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1년 3월 12일 월요일 오전 06시 58분 06초 제 목(Title): 조한욱/ 과학혁명, 새로운 우주관과 세계관 조한욱 (hocho@cc.knue.ac.kr) 조회수 : 1061 , 줄수 : 93 EBS 교양강좌: 1998/4/23--과학혁명 과학혁명: 새로운 우주관과 세계관 안녕하십니까. 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의 조한욱입니다. 어제의 종교개혁에 관한 이야기에 이어 오늘은 과학혁명이 만들어놓은 근대적인 우주관과 그 속에서 이제 완전히 새롭게 바뀌게 된 인간들의 위치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의 강의 역시 세 부분으로 나누어 먼저 과학혁명에 대한 전반적인 개관과 과학혁명의 한 축인 프랜시스 베이컨과 르네 데카르트에 의한 과학적 연구 방법론의 확립에 대해 말씀드리고, 다음으로 또 다른 축으로서 코페르니쿠스에서 출발하여 뉴턴에서 정점에 달한 천문학적인 새로운 가설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결론으로 과학혁명이 갖는 문화사적, 지성사적 의의에 대해 계몽사상과 관련시켜 말씀드림으로써 오늘의 강의를 마무리하겠습니다. I 16세기와 17세기에 이르러 우주를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전면적인 변화가 발생했습니다. 지구중심의 우주관이 태양중심의 우주관으로 바뀐 것입니다. 지구는 태양을 돌고 있는 행성 중의 하나일 뿐이며, 그 이후 태양 역시 수백만의 별 중 하나임이 증명되었습니다. 이것은 과학 이론에 있어서의 발전임은 물론 우주 전체라는 거대한 구조 속에서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의 위치, 또한 그것과 같은 맥락에서 인간의 위치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가져와 도덕적, 종교적인 면에 있어서도 지대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지금까지 지구는 우주의 중심으로서 특수한 지위를 누려왔지만, 이제 지구는 우주 속의 티끌과 같은 존재로 바뀌었고 그것과 함께 지구에 살고 있는 인간의 위치 역시 격하되기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새로운 과학적 개념과 그 설명을 위한 방법론의 발전은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지대했던 것으로서 그 이후 서양 세계에 있어서 지식의 체계란 과학적으로 정의되어야만 올바른 것이라는 평가를 받기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오늘날 어떤 사실을 말할 때 그 옳고 그름의 기준의 하나로서 과학적인가 아닌가를 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세계 문명의 역사에 있어서 단일한 사건으로서 이것보다 더 큰 영향력을 미쳤던 지적 발전의 유례는 찾기 힘들 것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우주관과 과학적 지식의 확립과정을 통칭 '과학혁명'이라고 부릅니다. 이 용어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보충 설명이 필요합니다. 본디 '혁명'이라는 말은 정치적인 의미로 사용될 경우 많은 사람들이 관련되어 있는 급격한 개선적인 변화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과학혁명은 급격한 것도 아니었고 또한 이것에 관련되어 있던 사람들도 몇백 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가정, 혹은 연금술과 같은 마법에 근원을 두고 있기도 합니다. 이것은 폴란드, 이탈리아, 보헤미아, 프랑스, 영국, 덴마크 등지의 실험실에서의 연구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물론 그 실험실이라는 것도 조잡한 수준에 머물러 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과학혁명'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 영향력이 너무나도 방대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과학혁명의 기원은 보통 두 가지로 상정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프랜시스 베이컨과 르네 데카르트에 의한 새로운 과학적 방법론의 확립과정을 말합니다. 즉, 사실을 관찰하고 관찰된 사실을 축적하여 그 기초 위에서 그 사실들을 연결시키는 종합적 법칙을 찾는 경험론적 방법이나, 명제를 먼저 제시하고 그것을 분석해 나가는 합리론적 방법의 확립을 말합니다. 두 번째는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로부터 출발한 천문학적 새로운 가설, 즉 지동설이 그 이후 케플러, 갈릴레오를 거쳐 뉴턴에 이르면서 하나의 물리학적, 혹은 수학적 공식으로 귀결되던 과정입니다. 먼저 베이컨과 데카르트의 새로운 방법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프랜시스 베이컨(1561-1626)은 영국의 대법관이자 뛰어난 과학자였습니다. 