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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1년 3월 11일 일요일 오후 02시 52분 02초
제 목(Title): 조철수/ 고대신화의 극적 상상력 


출처: 이머지 1 

1. 古代 神話의 劇的 상상력 
조철수 
서강대 신학대학원 초빙교수. 예루살렘 히브리대학교에서 성서학, 고대 셈어, 
앗시리아학, 이집트학 등을 공부하고 수메르어 문법으로 박사학위 취득. 
《사람이 없었다 신(神)도 없었다》 《수메르 신화 1》 《메소포타미아와 
히브리 신화》 등의 저서가 있다.  
  
 


연재를 시작하며 
고대 한국의 지적 문화는 분명히 고립된 환경에서가 아니라 先문화권의 영향과 
교류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그런데 흔히 우리는 그 유래의 진원지를 모두 중국 
내지는 그 너머의 어디쯤으로 간주해 버리곤 한다. 과연 그럴까? 단군, 주몽, 
김수로왕 등의 始祖신화나 성주풀이, 원앙부인 본풀이, 바리공주 등의 
무속·口碑신화, 신라의 금관이나 토우, 고구려 고분벽화 등의 유물들에서 
나타나는 신화소들은 당시의 문화 전래과정을 밝혀줄 객관적 흔적들이다. 이런 
신화소를 인류 초기 역사의 가장 원형이라고 할 메소포타미아 신화와 비교하여 
그 문화적 유사성과 연결점을 찾아봄으로써 우리 고대문화의 원형을 추적해 
보려는 의도에서 이 연재를 시작한다. - 편집자 

신화는 문화의 특성을 표현한 그릇이다. 인류의 문화 발전과 더불어 신화도 
여러 형태로 형성되지만 역사시대를 시작했던 고대 근동의 문헌 신화는 유럽의 
도시적 신화의 정형을 이룬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창세 신화, 건국 신화, 
저승여행 신화, 홍수 이야기, 사랑과 이별 신화, 구원 신화, 전쟁 신화, 변신 
이야기 등 知的 신화의 큰 맥락을 차지하는 神話素는 대부분 고대 근동의 
신화에서 찾아진다. 古代 近東, 특히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고대 이집트에서 
만들어지고 전승되어 그 맥을 잇는 신화는 지중해 동쪽 연안 지역의 여러 
민족들의 이야기와 교류하여 새로운 이야기로 창출되며 히브리 성서, 고대 
그리스 비극 등에서 그 강한 전승을 읽을 수 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도성문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도성 문화는 기원전 40∼35세기에 형성되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都城 문화와 함께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문화 유산은 숫자와 
문자이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이 경제 활동을 하며 많은 물량을 운반하기 
위해 ‘두 바퀴 달린 수레’를 발명한 것은 물질 문명 발달에 큰 혁신을 
가져왔고 그들이 상거래의 투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개발한 숫자와 문자의 
사용으로 인류의 역사시대가 시작되었다. 

남쪽 메소포타미아의 우루크Uruk나 에리둑Eridug 같은 도성국가에서 발전된 
분업경제는 메소포타미아 사회를 형성하는 데 그 초석을 깔았다. 유프라테스 강 
하류 삼각주 지역 늪과 연못 지대에 건설되었던 성곽도시 에리둑은 地下水 신을 
수호신으로 섬기는 도성국가였으며 지하수 신의 상징으로 두 물줄기를 따라 
올라가는 물고기를 그렸다. 지하수 신은 지혜의 신, 치유의 신으로 고대 
메소포타미아 신화의 세계에 활동하며 악한 귀신을 쫓아버리는 
驅魔司祭구마사제의 수호신으로 일상생활에서 그의 면모를 볼 수 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홍수 이야기에 의하면 큰 신들이 부정한 사람들을 홍수로 
모두 휩쓸어 버리겠다고 결정한다. 인간의 존재 자체가 위태로운 상황에서 
지하수 신은 도시의 착한 통치자이며 바른 대사제에게 큰 신들의 비밀을 
누설하고 커다란 방주를 만들어 홍수에서 살아남는 機智기지를 알려주어 인간의 
종자를 보존하게 만든다. 이 같은 홍수 이야기를 전하며 가르침을 설파했던 
고대 메소포타미아 현자들은 신화를 만들었으며 여러 형태로 전통이 형성되고 
문화의 패턴이 이루어졌다. 고대 고전 사회에 전해지는 구원자(메시아)의 
모습은 에리둑의 지하수 신에서 찾아진다. 

