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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1년 2월 27일 화요일 오후 02시 18분 49초
제 목(Title): 윤건차/ 기억과 사회과학적 인식 


출처: 진보평론 

논문/진보평론 5호(2000년 가을호)

기억과 사회과학적 인식 

- 재일동포에게 기억이란 무엇인가 - 



윤건차(尹健次)(가나가와대학(神奈川大學) 교수)

교육학 박사. 1944년 쿄도(京都) 출생. 재일한국인 2세. 

쿄도대학 졸업, 도쿄대학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일본 근대사상사, 한국 현대사상사, 근대 한일관계사 전공.
 

 

역자: 이은숙·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연구기획실장 



최근 일본에서 '기억'이라는 것이 저널리즘이나 사회과학 등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공공의 기억'이라든가 '공통의 기억' '기억의 국민화'라는 말들이 
나오고, 또한 '기억의 전쟁' '기억의 항쟁' '기억의 내전' 같은 것이 문제가 
되며, 전쟁과 기억, 역사와 기억의 상관관계, 국민형성에서의 기억의 조작 같은 
것들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때로는 '기억의 정치학'이라든가 '기억의 
변증법' '기억의 형식' 같은 용법도 등장하고 있어,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일본에서 이 기억이라는 문제가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들어서부터이며, 특히 90년대 후반에 본격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그것은 때때로 구미에서의 기억을 둘러싼 논쟁의 진행과 때를 같이한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의 관점으로 볼 때, 일본에서의 그러한 기억의 
'유행'은, 포스트 모던이나 오리엔탈리즘, 포스트 콜로니얼 등의 담론과 
마찬가지로 역시 구미에서의 '유행'을 뒤쫓아가는 측면이 있지 않은가 한다. 
구미, 특히 독일이나 프랑스에서는 아우슈비츠 참극을 둘러싼 역사인식과 
교과서의 기술을 둘러싸고 상당히 오래전부터 논쟁이 전개되어, 기억의 문제는 
홀로코스트, 즉 대학살을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가와 같은 논쟁과 결부되면서 
다양한 형태로 논의가 이루어졌다. 그에 반해 일본에서는 1990년대 후반에 네오 
내셔널리즘의 물결이 현저해지고 역사를 이야기하는 방식, 기억의 부활이 
문제가 되게 되었다. 

일본에서 네오 내셔널리즘이 대두된 직접적인 요인은, 전 일본군 
'위안부'('정신대')를 둘러싼 사죄와 보상 문제이다. 사실 네오 내셔널리즘을 
배후에서 뒷받침하고 있는 위기감 자체, 그 심연에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냉랭한,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불안하고 불확실한 심리들이 소용돌이치고 
있다. 요컨대, 1991년 12월에 김학순(金學順) 등, 3인의 전 '위안부'였던 
한국여성들이 일본 정부에 사죄와 개인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동경지방재판소에 제기했던 것은, 그때까지 어둠 속에 매장되어 있던 기억을 
일거에 불러냈으며, 일본인의 역사인식과 기억을 둘러싼 그때까지의 패러다임을 
크게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일장기·일본국가 
기미가요(日の丸·君が代)'의 법제화로 귀결된 90년대 일본 내셔널리즘의 
저류에는 경제불황의 지속과 반미감정의 증폭 등과 같은 요인 이상으로, 
'위안부'의 고발로 대표되는 아시아의 일본비판이라는 요인이 커다란 의미를 
가졌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1990년대 후반의 네오 내셔널리즘은, 주로 일본의 언론계를 통하여 
대두되었지만, 그 중 하나는 교과서 기술(記述)의 '편향'을 문제 삼았던 소위 
'자유주의 사관(史觀)'이며, 또 하나는 사죄하는 주체로서의 '일본인'의 태도를 
문제 삼았던 가또오 노리히로 (加藤典洋)의 {패전후론(敗戰後論}({사죄와 망언 
사이에서}, 창작과비평사, 1998)'이다. 그 중 자유주의 사관은, '위안부'를 
둘러싼 교과서의 기술내용에 대한 비판과 니시오 간지(西尾幹二)의 {국민의 
역사}({國民の歷史}, 산께이신문 뉴스 서비스, 1999) 간행 등에서 보여지듯이, 
이른바 전후 반세기라는 시점에서 '위안부' 문제가 던진 충격에 대한 반발, 
대응이라는 성질을 띠고 있다. 가또오의 '패전후론'도 역시 일종의 국가주의적 
발상이며, 아시아의 전쟁희생자보다 먼저 '대동아전쟁에서 죽은 3백만의 
자국민을 우선 애도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1990년이래, 일본의 재판소에 제소된 전 '위안부'에 의한 보상청구재판은 40 몇 
건을 헤아리며, 원고도 재일조선인(재일동포)은 물론이고, 한국, 대만, 중국, 
필리핀, 네덜란드, 영국에 미치고 있다고 한다. 더욱이, 재판에서의 '위안부'의 
증언은, 일본사회에 강한 충격을 주었다. 그것은 일본이나 남북한, 아시아 
각지, 나아가서는 네덜란드 등에 산재하는, 전 '위안부'들의 당사자 자신에게 
억압받았던 과거의 회복이라는 의미를 가짐과 동시에, 일본인 자신에게도 
공백의 과거, 부정적인 기억의 중대성을 각인시키고, 기억이 단지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의 문제임을 직접적인 형태로 제시하는 것이 되었다. 
요컨대, 거기에서는 과거의 폭력 문제가 제기됨과 동시에, 그것을 방치하고 
묵인해온 현재의 폭력 문제가 생각할 수도 없는 형태로 뜻밖에 돌출되게 
되었다. 일본사회를 뒤덮은 네오 내셔널리즘의 흐름은, 그 현재의 폭력에 눈을 
감고 일본의 과거를 찬미하는 '기분좋은' 역사관에 스며들고 있는 것이다. 

