의 지적 
경향에서 나타나는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성격을 제거하고, 일상 생활의 문제 
해결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도록 자극했습니다. 그러나 평생에 걸친 볼테르의 
경험론에 대한 강조는 프랑스의 사상가들을 이전에 비해 한층 현실 지향적으로 
만드는 매우 유익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당대의 문제들에 관해 끊임없이 관심을 보였던 볼테르는 시민적 자유의 강력한 
대변자이기도 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볼테르가 내건 구호는 "추악한 것을 
분쇄하라"였는데, 여기서 '추악한 것'이란 모든 형태의 억압·광신·편협함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과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박해하는 자는 괴물과 다를 바가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한 적대자에게 시민적 자유의 제 1원리로 간주되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써보냈습니다. "나는 당신의 말은 한마디도 믿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목숨을 
걸고 당신의 발언권을 옹호할 것이다."
 온갖 종류의 불관용 가운데 볼테르는 종교적 편협성을 가장 혐오했는데, 그 
까닭은 그와 같은 태도가 어리석은 미신에 기반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미신이 사라지면 사라질수록 광신 역시 사라지며, 광신이 사라지는 만큼 
비참한 상태도 없어진다." 이러한 종교적 억압에 대한 공격과 아울러 볼테르는 
세속 국가가 행사하는 압제적 권력을 자주 비판했습니다. 특히 볼테르는 
프랑스는 절대주의 체제보다 영국의 의회제를 선호했습니다.
 다음으로 볼테르의 대표작 『캉디드』에 대해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추악한 것을 분쇄"함으로써 인류는 거대한 진보를 이룩할 수 있다.' 
볼테르가 이와 같은 낙관적인 계몽주의 원리를 전파하여 당대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저작들 가운데서 오늘날까지 여전히 널리 읽히고 있는 
것은 풍자 소설 『캉디드』입니다. 명백한 이유 없이 2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참혹한 1755년의 리스본 지진이 일어난 지 얼마 뒤에 볼테르는 『캉디드』를 
저술했습니다. 여기서 그는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무한한 개선을 이룰 수 
있다는 이전에 신념에 유보적 태도를 보였습니다.
 스승 팡글로스박사의 어리석은 낙관주의의 영향으로 삶의 미래에 대해 잘못된 
안도감을 지니고 있던 소설의 주인공 캉디드는, 세계를 여행하면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참혹한 불행만을 경험하였습니다. 폭풍과 지진이 앞을 가로막은 것은 
약과였습니다. 더욱 참담한 것은 인간의 억제할 수 없는 정열 때문에 발생하는 
전쟁과 약탈이었습니다. 오로지 황금으로 된 공상의 나라 "엘도라도"(대부분의 
계몽 사상가들이 저 멀리 지평선상에서 보았다는 완벽한 세계에 대한 명백한 
조롱입니다)에서 캉디드는 재난을 피하고 당분간 휴식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이 황금의 나라 엘도라도는 성직자도, 법원도, 감옥도 없으며 무한정한 부와 
"수학과 물리학 연구 도구들로 가득 차 있는 ……과학의 궁전"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천성적으로 안식을 모르는 인간이었던 캉디드는 곧 
엘도라도의 평화스러운 완벽함에 실증을 느끼고는, 현실 세계와의 새로운 
투쟁을 찾아 길을 떠납니다. 그리고 "악명 높은 학교"에서 더 많은 수업을 쌓은 
후, 캉디드는 마침내 이야기의 끝 부분에 이르러 기본적 진리를 터득하게 
됩니다. 한 때는 아름다웠지만 지금은 지독히 못생긴 아내와 함께 작은 농장에 
정착한 캉디드에게 팡글로스 박사가 "여기야말로 가장 훌륭한 세계"임을 
끊임없이 강조하자, 그는 이렇게 답합니다. "그럴 수도 있지요, 그러나 우리는 
정원을 가꿔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볼테르에게 삶은 완전하지도 않으며, 또한 
결코 그렇게 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인간이 공허함 이론화를 피하고 
매혹적이지는 않지만, 생산적인 일에 열중한다면 인간은 최고의 성공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꾸준한 노력을 통하여 개혁의 길을 가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대표적인 계몽 사상가 중 한 명인 몽테스키외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몽테스키외 남작(1689-1755)은 무엇보다도 정치 사상가였습니다. 대표작『법의 