이러한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화의 결실은 문자라는 도구가 없이는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지식의 축적은 문자를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도성이 
건설되었던 적합한 지역은 강가였으며 자연히 강을 이용한 교통 수단이 이른 
시기부터 발달되었다. 또한 운하를 파서 경작지를 넓히는 것은 당연하였을 
것이다. 매년 늦은 봄이면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이 범람하며 남겨놓는 
새 흙은 경작자들에게 하늘의 축복이었다. 

(메소포타미아는 ‘두 강 사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동시에 운하 밑에 쌓이는 
沈積土침적토를 정기적으로 파내지 않고 내버려두면 두 강의 범람은 주거지를 
삼키는 재앙으로 돌변한다. 경작지 사이에 만들어 놓은 수로를 두 경작지 
주인이 서로 돌보지 않고 게을리 하면 당하게 되는 자연의 재해였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홍수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이처럼 서로가 힘을 합해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 天災를 입는다는 것이다. 구약성서 창세기 6장 5절에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홍수 이야기의 시작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야웨(이스라엘의 하느님)는 땅에 邪惡사악함이 많아졌고 온종일 그들의 
마음속에 궁리하는 어떤 것도 오직 사악한 것임을 보았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헌과 비교하면 성서에서 말하는 ‘사악함’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남쪽 메소포타미아의 여러 도성국가의 통치자들은 도시 사이에 조약을 
맺고 상호 협조하는 우호적인 사회 구조를 선호했으며 이들 도성국가들의 
모임을 ‘도시민의 주(主)들의 장소(ki-en-gi-ra)’라고 불렀으며 이 단어를 
바빌로니아 언어로 ‘슈메루’라고 음역했다. 고대 근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슈메루를 수메르Sumer라고 음역한다. ‘인류의 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했다’는 
논제는 설득력이 있으며 서양의 역사 교과서에는 유럽 문명의 시작을 고대 
메소포타미아 수메르의 문자 발달에서 본다. 

문자의 기원과 발달 

수메르 사람들이 개발했던 초기 象形文字는 사물의 모양을 간략하게 그림으로 
표기한 표의문자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형문자는 처음부터 사물을 간단하게 
그림으로 표현하자고 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상형문자의 기원은 기원전 
5000∼3500년 동안에 사용되었던 物票token의 유통과정에서 유래되었다고 
설명할 수 있다. 

처음 단계의 물표는 일정한 모양과 크기의 작은 돌들을 물건의 명목가치로 
설정하여 통용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보다 발전된 물표는 점토덩이를 작은 
돌 모양으로 만든 것으로서, 물표로 사용할 작은 돌들을 찾아서 사용하는 
한계를 극복한 것이다. 남쪽 메소포타미아 도성국가 상인들은 점토로 만든 
형태가 같은 물표를 물품의 명목가치로 정하여 상거래에 통용하였고 물표를 
점토로 쌓아 보관하는 경제활동을 했다. 또한 상거래의 투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물표를 점토로 쌓아 봉하고 표면에 소유주의 고유 무늬를 그려 넣었다. 
시장경제가 점차 복잡해지면서 한 종류의 여러 품목을 구별하기 위해 물표의 위 
표면에 개별적인 모양의 상징적인 線을 그어서 세분화했다(예를 들어, 흰색 
양과 점박이 양을 같은 물표에 그 표면만 다르게 표현했다). 또한 단단한 
돌이나 보석으로 엄지손가락 크기의 인장을 만들어 물표를 쌓은 점토덩이의 
표면에 찍어서 소유주를 명기했다. 