기억의 문제는, 일본에서는 전쟁책임, 전후책임의 문제와 중첩되어 있다. 
그러나 원래 '기억'이라는 말 그 자체는, 전쟁과 폭력에 얽혀 있는 가해 및 
피해의 문제와 직접 관련되는 것은 아니다. 현재의 시점에서 일본 국내에서 
기억의 문제는 다양하게 논의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학문적, 특히 
철학적인 문제로서 고찰하려고 하는 작업은 그렇게 많지 않다. 

타카하시 테츠야(高橋哲哉)는 아렌트(Hannah Arent)와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헤겔, 교토(京都) 학파의 '세계사의 철학' 등을 논하고, 기억의 
철학적 비판을 시도하고 있으나 ({記憶のエチカ}, 岩波書店,1995년), 그것은 
동시에 기억에 대한 현재의 논리적, 정치적, 역사적 비판에 연결되는 지점을 
모색하는 것이다. 

이와사키 미노루(岩崎稔)도 기억에 대하여 적지않게 발언하고 있는데, 역시 
일본의 전쟁책임이나 전후책임과 관련되는 형태로 기억의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다만, 이와사키는, 기억의 문제를 더욱 원리적인 측면에서 고찰하려고도 
하고 있다. 기억은 누구에게나 있다. 기억은 당연한 것이라는 감각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누구나가 기억을 자기가 생각하고 싶은대로 처리할 수 없다. 
사람은 갑자기 생각도 하지 못한 방향에서 엄습하는 기억에 부닥치기도 한다. 
더욱이 기억은 특정한 개체 속에만 머무는 것은 아니며, 나라고 하는 개체의 
분명한 자립성이라는 감각에 기반을 두고 있는가 하면, 동시에 집단의 불확실한 
생각을 수반하는, 그래서 개인으로서의 경계가 돌파되기도 하고 침윤되기도 
하는 장면에서도 작용한다. 요컨대, 기억의 불가해성 가운데 하나는, 극히 
실존적임과 동시에, 반드시 집단적인 사건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오인, 착각, 
불안, 강박, 조작 - 기억은, 확신이나 공감의 경험이면서, 항상 이러한 
부정적인 양상으로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와사키에게서, 기억의 문제는, 뭔가 상기(想起)되어야 할 과거의 사실에 
대하여 그 진위를 둘러싼 싸움으로 축소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기에서는 
기억과 망각의 이해 틀과 배치 그 자체가 문제시되는 것이다([記憶], 
{現代思想のキ?ワ?ド}, 靑土社, 2000). 

이처럼 이와사키는 말하자면 '방법으로서의 기억'을 강조하는데, 이것은 
재일조선인의 관점에 설 때,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혹은, 재일동포의 
관점에서 볼 때 기억은 더욱 중대한 문제를 포함한 것으로서 사고되어야 하는 
것일까? 구 식민지 출신자이며, 또 그 자손인 재일동포에게, 식민지 피지배의 
문제는 잊기 어려운 과거의 기억이며, 그것은 재일동포의 세대교체나 개인의 
주관적 생각과는 무관한 역사적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재일동포는 일본의 
조선식민지 지배에 기인하는 남북분단을 지금도 겪고 있고, 또한 과거의 명확한 
청산을 거부한 그대로의 일본의 차별사회에서 살고 있음으로써 현재도 역시 
'식민지적 상황' 속에 놓여 있는 실체적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원래 재일동포는 전후 일본사회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민족적' '국민적'인 
차이를 '이유'로, 다양한 형태로 불이익을 받고, 차별과 멸시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 점에 대하여 여기에서 자세히 논할 필요는 없고, 오히려 지금은, 
일본에서 기억의 문제가 부상한 큰 요인인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전혀 미해결 
상태에 있는 점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 재일동포 전체로 보면, 그 수나 양적인 
관점으로는 '위안부' 문제가 작은 일이지만, 질적으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일본의 국가나 군대에 의하여 조선 여성의 성이 유린된 것은 
전쟁범죄의 상징이기도 하며, 피해자는 물론이고, '민족' 전체의 입장에서 
보아도 참기 어려운 것이다. 

'위안부'에 의한 고발은, 제2차대전 이후 봉인되어온 기억이 가까스로 
되살아나서 그 이전의 일본과 동아시아 역사에는 없었던 전혀 새로운 사태의 
출현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그것에 대하여 조선침략의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 정부는,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기금(국민기금)'이라는 민간 
주체의 '보상금' 지급사업을 고안해 내 분명한 형태의 사죄와 보상을 거부하고 
국가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상태이다. 이러한 가운데 일부 일본인은 아시아의 
전쟁피해자에게 진솔한 태도로 임하려고 하였지만, 일본사회의 적지 않은 
부분은, 자유주의 사관의 일정정도의 만연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오히려 
침묵 내지는 부정, 거부 같이 자기책임을 부인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혹은 
나아가 국익중심의 피해자 의식으로조차 나아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재일동포 작가인 서경식(徐京植)의 표현을 빌자면, 이 일본에서는 전쟁 기억은 
곧바로 '은폐, 부인, 왜곡, 말소, 횡령 같은 폭력으로까지 되고 있다'고 하는 
사태이다(徐京植·高橋哲哉, {斷絶の世紀 證言時代―戰爭の記憶をめぐる對話}, 
岩波書店, 2000). 