그는 1620년에 <노붐 오르가눔>이라는 저서를 출판했는데, 여기에서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과학의 진보는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오류와 완전하게 결별하고 "확실성을 향한 점진적인 발전 단계들"을 확립해야지만 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베이컨은 인간의 감각에 의해 얻어진 지식인 엄격한 경험적 지식에 기반을 둔 "귀납법"을 확립시켰던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구체적 사실들을 관찰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한 일반화에 이르는 과정을 통해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베이컨은 "미신과 신학의 혼합으로 인한 철학의 타락이야말로 가장 큰 해악"이며, 따라서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냉정한 정신을 가져야 하고 신앙의 영역에 속하는 것에만 믿음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세밀하게 기록된 경험적 실험 방법에 근거하고 있는 협동적이고 모험적인 절차를 통해서만 학문은 진보한다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과거에 대한 무미건조한 사변과는 달리 집단적이고 과학적인 연구와 관찰이 유용한 지식을 낳고, 결과적으로 인간의 운명을 향상시킨다는 것입니다. 대륙의 합리론의 창시자라고 알려져 있는 르네 데카르트(1596-1650)는 베이컨과 거의 동시대의 인물입니다. 그는 두 가지 점에서 베이컨과 견해를 같이 했습니다. 첫째로 모든 과거의 지식은 폐기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다음으로 어떤 사상이든 그 가치는 유용성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과학에 대한 접근 방식에 있어서 데카르트는 베이컨과 완전히 다른 길을 제시했습니다. 경험론자였던 베이컨과 달리 데카르트는 합리론자이자 수학자였습니다. 데카르트는 지적 자서전이라고 말할 수 있는 <방법서설>에서 자신이 사색에 빠져있던 시기에 어떻게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모든 학설들을 체계적으로 의심하게 되었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명확하고 확실하게 인식되기 이전에는 무엇이든지 결코 참인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는 주장을 제1법칙으로 삼은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의심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방식으로 자기 자신의 단순한 사고 과정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준다는 인식까지 도달한 것입니다. 데카르트는 합리성을 자신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은 뒤 그 토대 위에 우주를 건립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우주관은 그리스 사람들이 파악했던 우주와는 다른 것으로서, 수학 법칙으로 표현되는 인간의 합리성이 도달한 최고의 원리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에서 보이듯 데카르트의 사색의 출발점은 인간의 생각입니다. 이것은 관찰된 사실로부터 출발하는 영국의 경험론과 대비되는 것입니다. 영국의 경험론은 외부의 사실을 먼저 관찰하고 그 사실들을 연결시키는 이론을 찾는 "종합의 방법"인 반면, 대륙의 합리론은 명제를 먼저 제시하고 그것을 설명해나가는 "분석의 방법"인 것입니다. 이 두 가지의 방법은 각기 출발점부터 다르지만 새로운 과학의 진보에 있어서는 마찬가지로 크게 기여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여의 핵심이란 지혜의 원천에 대한 생각을 바꿔놓았다는 것입니다. 중세, 르네상스, 종교개혁의 시대에 사상가들은 한결같이 과거의 지식이 지혜의 믿을만한 원천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면 17세기 이후의 사상가들은 옛 권위에 대해 복종하기 거부하면서 지식이 인도하는 곳에 도달하기 위해 자신의 지성에 의존하려는 결심을 보여줍니다. 원래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가 말했지만 칸트에 의해 유명해진 문구인 "감히 알려고 하라"는 말을 금언으로 받들면서 17세기 이후의 사상가들은 과학의 자율성을 강조하고, 정신의 자유로운 활동을 옹호했던 것입니다. II 이제는 코페르니쿠스에서 출발하는 지동설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지동설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존재했던 패러다임인 천동설에 대해 먼저말씀드려야 합니다. 프톨레마이오스로 대표되는 천동설에서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 혹은 중심과 아주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고, 그 주위에 달, 해, 별들을 포함하는 다른 천체가 완전한 원형을 이루며 돌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눈으로 보이는 별까지의 가시세계에서 물체의 운동은 어떻게 설명했을까요? 그것은 모든 물체를 이루고 있다는 네 가지의 원소에게 각기 자기 고유의 위치가 있어 그곳을 찾아가려고 하는 운동을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네 가지의 원소를 무거운 것부터 말하면 흙, 물, 공기, 불입니다. 흙의 고유의 위치는 지구의 중심이며 따라서 흙으로 이루어진 무거운 물체는 지구의 중심을 향하여 내려가려 한다는 것이며, 그 주위가 물의 고유의 위치, 그 주위가 공기, 그리고 그 바깥쪽이 불의 위치라고 합니다. 따라서 불은 자신의 고유의 위치를 향하여 타오른다는 것입니다. 흙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는 나무가 물에 뜨는 이유는 그것이 흙과 불의 원소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으로서, 나무가 불에 타는 것이 바로 불의 원소가 포함되어 있는 증거라고 말합니다. 