물표를 점토로 쌓아 보관하면 물표의 양이 많을 경우 그 부피가 점차 커지는 
것을 감당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물표를 쌓은 점토덩이를 평평하게 펴서 
점토판을 만들어 그 표면에 물품의 수효와 물표의 위 문양을 그려 넣는 방법이 
고안되었다. 물표의 표면 그림이 물품을 상징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처음 
물표의 표면을 그린 것은 상징문자이다. 여기에서 발전된 것이 사물을 간단하게 
그려 사물을 표현하는 상형문자의 탄생이다. 황소는 황소 머리의 두 뿔 
모습이며 물고기는 물고기 모양 등이다. 또한 발 모양은 발을 가리키며 
‘걷다’, ‘서다’ 등을 뜻하게 된다. 

기원전 3100년경에 사용되었던 상형문자의 수효는 약 천여 개 정도이다. 
상형문자를 土版토판에 그리는 도구는 갈대 나무 가지를 사선으로 잘라 만든 
尖筆첨필이고 토판의 왼쪽 위에서 아래로 문자를 그렸으며 점차 그리는 
상형문자의 모습에서 첨필을 토판에 찍어 옆으로 쓰게 되었다. 따라서 토판을 
시계 반대 방향으로 90도 돌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기 시작했다. 기원전 
30세기경에 나타나는 이러한 문자를 쐐기문자cuneiform라고 말한다. 

숫자문자와 곱셈의 기원 

물표에서 점토판으로 바뀌면서 새로운 의식구조가 생긴 것이 숫자문자의 표기 
방법이며, 숫자문자는 수메르 사람들의 60진법 사용과 더불어 큰 변혁을 
이루었다. 점토판에 수효를 찍어 그 내용을 기록하는 방법이 물표를 점토에 
쌓아 보관하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이라는 것은 확실하며 이로 인해 시장경제는 
더욱 활성화되었다. 60진법의 숫자 단위는 1, 10, 60을 기본 숫자문자로 한다. 
작은 반 타원형은 1, 조금 큰 둥근 점은 10, 좀 더 큰 반 타원형은 60이다. 
더하기는 큰 숫자 오른쪽에 작은 숫자를, 빼기는 작은 숫자 오른쪽에 큰 숫자를 
표기했다. 라틴 숫자도 이와 같은 방법이다(I=1, X=10, XI=11, IX=9). 곱하기를 
표기하는 방법이 특이하다. 큰 숫자 안에 작은 수를 표기하여 곱셈을 했다. 

60진법은 숫자에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신들의 세계에도 적용되었다. 수메르 
신들의 계보에는 ‘운명을 결정하는 일곱 큰 신들’이 있다. 기원전 25세기경에 
확정된 神系譜신계보에 의하면 가장 큰 신은 하늘 신(안)이고, 그 다음이 大氣 
신(엔릴), 지하수 신(엔키), 달 신(난나), 해 신(우투), 금성 여신(인안나), 
그리고 천둥신(아다드)의 순서이다. 60진법에 대비하면 60은 하늘 신의 
숫자이고, 50은 대기 신, 40은 지하수 신, 30은 달 신, 20은 해 신, 그리고 
묘하게도 15를 금성의 숫자로 정하였으며, 10은 천둥신의 몫이 되었다. 
우연이겠지만 30은 자연적으로 달(月)의 숫자이고, 해의 숫자가 20인 것은 
고대인들이 일 년을 18개월로 나누어 계산했을 경우에도 나온다(예를 들어, 
마야 문명에도 20은 태양의 숫자이다). 그러나 40이 악신을 쫓아내는 지하수 
신의 숫자이며, 淨潔정결의 상징숫자는 대부분 40이다(적어도 고대 근동 
문화권에서는 그렇다). 