당사자의 증언이나 역사학의 실증적 연구 등으로 보면, 조선 여성 등이 과거 
일본군 '위안부'로서 말로는 다할 수 없는 치욕을 당하였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것은 명백하게 민족적인 굴욕이기도 하다. 다만, 페미니즘이나 젠더, 
내셔널리즘에 관심을 갖는 우에노 치즈코(上野千鶴子)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일본과 한국(조선, 아시아)의 양자대립적 문제 혹은 
내셔널리즘(민족주의)의 문제로 파악하는 것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다. 그녀의 
{내셔널리즘과 젠다}({ナショナリズムとジェンダ?}, 靑土社, 1998: 
{내셔널리즘과 젠더}, 박종철출판사, 1999년)는, '위안부' 문제를 페미니즘 
관점에서 분석한 책이다. 거기에 따르면, 무엇이 '위안부'를 피해자로 
만들었는가 하고 그 원인을 묻는 것이 아니라 그녀들을 50년이 지나도록 
침묵하게 만든 억압의 구조를 문제시하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일이라는 것이다. 
거기에는 물론, 한국에서 말하자면, 세계의 냉전구조의 고착화와 관련된 
군사독재 정권의 지속이라는 정치적 요인이 있었던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우에노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위안부'에게 침묵을 강요한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서, 내셔널리즘에 스며 있는 반페미니즘적 요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거기에서 가장 문제되는 것은 '위안부'의 경험을 '민족의 
치욕'이라고 하는 발상이다. 같은 민족의 여성이 일본의 남성에게 유린되었다고 
하는 '사실'은, 한국의 남성에게는 참기 어려운 치욕이며, 그 때문에 그녀들은 
침묵을 어쩔 수 없이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거기에 있는 것은 여성차별을 
당연시하는 가부장제의 논리이며, 그것이 여성의 주체성을 부정하고, 
'위안부'에게 스스로의 체험을 수치스럽게 생각하게 하며, 반세기가 넘도록 
침묵을 강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우에노의 이해 방식은, '위안부' 문제를 단순히 민족간의 가해/피해 
문제 혹은 전쟁책임·전후책임, 나아가서는 기억의 문제로서만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페미니즘이나 젠더, 그리고 가부장제와 같은 보다 깊은 관점에서, 어떤 
의미에서는 사회과학의 보다 근본적인 입장에서 파악하려 하는 것이다. 
재일동포 남성들도 귀담아 들어야 할 이야기지만, 이점은 '위안부'를 둘러싼 
논쟁이 자칫하면 저널리스틱한 방향으로 흐르거나 또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것과 관련되는 역사인식의 문제로 대체되거나 혹은 책임의 소재라는 
윤리적·정치적인 문제로 회귀될 우려가 있는 가운데 사회과학이 짊어져야 할 
책임과 과제를 구체적으로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하나의 중요한 시사점이 된다. 

이런 점을 생각할 때, '위안부' 문제의 경우도 그러하지만, 현재 일본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재일동포를 둘러싼 여러가지 논의, 예를 들면 전후보상이나 
참정권, 법적 자격 등과 관련되는 각종의 논의가 과연 사회과학적인 인식을 
포함하여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지, 요컨대 사회과학적인 검증에 충분히 견딜 수 
있는 것인지 하는 점에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사회과학적으로라는 
것이 애매하다면, 혹은 과도한 것이라면, 실증가능한 역사적 사실에 정확히 
근거하고, 또 과거 및 현재의 제도나 법 체계에 근거하여 논의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기억의 문제에 대해 말한다면, 하나의 기억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과연 그것은 단순한 생각의 편린들이나 심정의 토로 혹은 마음의 흐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사회과학적인 인식을 근거로 한 것 바꾸어 
말하면 계급이나 민족, 국가, 국민 같은 '거대 담론'의 개념에도 충분히 연관될 
수 있는 것으로서 파악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보자. '위안부' 문제를 논하는 것은 중요하다. '위안부'가 
요구하고 있는 것은 일본정부의 국가로서의 사죄와 보상이다. 이것은 매우 
정당한 요구이다. 따라서 일본에서 최근 '위안부' 문제가 기억의 문제와 
관련하여 논의되는 것은 결코 나쁜 일은 아니다. 오히려 일본인이나 재일동포, 
그 밖의 사람들의 역사인식을 바로잡는 의미에서는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위안부'가 요구하는 최종목표는 어디까지나 사죄와 보상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일본정부는 사죄와 보상을 거부하고 있으며, 그 중요한 논거는, 
일본은 과거 조선을 식민지 지배했지만, 그것은 '침략'이 아니었다는 주장이다. 
1965년에 체결된 일한기본조약 때도, 또한 현재 계속되고 있는 일조국교체결 
교섭에서도, 일본정부가 일관하여 주장해온 것은 조선지배의 '합법론'이다. 
당시의 대한제국'정부'와 협의하여, 일본은 합법적으로 '조약'을 체결해서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군사적 지배를 부정하는 
것이며, 당연히 일본과 조선은 한번도 교전상태였던 적이 없다는 것이 된다. 
식민지 지배는 했지만 침략은 하지 않았다, 이것이 일본정부의 '한국병합'에 
대한 공식적 견해이다. 더욱이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는 입증불충분하다는 
것이다. 