정신』(1748)에서 몽테스키외는 다양한 환경과 역사·종교적 전통이 정치 
체제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를 밝히고자 했습니다. 그는 기후 및 지리적 
환경에서 나타나는 변화될 수 있는 차이점들이 인간 행위, 나아가 정부 형태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법의 정신』의 거의 전편에 걸쳐 지적하였습니다. 즉 
외적 조건의 영향으로 인간 행위는 다양하게 나타나며 이와 같은 형상은 
인간으로서는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몽테스키외는 궁극적으로는 
특정한 정치 체제, 즉 영국의 체제를 선호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모든 국가들은 
영국의 체제를 모방하면서 맞닥뜨리게 될 환경적 장애물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 이상주의자였습니다. 그가 보기에 영국 정치 
체제의 가장 큰 장점은 행정·입법·사법의 삼권이 분리되고, 서로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러한 권력 분립은 자유를 보장할 수 있기 
때문에 일인 지배자나 지배 집단에 어떠한 절대 권력도 부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견제와 균형"에 대한 이와 같은 이상화는 결과적으로 다른 많은 
계몽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1787년 미국 헌법 제정에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대표적인 계몽주의자 중 끝으로 디드로에 대해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그다지 체계적인 사상가는 아니었던 볼테르나 약간 모호하고 성찰적인 
방식으로 저술을 했던 몽테스키외와는 달리 드니 디드로(1713-1784)는 가장 
실용적 경향의 계몽 사상가였습니다. 젊은 열정가였던 디드로는 종교를 
공격했기 때문에 한때 감금되기도 했으며, 이후 줄곧 검열과 투옥의 위협을 
받으며 활동했습니다. 그러나 전 생애 동안 조금도 굽힘 없이 철저히 유물론적 
철학을 옹호했으며, 후진적이거나 압제라고 생각되는 것에 대해서는 어디서건 
거침없이 비판했습니다. 볼테르와 마찬가지로 소설이나 희곡을 포함한 다양한 
형식으로 방대한 주제를 다루었지만, 디드로의 가장 큰 영향력은 야심만만한 
출판 사업인『백과 사전』을 기획하고 또 기고한 데 있습니다.
 당대의 모든 대표적인 계몽 사상가(볼테르와 몽테스키외도 포함하여)들이 
집필한 기사들로, 당시의 가장 진보적인 철학·과학·기술적 지식들을 망라하고 
또 전파할 목적으로 기획된『백과 사전』은 1715년에서 1772년 사이에 
분할본으로 간행되었는데, 모두 2절판 17권의 대형 책자와 11권의 도판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백과 사전이 일차적으로는 참고 문헌으로 
사용되고 있는 데 비해, 디드로는 자신의 『백과 사전』을 단순한 사실 
참고용이 아니라 끝까지 읽을 수 있는 그러한 서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이 
때문에 디드로는 "『백과 사전』이 사고 방식 전반을 바꿀"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과학과 기술 분야에서 이룩한 최신 성과를 
전파함으로써 디드로는 모든 영역에서 미신을 타파하기 위해 싸우고, 과학의 
진보를 더욱 촉진시키며, 결국에는 인간이 처해 있는 온갖 유형의 비참한 
상태를 줄이고자 했습니다.
 온갖 종류의 전통적 신앙은 "모든 사람의 감수성을 동원하여" 검토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신봉한 디드로는, 만약 기회가 주어졌다면 모든 
"비합리적인"종교 교리를 통렬히 비난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엄격한 
검열로 반종교적인 기사 집필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디드로는 『백과 
사전』에서 성체 성사 항목을 찾으면 "식인 풍습 항목을 보라"처럼 간접적인 
방식으로 종교를 비난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식의 조롱 대문에『백과 
사전』의 처음 몇 권이 간행되자 논란이 일어난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러나『백과 사전』은 엄청난 반대에 부딪치면서도 완간되었을 뿐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큰 인기를 끌어 여러 차례에 걸쳐 재판본이 출간되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를 넘어서 유럽 전체로 계몽 사상가들의 생각을 전파하는 데도 
기여했습니다.