예를 들어, 홍수는 40일 계속되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40년 헤매었다, 
예수는 40일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받았다 등. 40은 정결례, 즉 깨끗이 하는 
의례와 관련되어 상징적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흔하다. 40이라는 숫자가 갖는 
이러한 의미와 해석은 60진법을 오직 수메르 일곱 신의 구조에 적용했을 때만 
이루어진다. 

원통형 인장과 음각 

또 하나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화에서 발견되는 특징은 원통형 印章인장이다. 
인장은 소유주를 나타낸다. 계약서를 작성하고 인장을 날인함으로써 그 효력이 
발생되는 사회규범에서 안정을 추구하는 도시민의 오래된 관습과 염원을 볼 수 
있다. 원통형 인장에 표현된 그림은 예술적인 가치뿐 아니라 문화의 여러 면을 
보여준다. 의복, 거주 형태, 신분의 차이 등 그들의 일상생활을 그림을 통하여 
볼 수 있다. (신들은 모두 사람의 모습이지만 신은 뿔 달린 모자를 쓰고 있다. 
뿔은 신의 뜻을 전하는 통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대인들은 큰 북을 두드려 
사람들의 원성을 신에게 전달하였으며, 신의 뜻은 뿔 나팔처럼 높은 소리가 
나는 도구로 응답되었다.) 

원통형 인장에 나타난 그림에서 고대인들의 신화나 영웅전의 한 면을 읽을 수 
있다. 수메르 문학 작품이 나오는 시기는 기원전 25세기 정도이지만 원통형 
인장은 그보다 훨씬 전의 것들도 많다. 따라서 후대에 문자로 전해진 신화나 
영웅전의 오래된 전승을 엿볼 수 있다. 영웅이 동물과 싸우는 장면은 원통형 
인장에 자주 나온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영웅 이야기에도 그들이 사자나 황소 
같은 야생 동물과 싸워 이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기원전 35세기 정도의 
원통형 인장도 있다. 

인장은 陰刻음각으로 새긴 것이다. 물론 인장을 만드는 전문인은 음각을 보는 
눈과 관점이 있어서 쉽게 제작하였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실상 원통형 인장을 
토판에 굴려보지 않고 인장만을 들여다보고 그 속의 그림을 연상할 수 있는 
능력은 그렇게 보는 관습에 적응되지 않았으면 어렵다(적어도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렇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의 음각을 볼 수 있는 사고는 
신화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음각으로 만든 거푸집으로 점토 신상을 다량 
생산해 낼 수 있는 능력은 수메르 창세 신화에 인간을 점토로 다량 생산하는 
이야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람을 흙으로 만들었다는 인간창조 이야기는 
성서에 기록되었기에 그렇게 여기어 ‘흙으로 돌아간다’라고 흔히 말한다. 

지혜의 시작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문학 작품 중의 하나는 기원전 2500년 경의 토판에서 
읽을 수 있다. 수메르에 사는 지혜롭고 유식한 아버지가 그의 아들에게 준 
가르침이다. 

슈루파크는 그의 아들에게 가르쳤다. “도둑질을 하지 말라. 네 자신이 
쓰러지는 것이다. 도둑은 정말로 蛇龍사룡이며 즐긴 자는 정말로 女종이다. 
(남의) 집을 [부수고 들어가지] 말라. […] 살인강도를 하지 말라. … 간음하지 
말라. 네 스스로 […] (남의) 젊은 여자와 놀지 말라. 구설수가 커진다. 맹세를 
하지 말라. 네 자신이 매인다. 언쟁을 일으키지 말라. 네 것이 쓰러지는 
것이다. 거짓을 [불리지 말라] …” 

이러한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잠언에 나오는 아버지의 가르침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십계명의 ‘살인을 하지 말라. 간음을 하지 말라. 도둑질을 하지 말라. 
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 남의 집을 탐내지 말라’와 같은 전통에 있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신화와 문화가 고대 고전 문화의 정형을 이루었고 그 근간이 
되었음은 분명하며 그 원형을 찾아내는 연구는 현재 많은 학자들에 의하여 
진행된다. 위에 인용한 문단에서 십계명의 원형을 찾을 수 있으며 이러한 
수메르의 잠언에서 발전된 법조항이 기원전 2000년경에 우르 3왕조의 창시자 
우르남무 왕에 의하여 공포되었다. 이것이 인류 최초의 법전이다. 아래 번역이 
그 시작 부분이다. 