오늘날 논란이 되고 있는 '위안부' 문제는 적지 않은 기억의 문제로서 논의되고 
있으나, 거기에는 지금 여기에서 말한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성찰이 더욱 
필요한 것으로 생각된다. '위안부' 문제가 아무리 기억의 문제로서 
다루어진다고 해도, 과연 그것이 일본 국가의 사죄와 보상으로 연결되는 
에너지의 획득에 유익한 것인가 아닌가 하는 의문과 연결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점은, 물론, '위안부' 문제가 기억의 문제와 관련하여 논의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고, 거기에서의 논의 방식이 문제 해결에 연결될 
수 있는가 아니면 적어도 문제 해결에 연결되는 인식의 향상에 유익한가 어떤가 
다시 한번 음미해 볼 필요가 있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위안부'를 둘러싼 논쟁은 일견 치열하다. 자유주의 사관의 이데올로그들은 
우선 '위안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 또한 그러한 존재가 사실이라고 해도 
그것은 자유의지에 따른 '매춘행위'라고 한다. 혹은 그러한 '노무'는 전시 
'일본국민'이라면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부하되어 있었던 것이고, 그것은 
전시체제의 어쩔 수 없는,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는 
것이다. 반면, '위안부'에 대한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는 논자들은, 그것은 
전쟁범죄이며, 당시 동일한 '일본국민'이었던 그녀들에게는 내외인 평등의 
원칙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강하게 반발한다.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논쟁은 복잡다기하여 그 내용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키면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서 말한 것은 단순화되기는 
했지만 결코 요점을 벗어나지는 않으며, 오해되고 있다고도 생각되지 않는다. 
그점을 전제로 하고 말한다면, 현실의 '위안부' 논의에서 결여되어 있거나 혹은 
착각되거나 또 때로는 고의로 생략되고 있는 것은 일본의 조선지배에 대한 
전체적 틀거리에 대한 인식이며, 이것이 논의에서 제외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에서 권력을 장악한 일본이 가장 힘을 쏟은 것은 조선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는 것이었다. 요컨대 조선인은, 일본의 천황을 매개로 하여 일본인과 
'동포'가 되며, 훌륭한 '황국신민'이 되도록 강요되었다. 그렇지만, 식민지 
치하의 조선에서 일본인과 조선인이 평등하였다는 것은 완전히 거짓말이다. 
법제도 상으로 조선인은 일본의 패전에 이르기까지 '황국신민'이기는 했어도 
'일본 국민'은 아니었다. '황국신민'이라는 것은 이데올로기적 담론이고, 그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반드시 정해져 있지는 않았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식민지 조선에서는 대일본제국 헌법이 시행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일본의 
국적법도 적용되지 않았다. 당연히 조선인이 '일본국민'이었던 것은 아니며, 
법, 제도 상으로는 한 조선인은 일본의 '호적(내지호적)'과 구별되는 
'조선호적(외지호적)'에 편제되었을 뿐이고, 일본국적을 소지한 적은 한번도 
없다. 

일본은 전전에 조선인에게 철저히 '황국신민'임을 강요하고, 소돼지 같이 
부려먹었을 뿐만 아니라, 병사나 군속, 일본군 '위안부' 등으로서 그 인생을 
뒤집어놓았다. 더욱이, 1945년 8월의 패전 후에 일본정부는 태도를 백팔십도 
바꾸어 조선인 배제·차별 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무조건항복·식민지상실이라는 사태 속에서, 일본정부가 지상최대 과제로 삼은 
것은 '국체(천황제) 수호'이며, 그 일환으로서 조선·조선인 버리기를 감행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전 직후 히가시쿠니 나루히코(東久邇稔彦) 수상이 
말했던 저 유명한 '1억 총참회'론에는, '1억'이라는 수자로 보는 한 식민지 
민중이었던 2천수백만명의 조선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1억총참회론'은 
정치가건, 군이건, 관이건, 민이건, 패전한 사실을 조용히 반성하려 한다는 
것으로, 실질적으로는 천황과 국민을 동시에 면책하는 논리였다. 그러나 왜 
조선인이 일본의 패전을 반성하지 않으면 안되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으며, 
기억의 문제와 관련해서 말한다면, 그 '1억'이라는 숫자에 조선인이 포함되어 
있었던 '사실'을 현재의 일본인이 과연 알고 있는 것인가 의혹도 떠오른다. 

어쨌거나 일본정부의 재일조선인 버리기 정책은 1947년 5월2일, 요컨대 신헌법 
시행 전날, 최후의 칙령인 '외국인 등록령'을 공포·시행함으로써 
노골화되었다. 구식민지 출신자인 재일동포를 '외국인'으로서 취급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외국인등록령은, 구식민지출신자 추방과 식민지 지배의 책임회피를 
본질로 하는 것으로, 그 자체가 다음날인 5월3일 시행된 일본국 헌법에 의한 
전후체제=상징천황제의 출발과 한묶음이었다. 

이렇게 볼 때, 조선인 등 구식민지 민중을 지배하고, 버리고, 게다가 패전후 그 
책임을 회피하는 과정의 중심에는, 항상 천황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일본정부가 '위안부' 등에 대한 사죄와 보상을 거부해온 
것은 그 연장선상에서 인데, 그 참된 정치적 의도가 천황의 침략책임, 
전쟁책임, 전후책임 회피에 있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는 
재일동포가 문제제기해야 할 것이 바로 상징천황제 그 자체가 된다. 

근대 일본에서 천황은 일본인의 심성에 깊숙이 각인되어 왔다. 따라서 기억의 
문제가 과거와 현재의 진실에 관련되어 역사적 사실의 은폐, 부인, 조작, 왜곡, 
망각을 고발하고, 그것을 되살려내고, 부활을 추구하는 것과 관련된 것이라고 
한다면, 일본에서 기억의 문제는 천황이나 천황제와 관련되는 역사적 사실과 
법제도가 문제되어야만 진정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요컨대, 재일동포와 
마찬가지로 혹은 그 이상으로, 일본인이 물어야 할 것은 상징천황제 문제이다. 
실제로 일본의 전후사에서의 최대 오점은 천황·천황제의 책임을 포함하여 
전쟁책임의 총괄을 1억 총참회로 완전히 유야무야해온 점이다. 더구나 
현실에서, 자유주의 사관을 가진 네오 내셔널리스트가 가장 옹호하고 
은폐하려고 하는 것이 이 천황·천황제에 관한 문제이며, 또한 전후 민주주의 
및 그 계보를 따르는 진보적 지식인들이 굳이 입에 담으려고 하지 않는 것도 
역시 이 천황·천황제 문제이다. 실제, 전후 민주주의가 일종의 '원칙'이었던 
것은, 이 상징천황제가 내포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방치해왔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현재 일본인의 의식수준, 멘탈리티로 볼 때, 이 천황·천황제, 혹은 
그것에 관한 '민족'의 문제나 재일동포에게 연관 깊은 '국적' 문제는 가장 보기 
힘든 것 중 하나가 돼 있다. 현대 일본의 '최신' 학문적 조류라고 할 수 있는 
문화연구(cultural studies)나 포스트모던한 문화론 등도, 천황·천황제에 관한 
문제는 교묘하게 피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말하자면 그 문제들은 일본인 
전체에게는 망각의 저편으로 던져져, 기억해야 할 사항으로서 중시되지 않게 
되어 있는 것 같다. 게다가 정치의 세계에서는, 우익화 흐름 속에서 
천황·천황제 찬미의 소리가 음으로 양으로 높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모리 
요시로(森喜朗) 수상이 취임하자마자 
신도정치연맹국회위원간담회(神道政治連盟國會議員懇談會) 결성 30주년 
기념축하회에서 '일본의 나라는 천황 중심의 신의 나라라는 점을 국민에게 
알리도록 하자'(2000년 5월16일)고 발언한 것은 그 단적인 예이다. 

