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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1년 3월  9일 금요일 오후 12시 30분 58초
제 목(Title): 인문학데이트/ 김정동 


출처: 한겨레 문화 

[인문학데이트] 23. 김정동 

 건축은 역사의 맨얼굴
삶의 흘러온 공간 살려야 
¨근대사는 역사책보다 장소에 녹아있어 
전통민가는 보존되는데 
근대시민건축은 관심도 못끈채 사라져 
남아 있는 건물 보존 시급¨ 

`건축은 역사의 맨 얼굴이며, 역사는 건축의 원형질이다'.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던 한국근대건축사의 영역을 닦은 목원대 김정동 
교수(53)는 평생 이런 신념을 되뇌며 `옹고집 학문'의 길을 걸어왔다. 전통과 
현대건축 사이에 커다란 구멍이 나있고, 근대건축을 식민지유산으로 금기시해온 
건축동네에서 그의 건축사담론은 아직 젊고 낯설다. 
그러나 <근대건축기행> 등의 저작과 기고들을 통해 선보인 근대건축사료 
발굴작업은 근대성에 대한 학문적 인식을 앞당기고 인문학으로서의 건축담론을 
구축하는 토대를 만들었다. `역사경관을지키는시민의모임'(이하 역사모) 등 
그가 주도한 내셔널트러스트 운동도 대전 오정골 선교사촌과 강경근대건축물 
보존 등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 
지금도 아침저녁 옛 신문의 건축기사를 탐독하고 강단과 건축사 현장을 바삐 
오가는 김 교수가 후학 조은경(28·홍익대 건축학과 박사과정)씨에게 자신의 
학문관을 털어놓았다. 
■편집자 


조은경=이제까지 해오신 작업의 특징은 건축 아닌 다른 분야에서 건축적 요소를 
끌어내어 대중에게 알리려 한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을 걷는다>란 책이 
처음 나왔을 때 건축분야 서가에만 꽂혀있었는데 나중에는 인문분야 서가에도 
있더군요. 역사로서의 건축을 알리려는 노력들이 조금씩 빛을 보는 느낌입니다. 

김정동=요즘 제 이메일에는 건축학도들보다 일반인이나 인문학자들로부터의 
문의가 더 많습니다. 자기 사는 곳의 건물을 누가 세웠고 내력은 어떤 것인지를 
묻지요. 관련서적이나 건축물의 지난 흔적들을 가급적 상세하고 친절하게 
답해줍니다. 그런 작업자체가 참 행복해요. 어차피 근대사는 
개화기·식민지사와 맞물려있어 인문학이나 본격사학을 하는 분들도 건축장르를 
몰라서는 허구적인 글밖에 쓸 수 없지요. 이를테면 조선초 개국공신 정도전이 
어디 살다가 피살됐고 무슨 일을 했는지 따위가 대개 장소를 배경으로 
나타나는데, 기존 사서들은 표피적으로 나타난 것보다는 추상적 업적·사상에만 
천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실감이 안가죠. 근대사는 일반대중에게 
장소로서 녹아있는 것이지 건축가나 사가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여지껏 
전통건축만 문화재라 했다가 근대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이 확산되면서 최근 
관련법안이 국회를 통과한 것은 그런 면에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조=건축은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라 정치·사회·문화사의 중요한 요소임을 
누누이 강조해오셨는데요. 그러면서도 그동안 저작에서 특정 사관이 개입된 
근대건축통사 대신 해외근대건축이나 우리 근대건축의 개별사례만을 주로 
언급한데는 까닭이 있지않을까 싶습니다. 

김=지금껏 일련의 저술을 낸 이유는 궁극적으로 한국근대건축사의 결정판을 
쓰기위한 작업의 일부입니다. 근대건축에서 100% 독자적인 한국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요. 전통건축이 아닌 근대 신건축은 새로운 것에 대한 요구에서 
출발합니다. 미국 등 서구에서는 마천루나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소화했지만 
아시아쪽은 근대건축을 복사하는 것조차 힘겨웠지요. 따라서 남겨진 우리 것만 
봐서는 근대건축사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신고전주의나 국제주의 등의 
그럴싸한 이름으로 찾아온 근대건축은 우리에겐 의식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받아들인 식민양식의 표현갈래였을 뿐입니다. 조선총독부나 한국은행, 
화신백화점 건물 등이 그런 것들이었지요. 저는 우리 근대건축의 흐름이 외국에 
의해 수동적으로 형성된 이상 외국건축부터 먼저 주시해야한다고 보았어요. 
신건축의 발생지인 열강의 건축과 이들 양식이 극동, 동남아 지역에 유입되는 
과정들을 살펴본 뒤 당시 우리 상황 등을 녹이며 차분히 근대건축사를 쓰겠다는 
뜻입니다. 이 문제는 사실 음악, 미술 등의 예술사에도 해당되는 것인데, 
근대성의 본질을 깊이 고민하지않고 장르사를 섣불리 정리하는 것은 무리란 
생각이 듭니다. 