1조 사람이 사람1)을 살인했을 경우에 그 사람을 죽일 것이다. 
2조 사람이 살인강도를 했을 경우에, 그 사람을 죽일 것이다. 
3조 사람이 실수로 사람을 상해(傷害)했을 경우에, 그 사람은 감옥살이 할 
것이며, 은(銀) 15쉐켈을 지불할 것이다. 
9조 사람이 그의 아내와 이혼할 경우에, 그는 銀 1마나2)를 그녀에게 지불할 
것이다. 
10조 그가 미망인과 이혼할 경우에, 銀 2분의 1마나를 그녀에게 지불할 것이다. 
11조 사람이 결혼 계약서가 없는 미망인과 성관계를 가졌을 경우에, 그 사람은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 

우르남무 법전보다 250년 후에 공포된 함무라비 법전은 우르남무 법전을 
근간으로 편찬된 것이다. 함무라비 법전의 시작 부분을 읽어본다. 

1조 만일 사람이 사람을 고소하고 그에게 살해 소송을 제기하였으나 그것을 
입증하지 못하면 그 고소인은 처형당한다. 
2조 만일 사람이 사람에게 마술을 (했다고 소송을) 제기하였는데 그것을 
입증하지 못하면 그에게 마술이 걸리게 한 자를 강신(江神)에게 데려간다. 그는 
강신(江神)에게 와 빠질 것이며 강신이 그를 삼켜버릴 경우에 고소인이 그의 
집을 차지한다. 
그 사람을 강신이 깨끗하다고 하여 그가 온전한 경우에 그에게 마술을 걸었다고 
(소송을) 제기한 자는 처형당한다. 강신에게 와 빠진 자는 고소인의 집을 
차지한다. 
3조 만일 사람이 재판에 거짓 증거로 (불려) 나왔는데 그가 이야기한 말을 
입증하지 못했다. 만일 그 재판이 생명에 관한 재판이면 그 사람은 처형당한다. 
4조 만일 곡식과 금전에 관한 증거로 나왔다면 그 재판의 벌을 짊어진다. 
5조 만일 재판관이 판결을 내려 결정을 짓고 인장을 남겼으나, 이 후에 그가 
그의 판결을 바꿨다면, 그가 내린 판결을 바꾼 것이 그 재판관이라고 입증하고 
그 판결에서 생겨난 청구액을 12배로 (피해자에게) 준다. 그리고 집회에 그의 
재판권좌에서 그를 쫓아내며 그는 돌아오지 못하고 재판관들과 함께 재판에 
참석하지 못한다. 
6조 만일 사람이 신전이나 왕궁의 재산을 훔쳤으면 그 사람은 처형당한다. 
그리고 장물을 손에 받은 자도 처형당한다. 
7조 만일 사람이 은이나 금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황소나 양이나 나귀나 
무엇이든지 사람의 아들 손이나 사람의 종의 손에 증인이나 계약서 없이 샀거나 
혹은 보관한다고 받았으면 그 사람은 도둑이다. 그는 처형당한다. 
8조 사람이 황소나 양이나 나귀나 돼지 그리고 혹은 배를 훔쳤는데, 그것이 
만일 신전의 것이나 왕궁의 것이면 30배로 줄 것이며 중인의 것이면 10배로 
갚을 것이다. 만일 줄 것이 없는 도둑은 처형당한다. 