이렇게 말하면, 아니다, 일본인들도 '일장기·기미가요' 법제화 문제에서도 볼 
수 있듯이 과거의 아시아 침략과 관련하여 천황이나 천황제 문제를 충분히 
논의해왔으며 지금도 논의하고 있다고 하는 반발이 나올 법하다. 물론 그것은 
그러하며, 필자도 부정할 생각은 없고, 이 일본에서 많은 눈에 띄는 발언이나 
운동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인식의 방식이 
재일동포나 남북한 문제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느냐 하면 그 답은 
역시 수상쩍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앞에서 인용한 우에노 치즈코는, 국민이라는 집단적 아이덴티티의 배타성을 
뛰어넘을 필요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반대로 '세계시민'이나 '개인' 혹은 
'인간'이라는 상징적·보편적인 원리에도 경계해야 한다고 논하고, 스스로의 
아이덴티티의 상태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즉 '나'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젠더나 국적, 직업, 지위, 인종, 문화, 윤리 등 다양한 관계성의 집합이다. 
'나'는 그 누구로부터도 도망칠 수 없지만, 그 누군가가 하나로 환원되는 것도 
아니다. '나'가 거절하는 것은 단일한 카테고리의 특권화 혹은 본질화라고 
말한다. 당연히 여기에서는 스스로가 '일본인' 내지는 '일본국민'이라고 
규정받고, 일본인으로서, 일본국민으로서 타자에 대하여 응답을 요구하는 데에 
이의를 표한다고 하는 뉘앙스가 있다. 

이러한 우에노의 담론은 학문적으로는 그 자체로 보아 거기에 굳이 이견을 말할 
이유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우에노의 주장은 페미니즘이 내셔널리즘을 
넘을 수 있는가를 중심 주제로 한 앞의 {내셔널리즘과 젠더}에 수록되어 있는 
것이며, 거기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도 중요한 테마이다. 우에노에게서 
본다면, 내셔널리즘은 페미니즘과 화해할 수 없는 것이며, 피억압민족의 
내셔널리즘은 긍정되고, 제국주의자의 그것은 부정되어야 한다는 이분법은 그 
자체가 잘못된 인식이라고 한다. 피억압민족의 내셔널리즘에도 부정되어야 할 
요소가 당연히 있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분명히 그렇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우에노는 상징천황제하의 전후세대이고, 그녀가 일본인이며, 
일본국민임에는 추호의 변함도 없다. 따라서 '나'를 만들어내는 것은 다양한 
관계성이라고 해도, 아시아인의 눈으로 볼 때 역시 우에노는 일본인으로서, 
일본국민으로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책임에 대하여 어떻게 태도를 취할 
것인지를 정면으로 분명하게 언표하지 않으면 안되는 입장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는, 우에노가 말하는 틀에는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고 혹은 빗나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여기에서 오해를 무릅쓰고 감히 말하자면, 내셔널리즘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현실에 거의 없다. 과거 제국주의 편에 섰던 나라의 사람이건 식민지 역사를 
겪은 나라의 사람이건, 나아가서는 아직도 국가를 갖지 못한 팔레스타인 등도, 
각각 다양한 형태로 나름대로의 내셔널리즘을 가지고 있다. 자기는 
'세계시민'이나 '개인'이라고 하는 사람조차도 결코 내셔널리즘으로부터 
자유롭지는 않다. 따라서 일본인으로서, 일본국민으로서 전쟁책임이나 
전후책임을 망각하고 소홀히 하는 것이 내셔널리즘이며, 내셔널리스트라고 
하면, 일본인으로서, 일본국민으로서 정면으로 전쟁책임을 추궁하고 전후책임을 
완수하려 하는 것도 또한 다른 의미에서의 내셔널리즘이며 내셔널리스트이다. 

그점은 차치하고, '나'를 만들어내는 것이 다양한 요소의 관계성이라고 해도, 
일본인의 아이덴티티와 기억은 현실에서는 매스미디어에 의하여 적쟎이 
재생산되고 있다. 신문에는 거의 매일같이 주간지 광고가 게재되고 있는데, 그 
중심은 여성의 누드와 타인의 스캔들, 그리고 북한에 대한 중상(中傷)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기에서는 남북분단의 주된 원인, 나아가서는 한국전쟁이라는 
비극의 원인이 일본의 조선식민지 지배에 있었다는 사실은 전혀 망각의 저편에 
쫓아낸 채, 북한은 군사독재 국가이며, 일본의 안전을 위협하는 흉악한 테러 
국가라고 일방적으로 씌여 있다. 정말로, 현대 일본의 내셔널리즘의 초점은 
북한 적대시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여기에서 특별히 북한의 
국가체제나 사회 상태를 옹호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북한이 많은 문제를 
가진 나라임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조선·조선인을 일관되게 부정적 타자로서 위치지워온 일본인의 아이덴티티의 
상태를 옹호할 마음은 없다. 

일본의 신문을 보면, '위안부'나 구 일본군인·군속 혹은 강제연행 등에 관련한 
기사에서 애매하고 조악한 것이 눈에 띈다. 재일동포의 역사와 현 상황에 관한 
보도에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과거의 아시아 침략과 관련하여, 천황·천황제의 
책임을 언급하지 않는 것은 매스컴 공통의 암묵적 양해사항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지금 구체적으로 '영주 외국인 [지방참정권]은 헌법위반이다!'라고 제목을 단 
주간지 기사를 예로 들어 말하면, 이것은 일본국 헌법 자체가 '일본신민'이었던 
구 식민지 출신자를 헌법의 틀 바깥으로 방출한 배외적이고 반인도적인 것임을 
잊어버린 글쓰기이다. 신문에서는 빈번히 '과거 일본국민이었던 
재일한국·조선인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일본국적을 상실했다'는 등 
아무렇지도 않게 쓰고 있지만, 이것도 잘못된 기술이다. 