 지금까지 볼테르, 몽테스키외, 디드로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물론 이들 
이외에도 중요한 계몽사상가들은 많이 있습니다. 중농주의자 프랑수아 
케네,『백과 사전』의 또 다른 편집자 달랑베르, 콩도르세, 콩디약 등등 
프랑스인으로서 중요한 계몽사상가들은 대단히 많이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계몽사상은 유럽의 다른 나라들, 그리고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서까지 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예컨대 스위스 출신의 루소는 『사회계약론』이나 『에밀』과 같은 저작을 
통해 정치사상과 교육철학에 중요한 개념을 도입시켰습니다. 독일에서는 
레싱이『현자 나탄』과 같은 희곡을 통해 종교적 관용의 중요성을 
역설했습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흄과 같은 철학자와 아담 스미스와 같은 
경제사상가의 주도하에 철학적 회의주의와 자유시장 경제의 이론을 
제시했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체자레 베카리아가 사법과 형벌에 관해 진보적인 
대안을 내놓았습니다. 미국에서는 토마스 제퍼슨과 벤자민 프랭클린이 교육의 
중요성과 실용적 삶의 태도의 중요성을 높이 인식시켰습니다. 
 그러나 시간적 제약 때문에 그들에 대해 일일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지금은 
단지 이들이 갖는 시간적, 공간적 다양성과 내세우는 주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함께 나누는 공통적 특성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들은 인간의 이성을 적절히 사용한다면 우주를 움직이는 법칙들 뉴턴처럼 
찾을 수 있으리라 믿으면서 인간 사회의 배후에도 그런 법칙이 존재한다고 
믿었습니다. 그것이 "자연법", 이성을 사용하면 그 "자연법"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자연법을 발견하려는 궁극적인 목적은 사회를 개혁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인간이 교육을 통해 완성될 수 있고 ,그리하여 사회가 
진보할 수 있다는 진보사상을 믿었던 낙관주의자들이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도 
여러 측면에서 이들이 우리에게 물려 준 유산을 갖고, 이용하면서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제 19세기로 접어들면서 이성만능주의에 대한 반동의 맥락에서 
감성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다음에는 감성의 중요성을 인식시킨 낭만주의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Ⅲ.

 보통 계몽 사상은 프랑스 혁명의 지적 기원이라고 간주되고 있습니다. 프랑스 
혁명은 결과적으로 나폴레옹의 출현으로 귀결되었는데, 1815년경 유럽에서는 
프랑스 혁명과 계몽사상에 대한 반발이 크게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사조의 
측면에 있어서 계몽사상에 대한 반발은 낭만주의라는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낭만주의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계몽사상과는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낭만주의의 작가와 미술가는 18세기의 전지전능의 이성에 반대하였으며, 이성의 
시대가 몰아낸 바 있었던 신앙·정서·전통 그리고 그 밖의 가치를 
옹호하였습니다.
 계몽 사상과의 대조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계몽사상이 
특히 18세기에 프랑스가 주도하였던 운동이었다면 낭만주의의 근원은 1770년대 
독일에서 나타난 운동이 선구적 역할을 하였고, 독일이 계속하여 그 
중심점이었습니다. 그것은 한 희곡 제목에서 따온 '질풍노도'(Sturm und 
Drang)라는 것으로서 이 운동이 그 후 유럽 도처에서 감정을 촉발시켰던 문예 
운동을 선도하였습니다. 