(구약성서 출애굽기 20장에 십계명이 나오고 21장부터 모세의 법이 시작되며 
21장 12절부터 사회 범죄에 관한 경우법들이 기록되었다. 그 시작이 우르남무의 
법전이나 함무라비의 법전처럼 ‘살인에 관한 법령’이다:‘사람을 때려 
죽였으면 그를 죽일 것이다.’) 
기원전 20세기경에 이러한 법조항을 규범으로 법정신을 중요하게 여겼던 고대 
메소포타미아 사회는 매우 발전된 법치문화의 사회였음을 충분히 읽을 수 있다. 

12달의 시작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현자(학자)들은 법뿐 아니라 일상생활에 필요한 
행정문구와 동물, 식물, 광물 등을 나누어 백과사전 목록을 작성하였다. 또한 
단어의 여러 뜻을 정리하여 사전을 만들었으며 고대 메소포타미아 언어의 
문법을 형태별로 분석하는 시도를 하였다. 후대 전승(특히 고대 그리스)에서 
고대 바빌로니아의 지적 문화를 가장 두드러지게 받아들인 것은 천문학이다. 
고대 그리스 현자 탈레스(기원전 640∼546년경)가 일식을 예고할 수 있었던 
것도 탈레스가 바빌로니아의 천문지식을 습득하였기 때문이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매우 이른 시기부터 천문 지식을 기록하였다. 이미 
27세기경에 윤달(iti-diri, “달-여분의”)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으며 이는 
태양력과 음력의 차이를 조정했던 결과이다. 

기원전 20세기에는 이미 밤하늘의 별자리를 12자리로 고정하게 되었다. 춘분과 
추분에 동쪽에 떠오른 별자리를 각각 황소와 전갈로 정하게 된 것도 기원전 
30세기 정도인 것은 원통형 인장에 나오는 그림에서 알 수 있다. 또한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춘분과 추분에 신년행사를 거행했던 관습도 천문지식과 
관련된다. 수메르 문자로 ‘황소’는 황소 머리에 두 뿔이 달린 형상이다. 
기원전 3500∼2500년대의 황도대에 의하면 춘분과 추분이 황소와 전갈자리이며, 
하지와 동지는 각각 사자Leo와 물병자리Aquarius이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기원전 30∼20세기경에 만들어진 신화 가운데 
‘황소’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다. ‘인안나의 저승여행’ 신화에 의하면 
금성을 표상하는 ‘사랑과 전쟁의 여신’ 인안나는 저승으로 여행을 떠난다. 
인안나가 저승 입구에 당도하자 그녀는 저승 대문을 세차게 밀치며 문을 열라고 
고함 지른다. 문지기는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묻는다. 

“나는 인안나이며, 해가 뜨는 쪽을 향하여.” 
“만일 당신이 인안나이고 ‘해가 뜨는 쪽을 향하여’라면, 왜 돌아가지 못하는 
저승에 왔습니까? 사람이 걸어도 돌아가지 못하는 길을 당신은 왜 
택했습니까?” 
거룩한 인안나는 그에게 대답했다. 
“나의 언니 가샨키갈라의 남편 구갈안나(하늘의 큰 황소)가 죽었기 때문에 
그의 장례식을 보러, 그의 장례식에 술을 따르러, 그래서 왔다.” 