전전의 조선인은 법적으로 일본국민이 아니었으며, 그때 한국·조선이라는 것이 
존재했던 것도 아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일본국적을 상실했다는 것도 
조약에 재일조선인의 법적 지위에 대하여 뭔가 언급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강화조약에는 일본의 주권회복이나 영토의 확정 등이 명기되었지만, 구 식민지 
출신자에 대한 대우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기술도 없다. 진실은, 언제 저와 
같은 형태로 재일조선인을 '법적'으로 방출하는가를 재고 있던 일본정부가 
조약의 체결·발효를 계기로 재일조선인을 '외국인'이라고 해서 버리고, 
일방적으로 '조선'이라는 국적표기(기호)를 부여함과 동시에, '범죄자' 같은 
지문날인을 강제했던 것이다. 덧붙이자면, '한국' 국적이라는 것은 법적으로는 
1965년의 한일기본조약 체결후에 비로소 등장한 것이다. 

일본의 전후보상정책이 국적조항을 축으로 재일동포나 남북한 사람들을 
배제해온 것은 명백하다. 더구나 일본의 '우익'적 인사들이 가지고 있는 
특징은, 재일동포의 '한국' 국적과 '조선' 국적의 구별을 두지 않는 점이다. 
혹은 굳이 그것을 무시하려는 태도를 취한다. 재일동포가 사죄나 보상을 
요구하면 한일기본조약 체결시에 이미 해결되었다는 등 스스로의 무지를 
아무렇지도 않게 드러낸다. 또한 정권여당 국회의원들은, '일한신시대'를 
구가하는 문구로, 반대로 '한국' 국적과 '조선' 국적 사이에 노골적인 차별을 
의도하기도 한다. 여당 국회의원을 중심으로 국회에 제출된 외국인 참정권 
법안은, 그 자체가 선거권만 인정하고 피선거권을 부인하는 표만을 목표로 하는 
것이며, 그렇기에 '조선' 국적을 배제한 차별적인 것이다. 정권여당 내부에서 
재일동포 구 군인·군속에 대한 전후보상이 일시금 지급과 같은 형태로 겨우 
구체화된다고도 하지만, 거기에서도 국적이나 영주권의 유무, 거주지 등에 의한 
차별을 의도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 대하여 일본의 신문은 정확한 정보를 
독자에게 전하지 못할 뿐 아니라, 특히 외국인인 재일동포를 왜 '특별우대'하는 
것인지와 같은 류의 기사를 게재하는 경우조차 있다. 

이렇게 볼 때, 잘못된 신문보도로 만들어지는 일본인의 아이덴티티라는 것은 
대체 어떤 것이냐가 문제된다. 기억의 문제와 관련하여 말하면, 이러한 
신문기사가 일본의 과거의 아시아 침략이나 조선지배의 기억을 불러내어, 
전후책임의 자각이나 전후보상의 실현을 가능하게 하는 데 뭔가 유익한 길을 
조성하고, 아시아 사람들의 새로운 공존을 이루어낼 수 있게 하는 것인가 
묻는다면 그 답은 아니라고 할 수밖에 없다. 

당초 기억은, 역사의 문제와 크게 관련되어 있다. 실제로 기억과 역사는 어떻게 
다르고 어떻게 중첩되어 있는가, 사회과학의 문제로서도 지극히 중요하다. 

'기억' 제작자인 프랑스의 역사학자 삐에르 노라(Pierre Nora)는, 기억은 
무엇보다도 생명이며, 살아 있는 집단에 의하여 담보되는 것이라고 하고, 
감정적·마술적인 성격을 보이는 것이라고 한다. 그에 대해, 역사는 지적 
작업이며, 분석과 비판적 언설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고 한다. 기억은 사고를 
성스러운 것 속에 머물게 하는 것임에 비해, 역사는 사고를 거기로부터 끄집어 
내어 항상 속화(俗化)한다고 한다. 더욱이 과거에는 역사서술은 기억에 
달라붙어, 역사와 기억의 일치가 자명했지만, 기억의 힘이 점차로 쇠약해짐에 
따라 역사와 기억간에 거리가 생기고, 이제 역사는 기억을 쫓아내서 
상대화시키고, 분석의 대상으로 삼기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기억과 역사의 
틈에서]([記憶と歷史のはざまに]), {思想} 2000년 5월호). 

그리고 코세키 타카시(小關隆)는 {기억의 형태}({記憶のかたち}, 柏書房, 
1999)라는 편저에서 기억이나 역사 같은 개념에 관하여 논자들간에 분명한 
합의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도, 기억은 과거를 인식하려고 하는 모든 
작업, 그리고 이 작업의 결과 얻어진 과거의 인식의 상태라고 정의하고 있다. 
요컨대 기억 작업은 어느 것이나 표상행위여서 셀 수 없는 과거의 사건 속에서 
현재의 상상력에 기초하여 특정한 사건을 선택하여 불러내는 행위, 표상을 
매개로 한 재구성 행위라고 한다. 바꾸어 말하면, 기억이란 과거 사건의 단순한 
저장으로서가 아니라 현재의 상황에 맞추어 특정한 사건을 상기하여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로서 이해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더욱이 가족이나 
지역사회, 국민국가 등의 공동체의 기억은, 그 공동성을 유효하게 보증하는 
과거의 인식으로서 널리 인지되는 '공공의 기억'이라고 한다. 당연히 역사와는 
성격이 다른데, 다카시에 따르면, 역사란 '학술적'이라고 불리는 그런 방법으로 
표현된 기억이며, 그것은 기본적으로는 문자 텍스트에 구체화될 뿐만 아니라 
문자텍스트가 압도적으로 특권화된 작업이며, 제도이다 라고 한다. 