 계몽 사상이 종교를 미신으로 간주하고 경멸했다면 낭만주의는 경건심을 
존중하였습니다. 그 예를 괴테에게서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질풍노도'의 시기에서 가장 인기가 많았던 작품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었습니다. 이것은 괴테(1749 - 1832)가 쓴 애상적인 
단편소설이었습니다. 나폴레옹도 이 소설을 일곱 번이나 읽고 주인공이 자살할 
때에는 그 때마다 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불안한 심정, 자기연민·자멸 
- 20세기에 유행하는 용어로 말한다면, 소원한 의식, 「방관자」라는 의식, 
이것이 괴테의 주제일 것입니다. 계몽사상가의 낙관주의와는 대조적으로 
낭만주의자들은 비관주의와 절망의 화음을 냈던 것입니다.
 괴테의 길고도 생산적인 생애는 바로 낭만주의의 전시대에 걸쳐 있으나 그 
자신은 어느 점에서 진정한 18세기의 이성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연과학에 
관심을 가졌었고 바이마르에 있는 독일의 한 소국의 계몽사상의 영향을 받은 
궁정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낭만주의의 제가치는 그의 가장 
위대한 작품 - 독일어로 쓴 최대의 작품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은 
-『파우스트』의 바로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괴테의 나이 20대에 
시작하여 80되었을 때 비로소 끝났다는 이 장편 시극은 보통 말하는 의미에서의 
극이 아니라, 유럽사상의 주류에 대한 철학적 해설이라고도 할 것입니다. 
당시에 전래되던 전설에 의하면 노령의 파우스트는 학문탐구에 지쳐서 영원한 
청춘을 갈망하여 일정한 시기에 그의 청춘을 즐길 수 있다는 교환조건으로 그의 
영혼을 악마에게 팔았습니다. 그러나 음모에 사로잡혀 영겁의 불로 
가버렸습니다. 괴테는 이 전설을 변형하였습니다. 파우스트는 사실 지식의 
추구가 환멸을 주고 아무런 이득도 없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다.
   황금의 생명수는 녹색이다. 

 그러나 한편 악마와 계약을 하고 타인의 행복을 위하여 이기적인 일들을 
희생하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결국에 가서는 구제를 받습니다. 인간이 
죄를 저지른 다음 거기서 벗어나려고 애를 써서 결국에 가서는 구제를 받는다는 
극인 괴테의 『파우스트』는 계몽사상이 멸시한 바 있었던 기독교적 생활양식을 
재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로 돌아간다는 것, 이것은 얼마 안 가서 
낭만주의의 현저한 특징이 되었습니다.
 종교적 경건심과 같은 맥락에서 낭만주의자들은 중세의 중요성을 높이 
인식하였습니다. 계몽사상가들은 자신들의 빛의 시대에 대립되는 암흑의 시대, 
종교에 의해 지배되던 야만의 시대로 중세를 파악했지만 중세의 가치를 높이 
인식하면서 열정적으로 중세를 복구시키려했습니다. 실제로 중세가 역사학의 
연구 대상으로 편입된 것이 19세기말에 이르러서야 가능했습니다. 
 이런 중세에 대한 열정은 과거에 대한 열정, 즉 역사에 대한 열정과 맥락을 
같이 하였습니다. 특히 이제 각 민족들은 자신들만의 특유한 역사성을 찾으려 
시도했으며, 낭만주의가 민족주의와 같은 연장선상에서 논의될 수 있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계몽사상이 강조하는 이성에 의거한 자연법은 어느 
곳에서든 통용될 수 있는 불변의 진리를 찾으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각 민족의 
시간적· 지리적 특수성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반역사주의적 태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에 비교할 때 낭만주의는 유기체로서 개개의 민족이 지니는 
독특한 개성, 즉 민족 정신을 강조하였고, 그것의 역사를 강조한 것입니다. 그 
대표적 인물은 헤르더입니다. 
 독일의 작가 헤르더(1744 - 1803)는 문화적 민족주의의 이론을 
발전시켰습니다. 민족마다 개개의 유기체와 같이 독자적인 명확한 개성 즉 
「민족정신」(Volksgeist)이 있습니다. 한 민족의 성장을 측정하는 가장 정확한 
척도는 그 민족의 문화입니다. 즉 그 민족이 젊으면 시가 발달하고, 성숙한 
민족이면 산문이 발달합니다. 이것이 헤르더의 결론이었습니다. 헤르더의 
자극을 이어받아 중세독일문학의 학도들은 사람의 입에 많이 오르는 민요를 
수집하고 그림 형제는『우화』를 편집하였습니다. 1782년, 『니베룽겐의 
노래』(Niebelungenlied)의 완전한 원본이 처음으로 출판되었습니다. 