조=우리 건축의 역사적 종속성이나 주변부적 성격을 짚어낸 것으로 들리는군요. 
사실 한국근대건축과 관련해 학계는 관점이나 시대구분에 대한 정리조차도 
미흡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렇다면 선생님의 근대건축사관은 어떤 것입니까. 

김=건축가들은 한국성이란 말도 합니다만 어차피 이 땅에 세워졌다면 서민들의 
삶이 녹아있는 사회사적 견지에서 건축사를 봐야하지 않을까요. 정치적으로만 
보면 식민성에 대한 얘기가 압도하면서 결국 근대성은 없다는 결론에 이르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건축사가의 처지에서는 근대건축물이 외세의 
상징이었더라도 지금도 보고 써야하는 시설이란 점에서 갈등이 남습니다. 
실제로 재료나 자본의 일부, 건설인력은 우리 것이었습니다. 건물을 짓기위해 
서양과 일본의 기술이 필요했지만 그래도 우리 땅에 역사의 얼굴로서 계속 
존재해왔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시대사의 아픈 흔적이자 앞으로 
현대건축의 방법론을 해결할 본보기로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죠. 사실 눈에 
익은 근대건축물들은 당시 건축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고 실제로 주거공간이나 
상점 등 민중의 자발적 욕구로 지은 건물이 더 많았습니다. 국도극장, 단성사 
철거에서 보이듯 문제는 이런 건물들마저 현대사적 격동과 개발명목아래 
사라져버리고 있다는 점이죠. 내셔널트러스트 운동을 하면서 옛 상도 강경의 
근대경관 보존운동 등을 하는 것도 이런 `시민건축'을 살리려는 
이유에서입니다. 저는 건축사관에서 총체성을 중시합니다. 단순한 명분이 
아니라 당대의 역사, 의식, 삶의 양상을 통해 건축을 되짚자는 것이죠. 

조=건축에서도 근대를 자생적으로 받아들인 측면을 눈여겨보자는 얘기군요. 
하지만 이런 부분을 이해하는 것은 결국 대중들의 몫이고, 이또한 남아있는 
소수 근대건축물을 통해 호소할 수밖에 없는 것이 한계가 아닐런지요. 

김=전통건축에서는 평민층의 살림집도 조명받고 있으나 근대건축에서는 이른바 
`시민건축'인 당시 생활·생산시설 등은 철저히 외면받고 있습니다. 사실 
일제시대 근대기 소설에는 주요 무대로 주거시설이나 교회 따위가 많이 
등장하는 데 지금은 족보없는 건축처럼 사라져버렸어요. 지정문화재가 아니란 
측면도 있고 관심거리가 되지않은데도 원인이 있지요. 구한말 서울 삼청동에 
세워진 최초의 신식무기 제조공장 번사창만 해도 서구기술을 주체적으로 
수용하려는 의지가 서린 기념비적 건물이지만 누구하나 주목하지 않습니다. 
해방 뒤 지어진 충남 대천해변의 외국선교사 수양관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서구화는 시대의 필연적 흐름이었기에 자의적이거나 타의적인 성격이 
뒤섞여있습니다. 단순히 자의냐 타의냐가 아니라, 근대 건축물에 대한 
당대사람들의 고민과 의식을 최대한 따라가는 것이 제 관점입니다. 조=아직까지 
학계에는 근대건축사에 대한 총체적 담론틀이 형성되어 있지 못합니다. 
일부에서는 이런 작업이 지엽적인 개별건물만을 서구적 근대성의 틀 안에 
끼워맞추려 한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김=근대성을 논하기 전에 당장 그 논의의 터전이 망가지고 사라지는 현실을 
바로잡는 것이 더 급하지 않습니까. 근대건축물의 보존과 자료목록부터 제대로 
정리해야 합니다. 추상적인 건축사관을 따지기보다 불도저에 밀리고 태풍에 
날아가는 지방 근대건축물 발굴과 건축기록 정리 등을 통해 연구의 바탕을 먼저 
확보하는 것이 지금 건축사학자들의 할 일입니다. 게다가 대학 건축학과 
교과목에는 전통과 현대건축사를 잇는 우리 근대건축론이 거의 없어 실제로 
한국적 근대건축이 어떠했는지 만져볼 기회조차 없습니다. 제가 자료발굴에 
목을 맨 것은 어찌보면 그런 답답증 때문이기도 하겠지요. 