이렇듯 각 물체는 자신의 '고유의 장소'(natural place)가 있어 그곳을 찾아가려는 속성을 갖고 있으며 그것이 바로 '자연적 운동'(natural motion)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불의 위치 외부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그곳은 신과 천사의 세계, 완벽한 세계로서 완벽한 물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것을 에테르 혹은 제5원소(quintessence)라고 말합니다. 4원소 다음의 다섯 번째 원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동설을 지탱해주던 천체의 완벽한 원 운동이나 물체의 움직임을 설명해주던 '자연적 운동'이라는 개념은 몇 가지 관찰된 사실을 제대로 설명해주지 못합니다. 그 첫 번째는 어떤 별들에게서 보이는 '후행운동'(retrograde motion)이며, 두 번째는 어떤 물체를 던졌을 때 그 물체의 고유의 장소로 직접 가지 않고 이른바 포물선을 그리고 날아가는 '투사 운동'(projectile motion)입니다. 먼저 후행운동과 관련된 부분에 대해 말씀드리고 투사운동에 대해서는 뒤에 갈릴레오에 대해 설명하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천동설의 체계에 따른다면 모든 별들은 완전한 원을 그리면서 지구의 주위를 돌아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별들은 관찰하면 앞으로 가다가 뒤로 후진하다가 다시 앞으로 갑니다. 이렇게 관찰된 사실들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무언가 다른 이론이 필요합니다. 그리하여 천동설의 체계에서 채택한 이론이 '이심율'과 '주전원'이라는 개념입니다. '이심율'이란 지구의 중심이 우주의 중심이어야 하는데, 지구의 중심과 우주의 중심 사이에 약간의 차이가 있어 그 오차 때문에 그런 정형을 벗어난 운동이 발생한다는 설명입니다. '주전원'의 개념이란 그 후행운동을 하는 별이 원형의 궤도를 돌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원형의 궤도를 중심으로 하여 그곳에서 다시 원운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려면 태양의 둘레를 지구가 돌고 지구의 둘레를 달이 돌고 있는데, 태양과 달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즉 달은 지구의 둘레를 돌면서 동시에 태양의 둘레를 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어떤 별들이 뒤로 가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폴란드 출신의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1473-1543)가 했던 일은 대담한 새로운 종류의 가설을 제시한 것이었습니다. 즉, 만일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돈다고 상정한다면 이심율이나 주전원 같은 보조 개념의 도움이 없이도 후행운동을 간명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코페르니쿠스는 이런 생각을 밝히기 위하여 수학적인 공식을 적용했고, 그 결과 수학적 조화에 의해 지배되는 조화로운 우주관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 생각은 1543년에 출판된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라는 책을 통해 발표되었습니다만, 실지로 코페르니쿠스는 그 책을 1530년에 이미 탈고했습니다. 그 책을 뒤늦게 자신이 사망했던 바로 그 해에 출판했던 이유는 그 책이 출판될 경우 많은 물의를 일으킬 것이라는 사실을 예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실상 이 책은 종교계에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그렇지만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체계가 갖는 우수성 때문에 그것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습니다. 중세 전성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새로운 학문이 도입되었을 때와 비슷한 갈등이 벌어진 것이었습니다. 결국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새로운 학문과 종교적 신앙을 절충시켰듯, 다시 한 번 종교적 권위를 지킴과 동시에 새로운 학문을 받아들여야 할 필요성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말로는 쉽지만 실제로 그것은 천동설과 지동설을 조화시킨다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런 필요성에 부응하는 체계를 제시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덴마크의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1546-1601)였습니다. 그는 주전원의 개념을 이용하여 천동설과 지동설을 절충시켰습니다. 즉, 그는 지구를 우주의 중심에 위치시킴으로써 천동설을 유지함과 동시에, 태양이 지구의 둘레를 돌며, 다른 모든 별들은 태양의 주위를 돈다고 주장함으로써 지동설을 받아들이려는 시도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후 갈릴레오도 천체의 체계에 대한 저서에서 논외로 하였듯 우스꽝스러운 학설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당시의 카톨릭 성직자들이 가장 선호하며 받아들이려고 했던 것이 바로 이 티코 브라헤의 설명이었습니다. 하나의 에피소드에 불과한 일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이것은 과학이 과학 외부의 힘에 의해 얼마나 큰 영향을 받았는지를 보여주는 극명한 사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천문학적인 과학혁명의 과정에서 다음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요한 케플러(1571-1630)입니다. 