『니베룽겐의 노래』는 독일민족의 초창기의 영웅적 전설로서, 중세말기에는 
대단히 찬미된 바 있었으나 그 후의 세기에 이르러서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과거의 독일문학을 새로 평가함으로써 헤르더는 프랑스의 문화에 
속박되어 있는 상태로부터 그의 시대의 독일문학을 해방시키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런 헤르더의 사상은 슐레겔, 자비니 등에게로 계승되었습니다. 이들은 
독일의 문화적 토양에 "이질적인"민주 자유주의적인 사상들을 이식시키는 일을 
비난했습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역사가 가르치는 것은, 제도는 
유기적이면서 낭만주의적으로 진화해야 하며, 고유한 법률은 단순히 보편적인 
원리의 산물이 아니라 역사적 성장의 산물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이런 독일적 전통의 낭만주의는 헤겔과 피히테에 이르러 절정에 도달하게 
됩니다. 헤겔은 정반합의 변증법으로 유명합니다. 그것은 헤겔에게 있어서 
단순한 철학적인 논리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독일은 군소 연방으로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당대의 독일 군소 연방 국가의 형태로 나타난 분열상(정)이 통일의 
관념(반)을 낳게 되고, 그 결과 불가피하게 국민 국가의 창건(합)이 이루어질 
것으로 헤겔은 전망한 것입니다. 루소나 홉스같은 계몽 철학자들이 제기한 
인간에 대한 자연적 이해는 헤겔에게는 아무 쓸모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늘 
어떤 형태의 조직체이건 이런 저런 사회 속에서 살아왔다고 헤겔은 
주장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국가라는 제도는 그 자체가 자연적이며 역사적인 
조직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로지 그 제도 속에서만 법과 관습에 
의해서 약탈로부터 보호받고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헤겔은 자유는 
속박의 부재가 아니라, 사회적 무질서의 부재로 규정하였습니다. 
 예나 대학의 젊은 교수인 피히테는 처음에는 영적 세계의 창조주라고 할 
추상적인 개체의 내적 정신에 대한 신념을 발전시켜 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민족 감정을 갖고 있지 않던 그는 프랑스 혁명을 인간 정신의 해방자로서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가 독일의 많은 지역을 점령하게 되자, 그는 
태도를 180도 바꾸었습니다. 그는 헤르더의 민족 정신이라는 관념을 
받아들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더 이상 개체의 정신이 아니라 관습, 전통, 역사 
속에 표현되어 있는 전체 인민의 정신이었습니다. 피히테는 1808년에 『독일 
민족에게 고함』이라는 주제로 행한 일련의 강연에서, 독일 정신을 단지 무수한 
정신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여타의 모든 정신에 대해 우위에 있는 것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는 세계가 아직까지 독일 정신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없었으나 곧 듣게 될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 베를린에서 피히테의 연설을 듣던 
프랑스 군사령관은 강연 내용이 너무나 학문적이어서 검열할 필요를 못 
느꼈겠지만, 그 강연들은 프로이센인들이 독자적인 정치적 민족으로서 
프랑스인들을 축출하기 위해 봉기해야 한다는 의식적인 기도를 고무하는 
표현임에는 틀림없었습니다. 

 이제 오늘의 강의를 마무리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낭만주의는 계몽사상을 
대체하였는가? 반드시 그렇게 볼 필요는 없습니다. 계몽사상이 확립해 놓은 
합리주의적 이성이라는 기반 위에 감성이라는 물고를 터놓은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대표적 낭만주의자인 괴테가 합리적 정신의 소유자였으며, 대표적 
계몽사상가들인 디드로, 루소, 칸트가 어떤 면에서는 낭만주의의 선구자로 
추앙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그 주장은 설득력을 갖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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