‘하늘의 큰 황소’는 춘분에 동쪽에서 떠오르는 별자리인 황소자리Taurus를 
가리킨다. 예나 지금이나 황도대의 별자리는 밤하늘에 오직 6개월만 보인다. 
하늘의 황소가 죽었다는 표현은 황소 별자리가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즉 
추분 때를 말한다. 고대인들에게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춘분과 추분은 중요한 
때였으며 이 때를 중심으로 신년행사를 했다. 
이로써 지금 우리는 12개월의 달력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흔히 보는 화투의 그림에서도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황도대 전승의 
상징성을 찾을 수 있다. 12월은 우산을 들고 서 있는 심부름꾼이다. 12월에 
비오는 지역은 중동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페르시아 지방에서 유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12월의 심부름꾼은 비/물을 상징하는 지혜와 구원 신 엔키를 
가리키며 물병자리와 깊은 관계를 가진다. 물병자리의 때는 동지이다. (고대 
수메르 신화에서 엔키는 큰 신들의 심부름꾼 역할을 한다.) 또한 네 광(光, 
별자리)을 고대 메소포타미아 신화와 대조하면 큰 별 신들(목성, 금성, 화성, 
토성)이다. (고대 근동의 황도대의 별자리 이름과 신라 시대에 수입된 
십이지상을 비교하면 문화의 변천을 찾을 수 있다.) (우리가 쓰고 있는 
12지간의 유래도 결국 고대 메소포타미아 천문에서 찾아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용하는 일주일도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신계보에서 
유래된다. ‘운명을 결정하는 일곱 큰 신들’의 별들(태양신, 달신, 금성 여신, 
화성, 목성 등)에서 지금의 일주일을 찾을 수 있다. 日=태양신, 月=달신, 
火=불신/역신, 水=지하수신, 木=마르둑(목성), 金=인안나(금성 여신), 
土=엔릴(땅 위를 주관하는 대기신). (고대 메소포타미아 큰 별 신들이 
그리스-로마 문화를 통하여 이렇게 전개된 것이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화의 전파 

고대 메소포타미아 신화는 주변의 여러 민족에게 전파되며 히브리 성서와 고대 
그리스-로마 신화에서도 충분히 읽을 수 있다. 또한 유대인들이 바빌로니아 
지역에 퍼져 살면서 발전시킨 그들의 문헌에서도 고대 바빌로니아의 학문 
전통을 읽을 수 있다. 고대 근동의 신화는 지중해연안 지역에 두루 퍼지고 고대 
그리스 문화와 접하면서 곧 유럽 문화의 기층을 이루었다. 
한편 고대 근동 문화와 신화는 동쪽으로도 전해졌다. 메소포타미아의 동쪽은 
자그로스 산맥으로 경계를 이루고 있지만 산맥 너머로 무역 거래를 하였다. 
주로 광물 수입이며 곡식을 판매했다. 지금의 이란과 카스피해 쪽으로 
무역활동을 하였다. 또한 고대 메소포타미아 상인들은 기원전 35세기에 이미 
페르시아만으로 들어오는 무역 거래를 주도하였으며 주로 인도의 서쪽 지역 
물품과 교역했고 아라비아 반도 남단 지역에서도 귀한 보석이나 광물 등을 
수입하였다. 기원전 20세기에는 페르시아만으로 동쪽의 국제 무역뿐 아니라 
외국의 광대들이 들어오는 사례를 볼 수 있다. 바빌론의 사거리에서 사람들은 
인도산 코끼리와 원숭이의 행렬을 구경했으며 희귀한 동물들의 놀이를 즐겼다. 
기원전 7세기경 앗시리아 군대의 압박에 못 견디는 바빌로니아 왕들이 해외로 
도망가는 경로 역시 페르시아만으로 통하는 해로였다. 

동서 교역의 해상로 

역사적으로 우리 나라 남단의 부족국가와 서역국 사이에 해상 왕래가 있었다는 
것은 발리 섬의 돌하르방과 제주도의 것이 매우 비슷하다는 분석에서도 쉽게 
접근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삼국유사에 전해진 가락국기의 김수로왕에 관한 
설화를 읽더라도 이해가 된다. 가야국의 시조 김수로왕은 인도 동쪽에 있는 
아유타 왕국의 공주와 혼인했다고 전한다. 또한 언어적으로 인도에 널리 
사용되는 드라비다語와 고대 국어 사이에 연관된 단어가 수백 개가 넘는 것도 
서역국의 문화가 우리 고대국가 문화에 유입되었다는 것을 반영한다. (강길운 
교수의 韓國語系統論, 上, 1992, 147∼202쪽에 1,370여 개의 어휘를 
드라비다語와 고대 국어의 어원 연구자료로 제공한다.) 벼농사와 관련된 많은 
어휘가 대부분 드라비다語라는 점은 주지하는 바이다. 