그는 여러 가지 면에서 근대의 과학자라기보다는 마술사에 가까웠습니다. <우주의 신비>(Mysterium Cosmographicum: 1596)라는 그의 저서의 제목이 암시하듯 그는 신의 감추어진 비밀을 탐색하기 위해 천문학을 연구했습니다. 그의 근본적인 신념은 신이 수학적인 법칙에 따라 우주를 창조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티코 브라헤의 이론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브라헤의 정밀한 관찰에 의존하여, 코페르니쿠스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행성 운동에 관한 두 개의 가설이 사실과 부합하지 않음을 발견했습니다. 코페르니쿠스는 천체가 균일한 속도로 원을 그리며 회전한다고 생각했으나, 케플러는 행성들의 속도가 태양과의 거리에 따라 다르다는 것과, 그 궤도는 타원형이라는 가설을 내세웠습니다. 또한 그는 태양과 행성 사이의 끌어당기는 힘이 행성들로 하여금 궤도운동을 하도록 만든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학설은 너무도 마술적인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17세기의 기계론적인 과학자들에게 거부당했지만, 17세기 말에 이르러 뉴턴이 제시한 만유인력의 법칙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이제 지구가 타원 궤도를 돌고 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할지라도, 여전히 해결해야 할 문제가 남습니다. 그것은 '만일 지구가 움직인다면 왜 우리가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가'라는 문제로서 이것을 해결한 사람이 이탈리아의 과학자 갈릴레이 갈릴레오(1564-1642)였습니다. 갈릴레오는 관찰과 이론을 겸비한 천문학자로서, 그는 1609년에 배율 30배 이상의 망원경을 발명하여 경험적 자료를 축적하였고, 관성의 법칙이라는 새로운 운동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즉, 그는 연역과 귀납의 방법을 결합시켰던 것입니다. 그는 망원경을 통해 목성의 주위를 돌고 있는 위성들을 발견하여 목성과 그 위성들 사이의 당기는 힘이 지구와 달 사이의 힘과 같은 관계일 것임을 추론했고, 1632년에는 <두 세계의 구조에 관한 대화>라는 저서를 통해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과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비교하면서 지동설의 우수성을 논증했습니다. 1638년에는 <두 세계에 관한 논고>를 저술했으며, 그가 관성의 법칙을 밝힌 것은 바로 이 책을 통해서였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상대성 원리'로서 운동체는 계속하여 운동을 하려 하며 등속도로 움직일 경우 우리는 그 속도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자동차나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우리가 그 운동을 느끼는 것은 출발할 때나 정지할 때입니다. 즉 가속이나 감속이 될 때 우리는 그 운동을 느끼는 것이며, 같은 속도로 움직일 때 우리는 그 운동을 느끼지 못합니다. 즉 자동차와 내가 똑같이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자동차와 나 사이에서 벌어지는 상대적 운동은 없다는 것입니다. 지구가 돌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구와 똑같은 속도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지구와 우리 사이의 상대적 운동은 없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가 지구의 운동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는 투사운동과 관련된 의문도 해소시켰습니다. 그는 물체를 던졌을 때 그 날아가는 운동을 수직과 수평 운동으로 나누어 그 물체는 수평적으로는 등속도로 운동하지만 수직적으로는 자유낙하 운동인 가속도 운동을 하며 따라서 던져진 물체는 포물선을 그린다는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갈릴레오의 이런 발견 역시 만유인력의 법칙을 위한 초석의 역할을 합니다. 이제 이러한 천문학의 발전의 역사에 있어서 해결해야 할 최대의 문제는 이렇게 발견된 천문학적 지식이 어떤 원리에 의해 작동하는지를 설명해줄 새로운 물리학을 확립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 과업을 성취한 사람이 바로 아이작 뉴턴(1642-1727)입니다. 그가 체계화 시킨 운동의 법칙은 첫 번째가 관성의 법칙입니다. 즉 정지한 물체는 계속 정지한 상태로 있으려 하며, 운동하는 물체는 계속 그 운동을 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의 법칙이 F=ma라는 운동 법칙입니다. 즉 어떤 물체의 질량과 속도를 곱한 것이 힘이라는 법칙입니다. 세 번째가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입니다. 어떤 물체가 다른 물체에 힘을 가할 때 힘을 가하는 물체 역시 똑같은 충격을 받는다는 법칙입니다. 네 번째가 만유인력의 법칙입니다. 즉 두 물체 사이의 끌어당기는 힘은 두 물체의 질량을 곱한 것을 그 둘 사이의 거리의 제곱으로 나누어 그것에 만유인력 상수를 곱한 것과 같다는 법칙입니다. 이제 만유인력의 법칙이 확립됨으로써 어떤 행성이 태양의 궤도를 이탈하려고 하는 원심력이 못지 않게 끌어당기는 만유인력이 구심력으로 작용함으로써 천체는 궤도를 이탈하지 않고 운행될 수 있다는 것이 수학적으로 입증된 것입니다. 