기억이라는 관점으로 생각할 때, 식민지하의 조선인은 스스로가 '일본국민'이 
아님을 온몸으로 알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에 일본의 헌법이 조선에 
시행되고 있지 않았다거나 일본의 국적법이 조선인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고 
하는 법제도상의 것은 전혀 몰라도 일본·일본인에 의한 일상적인 
차별·억압·멸시에 의하여 일상적으로 '조선인'임을 알게 되고 속마음 깊은 
곳에 일본·일본인에 대한 반발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일부에서 스스로 
'일본인'이 되는 길을 선택하고 '친일파'로의 길을 걸은 사람도 있었지만, 
그것은 결코 다수가 아니며 또한 현실의 일본·일본인이 허용하지 않았다. 
조선인은 어디까지나 '조선인'이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마침내 '해방' 후, 일본에 남은 조선인은 국적 문제에서 인생의 모든 것이 
좌우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일본정부가 자의적으로 
'일본국적'을 박탈했을 뿐만 아니라 1965년의 한일기본조약 체결후에는 '조선' 
국적으로부터 '한국' 국적으로의 교체를 둘러싸고 재일동포 사회 속에서 격렬한 
갈등이 일어났다. 재일동포에게 국가나 국민, 국적은 가장 중요한 요소이며, 
'나'는 좋건 싫건, 민족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국가, 국적에 의하여 크게 
규정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더구나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재일동포의 젊은 
세대로부터 점차로 '민족'이라는 의식조차도 뿌리째 뽑혀나가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의 연장선상에서, '위안부'의 증언이 기억의 문제로서 커다란 
의미를 갖는 것은, 그것이 은폐되어 있던 과거의 사실을 불러냈을 뿐만 아니라 
증언자의 자연적 생명으로 보아 남겨진 시간이 너무나 적은 것에 대한 공통의 
자각이었다고 생각된다. 여기에서 '공통의'라는 것은, 한편으로는 '위안부'이며 
또 한편으로는 '위안부'의 문제를 스스로의 문제로 받아들인 일본인이며, 
조선인이며, 그밖의 다른 사람들이다. 이 경우, '위안부'와 함께 문제를 
고발하고, 일본정부에게 사죄와 보상을 요구한 사람들은, 증언을 듣고 또한 
역사연구의 성과를 배움으로써, 스스로의 인식을 명확하게 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 경우, '위안부'라는 과거의 사실에 대한 기억은, 그 성질상 엷어져 
갈 뿐인 것이다. 기억은 어디까지나 살아 있는 개인이나 집단에 의하여 
담보되는 것이며, 또한 감정적인 것이다. 당연히 그것을 보충하는 것은 
역사지만, 그러나 그 역사는 어디까지나 지적 작업이며, 사실의 파악·분석과 
비판적 고찰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게다가 기억이 엷어져 역사와 기억 사이에 
거리가 생기면 생길수록 역사인식의 내용도 애매해지며, 동요하지 않을 수 
없다. 

재일동포 젊은 세대에 대해 말하면, 재일동포는 나이든 사람들로부터 증언을 
듣고 모르고 있던 과거를 배우고 과거의 사건 속에서 '위안부' 문제가 가진 
비참함과 중요성을 자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증언의 유한성, 
기억의 유한성이 절박한 문제가 되고 더욱이 일본의 학교교육이나 매스미디어를 
통하여 진실한 역사에 접하기 어렵게 되어갈 때, 과연 재일동포에게 '위안부' 
문제가 집단적인 기억으로서 남을 수 있을 것인지는 의문이다. '위안부' 
문제뿐만 아니라 일본의 식민지 지배의 실상이나 조선인에 대한 천황·천황제의 
의미, 그리고 재일동포의 시민적 권리나 전후보상에서의 국적(조항)의 계략에 
대한 이해 같은 것도 곤란하게 되지 않을 수 없다. 당연히 은폐된 과거를 
고발하는 힘을 갖지 못하게 되며, 결국은 잘못된 역사인식을 갖게 됨으로써 
'고발자'로서의 정당성조차 가질 수 없게 될 우려가 있다. 

재일동포� 그 역사적 위치로 보아 일본국가나 일본인에 의한 가해자로서의 
기억을 은폐하고 왜곡하고 망각하는 것을 고발하는 정당성을 가지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재일동포의 고발이 항상 옳은 
것임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재일동포의 고발이 잘못된 기억이나 정보에 
기초한 것이라고 하면, 도리어 고발의 정당성을 훼손당하게 된다. 무엇보다 
재일동포의 고발이라 해도 재일동포의 사상적·이데올로기적 입장은 다양하며, 
이미 재일동포 총체로서의 정돈된 입장이나 의지를 갖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전후보상이나 참정권을 요구하는 운동은 하나의 구체적 과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개별의 운동이다. 게다가 그러한 운동의 추진은 정열만으로는 
불충분하며, 거기에는 역사적 사실 파악뿐만 아니라 호적이나 국적, 그리고 
일본의 법체계 전반에 대한 일정한 인식이 필요하고, 또한 요구실현의 장애로서 
작용하고 있는 일본과 아시아의 국제관계나 일본의 정치 및 관료제 등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다. 만일 일본정부의 사죄거부·보상거부가 어디까지나 '국적' 
기준이라고 하면, 제1차대전 후에 전쟁범죄의 처벌에 도입되기 시작했던 
'인도를 저버린 죄악'이라는 식의 개념과 그 유효성을 논리적으로 추궁하여 
가는 것도 필요하다. 당연히 이러한 고찰은 천황제나 남북분단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하며, 보다 크게는 민족이나 계급, 국가, 나아가서는 자본주의 성립 
같은 '거대 담론'을 시야에 넣는 것으로 연결된다. 실제로도 스스로의 위치를 
올바르게 파악하고 사회의 변혁을 추진하려 한다면 역사인식을 그 나름대로 
확보하는 것이 불가결하며, 그 역사인식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폭넓은 
사회과학적 인식이 필요하다. 