카락스 출신의 이시도루스Isidorus of Charax가 그리스語로 쓴 여행 기록에서 
전하는 바와 같이 로마제국의 아우구스투스Augustus 때에도 로마에서 
바그다드를 경유하여 동서양의 교류가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史書인 
後漢書에 의하면 서기 120년경에 로마의 곡예사들이 중국에 도착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로마인들의 왕은 중국과 사신을 교환하기를 원했다고 전한다. 이 당시 
로마인들이 중국에 도달하는 경로는 인도를 거쳐 동남아시아를 경유하는 
海路였다. 인도와 동남아시아, 우리 나라 남해안 쪽에 문화적 연결이 있는 것은 
김수로왕의 혼인 이야기에서만 찾아지는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다. 그 이전에도 
이미 잦은 왕래가 있었다는 것을 상정할 수 있다. 인도 또한 고립된 문화권이 
아니라 서쪽의 페르시아와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지중해 연안 등의 문화가 
해로와 육로를 통하여 유입되었던 곳이다. 

울산 천전리 암각화의 아래 부분에 ‘네 발 달린 용’의 모습이 나온다. 
(아마도 이 그림은 신라 중기의 것 같다.) 네 발 달린 용의 기원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이다. 가장 잘 알려진 그림으로 바빌론의 이쉬타르 성문에 채색된 
구운 벽돌로 용 모습을 새긴 것이다. 바다의 용이 인류의 대적으로 등장하는 
신화의 원형은 기원전 15세기경에 쓰여진 바빌로니아 창조 서사시에서 읽어 볼 
수 있다. 신들의 용사가 바다의 용을 무찌르고 세상을 창조하는 것이 
바빌로니아의 창조 서사시이다. 신약성서 요한계시록에도 바다의 용이 사탄의 
우두머리로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한편 지하수 신이며 치유의 신으로 
등장하는 구원의 신이 지하수와 연결되어 있는 이유는 남쪽 메소포타미아의 
자연 환경에서 찾을 수 있다. 지하수 신의 아들 두무지(두무지는 ‘착한 
아들’이라는 뜻이다)의 별명이 ‘하늘의 용(대추야자나무)의 열매’이다. 
두무지는 불쌍하게도 강물에 휩쓸려 죽어 저승의 감독관이 되고 6개월에 한번씩 
이승과 저승을 왔다갔다하는 운명을 가졌다. 이 이야기에서 착한 역할을 하는 
용이 있으며 강물과 연관된다는 전승을 읽을 수 있다. 

고대 한국의 문화 유형 

고대 한국의 지적 문화 또한 고립된 환경에서 유아독존식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주변의 先문화권의 영향과 교류에 의하여 이루어졌음은 주지하는 
바이다. 삼국유사 등에 전하는 단군, 주몽, 김수로왕 등의 시조 신화나 
구비신화인 창세신화, 성주풀이, 원앙부인 본풀이(이공본 풀이), 바리공주 등의 
무속신화도 도시민적 신화의 유형에서 이해될 수 있다. 한국의 신화 형태소를 
인류의 초기 역사시대의 가장 원형적인 신화의 내용과 비교하며 신화소의 
유사성과 문화적 연결점을 찾는 연구는 우리 고대 사회의 문화 유형을 찾는 
작업에 큰 기여를 할 것이다. 

한국의 고대 신화를 읽으며 고대 근동 문화와의 연계성을 찾는 작업은 고대 
근동의 풍부한 문헌과 예술 자료를 바탕으로 연구될 수 있다. 또 한가지 중요한 
통찰은 신화의 극적 상상력을 통하여 문화 유산의 상징 체계를 구성해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서로의 신화를 비교하고 대조하며 그 차이를 극적 상상력으로 
보완하고 보충하면 보다 완성된 틀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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