조=학술활동과 더불어 내셔널트러스트 같은 민간차원의 보전운동에도 
열심이신데요. 운동의 전망과 계획에 대해 듣고싶습니다. 

김=일단 그나마 남아있는 근대건물을 살려야지요. 아직 초보단계이므로 
주민들이 자기네 삶의 흘러온 공간에 대해 애착을 느끼게 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대다수 사람들이 여전히 재산가치만을 중시하는 것이 가장 큰 
장애지요. 보존재원 마련을 위해 제대로 된 기부문화를 만드는 것도 
과제입니다. 강경에선 `역사모'와 언론의 도움 덕분에 보존예산 10억원을 
확보했어요. 인터넷 등의 여러 매체를 통해 꾸준히 관심을 호소하고, 
관련학자들이 꾸준히 건축물의 가치를 찾아내는 것이 여전히 중요하죠. 
근대건축에 얽힌 새 자료와 건축가의 자취를 꾸준히 찾고 평가하는 것 말고는 
특별한 계획이 없는 셈입니다. 정리 노형석 기자nuge@hani.co.kr·사진 김경호 
기자jija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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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동은 누구? 


△ 1948년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남. 

△ 70년 홍익대 공과대 건축학과 졸업. 

△ 82년 홍익대 대학원 건축학과 석사. 

△ 91년 홍익대 대학원 건축학과 박사. 

△ 93~94년 일본 도쿄대 객원연구원 

△ 96년 한국건축가협회 특별상(초평상)수상 

△ 98년 대한건축학회 특별상(남파상) 수상 

△ 80년∼현재 목원대 건축·도시공학부 교수 

△ 한국건축가협회회원, 명예이사 

△ 쓴 책:<일본을 걷는다 1·2>(97~99, 한양출판), <하늘 아래 도시, 땅 위의 
건축 1·2>(98, 가람기획), <김정동 교수의 근대건축기행>(99, 푸른역사), 
<남아 있는 역사, 사라지는 건축물>(2000, 대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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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동이 말하는 김정동 

아름다운 건축물에서 아름답게 살게되기를 

나는 매일 과거와 현재 두 시대를 사는 느낌으로 일한다. 과거 자료를 뒤지며 
오늘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일상이 바쁜 오늘날 과거지사는 그야말로 역사 
속의 일이다. 사실 우리 삶은 오늘과 내일이 더 중요할지도 모르겠다. 건축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건축은 예술과 기술의 집합체다. 그 결과물이 삶의 질을 결정하고, 사회의 
얼굴이 되기 때문이다. 다양한 디자인의 건축물은 다양한 사회를 만든다. 
건축이 공학이자 인문학이기도 한 까닭이 여기 있다. 

그럼에도 건축이 모든 사람들을 만족치 못하게 하는 원인은 공학, 인문학 
사이의 괴리에서 비롯된다. 건축에 예술성을 집어넣는 것은 전반적인 사회 
인식과 관계가 깊다. 우리는 "서양건축은 아름답다"고만 얘기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되기까지 그 사회의 공동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상류·중류·하류사회가 있었다면 건축도 그 부류에 따라 존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개화기 이래 우리에겐 그런 위계 공간이 없었다. 
식민지시대를 거치면서 모두 질곡의 사회를 살았고, 도구에 불과했던 건축가는 
우리 것을 만들 수 없었다. 우리는 근 1세기를 그렇게 지내왔다. 

땅과 건축물이 가진 자의 재산가치라는 인식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아름다운 건축물을 후손을 위해 이 땅에 남길 의무가 있다. 정치가의 쉰 
소리나 학자들의 글 줄은 종이에만 남게되지만 그것을 담아 밖에 내 놓을 수 
있는 것은 건축뿐이다. 건축사가의 길은 그 일의 접점을 찾아주는 데 있다. 나 
자신 이를 위해 건축의 역사를 챙기고, 오늘 건축의 흐름을 기록하려 하고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 아름다운 건축물 속에서 아름답게 살게 되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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