'거대담론'이라고 하면 일본에서는 1980년대 이래 그 '소실(消失)'이 활발히 
논의되었고 실제로도 지식인들의 논의 역시 프랑스 포스트 구조주의나 그 후의 
문화연구 등의 '유행'에 편승하여 문화론이나 개별적인 문제에 집중되어 
있었다. 운동론과 관련해서도 70년대 이래 특히 80년대 이래에는 일부 운동을 
제외하고는 시민사회, 생활세계, 공동체, 주체, 개인 같은 비계급적 내지는 
중산계급적인 차원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며, 현실에 대한 비판 방식 그 
자체가 래디컬리즘이나 정치적 감각을 결여하게 되었다. 그것은 말하자면 
'전체성'이나 '당파성' 같은 것에 대한 거부반응이기도 하지만, 그 결과 
현실변혁을 위한 방법론은 찾아보기 어려워지며, 필연적으로 변혁의 주체도 
희미해지고 애매해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생각에 따라서는 80년대 이래 
회자되기 시작한 기억의 문제는, 이러한 시간적·정치적인 공백을 메꾸어주는 
보조물로서 고안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전쟁책임이나 전후책임, 특히는 일본군 '위안부'나 재일동포 문제와 관련하여 
기억의 문제에 대해 고찰해왔는데, 재일동포에게 기억의 문제는 확실히 
중요하다. 그러나 동시에, 지금까지 말해왔듯이 기억만으로는 불충분한 점도 
어느 정도 이해된다. '위안부' 문제를 생각해 보아도 시간의 경과라는 점에서만 
봐도 증언의 유한성, 기억의 유한성은 명백하며, 그 부족함을 채우는 것은 
역사인식이다. 요컨대 문제의 분석이나 비판적 언설을 수반하지 않는 지적 
작업으로서의 역사인식이 결여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더욱이 그 역사인식의 
내실을 보다 심화시키려면, 거기에서는 역시 민족이나 계급, 국가, 그리고 
천황제나 남북분단의 극복 같은 '거대담론'에 대한 사회과학적 인식이 
불가결하다고 생각한다. 바꾸어 말하면, 기억의 투쟁은 망각과의 투쟁이며, 
그것은 망각의 '묘약'이라고나 할 만한 일상성에의 매몰과의 투쟁이기도 하다. 
당연히 망각을 피할 길은 역사에 대한 성찰인데, 그것은 사회과학적 인식을 
심화시킴으로써 보다 확실한 것이 된다. 

실제, 1970년대 혹은 80년대 이래의 일본이나 한국의 동시대사를 볼 때, 
사회과학적인 표현을 하자면, 거기에서는 국민국가에 대체되는 새로운 시스템이 
예견될 수 없는 조건하에서, 어디까지나 국민국가를 절대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권력관계의 민주화에 노력하면서, 공정한 사회분배의 실현, 다양한 
소수자·주변자와의 공존 등을 구체화할 수 있는,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것이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럴 경우, 현실의 움직임을 보면, 
환경·여성·인권·복지·소수자와 같은 탈근대적 요소를 띤 개별적인 운동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그러한 개별적인 문제에 대한 래디칼한 
열중이 반드시 민족이나 계급, 국가, 천황제, 남북분단 등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으로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자명하지 않은가 생각한다.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세대간, 양성(兩性)간, 그리고 빈부나 약자 문제 등, 
최근의 시민운동이나 급진적인 민주주의가 제기하는 문제를 넓은 시야에서 
파악하고, 그것들을 민족이나 계급, 국가, 천황제, 남북분단의 극복과 같은 
커다란 문제와 상호 접합시켜서 생각하는 '전체'에 대한 시선이 불가결하지 
않은가 하는 점이다. 요컨대, 그것은 보다 폭넓게, 근본적인 차원에서 모든 
것을 고찰하는 사회과학적 인식이 중요하다는 것이며, 그것을 기억의 확보, 
부활의 문제와 관련지워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사회과학적 인식은 어떻게 확보될 수 있는가의 문제가 또한 
생기는데, 그것은 반대로 기억의 확보, 부활, 혹은 기억의 애매성에 대한 
추궁에서부터 출발할 수 있다. 재일동포에 대해 말한다면, 재일동포의 출발점은 
어디까지나 스스로의 노력, 요컨대 구 식민지 출신자로서의 내력을 분명히 하는 
데 있다. 자신이 존립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또한 어떤 미래를 모색하는 것이 
좋을 것인가 하는 나날의 물음, 혹은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일상적인 노력 내지 
투쟁은 모두 역사에서의 자신의 위치지움을 확인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역사인식을 묻는 것이지만, 그 
역사인식을 보다 확실한 것, 보다 풍부한 것으로 만들어나가기 위해서는 
사회과학적 인식이 또한 빠져서는 불가능하다. 민족이나 계급, 국가, 천황제, 
남북분단, 국적, 참정권, 기타 다양한 사항에 대한 사회과학적 인식에 
뒷받침해서야말로 재일동포는 자신들의 미래를 주체적으로 열어나갈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와 같이 이해되어야만 기억의 문제가 역사인식과 연결되고 
나아가서 사회과학적 인식과 중요한 관계를 명백하게 지니게 된다. 

이와 같이 생각할 때, 그러한 사회과학적 인식은 어떻게 하면 확보될 수 
있는가, 그것은 지식인의 역할인가 혹은 대중화 시대에서 모든 사람들의 
과제인가, 만일 그렇다면 지식인과 대중(민중)의 관계는 무엇인가와 같은 
오래되고도 새로운, 어떤 의미에서 방치해온 문제가 또한 검토 과제가 되는데, 
그것 역시 다시 고찰해야 할 문제일 것이다. 

{가나카와대학평론(神奈川大學評論)} 제36호 2000년 7월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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