흔히 아인슈타인의 물리학이 등장한 이후 뉴턴의 물리학은 극복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물리학은 소립자의 세계에서 적용되는 확률의 법칙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우리가 살고 있는 가시의 세계에서 뉴턴의 법칙은 여전히 통용되고 있습니다. 뉴턴이 확립한 운동 법칙이 갖는 또 다른 의미는 그 법칙이 해, 달, 지구, 행성, 별들과 같은 천체 사이에서만 통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물체에 동등하게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해와 달 사이에 작용하는 힘은 지금 말하고 있는 나와 마이크 사이에서도 같은 법칙에 따라 작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과학혁명이 갖는 지성사적 의의에 대해 말씀드리며 오늘 강의의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III 이제 과학혁명에 대해 전체적인 결론을 내리기에 앞서 한 가지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사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동설이 천동설을 대체한 이후 우리는 오늘날까지 천동설을 어리석은 이론이라고 무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동설을 믿던 학자들의 업적을 그렇게 쉽게 치부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태양이 떠오르는 지점이 날마다 바뀌는 것을 관찰하여 지구의 축이 23.5。 기울어져 있다는 것을 알아냈고, 1년의 길이가 365.2422일이라고 거의 정확하게 계산해냈던 사람들입니다. 아마도 그들이 이룩한 성과가 없었다면 이후의 지동설의 발견 역시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어쨌든 지동설이 출현한 이후 이제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 아닌 것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지구는 단지 하나의 행성에 불과하게 바뀌었습니다. 그것은 지구중심적인 성서의 권위에 큰 타격을 가했고, 그런 이유 때문에 갈릴레오가 재판을 받았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뉴턴이 이룬 과학적 업적이 아무리 대단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여전히 종교가 큰 힘을 발휘하던 세계에서 그 과학적 업적을 종교와 절충시키지 못한다면 그의 성공은 보장받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뉴턴은 바로 그 일을 해냈습니다. 뉴턴은 자신의 업적이 무질서하게 보이는 만물의 운동 뒤에 숨어있는 조화로운 신의 의미를 밝히는 것이라고 파악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과학과 신앙이 절충되었기 때문에 그 이후에도 과학의 순조로운 발전이 보장되었던 것입니다. 새로운 과학에 대한 비판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은 그 새로운 법칙들이 현상계에서 보이는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관성의 법칙에 따르면 운동하는 물체는 계속 운동을 해야 하지만 우리가 보는 세계에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우리는 여전히 천동설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가시적인 세계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해가 뜨고 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언어는 해가 뜨고 진다고 말하지 "지구가 한 바퀴 돌아 아침이 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뉴턴이 했던 일은 현상계에서는 그렇게 보이지만 그 배후에는 조화로운 신의 의미가 깔려있고, 그 의미는 법칙적으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한다면 과학이 새로운 신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당시 유럽은 종교개혁에 뒤이어 거의 100년에 걸쳐 벌어진 종교전쟁에 싫증을 느끼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종교전쟁은 프랑스와 독일의 국토를 황폐화시켰습니다. 인간의 영혼을 구제한다는 종교 때문에 오히려 전쟁이 벌어지고 쓸데없는 비이성적 신학 논쟁 끝에 사람들은 종래의 종교에 염증을 느꼈습니다. 이제 과학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나서게 되었습니다. 과학이 말하는 신은 합리적인 성격의 신입니다. 바꾸어 말해, 뉴턴의 법칙은 인간의 이성을 합당하게 사용한다면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성적 신에 대한 믿음은 인간 존재의 합리성과 인간 능력의 개발에 대한 믿음으로 확산됩니다. 계몽사상가들의 종교관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그것은 '이신론'입니다. '이신론'이란 이성을 활용하여 신의 존재를 파악하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뉴턴의 과학 법칙은 "이성을 통해 알 수 있는 신의 의미"를 밝혀준 것이며, 그런 측면에서 계몽사상의 초석이 되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합리성에 대한 믿음, 인간 능력 개발에 대한 낙관주의, 이성적 신에 대한 믿음과 같은 것이 곧바로 계몽사상의 기틀이 되었던 것입니다. 다음 주에는 계몽사상과 낭만주의,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